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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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계 2:1-7
제목 : 처음 사랑
저는 낭만이라는 단어를 좋아합니다. 낭만이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요. (in) “현실에 메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심리. 또는 그런 분위기”라는 뜻과 “감미롭고 감상적인 분위기”라는 뜻이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낭만이라는 단어는 첫 번째 의미의 낭만입니다. 현실에 매이지 않고 이상적으로 어떤 현상이나 일이나 사물을 대하는 이 낭만이란 단어를 좋아합니다. 물론 균형을 잃어선 안 됩니다. 현실적인 감각도 중요하고 또 이상향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 이 두 가지의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극단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상적인 사상을 완전히 배제하면 지독한 현실주의자가 될 수 있고, 반대로 현실적인 감각을 완전히 배제하면 비현실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공상가가 될 수 있겠죠.
그런데 제가 낭만 같은 이야기를 말씀드리는 이유는 성경에 낭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참 희한하게도 성경의 저자들이 각자 자신들이 살아가는 현실이 어떠한지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대적인 상황과 환경에 영향을 받아서 어느 정도 감안해서 말씀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저자들은 오직 하나님을 한분만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그들이 살아가는 현실이 어떠하든지 시대적인 정황이 어떠하든지 관계없이 삶의 이상적인 가치와 기준을 오직 하나님께 두고 성령의 감동하심 가운데 성경을 기록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성경에 낭만이란 것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우리의 영적인 낭만을 잃어버려선 안 될 것입니다. 상황이 어떻든, 또 시대가 어떻든, 그러한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서 우리의 영적인 낭만을 상실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스스로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면밀하게 살피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죠.
자, 그래서 이러한 영적인 낭만을 지키고, 성경적인 소망을 품으면서 살아가는 것,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선한 행위를 행하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요즘에는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습니다. 삶이 고단하고 팍팍해서, 시대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자존감이 낮아질 수밖에 없어서, 사회적으로 여러모로 눈치가 보여서. 뭐 다양한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모습을 보이고, 또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모습을 보일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과연 그 모습을 바라보시고 무엇이라 말씀하실까요. 그 말씀은 오늘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보내시는 말씀, 이 말씀들을 잘 살펴보면, 오늘날과 크게 다를 것 없는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요한계시록 2장 1절부터 7절까지의 말씀에 기록된 에베소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오늘날 우리가 지켜야 할 성경적인 낭만이란 무엇인지, 과연 우리의 처음 사랑을 어떻게 회복하고 발전시켜야 할 것인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요한계시록 2장 2절과 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out)
2절과 3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가 잘한 점을 칭찬하십니다. 그런데 이 칭찬의 말씀이 책망하시는 말씀에 가려져서 에베소 교회가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 책망받은 교회라고 단순하게 기억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에베소 교회가 예수님께 책망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죠. 하지만 에베소 교회의 시대적인 상황과 배경을 충분히 고려해볼 필요있습니다.
본문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시대적인 상황과 배경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당시에 에베소 교회는 소아시아에서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세 개의 거대한 무역로가 만나서 에베소 도시를 통과했기 때문에 지리적으로 당대의 핵심적인 무역의 통로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시리아나 인도, 이집트와 같은 나라에서 몰려온 상인들이 식료품이나 향료, 고급 옷감, 보석, 노예 등 모든 것들을 사고 파는 거대한 무역 시장이었던 것이죠.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에베소에 몰려들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에서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과 함께 고린도에서 에베소로 이동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몇 년 후에 에베소에 방문해서 2년 이상 머물면서 말씀을 가르쳤죠. 또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전 지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본거지로 삼았습니다. 상업적인 목적으로 에베소에 오는 사람들과, 우상숭배를 위해서 순례하는 사람들, 이렇게 복합적인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에베소로 몰려들었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을 것입니다. 그 이후에는 디모데가 짧은 기간 동안 에베소 교회에서 목회했습니다. 그러다가 1차 유대인 전쟁 발발 직후에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 와서 90년대 말까지 목회했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사도 바울, 디모데, 사도 요한 등, 어마어마한 성경 인물들의 손길이 직접 닿은 교회가 바로 에베소 교회였습니다.
이렇게만 보면, 에베소 교회는 굉장히 건강하고 바른 교회이면서 동시에 완벽한 교회일 것만 같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같은 인물들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하더라도 사도 바울과 디모데와 사도 요한의 손길이 순차적으로 에베소 성도들에게 닿았다면, 그렇게 기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에베소 주위 환경이 믿음을 지키고 성장시키기에는 그리 좋은 환경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처음으로 세워지고 성장하던 시기에 에베소는 영적으로 굉장히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풍요의 여신 아르테미스, 그리스 로마신화에 등장하는 다이아나 여신의 신전이 에베소에 있었으며, 이 신전은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속할 정도로 고대 건물 중에 가장 큰 건축물이었습니다. 거대한 규모도 규모이지만 이 아데미 신전에는 수천 명의 남사제와 여사제가 있었습니다. 말이 사제이지 실제로 이 사제들 대다수는 신전에서 몸을 파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몸을 파는가 하면,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제사를 바칠 때 음란하게 혼음하는 행위들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는데, 이때 음란 행위를 주도하는 사람들이 바로 남사제와 여사제들이었던 겁니다.
뿐만 아니라 에베소에는 황제 숭배가 번창해서 도미티안 황제를 숭배하는 신전이 있었으며 총 여섯 개의 황제 신전들이 에베소 도시에 있었습니다. 소아시아에서 가장 활발하게 황제를 숭배하는 황제 숭배의 중심지가 바로 에베소였던 겁니다.
이러한 현실 가운데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이 건강하고 바르게 신앙생활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겁니다. 물론 교회에서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디모데, 사도 바울과 사도 요한을 통해 말씀을 배우고 영적으로 도전받고 결단하며 살아가는 그런 영적인 원동력을 얻었겠습니다만, 교회 문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온갖 우상숭배하는 사람들과 황제숭배하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그들과 살을 섞으며 살아가야 했으니, 어떻게 보면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신앙생활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어려운 상황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자 그래서,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과 배경 가운데서 에베소 교회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고군분투했습니다. 외적으로는 음란하게 우상숭배하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또 내적으로는 거짓된 사도들, 다른 복음을 가르치는 사람들, 이러한 사람들로부터 분별력을 가지고 말씀을 바르게 믿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서 처해 있었지만,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내용이 바로 요한계시록 2장 2절과 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2절 말씀을 다시 보시면, (in)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안다.” 이 말씀을 원어로 보면 어순이 우리말 성경과는 조금 다릅니다. 우리말로는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안다. 이렇게 읽을 수 있지만, 원어로는, 내가 안다. 너의 행위를, 그리고 너의 수고를, 그리고 너의 인내를.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out) 어순으로 보면, “내가 안다”라는 말이 가장 앞에 나와있기 때문에 “내가 안다”, “내가 알고 있다”라는 말이 강조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예수님께서 아신다는 겁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믿음을 지키고 올바르게 신앙생활하는 것이 정말 정말 어려운 상황에서 이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계신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본질적으로 영적인 위로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는 말을 하면서, 어떤 일을 할 때 서로 칭찬해주고 응원해 주고 격려해 주는 것을 미덕으로 삼습니다. 물론 그렇게 서로 으쌰으쌰하면 없던 힘도 생기는 것 같고 의욕도 솟구칠 수 있습니다. 저도 칭찬 좋아합니다. 네. 저뿐만 아니라 우리 교역자들에게 아낌없이 칭찬해주시고 격려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 그런데, 칭찬과 응원과 격려를 서로서로 아낌없이 해주고, 같이 으쌰으쌰하고 또 힘들어 하는 지체들에게 우쭈쭈 해주고 이런 것들은 공동체성을 세워나가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되지만, 이는 본질적으로 볼 때 완전하다고 볼 순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격려와 칭찬, 응원이 담긴 말을 할 때 그 말이 아무리 진심이라고 하더라도 정작 당사자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얼마나 마음을 쏟고 진심을 다했는지, 상대방의 입장에서 100퍼센트 아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는 것이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남모르게 수고하고 노력하는 부분들을 정확하게 아시고, 또 어떤 때에는 시험 들어 상처받고 마음이 흔들리더라도 그 마음을 남모르게 홀로 굳게 잡고 고군분투하며 이겨내기 위해서 애쓰는 그 마음을 예수님께서 다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2장 2절에서 “내가 안다”라는 이 단어 하나만 가지고도 우리는 가장 큰 위로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자 그래서,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는데, 에베소 교회에 관련해서 어떤 점을 아신다고 말씀하십니까? 이 내용은 에베소 교회의 칭찬과도 연결되는데요. (in) 에베소 교회에 대한 첫 번째 칭찬은 바로 행위입니다. 헬라어로 이 단어는 행위 또는 일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단순하게 어떤 행동 한 두 가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out) 당연히 그렇겠죠. 사람이 어떤 선한 행동을 한번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삶 전체를 가리켜 믿음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죠. 이러한 점에서 행위라는 단어 자체는 어떻게 보면 단회적인 행위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만, 본문에서의 의미는 신자의 삶에서 나타나는 모든 행위를 가리킨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러한 의미로 적용해서 다시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전체적인 행위를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행위 안에는 수고와 인내가 필연적으로 수반되어야 하는데요. 두 가지 내용을 조금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수고는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수고가 아닙니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수고하다”라는 말은 일을 하느라 힘을 들이고 애를 쓰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사람이 어떤 일을 마쳤을 때 수고하셨습니다. 라고 표현하는데, 요한계시록 2장 2절에 나오는 수고는 그 정도의 수고가 아닙니다. 단어가 사용되는 상황은 비슷하지만, 정도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데요. 본문에 나오는 수고라는 말은 고통을 수반하는 굉장히 힘든 노동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교회에서 단체로 어떤 극한의 노동을 감당했기 때문에 이 단어가 사용된 것일까요? 당연히 그렇지 않겠죠. 본문에 나오는 수고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모든 노력을 의미합니다. 이는 단순하게 애쓰고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최악의 환경 속에서 감당해 내는 최선의 섬김이며,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완전히 소진될 정도의 수고를 의미합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에베소에 이미 널리 퍼져있는 우상숭배로부터 믿음을 지키는 것 자체만으로도 버거웠을 것입니다. 아데미 신전에만 가면 잘생기고 몸 좋은 근육질의 남사제들과 예쁘고 섹시한 여사제들이 들끓습니다. 일터에만 나가면 아데미 신전에서 얼마나 황홀한 시간을 보냈는지 대한 음담패설들이 끊이지 않았을 겁니다. 상상의 나래를 조금 더 펼쳐보자면, 직장 상사나 동료들이 아데미 신전 제사 시간에 맞춰서 한번 갔다 오자고 끊임없이 유혹하는 일들이 계속해서 발생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에베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힘겹게 투쟁했습니다.
이어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칭찬받은 첫 번째 내용, 행위에 포함되는 인내라는 단어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인내라는 단어는 요한계시록에서 굉장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사용되는 인내라는 단어는 죄악이 편만한 상황 가운데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 인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괴로운 환경 속에서 참고 견디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영접한 성도들은 이 땅에서 고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 고난당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릴 수 있어야 하며 인내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 편안하고 윤택한 삶, 아름다운 삶은 성도들에게 적합한 삶이 아닙니다. 물론 물질적으로는 특별한 걱정 없이 잘 먹고 잘살면 좋겠습니다만, 영적으로 아무런 걱정과 고민 없이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죠.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대한 칭찬 두 번째는,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2절 하반절 말씀 보세요. (in)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여기서 우리는 사도 요한이 말한 악한 자들이 정확하게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만, 악한 자들이라는 말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악한 사람들 모두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out) 학자들에 따르면 이 악한 자들에는 거짓 사도, 자칭 사도, 거짓 선지자, 니골라 당과 같은 사람들이 악한 자들에 포함되었을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런 악한 사람들을 철저하게 막아서고 용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에베소 교회의 모습은 요한일서 4장 말씀에 기록된 사도 요한의 가르침과 일치합니다. 요한일서 4장 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여기서 분별하라는 말은 조사하다, 면밀히 밝히다, 주의 깊게 살펴보고 확인하다.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out) 어떤 사람이 거짓 선지자인지 아닌지, 이단인지 아닌지, 다른 복음을 가르치려는 사람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깊이 있게 조사하고 면밀하게 밝히고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죠.
요즘에는 교파와 교단의 구분이 뚜렷하고 각 교단별로 이단피해대책조사위원회가 있기 때문에 어떤 교회가 이단적인 가르침을 행할 경우에 이단인지 아닌지를 공식적으로 분별합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에는 교파와 교단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누가 이단인지 아닌지, 누가 제대로 가르치고, 또 누가 이상하게 가르치는지 이름만 놓고 보면 올바르게 분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에베소 교회는 거짓 선지자들이나 이단에 대해서 엄격하고 철저하게 대응했습니다.
이어서 에베소 교회에 대한 칭찬 세 번째는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 견뎌냈고 게으르게 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3절 역시 2절과 마찬가지로 에베소 교회가 정확하게 무엇을 견뎌냈는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out)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일단 에베소 교회는 결과적으로 볼 때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 수많은 환난을 견뎌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자신들에게 찾아오는 수많은 환난들을 견뎌낸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지치지 않았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지치지 않았다고 읽는 것이 좋습니다. 자, 그래서 여러 가지 환난과 고난을 겪으면서 인내한 에베소 성도들은 충분히 지칠 만했지만, 결코 지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에베소 교회의 모습을 보면, 비록 예수님께 책망받은 교회라고 하지만, 그 가운데 고군분투하면서 애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인내와 수고로 선한 싸움을 싸우고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견디고 지치지 않은 이 에베소 교회는 어떤 이유로 예수님께 책망받았을까요. 에베소 교회가 책망받은 내용은 요한계시록 2장 4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2장 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에베소 교회가 예수님께 책망받은 내용은 단 한 가지입니다. (이어서) 그것은 바로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간결하고 짧지만 앞서 등장한 에베소 교회에 대한 칭찬 전체를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무게감이 있는 책망의 말씀입니다. (out) 그렇다면 에베소 교회가 버렸다는 그 처음 사랑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in) ‘처음 사랑’이란 에베소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뒤에 처음으로 가졌던 사랑과 열정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이 ‘처음 사랑’의 대상이 누구인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해석상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out) 해석의 가능성은 세 가지가 있는데요. 첫 번째 가능성은 하나님 사랑이고요. 두 번째 가능성은 이웃 사랑, 세 번째 가능성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둘 다입니다. 세 가지 중에 어떤 것이 정답일까요? 네. 눈빛과 표정으로 정답을 다 말씀해 주셨는데요. 정답은 세 번째,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둘 다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별개의 것으로 구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이웃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 중에 하나는 사랑하는데 다른 하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든 이웃이든 둘 중 하나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다른 하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둘 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를 사랑하는 것도 거짓일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 그래서, 에베소 교인들이 책망받은 말씀인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말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은혜를 깨달은 뒤에 처음으로 품었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이웃을 사랑하는 그 마음을 버렸다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으로 보면, (in)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사실 이 부분도 원어로 보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는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다.” 누가 버렸습니까? 에베소 교회가 버린 것입니다. 수고와 인내를 아끼지 않았고,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았고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 견뎌내고 지치지 않은 에베소 교회가 결과적으로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말씀을 자나치게 극단적으로 생각해선 안 됩니다.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말씀을 보면서 아,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예 없어졌구나. 완전히 변질됐구나. 사랑이 아예 없구나. 이렇게 생각해선 안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만약 에베소 교회가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을 완전히 버렸다면, 정통 교리를 수호하기 위해서 그렇게까지 투쟁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럴 필요가 없죠. 진리가 짓밟히든 말든, 이단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이상한 복음을 가르치든 말든 무슨 상관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 있어야 그런 악한 사람들을 용납하지 않고 쫓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자, 그래서 우리는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린 것에 대해서 이렇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 가운데 필사적으로 정통 교리를 수호하고, 거짓 선생들과 이단들에 대항해서 투쟁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 지체들을 사랑하는 것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진리 그 자체에 지나치게 집중하다보니 처음 사랑을 버리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추측은 시대적인 배경에 따른 합리적인 추측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에베소 교회를 감싸고 돌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에베소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성도들 개개인이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그들의 처음 사랑을 자의적으로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뒤에 처음으로 느꼈던 그 사랑과 열정을 자신의 의지로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냥 뭐 어쩌다 어쩌다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원래 잘 가지고 있었는데 무슨 소매치기 당해서 없어졌다거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 교인들 개개인이 자신의 뜻대로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여기에는 그 어떤 핑계도 통용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 때문에 사랑을 잃어버렸다거나, 누가 나한테 말이나 행동을 어떻게 해서 시험들어서 그렇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은 요한계시록의 정황에 따르면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지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 사랑을 버렸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에베소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처음 사랑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요한계시록 2장 5절 상반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in) 시작.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방법은 세 단계로 나눠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첫 번째 방법은 (in) 어디에서 떨어졌는지 기억하는 것입니다. 본인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처음 사랑을 버리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스스로 진단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에베소 교회는 과거를 회상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과거에 이미 하나님의 깊은 은혜와 사랑을 경험했으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자신들이 경험했던 그 은혜와 사랑을 먼저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에베소 교회에게 지금까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어떤 새로운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돌이켜 보라고, 기억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어서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두 번째 방법은 (in) 기억한 것에 대해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하라는 헬라어 단어는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식의 말뿐인 회개가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는 잘못된 행동을 더이상 저지르지 않고 즉각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실제적인 행동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내용은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세 번째 방법과 연결되는데요. (in) 세 번째 방법은 처음 행위를 가지는 것입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예수님께 책망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처음 사랑을 버렸기 때문에 책망받지 않았습니까? 그럼 책망받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처음 사랑을 회복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처음 사랑을 되찾으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말씀을 보면,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처음 사랑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처음 행위를 가지라는 겁니다. (out)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처음이 행했던 모든 일들,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서 선한 일들을 행했던 그 모든 행위들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책망의 내용은 굉장히 간결하고 짧지만, 실제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에베소 교회 성도들 개개인이 많은 부분에서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처음 사랑을 버렸는지 기억해야 하고 또 기억한 것에 대해서 회개해야 하며, 회개한 내용에 대해서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데, 특별히 과거에 자신이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그 뜨거운 은혜와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했던 그 모든 행동들을 다시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방법 세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기억하고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가지는 것. 어떻게 보면 굉장히 단순하고 간단해 보이는 방법입니다만, 현재 본인의 영적인 상태에 따라 얼마나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는 천차만별일 것입니다. 자 그런데, 예수님께서 에베소 교회에게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방법을 알려주셨는데, 우리는 이 내용을 쉽게 지나쳐선 안 됩니다. 요한계시록 2장 5절 하반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아멘.
만일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처음 행위를 가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예수님께서 에베소 교회에 직접 찾아가셔서 에베소 교회의 촛대를 그 자리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신다는 겁니다. 여기서 촛대를 옮긴다는 말은 에베소 교회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합니다.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님께서 교회를 소멸시키겠다고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는 겁니다. 너무나 두려운 말씀이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앞서 말씀드렸지만, 에베소 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디모데, 사도 바울과 사도 요한의 손길이 닿아있는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사도가 직접 목회한 교회라니.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런데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사도가 목양한 역사가 있는 교회, 근본이 있는 교회가 어떻게 될 수 있다는 겁니까? 촛대가 옮겨질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 겁먹으라고 주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겠다는 말씀은 실제로 엄포를 놓는 말씀이 아닌, 실제로 그러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2장 1절부터 7절까지의 말씀을 1차적으로 가장 먼저 받은 에베소 교회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에베소 교회는 에베소 지역에 일어난 대지진과 말라리아 전염병, 그리고 여러 가지 전쟁들로 인해 교회의 촛대가 옮겨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처음 사랑의 중요성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에베소 교회가 실존했던 시대를 떠올려 보면, 건강하고 바르게 신앙생활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보이지만, 놀랍게도 에베소 교회는 그러한 상황 가운데에서 예수님께 그들의 수고와 인내,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고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견뎌내며 지치지 않은 부분을 칭찬받았습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에베소 교회가 이 정도만 해도 정말 대단하고 잘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만, 서론에 말씀드렸듯이, 성경 말씀은 시대적인 상황과 배경에 영향받지 않습니다. 지금 너희 시대는 어려우니까 그정도면 잘했어. 그정도면 뭐 사랑 좀 못할 수도 있지. 진리를 잘 지키지 못할 수도 있지. 믿음을 부인할 수도 있지. 괜찮아. 이런 식으로 말씀이 기록되지 않습니다. 물론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겠죠.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진리를 보존하기 위해 투쟁하다가 목숨을 잃는 시대도 있고, 반대로 태평한 시대를 누릴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시대든 관계없이 성경은 하나님을 기준으로 삼아 절대적인 기준과 가치관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오늘 함께 살펴본 말씀도 그렇습니다. 주위에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음행의 유혹을 받기도 하고, 교회 안에서는 이단들과 싸워야하고, 상상만 해도 너무나 피곤하고 지칠만한 상황입니다. 사랑 좀 못하면 어떻습니까. 이해해 줄만하지 않습니까? 잘하는 것이 있으면 못하는 것이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사람이 어떻게 완벽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네. 보통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자기합리화에 빠지게 되는데요. 이렇게 자기합리화하는 일이 없도록 요한계시록 2장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신앙적인 낭만을 품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어떤 시대든지, 기독교가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든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 어떠하든지, 그런 요소들에 영향받지 않고 사실과 전혀 다른 말들에 대해서는 요동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기준으로 삼아서, 하나님의 나라가 속히 도래하기를 소망하며,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그 처음 사랑을 온전히 품고 그 사랑을 담아 행동으로 실천하며 살아가는, 그런 복된 삶을 살아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만약 처음 사랑을 버렸다면,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 사랑을 버렸는지 기억하고, 회개하며 다시 처음 행위를 회복할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처음 행위를 회복하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우리 화평교회의 촛대를 옮기실 수 있다는, 너무나도 두려운 그 가능성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요한이 목회한 에베소 교회의 촛대도 옮기신 예수님께서는 지상에 있는 교회 중에 그 어느 교회든 관계없이, 처음 사랑을 버린 채 스스로 돌아보며 회복하지 않고 나태하고 게으른 채로 신앙 생활하는 그런 교회는 요한계시록 2장 5절 말씀에 따라 그 촛대가 다른 곳으로 옮겨질 것입니다.
오늘 함께 나눈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영적으로 너무나 어둡고 타락한 이 시대 가운데 하나님 앞에 충성된 일꾼으로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깊이를 더해가시며 삶으로 주님께 영광 돌리시는 모든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며, 주님의 몸된 교회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시는 주님 감사를 드립니다. 처음 사랑을 버리고 주님께 책망 받은 에베소 교회의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받기만을 원하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며,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만을 강요하고 우리의 처음 사랑과 처음 행위에 대해 깊이 상고하지 않는 불충을 주여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처음 사랑을 회복한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치지 않고 쉬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푯대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 화평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날이 갈수록 예수님을 아는 지식과 사랑의 깊이가 풍성해 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주여 우리의 심령을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 마무리 기도 >
온 우주만물과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의 인도하심 따라 삼일 저녁에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수요기도회에 나와 한 목소리로 찬송하고 말씀을 나누며, 한 마음으로 기도하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언제든 은혜의 자리를 사모하며 시간을 구별하여 주님 앞에 나아오는 우리 성도님들을 주여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함께 마음모아 기도한 제목들이 있습니다. 담임목사님 청빙과 우리 교회와 국가와 사회 열방을 위해, 환우들을 위해. 다양한 기도제목들을 놓고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여 주시고, 주님의 뜻에 따라, 역사하실 줄 믿사오니, 잠잠히 믿음으로 기다릴 수 있도록 우리의 심령을 붙잡아 주시고, 더욱더 굳건한 믿음으로 주님 한분만을 의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풍성한 은혜 내려주심에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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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에베소는 소아시아 상업의 중심지. 당대의 핵심적인 무역의 통로. (항구도시)
세 개의 거대한 무역로가 만나서 에베소를 통과함. 거대한 항구도시로서 그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였으며 아시아 지역 로마 총독의 소재지였음. 시리아, 인도, 아라비아, 이집트와 같은 나라에서 몰려온 상인들이 식료품이나 향료, 고급 옷감, 보석, 노예 등, 모든 것들을 사고 파는 거대한 무역 시장이었던 것.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에베소로 몰려듦.
에베소 교회는 AD 52년경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에 의해 세워졌음. 이들은 천막 만드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으며 바울과 함께 고린도에서 에베소로 왔음. 에베소 교회는 이 때 두 사람으로 시작되었고 몇 년 후에 바울이 다시 방문해서 2년 이상 머물면서 가르쳤음.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전 지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본거지로 삼았음(행 19:10). 그 이후에 디모데가 짧은 시간동안 목회하였음(딤전 1:3, 딛 1:5). 제1차 유대인 전쟁(66-70년) 발발 직후에 팔레스타인에 있던 사도 요한이 에베소로 와서 90년대 말까지 목회했음. 목회자로 말하자면 사도 요한이 가장 깊게 관련되어있음.
에베소는 일곱 교회 중에서 오늘날 가장 많은 유적을 보유하고 있음.
풍요의 여신 아데미(아르테미스, 라틴어로는 다이아나-그리스 로마신화) 신전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힘. 이 신전은 가장 큰 고대 건물로 꼽히며, 아테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보다 네 배는 더 큼.
아데미 신전에는 수천 명의 남사제와 여사제가 있었음. 이들은 대부분이 신전에서 몸을 파는 사람들이었음. 신전에서는 제사 의식과 더불어 여사제와의 혼음이 공공연하게 행해졌음.
에베소에는 황제 숭배가 번창하여 도미티안 황제에게 바치는 신전이 있었으며, 총 여섯 개의 황제 신전들이 있었음. 다시 말해 황제 숭배의 중심지였던 것. 이러한 의미에서 에베소는 황제 숭배의 수호자라고 불렸음.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이 대면한 현실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음. 이들은 내외적으로 직면하는 문제와 싸워야 했음. 또한 교회 내적으로 들이닥치는 거짓 교사들과의 싸움도 만만치 않았음(엡 4:14, 계 2:2,6).
훗날 에베소 교회는 에베소 지역에 일어난 대지진과 말라리아 전염병, 그리고 투르크인들과의 전쟁 등으로 인해 교회의 촛대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지금은 에베소 교회의 흔적만 남아있다.
** 처음 사랑
에베소 교회가 첫사랑을 잃어버리게 된 역사적 사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기독교 박해 때 신앙을 버린 것이고, 또 하나는 교리 싸움으로 성도 간의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에베소 교회에는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데, 케린투스와 같은 영지주의 이단들의 영향이 그것이었다. 영지주의는 기본적으로 이원론을 주장하여, 물질 세계는 근본적으로 악하고 영적인 모든 것은 선하다고 가르친다. 영지주의에서 파생되어 나온 이단 사상이 니골라당의 가르침이다. 니골라당은 극단적 이원론주의자들로, 영은 선하고 육은 본래 악하다는 전제 하에 악한 육체가 저지르는 모든 행위는 죄일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교회의 거룩함과 순수성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에베소 교회는 이러한 박해와 이단 사상과의 싸움 가운데, 하나님을 처음 만나고 섬겼던 첫사랑을 잃어버렸다. 아군과 적군을 정확히 구분하여 사랑할 사람은 사랑해야 했지만, 사랑과 긍휼과 자비 없이 차갑고 날카로운 칼날만이 번쩍이던 상황이었다.
교회는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이 같은 이단을 미워하고 그들과 거리를 둘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분쟁 속에 자칫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성도 간의 사랑마저 모두 잃어버리는 우를 범하기 쉽다. 교회도 극단적 이원론에 빠져 악한 것과 선한 것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고, 내 편이 아니면 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틀린 것을 틀리다고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틀린 것이 아닌 ‘다른 것’조차 틀리다고 생각하여 구별하고 싸워야 할 적으로 인식하는 어리석음을 주의해야 한다.
** 2세기 말에 사도 요한이 자신의 인생의 말년을 에베소에서 보냈다는 이야기가 있음. 소문에 의하면 사도 요한은 에베소에서 요한복음을 기록했고, 그곳에서 죽었다고 알려져 있음. 후기 전설에 따르면 예수님의 모친인 마리아의 무덤도 에베소에 있다고 알려져 있음.
** 이 편지들의 놀라운 특징 중에 하나는 각 교회가 소재지인 도시의 역사에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편지들보다 더 창조적이고 수사학적으로 강력한 편지를 상상하기는 어렵다. 각 도시에 살고 있는 독자는 각각 자신이 이 세상에 얼마나 깊이 속해 있는지 상기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들의 교회가 그들의 도시를 꼭 닮았기 때문이다. 이는 신약 성경의 가르침 곧 신자들은 땅의 시민이 아니라 하늘의 시민으로 부르심을 받았고(빌 3:17-21), 땅의 보물보다는 하늘의 보화를 추구하며(마 6:19-20), 자기들은 이 땅에서 거류민과 나그네로 간주하는(벧전 1:1, 17, 2:11) 자들이라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 교회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AD 60년대 중반에 발발한 유대-로마 전쟁의 혼란 속에서 사도 요한은 에베소에 이주했다고 전해진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옆에 있는 세베대의 아들 요한에게 자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부탁한다고 말씀하셨다. 요한은 예루살렘에 있던 자기 집에 마리아를 모시고 살다가, 사도 바울의 전도 여행으로 말미암아 복음이 소아시아 지방에서 흥왕하게 되자, 바울을 이어 에베소 교회를 맡아 목회하던 디모데의 초빙을 받게 되고, 60년대 중후반 경에 노쇠한 마리아를 모시고 에베소로 이주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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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해]
2:2 나는 네 행위들과 수고와 인내와 네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그들이 사도가 아니라 거짓된 것을 드러낸 것과
2:3 네가 인내하는 것과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낙심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다.
에베소 교회에 대한 주님의 평가
칭찬의 내용이 책망보다 훨씬 김. 에베소 교회의 주변 환경을 고려해 볼 때 에베소 교회는 굉장히 훌륭한 교회임.
장점 1. 행위(수고와 인내)
행위는 단순한 선행을 가리키는 말이 아님. 어떤 행동 하나를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삶이 믿음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님.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삶으로 나타나야 함. 믿음과 행위는 분리되지 않음. 하나님께서는 신자의 모든 행위를 기억하심. 따라서 에베소 교회의 행위는 전체적인 영적 생활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음. 예수님께서는 에베소 교회가 얼마나 힘든 상황 가운데에서 믿음을 잘 지켰는지 알고 계심.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몰라줘도 괜찮음. 누가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은 사실 영적으로 연약한 사람들이 갖는 마음임. 성숙한 신앙인은 예수님께서 알고 계신다는 이 말씀만으로도 마음에 큰 위로가 됨. 다른 사람들이 안다고 해서 얼마나 알겠는가.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과, 자신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또 하나님께 영광올려 드리기 위해서 행하는 모든 행위들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알아봤자 얼마나 깊이 알 수 있겠는가. 어차피 알 수 없음.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고, 또 칭찬해주는 것은 크게 의미부여할 필요가 없음. 때로는 그러한 칭찬들이 위로가 되고 또 힘이 될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또 본질적으로 우리의 마음과 행위를 100퍼센트 아는 분은 주님 뿐이라는 사실.
이 행위 안에 수고와 인내가 포함됨. 2절을 직역하면, 나는 안다 / 너의 행위들을 / 곧 너의 수고와 인내를. 이렇게 직역하면 행위가 가리키는 것은 수고와 인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음. 앞서 설명했듯이 행위라는 것이 영적인 행위, 즉 인생에 있어서 신자가 행하며 살아가는 모든 전체적인 영적인 생활이라고 했는데, 요한계시록이 기록되던 상황에 맞게 표현하자면, 이 행위들은 수고와 인내라는 것임. 그렇다면 수고가 무엇일까?
수고는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수고가 아님. 국어사전에 따르면 수고하다 라는 말은 일을 하느라 힘을 들이고 애를 쓰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 그래서 우리는 보통 사람이 어떤 일을 마쳤을 때 수고했다고 표현하는데, 본문의 수고는 그런 수고가 아님. 용도는 비슷하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음. 이 수고는 고통을 수반하는 굉장히 힘든 노동을 의미함.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기가 했던 힘든 노동에 대해 말할 때 사용했음. 고린도전서에서는 선교를 위해 힘쓰고 애쓰는 노고에 대해 말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하기도 했음. 그런데 같은 단어라고 하더라도 계2:2에 나오는 수고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모든 노력을 의미함. 단순하게 애쓰고 노력하는 것이 아님. 어려운 환경 속에서 감당해 내는 최선의 섬김임. 소진될 정도까지의 수고이며 사회적 적대감을 인내하며 견디는 것을 의미함.
잘먹고 잘살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수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 그렇다면 에베소 교회는 어떤 수고를 감당하였는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악한 자들과 투쟁해야 했으며, 거짓 선생들과 싸워야 했고, 정통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했음.
에베소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음. 에베소 교회는 이교도의 사회적 압박에 둘러싸여 있었음. 황제 숭배의 유혹과 아데미 신전 등 우상 숭배의 압박에 시달렸음. 에베소 성도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투쟁하였음. 이들은 믿음을 위해 땀을 흘렸고 희생과 봉사를 아끼지 않았음.
행위에 포함되는 인내라는 말은 요한계시록에서 굉장히 중요한 용어임. 인내는 죄악이 편만한 상황 가운데에서 믿음을 지킨 것을 뜻함. 다시 말해 괴로운 환경 속에서 참고 견디는 것을 의미함. 인내는 요한계시록의 핵심적인 주제임. 이 땅에서 고난당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약속을 기다리며 인내해야 함. 편안하고 윤택한 삶, 아름다운 삶은 성도들에게 적합한 삶이 아님. 이 땅에 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게 인내는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것임.
장점 2.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았음.
사도 요한은 악한 자들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밝히지 않았음. “악한”이라는 말은 도덕적인 악함과 영적인 악함 모두 의미할 수 있음. 학자들에 따르면 이 악한 자들에는 거짓 사도, 자칭 사도, 거짓 선지자, 니골라 당이 악한 자들에 포함되었을 것임. 에베소 교회는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았음. 그런데 악한 자들의 정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에베소 교회가 이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았다는 사실임. 에베소 교회는 비진리에 대하여 단호한 태도를 취했음. 그들의 거짓됨과 악함을 철저하게 밝혀냈음. 이러한 에베소 교회의 모습은 요한일서 4장 말씀에 기록된 사도 요한의 가르침과 일치함. 요한일서 4: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 “분별하라”는 말은 조사하다, 면밀히 밝히다, 주의 깊게 살펴보고 확인하다.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음. 그러니까 거짓 선지자들이나 이단들에 대해서 엄격하고 철저하게 대응한 에베소 교회의 모습은 칭찬받아 마땅함.
장점 3.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 견뎌냈고 게으르게 행하지 않았음.
에베소 교회가 무엇을 견뎌냈는지 정확하게 기록되어있지 않음. 아마도 요한이 견뎌낸 것이 무엇인지 굳이 밝히지 않아도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이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
결과적으로 무엇을 견뎌냈는지는 모르겠으나, 에베소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수많은 환난을 견뎌야 했음. 외부적인 환경에서 오는 고난과 박해를 견뎠음. 교회 내적인 문제보다는 외부에서 오는 박해와 환난에 관련된 표현임. “게으르지 않았다” 보다는 “지치지 않았다”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함. 현대적인 시각에서 볼 때 에베소 교회는 칭찬받아 마땅한 교회임.
2:4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할 것이 있으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다.
유일한 단점 1. 처음 사랑을 버렸음
에베소 교회에 대한 칭찬이 나열되다가 갑자기 책망에 대한 내용이 등장함.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이 말씀은 아주 간결하지만 앞서 등장한 모든 칭찬에 대한 내용이 무색해질 정도로 무게가 있는 책망임. ‘처음 사랑’이란 에베소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뒤에 처음으로 가졌던 사랑과 열정을 뜻함. 처음 사랑이 하나님 사랑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고, 이웃 사랑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음. 처음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모두를 포괄함.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이웃을 사랑할 수밖에 없음. 반대로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음. 둘 중에 선택적으로 하나는 사랑하는데 다른 하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사실상 진심으로 하나님이든 이웃이든 둘 중 하나를 사랑한다면, 다른 하나를 필연적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 에베소 교회는 하나님이나 서로에 대한 사랑보다 진리를 더 사랑했던 것으로 보임. 물론 이 말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신자가 아니라거나 아예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는 의미가 아님. 만약 그랬다면 앞서 등장한 에베소 교회를 향한 칭찬들은 들을 수 없었을 것임. 그들의 수고와 인내와 정통 교리를 수호하고자 하는 모든 행위는 칭찬받아 마땅하지만, 처음 사랑을 상실한 것.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 문제임. 우리말 성경에 보면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은가? 누가 버린 것인가? 에베소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성도들 개개인이 그 사랑을 자의적으로 버린 것. 자신의 의지로 사랑을 버린 것. 어쩌다 어쩌다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 아님, 무슨 소매치기 당해서 있었는데 없어졌어요. 이런 게 아님. 그냥 자기가 자기 뜻대로 사랑을 버린 것. 그렇기 때문에 단점으로 지적받는 것이며 책망 받는 것임.
그런데 사실 에베소 교회는 처음부터 사랑이 없었던 교회는 아니었음.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이 몇년 동안 쉬지 않고 눈물로 가르쳤던 교회임. 또한 디모데가 그 뒤를 이어 목회했으며, 디모데 이후에 사도 요한이 목회했던 교회임. 엡 1:15(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에 따르면 에베소 교회는 사랑이 충만한 교회였음.
이러한 에베소 교회가 어쩌다가 처음 사랑을 버리게 되었을까.
정통 진리를 수호하며 이단과 싸우는 과정에서 형제 사랑을 잃어버렸을 수 있음. 교리에 대한 강한 집념이 사랑을 약화시켰을 수 있음. 이단에 대한 증오가 형제 사랑을 약화시켰을 수 있음.
사랑과 진리, 이 두 가지는 어느 하나도 포기해선 안 될 것.
정통 교리를 수호하고 사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나와 입장이 다른 형제를 함부로 정죄하고 비판하는 일은 매우 조심해야 할 것.
사랑과 열정을 상실한 냉랭한 정통주의도 경계해야 할 것.
이러한 가능성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처음 사랑을 버린 이유라고 단정지을 수 없음. 사람마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게 된 원인이 다를 수 있음. 중요한 사실은 처음 사랑을 상실했다는 데 있음.
2:5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하여라.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너에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방법
1) 어디에서 떨어졌는지 기억하라.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첫 번째 단계는 기억하는 것. 어디에서 떨어졌는지 자기 성찰이 필요함. 원인을 스스로 진단하라는 것. 목사에게 해달라고 해선 안 됨. 기억하는 것은 과거의 경험을 현실화하는 것. 에베소 교회는 과거를 회상할 필요가 있음. 왜냐하면 이미 이들은 하나님의 깊은 은혜와 사랑을 경험한 자들이기 때문. 이들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이 아님. 이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했던 자들임. 그렇기 때문에 먼저 기억해야 하는 것임.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에베소 교회에게 새로운 것을 요구하시지 않고, 과거를 돌이켜 보라고, 기억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2) 기억한 것에 대해서 회개하라.
회개하라는 헬라어는 단호한 변화와 결단성 있는 행동을 촉구함. 잘못된 원인을 기억했으면 그것을 단호하게 고치고 돌아서야 한다는 것.
3) 처음 행위를 가져라. (처음 행위를 행하라)
구체적인 행동을 강하게 요구하는 명령. 그런데 이상함. 처음 사랑을 버렸기 때문에 책망 받은 것인데,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방법으로는 처음 행위를 행하라고 말씀하심. 처음 행위를 행하라는 말씀은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것보다 훨씬 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음. 처음 사랑을 포함해서 에베소 교회가 처음에 행했던 일들,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선한 일들을 행했던 그 행위들을 회복하라는 의미임.
처음 행위를 회복하지 않을 경우
- 내가 너에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면 – 기억하라, 회개하라, 처음 행위를 가지라.
이 세 가지를 행하지 않으면 심각한 심판을 받게 될 것. 어떤 심판?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는 심판을 받게 될 것. 이는 에베소 교회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함. 촛대가 옮겨지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모든 교회의 성도가 참으로 깨어있어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교회를 성찰해야함.
2:6 그러나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들을 미워하는구나. 나도 그것을 미워한다.
장점4.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함.
니골라 당의 근원에 대해서는 정확한 자료가 존재하지 않음. 계 2:15에서 니골라당이 다시 언급되는데, 니골라 당은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과 유사한 자들일 가능성이 매우 높음. 또한 이들은 두아디라에 나타나는 이세벨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됨. 동일한 이단이거나 유사한 이단일 가능성이 매우 높음.
니골라 당은 초대 교회 성도들의 신앙의 순수성을 파괴했음. 에베소 교회뿐만 아니라 소아시아의 모든 교회가 혼합주의, 부도덕, 우상숭배, 초기 영지주의, 반율법주의 등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음.
2:7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이기는 자,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겠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차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라고 선포하셨음(마 11:15; 막 4:9; 눅 14:35).
‘이기는 자’라는 용어는 계2-3장에서 7번 등장함. 이긴다는 동사는 신약에서 28회 사용되었는데 요한 문헌에서 6회, 계시록에서 17회 사용되었음.
이기는 자는 어떤 특정 인물을 가리키는 말이 아님. 순교자를 가리키는 말도 아님. 이기는 자에는 순교자도 포함되지만 순교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님.
“이기는 자”라는 말은 시험이나 타협, 환난을 견디고 인내한 교회의 승리에 적용되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험”을 이기신 것을 모델로 삼는다(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5:5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 –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것.
생명나무는 하나님께서 마지막 심판 후에 택한 자들에게 주시는 보상임. 요한계시록에서 생명나무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과 동일한 의미임. 생명나무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금지되었던 생명나무에 접근하는 것이 허락되었음을 의미함. 잃어버렸던 생명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 에베소 교회의 이기는 자들은 하나님의 낙원에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특권을 누리게 될 것.
** 결론
처음 사랑을 버린 사람, 처음 사랑을 상실한 사람에게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 그런데 과연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 전부일까? 성도의 성화의 삶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이 처음 사랑의 회복일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더 깊은 곳에 있다. 처음 사랑은 사실상 출발에 불과하다. 출발점에서 지치지 않고, 쉬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나아가면, 예수님을 아는 지식과 사랑의 깊이가 더욱 더 풍성해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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