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유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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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롬 4:1-12
제목 : 믿음의 유익
호사유피 인사유명,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훌륭한 일을 해서 후세에 명예로운 이름을 남겨야 한다는 유명한 속담이죠. 이 속담은 많은 사람들에게 동기부여를 제공합니다. 물론 국가와 사회에 어떤 기록을 남길만한, 역사책에 기록될만한 큰일을 하는 분들은 극소수에 불과하겠습니다만, 내가 속해 있는 어떤 공동체나 직장 또는 가족 구성원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특정 부분에서만큼은 기여도를 남기고 싶은 욕구가 있기 마련이죠. 이러한 마음은 사람에게 책임감을 부여하고 행동에 대한 동기를 자극합니다. 너무 과하지만 않으면 얼마든지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죠.
하지만 이러한 사고방식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동일하게 적용된다면 영적으로 심각한 문제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를 중심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인식하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전적인 은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믿음에 대해서도 잘못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오해가 점점 발전하게 되면, 교회에서 헌신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비성경적으로 사고하게 되지요.
따라서 이러한 오해를 불식시키고, 건강하고 바른 신앙생활을 영위하려면, 믿음에 대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본인이 교회에서 헌신하는 부분에 대해서 그 어떠한 기여도나 공헌도를 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를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말을 진실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나의 나 됨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고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를 위해서 우리는 믿음의 유익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말씀인 로마서 4장에서 의로 여겨짐에 대해서 기록하는데요. 로마서 1장부터 3장까지의 말씀을 보면, 의로 여겨짐, 칭의에 대한 기본적인 교리는 이미 충분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다시 한번 칭의에 대해서 길게 설명합니다. 기본적인 칭의 교리를 설명한다기보다, 아브라함과 다윗을 예로 들면서 칭의에 대한 심화 개념을 다루는데요. 이 시간 본문 말씀을 함께 살펴보면서, 믿음을 통해 우리가 어떤 유익을 얻을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함께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사도 바울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그 어느 것도 자랑할 수 없으며, 그 어떠한 공헌도나 기여도를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예로 듭니다. 로마서 4장 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in) 시작.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사도 바울이 아브라함을 평가절하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out) 2절 말씀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행위가 무익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사도 바울은 야고보서 2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친구, 하나님의 벗이라고 칭함 받은 사실을 깎아내리지 않습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은 우리의 영적인 조상이자 믿음의 조상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들의 롤모델로서 믿음의 삶을 살아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브라함이 인생에서 실천한 모든 믿음의 행위들은 그가 하나님께 의롭다고 여겨짐을 받는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그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것은, 아브라함이 언젠가 하나님께 행위로 보답할 수 있기 때문에 주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주신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사도 바울이 아브라함의 믿음과 의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로마서의 수신 대상인 로마 교회에 있는 전통적인 유대인들을 향한 믿음의 도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아브라함과, 개신교에서 생각하는 아브라함의 괴리는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외경에 있는 “희년서”라는 책을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그의 모든 행위에서 완전했으며, 일평생 그의 의를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23:10).”
또 마카비1서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이 발견되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것이 아브라함에게 의로 여겨지지 않았는가”
이런 내용을 보면 아브라함은 완전무결한 사람으로 원죄도 없어 보이고, 자신의 행위만으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으며, 완전한 행위를 통해 하나님께 의로움을 얻을만한 인생을 살아낸 것처럼 보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솔로몬의 지혜서나 바룩2서와 같은 외경에서도 아브라함은 행위로 율법을 완벽하게 지킨 인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은 완벽한 신앙의 모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이와같이 생각하는 유대인들에게 담대히 선포합니다. 로마서 4장 2절 말씀을 다시 한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in)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아멘. (out) 사도 바울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행위로 자랑할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믿음으로 고향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난 것이나,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친 것과 같은 위대한 믿음의 실천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그의 행위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믿음의 행위가 무슨 소용이 있는 걸까요? 아브라함이 위대한 믿음의 인생을 살아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다면 믿음의 유익은 도대체 무엇이라 생각해야 할까요. 사도 바울에 따르면 믿음의 유익 (in) 첫째는, 의로 여겨주시는 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4장 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아멘. 신실한 행위로 율법을 하나도 빠짐없이 완벽하게 지켜야만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out)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는 죄인을 의인으로 여겨주십니다. 의롭다고 여겨주실만한 행위를 하나님께 계속해서 보여 드리고 완벽하게 증명해야만 의인의 신분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영적으로 무기력한 죄인을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도님들 인생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믿으신 때를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처음으로 믿었을 때, 갑자기 나도 모르게 믿음이라는 것이 생기던가요? 갑자기 나도 모르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려는 마음이 샘솟듯이 솟아납니까? 내가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는데, 갑자기 하나님께 믿음을 고백하나요?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않죠. 개인차는 존재하겠습니다만, 본인이 하나님을 믿겠다는 믿음의 결단을 내림으로써 신앙생활이 시작됩니다. 이 과정에서 신자의 지분이 얼마나 될까요? 말씀을 귀로 듣고, 머리로 생각하고, 가슴으로 반응하고, 결단하고, 믿음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 이 과정은 스스로 해내야 하는 부분이지 않습니까? 무엇에 홀린 듯이 교회 가고, 예배 시간에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거나, 딴생각하면서 앉아 있는데, 갑자기 은혜받아서 눈물 흘리는 일은 거의 없지 않습니까?
이러한 부분을 종합해 보면,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되는 과정이나 신앙생활하는 과정에는 인간적인 노력이 수반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과정에 있어서 요구되는 노력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노력은 본질적으로 우리의 영적인 신분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우리 영혼에 본질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믿음을 통해 얻게 되는 의로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내용을 설명하면서 창세기 15장 6절 말씀을 인용하는데요. 창세기 15장 5절과 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in) 시작.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out)
이 순간이 아브라함에게 어떤 순간인가 하면,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정 가운데 불완전한 시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직 아브라함에게 자식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내용이 언제 어떻게 성취되는지 전혀 몰랐지만, 하나님께서 성취해 주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해 보였겠지만,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여겨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여겨주신 것이죠. 내가 약속한 내용을 믿기 어려웠을텐데, 네가 나를 신뢰하는구나.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있구나. 이런 식으로 칭찬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죄인의 신분에서 의인의 신분으로 격상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본래 죄인의 신분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아브라함이 원래 의인이었는데 하나님께서 굳이 반복해서 아브라함을 의인의 신분으로 칭하시는 것은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죄인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죄인이었던 아브라함이 행위로는 의인의 신분을 얻을 수 없었지만,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이 기대하지도 않았던, 상상하지도 못했던 의인의 신분을 얻게 된 것입니다.
자 그래서 아브라함은 원래 죄인이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삶으로 보여준 믿음의 행위가 어떻게 여겨지는지. 의인으로 칭함을 받는 데 있어서 행위가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행위가 신자에게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의인의 신분을 획득하는 데 있어서 행위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겁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죄인이 어떤 행동을 하든 그 행동은 절대적인 존재 앞에서 선한 행동으로 여겨질 수 없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여겨진 것은 아브라함이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의인이라고 불린 것이 아닙니다. 물론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아브라함은 의인으로 여겨질 만한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죄인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의인이라고 불린 사건은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엄청난 은혜를 받은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브라함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선택받은 모든 주님의 자녀들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원받았다고 해서 우리가 영적으로 다른 사람에 비해 특별히 더 잘났다고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가 어떻든, 우리의 본성이 어떻든 관계없이 우리의 믿음만 보시고 의인이라고 칭해주셨습니다. 의인이라고 부르실만한 이유가 있어서 의롭다고 여겨주신 것이 아닙니다. 본성과 마음은 여전히 죄인의 상태에 머물러 있을지라도 의인이라고 칭해주시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의 유익이자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사도 바울은 의로 여겨짐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는데요. 로마서 4장 4절과 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out)
정해진 시간 동안 일을 한 사람이 일당을 받는 것은 노동의 대가이자 정당한 보상이기 때문에 은혜라고 볼 수 없지만, 일을 하지 않은 사람이 일당을 받는 것은 은혜입니다. 반대로 경건하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 그 사람이 경건하지 않더라도 의로운 사람이라고 여겨주시는 것. 이것이 바로 은혜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이 하나님을 믿을 때, 의인이라는 신분을 대가나 보상으로 주실 이유가 전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인이라는 신분을 허락하시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엄청난 은혜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이 로마서 4장 3절, 아브라함의 칭의 내용에 이어서 등장한다는 점을 통해 이 말씀이 일차적으로는 아브라함과 관련되어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로마서 4장 5절에서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가 아브라함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로마서 4장 23절과 24절 말씀으로 연결되는데요.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인으로 칭해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만 예뻐하고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의로 여기심 받을 우리를 위한 목적이 담겨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out)
이제 믿음의 유익 첫 번째 내용을 정리하면서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의 설명을 들려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의롭다 하시는 사역을 하심에 있어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사람 안에 있는 경건이나 선을 조금이라도 존중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사역을 하시기 직전에 하나님은 그 사람을 오로지 경건하지 않은 자로 보실 뿐이며, 그렇기 때문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사람 안에 있는 경건은 그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을 근거가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전제도 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 외에는 그 어떠한 것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근거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과, 의롭다고 여기시는 하나님의 선포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믿음의 유익 두 번째 내용을 살펴볼텐데요.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유익 두 번째는, (in) 의로 여겨진 사람에게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4장 7절과 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in) 시작.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은 시편 32편 1절과 2절 말씀을 인용한 말씀인데요. 시편 32편 1절과 2절 말씀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in) 시작.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아멘. (out)
이 말씀에 따르면 사람의 행복은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시는 은혜에 달려있습니다. 죄를 용서받으면 행복한 사람이고, 죄를 용서받지 못하면 불행한 사람이라는 것이죠. 이런 말씀은 21세기의 세상 물정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죄사함만으로 인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고 말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일 겁니다. 그런데 시편 32편 말씀을 보면, 행복의 기준은 죄사함을 받았느냐 받지 못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다른 조건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시편 32편 1절 말씀을 다시 보세요. (in) 노란색 글씨 부분은 수동태로 표현된 내용인데요. 허물의 사함을 받고. 이 내용을 직역하자면, 허물을 용서받고 또는 허물이 제거되고, 죄가 가려진 사람은, 죄가 덮여진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out)
본인이 직접 죄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본인이 지은 죄가 타인에 의해 가려지고, 죄값을 지불하지 않았는데, 본인이 빚진 금액 전액을 탕감받은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이어서 시편 32편 2절 말씀 다시 보세요. (in)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않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out) 다시 말해 하나님께 심판받지 않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시편 32편은 죄사함에 대한 기쁨을 찬양합니다.
자 그런데, 이러한 시편 32편 말씀을 기록한 사람은 다윗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윗이 죄사함 받는 기쁨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성도님들은 다윗을 어떤 인물로 기억하십니까? 예컨대, 다윗은 골리앗을 때려잡은 사람, 장인어른인 사울에게 미움받아서 오랜 시간 동안 고생하면서 도망 다닌 사람, 언약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올 때 너무 기뻐서 춤을 추다가 옷이 벗겨진 줄도 몰랐던 사람. 뭐 이런 식으로 알려져 있죠. 하지만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하고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를 모의 살해함으로써 하나님께 책망받고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겪게 되는데요. 그 일들 가운데, 다윗이 하나님께 죄악을 용서받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 일이며, 은혜로운 일인지를 깊이 체험합니다. 다윗은 이러한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시편 32편 말씀을 기록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러한 다윗의 고백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로마서 4장 7절과 8절 말씀을 다시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in)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아멘.
하나님께 의롭다고 여겨진 사람에게는 어떤 유익이 있습니까? 죄인의 신분에서 의인의 신분으로 변화된 것만으로도 엄청난 은혜인데, 여기에 죄사함의 은총과 복이 있다는 선언까지 추가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오늘 살펴본 내용을 토대로 우리 삶에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in) 하나님께 의롭다고 여김 받은 주님의 자녀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을 매일 매일 품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행위는 의로움을 얻는 데 아무 소용이 없으므로 믿음에 미치는 행위의 영향력을 완전히 배제하고, 오직 믿음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증거했습니다. 이를 증거하는 과정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이라는 구약성경 인물 중에 대표성을 띤 인물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요. 두 인물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와는 다르게 사도 바울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불경건한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며, 다윗은 행위로 범죄를 저질렀다가 은혜로 죄사함 받은 인물로 표현됩니다. (out)
이를 통해 우리는 아브라함과 같이 불경건한 사람이었지만, 오직 주님의 은혜로 의인의 신분을 얻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다윗과 같이 죄악된 본성으로 인해 범죄하며 살아가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이기 때문에, 누군가를 판단하거나 스스로 교만한 마음을 품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철저하게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님들, 부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자녀다운 선한 마음을 품고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어서 두 번째 적용점은, (in)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에 대한 개념을 점검하고, 이미 나에게 베풀어주신 축복에 대해서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따르면 축복이란 무엇입니까? 내가 무언가를 가지고 싶을 때, 하나님 저거 주세요. 이렇게 기도해서 응답받는 것이 축복입니까? 저 사람보다 잘살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했을 때 물질적으로 차고 넘치게 복을 주셔야 축복받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죠. 로마서 4장 7절 말씀에 따르면,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시지 않아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죄인인 사람을 의인이라고 여겨주시니, 이것만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차고 넘치는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매일 매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처음 예수 믿었던 그 순간만 기억하고 간직할 것이 아니라, 그 순간 이후로, 의인의 신분을 가지고 주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죄사함의 은총을 얻은 것이 복이라고 했으니,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기억하면서 매일 매일 우리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려야 할 것입니다. (out)
마지막 세 번째 적용점은, (in) 의롭다 여기심 받은 주님의 자녀는 하나님께 행위로 인정받기 위해 헌신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다보면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물심양면으로 헌신하는 행위가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따르면, 인간의 행위는 어떤 방식으로 행하든 온전할 수 없으며,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습니다. 선한 믿음의 행위를 보이기 위해서 최선의 최선의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 흠없는 헌신이 될 수는 없습니다. 죄악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완벽한 헌신을 올려드릴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헌신의 불완전성을 인지하고, 헌신이라는 행위를 통해 하나님께 인정받고자 하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성도가 헌신할 때, 어떻게 얼마나 헌신하는지도 중요할 수 있겠습니다만, 하나님은 가장 먼저 그 행위의 중심을 보십니다.
만약 어떤 성도가 하나님을 온 마음 다해 사랑하지 않으면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으면서 교회에서 헌신하는 행위로 인정받으려고 한다면, 그 성도는 교회 공동체 내에서 칭찬받고 인정받을지는 몰라도 하나님께는 칭찬받을 수 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마음이 동하지 않을 경우에 헌신하지 않아도 될까요?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때까지 쭉 쉬어도 될까요? 그렇지 않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가만히 있는다고 생기지 않습니다. 행위로 증명하려고 하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마음의 중심을 먼저 돌아보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헌신을 통해 우리 주님께 영광 올려드릴 수 있도록 스스로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성도님들, 오늘 함께 나눈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믿음의 유익을 매일 매일 온전히 누리시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전적으로 무능력하고 부패한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해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그 어떠한 권리도 자랑할 수 없으나, 오직 주님의 은혜로 의인의 신분을 허락해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한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주님의 은혜와 죄사함의 축복을 늘 기억하며, 감사가 넘치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모두의 심령을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찬송가 433장 함께 찬송하겠습니다.
< 축도 >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지극히 크신 사랑하심과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충만케 하심이, 믿음으로 의롭다 여기심 받고, 죄사함의 은총이 진정한 축복임을 고백하는 모든 주님의 자녀들 머리 머리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개요
1. 서론
“명예, 공헌도, 기여도에 대한 욕구 또는 욕심”이 미치는 하나님과의 관계.
나의 전적인 무능력함을 인정하는가?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전적인 은혜를 인정하는가?
2. 본론 – 믿음의 유익
1) 의로 여겨짐
2) 복이 있도다
3. 적용
1)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함과 의인으로 여겨주심에 대한 감사함을 재점검하기
2) 축복에 대한 재정의
축복이란 무엇인가? 내가 바라는 것을 들어주시는 것을 축복이라고 생각하는가?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것이 축복.
4. 결론
믿음의 유익. 믿음으로 무엇을 얻는가? 그리고 나는 무엇을 얻었는가.
본문
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9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10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11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바른성경
1 그러면 우리가 육신으로 우리 조상 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겠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없다.
3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라고 하였다.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품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않고 보수로 여겨지지만,
5 경건하지 못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분을 믿는 자에게는, 비록 행위가 없어도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진다.
6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도 말하기를
7 "불법을 용서받고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다.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않으실 사람은 복이 있다." 라고 하였다.
9 그러면 이 복이 할례자에게만 내리는 것이냐? 아니면, 무할례자에게도 내리는 것이냐?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라고 하였다.
10 그러면 그것이 어떻게 의로 여겨졌느냐? 그가 할례를 받았을 때냐, 아니면 할례를 받기 전이냐? 할례를 받았을 때가 아니라 할례를 받기 전이었다.
11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할례를 받기 전에 얻은 믿음의 의를 확증하는 것이니, 이는 그가 무할례자로서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롭게 여기심을 얻게 하려는 것이었다.
* 신약의 구약 사용 – 그레고리 빌, D.A.카슨
p. 336
바울은 아브라함 이야기를 창 15:6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그는 자랑을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의 문맥 속에 두며 초기 유대교가 가진 아브라함의 이미지를 뒤집는다. 4:3에서 바울은 창 15:6을 인용하는데, 이 인용은 70인역과 거의 일치한다. 70인역은 여호와(퀴리오스)를 하나님(데오스)으로 바꾼 것 외에는 맛소라 본문을 따르고 있다.
“여긴다”는 것은 단순한 천상의 계산이 아니다. 그것은 유효하며 복을 주고 복을 보증하는 것이다. 이 여기심은 믿음 자체를 통해서만 받을 수 있다. 일하는 자에게는 보수가 의무적으로 주어진다(4:4). 대조적으로 믿음은 그 근원이나 활동에 있어서 수동적이며 다른 이의 무조건적인 호의에 의존한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명확한 내용과 외형을 가지고 있다. 그는 경건하지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시는 분을 믿었다.
바울의 시선은 창 15:6에 고정되어있지만, 이 구절이 나타나는 서사적 문맥도 고려한다. 보상에 대한 그의 언급은 틀림없이 15:1에 있는 아브라함의 환상을 상기시킨다. 환상 중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는 너의 방패이다. 너의 상급은 지극히 클 것이다.”라고 약속하신다. 이 상급과 이후의 설명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최초의 약속, 즉 하나님이 그를 큰 민족으로 만들고 세상의 모든 족속에게 복이 되게 하겠다는 약속(12:1-3)을 재수립하는 것이다. 창 15:6에 대한 바울의 암시는 그가 아브라함의 믿음을 하나님의 약속과 연결시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칭의가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의 근원이 된 그 약속의 예기적 시행으로 이해한다. 아브라함의 칭의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약속에 구체적으로 매여있고 그것으로부터 정당하게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여겨주신 것은 후손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의 대답을 하나님이 인정해 주신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바울의 묘사는 분명히 아브라함이 불경건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창 26:5에 근거해서 서사를 읽을 때 이는 충격적인 주장이다. 아브라함은 불경건한 자들 중 하나이다. 하나님은 그를 구원 역사의 도구로 선택하셨다. 그는 외롭고 연약하며 변명할 수 없는 개인이었는데,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그렇게 된 자였다. 자식이 없고 집이 없으며 여기저기 떠도는 아브라함은 에덴동산의 안전과 결실을 누린 아담과 대조를 이룬다.
하나님께서는 불경건한 자들을 의롭다고 여기신다. 이 행동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명백히 금지하신 것이다(출 23:7, 잠 17:15, 24:24-25, 사 5:23, 막 2:7b).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행동하시며 자신의 심판을 극복하신다. 이는 하나님이 그의 무법한 백성들을 다루시는 것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아브라함의 칭의는 다윗의 경험과 대등하다. 다윗은 성경에서 용서받은 죄인들 중에서 가장 특출나다. 결과적으로 다윗은 행함이 없는 칭의에 대한 두 번째 증인으로 봉사한다. 그는 율법의 위반자로서 말한다. 다윗에게 있어 행함은 율법에 대한 순종의 행위가 아니라 도리어 무법한 행동들과 죄이다(4:7). 자신의 행위를 통해 주어지는 의를 소망하는 자들은 율법과 죄와 진노를 초래하는 율법의 작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롬 3:20, 4:15). 행함이 없이 의로 여김을 받는 것은 다름 아닌 죄의 용서이며 죄를 계산하지 않는 것이다. 보응과 처벌이 있어야만 하는 곳에 받을 자격 없는 호의가 주어지는 것이다.
다윗을 언급하면서 바울은 70인역 시 31:1-2(32:1-2 MT)을 변형없이 따른다. 70인역을 따라서 바울은 첫 번째 절에서 단수 형태를 복수 형태로 바꾼다는 점에서 히브리어 성경과 다르다.
바울의 경우 고백은 믿음 안에 은연중에 포함된다. 우리의 인격을 압도하던 죄는 믿음 안에서 극복된다. 믿음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아브라함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시편의 확대되는 문맥은 의로 여기심이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효력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시편에서 죄 용서는 몸과 마음을 치료하고, 고통의 때에 구원을 주며,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사랑스런 돌보심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시 32:3-11). 결과적으로 바울에 의하면 의로 여기심은 생명을 (재)창조하는 축복이다. 시편 32편이 묘사하고 있는 모든 유익을 유효하게 하는 것은 죄 용서이다.
박형용 로마서 주해
4:1-3
바울은 4:1을 시작하면서 운(그런즉)을 사용함으로 믿음의 법으로만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있다고 설명한 바로 전 구절(롬 3:21-31)의 논리를 이어 받아 아브라함의 경우를 예로 든다. 바울은 자신을 유대인과 동일시하면서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라고 표현한다. “조상”(προπάτωρ, hapax legomenon)이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사용되는데, 이를 통해 바울은 아브라함이 유대인의 조상임을 강조하고 바로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문제는 아브라함이 어떻게 의롭다 하심을 인정받았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바울은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지 않은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칼빈은 이렇게 설명한다. “만약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다면 그는 그 자신의 공적을 자랑할 수 있지만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러므로 그는 행위로써 의롭게 되지 않았다” 박윤선은 “신앙이란 것은, 그 대상의 불가사의함에도 불가하고 온 인격을 들여서 신뢰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인간은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말씀을 근거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선하신 하나님이심을 전폭적으로 신뢰해야 한다(히 11:6). 고데(Godet)는 바울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매, 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으매 라고 말한다. 그가 약속을 받아들일 때, 그의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 자신으로, 즉 그의 진라, 그의 신실성, 그의 거룩성, 그의 선하심, 그의 지혜, 그의 능력, 그의 영원성을 받아들였다.”라고 정리한다.
4:4-8
바울은 일반적인 행위의 원리와 은혜의 원리를 대비시켜 설명한다. 바울은 일 즉 행위를 통해 얻는 보상과 은혜의 방법을 대칭시킴으로 믿음의 방법은 은혜의 범주에 속한다고 설명한다. 일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삯은 보수라고 말하지 은혜라고 말하지 않는다. 본 구절은 일도 하지 않고 경건하지도 않은 자가 자신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그분을 믿을 때, 그 믿음을 의로 여긴다는 논조로 믿음의 방법을 강조한다. 이 말씀은 죄인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의롭게 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마 20장에 기록된 포도원 주인과 품꾼들의 관계에서 노동의 삯과 은혜의 개념이 드러난다. 아침 9시에 포도원에서 일을 시작해서 하루 종일 일하고 한 데나리온을 받은 종은 노동의 대가로 보상을 받은 것이요. 오후 5시에 포도원에 들어가서 잠시 일하고 역시 한 데나리온을 받은 종은 노동의 대가보다는 은혜의 선물을 더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을 받는 것은 행위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엡 2:8)
바울은 다윗의 시편 32:1-2을 인용하면서, 구약도 이미 행위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께 의로 여김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고 가르친다. 또한 다윗은 복된 사람을 설명하면서,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와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를 동일시하면서 이런 사람은 복이 있다고 선언한다. 다윗은 불법이 있는데도 처벌받지 않고 죄가 가려져서 없는 것처럼 인정받는 사람이 복이 있고, 죄가 있는데도 주께서 그 죄를 죄라고 하지 아니하는 그 사람은 복이 있다고 선언한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취하신 의(롬 4:25)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음으로 우리의 죄가 가리어졌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없는 것으로 인정해 주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인해 의롭다 인정을 받은 것이다.
롬 4:9-12
그래서 바울은 다윗의 말을 인용한 직후에 아브라함의 믿음과 연계시킨다. 창세기에 따르면, 아브람은 나이가 많아 자식을 가질 수 없는 형편에 있을 때 여호와께서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창 15:4)라고 하신 말씀을 믿었다. 이어서 성경은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라고 기록한다. 이 때는 아브람과 사래가 이삭을 잉태하기 이전의 시기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개명해주시고 할례를 받으라고 명령하시기 이전의 시기이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생애의 과정에서 나타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시기와 할례의 제도가 설립되는 시기를 비교하면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할례나 무할례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천명한다. 하나님의 계획은 아브라함의 생애를 사용하셔서 할례자이거나 무할례자이거나를 막론하고 아브라함을 모든 믿는 자의 대표자로 만드시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그가 할례를 행하기 전에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죄의 용서를 받았다.
이러한 개념은 공로의 개념이 끼어들 수 없게 만든다. 김진옥은 “아브라함의 의에 대해서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부분은, 이것이 간주된 의라는 점이다. 아브라함은 실제적으로는 의인이 아닌데, 단지 의인으로 간주된 것이다. 아브라함의 의를 묘사하기 위해서 로마서는 연속적으로 간주되었다, 여겨졌다는 로기조마이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롬 4:3,4,5,6,8,9,10,11,22,23,24). 하나님으로부터 칭의를 얻었다고 해서 아브라함이 본질적으로 의인이 된 것은 아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됨을 외적으로 인친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 됨이 먼저요. 할례는 그 사실을 외적으로 확인하는 의식이다. 신약의 세례도 마찬가지이다. 세례는 그 자체로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는 의식이 아니요.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함을 받은 성도를 외적으로 보이는 세례의식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 됨을 확인하는 것이다. 구약의 할례의식이 구속역사 진행의 과정에서 신약의 세례 의식으로 전환되었다. 할례나 세례가 구원을 보장하지 못한다. 오직 믿음만이 구원을 보장할 수 있다. 박윤선은 “아브라함이 받은 할례의 표를 해석하면서 할례는 아브라함의 칭의로 된 표요, 그 얻는 의의 본질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유대인들은 이런 표에 불과한 할례를 오해하여 본체로 알고 그것을 과중시하였다. 따라서 그것은 그들에게 표로서의 효과도 내지 못하고 도리어 본체를 아는 일에 장애물이 되고 말았다. 표를 본체시하는데 관습이 된 그들은 구약의 예표가 가리킨 그리스도 예수를 모르게 되었다.” “할례의 표”의 표현에서 할례는 동격적 소유격으로 할례가 표 자체임을 나타낸다.
* NIGTC 리처드 롱네커
4:1-24에서 명사 디카이오쉬네는 7회 등장(3,5,6,9,11,13,22)
동사 미스튜오는 5회 등장(5,17,18,24 등)
동사 로기조마이(여기다, 간주하다)는 11회 등장(3,4,5,6,8,9,10,11,22,23,24 등)
4:1에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라는 표현에 관하여.
이사야 51:1-2
1 의를 따르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내게 들을지어다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
2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낳은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에 내가 그를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였느니라
유대교에서는 이러한 특권이 유대인으로 출생한 사람들에게 한정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조차 아브라함을 우리 아버지 또는 우리 조상으로 부르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의 조상(4:11)이 되며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4:12)의 조상이다. 바울은 자신과 예수를 믿는 유대인 출신의 다른 모든 신자 뿐만 아니라 인종이 어떠하든지 로마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도 포함시키면서 전혀 망설임 없이 아브라함을 우리 조상으로 부른다. 갈 3: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BECNT 토머스 슈라이너
4:1
바울은 아브라함의 보편적인 조상 됨에 관심이 없었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4장 전체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아브라함의 자녀로 포함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바울이 이곳에서 주장하는 것은 사람들이 행위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육신적 자손만으로 불충분하다는 암시가 있기는 하지만, 아브라함을 육신에 따른 조상으로 말하는 것이 아브라함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아무 잘못이 없다. 그는 믿음의 조상이라 불릴만한 사람이다.
4:2
행위와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의 관계. 바울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필요가 있는 행위를 하지 않았음.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했다면,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기초는 무엇이었는가? 바울은 70인역과 거의 정확하게 일치하는 창 15:6을 인용하여 이 질문에 답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믿음은 의로운 행위가 아니다. 4~5절은 2~3절의 핵심을 다시 말하고 있기 때문에, 믿음과 행위 사이의 대립이 파악될 것이다.
바울은 4~5절에서 일하는 것과 믿는 것을 명확하면서도 단호하게 대조한다. 일하는 것은 삯을 받기 위해 사람이 행하는 것이며, 삯은 일하는 사람에게 빚진 것이다. 믿는 것은 일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일하는 것은 각 사람의 능력의 결과이지만, 믿는 것은 다른 사람을 의존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었으며, 아브라함은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의존했다. 일하는 것은 행하는 것을 수반하지만, 믿음의 진수는 받는 것이다. 밀하는 것과 일하는 것 사이의 대립은 동사 로기제스다이의 의미에 빛을 던져주는데, 이 단어는 4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 개념은 자신에게 내재하지 않은 사람에게 어떤 것이 여겨진다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수여되는 생경한 의라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이 자손이 없어 고민할 때,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아브라함이 자손을 낳을 수 있는 통상적인 나이를 넘어섰기 때문에 자신의 힘으로 그 약속을 성취할 어떤 입장에도 있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신의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만드심으로써 불가능한 것을 행하실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을 존중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믿음과 신뢰를 하나님의 약속에 두었기 때문에,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을 보여주었다.
아브라함에 대한 바울의 관점과 유대교 문헌에서 발견되는 것을 비교해 보아야 한다. 마카비1서 2:52 “아브라함이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이 발견되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것이 아브라함에게 의로 여겨지지 않았는가” 이 본문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창세기 22장과 창세기 15장 6절을 결합시킨다. 마카비1서 저자는 아브라함의 의가 그의 믿음에 근거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희년서 23.10 “이는 아브라함이 그의 모든 행위에 있어 하나님께 완벽했으며 그의 모든 생애에 의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
아브라함이 받은 모든 시험 중에서 순종한 것, 특히 이삭을 기꺼이 제물로 드리려 한 것이 기념되고 있다.
유대교 문헌에서 아브라함의 행함에 대한 강조를 율법주의로 낙인찍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모든 유대인은 아브라함의 행함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흘러나온 것으로 생각했으며, 바울 역시 하나님의 은혜가 변화된 삶을 만들어 낸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유대교 문헌에서 아브라함의 행함에 대한 강조는 바울신학에 나오지 않는 신인협력설로 쉽게 이르게 할 수 있다.
바울은 영생을 얻기 위해 행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아브라함을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으로 묘사함으로써 유대교 전통의 흐름에서 벗어나 있다.
인간에게는 자연스럽게 자만심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되어 있는 로마의 회중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4-5절도 역시 공로적인 성취에 반대하는 논쟁을 보여준다. 삯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그 삯을 은혜가 아닌 보수로 생각한다.
유대인이 가지고 있는 민족주의와 행함은 분리될 수 없다. 만일 유대인이 하나의 민족으로서 이방인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다면, 유대인이 단지 인종적 유대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이방인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전형적으로 그러한 확신을 가졌다.
아브라함은 할례 받기 전에 의인으로 여겨졌으며, 율법과 약속은 구분된다. 롬 5:13-14은 아담과 모세 사이의 기간이 율법이 없는 시기였으며, 율법은 모세가 살아 있을 때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갈 3:15-18은 아브라함 때로부터 430년 후에 제정되었다고 분명하게 언급한다. 바울도 모세 아래 주어진 율법과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 사이를 구분한다.
바울이 다윗의 죄를 언급하는 것은 다윗의 도덕적 실패들, 특히 밧세바 및 우리야와 관련이 있는 그의 범죄를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칼빈).
죄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큰 복을 받는 것을 의식하고 있으며, 그 복을 받을 자격이 없고, 그 복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행복을 가져다주는 하나의 선물이다.
바울이 행위에 있어 자랑하는 것을 배제하는 이유는 인간이 그러한 행위로 자랑하려는 유혹을 받기 때문이다. 바울은 여러 교회에서 제기되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목회자로서 글을 쓰고 있으며, 바울이 어떤 신학적인 명제를 추상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이상한 분석이다.
또한 바울은 인간이 자신의 행위와 자신의 의를 조화시켜 계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것은 은혜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 모든 사람의 조상 아브라함 (4:9-16)
9-16절에서 누가 아브라함의 자손인가 하는 문제가 전면에 나타난다. 사람이 무엇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아브라함 가족의 일원이 될 수 있다. 바울은 아브라함 가족의 일원이 되기 위해 사람이 할례를 받아야 하는지를 묻는다. 사고의 흐름은 아래와 같다.
의롭다 하심을 얻기 위해 할례가 필요한가? (9a)
아브라함에게는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는 것을 우리가 주장했다(9b)
이제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에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10절)
그리고 아브라함의 할례는 그가 할례를 받기 전에 이미 소유했던 믿음으로 된 의를 인 친 것이다(11a)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에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그가 할례 받지 않은 모든 신자들의 조상임을 보여주며(11절)
할례 받지 않은 모든 신자들 역시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에 그에게 속해 있던 믿음을 가지고 있는 한, 아브라함의 할례는 그를 모든 할례 받은 자들의 조상으로 만든다.
만일 할례가 아브라함 가족의 일원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사람은 아브라함의 자녀의 일원이 되기 위해 유대인이 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할례자와 무할례자,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의 조상이다.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사람이 율법을 충실히 지킴으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 아브라함 가족의 일원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아브라함 가족 안으로 들어가는 수단으로써의 특징을 지닌다.
9절의 “그런즉”(운)은 이전 단락과 논리적인 연결을 구축한다. 이러한 연관성은 마카리스모스(복)라는 단어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행위와 관계없이 받는 의롭다 하심을 얻는 복을 가리킨다.
바울이 묻고자 하는 것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할례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인지, 아니면 무할례자도 이 복에 포함되는지이다. 다윗이 시편 32편에서 선언했던 복은 아마도 유대인들에 의해 오직 할례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으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시편 32편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제시함으로써 이 질문에 대답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9절에서 바울은 창 15:6에 호소하는데, 이 구절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는 것을 선언한다. 창 15:6은 시 32편의 의미를 밝히기 위한 해석학적 열쇠이다. 바울은 만일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면, 할례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한다. 언약적 은혜는 할례에 의존하지 않는다. 믿음만이 축복을 받는 통로이다.
10절
아브라함은 언제 하나님 앞에서 의로 여기심을 받았는가?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 할례 이전인가 이후인가? 창 15장은 창 17장보다 시간상으로 앞선다. 즉 아브라함은 할례 받기 전에 의롭다고 여겨졌다. 만일 아브라함이 할례 받기 전에 의로웠다면, 할례는 의롭다 하심을 얻는 데 필수적인 것이 될 수 없다. 믿음만이 이 복을 얻는 데 필요하다.
만약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할례 없이 가능하다면, 도대체 하나님은 어떤 이유로 할례를 제정하셨는가? 바울은 11-12절에서 이 질문에 대하여 답한다.
할례는 표(세메이온)와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으로 묘사된다. 세메이온과 스프라기스를 구분해서는 안 된다. 이 두 단어를 사용하는 목적은 할례가 믿음에 고유하거나 본질적인 것이 아님을 말한다. 오히려 이것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이미 가지고 있었던 권리를 확증하고, 뒷받침하고, 인준하고, 확인하는 것이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이러한 의를 믿음으로 “무할례시에” 가졌다고 말함으로써, 할례가 의를 얻는 데 필수적인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거한다.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표가 없다고 해서 불리한 점이 아무것도 없다. 이는 할례 받지 않고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구원사에 있어 유대인의 우선성 때문에 아브라함을 할례자의 조상으로 쉽게 포함시킬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할례가 믿음으로 된 의를 인 친 것으로 말했으며, 아브라함을 유대인의 조상으로 말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우선 이방인이 아브라함의 가족으로 포함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자세히 설명한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에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믿는 모든 무할례자의 조상으로서 기능한다. 여기서 바울은 창 12:3을 암시하는데, 이 구절에서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 안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한다(갈 3:6-14). 아브라함 역시 그가 할례를 받기 전에 믿었다는 점에서 아브라함은 모든 사람의 조상으로서 기능한다. 바울은 이방인이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기 위해 오직 믿음만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인식시킨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이유는 할례자의 조상이 되기 위함이다. 바울은 할례의 중요성을 상대화한다. 할례는 충분한 것이 아니다. 사람은 무할례시에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라야 한다.
NICNT 로마서 – 더글라스 무
4:1
바울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육신의] 노력으로 무엇을 발견했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이 장에서 아브라함의 조상 됨을 확대해서 모든 믿는 자의 영적인 아버지임을 포함시키는 데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오히려 이 어구는 우리 조상을 한정 수식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한정 수식에는 영의 대물림에 대립되는 육의 대물림, 우리의[유대인의] 혈통에 따른 조상이 포함될 수 있다. 이는 넓게 보면, “옛 시대의” 시각에 의해 한정될 수 있다. “새 시대”의 시각에서 보면 아브라함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없이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기 때문이다(4:11-12)
4:2
아브라함에 대한 유대인들의 해석은 아브라함의 경건의 본질이자 그가 하나님과 맺은 유례없는 관계의 기초로 그의 행위를 강조했다. 바울은 이 결론에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없다. 라는 짧은 단서를 붙인다. 이 단서는 아브라함의 자랑을 제한하는가? 아니면 완전히 무효화 하는가? 바울은 아브라함의 자랑할 권리도 완전히 거부한다. 하나님 앞에서건 사람들 앞에서건 일체의 자랑거리를 배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에게 자랑할 수 있는 권리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4:3
창 15:6 인용. 4장 나머지 부분의 중심 논점.
“믿다”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부분이며, 의로 여김을 받는 것과 연결된다. 구약에서 이런 연결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주 드물다.
창 15:6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자기에게 자손이 있게 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하여 하나님에 대해 품는 그의 완전한 신뢰이다. 그러나 이 약속은 창 12:1-3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갱신인 만큼, 아브라함이 야훼를 믿는다는 말이 나오게 하는 약속에는 앞선 본문에서 약속된 세계적인 축복이 포함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는 것의 의미이다. 믿음이 의로움의 동의어로 간주되는 것을 시사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 자체를 하나님께서 흡족하게 여기시는 의로운 행위로 보신다는 것)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는 것은 본래 그에게 없는 하나님의 의를 부여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에게 의의 신분을 부여하게 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반응으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심으로써 아브라함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수립된다는 핵심적인 요지는 창세기와 로마서에서 모두 똑같은 것이다.
바울의 해석은 전형적인 유대인들의 해석과 거리를 둔다. 유대교의 해석자들은 흔히 창 15:6을 창 22장의 렌즈를 통해서 보았으며,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의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되었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보상할 책임이 있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4:4
4:4-5에서 바울은 창 15:6에서 아브라함의 칭의에 관해서 하는 말로부터 두 개의 신학적인 결론을 도출한다. (1) 행위가 칭의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아무것도 없다. (2) 이것은 하나님의 의롭다고 하시는 평결이 (노력해서) 버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받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결론이다. 또한 이 결론은 23-24절에서 진술하는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라는 해석학적 원리를 조명한다.
바울이 관심을 갖는 것은 여기심의 성질이다. 바울은 일하는 자에게 줄 삯을 어떻게 여기느냐, 어떻게 셈하느냐에 관한 일반 원칙을 정한다. 사람이 일하는 경우, 그가 받는 반대 급부는 채권 또는 정당한 보상 문제가 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고용자는 그 일꾼에게 일정한 임금을 빚지는 것이지 그것을 값없이 또는 의무감 없이 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바울은 암암리에 신학적 적용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일이 의미하는 바로는 보상이란 바로 빚을 갚는 것을 뜻하기에, 의의 보상이 결코 행위에 의존하여 시행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결코 그의 피조물에게 빚을 지는 일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칭의는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지 사람이 일을 해서 정당하게 얻는 임금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을 향하여 은혜롭게(의무나 필요에 쫓기는 일이 없이) 역사하신다는 것이 바울의 신학적인 원칙 중 하나이다. 바울은 아브라함에게 의롭다하심을 얻게 해준 믿음이 행위가 배제된 믿음이었음을 증명한다.
이러한 바울의 증명은 당시 가장 세력을 떨치고 있던 유대교 신학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었다. 그 신학은 믿음과 행위를 밀접하게 하나로 묶었고, 그것이 구원에 관한 일종의 신인협력설로 나타났다. 의로 여겨주심은 완전히 은혜로 하시는 일이며, 믿음에 기초한 것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은혜는 바울의 논리의 종점이 아니라 시작이며, 은혜라는 사실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는 믿음은 일체의 행위 이외의 믿음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4:5
이 말씀은 바울이 게으름을 찬미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인은 절대로 선행을 쌓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칼빈이 정확하게 강조하듯이, 바울은 자기의 믿음을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길 생각을 하지 않고 자기 만족에 취해있는 그리스도인을 너그럽게 보지 않는다. 오히려 바울이 염두에 있는 것은 자기의 행위에 의지해서 하나님 앞에 설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출 23:7에서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라고 하신 하나님의 선언과 대조해서 보아야 한다. 구약의 본문들은 기존 상황에 대한 선언 또는 인정을 가리킨다. 그러나 바울은 믿는 자에게 값없이 새로운 신분이 주어지는 창조적인 사역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자애로우시고 값없이 주시며, 어떤 사람에게도 빚진 자가 될 수 없는 분으로 나타난다. 믿음이 의로 여기심을 받는 자는, 이런 하나님을 믿는 자요, 그럼으로써 혹시 자기의 선행이 일으킬 수도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일체의 권리 주장을 그의 믿음 가운데서 포기하는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바울에게 있어 믿음은 인간적인 것에서 비롯된 일체의 노력과 전적으로 구별되는 무엇이라는 것이 다시 한번 분명해진다. “우리는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공로로 여길 수 없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의롭다 하시는 사역을 하심에 있어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사람 안에 있는 그 어떤 것도 경건하다고 보거나, 그 사람 안에 있는 어떤 선으로 조금이라도 존중하시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 하시는 사역을 하시기 직전에 하나님은 그 사람을 오로지 경건하지 않은 자로 보실 뿐이며, 그렇기 때문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사람 안에 있는 경건은 그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을 근거가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전제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4-5절에서 바울의 목적은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는 믿음은 ”오직 믿음“이요, ”행위 외의“ 믿음이라는 것을 밝히는 데 있다.
4:6
의롭다 하심에서 행위를 배제하는 문제에 대한 바울의 관심이 이절에서 일한 것이 없는데 하나님이 의로 여기시는 사람의 축ㄹ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로 다시 표출된다.
4:7-8
다윗의 말은 시 32:1-2a에서 인용한 것이다. 바울이 이 말씀을 인용하는 이유 중 하나는 거기에 키워드인 ”여기다“라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죄의 사함과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를 그를 정죄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는 것을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시편 말씀을 로마서 말씀과 연결시키면 두 개의 암시를 발견할 수 있다. 1) 죄사함이 의롭다 하심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2) 바울은 의롭다 하심에 관한 그의 강한 사법적 이해를 다시 한번 드러낸다. 의롭다 하심을 사람에게 죄를 부과하지 않는, 또는 씌우지 않는 것에 비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도덕적인 변화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역이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뀌었다는 것은 무죄 방면된다는 의미로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뜻이다.
4:9-12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는 것이 갖는 또 하나의 중요한 면을 지적한다. 그 일이 그가 할례받기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이런 상황이 바울로 하여금 아브라함은 할례받은 자나 할례받지 않은 자나 모든 믿는 사람의 조상이라고 주장할 수 있게 한다. 그럼으로써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데 유대인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오직 믿음만 있으면 일한 것이 없어도, 할례를 받지 않아도, 하나님의 영적인 가족의 일원이 되기에 충분하다.
폴 악트마이어
그 당시의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고난 속의 신실함과 그의 언약을 지켰던 신실함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를 의롭다고 여기도록 했다고 강조했다. 바울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여기신 시점이 그가 시험을 받기 전이며(창 22) 또한 할례 받기도 전임을(창 17:10; 갈 3:17-18) 강조한다. 아브라함은 마치 그가 좋은 일을 해서 그의 의를 급여로 받은 것 마냥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었다. 이 점에 있어서 NEB 성경이 RSV보다 바울의 의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아브라함이 그가 한 어떤 행위 때문에 의롭게 되었다면 그에게 자랑할 것이 있겠지만, 그가 어떤 의롭게 칭함을 받을 만한 행위를 하기 전에 의를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그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자신의 순종을 증명하기도 전에 의롭다고 여김을 받았다. 그가 할례를 받기 전에, 시험 속에서 신실함을 증명하기도 전에 의롭다 여김을 받은 것이다. 사실 이 행동들은 하나님께 보상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셨을지도 모르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그런 행위들을 하기 이전에 의롭다 여김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의는 믿음에 근거한 것이지, 그의 순종의 행위들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바울은 믿음이 율법을 폐하지 않으며, 율법이 진정으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보여준다. 아브라함이 율법이 오기 전에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처럼, 믿음이 율법 자체를 앞서고 있으며, 율법은 믿음에 근거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율법의 진정한 위치와 중요성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아브라함은 또 다른 이유 때문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것은 그가 모든 민족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된 축복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우리가 만약 그 약속된 축복을 나누기 원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아브라함을 통해서만 갖게 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전혀 받지 못한다는 뜻이다(창 12:2-3).
바울은 이 점에 대해 심각하게 논의한다. 사실 바울은 믿음 안에서 아브라함을 우리의 조상으로 삼는 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그의 믿음에 근거해서 의롭게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아브라함의 믿음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의 자손이 아니고, 또 우리가 만약 그의 자손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의 자손에게 약속된 축복을 공유할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은 4:1에서 육신으로 조상이 된 아브라함을 언급하고, 마치면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을 언급한다. 이는 바울이 어떤 방향으로 그의 논의를 진행시키는지를 보여준다.(4:11)
아브라함이 그가 의롭다 칭함을 받을 만한 어떤 행동도 하기 전에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에는 더 깊은 암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게 하신다는 것이다. 신 7:7-8.
바울은 1:2-4에 있는 편지의 주제에서 선언한 요소로 돌아가고 있다. 그리스도는 구약에 미리 약속한 것들을 완료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바울이 율법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데 뜻깊은 중요성을 내포한다. 그 자체로 율법은 악이 아니며, 바울은 이 점을 나중에 명백하게 보여줄 것이다(7:12). 믿음의 구조 안에서, 율법은 하나님의 질서를 위한 선물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은혜의 선물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의 문제는 율법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에 있으며, 또 죄가 율법을 통하여 하는 일이다.
기본적으로 문제는 죄가 율법을 사용하여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긍휼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그럭저럭 죄를 우리의 제어 아래 놓을 수 있다고 믿게 하는 것이다. 죄가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그럭저럭 하나님의 긍휼 없이도 우리의 가치를 이룩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조차도 가질 용기가 없었던 하나님 앞에서의 자랑을 원하고 있다. 우리는 긍휼로서의 구원보다 임금(wages)으로서의 구원을 원한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기 원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의롭다고 선언될 만한 토대를 주어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언제나 우리 자신이 구원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주장할 때나 죄가 우리 인간의 모든 도덕성을 휘어잡고 있는 것을 부인할 때 우상숭배가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율법의 행위에 의존하고 싶어하는 것은 하나님보다는 우리 자신을 의지하고 싶어한다는 뜻이다. 율법의 문제는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관대하심을 받기 싫어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기를 우리가 저지른 일에 대해 대가를 치르는 것이 낫지, 우리가 받지 못할 것을 아예 받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태도에 대해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어떤 일꾼들은 긍휼을 원망하고 더 많은 급료를 받기를 원했다(마 20:1-16). 그 일꾼들처럼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관대함에 대해서 시기하고, 더 나아가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관대함에 대해서도 시기한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 때문에 받아들여질 수 있고, 우리 자신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면, 궁극적인 계산에서 우리는 전혀 가치가 없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족(self-sufficient)에 가득한 현대인의 입에 담기 힘든 고백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확신할 수 있는 모든 종교적인 가치에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바울이 내리고 있는 이스라엘 중의 덕의 모범인 아브라함에 대한 판단이다. 만약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로워졌다면, 그는 자랑할 것이 있을 것인데, 그가 은혜로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전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진정 우리 믿음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으로부터 배울 것이 참 많다.
함께 오르는 로마서 – 김진욱
롬 3장까지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의의 계시에 초점을 맞추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데서 분명하게 나타났다. 이제 롬 4장부터 아브라함에게 집중된다. 초점이 하나님의 의에서 아브라함의 의로 옮겨진 것이다. 이 전환점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롬 4장부터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하나님의 의가 사람들 속에서 어떻게 실질적으로 구체화되는지 보여준다. 사도는 이 논증에서 아브라함을 모델로 세운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서술하는 이 장은 훌륭한 신앙인의 삶을 치하하면서 우리에게 그렇게 살라는 식으로 권면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실제적으로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설명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얻은 칭의 속에서 죄인들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역동적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믿음이 무엇인가 보여주는 아브라함의 삶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발견한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는 모델이다.
아브라함은 무할례 시에 의롭다함을 얻었다(롬 4:10). 이 사실은 이방인들도 그의 자녀가 되는 데 제한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후에 할례를 받게 된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할례는 먼 훗날을 바라보며 그가 무할례자들 뿐만 아니라 할례자들의 아버지 됨을 위하여 받은 것이다. 칭의를 중심으로 논의되는 아브라함의 무할례와 할례는 아브라함이 유대인 뿐만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아버지 됨을 빈틈 없이 나타내고 있다.
아브라함의 칭의는 할례를 강제하는 율법과 관계 없는 칭의였다. 아브라함이 얻은 의로움은 율법의 행위로 얻은 의롭다 함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의 칭의는 그가 가진 믿음을 통해 이루어졌다. 아브라함이 받은 칭의는 율법과 관련이 없는 칭의이며, 율법 이전으로 소급되는 근원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아브라함의 칭의는 율법 없이 은혜로 주어지는 신약시대의 칭의와 일맥상통한다. 아브라함이 율법 없이 의롭다 함을 얻은 것처럼, 그의 자손들도 율법과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