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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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눅 4:22-30
제목 :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누가복음 4장 16절부터 30절까지의 말씀은 하나의 긴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3주 전 수요기도회에서 앞부분 내용을 다루었는데요. 단락이 길어서 지난번에 다루지 못한 나머지 내용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지난번에 나누었던 내용을 간단하게 되새겨 보고 이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공적인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실 때, 가장 먼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는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인격과 함께 이 땅에 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 대신에 하나의 긴 단락이 등장합니다.
이 단락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 대신에, 구약성경 레위기에 등장하는 희년 규례에 대해 말씀합니다. 여기서 희년 제도란 이스라엘 국민들과 이스라엘 영토에만 적용되는 국내법입니다. 이 희년이라는 제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유익을 가져다 줍니까?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땅을 팔거나, 노예로 팔려 갔을 때 50년에 한번씩 오는 희년이 되면 전국에 뿔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모든 사람들이 자유로운 신분을 얻게 됩니다. 가난하고 힘없고 연약한 사람들에게 진정한 해방과 자유를 안겨주는 규례가 바로 희년 규례이죠.
그런데 이 희년 규례가 이스라엘에서 시행된 적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기억 못하실 줄 알았는데, 네 감사합니다. 적어도 성경에는 희년에 관한 역사적인 기록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이스라엘 전국에 희년을 선포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이죠. 만약 50년마다 희년이 선포된다면, 돈이 많은 사람에게도 문제가 생기고, 돈이 없는 사람에게도 문제가 생깁니다. 돈이 많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희년이 올 것을 미리 계산해가면서, 땅에 대한 가치를 재평가할 필요가 생깁니다. 반대로 돈이 없는 사람의 입장에서 가정해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몇 년만 버티면, 뭐 한 5년, 10년만 버티면 희년이야. 이러면 빚지고 살아도 큰 문제 없지 않겠습니까? 그냥 이자만 내면서 버티다가 희년이 오면 한방에 자동으로 원금 상환되니까요. 그러니 버티기 작전에 들어가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자와 원금을 매달 조금씩 조금씩 갚을 필요가 없는 겁니다. 어차피 몇 년만 버티면 희년이 오는데 뭐하러 원금을 갚겠습니까.
자, 이런 식으로 상상해보면, 희년이라는 규례는 말 그대로 꿈같은 규례이자 현실성이 부족한 규례처럼 느껴집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스라엘에서 단 한번도 시행된 적이 없는 희년 규례인데, 이것을 누가 선포합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겁니다. 누가복음 4장 18절과 1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화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아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그 다음에 가장 중요한 내용이 등장하죠. 주의 은혜의 해. 즉 희년을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라는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주의 은혜의 해, 희년을 전파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누가복음 4장 2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화면)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읽으신 이사야서 61장 말씀이 오늘 성취되었다고 선언하십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2천년 전,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공생애 활동을 시작하시던 때에, 나사렛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종말론적인 희년이 성취되었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여기서 희년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포로로 잡혀간 사람, 노예로 팔려 간 사람, 가난해서 어쩔 수 없이 삶의 터전을 팔아버린 사람, 이 모든 사람들이 회복되는 년도, 그것이 바로 희년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 회복되고 새로운 소망을 품으며 다시 시작하는 시간이 희년입니다. 그 희년이 예수님의 선포로 인해 오늘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자, 그래서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종말론적인 희년을 선포하신 이후로 이제는 영적으로 누군가에게 팔려가거나 잡혀가거나 빼앗기거나 하는 일들이 더이상 발생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굉장한 말씀이죠. 얼마나 아름답고 은혜로운 말씀입니까? 인생에 아무런 소망이 없는 사람들, 희망 한 점 없는 사람들, 이렇게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살아갈 이유와 참된 소망을 제시해 주시는 예수님의 희년 선포는 은혜롭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는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 등장합니다. 누가복음 4장 22절 말씀 보세요. (화면)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말씀을 천천히 읽어보면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이 종말론적 희년의 선포를 듣고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다음)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부분이 뭔가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은혜로운 말”과 “놀랍게 여겨”라는 말은 서로 반대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말 성경으로 읽으면 말이 안 되진 않습니다. 너무 은혜로운 말이어서 깜짝 놀랐다. 이렇게 읽으면 문제 될 것이 전혀 없죠. 하지만, 여기에 사용된 따우마조 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화면) 성경에서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첫 번째 뜻인 “놀라다”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무엇에 대해서 이상하게 여기다. 이상하게 생각하다. 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이 따우마조라는 단어를 어떤 의미로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문장의 뉘앙스가 180도 바뀔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번째 의미인 이상하게 생각하다 라는 의미로 22절 말씀을 읽어야 하는데요. 이상하게 생각하다 라는 의미로 22절을 직역해 보면, (화면) 그들 모두 그를 증언했다. 그리고 그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은혜의 말들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은혜의 말들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예수님의 종말론적인 희년 선포가 은혜로운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나사렛 회당 사람들이 예수님의 은혜로운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22절 하반절에 등장합니다. (화면)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나사렛 회당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는, 종말론적 희년을 선포한 사람이 다름 아닌 요셉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나사렛 회당 사람들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그 은혜로운 말 자체에 집중하지 않고 그 말을 한 사람, 그 사람이 누구인지 그 존재 자체에 집중했기 때문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말씀을 보면, 나사렛 회당 사람들이 잘못된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나사렛 회당 사람들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만하지, 그럴 수 있지. 이렇게 생각하는 분 계십니까? 네. 그럴 수 없죠. 너무나 당연한 얘기니까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그런 식으로 반응하면 안 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죠.
하지만 나사렛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얘기가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예수님의 육적인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보다 나이도 많고 서로 굉장히 친한 사이라고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이 갓난아기 때부터 성장하는 과정을 쭉 지켜봤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코찔찔이 시절부터 성인으로 장성하기까지 이웃사촌으로 가깝게 지내왔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예수님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인식될까요? 네. 그냥 동네 이웃이자 우리 가족과 잘 알고 지내는 평범한 목수의 아들 정도로 인식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러한 관계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은혜로운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충분히 어려울 수 있습니다. 나사렛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예수님이 이마에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등짝에 무슨 날개가 달려있는 것도 아닌데, 무슨 수로 예수님의 정체를 인식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라는 반응이 나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하는 반응은 예수님 또는 요셉과 마리아와 친분이 있었던 나사렛 유대인들만 보이는 반응일까요? 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와 유사한 반응들은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모태신앙으로 자라나고, 하나님께 부르심 받아서 평생을 목회자로 살아가겠다고 결단하고 사역지에 뛰어들면, 본문 내용과 비슷한 경우를 만나게 됩니다.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네. 저는 서른 여섯 살입니다. 아... 우리 애보다 어리시네. 아.. 아직 마흔도 안되셨네. 이렇게 나이만으로 판단 받는 일을 마주하게 됩니다. 네. 물론 우리 화평교회 성도님들은 성숙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단순하게 나이만으로 판단하시진 않을 겁니다. 그렇죠? 하지만 다른 교회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저의 아버지께서 목회하시는 교회에서는 현재 저를 목사님이라고 부르시는 분이 많지 않습니다. 왜요? 어렸을 때부터 그냥 봐왔으니까, 내가 얘 업어키웠으니까. 코찔찔이였을 때부터 콧물 닦아주면서 봐왔으니까. 그러니까 태호는 그냥 태호인 겁니다.
네. 물론 친하게 생각하고 가깝게 생각하면 그럴 수 있습니다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스폰지가 물을 흡수하듯이, 말씀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흡수할 수 있을까요? 그럴 가능성은 굉장히 낮습니다. 듣기에 기분 좋은 말씀, 복 받는 말씀, 잘 된다는 말씀. 이런 종류의 말씀을 전하면, 좋은 얘기니까, 기분 좋아서 듣는 척이라도 할 수 있겠습니다만, 성경에는 축복받는 말씀보다 저주받을 수 있다는 말씀, 하나님께 책망받고 심판받을 수 있다는 경고의 말씀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니 때에 따라서 듣기에 달갑지 않은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주의해야 하고 분별해야 하고 나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는, 마치 잔소리처럼 들릴 수 있는 그런 말씀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어려.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았어. 믿음이 어떻고 성화가 어떻고 이런 말을 할 나이가 아니야. 마치 이런 식으로 목회자를 목회자로 보지 않고 나보다 어린 사람, 경험이 부족한 사람, 아직 세상을 잘 모르는 사람, 이런 식으로 목회자를 자기 자신만의 기준으로 평가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은혜로운 말씀으로 들을 수 없습니다.
물론 방금 제가 말씀드린 비유가 본문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다거나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서른 살에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셨고, 승천하시기 전까지 미혼이셨습니다. 무려 상투도 틀지 않으신거죠. 나이로만 말하자면 우리 유의겸 전도사님보다 두 살 더 많으시고요.
네. 어쨌든 우리 예수님은 육안으로 볼 때 아주 젊고 청년 같은 비주얼을 가지고 공생애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이렇게 젊은 모습을 가지고 계신 예수님이 나사렛 회당에서 종말론적인 희년을 선포하자, 예수님의 가족들과 알고 지낸 이웃 유대인들이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여기서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라는 말은 질문 같아 보이지만, 답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정답을 확인하기 위해 물어보는 질문이 아니라 답을 정해놓고 하는 질문, 즉 수사의문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사렛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요셉의 아들인 줄 알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런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예수야. 너 요셉 아들이잖아. 너가 뭔데 그런 말을 해? 너가 무슨 권위로? 내가 너 아는데? 내가 너 애기 때부터 업어키웠어. 그런데 뭐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신다고? 하나님께서 너한테?
이런 식의 부정적인 반응이 터져 나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말씀이 아닌 나이와 관계만으로 판단했다는 것이죠.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상관없습니다. 그냥 뭐 종말론적 희년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그냥 예수님의 육체적인 존재 자체, 요셉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나사렛 유대인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23절 말씀 보세요. (화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나사렛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에게 속담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너의 고향 여기에서도 행해라.” 23절 말씀에 따르면, 나사렛 사람들이 실제로 이 말을 했다는 겁니까 하지 않았다는 겁니까?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지만, 마음속에 이런 생각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아시고 지적하셨다는 겁니다. 말로만 희년이 선포됐다느니 그런 말하지 말고 가버나움 동네에서 했던 것처럼 똑같이 능력을 보여주고 증명하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보고 믿어보겠다는 그런 교만하고 악한 마음을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참 희한합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이 어떤 말씀이었습니까? 주의 은혜의 해가 오늘 성취되었다는 것이죠. 여기에 살을 붙여서 표현하면,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이런 기적과 같은 일들이 오늘 성취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러한 일은 한 두 가지의 기적이 아닌 겁니다. 전 세계적으로 산발적으로 발생하는, 셀 수 없을 정도로 수없이 많이 발생하는 기적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믿기만 하면 희년의 영적인 유익을 누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사람이 잘 살든 못 살든, 그 사람이 잘 생겼든 못생겼든 상관없습니다. 그 사람이 사회에서 어떤 평판을 가지고 있으며 얼마나 똑똑하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저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에 온전히 반응해서 인격적으로 믿기만 하면, 종말론적인 희년의 유익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가장 먼저 받은 나사렛 유대인들은 종말론적인 희년 선포를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그저 눈에 보이는 단순한 기적입니다. 우리 동네에 누구 눈먼 사람 있으면 고쳐주고, 앉은뱅이 있으면 일으켜 주고, 중풍병자 있으면 깨끗하게 회복시켜 주고, 귀신 들린 사람 누구 있으면, 귀신 내쫓아주고. 이러한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기적을 원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모순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종말론적 희년을 선포하신 그 순간 이후로 수많은 기적들이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영적으로 자유를 박탈당한 사람들이 아무런 대가 없이 본토로 돌아와 정착하고 수많은 빚이 한순간에 정리되어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시대가 열렸는데, 정작 이 말씀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 내가 보고 내가 판단해서 믿을 수 있는 것, 이런 것들만 찾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래서, 마음속으로 기적을 요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두 가지의 예를 들어서 말씀하십니다. 25절과 26절 말씀 보세요. (화면)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먼저 첫 번째 예는 엘리야 시대 이야기입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는 북이스라엘의 아합왕이 통치하던 때였습니다. 이때 북이스라엘은 풍요의 신이라 불리는 바알을 숭배하며 음란하게 섬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에 대한 심판의 일환으로 비를 내리지 않으셨죠. 요즘처럼 상수도 시설이 완비되지 않았던 시대에는 비가 내리지 않으면 치명적인 피해를 입게 됩니다. 국가 전체가 마비될 수 있는 위험을 초래하죠.
이렇게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가 오지 않아서 물이 없어 고통 당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 선지자를 이스라엘이 아닌 외국으로 보내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나라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선지자가 전하는 말씀이 거부당하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다른 나라로 보내셔서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자 이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엘리야 선지자 이야기의 핵심은 기적이 아닌 바로 인과관계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선지자를 거부하고 계속해서 우상숭배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무슨 엄청난 기적을 보여주시면서 내가 진짜 하나님이니까 우상숭배같은 거 제발 좀 하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려라.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그렇게 하실 수도 있겠지만 본문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죠. 회개할 수 있도록 말씀을 주시긴 하지만, 한도 끝도 없이 계속해서 말씀을 주시거나 믿을 수 있도록 기적을 보여주시지 않습니다. 기회를 주시되, 그 기회를 걷어 차버리면, 더이상 애걸복걸하지 않으시고, 그 은혜를 다른 곳으로 옮겨버리시는 것이죠.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의 메시지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가 분명하죠. 그러니 우리는 착각해선 안 됩니다. 내가 신앙생활 열심히 하지 않으면, 내가 은혜받지 못하면, 내가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손해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일단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부족한 것이 없으십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고 높여드려야만 하나님의 능력이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하나님께 그 어떠한 피해를 입힐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에 반응하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 손해가 아닌 온전히 나에게 손해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은혜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말씀을 주시고, 상황을 조성해주시고 그 자리로 인도해주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말씀을 거부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로 옮기실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두 번째 예는 엘리사 선지자가 나아만 장군의 나병을 고친 이야기입니다. 27절 말씀 보세요. (화면)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나아만 장군은 수리아의 장군이었습니다. 이스라엘과는 전쟁 중에 있었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누구 편을 들어주셔야 할까요? 너무 유치한 질문이긴 하지만, 굳이 대답하자면 이스라엘 편을 들어주셔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엘리사 선지자를 통해 적국의 군대 장군인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주십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나병으로 죽을 수도 있는데, 이걸 굳이 고쳐주십니다. 참 이해하기가 어렵죠.
하지만 여기에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반응하지 않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반응하지 않기 때문에,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언약 공동체에 소속되지 않은 사람, 주인공이 아닌 엑스트라에 불과한 사람, 즉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소외된 사람, 이런 사람들에게 은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자, 그럼 예수님께서 예를 들어 말씀해주신 두 가지의 이야기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두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인과관계에 있습니다. 원인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죄악된 본성이죠. 그 죄악된 본성으로 죄를 짓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살리시기 위해서 선지자를 보내시든, 목회자를 보내시든, 어떤 사람을 통해서든 말씀을 주셔서 회개하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죄인이 이를 매몰차게 거부하고 계속해서 죄를 짓는다면, 이 사람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든 상관없이 그에게 주어질 은혜가 다른 곳으로 옮겨질 수 있습니다. 마치 사르밧 과부와 나아만 장군처럼, 그 어느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게 주어진 것입니다.
자, 그래서 이러한 예수님의 이야기는 나사렛 회당에 모인 유대인들의 분노를 극대화시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두 가지의 예는 유대인들에게 성립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족보로 따졌을 때 아브라함의 40대손이면, 하나님을 믿든 말든 관계없이 일단 구원은 따놓은 당상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구원은 그냥 기본적으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겁니다. 우리 선조이신 아브라함께서 세우신 공로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함부로 버릴 수가 없고, 또 구원해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혈통상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들이 그렇게 믿는다는 얘깁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아브라함이건 뭐건 조상이 누구건 알 필요가 없습니다. 종말론적 희년의 유익을 누릴 수 있느냐 없느냐는,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하는지, 아니면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기적을 보여주면 믿겠다는 식으로 반응하는지. 이 두 가지 중에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서 어느 분이 구원받으셨고 어느 분이 구원받지 못하셨는지 감히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일단 구원받으셨다는 가정 하에 이 말씀을 묵상하노라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종말론적인 희년의 유익을 이미 누리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러운 죄악으로부터 스스로 깨끗하게 만들 수 없는 우리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죄사함을 받았고, 그 무엇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믿으십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매일 매일 한 발자국씩 더 나아가야 합니다. 단순히 구원받았다는 사실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에 온전히 반응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기분 좋은 말씀, 받아 먹을만한 말씀, 듣기에 괜찮은 말씀, 이런 종류의 말씀에만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것으로 만족해선 안 됩니다. 때로는 딱딱한 말씀을 들을 수도 있고 불편한 말씀을 들을 때도 있겠지만, 이단적인 사상을 가르치거나 다른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닌 이상,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라고 믿고 깊이 있게 묵상하며 긍정적인 마음과 열린 마음으로 말씀에 반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말씀을 누가 전하느냐. 어떻게 전하느냐. 몇 분 동안 말씀을 전하느냐. 이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과 방식에 따라 은혜받고 은혜받지 못하고가 결정된다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보이는 반응은 나사렛 회당에 모인 유대인들의 반응과 다를 바 없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화평의 성도님들, 사람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은혜받는 것에 대해 자꾸만 조건을 달게 됩니다. 이런 설교를 들어야 은혜를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들을 과감하게 버려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라는 반응을 보인 유대인들과 동일한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함께 나눈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언제 어디서든 가난한 마음과 갈급한 심령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한다면, 우리는 종말론적 희년의 유익을 더욱더 깊이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복된 신앙생활을 영위하시며 주님과 동행하시는 삶을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주님의 크신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종말론적인 희년의 유익이 우리에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나사렛 회당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며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은혜받지 못하는 모습들이 우리 안에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가난하고 갈급한 심령으로 말씀을 받으며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주여 우리의 심령을 주장하여 주시고 풍성한 은혜 누리며 복된 신앙생활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 마무리 기도 >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을 우리가 감히 측량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이끄시는 삶이 얼마나 경이롭고 놀라운지 매일 매일 체감하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살아계신 주님, 어려운 시대에 하나님의 손길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주님의 자녀들이 오늘도 주님께 여러 가지 기도 제목들을 올려드렸습니다. 우리 모두의 기도에 응답하여 주시고, 주님의 뜻 가운데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 주해
종말론적 희년의 선포에 대한 두 가지 반응
1. 부정적인 반응 – 부유한 자(유대인들)
1) 과정
은혜로운 말이라고 느낌 → (부정적인 의미로) 놀랍게 여김 →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 1 예수님의 속담 인용, 2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함. 3 엘리야 시대 흉년이 들었으나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만 보내심을 받음. 4 엘리사 시대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나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이 깨끗해짐. → 예수를 죽이려는 반응으로 극대화 됨.
2) 평가
예수님은 유대인들과의 대화를 포기하지 않으심. 야 됐다. 그만해. 내가 니들한테 무슨 말을 하겠냐. 이런 식으로 대화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대화를 이어 나가심. 그 과정에서 유대인들은 점점 화가 끓어오름. 자신들의 영적인 상태를 인정하지 않음. 오히려 본인들이 예수님을 마음대로 평가하고 결국은 “죽음”으로 심판하려 함.
*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에 나타난 의미
1) 두 이야기에서 구원은 절대적으로 이스라엘의 특권이라는 생각이 효력을 잃게 됨. 하나님의 은혜는 굶주림으로 고통을 겪고 나병으로 괴로움을 겪던 극빈층의 이스라엘 백성을 지나쳐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졌음.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당연시해서는 안 됨(3:8)
2) 하나님의 은혜는 이스라엘을 지나쳐 이방인들에게 주어졌음.
엘리야는 “시돈 땅”에 있는 한 과부에게 보냄 받았으며, 엘리사는 “수리아 사람” 나아만에게 보냄 받았음. 사렙다의 과부와 나아만은 이방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에 적대적이었고 이스라엘이 증오했던 지역 출신이었음. 엘리야가 나아만에게 보냄 받았을 시기에 나아만은 이스라엘을 포위하고 있던 수리아 군대의 장군이었음.
3) 예수는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이상한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언급하고 있음. 엘리야는 보내졌고, 수리아 사람 나아만은 깨끗해졌다. 보냄 받고 깨끗함 받는 것을 나타내는 동사는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행위를 가리키는 방식인 신적 수동태로 사용되ㅣ었음.
* 사렙다 과부와 수리아 사람 나아만은 좋은 소식을 받은 가난한 사람들이며, 속박에서 자유를 얻은 자들이며, 시력을 회복한 맹인들이며, “주의 은혜의 해”가 주는 혜택을 얻은 자들임. 예수님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이방인들이 아니라 자신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가난한 자들이요 눌린 자들이라고 생각했음. 그러나 과부와 나아만은 이사야서의 인용에서 선언한 하나님의 긍휼이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로 확장된 것을 보여줌.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확장된 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이방인들을 선택하신 결과로 생긴 현상임.
랍비 전통에서 신성모독자나 우상숭배자를 돌로 쳐서 죽이는 규정은 있으나 낭떠러지에서 떨어뜨려 죽이는 규정은 없음. 야고보는 성전의 난간에서 떨어졌고 돌에 맞아 죽었음. 예수를 언덕에서 밀쳐 떨어뜨리려 하는 행동은 돌로 치기 전에 행한 것일 가능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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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 부족 시 사용할 것
2. 긍정적인 반응 – 가난한 자, 병든 자, 목마른 자 (눅 23:42-43 행악자)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 같은 조건, 같은 운명. 다를 것이 없다고 느낄 수 있는 상황.
행악자에 관한 주해 –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의 십자가 230~
행악자의 요청 – 눅 23:42 나를 기억하소서.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것은 구원의 근거가 됨.
행악자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한 구원을 대범하게 요청한 것. 예수님은 이 요청을 받아들이심. 더 나아가 예수님은 행악자가 요청하지 않은 것도 주심. 낙원!
가깝든 멀든 미래까지 기다릴 것 없다. 내가 엄숙히 약속하노니, 네가 오늘 나와 함께 하나님 나라에 있을 것이다.
* 낙원이란 무엇인가?
예수님의 이 약속은 자유, 땅, 죄 사함을 모두 포함한 약속임. 실제로 이 행악자는 자유와 자신의 모든 소유를 잃은 사람. 뿐만 아니라 십자가 형을 받고 있음. 용서받을 수 없는 엄청난 죄의 책임을 지고 있으며 심지어 죽음이 눈앞에 놓여있음. 그런데 예수님은 이 행악자에게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 약속하시는 것. 이는 종말론적인 희년을 선포하신 것과 같은 것임.
자기의 소유를 잃고 자기의 가족을 잃고 자유와 몸을 잃고 사람과 하나님께 아무런 권리도 주장할 수 없는 사람에게 죄 사함을 얻고, 자유와 가족과 낙원에 참여하며 누릴 것이라 선언하시는 것. 따라서 “오늘 네가 낙원에 있을 것이라”는 말씀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새로운 출발점이며 새로운 시작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 행악자요, 십자가형이 불가피한 범죄자에게 가장 의롭고 복되며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를 값없이 주시는 것.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이해되는가? 용납할 수 있는가? 난 그럴 수 없음..
누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사역을 묘사하기 위해 두 가지 문학적인 장치를 사용함.
첫째,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는 두 사람에 대한 묘사.
‘행악자’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악을 행한 사람들”이다. 유대인의 관점이든 로마인의 관점이든 메시아 왕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사람인 것은 분명함. 이들은 범법자였으며, 사회에 유익을 끼친 사람들이 아님.
하지만 이 모습은 낯설지 않음. 십자가 앞에서 세상의 모습과 우리의 모습은 많이 닮아있음. 어쩌면 현재 세상과 우리는 더 심각한 상태일 수 있음. 왜냐하면 행악자들은 십자가에 못박혀 형벌을 받았고, 예수님을 욕하고 비난함으로써 자신의 악함을 다 드러냈지만, 세상은 죄를 짓고도 깨끗한 척함. 우리도 어쩌면, 십자가를 혐오하면서도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음. 시 50:21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
종말론적 희년의 선포.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특별히 행악자의 요청과 예수님의 응답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성격을 보여줌.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을 보면서 여러 가지 반응을 보일 수 있다. 나는 이 행악자와는 다르다. 나는 이정도까지는 아니다. 이정도의 죄인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악자가 구원받는 건 뭔가 아쉽다. 나랑 똑같은 천국에 간다는 게 이해하기 어렵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는 무슨 권리로 이렇게 생각하고 어떤 기준으로 그런 판단을 하는가? 십자가 앞에서는 개인적인 생각이나 사회적인 관습은 아무 소용이 없다.
만약 나 자신이 이 행악자보다 낫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예수님이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사람이 보기에 어느 수준에 있든지 하나님 앞에서는 동일하다. 자기가 옳고 경건하며 깨끗하다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필요없다. 인간이 죄인이요 행악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인간성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첫걸음이다.
둘째, 행악자의 처지. 행악자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없고 구원을 받기 위해 그 어떠한 기여도 할 수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잘못과 실수, 죄와 불의를 만회하거나 갚을 길이 없다. 그러나 이 행악자는 인간 존재에 있어서 가장 낮은 지점에서 구원자를 붙드는 사람이다. 또다른 행악자는 예수를 저주한다. 모든 인류는 두 행악자 중에 하나에 속한다. 누가는 이 사건을 일차 독자인 데오빌로에게 소개한다. 아무리 로마 지방 속주의 총독에 해당하는 고위 관료라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한 사람의 행악자에 불과하다. 자기 자신의 어떤 기여도도 주장할 수 없는 구원. 인간의 공로가 제로에 수렴하는 하나님 나라. 이것이 누가가 전하는 십자가 복음이자 종말론적 희년의 선포이다. 이것이 얼마나 복된 지점인가? 새로운 인생이 주어지고, 창조 질서가 회복되며 예수님으로 시작된 나라가 출발하는 지점이다.
셋째,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최악의 인간이라도 다시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곳이다. 어느 누가 십자가에 못박힌 행악자에게 관심을 갖겠는가? 누가 이런 악한 죄인에게 애착을 갖겠는가? 누가는 당시 인간의 가난을 알고, 당시 여성과 어린 아이들의 소외와 절망을 알며, 인간의 비참함을 이해하고 있었다.
십자가가 무엇인가? 복음이 무엇인가? 자신의 모든 부끄러움이 드러나고, 아무런 희망조차 품을 수 없는 절망적인 존재가 되더라도, 아무도 가까이할 수 없는 존재가 되더라도,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요청하기만 하면, 예수님은 그 요청을 들어주실 뿐만 아니라, 요청하지 않은 낙원까지 허락하신다. 하나님 나라에 지체없이 오늘 당장 참여하게 하신다. 이것이 십자가의 복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