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 따라 사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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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고전 7:17-24
제목 : 부르심 따라 사는 삶
사람은 자신의 인생에서 선택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부모님과 가정환경은 본인의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죠. 이렇게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부분, 부모님이나 가정환경으로 인해서 사람이 얼마나 영향을 받을까요. 사람인이라는 온라인 취업 포털 사이트에서 2년 전에 설문조사를 진행했는데요. 부모 능력이 취업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관한 설문조사입니다. 구직자 10명 중에 7명은 부모 능력이나 가정환경이 취업 성공에 영향을 준다고 응답했습니다. 또한 상대적인 박탈감에 대해서는 절반 이상이 종종 느낀다고 응답했고 27%는 자주 느낀다. 18%는 매일 느낀다고 응답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전체 응답자의 86%는 우리 사회에서의 계층 간의 격차를 느낀다고 답했습니다. 자신이 선택할 수 없었던 부분, 부모님과 가정환경으로 인해서 취업에도 영향을 받고, 사회적인 계층이 나뉘는 데에 있어서도 영향을 받는다고 응답한 것입니다.
이러한 영향은 불신자들만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도 동일하게 영향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리스도인은 본인이 선택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오늘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인 고린도전서 7장 17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는데요. 본문 내용을 자세하게 살펴보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함께 상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고린도전서 7장 1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아멘.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를 우리는 고린도전서라고 부릅니다. 고린도전서 말씀은 일차적으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직접적으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고린도전서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받아들입니다.
자 그런데 고린도전서 7장 17절 말씀의 경우에는, 적용 대상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7장 17절 말씀 하반절 말씀을 보시면,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라고 되어있죠. 여기서 명한다는 표현은 권위를 가지고 누군가에게 해야 할 바에 대해서 자세하게 지침을 줄 때 사용하는 단어인데요. 사도 바울이 이런 식으로 모든 교회들에게 강하게 명령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이렇게 힘주어 모든 교회에 명령하는 내용은 어떤 내용일까요. 고린도전서 7장 17절 말씀을 세 부분으로 나눠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 부분은, 주님께서 각각의 사람들에게 직접 나누어주셨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 우리가 선택하지 못하고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했던 그 모든 것의 근원이 어디라는 겁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그 근원이 되신다는 겁니다. 예컨대, 자신이 태어나보니 고아였다거나, 편부 편모 가정에서 성장했다거나, 아니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서 신앙 생활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거나. 아니면 반대로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났다거나. 이런 모든 것들이 사실은 눈떠보니 우연하게 불가항력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계획되고 의도된 조건들이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적합한 환경을 개인의 몫이나 분량으로 친히 나누어 주셨다는 겁니다. 이러한 점에서 사회적인 기준이나 잣대를 적용하면서 자신의 환경이나 형편에 대해서 불평할 수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다. 왜요? 주님께서 직접 주셨기 때문이에요.
또 추가로 설명해 드리자면, 고린도전서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각각의 사람에게 나눠주신다는 개념은 고린도전서에서 자주 등장하는 굉장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하나님께서 칭찬해주시는데, 뭉뚱그려서 그냥 한번에 칭찬해주신다는 겁니까? 아니죠. 각각의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칭찬해 주신다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7장 7절 말씀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다고 하죠. 은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인데, 모두에게 똑같은 은사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각 사람에게 맞게 은사를 주신다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2장 7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이 말씀에서도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 주시면서 동시에 사람마다 주시는 것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첫 번째 내용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크고 선하신 뜻, 놀라우신 뜻에 따라서 주님의 자녀들에게 각각 나누어주셨습니다. 개인의 몫으로 특별하게 나누어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부모님? 우리의 가정환경? 우리의 성장 배경? 우리의 자녀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개개인에게 친히 수여하신 겁니다. 이러한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한다면 하나님께 진심 어린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라는 존재를 계획하시고 나의 모든 배경을 마련해 주셨는데, 이것에 대해서 사회적인 기준이나 잣대를 들이밀면서, 하나님께 부족하다고 불평할 수 있겠습니까? 왜 나한테는 이 정도밖에 주시지 않느냐고. 왜 저 사람한테만 많이 주시냐고 불평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불평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믿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으로만 만족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갈 것이냐. 어떤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볼 것이냐. 나의 삶을 어떤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바라보고 판단할 것이냐. 이 모든 것을 말씀에 근거해서 판단하고 사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세계관과 가치관의 출발점은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에게 주셨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이어서 고린도전서 7장 17절 말씀의 두 번째 부분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부르셨다는 겁니다. 이 내용은 첫 번째 부분과 연결됩니다.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모든 환경을 조성해 주셨는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스도인으로 구별해서 부르셨다는 겁니다. 여기서 부르셨다는 표현은 참여에 대한 요청을 권위 있게 전할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그냥 무슨 이름 부르듯이 아무렇게나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인즉슨,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개념 역시 고린도전서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사용되기 때문인데요. 고린도전서 1장 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너희를 불러. 여기서 불러라는 말은 “부르다”라는 동사로 표현한 것인데, 여기서 부르심이라는 개념이 그리스도인의 회심을 묘사하는 방식으로 사용됩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과 교제하게 하시는데, 불신자가 예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엄밀히 말하면 교제할 수 없죠. 그럼 언제부터 예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로부터 예수님과 깊이 교제할 수 있습니다. 자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 9절 말씀에서 “너희를 불러”라는 표현 자체는 그리스도인의 회심이 내포되어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 그런데, 이 부르심이라는 것을 영적으로만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어요. 왜 그런가 하면, 우리의 삶은 어디에 있습니까? 교회에 있습니까? 사회에 있습니까? 우리 성도님들의 주된 활동반경은 사회와 가정이죠. 물론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의 경우에는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 받은 그 상황이 다르겠습니다만, 어찌 되었든 주님의 자녀가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 받을 때, 그 삶의 정황은 사회 가운데 있습니다. 세상과 동떨어진 부르심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에요. 세상에서는 아무렇게나 살고, 교회 와서 눈물 찔끔 한번 흘리고 회개 기도하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까? 그렇지 않죠.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믿는 자로,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시는 것도 있지만, 이 세상 가운데에서 부르심 받는 의미도 함께 담겨 있는 겁니다.
자 그럼, 이제 두 번째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자녀들을 부르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두 가지로 표현이 가능한데, 하나는 구원과 관련된 부르심이고, 다른 하나는 일반적인 부르심이에요. 구원과 관련된 부르심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하나님께서 주님의 자녀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시는 겁니다. 허물과 죄로 죽어있던 주님의 자녀를 물과 성령으로 소생시켜 주신 거예요. 그렇게 부르심 받은 주님의 자녀는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께 부르심 받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빛과 소금된 역할을 감당하도록 부르심 받는 것이죠.
이제 고린도전서 7장 17절 말씀의 세 번째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세 번째 부분은 그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대로 행하라는 표현에는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각 사람에게 주님께서 나눠주신 대로, 각 사람을 하나님께서 부르신 대로, 자신의 삶을 살아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에 비추어 이 말씀을 보면, 인격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예컨대,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공부 열심히 해서 상위권 대학에 진학해서 대기업에 취업하거나 전문직 종사자가 되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라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죽기 살기로 어떻게든 성공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데, 한편으로 환경이 어려운 사람의 경우에는 이러한 경쟁에서 생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람에 따라 공부가 적성에 맞지 않는 경우도 있죠. 지능이나 인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단지 적성에 맞지 않는다거나, 다른 일이 하고 싶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다양한 직업을 가질 수 있죠. 예컨대, 사업을 한다거나, 건설 현장에서 일을 한다거나, 환경미화원으로 일한다거나, 유통업에 종사한다거나. 이런 식으로 다양한 직업을 가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마치 직업에 귀천이라도 있는 것처럼, 직업에 따라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녀를 교육할 때, 너 이렇게 공부 안 해서 어떻게 하려고 그래. 공부 안 하면 저 아저씨처럼 돼. 너 저렇게 살거야?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분들이 계실 수 있죠. 물론 이런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직종에 따라 내심 무시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언행이나 생각은 명백하게 비성경적입니다. 앞서 살펴본 고린도전서 7장 17절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의 부르심대로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간다는 전제하에서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면, 부르심에 응답하는 마음으로, 성실하고 신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칼빈 선생님은 노동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무리 천하고 추한 일을 할지라도, 그 일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찬란하고도 고귀한 일이다.”
이와 유사한 견해로는 16세기말에서 17세기 초에 활동한 존 코튼 목사님의 견해가 있습니다. 한번 들어보세요. “믿음이란 육적인 마음이 그것을 부끄러워할지라도 자신의 소명이 이끄는 대로 그 어떤 보잘것없는 일이라도 기꺼이 감당하는 것이다.”
칼빈 선생님과 존 코튼 선생님의 설명에 따르면, 사람의 직업에 귀천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돈을 잘 버는 직업이든, 돈을 잘 못 버는 직업이든 사람의 기준과 관점에서 함부로 무시하는 일은 없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어진 시간을 낭비한다거나, 성실하게 미래를 준비하지 않고 되는대로 그냥 아무 직업이나 갖게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부르심 따라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7장 17절 말씀을 통해 세 가지의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 각 사람의 모든 환경과 조건을 마련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은 우스갯소리로라도 만약이라는 가정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혼자서 아무리 상상의 나래를 펼쳐봐야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상대적 박탈감먼 더욱 커질 뿐입니다. 또한 그러한 생각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사하며 하루 하루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감사하려면, 먼저 우리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환경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집에 비해서 다소 부족한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감사해야 합니다. 특별히 오늘 직장인 연합 구역예배로 모였는데, 다들 경제활동을 하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요소들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체감하실 줄로 압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7장 17절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예수님께서 나에게 내 몫을 나누어주셨음을 인정하시고, 상대적인 박탈감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감사와 찬양을 우리 주님께 올려드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둘째로,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부르셨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구원받은 주님의 자녀로만 부르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에서 주님의 자녀로 부르심 받았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헛되이 보낼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목회자들만 하나님께 부르심 받은 것이 아니라, 모든 주님의 자녀들 개개인이 하나님께 특별하게 부르심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믿으십니까. 우리를 부르신 주님의 은혜에 응답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모든 주님의 자녀들은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야 합니다. 무슨 고귀하고 위대한 일을 하지 않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어떤 직장에 다니든 관계없습니다. 부르심 그대로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집사님들 권사님들. 돈도 벌어야 하고, 가족들도 돌보시느라 고생이 많으시죠? 제가 감히 그 고충에 대해서 다 헤아릴 순 없습니다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나누어주셨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셨으며, 우리의 삶을 포기하지 말고 그대로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감당하기 힘드신 때가 있겠습니다만, 고린도전서 7장 17절 말씀을 가슴 깊이 묵상하시면서, 주어진 삶을 온전히 살아내며, 수많은 스트레스 가운데에서도 진정 어린 감사를 하나님께 올려드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이 시간 나눈 말씀 기억하시면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이 주님의 뜻 가운데 주어졌음을 기억하시면서, 감사함으로 살아가지 못한 분이 계시다면,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올려드리시기 바랍니다. 또한 말씀을 통해 이제는 새롭게 결단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겠노라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부르신 그 부르심 따라 온전히 살아가겠노라 결단하는 기도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기도합니다.
은혜와 자비가 충만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각각의 사람에게 주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여러 가지 조건과 환경을 주시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인생을 살아가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특별히 이 시간, 가정을 돌보며, 직장생활을 감당하는 모든 우리 여자 직장인 구역원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인생 가운데 고된 일정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을 주시며, 간신히 버텨내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넉넉하게 감당하며, 사회에서 빛과 소금 된 역할을 온전히 감당해내는 모든 직장인 구역원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부르신 그대로 행하기를 원하오니, 이번 한주간도 우리 모두와 동행하여주시고 우리의 삶으로 주님께 영광올려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 헌금
찬송가 310장 찬송하시면서 준비하신 예물 올려드리겠습니다.
◈ 광고
1. 오늘 여자 직장인 연합구역예배 참석하신 성도님들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2. 내달, 6월 25일 주일 낮 1시 30분에 여자 직장인 연합구역예배를 중예배실에서 드립니다.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제가 축도하고 여자 직장인 연합구역예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지극히 크신 사랑하심과,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충만케 하심이, 감사함으로 부르심 따라 살아가기로 결단하며 나아가는 모든 주님의 자녀들 머리 머리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17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18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19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20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24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찬송가 장 함께 찬송하겠습니다.
< 축도 >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지극히 크신 사랑하심과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충만케 하심이,
모든 주님의 자녀들 머리 머리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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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 서론
2. 본론
3. 적용
4.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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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7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18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19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20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24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바른성경
17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대로,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여라. 나는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령한다.
18 누가 할례받은 상태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마라. 누가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냐? 할례를 받지 마라.
19 할례는 아무것도 아니고, 무할례도 아무것도 아니니,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20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마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으면, 차라리 그 기회를 이용하여라.
22 주님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다. 마찬가지로 자유인으로 있을 때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다.
23 너희는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신 몸이니 사람의 종이 되지 마라.
24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머물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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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고전 7:7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이에 상응하는 부분이 17절임. 고전 7:17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바울은 여기서 “각각”이라는 사상에 대해 폭넓게 다루어야 할 필요를 느낌. 이러한 의미에서 17절은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의 서론이라고 볼 수 있음. 17절은 앞절의 결론인 동시에 뒷 절의 서론임.
17절의 서론적인 표현은 20절과 24절에서도 반복됨. 고전 7:20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 고전 7:24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말하자면 17절-24절 단락은 “각 사람의 부르심”을 서론으로 시작해서 먼저 종교적인 문제를 다루고(18-19절), 맺는 말로 “각 사람의 부르심”을 반복함.
그 다음으로는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고(21-23절) 맺는 말로 “각 사람의 부르심”(24절)을 다시 반복함.
서론(7:17)
각 사람을 부르시고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다는 사상은 고린도전서 곳곳에서 등장하는 중요한 사상임. 특히 사역자에게 주어지는 기능(3:5), 하나님에게서 오는 칭찬(4:5), 은사의 다양성(7:7), 은사의 수여(12:7, 11, 18), 그리고 부활의 열매(15:23)는 이 구절에 주의를 기울이게 만듦.
여기에 담긴 “각각”의 사상적인 특징은 개인성에서 비롯된 자유와 전체성에서 비롯된 통제임.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수여하시는 개인성 때문에 각 사람은 충분한 자유와 권한을 지님. 그러나 각 사람은 지체로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서로를 손상시키지 않도록 그 자유와 권한을 엄격히 통제하지 않을 수 없음. 이것이 “각각”의 사상에 나타나는 일차적인 특징임.
각 사람의 자유와 구속은 각 사람에게 부르시고 나눠주시는 하나님 때문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남. 오직 주께서...하나님이 부르시고 나눠주시기 때문에 각 사람의 개인성은 절대로 침범될 수 없음. 각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절대적인 자유를 선사 받음. 그러나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나눠주신다는 사실이 각 사람을 제한함. 각 사람의 개인성과 자유가 하나님께 적대적이어서는 안 됨. 이것은 다른 사람을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는 제한보다 더 큰 통제임. 각각의 근원은 하나님이심. 그러므로 각 사람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해야 함. 그렇지 않으면 무질서로 나아갈 수밖에 없음. 따라서 하나님은 사람을 기계화(자유가 없는 상태)하지 않으시지만, 통제가 없는 상태로 내버려두지도 않으심. 그리고 바울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할 것을 명함.
종교적인 문제(7:18-20)
고린도교회는 종교적인 면에서 할례자와 무할례자로 구분됨. 교회 구성원의 다양성은 복음 전파로 인한 교회 확장에서 필연적인 일임. 그러므로 복음이 전파될 때 구성원의 다양성에서 비롯하는 여러 가지 문제점은 발생할 수밖에 없음.
사회적인 문제(7:21-24)
고린도교회는 종교적인 면에서와 마찬가지로 사회적인 면에서 두 부류의 사람들로 구성됨. 종과 자유인의 구분임. 이것도 이미 1:26에서 암시되었음.
복음은 노예 제도에 긍정적이지 않음. 하지만 복음은 이러한 제도를 표면적으로 거부하지 않음. 먼저 사람의 영혼이 변화되지 않으면 제도는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기 때문. 표먼적인 제도의 변화보다 내면적인 영혼의 변화가 급선무임. 그러므로 바울은 제도를 변화시키는데 집중하지 않고 영혼을 변화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임.
바울의 논지는 종의 신분을 가진 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종의 신분 그대로 있는 것을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사회적 신분의 변화를 의미하지 않기 때문.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인 신분을 변화시킬 기회까지 포기하라는 말은 아님. 종에게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그 기회를 사용하라는 것. 사실상 노예 신분은 권장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 바울은 신분과 상태를 개선할 기회를 제한하지 않음.
그러나 종은 자기 신분 그대로 머무는 때에 염려하지 않아도 됨. 왜냐하면 주 안에서 부르심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 되기 때문. 주 안에서 부르심 받은 자는 이미 변화를 겪음. 사회적인 신분과 상태에는 변화가 없지만 그의 영혼과 그의 인격은 변화를 체험함. 육체는 여전히 사회 제도에 매여 있지만 영혼은 이미 자유인과 같음.
영혼의 자유는 육체의 매임을 새롭게 이해시키며, 죄에서의 자유는 사회적인 구속을 새롭게 이해시킴. 주님 안에서의 부르심은 사람을 죄에서 자유롭게 만드는 동시에, 죄에서 자유인이 된 그 사람은 그가 속한 현재의 사회적 신분을 감당하게 함. 주님의 자유인이기 때문에 육체로는 사회적 신분을 제한당하는 종이라고 할지라도 주님과는 인격적인 교제를 나눔. 그는 자유인으로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의 자유를 누림. 주님의 자유인이 되었으므로, 종으로 그대로 남는 것은 아무런 염려거리도 되지 않음. 억지로 이 신분을 벗어나려고 노력하지 않음.
사회적인 자유인에 대해 바울은 그대로 남으라고 말할 필요가 없음. 단지 자유인이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가 언급될 뿐임. 사회적인 자유에 대한 모든 권리를 소유하고 있더라도, 그 자유를 남용해서는 안 됨.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사회적 자유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 그리스도께 유익이 되지 않는다면 자유로운 행동을 제한해야 함. 그는 자유인이지만 종으로서 행동함. 종으로서 그리스도를 섬김. 자신의 자유를 기꺼이 그리스도께 바침.
그리스도인이라면 종이건 자유인이건 신분에 개의치 않음. 문제는 어느 신분에 속하느냐가 아니라, 그 신분 앞에 어떤 수식어가 따라붙느냐이다. 주께 속한 자유인인가? 그리스도의 종인가? 주께서 각 사람을 부르시는 방법도 다르고 각 사람이 주님께 부름받은 상태도 다름. 하지만 부르심의 결과는 언제나 한 가지임. 주께 속한 것. 그리스도의 것이 되는 것임. 이를 위해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임. 그리스도의 구속이 사람을 그리스도의 것으로 만듦. 그리스도인은 어떤 신분에 있든지 간에 값이 치러져서 주께 속한, 그리스도의 라는 수식어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사람에게 매이지 말고 하나님께 매일 것을 말함.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각자의 신분을 고수할 것을 말하면서도, 그 신분에 지나치게 관심을 갖다가 결국 사람에게 매이게 될 것을 경고함. 중요한 것은 신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 되는 것. 하나님께 매이는 것에 있음.
사회적인 면에서 어떤 이는 종일 수 있고, 어떤 이는 자유인일 수 있음. 그러나 어떤 신분이든지 간에 하나님께 매이며, 중심을 하나님께 두는 한, 그 신분을 그대로 지니고 있어도 자족할 수 있음.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말함.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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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GTC
고전 7장에 등장하는 이슈. 종과 자유인. 유대인과 이방인.
복음의 새로운 종말론적 현실은 “인간적인 범주화”를 폐기함. 그러나 더 심오하고 현실적인 의미에서 이를 상대화하고 재정의함.
데밍은 다음과 같이 논평함.
1) 어떤 그리스도인도 자신의 삶의 환경에 의해 노예처럼 속박당할 수 없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그리스도인이 되었음.
2) 자신이 처한 삶의 상황을 부당하게 바꾸려는 노력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효능을 무시하는 것이며, 이는 그 자체로 노예의 한 형태를 드러냄. 이로써 할례자와 무할례자라는 짝은 그리스도인에게 외적인 환경은 크게 중요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인은 어떤 방법으로든 변화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일반적인 원리를 설명하는 기능을 함.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 몸을 가진 삶은 복음에 일치하는 방식으로 영위되어야 하고 그것을 현실에서 보여주어야 하는 영역임. 고린도 지역 사람들은 보다 좋은 환경과 보다 높은 신분을 추구했음.
바울은 사역, 영적인 은사, 부활의 존재 방식에 대한 문맥에서 디도미를 자주 사용한다. 일상생활의 환경은 바로 주께서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에 따라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것이다. 부르심과 섬김에 대한 바울의 개념은 자율에 특권을 부여하는 근대의 세속적인 개념과 다르다.
20a 하나님께서 어떤 구체적인 상태나 역할로 부르신 것을 의미함.
바울의 논리는 일차적인 의미에서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그 안에 지상의 상황의 전환과 지양을 포괄할 수 있으며, 그것은 어떤 상황을 섬기기 위한 부르심이 될 수 있게 함.
자유는 자신을 더 낫게 만들려는 데 있지 않고, 17-24절의 바울의 주장을 따라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데 있다.
20절
이 절은 수미상관적 구조에서 핵심에 해당함. 이 구조는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부르심 받을 때 처해 있던 상황에 머물러 있으라는 말로 시작되고 마무리됨.
전반부(18-19절)는 할례에, 후반부(21-23절)는 노예의 신분에 초점을 맞춤.
바울은 모든 사람이 노예이면서 동시에 자유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기본적으로 똑같은 상황에 놓여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마치 각 개인의 외적이며 세상적인 신분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노예가 겪는 고통을 단순히 약화시키지 않음.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신분의 차이는 폐지됨. 모든 그리스도인은 종말론적인 균일화에 의해 그리스도에게 속한 노예의 신분 안에서 역설적인 자유를 누림.
자유인은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고 노예는 주님의 자유민이 된다. 그리스도의 노예가 된다는 사실은 다른 어떤 가문의 어떤 신분보다 높은 것이다.
이 모든 것은 23a를 이해하도록 준비시켜준다. 그리스도는 값을 치르고 산 자들을 책임지고 돌보신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다. 이는 바로 그리스도인의 신분이자 영예이다.
23b-24절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사건으로 치른 값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자신의 소유로 샀다면, 신자들은 다른 사람이나 대리인이나 제도에 종속되기 위해 자신을 자기 마음대로 팔아넘길 수 없다.
23a는 사회적, 재정적 유익을 위해 자신을 노예로 팔고자 하는 그리스도인 자유민들에게 관심을 갖는다. 해당 문맥은 바울의 관심이 수신자들이 유명 인사들과 어울리거나(1:10-12) 후견인과의 관계와 소유를 통해 신분 상승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것에 대해 그들을 경고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암시한다. 이는 고린도의 성취 지향적이며 경쟁적인 배경과도 일치한다. 바울은 상황뿐만 아니라 자세에도 관심을 갖는다. 즉 공적인 세상과 개인의 태도이다. 신자들은 인간의 관점에서 모든 것이 어떤 신분에 도달하느냐에 달려 있는 명예와 수치의 문화에 종속되는 상황으로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
기원후 1세기 그리스-로마 사회의 노예제도
어떻게 노예가 되는가?
a. 주요 도시에서는 대략 노예 인구의 1/3이 노예 신분의 여인에게서 자녀로 태어난 이들이었음. 전체 인구의 1/4이 노예였을 것임. 노예의 신분으로 태어난 자녀들은 노예 주인의 소유물이 되었음.
b. 노예가 되는 주요 원인은 종종 사람들이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을 노예로 파는 것이었느넫, 빚을 갚고 남은 돈으로는 저축을 하거나 자신의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자금을 마련할 수도 있었음. 자기 판매 범주 안에서는 주인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기도 했음. 어떤 경우에는 유명하고 성공적인 주인에게 자신을 판다는 것은 심지어 미래의 번영과 현재의 보호를 위한 투자로 인식되었음. 하지만 거기에는 언제나 위험이 따랐음.
c. 보호자가 없는 어린아이를 유괴하여 파는 행위와 성인을 유괴하는 행위는
불법적이지만 실행되고 있었음. 어떤 이들은 갓난아기를 팔기도 했는데, 그냥 내버려져 죽기도 했음.
d. 전쟁 포로와 적대국 백성을 노예로 삼는 일도 종종 일어났음.
노예의 역할과 지위의 큰 차이
법적인 측면에서 엄밀히 말하자면 노예는 개인의 권리를 지닌 온전한 인격체가 아닌 한 물건, 곧 주인의 재산이었음. 심지어 노예의 결혼은 결혼이 아니라 노예와의 결합이었음. 따라서 노예를 소유한 자들은 자신에게 속한 노예에게 극심한 학대와 폭력을 행사할 수 있었음. 또한 고문과 신체적인 형벌도 가해졌음. 특히 여성 노예들은 성적 만족의 대상으로 남용될 우려가 있었음. 여성 노예들은 종종 주인의 아들에게 이용당할 것을 예상해야 했음.
노예의 신분과 위로 올라갈 잠재적 가능성은 다음 두 가지 요소에 달려 있었음. 1) 집안에서 노예의 역할. 농사짓는 일을 하는 것에서부터 재산 관리자, 가사 책임자, 비서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음. 이는 개인의 역량과 우호적인 기회에 달려 있었음. 2) 더 높은 신분의 가정으로 옮기는 것. 일부 부유한 가정은 수백 명에 이르는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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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CNT
무할례와 할례, 종의 상태와 자유민의 상태는 혼인, 이혼, 독신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것들은 인종적 유산이나 사회적 지위와 같은 이 땅의 어떤 상태도 하나님에 의한 그리스도인의 부르심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신적 원리를 예증해 준다.
종들은 자유인들과 똑같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 이들의 사회적 지위에는 영적인 중요성이 전혀 없다. 그리스도인이 할례를 받느냐 받지 않았느냐, 종이냐 자유자냐, 혼인했느냐 홀로 있느냐는 하나님께 중요하지 않다. 한편의 조건이 나쁘고, 다른 편의 조건이 좋은 것이 아니다. 또한 한편의 조건이 덜 좋고, 다른 편의 조건이 더 좋은 것도 아니다. 어떤 조건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에 장애가 되지 않는데, 그리스도인은 이제 다른 어떤 것이 아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서만 규정될 뿐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지위에서의 변화는 부르심의 전제 조건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7:19), 특히 음행을 피하는 것(7:2)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할례를 받았든 받지 않았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혼인을 했든 독신이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기독교적 자유를 즐기기 위해 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효과적으로 섬기기 위해 올바른 상황을 찾을 필요가 없다.
그 결과 바울은 이 단락에서 세 번에 걸쳐(7:17, 20, 24) 고린도 교인들이 그들이 부름을 받은 상황에 그대로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그대로 살라”, “이것 안에 그대로 머물라” “하나님 앞에서 이것 안에 그대로 머물라”.
종교적 근거들을 들어서 삶에서의 지위를 바꾸는 것은, 이것이 오직 은혜에 기초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만한 것인지 아니면 부정하는 것인지보다는, 이 세상적 지위에 더 많은 중요성을 두는 것이다. 구원의 제공은 그들에게 그들의 인종적, 사회적 가정적 지위를 바꾸도록 요구하지 않은 채로 그들에게 주어졌다. 사실상 종교적인 이유들로 변화를 만들려는 시도는 하나님의 은혜에 반대되는 것이다.
요지는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삶의 상황을 바꿀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 삶의 상황을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관련하여 지위의 변화가 불필요하지만, 이것이 지위 변화를 금하는 것은 아니다. 종이 되는 것은 기독교적 삶을 사는 것에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자유를 위한 기회가 온다면, 종은 그것을 잡아야 한다. 자유롭게 되는 것에 이점들이 있으나, 이 이점은 하나님 앞에서의 가치나 지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 단원에서 바울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형태를 띤다.
1. 기본 원리에 대한 진술: 주께서 나누어 주시고, 하나님이 부르신 대로 너의 삶을 살아라(7:17)
a. 예: 할례와 무할례(7:18)
b. 예: 할례와 무할례는 아무것도 아님(7:19)
2. 기본 원리의 재진술: 네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안에 머물라(7:20).
a. 예: 종의 상태(7:21ab)
b. 예외: 네가 너의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을 이용하라. (7:21cd)
c. 이론적 근거: 종은 주님의 자유민이며, 자유인은 주님의 종이다(7:22-23).
3. 기본 원리의 재진술: 하나님 앞에서 네가 부름을 받은 부르심 안에 머물라
(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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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NT 고린도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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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삶 – 조엘 비키
pp.574
노동에 대한 견해
종교 개혁자들은 노동에는 본질적인 위엄이 있다고 믿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천하고 추한 일을 한다 할지라도, 그 일이야말로 하나님 보시기에는 찬란하고도 고귀한 일이다.”
존 코튼은, “믿음이란 육적인 마음이 그것을 부끄러워할지라도 자신의 소명이 이끄는 대로 그 어떤 보잘것없는 일이라도 기꺼이 감당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노동에 대한 개혁주의의 가르침
1) 우리는 일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는 자로 부르심 받았다.
2)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일에 만족하셨다.
3) 하나님은 우리의 노동을 통해 우리에게 일용할 것을 공급하신다.
4)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일할 것을 명령하셨으므로, 사람은 그 명령에 따라 일해야 한다.
5)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일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를 원하시며, 그것을 통해 인정받기를 원하신다.
6)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개인의 필요를 채우시는 특별한 은사들을 공급하신다.
7) 타락은 우리의 노동에 근본적인 영향을 끼쳤다. 노동은 수고로운 일이 되었으며, 가시와 엉겅퀴가 우리의 노력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타락한 인간은 노동을 통해 창조주를 영화롭게 하는 대신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돌린다.
8) 노동이란 개인적 활동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활동이다.
9) 하나님께서는 아름다움을 기뻐하신다. 성경은 단순히 노동의 기능적이며 공리주의적 양상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10) 그리스도께서도 능동적 순종을 통해 일하셨으며, 신자의 노동 역시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의 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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