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와 찌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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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고전 4:7-16
제목 : 쓰레기와 찌꺼기
사람들은 연말이 다가오면 한해를 어떻게 보냈는지 점검합니다. 올 한해 우리 집 자산은 얼마나 성장했는지, 올 한해 우리 가족의 건강은 어떠한지, 부모님의 건강, 본인과 배우자의 건강, 자녀들의 건강을 돌아봅니다. 이뿐만 아니라 자녀들 또는 손주들의 학업 성취도를 살펴보면서 2023년도에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또 작년에 비해서 얼마나 성장해야 할지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마음가짐을 다잡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삶의 점검 방식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을 빠뜨려선 안 됩니다. 가정의 경제성장률이나 건강의 변화 이런 부분들만 신경 쓸 것이 아니라, 본인의 신앙과 가족 구성원들의 신앙성장률을 돌아봐야만 합니다. 일종의 루틴처럼 규칙적으로 신앙생활한다고 해서 신앙 상태가 항상 건강하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삼시 세끼 밥 잘 챙겨먹는다고 해서 질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죠.
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신앙을 돌아볼 수 있을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뚜렷한 목표를 제시합니다. 빌립보서 3장 14절 말씀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에게 분명한 목표가 제시됩니다. 빌립보서 3장 1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아멘. (out) 푯대를 향하여,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는 인생. 이것이 바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7절과 8절에서 그리스도인의 인생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out) 그리스도인의 인생은 어떤 인생입니까? 하나님 나라에 가기까지 선한 싸움을 끊임없이 감당하는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인생의 달려갈 길을 완주하는 것, 세상의 수많은 유혹과 시험들 가운데에서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지켜내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인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인생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때, 뭔가 확실하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푯대를 향하여, 부름의 상을 향하여 달려가는 삶이란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하면서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선한 싸움을 싸워내고 달려갈 길을 온전히 마치는 삶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인생일까요? 우리의 마음이 영적으로 뜨겁게 달궈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교리적으로 박식하고, 성경 말씀을 줄줄 외우는 지식적인 측면에서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마태복음 16장 24절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인생을 한마디로 정의하십니다. (in)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out) 그리스도인의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인생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만 보면, 그리스도인의 인생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괜찮아 보이고 멋있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진다. 얼마나 근사해 보입니까? 예수님처럼 나도 십자가를 진다. 엄청나죠.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을 따라서 십자가를 지는 행위가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인지, 또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마음과 행동을 의미하는 것인지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올 한해를 돌아보면서 우리의 신앙생활과 믿음을 점검할 때, 어떤 지표를 통해 점검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인 4장 1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아멘.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명령합니다. (out)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신앙생활을 점검할 수 있는 힌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도 바울을 얼마나 많이 닮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굉장히 주관적인 말씀처럼 보일 수 있는데요. 고린도전서 4장 16절 말씀만 놓고 보면 주관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7절부터 13절까지의 말씀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사도 바울을 본받는 것이 어떠한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본문 말씀을 깊이 상고하면서 우리의 신앙을 함께 돌아보는 시간 되기를 소원합니다.
먼저 고린도전서 4장 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out)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사도 바울이 무슨 이유로 이렇게 강한 어조로 책망하는 것인지, 고린도 교회의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에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던 시대, 다시 말해 사도 시대에 고린도는 로마 자유민, 토착 그리스인, 도처에서 온 이주민들로 이루어진 혼합된 인종 사회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한민족을 이루고 사는 우리 입장에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사회이지만, 참 희한하게도 고린도는 로마 제국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러 인종들이 섞여 살고 있었지만, 그들 모두가 자신들을 로마 사람으로 느꼈습니다. 모든 영역에 있어서 로마의 문화적인 가치들과 정체성에 영향을 받았던 것이죠. 복음이 고린도 지역에 전해지기도 전에 이러한 로마 사회가 이미 형성되었던 겁니다.
자 그래서, 고린도 주민들은 로마 사회에서 자신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서 온 힘을 다했다고 합니다. 이 당시에 어떻게 지위를 향상시킬 수 있는가 하면, 권력 있는 사람들에게 후원을 받는다거나, 사회에서 영향력이 있는 친구들을 다양하게 사귄다거나, 정치적인 적대감을 형성해서 상대방을 로마 사회에서 축출시킨다거나 하는 다양한 수단과 방법들을 가리지 않고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고린도 사회는 경쟁적이면서도 개인주의가 만연한 사회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자본주의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죠.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어떤 사람들이 주를 이루었을까요? 일단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개척했다는 점에서 고린도 교회를 좋게 생각하게 되는데요. 앞서 살펴본 고린도 지역의 배경을 감안해 보면, 고린도 교회를 무조건 좋게 생각할 수만은 없습니다.
복음이 고린도 지역에 처음으로 전해졌을 때 복음을 접한 사람들이 누구였겠습니까? 당연히 고린도 지역에 체류하거나 거주하는 사람들이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라고 했습니까? 고린도 지역의 로마 사회에서 우월한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서 경쟁적이면서도 이기적인 성취욕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이기적인 성취욕을 가진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타인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만족에 치우친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 중 일부가 고린도 교회의 성도로서 신앙생활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복음을 접하고 예수님을 만나서 순식간에 아름답게 변하면 참 좋았겠습니다만, 안타깝게도 한순간에 이기적인 성취욕을 버리고, 자기를 부인하는 신앙을 갖게 된 것이 아니라, 변하는 과정 가운데 고린도 교회에서 다양한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고린도전서를 읽어보면 분쟁이나 음행, 송사, 우상 제물을 먹는 문제, 은사 문제 등 고린도 교회에 다양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 문제 중에 오늘 본문 말씀인 고린도전서 4장 7절 말씀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고린도 교회 성도들 가운데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고 본인의 물질을 자랑하는 성도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들, 영향력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고린도 교회에 들어와서 힘을 과시하거나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깔보거나 하는 일들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다시 말해 로마 사회에 뿌리 깊게 스며들어 있는 사회적인 계급과 지위의 장벽. 이런 것들을 고스란히 교회에 가지고 들어온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기독교 공동체는 지위를 놓고 경쟁하는 또 하나의 사회처럼 인식되었을 것입니다. 기득권을 쥐고, 누가 더 영향력을 끼치느냐 끼치지 못하느냐. 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시덥지 않은 것을 가지고 문제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지식을 가지고 다시 본문 말씀으로 돌아와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한 상태에서 고린도 성도들에게 세 가지의 질문을 던집니다. 먼저 첫 번째는, (in)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갈등의 뿌리가 사회적으로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자 하는 인간적인 욕구, 사회적인 욕구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고린도 교인들의 정체성을 지적합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도대체 너의 내면의 특별한 점이 무엇이냐. 도대체 누가 너에게 우월성을 부여하느냐.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을 특별하게 만드신 것은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 귀하지 않은 생명은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특별하고 소중합니다. (out)
그러나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면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구원하신 자녀라는 사실. 이 사실을 배제한 채로 자기 자신에게 심취해선 안 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라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두 번째는 (in)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하는 질문입니다. 첫 번째 질문과 마찬가지로 문장의 형태는 질문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사도 바울이 몰라서 물어보는 질문이 아니죠. 이런 질문을 보통 수사의문문이라고 부르는데요. 사도 바울의 두 번째 질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 그들의 전재산이 본래 그들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담고 있습니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은 많지만 실상 고린도 교인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들의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입니다. 가지고 있으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받았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인생을 살아가야 할까요? 이는 세 번째 질문으로 연결됩니다. (in)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받은 것을 누리고 있으면서 왜 받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느냐. 도대체 왜 자기 힘으로 이룬 것처럼 포장해서 자랑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세 가지 질문에 따르면, 고린도 성도들은 애초에 소유물에 관해서는 자랑할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은 많지만, 원래부터 내 것이 아니라면,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무엇을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성경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인은 소유에 관해서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out) 이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능력과 스펙, 직업, 배경, 은사와 같이, 개인의 존재를 둘러싼 모든 것에 있어서 타인에게 내세울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받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칼빈 선생님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in) “자랑할만한 아무런 정당성 없이 자랑하는 것보다 더 무익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인간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우월성을 주장할 근거를 갖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신을 높은 수준에 두는 것은 어리석고 주제넘는 일이다.” (out)
칼빈 선생님의 설명대로 인간은 어느 누구도 자랑할만한 근거를 갖지 못합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 일부는 하나님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고 자신의 소유와 권력과 영향력을 마음껏 휘두르는 잘못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고린도 성도들의 잘못된 신앙생활을 지적함과 동시에 마치 영적인 의사인 것처럼 고린도 성도들의 영적인 상태를 진단합니다. 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상태가 어떻다는 것입니까? 이미 배가 부른 상태, 이미 부유한 상태, 사도들의 가르침, 올바르고 건강한, 성경적인 진리가 없이 신앙생활하고 있는 상태라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의 이러한 잘못된 영적인 상태를 있는 그대로, 여과 없이 지적합니다. 사도 바울의 지적은 10절에서도 이어지는데요. 1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10절 말씀에는 대조와 역설이 담겨 있습니다. 대조적인 내용이라는 것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지만, 역설이 담긴 내용은 이해하기 어려워서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in)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다. 이게 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문자적으로 생각해 보면 뭔가 이상합니다. 앞서 살펴본 내용에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잘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다고 말하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로운데 왜 질책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은 역설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볼 때 고린도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구원의 출발점인 중생부터 성화의 끝까지. 성화의 전체 과정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상태로 포괄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요. 이러한 점에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넓은 의미에서 볼 때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표현 자체로 만족해선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풍요로움으로 만족함과 동시에 자기 자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다,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시니 나는 지금 잘하고 있다는 식으로 착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인의 영적인 질병을 돌아보지 않고, 또 본인의 신앙생활을 돌아보지 않고 그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자신은 충만하다, 자유롭다. 이런 식으로 착각하고 스스로 만족해선 안 되는 것입니다. (out)
자 그리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로마 사회에서 세상 사람들이 사용하는 온갖 편법들을 분별하지 않고 사용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상위 계층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 일부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다. 라는 역설이 담긴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그들이 사용하는 지혜가 온전한 지혜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사도들은 어떻습니까?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습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바보 멍청이같이 손해를 감수합니다. 고생을 자처합니다. 고난을 피하지도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11절과 12절 말씀에 따르면 사도들이 그리스도 때문에 어떤 일들을 만납니까? 고린도 성도들은 배부르고 풍요롭지만 사도들은 굶주립니다. 목이 마른 상태로 다닙니다. 돈이 없어서 헐벗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노예처럼 매를 맞습니다. 복음 전도자이기 때문에 나그네처럼, 이방인처럼 머물 곳이 없어서 방랑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기진맥진할 정도로 노동을 감당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모욕당하고 박해받는다고 하더라도 축복과 인내와 권면으로 반응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 말씀을 통해 우리를 그리스도 때문에 감내해야 하는 어리석은 삶을 소개하고, 또 우리를 어리석은 삶으로 초대합니다. 그렇다면 어리석은 삶이란 어떤 삶일까요. 사도 바울은 이 내용을 간단하게 네 가지로 표현하는데요.
먼저 첫 번째는 끄트머리에 놓인 듯한 인생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9절 상반절 말씀 보세요. (in)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만 죽이기로 작정된 자처럼 느꼈다고 말하지 않고 사도 집단 전체를 가리켜 “우리”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삶을 사는 건 사도 바울이니까 가능하지. 이런 식으로 사도 바울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 집단 전체가 마치 하나님께서 죽이기로 작정하신 사람들처럼 어려운 상황 가운데 놓여졌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out)
자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을 죽이기로 작정된 자들처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누리고 있는 것들을 사도들이 똑같이 누릴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9절 말씀에 등장하는 이 끄트머리라는 단어는 사도들의 사회적인 지위를 의미하는데요.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세상에서 제일 끝자리에 앉히셨다는 겁니다. 속된 말로 가장 하찮고 후진 자리에 두셨다는 것이죠. 그것도 곱게 앉히신 것이 아니라 죽음을 직면한 상태로 끝자리에 앉히셨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 내용만 봐도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끝자리에 앉은 삶으로 초대하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속시원하게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죠.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삶이란 무엇인지 끄트머리라는 이미지를 점점 더 강화시킵니다. 9절 하반절 말씀 보세요. (in)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여기서도 “우리”라고 표현합니다. 나 바울이 아니라 사도 그룹 전체인 우리를 말하는데요. 우리가 어떻게 되었다는 겁니까? 세계 곧 천사와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는 겁니다. 여기서 구경거리라는 단어는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에 포로로 잡혀가는 모습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단어인데요. 전쟁 포로들이 어떻게 잡혀갑니까? 밧줄로 꽁꽁 묶인 채로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씻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한 흉측한 몰골로 잡혀 오지 않습니까? 그렇게 끌려와서 포로로 지내다가 효용 가치가 떨어지면 사형당하기 일쑤인데, 이렇게 비참한 전쟁 포로의 모습, 생사여탈권을 적군에게 맡긴 채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사도들의 인생이며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 때문에 감내해야 하는 어리석은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은 우리를 세상의 구경거리와 같은 삶으로 초대합니다.
이어서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삶이란 더러운 것과 찌꺼기로 표현됩니다. 고린도전서 4장 13절 하반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오늘 본문 말씀을 글의 구조로 나눠보면, 4장 16절, 그러므로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라는 명령이 핵심인데, 이 명령의 주된 내용은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삶을 살아가는 사도들을 닮으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어리석은 삶을 네 가지로 표현하자면, 끄트머리, 구경거리, 그리고 방금 읽은 13절 말씀의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이렇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먼저 세상의 더러운 것이란, 더러운 잔존물이나 찌꺼기, 더러운 쓰레기나 배설물 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만물의 찌꺼기라는 말은 쓰레기, 오물, 찌꺼기 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신약학자인 티슬턴에 따르면, 만물의 찌꺼기가 모든 사람의 신발에서 나오는 먼지나 찌꺼기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의 쓰레기와 만물의 찌꺼기라는 단어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세상의 온갖 더러운 것, 쓰레기, 배설물, 오물과 만물의 찌꺼기, 이런 존재가 누구라는 겁니까? 사도들이 그런 존재가 되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부르심 받아서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 사도들이 어떤 존재가 되었다는 겁니까? 세상의 쓰레기, 찌꺼기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인생에 대한 우리의 기대치와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다운 인생의 괴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보통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으면 어떤 기대감을 품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삶에 역사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할 때 하나님께서 도와주셨으면 하는 마음을 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역할을 도우미 역할 정도로 제한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4장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어떤 역할을 해주신다, 또는 어떻게 어떻게 해주실 것이다. 이런 내용은 일절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와 우리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결론은 사도 그룹이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와 같은 존재가 되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 특별히 부르심 받은 사도들만 감당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지 않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속된 말로 사도 바울은 지금 고린도 성도들과 우리에게 똥물로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황금으로 도배된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는 사람에게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와 같은 존재로 살아갈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님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지, 그들의 내면 깊이 박혀있는 성취욕과 이기심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그들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밝혀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부풀어 오르는 허영심이라는 풍선을 단번에 터뜨린 것이죠. 여기서 우리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책망받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남의 일처럼 여겨선 안 됩니다. 21세기 대한민국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물질에 대한 관념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과연 내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인가. 과연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셨는가. 과연 나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셨다는 믿음으로, 청지기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이러한 부분들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는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대조와 역설을 통해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잘못된 영적인 상태를 지적하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분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다는 말씀을 통해 사도 바울을 닮아가는 삶이 어떠한 것인지 알려주었죠. 우리는 여기서 네 가지의 단어를 살펴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죽음에 직면한 채로 세상의 끝자리에 두셨고, 모든 사람들과 천사들에게 구경거리가 되게 만드셨으며,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처럼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사도시대 때 하나님을 가장 잘 믿고 사랑했던 사람은 당연히 사도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도들을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처럼 여겨지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이 세상의 끝자리에 두셨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불평불만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두신 그 자리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요청합니다.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와 같은 나를 본받으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님들, 올 한해를 돌아보시면서 과연 나는 나 스스로를 얼마나 더러운 존재로 생각하는가? 과연 나는 찌꺼기와도 같은 존재인가. 이런 부분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쓰레기와 찌꺼기와 같다는 생각을 얼마나 가지고 살아가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존재가 쓰레기와 같다면, 만물의 찌꺼기와 같다면 누군가에게 모욕을 당하거나 핍박을 당하거나 비방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화가 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상황에서 화가 난다면,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면, 그것은 자신이 쓰레기와 찌꺼기가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이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기 위해서 원고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마음이 참 괴로웠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목사이지만, 아직 완전한 쓰레기와 찌꺼기의 마음을 품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 목회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리스도 때문에 지속적으로 겪게 될 손실들을 기쁨으로 감당하기를 소원하지만, 여전히 부족한 점도 많고 아직도 제 안에 있는 화를 완벽하게 조절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제가 아직 쓰레기와 찌꺼기가 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쓰레기와 찌꺼기가 아니기 때문에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 역시 이 말씀을 전하면서 더 낮은 마음을 품고 더 낮은 자세로 섬기기로 결단하며 나아갑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님들, 올 한해를 돌아보시면서, 내년에는 기필코 쓰레기와 찌꺼기와 같이 낮아진 마음과 자세로 하나님과 공동체를 섬기며, 주님께 삶으로 영광 돌리시는 모든 주님의 자녀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들이 되어라 아멘.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고린도전서 4장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한 삶인지, 사도 바울을 닮아가는 인생이란 어떤 인생인지 깨닫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겪게 될 손실들을 기쁨으로 감당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지체들 앞에서 사도들처럼 쓰레기와 찌꺼기와 같은 존재로 우리 자신을 인식하기를 원하오니,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모두에게 성령충만함을 허락하여 주시어 우리 안의 죄악된 본성을 지혜롭게 다스리게 하여 주시고, 더욱더 겸손한 자세와 사랑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며 복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 고린도 교회의 배경
1) 바울 시대에 고린도는 로마 자유민, 토착 그리스인, 도처에서 온 이주민들로 이루어진 혼합된 인종 사회였음.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고린도는 로마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았으며, 고린도 주민은 자신들을 로마인으로 느꼈다고 함. 모든 영역에 로마의 문화적인 가치들과 정체성에 영향을 받았던 것.
고린도 주민들은 로마 사회에서 자신의 지위를 향상 시키는 것에 몰두했음. 성공을 위해서 권력가들의 후원을 받는 것과 영향력있는 친구들을 사귀는 일, 고객을 만들기 위해 돈을 쓰는 일, 정치적인 적대감을 발휘해서 반대자들을 추방하는 일 등.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 수단가 방법을 가리지 않았음. 고린도 교회를 둘러싼 문제들을 이해하려면, 고린도의 배경을 무시해선 안 됨. 십자가의 메시지에 대립하는 가치들이 교회로 침투해 들어왔으며, 무자비함과 자력 승진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권력이야 말로 참된 가치로 여겨지던 시대였음. 고린도 사회는 경쟁적임 개인주의가 만연한 사회였음. 사회적으로 우쭐대고 자만심이 강한 개인들이 고린도교회를 움켜쥐고 흔들었을 것. 이들은 자신의 지위, 영향력 등을 나타내는 그들의 힘을 과시했으며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깔보았음. 이들은 로마 세계에 스며들어 있는 사회적인 계급과 지위의 장벽을 보존하고 싶어 했음. 어떤 이들에게 기독교 공동체는 사회적인 규범에 따라 지위를 놓고 경쟁하는 또 하나의 영역이 되었던 것.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지도적 인물들의 자기 과장을 허물고자 하며, 바울은 사도들을 사회의 찌꺼기와 구별될 수 없는 사람들로 규정함. 고전 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 고린도 성도들은 이방인 회심자들, 유대적인 요소에 치우쳐 있는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 우상들과 민속 종교를 숭배했던 사람들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음. 고린도 성도들은 대체적으로 야심이 많고 경쟁심이 강한 편이었음. 이들은 고린도 지역의 사업과 무역, 사회적 지위 및 경제적 권력 등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성공을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음. 사업가들은 종종 관습과 질서를 무시했음. 당장 성공이 보장되는 일이 아니라면 편법도 마음대로 활용했음.
3) 고린도 지역에는 성공이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승리주의적인 형태의 종교가 성행하고 있었음. 어떻게 보면 기복주의적인 신앙과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음. 이런 지역에서 낮아지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일이란 말할 수 없이 부끄럽고 치욕스러우며 어리석은 일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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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린도 성도들의 특징을 요약하자면,
1) 우월한 지위 확보를 위한 경쟁적, 이기적 성취욕
2) 타인을 고려하지 않는 자기만족적 태도와 자기만의 자유를 누리려는 경향
3) 사랑이나 타인을 위한 배려 등과 같이 일상적인 삶을 위한 기본적인 은사보다는 특별한 은사를 높이 취급하는 경향이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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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해 주느냐? 네가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서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냐? 받은 것이라면, 왜 받지 않은 것처럼 자랑하느냐?
고린도 교인들의 갈등의 뿌리가 타인들로부터 자신을 구분하는, 그리고 상상된 사회적 사다리의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자 하는 인간적 열망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우쭐해선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한다. 첫 번째 질문.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이 질문은 부정적으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주제넘는 모습을 지적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도대체 누가 너희 안에서 특별한 것을 보는가? 누가 너희에게 어떤 우위성을 부여하는가?” 반대로 이 질문은 긍정적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누가 너희를 그렇게 특별하게 만들었는가?” 하나님께서 이들을 특별하게 만드셨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을 특별하게 만드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그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숨겨진 신비들을 드러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누구도 자랑할 자격이 없으므로, 자랑해선 안 된다.
두 번째 질문.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이 질문은 고린도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 중에 어느 것도 본래 그들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담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오만하거나 자랑할 수 없다. 우리는 은혜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것에 대해 자랑할 수 없다.
세 번째 질문은 고린도 교인들을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이끈다.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고린도 교인들은 자랑해서는 안 된다. 애초에 그들에게 자랑할 것이란 단 하나도 없다. 고린도 교인들이 우쭐해하는 것은, 하나님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모든 것을 주신 분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칼빈: 자랑할만한 아무런 정당성 없이 자랑하는 것보다 더 무익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인간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우월성을 주장할 근거를 갖지 못한다. 그리므로 누구든지 자신을 높은 수준에 두는 것은 어리석고 주제넘는 일이다.
4:8 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 너희는 이미 배불렀고, 이미 부유해졌으며, 우리 없이 다스렸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다스리기 위하여, 너희가 참으로 왕이 되었으면 좋겠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의 잘못된 자랑을 무너뜨린다. 사도들은 십자가의 지혜를 따라서 산다. 고린도 성도들은 이 세대의 지혜를 들이마시며 왕인 것처럼 행동한다.
배부르게 되었다는 것은 전통적으로 교만과 연결되었으며, 방종과 연결되었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이 지혜롭다고 생각하며, 지혜 있는 자는 스토아 사상에서 왕과 같이 여겨졌다.
어떤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이 이미 왕이 되었으며 통치를 떠맡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없이”라는 말은 고린도 교인들이 사도들로 하여금 통치에 참여하도록 하지 않은 채로 통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구절은 4:9-13에 있는 자신을 낮춘 사도들과 고린도 교회의 교만한 자들의 대조를 위한 포석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다른 이들보다 더 높아지고 강해지도록 유발하는 그들의 세상적 오만을 바로잡으려 한다. 고린도 교인들의 기본적인 큰 잘못은 이미 자신들을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완벽하다고 보는 것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십자가에 따라서 지혜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고린도 교인들은 왕노릇하지 못한다. 또한 고린도 교인들은 지혜에 대한 세상의 기준에 따라서 자신들을 평가함으로써 자신들이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미”라는 말은 문맥에서 볼 때, “너무 빨리” “너무 쉽게” 배부르고 부유하고 왕노릇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성숙에 이르는 유일한 길로서 고난이라는 길고 고된 길을 제시함으로써 이러한 오해를 바로잡는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광에 이르는 빠른 길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우리를 데려가는 느리고도 험난한 길이다.
4:9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 내가 생각하기에, 하나님께서 사도인 우리를 마치 죽이기로 작정된 자들처럼 맨 마지막에 두셨으니, 우리는 세상, 곧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
“사도인 우리” 바울은 자신의 개인적 존재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사도들의 존재를 말함. 바울은 사도들의 고난을 하나님께 칭찬받을 만한 삶으로 표현함.
하나님은 사도들을 죽이기로 작정된 자들로서 세상에 제시하심.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이 써야 할 왕관을 주시기는커녕, 사도들이 그리스도처럼 고난을 당해야만 하며, 비참하게 가난한 자들과 구분될 수 없어야 한다고 정하셨음. 행 9:16, 마 5:11, 눅 6:22. 따라서 끄트머리 라는 것은 사도들의 사회적인 지위를 가리킴. “죽이기로 작정된”과 “세계에 대한 구경거리”는 검투사의 싸움들에서 오거나, 전쟁 죄수들, 포로들이 줄을 지어 로마 시를 통과해 끌려가 결국 사형을 당했던 사건들에서 비롯된 이미지에 의존하고 있는지도 모름. 이 섬뜩한 극장의 피에 굶주린 구경꾼들로서의 세계, 천사들, 그리고 사람은 사도들의 고난의 우주적인 의미를 강조함.
4: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지만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슬기롭고, 우리는 약하지만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지만 우리는 비천하다.
사도들과 고린도 교인들의 세 가지 대조
1)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다.
하나님의 미련함 vs 세상의 미련한 지혜
2) 우리는 약하지만 너희는 강하다.
하나님의 약함 vs 이 세상의 강함
3) 우리는 비천하지만 너희는 존귀하다.
- 비천함 vs 존귀함 (고전 1:26-28)
고린도 교인들이 지혜있고 강하고 존귀한 자들이라면, 고린도 교인들은 세상의 기준에 아부를 떨고 그 기준을 버리거나 떨쳐내지 못한 것임에 틀림없음. 이는 고린도 교인들이 정말로 그리스도인인지 의문을 갖게 함.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음. 고린도 교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있음.
4:11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는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를 맞으며 정처 없이 다니고,
4: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 수고하며 우리 손으로 일한다. 욕을 먹으면 도리어 축복하고, 박해를 받으면 참고,
여섯 가지 고난 목록과 학대에 대한 바울의 세 가지 반응. 학대 당하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보여주는 결론의 틀을 형성함.
지금은 영광의 때가 아닌 고난의 때임. 바울은 사도들을 학대 받는 이방인과 아무것도 갖지 못한 자들에 비유함. 사도들의 배고픔과 목마름은 고린도 교인들의 배부름과 대조됨. 매맞음은 노예처럼 두드려 맞는 것을 가리킴. 정처 없다는 것은 이들이 방랑자들이라는 것을 보여줌. 또한 노동이라는 단어는 온몸의 힘이 다 빠질 정도의 노동을 함의함.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비방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축복과 인내와 권면으로 반응함(롬 12:14; 벧전 2:23; 3:9, 15-16). 그들도 주님처럼 사도들은 경멸의 대상들이다. 그리고 바울은 사도들에 대한 세상의 의견을 요약하는, 거의 동의어에 가까운 두 개의 욕설을 지닌 목록으로 결론을 내림.
4: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비방을 당하면 좋은 말로 응답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쓰레기처럼 되었고, 만물의 찌꺼기처럼 되었다.
세상의 더러운 것 - περικάθαρμα는 청소에 의해서 제거된 것, 더러운 잔존물이나 찌꺼기를 가리킴. 더러운 물건, 쓰레기, 배설물, 오물.
만물의 찌꺼기-περίψημα는 어떤 것을 문질렀을 때 떨어져 나오는 부스러기들을 가리킴. (BDAG 쓰레기, 오물, 찌꺼기) 티슬턴은 이 단어를 모든 사람의 신발에서 털려 나온 찌꺼기들이라고 번역함.
4:14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 내가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하듯 훈계하려는 것이다.
바울이 이런 편지를 쓰는 목적은, 고린도 교인들의 삶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서 오는 자존감을 그들 안에 심어주기 위함임. 이러한 영적인 건강한 자존감은 세상이 수여하는 변덕스럽고 변변찮은 가치들과 욕망들에 대한 갈망을 뿌리채 뽑을 수 있음.
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에게 만 명의 가정 교사가 있더라도 아버지는 많지 않으니, 내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으로 너희를 낳았다.
스승들은 상위 신분에 속한 사람들에 의해서 그들의 자녀들의 생활과 도덕을 감독할 의무를 맡은 믿을 만한 종들이었음. 이 종은 아이를 학교에 데려갔다가 다시 집으로 데려왔으며, 이 종에게는 아이를 보호하고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하는 의무가 주어졌음. 이러한 의무를 감당하기 위해서 주인의 자녀를 엄격하게 다스렸음. 수치스러운 방법으로 야단치거나 회초리를 들었음.
그러나 자녀를 사랑하는 아버지는 권면을 통해서 금지된 행위를 건전한 방식을 사용해서 자녀로 하여금 싫어하게 만듦.
4: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들이 되어라.
고린도 교인들은 높은 지위에 대한 그들의 갈망을 포기하고 바울이 보여주는 낮아짐을 받아들여야만 함. 고린도 교인들은 그리스도 때문에 약하고 비천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을 환영해야 함. 학대를 축복으로, 비방을 화해로 갚아야 하며, 박해를 인내해야 함. 그들은 그들의 인격과 소유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이자 선물인 것을 기억해야 하며, 그들이 본래적으로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함. 그들은 하나님의 밭에서 함께 수고할 수 있도록 동역자들에 대한 모든 원망과 경쟁심을 제거해야 함. 스스로 지혜롭거나 엘리트인척 행동하는 것에 저항해야 하며, 하나님의 능력에 항상 의지해야 함. 궁극적인 목적은 바울과 같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다.(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바울의 행위가 복음에 일치하는 한에서 바울을 본받아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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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린도전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7절 고린도 교회에 대한 책망. 세 가지 질문.
1) 누가 너를...구별하였느냐? (7a)
고린도교회가 뛰어난 이유는 그들 자신에게서 찾을 수 없다. 그들이 뛰어나게 구별된 이유는 오직 하나님에게서 찾을 수 있다.
-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의 갈등의 뿌리는 타인들로부터 자신을 구분하는 것에서 비롯되었음. 또한 사회적인 성공과 높은 위치에 오르고자 하는 인간적인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음. 바울은 이러한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들에 대한 부풀려진 생각에 대해 구멍을 냄. 마치 풍선처럼 잔뜩 부풀어오른 것을 단번에 터뜨리는 것. 어떻게? 두 가지 질문을 통해. 첫 번째 질문, 누가? 두 번째 질문,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냐?
첫 번째 질문은 부정적인 뉘앙스로 해석하면, “도대체 누가 너희 안에서 특별한 것을 보는가? 누가 너희에게 어떤 우월성을 부여하는가? 누가 너희를 그렇게 특별하게 만들었는가?” 이렇게 비꼬는 식의 질책이 된다.
2) 고린도 교회의 소유에 관해 묻는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7b)
고린도 교회가 소유한 것 중에 하나님을 통해 받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음. 다시 말해 그 어떠한 것도 본래 고린도 성도들의 명의로 된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가지고 있으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님.
3)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자랑에 관해 묻는다.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서 받았다면 자랑할 게 하나도 없다”
본격적으로 고린도 교회를 책망하는 바울은 우선 고린도 교회의 모습을 설명한다. “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8a)
이어서 바울은 사역자들의 모습을 설명함. “내가 생각하건대”(9a) 사역자들의 모습은 하나님에 의해 결정된 것임.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 두셨다”(9b)
하나님은 사도들의 모습의 원인이시다. 성도들이 왕 노릇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게, 사역자들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가장 비천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사역자들은 “끄트머리”가 되었고 “죽이기로 작정한 자들 같이” 되었다. 사도들은 끝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며, 죽음을 직면한 사람들임.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9c) 사역자들은 마치 관객들이 모여 배우들의 연기를 구경하는 “극장”처럼 되어버리고 말았음.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과 사역자들을 세 가지로 비교함.
(미련/지혜, 약함/강함, 존귀함/비천함)
바울이 여기서 비교하는 것은 형용사뿐 아니라 전치사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디아 크리스톤),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엔 크리스토)
-> 무엇이 문제인가? 고린도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음. 그리스도 안에는 구원의 시작부터 구원의 완성까지 지속되는 상태임. 그럼에도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의식은 종종 걸림돌이 됨.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풍요로 만족하고 말기 때문.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만끽하는 자유가 음행까지 정당화하는 문제를 일으킴.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함.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또 있음. 그것은 “그리스도 때문에”임. 그리스도 때문에 발생하는 것은 무엇임? “잃는 것”이 발생함.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유익과 함께 그리스도 때문에 잃는 손해가 발생함.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유익을 얻고 다른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 때문에 잃는 손해가 발생함. 바울은 그리스도 때문에 입은 손해를 자세하게 열거함. 11-12a절: 주림, 목마름, 헐벗음, 매 맞음, 정처가 없음, 수고하여 자기 손으로 일함.
그런데 여기에 역설이 있음. 바울은 모욕을 당하지만 축복함. 핍박을 당하지만 참음. 비방을 당하지만 권면함.(12b-13a) 바울은 세상의 더러운 것(περικάθαρμα, 더러운 물건, 쓰레기, 배설물, 오물)과 만물의 찌꺼기(περίψημα, 쓰레기-오물-찌꺼기) 같이 되었다고 고백함.(13b) 내 실존이 겨우 더러운 것이라면, 겨우 찌꺼기라면 모욕을 당하거나 핍박을 당하거나 비방을 당한다고 해서 화날 것이 없다. 바로 이것이 바울의 삶에 임하는 자세임.
바울이 이러한 내용을 길게 서술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부끄럽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권하기 위함임. 성도를 좌절에 빠뜨리지 않고 세우는 데 목적이 있음. 바울의 관심은 책망으로 인해 그들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건설임.
바울이 성도를 세우려는 까닭은 “내 자녀같이” 생각하기 때문이며, 성도에게 자녀 같이 권하는 이유는 “스승”이 아니라 “아버지”이기 때문. 성도들의 진정한 스승이 되는 것만 해도 정말 귀한 일이지만, 아버지가 되는 것은 더욱 귀한 일임.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않기 때문.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의 아버지라고 주장함.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낳았기 때문. 여기에 스승과 아버지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음. 스승은 가르치는 자이지만 아버지는 낳고 기르는 자이다. 생명의 관계는 지식의 관계를 넘어섬. 바울은 성도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낳았음.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 관계의 울타리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건강한 생명적인 관계가 형성됨. 둘째, 바울은 성도를 복음으로 낳았음. 복음은 생명 관계를 위한 도구임. 복음으로 맺어질 때 전도자와 신자는 복된 생명적인 관계를 이룸.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는 본받는 것을 권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