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써 여호와를 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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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호 6:1-6
제목 : 힘써 여호와를 알자
오늘 본문 말씀은 호세아서에서 가장 유명하고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여호와께 돌아가자 라는 말씀과 힘써 여호와를 알자 라는 말씀이 가장 유명하죠. 또 제이어스라는 찬양팀에서 여호와께 돌아가자 라는 찬양 앨범을 내면서 복음성가를 좋아하는 학생들이나 청년들에게 이 말씀이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얼마 전에 화평콜센타에서도 한번 불렀던 찬양이었고요. 찬양을 통해 말씀이 더욱 익숙해지고 친근해지고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아주 바람직하고 긍정적인 현상입니다. 하지만 말씀을 묵상할 때 문맥과 상황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특정 구절에만 집중해서 자의적으로 묵상하다보면, 샛길로 빠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께 돌아가자는 말, 힘써 여호와를 알자는 말에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만, 호세아서 6장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 중에 딱 두 문구만 기억한다면, 건강하게 말씀을 이해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이 말씀이 나오게 되었는지, 이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호세아서 6장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을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뭔가 회개하려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돌아가자고 하니까요. 회개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가 방향을 돌이켜서 죄악된 방향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제 회개하는 건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아직 하나님께 완전히 돌아온 것은 아닙니다. 돌아가자 라고 말만 한거니까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라고 누가 말하고 있는 걸까요? 내용 자체는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누가 돌아가자고 말을 하는 건지 궁금합니다. 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되는 구절인데요. 몇 가지의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첫 번째 가능성은 호세아서 5장에서 제사장들이 맹렬한 비난을 받았기 때문에 제사장들이 회개하는 의미에서 말했을 가능성입니다. 5장에서 6장까지 한 번에 문맥이 그렇게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가능성은 호세아 선지자가 백성들을 향해 권면하는 말씀일 가능성입니다. 우리가 가장 일반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죠. 선지자로써 백성들에게 회개하자고 돌아가자고 권하는 겁니다.
마지막 세 번째 가능성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운동하면서 외치는 말일 가능성입니다. 만약 백성들이 말한 것이라면 이는 명백히 불성실한 회개일 것입니다. 이 세 번째 가능성에 관심을 가지고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의 장과 절의 구분이 없다고 생각하고 오늘 본문을 쭉 읽어보시면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화면)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니라” 백성들이 말합니다. 여호와께 돌아가자! 왜 돌아가야 합니까?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여호와 하나님만이 치료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고쳐주시기만 한다면 이삼일이면 거뜬하게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3절에서 백성들은 결론을 맺습니다. (화면)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여호와께 돌아가자는 회개부터 시작해서, 왜 회개해야 하는지,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실지, 또 하나님을 근거로 해서 여호와를 알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3절 말씀만 놓고 보면 정말 믿음 좋고 결심 좋은 완벽한 고백처럼 보입니다. 정말 회개할 것만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4절 말씀을 보면 문맥과는 전혀 다른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전개됩니다. 4절 말씀을 보십시오. (화면)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아멘.
여호와께 돌아가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이렇게 외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너에게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만약 호세아서 6장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이 긍정적이고 희망적이고 소망이 있는 진정한 회개의 고백이라면, 하나님께서 내가 너에게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신 분이기 때문에 온전히 회개하고자 하는 사람의 얼굴에 아무 이유 없이 침 뱉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는 분명히 이스라엘의 100점짜리 회개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4절 말씀 중간 부분부터 보시면, (화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무엇이 없습니까? “인애”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인애는 아침 구름, 아침 안개와도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아침 안개는 아침 햇살이 돋으면 순식간에 사라지죠. 안개가 꽉 찬 것 같고 충만한 것 같은데 햇살이 쨍하고 비추면 안개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집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애가 아침 안개와도 같다는 말은 형체는 있는 것 같은데 사실상 아무 것도 없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인애는 하나님 보시기에 일시적인 것이고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고, 회개하는 문구 자체에는 문제가 없으나 그들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고 인애가 없음을 정확히 지적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애가 무엇일까요? 인애란 히브리어로 헤세드. 언약적인 사랑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힘써 알자고 말하는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핵심인 인애가 빠져있습니다. 껍데기뿐인 고백이지요.
하나님을 정말로 안다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애가 흘러 넘쳐야 하는데 실상은 아침 안개처럼, 아침 이슬처럼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딱 한 가지만 빠져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딱 한 가지요. 다시 돌아가려고 열심히 회개 운동을 하고 있는데, 이제 마음잡고 진짜 하나님 알고자 하는데, 하나님이 안된다고 하십니다. 오히려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해줘야겠냐고 말씀합니다. 이건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
약간 다른 예시일 수 있지만, 실제로 기독교는 회개에 관련된 비난을 많이 받아왔습니다. 이를테면, 하나님 믿는 사람은 죄 지어도 되지? 기도만 하면 되잖아. 회개만 하면 다 용서받잖아. 이런 조롱과 비아냥거림, 비난들을 많이 받아왔습니다. 이런 손가락질을 받는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인애 없는 회개가 지속적으로 반복되어왔기 때문입니다.
인애 없는데도 회개할 수 있었던 동기는 바로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자기 죄에 대한 심판, 막연한 두려움이 몰려와 회개했을 수도 있고, 마음의 찝찝함을 털어내고자 회개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정말 돌아가고자 했지만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 그냥 사과 차원에서 회개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본인들은 야무지게 회개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님 보시기에 인애가 결핍된 회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인애, 헤세드, 하나님을 향한 사랑. 그거 딱 하나 빠졌는데 회개해도 안 받아주시는 하나님이 너무 야속하게 느껴지십니까?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서, 온 우주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라면서 그런 신이 뭐 그리 속이 좁냐고 좀 관대한 마음으로 부족하더라도 용서해주지 좀. 이렇게 비난의 화살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인애 없는 기독교는 팥 없는 단팥빵이며 물 없이 헤엄치는 물고기와 같습니다. 단 한 가지의 결핍이 우리 믿음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합니다.
인애의 결핍은 하나님을 알기 원하는 지식을 무효화시킬만한 치명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애가 없으면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 자체도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애 없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어불성설입니다. 기껏 해봐야 하나님에 대해 약간 아는 것에 불과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요. 인애가 결핍되어 있다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씀드렸지만, 1절 말씀을 보면 어느 정도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화면)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찢으셨습니다. 네. 하나님께서 우리를 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싸매 주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낫게 하실 것입니다. 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고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왜 찢으셨는지, 왜 치셨는지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없습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1장부터 5장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속 선포하고 소리 높여 외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너희를 치실 수밖에 없었고 찢으실 수밖에 없었는지를 외쳤습니다. 인애가 없는데 인애를 회복할 생각은 없고 인애가 없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추구하고자 하는 왜곡된 신앙을 하나님께서는 꿰뚫어 보시고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꼭 지켜야 할 부분들에 대해 정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우상 숭배하지 말라,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 말씀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었고 음란한 죄를 지었으며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지고 일반 백성들에게 종교심은 있었지만 허울뿐인 제사를 드리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호세아서 4장 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화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아멘.
이스라엘이 왜 망하게 됩니까? 지식이 없기 때문에 망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멸망당하는 겁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오해할 것도 왜곡될 것도 없이 분명한 메시지이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망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정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호세아서 6장 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화면)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아멘.
자기들 마음대로 죄 짓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놓고 이제 와서 여호와를 힘써 알자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의 삶을 망가뜨리면서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셨는데, 이들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먹고 나서 입을 닦으면 그만인 것처럼, 회개 기도하면 회개된 줄 아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금방 회복되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원활하게 돌아갈 것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그들을 상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상하게 되고 찢김을 당했어도 죄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습니다. 그저 자신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조각 조각으로 나누어진 단편적인 지식들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전부인 줄 압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을 다 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라고 고백하자 하나님께서는 딱 잘라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모른다. 너희가 나를 어떻게 아느냐. 너희에게는 인애가 없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닐까요? 하나님을 사랑하기만 한다면 될까요? 호세아서 6장 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화면)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아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두 가지가 무엇입니까.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알려주시기 위해 특별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전자제품을 샀을 때 설명서를 보면서 사용법을 배우듯이 계시된대로, 가르쳐 주시는 대로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올바로 알지 못하고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자기 생각과 자기 목적을 추구하는 일환으로 회개한 것입니다. 좋게 좋게 잘 끝내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고 싶은 것이지요. 이것은 완벽히 잘못된 생각과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 주셨습니다. 일방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셨고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로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우리가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맹목적이고 일방적인 섬김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인격적으로 우리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하나님 사랑하기를 원하시지요.
그렇기 때문에 인격적인 부분을 배제하고 좋은게 좋은거니까 좋게 좋게 그냥 잘 넘어가지 뭐. 죄 지어도 뭐. 회개하면 되지 뭐. 여호와께 돌아가자 하면 되지 뭐.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하나님께 죄악된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일한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그림하나 준비해왔는데요. (그림-미안해 뭐가 미안한데) 남녀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을 때 남자가 벗어나지 못하는 무한루프라는 제목의 그림입니다. 말 그대로 남자가 벗어나지 못하는 그런 내용이에요. 남자가 잘못해서 여자가 화가 난 상태로 시작합니다.
남자가 사과합니다. 미안해. 여자가 묻습니다. 뭐가 미안한데? 남자가 대답합니다. 모르겠어. 여자가 묻습니다. 모르면서 미안해? 남자가 대답합니다. 잘못했어. 여자가 묻습니다. 뭘 잘못했는데? 모른다고 하면 오늘 안에 안 끝날 것 같으니까 꾀를 내서 알아 라고 대답합니다. 여자가 묻습니다. 알면서 그래? 남자가 말합니다. 잘못했어. 그러자 여자가 묻습니다. 뭘 잘못했는데? 이럼 할 말이 없어서 다시 미안해 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게 되죠. (화면전환) 현장 예배를 드렸다면 많은 분들이 웃어주셨을텐데 지금 저 혼자만 웃어서 참 아쉽습니다.
제가 이 그림을 보여드린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여자와 같고 이스라엘이 남자 같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남성과 여성을 말씀드리는게 아닙니다. 방금 보여드린 그림과 관련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남자는 어땠습니까?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릅니다. 여자는 남자가 자기 잘못을 인지하지 못하고 똑바로 사과하지 않으면 화가 풀리지 않습니다. 여자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도 가끔 아내와 이런 일이 있습니다. 남자답게 쿨하게 넘어가지 못해 미안합니다.
아무튼. 이스라엘은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말하고 하나님은 됐거든 하고 있는 거예요. 마치 미안해 뭐가 미안한데? 몰라. 모르면서 미안해? 잘못했어 용서해줘. 뭘 잘못했는데? 미안해. 이런 상황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계속 되묻는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잘못하고 본인이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사람 문제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이 그렇습니다. 잘못해놓고 뭘 잘못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관계가 틀어지는건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좋게 좋게 빨리 해결했으면 좋겠어요. 뭘 해야할지 잘 모르겠으니 그럴싸한 회개 구호 하나 가지고 나아가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알맹이 없는 껍데기뿐인 회개를 받고 싶어도 받으실 수 없는 겁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었고 하나님을 향한 언약적인 사랑, 헤세드, 인애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자기들이 뭘 잘못했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그럴듯한 회개 구호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만의 잘못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죄성을 지닌 존재이기에 마치 관성의 법칙처럼 하나님께로 향하다가 다시금 죄악된 길에 빠지게 됩니다. 성도님들만 그렇다는게 아닙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중범죄를 저지르지 않더라도 마음으로, 생각으로, 입술로 죄를 짓습니다.
그리고 예배드릴 때가 되면, 기억나는대로 얼버무려 회개합니다. 죄 지은 줄 아니까요. 그리고 용서 받았다고 확신하고 예배가 끝나면 또다시 반복되는 죄성의 삶을 살아갈지도 모릅니다.
왜 그럴까요? 왜 온전히 회개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것에 왜 더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에 대한 사랑보다 예배를 통해 얻는 심적인 안정감과 만족감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모를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나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하는 복을 받아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화평의 성도님들 오늘 호세아서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했던 잘못을 답습하지 않도록 계속해서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되 어떻게 알아가야 하는가를 잘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풍성한 은혜 가운데 주님의 말씀이 내 인격에 녹아들고 나의 삶에 드러나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 이 두 가지를 잊지 않고 매 순간 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며 평생토록 힘써 하나님을 알아가시는 모든 화평의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시간 주님만 사랑하리 함께 찬양하겠습니다.
오늘 받은 말씀을 기억하면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도록 노력해야만 합니다. 순간순간마다 올라오는 우리의 죄성과 악한 생각과 마음들을 외면하고 그저 내 뜻대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길 원하진 않았는지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애가 내 안에 있는지요. 이 시간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주님 앞에 고백하며 나아가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께로 돌아오길 원하십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길 원하십니다. 그 과정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다한 사랑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 사랑을 가슴에 품고 힘써 하나님을 알아가는 모든 화평의 성도님들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기도회와 예배만으로 만족하는 신앙생활이 아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 또 우리가 속한 지역사회에서 주님께 영광 돌리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항상 동행하시고 인도하시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마무리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시간 여러 기도제목들을 놓고 주님께 아뢰었습니다. 우리의 필요를 잘 아시고 항상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기도응답 받은 줄로 믿고 나아갑니다. 당장 이루어지는 기도제목에는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리고, 응답이 미루어지는 기도제목에는 인내와 기대와 소망을 품으며 살아가길 원합니다. 주님께서 택하시고 사랑하시는 우리 화평의 모든 성도님들의 마음을 주장해주시고 항상 동행해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주해
호세아 당시의 상황과 예언의 말씀을 살펴보겠다.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에서 활약한 선지자이다. 호세아 선지자는 멸망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예언한 선지자로서 오늘날에도 적실한 메시지를 증거하고 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문제가 많았다. 총체적인 위기 상황이었다. 경제적으로는 부요했지만 사회 각층의 부조리가 만연해있었다. 그중에 특별히 지도층에 큰 문제가 있었다. 외교활동은 활발했지만 국가 안보가 불안했고 종교심은 있었지만 종교적인 혼란상황이 극에 달했다. 예배 자체가 큰 문제 덩어리였다.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고 죄를 지음으로 율법을 어겼다(왕상 12:26-30; 출 20:3-6; 신 4:12,15-19, 25-31, 35-40). 당시 북이스라엘은 다른 신을 섬기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도처에 위험 신호가 보이고 있었다. 호세아는 열심히 경보를 울렸다. 백성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걸었다. 호세아는 근본적으로 많은 말씀을 통해 북이스라엘의 핵심적인 문제가 무엇이냐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1절에도 나오지만 6절에서 나오는 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는 것이었다. 4장 6절에도 같은 내용이 나온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이런 예언의 말씀이 기록되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반역적 사회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길을 걷지 않고 율법을 가르치거나 실천하지 않고 윤리적 변화는 없고 삶의 신앙고백이 없는 상황 속에서 호세아가 말씀 사역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오늘 말씀 본문에 보면 바로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이 소개된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왜 돌아가야 하는가?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여호와만이 치료가 가능하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같다. 치료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그분께로 돌아가서 치료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있는 것 같다. 이삼일이면 거뜬히 일어날 것이다. 라는 생각도 있는 것 같다(2절). 게다가 그들은 치료를 확신하고 있었다. 이 자연의 운행이 확실하고 정교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회복시킬 것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결론을 맺는다. 3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라고 결론을 맺는다. 회개로부터 시작해서, 왜 회개해야 하는지, 하나님을 근거로 해서 여호와를 알자라고 말한다.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수 없을 것 같이 믿음 좋고 결심 좋고 완벽한 고백처럼 보인다. 회개의 말처럼 보인다.
그런데 4절에 보면 뜻밖에도 하나님이 당황하신다. 4절에 보니까 에브라임아! 이는 북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이다.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왜 하나님이 당황하셨는가? 왜 백성들이 100점짜리 신앙고백을 하고 돌이키는 말을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어째서 이 같은 반응을 보이시는가? 4절의 말씀이 계속된다.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인애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아침 안개와도 같다고 지적하신다. 모든 아침 안개는 아침 햇살이 돋으면 순식간에 사라진다. 안개가 꽉 찬 것 같고 충만한 것 같은데 햇살이 드러나게 될 때, 실상은 아무것도 없게 되는 것이다. 일시적이고 믿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중심을 꿰뚫어 보신 것이다. 훌륭한 고백과 회개의 말 가운데 그들의 중심을 바라보시면서 인애가 없다고 지적하시는 것이다. 인애는 무엇인가?
인애는 헤세드. 언약적 사랑을 가리킨다. 너희가 지금 하나님을 힘써 알자고 말하는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핵심인 인애가 빠졌다는 것이다. 껍데기뿐이라는 것이다. 너희가 정말 하나님을 알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애가 흘러넘쳐야 하는데 실상은 혹 있는 것 같으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명백하게 드러나는바 아무것도
없구나 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출 34:5-6, 신 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참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한분이신 것, 그리고 그가 존재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구원사역에 있어서도 그분만이 유일한 분임을 알아야 한다. 여기에는 하나님 사랑이 뒤따라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없고 고백만 있다는 말씀이다. 인애, 딱 한 가지만 결핍된 것처럼 보이나 이 결핍은 치명적인 것이다. 사실상 그들의 하나님을 알기 원하는 지식을 무효화시킬만한 치명성을 지니고 있다. 인애가 없는 것은 다만 삶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 자체도 없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인애가 없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이것은 말의 모순이고 기껏해야, 잘해야 하나님에 대해 약간 아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라 할 수 없다. 그들이 기도할 때, 회개할 때, 나름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기초했다. 하나님이 찢으셨으나, 맞습니다. 하나님이 치셨습니다. 하나님이 찢으셨습니다. 이런 지식, 이런 현실 직시가 있었다. 또한 하나님이 싸매실 것이다. 싸맨다면 하나님 외에는 싸매실 분이 없다. 고치실 분도 하나님뿐이다. 이런 것을 알고 있었다. 이들이 기대하는 고침과 치유는 아닐지 몰라도 하나님이 하실 것이다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왜 찢으셨는지, 왜 그들을 치셨는지, 여기에 대한 심각한 생각이 없었다. 호세아가 외치는 바는 왜 하나님이 너희를 칠 수 밖에 없었고 찢으실 수밖에 없었는지 였는데도 말이다. 인애가 없는데 인애를 회복할 생각은 없고 인애 없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추구하고자 하는 그러한 신앙을 하나님께서 꿰뚫어보시고 지적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 하나님 말씀에 충실하라는 것을 강조하고 형제에게도 사랑이 드러나도록 요청하셨다. 하나님은 호세아의 삶을 망가뜨리면서 까지 이스라엘에게 전달하고자 하셨는데 이들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먹고 나서 입을 씻으면 그만인 것처럼, 회개의 말을 하면 회개의 전부인 것처럼 금방 회복되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원활하게 돌아갈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이 죄 때문에 그들을 상하게 했는데 그들의 고백 가운데에는 죄에 대한 인식이 없다. 그저 자기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조각과도 같은 지식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부인 양, 이렇게 해서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는 양,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인 양,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라고 고백했는데 하나님은 한 마디로 대답하시는 것이다. 너희는 나를 모른다. 너희가 나를 어떻게 아느냐? 너희는 인애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 마음으로 말씀을 지키고 실천하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인애가 나타나는 것이 그 증거일 뿐만 아니라 결과이며 내용인데 말이다.
이스라엘은 철이 되면 비가 내리고 곡식을 내는 자연이 운행하는 것처럼 본인들이 고백하면 하나님이 일하셔서 얼마 되지 않아 회복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믿음이 좋다고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쉽게, 그저 그냥 알자라는 운동을 하고 하나님께 제스쳐를 취하면 회복될 것이라는 막연한 마음. 죄에 대해 심각하게 마음을 기울이지 못하고. 본인들이 겪고 있는 불편한 심정과 아픔과 고통을 벗어버리기 위한 것처럼 보이는 말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100점짜리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것은 참으로 부족하고 불성실하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막고 자기 생각과 자기 목적을 추구하는 일환으로서의 회개일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그들의 죄를 지적하고 그들을 칠 것이고 고통이 임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찬 물을 끼얹는 것 같은 말씀이다. 그 당시에 얼마나 잘한 운동인가? 얼마나 멋진 구호인가?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래 조금만 더 힘써라. 그래서 좀 더 알아라. 조금 더 열심히 하고 조금 더 하면, 그러면 너희가 나를 알거야.” 이렇게 대답할 줄 알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찬물을 끼얹는 것으로 그치지 않으시고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무엇보다도 원하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6절에서 말씀하신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은 진정으로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6절에 의하면 나를 모른다는 것이다. 내 중심을 모른다는 것이다. 내 인애를 모른다는 것이다. 내가 어떤 성품을 가진 하나님이며 언약의 하나님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을 알기를 원한다는 말씀이다. 오늘날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만족해서, 지식의 편린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그 신념을 흔들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인애가 없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 이것은 지식이 될지는 몰라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될 수 없다. 인애를 원하고 번제보다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원하시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가슴과 전인격을 통해 그를 대면하여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저자 제임스 페커는 이렇게 말한다. “신학적 지식 자체를 위해 신학적 지식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우리에게 나쁘게 작용할 것이다(무용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교만하게 할 것이고 우리를 우쭐하게 만들 것이다. 우리는 지식의 위대함에 도취되어 우리 자신을 다른 그리스도인들보다 한 단계 위에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고 나아가 미숙하고 부적절한 신학 개념을 가진 사람들을 경멸하고 업신여기게 될 것이다.” 이렇게 강하게 경고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인격에 녹아들고 삶에서 드러나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점수로 측정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점수로 측정할 수 없다. 인애도 마찬가지다. 도무지 점수로 낼 수 없다. 충성? 순종? 몇 점이다 말로 할 수 없다. 사랑? 열정도 마찬가지이다.
“인애”는 핵심어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필수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간다 할 때에도 기본, 즉 인애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변화될 수 있을까? 페커는 방안을 제시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바꾸기 위한 방법은 간단하지만 만만치 않다. 바로 하나님에 대해 배운 진리를 하나님 앞에서 묵상하는 내용으로 바꾸어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찬양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정보로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그 진리의 내용과 정보를 묵상하고 되새김질하고 마음에 새기고 하는 작업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기도와 찬양이 될 때까지 말씀을 붙잡는 것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바뀌어지는 것이다.”
페커의 제안은 우리에게 많은 도전을 준다. 이것은 말하자면, 누룩과 같은 역할을 한다. 빵을 만들 때 밀가루 반죽을 하고 누룩을 넣어 부풀린다. 아무리 밀가루가 많아도 누룩이 없다면 빵이 되겠는가? 될 수 없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살아있는 말씀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하나님을 대할 수 없다면 지식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페커에 의하면 이런 목적으로 그런 상태로 남아있는 것은 위험하기까지 하다고 한다. 지식으로 하여금 영적인 경건의 내용이 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남지 않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될 때,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만족하고 끝나지 않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될 때, 진리가 역사하고 하나님을 대면하는 즐거움과 자유함이 생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은혜와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교사로 헌신하는 우리들, 우리에게 맡겨주신 영혼들에 대해 우리는 어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매주 나아가는가? 그 말씀들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들이라 확신하는가? 그 말씀들이 내 안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현존하는가? 다시 한 번 돌아보고 점검하고 결단하는 시간이 되길 축복한다.
Ⅰ. 서론 – 호 6:1-3의 화자가 누구인가? - 이스라엘
1) 여러 가능성
- 호세아가 말한다는 가능성, 백성들이 말한다는 가능성
2) 백성들이 회개한다는 전제 하에,
이들은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Ⅱ. 본론
1. 거짓되고 불성실한 회개 6:1-3
1) 회복에 초점이 맞추어짐
– 낫게 하실 것. 싸매어 주실 것. 살리시고 일으키실 것.
2) 이스라엘이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것
– 나타나심, 임하심
2. 하나님의 반응 6:4-6
1) 불성실한 회개에 대한 반응
- 6:4 쉽게 사라짐, 6:5 빛처럼 나오는 심판.
2)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1) 인애
(2) 지식
이스라엘에게 부족했던 것? 참된 회개. 하나님을 아는 것(지식). 인애.
지식이 없음 – 호 4:1(진실, 인애, 지식없음), 4:6 지식을 버림.
6:6을 바꿔 말한다면, 나는 헌신을 원하고 찬양과 예배, 설교를 원하지 않는다.
Ⅲ. 결론 :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6장 1-3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백성들의 불성실한 회개인 것은 1차 메시지로 생각해도 무방.
오늘날 우리는 거룩한 회개 운동의 일환으로 이 말씀을 묵상해도 좋음.
회개하라는 권고는 4:15~5:15에 기록된 형벌을 뒤집는 약속이 포함됨.
참고.
엑스포지멘터리 175- 호 6:1-4 화자가 누구인가?
wbc 241-242 호 6:6 하나님께서 제사를 원하지 않으시는게 아님.
옥스퍼드 255
Logos – NAC Hose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