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의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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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벧전 3:8-12
제목 : 부르심의 목적
잠시 기도하고 말씀 시작하겠습니다. 언제나 우리를 눈동자 같이 지켜주시고 인도하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질병으로 인해 여러모로 시끄러운 이때에 우리 성도님들의 건강을 지켜주시고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게 하시며 은혜를 사모하는 갈급한 심령 허락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통해 주님을 더욱 알아가게 하시고 우리를 향한 부르심의 목적을 잘 깨달아 부르심대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베드로전서의 저자인 사도 베드로는 흩어진 나그네들, 이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된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베드로전서를 기록했습니다. 베드로전서에는 다양한 주제들이 존재하는데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주제는 바로 부르심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9절에 의하면, 이것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왜 부르심을 받았는가 하니, 복을 이어받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복이란 말을 보면 가슴이 설렙니다. 복을 이어 받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니, 나 같은 죄인이 복을 받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니, 이런 생각을 하면 기대감에 부풀어 오릅니다. 저는 과거에 결혼하기 전에는 복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결혼하고 나서 보니 복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피부로 체감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리는 영적인 복보다 현실적으로 느낄 수 있는, 내 삶을 좀 더 윤택하게 만들 수 있는 그러한 물질적인 복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제가 항상 물질적인 복을 간절히 구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물질은 우리 삶의 실제적인 고민거리입니다. 천국 가는 그날까지 물질은 많을수록 좋고 풍성할수록 할 수 있는 것도 참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사도 베드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복이 어떤 성격의 복인가, 물질적인 복인가에 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만 아쉬운가봅니다. 이러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사도 베드로는 무엇을 증거하기 위해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일까요? 죄성을 가진 우리가, 구원을 얻을 만한 능력이 전혀 없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하기 그지없는 우리가 왜 부르심을 받았을까요? 오늘 이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8절과 9절은 이런 식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어떻게 어떻게 해라. 이렇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저렇게 해라. 이것들을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다. 왜냐하면 복을 이어받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구조로 기록이 되어있는데요. 이 부르심의 목적은 다섯 가지로 구분이 됩니다.
첫째는, 마음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3장 8절을 보시면,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라고 되어있습니다. 마음을 같이 한다는 말은 단순하게 모든 성도가 동일한 의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조화를 이루어 한 마음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빌립보서 2장 2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마음을 같이 하여. 라는 말이 똑같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2절 이후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어떻게 자신을 낮추셨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맥에 의하면 한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진리에 대한 공통적인 이해를 포함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한 마음 품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한 교회를 섬김에 있어서 회중이 동일한 교리체계에 속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되어야 그 교회의 공동생활이 진정한 사랑과 단합으로써 장성하며 발전한다.”
박윤선 목사님 말씀대로 우리가 동일한 교리체계에 속하려면,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 가운데, 특별히 동일하게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고, 영적인 양식으로 기쁘게 취해야 합니다. 받은 말씀과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그 내용을 가지고 삶을 나누는 일은 한 마음을 품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저 조화로운 의견을 갖는다. 하나의 의견으로 통일한다. 이런 단순한 사고방식이 아닌, 하나님께 택함 받고 부르심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지향해야할 삶에 관하여 한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품는다면, 디테일한 부분에서 개별적인 차이가 발생할 수는 있어도 큰 맥락에 있어서는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다. 이 자리에 나아오신 성도님들, 부디 주님 안에서 한 마음을 품고 나아가시길 축복합니다.
둘째는, 동정하는 것입니다. 동정한다는 우리말은 남의 처지를 자기 일처럼 딱하고 가엽게 여기는 것입니다. 예전에 사용하던 개역 한글 성경에서는 “체휼하다” 라고 번역이 되어있습니다. 원어적인 의미로 생각해보면, 함께 동참하여 고통을 받는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말은 자기 일처럼 가엽게 여기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원어적인 의미는 함께, 같이,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요즘 같이 무한이기주의가 만연해 있는 세상에서는 타인의 고통을 함께 받으려는 모습을 좀처럼 보기 어렵습니다. 제가 예전에 즐겨보던 1박 2일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유행했던 말 중에 하나가 “나만 아니면 돼” 였습니다. 벌칙을 받아도 나만 안 받으면 된다. 나만 아니면 된다. 이런 우스갯 소리인데요. 이 유행어가 그 당시에는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모릅니다. 예능은 예능일 뿐이어야 하는데, 개인주의적인 세상에서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동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동정에 대해, 함께 고통 받는 것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 2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아멘.
한 지체, 이 지체가 어떤 지체인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지체인지 모릅니다만, 어떤 지체이든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그저 안타까워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이 바로 동정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각 지체들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같이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친하고 친하지 않고 가깝고 가깝지 않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화평교회로 부르셨다면, 이 교회의 지체로 섬기며 살아가도록 부르셨다면, 우리에게는 이러한 지체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고통당하는 성도를 서로 돌볼 수 있어야 하고 그 성도를 위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동정하는 마음, 함께 고통당하고자 하는 마음을 같이 품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셋째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형제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다들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단지 동료 의식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났다면,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났다면, 성도들 간의 끈끈한 사랑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따라서 기독교적인 형제 사랑은 일반적이고 막연한 사랑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결속시켜야 할 특별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형제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위의 동정보다 좀더 진보한 애정이다.
사실 저는 본질적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보다 동정하는 것이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마음이 강퍅해서, 공감이 잘 안돼서, 살기 빡빡해서, 내 걱정만 해도 우리 가족 걱정만 해도 시간이 모자라서 미처 내 주위에 있는 지체들의 고통이 느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함께 고통을 느끼는 것이 사랑하는 것보다 더 어렵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는데, 박윤선 목사님은 오히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동정보다 좀더 진보한 애정이라고 설명하십니다. 진정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렇지만 그만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고귀한 감정이지요. 마땅히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을 사랑하고자 노력하며, 사랑할 수 없는 이기적인 나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사랑하는 마음을 더해주시길 간구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넷째는,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동정”이라는 말과 비슷한 의미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불쌍히 여기는 것과 함께 고통 받는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표현은 우리말로 애간장이 끊어지는 정도로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향해 가지고 계신 마음입니다. 택하심과 은혜를 받고도 돌아선 자기 백성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가지시는 불붙는 긍휼의 마음입니다.
따라서 타인을 진정으로 불쌍히 여기려면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주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인 나를, 허물과 죄로 죽었던 나를 사랑의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셨음을 깨달은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길 수 있습니다.
다섯 번째는, 겸손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겸손은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것이며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4장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아멘. 겸손한 척 하기 위해 낮아지는 위선을 보이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비록 내가 더 잘났다고 느껴지더라도, 내가 더 똑똑하고 지혜로운 것 같아도, 내가 더 돈이 많아 누릴 수 있는 게 많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낮아짐을 요구하십니다. 겸손함이 없이 교회생활을 한다면 분명히 그 공동체에는 불화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평판을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닮아가기 위해 진심으로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길 수 있는 겸손함이 우리 안에 있기를 소망합니다.
지금까지 부르심의 목적 다섯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마음을 같이 하는 것, 동정하는 것, 형제를 사랑하는 것, 불쌍히 여기는 것, 겸손한 마음을 품는 것. 이것은 교회 공동체를 부르신 목적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택함받은 주님의 자녀라면, 우리는 이러한 목적의식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쉽지 않습니다. 언제나 마음을 같이하고, 항상 주위 지체들을 신경쓰고,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고, 겸손한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일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교회를 부르시고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살펴보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9절 앞부분의 내용,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 말씀은 우리가 세상을 향해 품어야 할 자세입니다. 스데반은 돌을 맞아 죽을 때에도 자신에게 돌을 던진 사람들을 위해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기대합니다. 이렇게 말할 법도 한데,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아달라고 기도하는 스데반의 신앙은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원수들에게까지도 선의를 베풀어야 하는 이유는 성도들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성도들은 온유한 마음을 가질 뿐 아니라 자신을 저주하는 자들에게까지 축복해 줄 수 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못하고 욕을 욕으로 갚지 못하는 것은 다소 억울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향해 돌을 던지는 세상에게 맞서 싸우기는커녕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해 저런 악한 마음을 품는구나 하며 그들 안에 믿음이 생기길, 예수님을 만나게 되길 기도하고 축복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몫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4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아멘.
말씀을 맺겠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전하는 이 복음의 말씀은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통상적인 주장을 뒤집습니다. 복 받는 것이 결론이 아닙니다. 복을 받는데, 이 복을 받으려면, 부르심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부르심은 무엇을 향한 부르심입니까? 마음을 같이 하고 함께 고통을 나누며 지체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고 겸손한 마음을 품는 것을 향한 부르심입니다. 또한 세상을 향해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축복하는 부르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성도님들은 이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하고 계신지요. 우리는 이 부르심에 완벽하게 응답할 수는 없으나, 우리에게 복을 이어주시기 위해 부르셨다고 하니, 그 부르심을 향해 한 발, 한 발. 함께 나아가야겠습니다. 우리 모두 마음을 같이하여 서로 사랑하고 고통을 나누며 불쌍히 여기고 겸손함으로 서로를 섬기는 화평의 지체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복을 받기 위해 필요한 복음이 아닌, 부르심을 깨닫고 그 부르심대로 살아가기 위한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니 감사합니다. 부르심의 목적을 잘 알게 하시고, 잊고 살아갔던 부분들이 있다면, 화평의 지체들에게 소홀했고 덜 사랑했고 덜 겸손했고 악을 악으로 갚으며 살아왔다면, 이 시간 스스로 돌아보고 다시금 결단하는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부르심에 응답하는 주의 자녀 되길 소망하오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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