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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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고전 10:23-33
제목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연말 시상식에 나와서 수상하는 배우들이나 운동선수들의 인터뷰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린다는 내용을 접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내용을 접하면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랑스럽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하죠. 그런데 이런 내용을 접할 때 한 가지 오해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릴 때, 우리가 무언가를 이뤄내야만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릴 수 있다는 오해입니다. 이러한 오해가 깊어지다 보면, 자신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려야겠으니 학업의 성취도를 끌어올려 주십시오. 승진시켜 주십시오. 돈을 많이 벌게 해 주십시오. 이런 식으로 자신이 무언가를 성취하는 방향에 기도를 집중하게 됩니다. 물론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능력을 더해 주셔서 무언가를 이루는 것만큼 드라마틱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극적인 성공 스토리는 주위에 있는 불신자들이나 이웃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게 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깨닫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이 성경에서 어떤 맥락에서 기록되었으며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 선행되어야 하는지 분명하게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함께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이란 어떠한 삶인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생각을 교정합니다. 먼저 고린도전서 6장 1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인 고린도전서 10장 2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in) 시작.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모든 것이 나에게 허락된다”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견해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직접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1세기 고린도 지역에서 활동한 여러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사용한 격언에서 비롯된 것인데요. 오늘 본문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이 격언을 신앙생활에 잘못 적용하는 부분을 세밀하게 지적합니다. 그런데 개역개정 성경으로 보면,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이 말씀 전체를 사도 바울이 직접 말한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만, 성도님들께 가장 익숙한 NIV 성경을 보면 (in) 모든 것이 가하나. 이 부분이 쌍따옴표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NIV 성경을 번역한 신학자들이 이 말씀을 사도 바울이 인용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렇게 번역한 것입니다. (out)
자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생각인 “모든 것이 가하다”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모든 것이 가하다고 말하지만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 가하다”라는 말은 가능하다, 할 수 있다. 이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있는 자유와 권한이 있다는 말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말을 자신들의 삶에 어떻게 적용했는가 하면, 말씀에 비추어봤을 때 내가 할 수 있느냐 할 수 없느냐를 스스로 판단해서, 가능한 일이라는 확신이 들면 무엇이든지 죄책감 없이 행동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이러한 판단은 그들의 자유가 가진 한계를 자각하지 못하고 영적인 분별력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고린도 성도들의 생각은 어떻게 보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교회 바깥에서 지낼 때와 교회 안에서 행동할 때, 무엇은 할 수 있고 무엇은 하지 말아야 하고. 이런 부분들을 충분히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보통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명백한 명령들. 예컨대 십계명과 같은 말씀들은 무조건 지키고자 노력하지만, 그 외에 애매한 부분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행동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면, 그렇게 하지 말라고 성경에 쓰여있어? 이런 식으로 반문하기 쉽죠.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이렇게 애매한 부분들을 세밀하게 교정하기 위해서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의무적으로 지켜야만 하는 십계명과 성경에 등장하는 다양한 금지 명령들을 제외한 나머지의 모든 일들은 마음대로 해도 될까요? 사도 바울에 따르면 그렇지 않습니다. 법적으로 따졌을 때, 합법이냐 불법이냐. 말씀에 비추어봤을 때 순종이냐 불순종이냐. 의식적으로 거룩함을 지킨 것이냐. 부정한 것이냐. 이런 것을 떠나서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먼저 고려되어야 할 것은 타인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과 덕을 세우는 일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삶이란 (in) 첫째로, 타인의 유익을 구하는 삶. 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4절 말씀 보세요. (in)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고린도 성도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 모든 것들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자신에게 주어져 있다는 생각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유익을 기초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찾거나 추구하지 말고 타인의 유익만을 추구하라고 명령합니다. (out) 누가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겁니까?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겁니다.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할 때,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위해서 해야 한다는 겁니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타인이 누구인가 하면, 한 교회에서 수십년동안 함께 신앙생활한 가족만큼 가까운 자기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깊이 있게 알지는 못하지만 같은 교회를 다니는 어떤 선량한 그리스도인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4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타인이란 그리스도인을 넘어서 불신자까지 포함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성도님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자유란, 나의 유익과 만족을 추구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허락된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고,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을 세우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노력할 때 사용되는 자유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삶은 (in) 두 번째로, 타인의 양심(자의식)을 위하는 삶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양심에 관한 내용은 25절부터 30절까지 이어지는데요. 이 내용은 우상 제물을 먹느냐 먹지 마느냐 하는 두 가지의 문제를 다루면서 양심에 관한 내용으로 연결됩니다. 먼저 첫 번째 경우는 시장에서 유통되는 우상 제물 문제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5절 말씀 보세요. (in)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out)
1세기 고린도 시장에서 파는 먹거리들 중에 특히 육류의 경우에는 대부분 우상 제물로 바쳐졌다가 시장으로 유통되었다고 합니다. 학자들마다 시장에서 판매하는 육류 중에 신전에서 나온 육류의 비중이 얼마나 되는가 하는 문제는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지만, 확실한 것은 신전에 바쳐진 고기 중의 일부가 시장에서 판매되었다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당시 유대인들이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굉장히 치명적인 사회적 이슈였겠죠. 그래서 우상 제물을 극도로 꺼리는 사람들을 위해서 우상에게 바치지 않은 음식을 따로 표시해서 팔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우상에게 바치지 않은 고기를 구입할 수 있었다는 것이죠. 하지만 사도 바울은 확실한 방법으로 우상제물을 먹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25절 말씀에 따르면,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양심을 위한다는 말은 누구의 양심을 위한다는 것일까요. 우상 제물을 판매하는 상인의 양심을 위한다는 것일까요. 아니면 우상 제물을 사먹는 본인의 양심을 위한다는 것일까요. 당연히 본인의 양심을 위한 것이겠죠. 신전에서 유통된 고기를 파는 사람은 양심 문제에 있어서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무슨 이상한 고기를 파는 것도 아니고, 우상에게 정성껏 바친 고기이기 때문에 당연히 품질이 좋을 수밖에 없으니 양심에 문제가 생길 수 없겠죠. 하지만 신자의 입장에서는 어떻습니까? 시장에서 판매하는 고기의 출처를 확실하게 알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구입해서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고기의 출처를 모르는 상태에 사먹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자기 양심을 위해서, 자기 유익을 위해서 너무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시편 24편 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아멘.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26절 말씀에서 우리가 방금 함께 읽은 시편 24편 1절 말씀을 인용합니다. (in)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out)
음식의 출처를 묻지 않고 사 먹는 것에 있어서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이유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가 시장에 팔리면, 그 고기는 더이상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가 아니라 그냥 고기가 되는 겁니다. 어떤 의미 부여를 할 필요도 없이 감사함으로 먹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우상 제물을 먹을 수 있는 두 번째 경우는 불신자에게 초대를 받아서 식사하는 경우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out) 식사 자리에 초대 받을 경우에 초대한 사람은 일반적으로 손님에게 가장 좋은 고기를 대접하기 때문에, 이러한 경우는 십중팔구 신전에서 유통된 고기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는 시장에서 고기를 구입해서 먹는 것과 동일하게, 물어보지 않고 먹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자기 유익보다 식사 자리에 초대하고 음식을 대접해준 사람에 대한 배려와 타인의 유익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식사 자리에 초대한 사람이 말해주거나, 동석한 사람 중에 누군가 고기의 출처를 말할 수 있겠죠. 고린도전서 10장 28절 말씀 보세요. (in)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out)
예컨대, 식사 자리에 올라온 고기가 투뿔이고 마블링이 기가 막혀서 입에 군침이 잔뜩 도는데, 그 순간 옆에서 “야. 이거 오늘 신전에서 나온 고긴데 최고급 고기래. 많이 먹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어떻게 해야 된다는 겁니까? 우상 제물이라고 말한 사람과 그 사람의 양심을 위해서 먹지 말라는 겁니다.
굉장히 단순하지만 분명한 원칙이죠. 어떤 방식으로든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먹지 말라는 겁니다. 물론 신전에서 나온 고기라고 말한 사람은 불순한 의도 하나 없이, 그저 단순하게 그냥 품질이 좋은 고기다. 이런 내용을 어필하고 싶어서 신전에서 나온 고기라고 말한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말한 사람의 의도와 관계없이 일단 그 고기의 출처가 밝혀지면 문제가 됩니다. 우상 제물이라고 알려진 상황에서 그 고기를 먹는 것은 타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을 판단하는 동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을 무시하고 그 고기를 먹는 신자는 “이게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이거나 말거나. 고기는 그냥 고기지. 다 하나님의 것인데 무슨 상관이야. 내 신앙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리스도인이야.” 얼마든지 이렇게 생각하고 먹을 수 있습니다만, 불신자는 신자가 어떤 생각과 마음으로 우상 제물을 먹는지는 크게 관심이 없을 수 있습니다.
불신자의 입장에서는 그냥 단순하게 어? 그리스도인이 우상 제물을 먹네? 야. 그리스도인 별거 없어. 예수 믿든 안 믿든 다 똑같아. 절에 다니든 성당에 다니든 다 똑같아. 이런 식으로 신자를 비방 거리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자유와 자신의 유익에 집중하기보다 식사 자리에 함께하는 불신자의 판단과 불신자의 유익을 위해서 우상 제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고기를 입에도 대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바울이 죄라고 여기는 것은, 불신자에게 그리스도인들이 조금이라도 우상숭배를 승인했다는 암시를 주면 안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우상 제물을 같이 먹으면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우상숭배에 참여해도 괜찮다는 느낌을 주거나, 다원주의를 용인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애매한 모습을 원천봉쇄해야 한다는 겁니다. 데이빗 갈런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결국 알면서 우상의 음식에 참여할 때, 그리스도인은 암묵적으로 우상숭배를 용인하는 것이며, 범죄자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다.” 이 설명대로 그리스도인은 나만 괜찮으면 돼. 이런 식의 생각과 행동을 피하고, 상대방의 양심과 유익을 위해서 더 깊이 생각하고 세심하게 배려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어서 (in)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삶 셋째는, 타인에게 거치는 자가 되지 않는 삶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아멘. 이 말씀을 조금 더 풀어서 읽으면, 그러므로 너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행하라. (out)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내용이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타인의 유익을 구하고, 타인의 양심을 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내용 안에는 우상 제물을 먹을 수 있는 두 가지의 경우가 포함되어 있었죠. 그런데 사도 바울은 먹는 문제를 주로 이야기하다가 31절에서는 훨씬 더 넓은 범위로 확장시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먹고 마시는 것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할 것이 아니라,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 명령합니다. 감사함을 통해 모든 것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고린도전서 10장 3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고린도전서 10장 32절 말씀 보세요. (in)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out)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행하는 그리스도인은 거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거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까? 32절에서 유대인 말 그대로 유대교에 소속된 유대인을 가리킵니다. 헬라인은 이방인 또는 불신자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고요. 하나님의 교회는 교회에 속한 모든 지체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종합해 보면, 그리스도인은 유대교에 소속된 사람들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불신자들과 이방인들, 그리고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모든 지체들에게 거치는 자가 되어선 안 된다는 겁니다. 이를 역으로 표현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상관없이 어떤 사람에게든지 상처를 입히고 실족시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치는 자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18장 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out)
실족하게 하는 사람을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말씀하십니까? 연자 맷돌을 목에 달아서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낫다는 겁니다. 굉장히 무서운 말씀이죠. 이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8장 9절에서 12절 말씀을 통해 타인을 실족하게 만들고 상처를 주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힙니다. 고린도전서 8장 12절 말씀 보세요. (in)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십계명을 어기는 것만이 죄가 아니라 형제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죄를 짓는 것이라는 겁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말과 행동을 좀 더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을 돌아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8장 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죄를 짓는 것이다. (out)사도 바울은 연약한 지체가 상처받는 것이 그 지체의 연약함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 형제의 연약함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 유익을 위해서 행동한 사람의 문제라는 겁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장난삼아 던진 돌멩이에 개구리가 죽지 않습니까? 이런 점에서 우리는 자기합리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만약 상대방이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뭐. 고작 이 정도로 상처를 받냐. 나는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닌데, 사람이 뭐 이렇게 베베 꼬였냐. 또는 무슨 사내 대장부가 그런 것 가지고 그러냐. 삐졌냐. 뭐 이런 식으로 반응해선 안 된다는 겁니다. 과정이 어떻든 결과적으로 연약한 형제가 자신의 어떤 말과 행동으로 인해 상처를 받았다면 그 자체가 예수님께 죄를 짓는 행위가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회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부끄러운 일이 참 많지만 그나마 덜 창피한 일을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결혼한지 7년 정도 되었는데요. 신혼 초창기 때, 저의 사모와 의사소통하는 과정에서 제가 아내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오해를 사게끔 표현한 일들이 참 많았습니다. 예컨대, 아내가 어떤 이야기를 하면, 제 방식대로 이해하면서 상처를 받습니다. 돌이켜보면 사실 그렇게까지 상처받을 일이 아닌데 부풀려서 과대 해석하면서 상처를 받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저의 잘못이죠.
또 반대로 어떤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내가 상처를 받으면, 나는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니라고 우깁니다. 참 못났죠. 그냥 솔직하게 사과하고 끝내면 될 일 아닙니까. 내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됐는데, 내가 말실수했네 미안해. 안 그럴게 앞으로 조심할게. 이렇게 말하고 끝내면 되는데, 제가 가지고 있는 본성적인 죄성과 미성숙한 인격 때문에 미안하다는 말이 신속하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결국 그렇게 옥신각신하면서 우기고 또 우기다 보면, 더 큰 상처를 안기게 되죠. 이런 경우가 바로 자신의 유익과 자존심을 내세우기 위해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를 성경적으로 보면 단순하게 개인적인 문제 또는 가정의 문제 정도로 끝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말씀에 따르면 배우자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형제에게 상처를 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엄격하게 표현하면 믿는 사람에게든지 믿지 않는 사람에게든지, 누구에게든지 상처를 입히는 것은 예수님께 죄를 짓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타인에게 거치는 자가 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더욱 세밀하게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컨대, 나는 원래 이래. 나는 원래 말이 먼저 나가. 나는 표현이 미숙한 사람이야. 이런 식으로 자기합리화 하는 경우가 있는데요. 사람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실수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 실수를 계속해서 반복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어떤 핑계를 댈 수 있겠습니다. 삶에서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거나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회에서는 물론이거니와 교회에서 끊임없이 영적인 시험을 만들어내는 영적 시험 제조기로서 자신이 하나님의 교회에 얼마나 악한 영향력을 끼치는 줄도 모르고 자신의 유익과 만족을 위해서 생활한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안타까우시겠습니까. 고든 fee라는 신약학자는 거치는 자에게 상처 받는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현실에서 상처받는 사람들은 불신자나 새 신자가 아니라 아주 오랫동안 교회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부디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면서 누군가를 실족시키거나 상처주는 일이 없도록 스스로를 돌아보며 배려심을 더욱 키워나가시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삶은 (in) 넷째로,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는 명령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갑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3절 말씀 보세요. (in)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말씀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내가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불신자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out) 이런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만 잘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특정 부류나 집단을 한정 지어서 편애하면서 그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든지 간에 기쁘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님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고린도전서 10장 23절부터 33절까지의 말씀입니다만, 사실은 11장 1절까지 한 단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절 말씀 보세요. (in)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out)
어디서 많이 본 말씀이지 않습니까? 고린도전서 4장 16절에서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명령한 것과 동일한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이 자기를 본받으라고 두 번 명령하는데요. 한번은 쓰레기와 찌꺼기와 같은 나를 본받으라는 명령이고, 다른 한번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자신을 본받으라는 명령입니다. 나를 본받으라는 두 가지의 명령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기초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에서 나를 본받으라는 명령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 자신이 얼마나 낮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를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지체들과의 관계 안에서 쓰레기와 찌거기와 같은 자신의 모습을 고백하며 관계 맺을 것을 명령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에서 나를 본받으라는 명령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삶을 기초로 하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삶이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는가에 깊은 관련성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삶이란 첫째로, 타인의 유익을 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둘째로, 타인의 양심을 위해서 배려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셋째로 다른 사람에게 거치는 사람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넷째로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님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삶이란, 자신의 목표를 이뤄서 하나님의 영광의 무게를 더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무한히 영광스러운 분이십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의 유익과 양심을 위해 살아가는 것, 다른 사람에게 거치는 사람이 되지 않는 것,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삶입니다.
오늘 함께 나눈 말씀을 깊이 묵상하시면서, 과연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인가. 혹시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려면 나의 부족한 부분을 어떻게 얼마나 변화시켜야 할 것인가. 이런 부분들을 깊이 고민하시면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루 하루 복되게 살아내시는 모든 화평의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허물과 죄로 죽어있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십자가 보혈의 은혜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영적인 생명을 헛되이 사용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쏜살같이 지나가는 우리의 인생이지만, 한평생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타인의 유익을 구한 삶, 타인의 양심을 위해 배려하는 삶, 타인에게 거치는 사람이 되지 않고,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삶. 이러한 삶을 온전히 살아냄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올려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여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죄악된 본성을 다스리며 말씀대로 살아가기를 원하오니 우리의 심령을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홀로 영광받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오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마무리 기도 >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각자에게 허락하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게 하시고, 삼일 저녁에 은혜의 자리로 친히 인도해 주시니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물댄 동산과 같이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인도하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우리의 영혼을 만족케 하시는 주님, 주님의 역사하심과 인도하심을 언제나 신뢰하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여러 가지 영적인 시험으로 인해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깨어 기도하게 하시며, 주님 한분만을 더욱 붙들며 의지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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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해
10:23 모든 것이 허용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며, 모든 것이 허용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다.
10: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여라
10:25 시장에서 파는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어라.
10:26 땅과 거기에 가득 찬 것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10:27 불신자들 가운데서 어떤 이가 너희를 초대하므로 너희가 가기를 원한다면,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어라
10:28 그러나 만일 어떤 이가 너희에게 “이것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다.”하고 말한다면, 알려 준 사람과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마라.
10:29 내가 지금 말하는 양심은 너 자신의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다. 왜 내 자유가 남의 양심에 의해 판단을 받아야 하느냐?
10:30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왜 감사하는 것 때문에 비난을 받아야 하느냐?
10:31 그러므로 너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여라
10:32 너희는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마라.
10:33 나는 모든 일에 모든 이들을 기쁘게 하려고, 또 나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많은 이들의 유익을 구하니, 이는 그들이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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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병수
바울은 우상 제물 또는 우상 제물 섭취를 피하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음. 우상과 관련된 문제는 우상 제물을 먹는 외견상의 일로만 이해되지 않기 때문. 바울은 우상 제물 섭취를 더 큰 관점으로, 즉 우상숭배라는 관점으로 이해함.
이러한 접근 방법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라고 말함. 우상 제물을 먹는 일이 곧 우상숭배라는 말을 이해하려면 지혜가 필요함.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이 말을 받기에 충분한 지각을 소유했다고 믿었음. 바울은 “내가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라고(15) 말한다.
논증1: 성찬(16-17절). 성찬은 주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제정되었고, 교회의 시작과 함께 이어져온 예식임. 성찬은 “참여”(코이노니아)임. 성찬은 잔과 떡으로 구성됨.
먼저 잔은 “축복의 잔”(16a)이라고 설명됨. 잔이 축복을 준다는 의미가 아님. 우리가 축복하는 바가 잔이기 때문에 축복의 잔임. 축복하다(율로게오)는 좋은 말을 하다, 복을 빌다, 감사하다, 찬양하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음. 좋은 말을 하다는 잔에 대해 아무 의미가 없다. 잔에게 무슨 좋은 말을 하겠는가? 복을 빌다는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임. 잔에게 복을 줄 이유도 없음. 감사하다 라는 뜻 역시 이런 문제점을 벗어나지 못함. 그렇다면 이 말은 아마도 복되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타당함. 예수님께서는 잡하시기 전에 자신의 희생을 가리키는 잔을 나누셨음. 성도는 이 잔을 대할 때마다 늘 감격하고 감사할 수밖에 없음. 그러므로 이 잔을 가리켜 복되다고 일컫는 것. 그리고 이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을 의미함. 입술로의 참여가 아니라 믿음으로의 참여임. 그리스도의 깨끗케 하는 효력에 참여하는 것임. (그리스도의 피가 죄를 씻으므로)
떡에는 “우리가 떼는”이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음. “뗀다”는 말은 떡이 하나임을 가리킴. 한 떡이 나누어지는 것임. 이는 하나와 여럿, 몸과 지체의 관계를 함축함. 이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을 의미함. 떡은 하나임. 그러나 이 떡이 떼어져서 여러사람에게 주어짐. 한 떡에 참여하는 것이 참여하는 모든 사람을 한 몸 되게 함. 바울은 우상 제물을 먹는 것은 곧 우상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논증을 펼치기 위해서, 성찬에서 잔을 먹고 떡을 먹는 것이 그리스도의 피와 몸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논증을 전개함. 성찬의 잔과 떡 섭취가 그리스도의 피와 몸에 참여하는 것이라면 우상 제물의 섭취는 우상에 참여하는 것임.
논증2: 이스라엘 제사(18절). 바울은 우상 제물 섭취가 곧 우상숭배라는 것을 설득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제사를 예로 들어 말함.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18a절)은 구약을 다시 제시하는 것.
제물을 먹는 사람은 제물과 관련이 있음. 제사장이 제물을 먹음. 제물을 먹는 것은 제단과의 관계에서 설명됨. 제물을 먹는 사람은 제단에 참여하는 사람임. 바울은 우상 제물을 먹는 것이 곧 우상에 참여하는 것임을 보이기 위해 구약 제사에서 제물을 먹는 것이 곧 제단에 참여하는 것이었음을 설명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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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제 사랑의 마음
문제 제기 – 고전 6:12와 비슷한 말씀
모든 것이 허용될 수 있다. 그러나 두 가지의 제한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1. 유익성을 따져야 한다. 유익한가 유익하지 않은가? ex) 음식물.
2. 건덕성을 따져야 한다. 당연시 되는 권리가 도리어 교회를 어지럽히거나 망가뜨릴 수 있다. 유익성과 건덕성은 자기 유익이 아니라 남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
1) 자기 문제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당시에 시장에서 먹는 먹거리들(특히 고기)은 대부분 우상 제물로 쓰였다가 유통되는 것들이었다. 우상 제물을 꺼리는 유대인들에 대한 배려로 우상 제물에게 바치지 않은 음식을 따로 표시해서 팔기도 했다. 하지만 바울은 지나치게 시장 음식의 출처를 알아내려고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함. 자기 양심을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즉 자기 유익을 구하기 위해 너무 전전긍긍하지 말라는 것. 왜?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 고전 10:26, 시 24:1(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고전 8:8은 음식의 중립성을 말함.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2) 타인 문제
바울은 불신자의 차원에서 설명함. 불신자가 신자를 초청할 수 있음. 이것은 가정으로의 초청을 의미함. 불신자와의 만남이나 교제는 피해야 하는 것이 아님. 불신자의 식탁에 초대받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음. 심지어 불신자가 우상을 섬기는 자일 때에도 그렇다. 바울은 이런 경우에 주어진 음식을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 권함. 양심의 문제를 거론할 필요가 없다는 것. 먹어도 될지 안 될지를 따져 물을 필요가 없음. 우상 제물로 쓰였다가 식탁에 오른 음식인지 굳이 알아볼 필요가 없음. 자기 양심, 자기 유익보다 초청하고 대접해준 사람에 대한 배려, 남의 유익이 더 중요함.
그러나 바울은 누군가 우상 제물이라고 알게 하면 먹지 말라고 권면함. 알게 하는 것은 (1) 의도적이지 않은 발설로서 단순 출처만 밝히는 것일 수 있지만, (2) 그럼에도 이것은 이미 하나의 시험이 될 수 있음.
일단 알려지면 문제가 됨. “알게 한 자”. 즉 남의 양심과 관련되기 때문. 모른다면 상관없지만, 알려진 경우의 우상 제물 섭취 문제는 신자를 판단하는 동기가 됨. 신자는 자유를 가지고 식사에 참여하지만, 불신자는 이를 두고 판단의 증거로 삼음. 신자의 자유, 자기 유익보다 불신자의 판단, 남의 유익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우상 제물을 먹지 말아야 함. 신자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자로서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음식을 받지만 도리어 불신자의 비방거리가 될 수 있음. 불신자가 비방하는 신자의 감사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바울은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라고 물음.
세 가지 결론
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31절).
바울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뿐 아니라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 권면함. 음식 문제뿐 아니라 “범사”로 나아감. 바울은 우상 제물을 먹는 일에 관련된 성도들의 행위가 하나님의 영광에 직접 관여됨을 의식함. 더 나아가 성도들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되어있다고 언급함.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할 수 없는 일이라면 당연히 포기해야 함.
2.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32-33절).
바울은 이미 8:9에서 약한 자에게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고 말했음. 이제는 헬라인과 유대인과 하나님의 교회에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고 권면함. 헬라인은 이방인을 가리키는 표현임(불신자, 27절). 그들이 기독교를 자신과 별 다를 게 없다고 오해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함. 유대인은 옛 언약에 속하여 유일신 여호와를 섬기는 자들임. 기독교가 우상에 대하여 관대한 자세를 가지고 있다고 그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함. 하나님의 교회는 신자들을 가리킴. 무엇보다 교회 안의 형제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함.
바울은 이를 위해 자신을 예로 제시함.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33a)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한다니, 우리로서는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짐. 바울은 자신이 이렇게 할 수 있는 비결을 제시함.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33b). 바울은 어째서 남의 유익,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고 자기 유익은 포기하는가?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
사도를 본받을 것. 마지막으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성도들도 자신을 본받기를 권면함.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까닭은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고 있기 때문. 바로 여기에서 신앙의 계승이 이루어짐. 신앙의 유산.
성도는 타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자세를 가져야 함. 약한 형제, 불신자, 헬라인/유대인/하나님의 교회에 거치는 자가 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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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슬턴
고린도인들이 슬로건으로 내놓았던 원론적인 준칙.
1)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10:23, 6:12)
2)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권리 또는 자유가 있다.(10:23, 6:12)
책임감 있고 사려 깊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세움을 받지 못하게 까지 하면서 자신의 자유 혹은 권리를 행사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과 같은 사람들, 선하고 의로운 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 또는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위해서 죽으셨다고 말할 때, 바울 역시 동일한 사실을 말한 것(롬 5:6-8).
제사에 사용된 고기가 다른 경로로 시장에 나온 고기와 구별되었는지의 여부는 여전히 논란이 됨.
머피 오코너는 대부분의 고기가 신전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함. 길(Gill)은 실제 사정은 해마다 달라졌을 것이라는 신중론을 펼침.
바울이 사용한 단어, 쉬네이데시스를 자의식으로 번역하든 양심으로 번역하든, 자아와 관련된 이슈가 사안을 결정하도록 해서는 안 됨. 시 24:1을 기억할 것.
형이상학적으로 말하자면, 속을 들여다보는 대신, 위를 올려다 볼 것!
식사 초대를 받을 경우, 보통 주인은 손님에게 가장 좋은 품질의 고기를 대접하려 할 것이므로, 아마 그 고기는 대개 신전에서 나온 것일 가능성이 높을 것.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통상적으로 문제될 것이 없음.
사도 바울에 따르면 일반적인 기준은 정해져 있음. 어떤 결정을 할 때, 내가 걱정돼서 확인하는 것 또는 나의 자신감에 근거한 것이어서는 안 됨. 결정은 전적으로 다른 사람과 관련된 요소에 의해 결정되어야 함.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더 자유로운 행동으로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불편하게 만들거나 폄하하는 일은 피해야 함. 자신의 까다로움이나 자유로움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처지를 먼저 고려하라는 것. 행동의 기준은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관심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
29b 왜 다른 사람의 자의식에 나의 자유가 종속되어야 하느냐?
바울이 말하는 바는 자유의 상실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을 할 수 있도록 그 자유를 합당한 방식으로 사용하라는 것. 13장에서는 이 가장 좋은 것을 다른 사람을 위한 사랑으로 더욱 확실하게 설명함.
10:31-33, 11:1
가장 중요한 긍정적인 기준 :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
가장 중요한 부정적인 기준 : 유대인, 이방인, 동료 그리스도인 중 그 어느 누구에게도 상처를 입혀서는 안 된다는 것.
두 번째 긍정적인 기준 : 모든 사람들의 모든 유익을 고려할 것. 다른 사람의 관심사와 복지에 대한 보편적인 존중의 태도를 지니라는 것.
두 번째 부정적인 기준 : 나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지 말 것.
구체적인 목표 및 최종적인 명분 :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함으로써 그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
“본”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원문에 등장하지 않음.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식으로 따라하는 자가 되라는 의미가 아님. 이 표현은 그리스도 및 사도적 삶의 방식에 대한 사도 바울의 사도적인 증거가 구체적으로 언급한 원칙에 대한 하나의 본 혹은 넓은 의미의 모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함.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고, 누구에게도 상처를 입히려 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유익을 자기 유익보다 앞세우는 모습에 있어 하나의 본과 모델이 된다는 것. 이것이 받아들일만한 모델이 되는 것은 그것이 바울의 것이어서가 아니라, 바울이 그것을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것으로, 따라서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적 증거의 일부로 인식했기 때문.
1. 타인을 위한 사랑의 부름에 응답하는 일
2. 올바른 기준에 근거하여 기독교적 판단을 내리는 것에 관하여.
과연 우리는 다른 사람과 전체의 유익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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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CNT
고전 8:9 그런즉 너희의 자유(엑수시아)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고전 8: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고전 8: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바울은 고전 8:9에서 제기된 엑수시아의 문제로 돌아감. 고린도교회의 어떤 이들은 그들의 지식이 그들에게 자신들이 보기에 적절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고 생각했음. 그들의 태도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경구. 고전 6:12에서 처음 마주했던 단언에 의해 지지를 받을 수 있었을 것.
바울은 이런 신조에 문제들이 있다고 보는데, 이런 신조는 허용되는 것에 대한 어떤 이의 개인적 이해가 옳은 것과 관심이 있는 유일한 것을 재는 유일한 잣대가 된다는 확신을 부추기기 때문.
이에 대해 바울은 두 개의 진술과 하나의 명령을 통해 논박함.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득이 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세우는 것은 아니다. 너희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최상의 유익을 위해 행하라는 것.
다른 이를 파괴할지 모르는 것은 어느 것이든 불법적인 것이 됨(8:7-13).
10:24 누구든지 자기 자신의 것을 추구하지 말라는 바울의 명령은 그들이 추구해서는 안 되는 것을 규정하지 않은 채로 남겨둠. 이기적인 것들 대신에 타인의 이익을 추구해야 함. “타인”은 약한 양심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동료 신자로 제한되지 않고, 식사 초대를 하는 불신자까지 포함함. 바울의 실천적인 조언을 지배하는 포괄적인 해석학적 원리들은 어떤 행동이 하나님께 영광을 가져올 것인가, 그리고 어떤 과정의 행동이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증거인가? 하는 것이다. 이 원리가 모든 그리스도인의 행위에 토대를 이룸. 기독교적인 사랑의 성격에서 도출되는 것.
고린도 교인들은 고기를 먹는 것을 포기할 필요가 없지만, 타인에 대한 사랑이 그들의 선택에 있어서 지배적인 요인이 되어야만 함.
어떤 식으로든 우상과 관련된 모든 음식을 피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요구였음. 시장에서 사는 음식이나 친구 집에서 나오는 모든 음식은 잠재적으로 어떤 우상숭배적인 의식에 의해 더럽혀졌기 때문. 이러한 가능성이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우상과의 과거 어떤 접촉을 가졌을 가능성을 근거로 모든 음식을 피하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 바울은 우상숭배자들과 우상의 음식으로 넘쳐나는 시장으로 가득한 세계 속에서 고린도 교인들이 어떻게 그들의 일상의 삶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해 명료하고 뚜렷한 규칙들을 세움.
그리스도께서는 주님의 자녀들을 고기 감별사로 부르지 않으셨음. 우상의 음식이 시장에서 팔리자마자 우상의 음식은 더 이상 더럽지 않음. 우상의 음식은 그냥 음식이 되는 것이며 한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 됨(롬 14:14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롬 14:19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양심을 위해 먹으라! 누구의 양심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불분명함. 구입자의 양심인가? 아니면 목격자의 양심인가?
바울이 죄라고 여기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그리스도인들이 우상숭배를 승인했다는 암시, 괜찮다는 느낌을 줄지 모르는 배경 속에서 우상 음식을 먹는 것.
그리스도인들이 종교적인 까다로움을 보여줄 필요가 없음.
알면서 우상의 음식에 참여할 때, 그리스도인은 암묵적으로 우상숭배를 용인하는 것이며, 범죄자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음식이라면, 그 음식은 허용될 수 있음. 바울은 그들이 믿지 않는 자의 가정에서 식사했다는 것 때문에, 비방하는 말들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떠돌게 될 것이라고 상상하지 않음. 바울이 의미하는 것은 “진정으로 이 음식에 대해 감사하며 우상숭배와 아무런 의도적인 연결을 가지고 있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행한 그런 행위를 누군가 왜 비방해야만 하는가?” 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가져오는 것들만 허용됨.
아프로스코포스. 다른 곳에서 사용할 때에는 하나님 앞에서 나무랄 것이 없는, 죄가 없는. 이런 의미를 갖는다. 이 명령은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님의 교회의 일원인 동료 그리스도인의 구원을 위태롭게 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8:7-13의 바울의 경고를 요약함. 동료 그리스도인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 (마 18: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건강한 두려움.
그리스도인은 잠재적 회심자들을 복음에서 돌아서도록 하는 행동들,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신앙을 저버리도록 하는 행동들. 이런 모든 행동들을 피해야만 함. 이는 단순하게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을 피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요구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와의 구원적인 관계로 이끄는 방식으로 행동해야만 함.
모든 것에서 모두를 기쁘게 하는 것 = 어떤 상황에서든지 자신의 이득,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지 않는 것.
많은 이가 구원받는 것 – 교회 공동체가 아닌 교회 안과 밖에 있는 사람들 모두를 가리킴. 이 용어는 모두를 나타내는 셈어적 표현법.
내가 그리스도를 모방하듯이 나를 모방하는 자들이 돼라.
전체 기독교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사랑과 동정을 반영해야 한다는 바울의 확신에서 오는 명령. 복음은 모든 신자의 삶에서 선포되어야만 한다. - 후커.
고린도후서 6:14-7:1에 있는 고통스러운 방문, 눈물의 편지, 그리고 지속된 권면은 사도 바울의 고전 10:23-11:1의 논증이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우상숭배와 연관된 것들에 참여하는 것을 버리도록 설득하는 데 큰 효과가 없었음을 보여줌. 엄청난 자기 희생을 요구하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대단히 복잡한 문제들은 하룻밤 사이에 해결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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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NT – 고든 피
24절
자유는 내 기쁨을 구하는 것이 아니며, 내 유익을 구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고 세워 주기 위해 애쓸 수 있는 그런 방식에서 오는 자유를 의미함. 개인의 자유를 무시하지 않고서 행동에 보다 중요한 동기를 부여하는 효과를 줌.
30절
만일 감사함으로 참여하면(26절을 의미하며 언급될 감사 기도를 예를 듦) 내가 왜 감사하는 것(감사 기도를 드림) 때문에 비방을 받겠느냐?
바울이 의도한 것은 유대인의 집에서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이기” 때문에 음식을 두고 복을 비는 앞의 설명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만일 바울이 자신의 음식에 그렇게 축복을 했다면, 어떻게 고린도 교인들 혹은 그들 중 일부가 이 문제로 그를 판단할 수 있을까? 이방인들에게는 이방인처럼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처럼 행했던 바울이다. 그는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먹었다면 도입 부분에 암시된 축복의 관점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누구에게도 비난 받을 수 없다.
31-32절
바울은 비본질적인 행동과 관련해서 질문하고 있다. 이는 신자가 자신의 유익이 아닌 이웃의 유익을 구해야 한다는 매우 중요한 원칙과 함께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을 개인의 자유를 완전히 제거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의 행동을 제어하는 것은 두 가지의 원칙에 근거한다. 첫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있다. 둘째, 누구든지 타인을 공격하면 안 된다. 따라서 첫 번째 명령은 자유라는 주제를 가지고 그것에 집중하며, 두 번째 명령은 그 사람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과 관련해 자유의 정당한 제한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첫 명령의 조건절은 먹는 예를 다시 언급하고, 마시는 것을 더해, “무엇을 하든지”라는 모든 행동까지 포함하며 확장한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한다. 신자의 행동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고 찬양이 될 수 있다.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는 것은 삶의 관점을 확장시킨다. 감사를 통해 모든 것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해야 함.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는 명령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이전 가르침에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단 한 사람에게도 상처주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물론 바울의 요지는 의도적인 행동과 관련이 있다. 신자는 먹는 것, 마시는 것, 어떤 것에든지 타인의 행동을 결정하려고 의도적으로 어떤 방식만을 고집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거치는 것은 복음 듣는 것을 가로막거나 지체 간에 이간질하는 식의 행동으로, 누군가의 감정에 상처를 주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울이 의미하는 자유는 다른 사람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님. 바울이 언급한 자유의 제한 역시 다른 사람의 양심이 행동을 통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 이와 반대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을 위해 해야 함. 즉 모두의 유익을 위해 하라는 것인데, 바울의 관점에서 유익은 곧 사람들이 구원을 얻는 것임.
33절
내가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한다.
바울이 지적한 것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얻기 위해 비위를 맞추려 했던 순회 철학자나 종교적인 허풍쟁이들에게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것. 그런 행동들이다. 바울의 관심은 그가 스스로 사람들을 기쁘게 한다는 데 있지 않고 그의 행동으로 그들이 구원 얻는 것을 가로막지 않겠다는 데 있다.
마지막 명령문은 안타깝게도 신약의 장 구분의 결과로 어려움을 겪어 왔음. 표현과 주장으로 보아 10:23-33을 끝맺는 부분임. 바울은 자신을 본보기로 호소하는 것만으로 부족했다. 여기서 강조점은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본에 있음. 십자가를 통해 바울이 갖는 주된 관심사는 그리스도의 희생임. 지혜와 지식에 근거를 둔 고린도 교인들의 행동의 진정한 해결책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임.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현실에서 “상처받는” 사람들은 불신자나 새 신자가 아니라 아주 오랫동안 교회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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