그가 오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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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눅 4:14-22
제목 : 그가 오신 이유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 시대를 어떤 시대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박식하신 우리 성도님들 중에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또는 3차 산업혁명 시대, 이런 식으로 대답하실 수 있습니다. 또 스포츠를 좋아하시는 분들의 경우에는 손흥민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자유롭게 정의 내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 뭔지, 3차 산업혁명이 뭔지, 제4차 산업혁명 시대가 뭔지, 손흥민은 또 누군지, 뭐 아무것도 몰라도 사는 데에는 크게 불편함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적인 관점에서 우리가 어떤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 의무적으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무엇을 위해 오셨는지, 오셔서 우리를 위해, 또 나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관심을 가지고 세밀하게 살펴봐야만 합니다. 오늘 이 시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 예수님께서 열어주신 새로운 시대.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으며 우리가 어떤 시대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 내용을 살펴보려면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사복음서 내용을 봐야하는데요. 요한복음의 경우에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의 관점과는 상이하기 때문에 오늘 말씀에서는 공관복음에 해당하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으로 인해 열린 새로운 시대가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마태복음 4장 1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화면)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시면서 처음으로 전파하신 말씀이 마태복음 4장 17절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는 회개하라. 왜냐하면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해야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이어서 마가복음 1장 1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화면)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때가 가득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기 때문에 너희는 회개하라. 그리고 복음을 믿으라. 마가복음 1장 15절 말씀과 마태복음 4장 17절 말씀이 약간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의미상으로는 어떻습니까. 같은 말씀입니까. 다른 말씀입니까? 의미상으로는 똑같은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라고 기록되었든 하나님 나라라고 기록되었든 같은 말이죠.
자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까요. 우리말로 생각해 보면, 가까이 왔다는 말은 이동의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거의 다 왔어”라는 말이 어떤 의미입니까?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 분들은 이런 표현을 사용할 일이 없으실텐데요. 시간을 잘 지키지 못하는 분들의 경우에는 거의 다 왔어. 응. 다 왔어. 이런 표현을 자주 사용할 수 있습니다. 표현 자체는 다 왔다는 말이기 때문에 완료된 동작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완료되지 않았죠.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니까요. 네. 이런 개념으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을 보면 충분히 오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아. 하나님 나라가 아직 온 것이 아니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원어의 시제 뉘앙스는 그렇지 않습니다. 헬라어 개념으로 보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은 완료 시제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는 이미 가까이 와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사역 시작과 함께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와 있는 겁니다. 여기서 전제 조건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조건 하에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러한 선포를 들은 유대인들의 경우에는 이 말씀을 곧이 곧대로 믿을 수 없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상은 실제로 종말이 임해야만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래서 예수님께서 공생애 시작과 함께 선포하신 말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는 말씀은 굉장히 중요한 말씀인데요. 참 희한하게도 이렇게 중요한 선포의 말씀이 누가복음에는 기록되어있지 않습니다. 성경책 가지고 계신 분들은 누가복음 4장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4장 1절부터 13절까지 내용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시험받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4장 14절과 15절에서는 아주 짧게 예수님의 사역이 소개되고 16절부터 30절까지 굉장히 긴 하나의 단락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단락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메시지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원래 공관복음의 스토리 전개상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포는 예수님께서 시험받으신 직후에 나와야 하는데, 누가복음에서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그런 내용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생각해서 기록하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깜빡해서 실수로 기록하지 않은 것일까요? 아마 그렇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가르침은 예수님의 핵심적인 가르침이었기 때문에 누가가 몰라서 기록하지 않았거나 깜빡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누가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면서 그 말씀 대신에 다른 말씀을 기록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이길래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 대신에 기록한 것인지,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누가복음 4장 16절 말씀 보세요. (화면)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을 보내신 1세기 이스라엘에는 회당 예배가 존재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회당이라는 용어는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를 의미하는 단어인데요. 회당의 역사는 기원전 586년에 바벨론 포로생활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남유다가 멸망하면서 여러 지방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은 각 지역마다 회당을 지어서 예배드렸습니다. 1세기에 이런 회당이 굉장히 많았다고 하는데요. 예루살렘에만 대략 480개 정도 있었고, 인근 지역까지 포함하면 대략 천여 개 정도 있었다고 합니다. 굉장히 많은 숫자죠. 또 어떻게 보면 회당이 교회와 비슷할 것이라 생각할 수 있는데요.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사실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는 회당에서 드리는 예배 순서에는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1세기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어떻게 예배드렸는지 궁금하죠. 저만 궁금한 거 아니죠? 네. 다양한 역사적인 자료들에 의하면 안식일에 회당에 모여서 예배드릴 때, 신명기 6장 4절 쉐마 단락을 암송하고 모세오경과 선지서 말씀을 봉독하고 본문을 해설하는 식으로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때는 목사가 존재하지 않던 시대였기 때문에, 자유롭게 말씀을 나눌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무슨 처음부터 대단한 존재로 등장해서 나사렛 회당에 특별 강사로 초빙되어 말씀을 나누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본문을 해설할 수 있는 자격은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특별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어서 누가복음 4장 17절 말씀 보세요. (화면)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예수님께서 성경을 읽으시려고 책을 펴시는데, 여기서 말하는 책은 오늘날 우리가 보는 그런 책이 아니라 두루마리를 의미합니다. 두루마리 휴지처럼 둘둘 말아서 말씀을 쭉 하나로 연결해서 기록해 놓은 겁니다. 잠시 후에 같이 읽겠습니다만, 예수님께서 읽으시는 부분은 이사야서 61장 1절과 2절 말씀입니다. 이사야서 말씀이 몇 장까지 있습니까? 66장까지 있죠. 두루마리로 펴서 61장까지 찾으려면 어떻게 찾아야 합니까? 이사야서 1장 1절 말씀부터 시작해서 쭉 펴야 찾을 수 있습니다. 완전 아날로그 방식이죠. 이걸 어느 세월에 펴서 찾습니까.
또 안식일 예배 시간에, 공적인 예배 순서에 포함되어있는 구약성경 말씀 봉독 시간에, 본문 찾는 시간 아깝다고 경박스럽게 빨리 빨리 빨리 찾을 수도 없을 겁니다. 자, 그래서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이사야 1장 1절 말씀부터 쭉 펼치시면서 결국 이사야서 61장 1절과 2절 말씀을 찾아서 읽으십니다.
누가는 이 내용을 4장 18절과 19절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18절, 1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화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아멘.
18절 19절 말씀이 길기 때문에 나눠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4장 18절 상반절 말씀 보세요. (화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라는 말씀에서 나는 누구일까요? 당연히 예수님이죠. 물론 이사야에서는 여호와의 종 또는 메시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 그래서 이사야서에 나오는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계신 겁니다. 그런데 이사야에 나오는 그 메시야가 예수님이다. 이 정도로 알고 넘어가는 것은 말씀을 모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메시아가 어떤 존재인지, 어떤 역할을 감당하는지 모르면 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메시아가 어떤 존재인지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4장 18절 말씀을 다시 보시면, 이사야에 나오는 메시아의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메시아라는 존재의 특징은 주 여호와의 영이 임한 존재입니다. 또한 이 메시아는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은 존재이죠. 자 그래서 이 메시아라는 존재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 즉 복음을 전하게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난한 자란 어떤 사람을 의미합니까. 삶의 의욕을 상실한 사람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 무거운 절망에 빠진 사람들, 이러한 사람들이 바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역이 이러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보내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은 어떤 역할을 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본질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4장 18절 하반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화면)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 관하여 세 가지 내용이 나오는데요. 먼저 첫 번째 내용은 포로 된 사람에게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이 말씀은 굉장히 의미심장합니다. 왜냐하면 이사야 선지자는 남유다가 멸망하기 전에 활동한 선지자이기 때문이죠. 아직 나라가 망하기도 전에, 포로된 사람에게 자유를 가져다 주는 메시아의 모습을 예언하는 것은 너무나도 신기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내용은,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눈먼 자들이 다시 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는 겁니다. 시각적인 면에서나 영적인 면에서나, 잃었던 시각을 회복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죠. 세 번째 내용은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억눌림 받는 사람이 자유롭게 될 것이다. 라는 말인데, 사실상 예수님께서 하시는 역할 이 세 가지의 내용은 한 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4장 1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화면)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아멘. 오늘 말씀의 핵심적인 구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이 땅에 은혜의 해를 전파하기 위해서 오신 겁니다. 그렇다면 은혜의 해가 무엇인지 알아야겠죠. 은혜의 해란 구약성경에 나오는 희년을 의미합니다. 희년이 무엇입니까? 레위기 25장 8절 말씀 보세요. (화면)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이어서 레위기 25장 10절 말씀 보세요. (화면)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안식년이 7년마다 한번씩 오는데, 일곱 번째 안식년은 49년이겠죠. 일곱 번째 안식년인 49년을 보내고 그 다음 해인 50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어떻게 합니까? 희년으로 지킵니다. 지키는 방식은 무엇입니까? 자유를 공포하는 방식으로 지킵니다. 말로만 자유를 공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희년을 지키게 되면, 경제적인 이유로 땅을 팔았던 사람은 원래 소유했던 땅을 돌려 받습니다. 빚을 얼마나 지고 있든 상관없이 빚도 탕감 받습니다. 대박이죠. 또 경제적인 이유로 노예로 팔려 갔던 이스라엘 사람은, 희년이 되면 자유의 몸이 됩니다. 원래 생활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겁니다. 땅도 돌려 받고 신분도 자유민으로 회복되는 정말 엄청난 제도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희년 제도는 누가 봐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제도입니다. 돈이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희년 제도가 어떻게 느껴질까요? 당연히 불편하게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얘가 나한테 빚졌어. 그래서 내가 얘 땅을 돈 대신 받았어. 얘가 가지고 있는 땅을 얻으려고 일부러 돈을 준 것도 아니고, 뭐라도 안 바꿔 주면 얘가 굶어 죽을 판이야. 그래서 바꿔줬어. 그런데 몇 년 안 돼서 희년이 됐네? 그럼 그 땅을 돌려줘야 돼. 이럼 돈이 있는 사람은 억울하겠습니까.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억울하겠죠. 이렇게 따지면 땅을 돈 주고 사는 사람은 바보 멍충이입니다. 왜요? 어차피 50년에 한번씩 희년이 올 거고 희년이 오면 땅을 돌려받으니까, 돈 주고 거래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자, 이렇게 희년에는 뭔가 현실적이지 않은 부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모순적인 부분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겠죠.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희년 제도를 얼마나 잘 지켰을까요? 구약성경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희년을 지켰다고 기록되어 있는 말씀은 없습니다. 다른건 다 잘 지켰는데 희년만 지키지 않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월절의 경우에도 심각하게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남유다 요시야 왕 시대가 되어서야 유월절을 지켰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왕기하 23장 22절과 23절 말씀 보세요. (화면)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여러 왕의 시대와 유다 여러 왕의 시대에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 요시야 왕 열여덟째 해에 예루살렘에서 여호와 앞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 아멘.
사사시대부터 요시야 왕 이전까지 유월절을 지킨 적이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마어마하죠. 그럼 유월절만 지키지 않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안식년을 지켰다는 말씀도 없습니다. 그럼 가장 기본 중의 기본인 안식일은 어떨까요. 다른 건 몰라도 안식일은 지켰을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안식일 역시 똑바로 지키지 않았습니다. 에스겔 말씀에 따르면, 안식일을 더럽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안식일을 종교적으로 지켰든 지키지 않았든, 안식일을 더럽혔다는 평가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과 같은 의미죠.
이렇게 이스라엘은 종교적으로 신앙적으로 완전히 무너져있는 상태에서 바벨론에게 멸망 당합니다. 그래서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에, 이스라엘에서 안식일 회복 운동이 일어납니다.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망한 것이라는 생각한 겁니다. 이러한 회복 운동에 따라 안식일을 엄격하게 지키기 시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면 바리새인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죽자고 달려들었던 겁니다. 그럼 안식년과 희년은 지켰을까요? 네. 여전히 지키지 않았습니다. 경제적인 이유로 안식년과 희년은 지킬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유일하게 안식년을 지켰던 것은 바벨론 포로기 70년 기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역대하 36장 21절 말씀 보세요. (화면) “이에 토지가 황폐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더라” 아멘. 엄밀하게 말하면, 이스라엘이 자의적으로 안식년을 지킨 것은 아닙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면서 이스라엘 땅이 안식해서 안식년이 지켜진 것입니다.
자, 이제 희년에 대한 내용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희년은 50년에 한번 씩 자유를 공포하는 해라고 했습니다. 종으로 팔려 간 사람, 막대한 금액의 빚을 진 사람, 돈이 없어서 땅을 판 사람, 이런 사람들이 모두 회복되는 해, 땅이 안식을 누리는 해, 그것이 바로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입니다.
자 그런데,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40세에서 50세 사이였다고 합니다. 세균 감염에 대한 위험도 굉장히 높았고 제대로 된 의료 시설이 마련되어있지 않았던 시대였기 때문에 평균 수명이 낮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 그래서, 평균 4-50세 정도 살다가 죽는다고 가정하면 희년을 제대로 누릴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습니다. 희년을 한번 정도는 겪을 수 있겠지만 두 번 이상은 겪기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희년이 정말 이상적인 제도이고 가난한 자들에게 소망을 품게 하는 그런 은혜로운 제도였겠지만, 경제적인 문제로 사실상 단 한번도 제대로 시행된 적이 없고, 실제로 희년을 두 번 이상 겪을 만큼 오래 살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년은 그저 그림의 떡이었을 겁니다. 희년이 어떤 제도인지는 레위기 말씀을 통해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몸으로는 단 한번도 겪어본 적 없는 이상적인 제도에 불과했던 겁니다.
자 그런데, 이렇게 유명무실한 희년을 누가 다시 선포합니까? 다시 오늘 본문 말씀으로 돌아와서, 누가복음 4장 19절 말씀 다시 보세요. (화면)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희년을 전파하게 하려 하셨다는 겁니다.
이어서 누가복음 4장 20절 말씀 보세요. (화면)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이사야 두루마리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을 읽으시고 이제 말씀을 해설하려고 하시는 순간이죠. 회당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마음으로, 궁금해 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어떤 말씀을 하십니까? 21절 말씀 보세요. (화면)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아멘. 우리말 성경은 부드럽게 번역하기 위해서 어순에 손을 댔는데요. 원어 어순에 따르면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오늘 성취되었다. 이 글이 너희 귀에. 헬라어 어순에 따르면 무엇이 강조되는 겁니까? 오늘 성취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무엇이 성취되었다는 겁니까? 희년을 전파하는 것이 오늘 성취되었다는 겁니다.
희년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빚진 사람, 땅을 판 사람, 종으로 팔린 사람. 이런 가난한 사람들, 절망에 빠진 사람들, 삶의 소망이 없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모두 회복되는 해라고 했습니다. 말 그대로 자유의 해입니다. 이런 자유의 해가 예수님의 입을 통해 선포되었습니다. 또한 선포된 것에서 더 나아가 오늘 성취되었다는 말씀으로 희년이 실행되었음을 알려주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희년의 유익은 모두에게 아무렇게나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서두에 말씀드렸듯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라는 말씀의 유익을 어떻게 누린다고 했습니까.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의 유익을 누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만 종말론적인 희년의 유익을 누릴 수 있는 겁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냥 자기 하고 싶은대로 다 하고 사는데, 갑자기 아무런 이유도 없이 희년의 유익이 떡하니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 말씀을 단적으로만 아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고 답할 것입니다. 물론 구원이라는 단어 안에 오늘 말씀이 담겨있습니다만, 구원을 영적인 구원, 사후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이 정도로만 아는 사람은 구원을 올바로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처음으로 어떤 말씀을 전하셨습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나님 나라가 눈앞에 왔음을 전하셨습니다. 이를 누가복음에서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셨습니까?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시고, 오늘 이 말씀이 응하였다. 라는 방식으로 표현하셨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말씀을 읽을 때, 종말론적인 희년 관점으로 읽으면, 많은 부분들이 더욱 풍성하게 이해됩니다. 예수님께서 열두해 혈루증을 앓는 여인을 고쳐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군대 귀신을 쫓아내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유를 회복시켜 주시기 위함입니다. 왜 자유를 회복시켜 주십니까? 종말론적인 희년이 선포되었고 희년의 유익인 자유가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와 탐욕으로 얼룩져서 흐릿해진 희년의 제도를 예수님께서 친히 회복시켜 주시고 실행시켜 주신 겁니다.
이러한 관점으로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과연 우리는 종말론적 희년의 유익인 자유와 회복이 온전히 이루어진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세상과 믿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또한 예수님 안에서 신분상으로는 자유민이 되었으니, 마음속으로 서로가 서로의 등급을 나누는 일이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자신과 친한 사람 친하지 않은 사람, 이런 식으로 당파를 짓거나, 자신과 잘 맞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의 잣대로 함부로 판단하는 일들이 속히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화평의 성도님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은혜의 해, 자유의 해를 선포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선포케 하셨습니다. 그러니 역사적으로는 종말론적인 희년의 시대가 이미 선포되었고 성취되었으며 시간상으로는 벌써 2천년이나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 가운데 종말론적인 희년의 시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함께 나눈 말씀을 깊이 묵상하시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함을 풍성히 누리시며, 주님의 제자된 삶을 온전히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님의 무한하신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종말론적인 희년의 유익을 누리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육신의 정욕과 세상적인 탐욕에 갇혀 죄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주님께서 선포하신 희년의 자유함을 누리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주신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바로 세워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종말론적인 희년의 시대에 참여하는 자들 되기를 원하오니 성령 하나님, 우리의 심령을 붙잡아 주시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은혜로우시고 자비가 충만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수요일 저녁에, 찬양과 말씀과 기도 가운데 풍성한 은혜 허락하여 주시니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주님의 자녀들이 주님의 영광을 위해 드리는 기도 제목들이 있습니다. 주님의 뜻 가운데 응답하여 주시고, 주님의 섭리와 손길을 날마다 체험하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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