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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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막 9:14-28
제목 :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오늘 함께 나누는 마가복음 9장 14절에서 28절의 말씀은 믿음이 없는 제자들과 믿음이 없는 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두 장면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장면은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 올라가셔서 변형되시고 산에서 내려오신 뒤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실 때 세 명의 제자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데리고 올라가셨습니다. 나머지 아홉 명의 제자들은 근처에 있는 마을에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변화산에서 자신의 영광을 보여주시고 제자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이미 변화산 사건이 있기 전부터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고난당하고 죽으실 것을 예고하셨지만, 제자들은 그 사실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는 이 세상에서 사역하실 날이 많이 남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산에서 내려오자 나머지 아홉 명의 제자들이 서기관들과 치열하게 논쟁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일로 논쟁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기로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능력을 받았고 그 이후로 귀신을 쫓아낸 적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6장 7절을 보시면,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이어서 6장 13절을 보시면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라고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귀신 쫓는 일을 처음부터 못했으면 크게 문제 될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께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받았습니다. 그 능력을 받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는 일들을 해왔는데, 마가복음 9장에 와서는 귀신이 제어되지 않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9장 19절입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아멘.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세대여. 라며 탄식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제자들은 여전히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전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다 책망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4장 40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아멘.
큰 광풍이 일어나 물이 배에 차게 되고 죽게 생기자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는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다를 잠잠하게 하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이 일이 있고 난 뒤 오늘 말씀인 마가복음 9장에서도 똑같이 믿음 없음을 책망 받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슨 이유로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을까요? 제자들이 못한 것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매우 위험천만한 밤바다에서 폭풍우가 몰아쳐서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두려워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제자들은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만을 바라보았습니다. 이것은 비단 제자들만의 문제는 아닐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죠. 맹렬하게 몰아치는 폭풍우. 차츰차츰 차오르기 시작하는 차가운 바닷물. 예수님께 받은 권능으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는 일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있는 해결되지 않을 것만 같은 절망적인 상황들과 문제들. 이 땅에 있는 수많은 비참하고 끔찍한 일들.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들로 인해 영적으로 요동하지 않고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우리 마음의 중심이 흔들리게 됩니다.
과연 하나님은 이러한 일들을 어떻게 보실까요? 폭풍우가 몰아치는 일? 더러운 귀신이 예수님의 이름으로도 제어가 되지 않는 일들? 요즘 온 세계에 큰 골칫거리인 코로나 바이러스? 사실 우리 주님께서 보시기에는 이 일들은 그렇게 크고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아래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이 땅의 비참함은 인간을 괴롭게 하는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문제들이 아닌 더욱 근원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불신. 불신앙입니다. 불신앙을 성경적으로 표현하자면 믿음 없음입니다. 믿음 없음은 하나님 보시기에 패역함이고 진정한 비참함이며 비참함의 근원지입니다.
마가복음 9장에서는 제자들을 향해 믿음 없는 세대여. 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마태복음 17장 17절에서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만 없는게 아니라 패역하기까지 하다는 말입니다. 그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고 믿음이 없었을 뿐이고. 이렇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패역하기까지 한 제자들의 모습을 책망하십니다. 패역하다는 말은 뒤틀리고 변절된 마음의 변화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믿음? 좀 없을 수도 있지. 좀 부족할 수도 있지. 어떻게 항상 믿음이 좋을 수가 있어?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런 안일한 마음과 태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믿음 없음과 패역함에 대한 책망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고 경계해야만 합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믿음 없는 세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는 진리에 대하여 패역한, 곧 진리에 대해 거스르는 세대이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아름다워 보이는 시대라도 신앙이 없으면, 그 아름다움은 모양뿐이고 생명이 있는 진정한 선은 아닌 것이다.” 믿음이 없으면, 행함이 올바르더라도 모양뿐인 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따라서 믿음 없고 패역한 세대 가운데 구별된 주의 자녀들로 살아가야 하니 우리에게는 삼위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고 또 말씀으로 깨닫고 변화되는 역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제 두 번째 장면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두 번째 장면은 예수님과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대화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 귀신들린 아이를 데려오자 귀신이 아이로 하여금 발작을 일으키게 합니다. 아이가 땅에 엎드려 구르고 거품을 흘립니다. 이런 너무나도 안타까운 상황에서 예수님은 귀신을 즉시 내쫓지 않으셨습니다. 한시가 급한데, 예수님은 그 아버지에게 물으십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마치 의사 선생님 같은 느낌입니다.
예수님은 이 아이가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 얼마나 괴로운지 몰라서 물어보신 것이 아닙니다. 귀신을 내쫓는 일, 아이를 치유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물어보신 겁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대답합니다. 21절 제일 뒷부분부터 22절까지 보겠습니다. “이르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귀신에 들려 고통당했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한마디 덧붙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이 말에는 불신앙 즉, 믿음 없음이 담겨있습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이라는 말은 “만약에 당신이 하실 수 있는 능력이나 역량이 있으시다면” 이런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만약”이라는 말이 정확하게 나와 있지 않지만, 원어상으로 보면 분명하게 나옵니다. 만약. 하실 능력이 있으시면. 이 말을 믿음이 담긴 신뢰 섞인 요청이라 볼 수 있을까요? 절대 그렇게 볼 수 없습니다. 확실하게 신뢰하지 못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요청하는 듯한 어조입니다.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귀신들리고 간질로 심히 고생하니 할 수 있는건 다 해봐야하니까요.
그런데 도와달라는 요청에서 한 가지 눈여겨 볼 것이 있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라는 말입니다. 불쌍히 여기다. 이런 말은 굉장히 기독교적인 말이죠.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시며 목자 잃은 양같이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씀, 굉장히 유명하잖아요. 그래서 뭔가 불쌍히 여기다. 이런 말을 보면 괜찮아보이고 좋아 보일 수 있습니다만, 사실 이 부분에서만큼은 좋게 보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전능하심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면서 어떻게든 도움을 받아보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버지는 어떻게 예수님께 요청해야 했을까요. 마가복음 1장 4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아멘.
이 나병환자는 예수님께서 고치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요청했습니다. 아버지의 요청과는 확실히 다릅니다. 원하시면 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과 만약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이 두 가지 요청에는 확연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물론 이 아버지의 입장도 어느 정도 이해는 됩니다. 이 아버지는 아마도 꽤 오래 전부터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소문을 들어왔을 것입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있는데, 나병환자를 고치셨대. 중풍병자를 고치셨대.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셨대. 심지어 죽은 사람도 살리셨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 오천 명을 먹이셨대. 눈먼 사람을 고치셨대!
이런 소문을 듣고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해도 자기 아들을 괴롭히는 귀신을 내쫓아주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아홉 명의 제자들이 다 실패하는 겁니다. 소문으로 들었을 때에는 이 제자들이라는 사람들도 하나같이 다 유능해서 모두 귀신을 내쫓는 능력을 가졌다고 들었는데, 그 스승이라는 사람은 과연 이 귀신을 쫓아낼 수 있을까? 어렸을 때부터 귀신들려 죽어가는 내 아들을 진정 깨끗하게 고칠 수 있을까? 의구심이 생길법도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반신반의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이라는 말은 정당화되거나 합리화 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뜻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아래에서 그분의 선하심 안에서 그 어떠한 일이라도 해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면 모든 일을 다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오늘 본문 23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아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예수님은 귀신 들린 아들의 아버지가 했던 말을 똑같이 반복해서 말씀하시면서 아버지의 믿음 없음을 교정하십니다. 예수님은 귀신 들린 아들의 상태보다 믿음이 없는 이 아버지의 상태를 더 심각하게 보셨습니다. 그래서 귀신을 바로 내쫓지 않으시고 거품 물고 나뒹굴고 있는 아들을 두고 이 아버지와 대화를 시작하신 것이었죠.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아버지가 대답합니다. 24절입니다.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아이의 아버지는 믿음 없음의 상태에서 절규합니다. 제가 믿습니다. 저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세요.
이 아버지의 울부짖음에는 무언가 모순이 있는 듯합니다. 믿는데 믿음 없음을 도와달라.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요. 위대한 종교개혁자 칼빈 선생님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는 믿는다고 고백하고 있으나 실상은 자신의 불신앙을 고백하고 있다. 이 신앙과 불신앙은 마치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신앙과 불신앙의 상태를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온전한 신앙이란 어디에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분적으로 불신앙을 가진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가 가진 적은 분량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인정하신다. 우리는 우리 속에 남아 있는 불신앙을 조심스럽게 떨쳐버리고 이 불신앙에 대하여 싸워야 하며 이를 신앙으로 바꾸어주시도록 주님께 구해야만 한다. 이와 같은 노력에 힘쓰면서 우리는 주님의 도우심을 얻기 위해 주님께로 가까이 가야한다.”
예수님께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 말씀하시자 아이의 아버지는 즉시 자신의 믿음 없음을 깨닫게 되었고 믿음 없음을 도와달라고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이고 자시고 됐고 빨리 내 아들이나 좀 고쳐주십시오. 이렇게 일방적으로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예수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은 것이 아니라, 아들을 고쳐주면 믿겠다 라고 예수님께 조건을 달아놓고 기적적인 일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그 어떤 일보다, 내 아들이 어린 시절부터 귀신들려 고생하고 죽어가는 일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믿음 없음이구나. 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물론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이 고백을 했다고 해서 아버지의 믿음이 급격히 상승했다거나 엄청난 믿음의 소유자가 되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음을 깨닫게 되었으니 이제 이 아버지는 믿음 있음의 상태로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믿음 없음의 문제가 해결되자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시고 이 단락의 사건은 마무리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제자들과 귀신들린 아들의 아버지의 비참함의 근원, 믿음 없음의 문제에 대해서 깨달음을 주십니다. 믿음 없음이 비참함의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문제를 해결 받기를 원하는 마음에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아오지만, 불신앙의 상태, 과연 주님이 하실 수 있을까? 해결해 주실까? 이런 믿음 없는 상태로 문제를 가지고 나아오고, 이런 일들이 계속해서 반복되다보면 우리는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문제는 주님이 하실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내가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화평의 성도님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정도와 깊이는 서로 제각각 다르겠지만 칼빈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우리는 모두 부분적으로 불신앙을 지니고 살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오래 참으시며 기다려 주시는 긍휼하신 사랑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십시오. 라고 구해야만 합니다.
이렇게 주님께 구하기 전에 먼저 우리의 절망적인 불신앙을 마주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내 안에 존재하는 악한 마음들을 외면하지 않고 그 마음들을 스스로 직접 대면하면서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믿습니다.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세요. 이렇게 구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시작임을 기억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생동감 있게 맛보며 주님과 동행하시는 모든 화평의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믿음 없고 패역한 세대 가운데에서 우리를 거룩하신 주님의 자녀로 불러주시고 구별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응답하며 살아가고자 하지만 우리 믿음의 연약함으로 인해, 우리의 죄성으로 인해 신앙과 불신앙의 사이에서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주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처럼 주님께서 하실 수 있을까. 이 일을 과연 해결해 주실까 라는 회의적인 시선과 믿음 없는 태도로 일관할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 믿음의 불확실성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이 아버지의 고백처럼,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라고 구하는 모든 화평의 성도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믿는 자에게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고 말씀하신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주님의 선하시고 기쁘신 뜻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을 굳게 믿으며 나아가길 원하오니, 우리의 믿음과 심령을 굳건히 붙들어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시간 모든 화평의 지체들과 영상으로나마 함께 마음을 모아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시고 한 마음으로 여러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더욱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우리 화평교회 되게 하시고 세상이 시끄럽고 혼란스러울수록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게 하시며, 영적인 갈급함을 허락하여 주셔서 목마른 마음으로 언제 어디서나 말씀을 갈망하고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간구하는 우리 화평교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비록 이 어려운 상황이 지속될지라도 하나님께 더욱 감사하고
주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며 기뻐하는 우리 되길 원하오니 우리의 마음을 붙잡아 주시고 주장해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