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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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롬 1:24-32
제목 :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진노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등급을 매기고 나누는 일들이 발생합니다. 잘 사냐 못 사냐. 얼마를 가지고 있냐. 학벌은 어떻게 되냐. 잘생겼냐 못생겼냐. 별의별 기준을 가지고 서로를 재단합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대한민국에는 알게 모르게 수저계급론에 대한 인식이 팽배해졌습니다. (in) 누가 만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대한민국 계급 측정기라고 해서, 극상류층, 상류층, 상위 중산층, 중산층, 상위 노동자. 이런 식으로 구분해 놓았습니다. (다음) 다이아몬드 수저부터 시작해서 극빈곤층까지. 굉장히 세세하게 나누어 놓았죠. 단순하게 자산만 놓고 보는 것이 아니라, 직업, 학벌, 취미, 무슨 정치성향까지 구분해 놓았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결혼정보회사에서도 등급을 매긴다고 합니다. (다음) 1등급부터 시작해서 15등급까지. 굉장히 세분화 되어 있죠. 이뿐만 아니라 거주지를 놓고도 등급을 매깁니다. (다음) 어디에서 사느냐. 서울 안에서도 어느 구에 거주하느냐에 따라 등급은 천차만별입니다. (out)
지금 예시로 보여드린 이 이미지들은 온라인 상에서 돌아다니는 이미지들입니다. 절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측정된 것이 아니죠. 하지만 이런 아무런 권위 없는 표를 보고도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 나는 흙수저구나. 나는 평생을 흙수저로 살아가야 하는구나. 이렇게 절망하는 사람들이 있죠.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사람이 정해놓은 외적인 기준에 좌지우지될 필요가 있을까요? 그럴 필요가 전혀 없죠.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하는 내용을 토대로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리로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어떤 기준으로 구분할까요.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으로 구분할 수 있고요. 구원론적으로 표현하자면,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인 로마서 1장 말씀에 따라 구분하자면, 하나님의 의를 받은 사람과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사람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잘 사냐 못 사냐. 부모님께 얼마나 많은 재산을 상속받았느냐.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나 어떤 학벌을 갖추게 되었느냐. 이런 요소들은 하나님의 의를 받는 데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시간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진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가 얼마나 값지고 귀한 것인지 함께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기 전에, 오늘 설교 제목인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1절부터 15절까지 로마서라고 불리는 이 편지의 서두를 작성했습니다. 자신에 대한 소개와 로마 방문 계획에 대해서 열다섯 절이나 할애했죠. 그리고 나서 로마서의 본론으로 들어가자마자 복음이란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로마서 1장 16절 말씀에 따르면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17절 말씀에 따르면, 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 또는 하나님의 의로움이 나타납니다.
여기서 주의해서 봐야 할 부분이 있는데요. 17절과 18절의 공통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in) 1장 17절 말씀을 보시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라고 기록되어 있고 1장 18절 말씀을 보시면,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죠. 17절의 “나타나서”라는 표현과 18절의 “나타나나니” 이 두 가지 표현은 우리말 성경에서 읽기 편하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원어에서 두 동사는 같은 동사이면서 현재 시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out)
그래서 17절과 18절 말씀을 부분적으로 직역해 보면, 1장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있다. 1장 18절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진노가 쉬지 않고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 “나타나다”라는 동사는 감춰져 있어서 보지 못했던 것이 이제는 볼 수 있도록 드러난 것을 표현하는 동사입니다.
그리고 로마서 1장 17절과 18절 말씀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진노. 이 두 가지 어구를 문법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는데요. 우리말로 하나님의 의라고 한다면, 어떤 의미로 생각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나의 책이라고 표현하면 어떤 의미입니까? 일반적으로 소유의 의미. 내가 가지고 있는 책. 이런 식으로 이해할 수 있죠.
하지만 헬라어에서 소유격은 굉장히 다양한 용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말 골치 아픈 친구예요. 헬라어 소유격의 용법은 무려 스물일곱 가지나 됩니다. 문법책에 따라서, 학자에 따라서 더 많을 수도 있고 더 적을 수도 있습니다만, 일단 굉장히 많고 복잡한 것은 사실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진노. 이 부분을 해석할 때, 학자들마다 다양한 견해를 제시합니다만, 박윤선 목사님의 해석을 따라서 읽는다면, 주격적 소유격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의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라고 읽을 수 있다는 겁니다. 또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노”라고 읽을 수 있겠죠.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토대로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을 부분적으로 다시 읽어보면, 이런 식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가 감추어져 있던 것인데 이제는 복음 안에서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다.” 1장 18절.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노가 감추어져 있던 것인데 이제는 하늘로부터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가 복음 안에서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로움을 우리가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신분의 변화를 통해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무슨 수저를 물고 태어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든, 흙수저를 물고 태어나든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가난하냐, 부유하냐의 문제는 의인의 신분을 획득하는 데 있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어느 수저를 물고 태어나든 가만히 있어서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죠. 왜 그렇습니까? 모든 인간은 죄인의 신분과 죄악된 본성을 가진 상태에서 인생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in)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에,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죄인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out) 죄인의 신분을 벗어나려면, 신적인 존재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 의로움의 전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죄인의 신분과 죄악된 본성을 가진 사람이, 어떤 행위로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의롭고 선한 행위를 할 수 없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로운 사람이라 칭함을 받는 것만이 죄인의 신분을 탈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전인격적으로 만나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아무런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의인의 신분을 취득하더라도 여전히 죄악된 본성을 가지고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간주해 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칭해주셔서 신분이 변하게 되면,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의 신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죄악된 본성으로 인해 때로는 죄를 지을 수도 있고, 믿음이 연약해질 수도 있지만, 의인이라는 신분만큼은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의인의 신분을 주신다고 했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큰 어려움을 주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악한 사람들을 심판하지 않으시는 걸까. 도대체 우리는 언제까지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이 언제인지 우리는 알 수 없는데, 저 악한 사람들은 지금 본인들이 누리고 있는 것들을 죽을 때까지 평생토록 누리면서, 떵떵거리면서 살아갈텐데, 저런 꼬라지를 언제까지 보고 있어야 하나. 이런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 잘나가는 드라마, 더 글로리와 같은 복수극 드라마가 엄청난 성공을 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 연진이가 동은이한테 당하는 모습을 손꼽아 기다리지는 않으셨는지요. 네. 이러한 심리는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철저하게 심판하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일반 대중들은 실화를 바탕으로 그려낸 드라마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가상의 복수극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겁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는 것처럼 보이는 것, 방관하고 계시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과연 사실일까요? 로마서 1장 18절을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노가 하늘로부터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의 엄중한 진노하심이 전 우주적으로 쉬지 않고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어떤 방식으로 전 우주적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장 24절부터 32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확인할 수 있는데요.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세 가지의 표현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개역개정 성경을 있는 그대로 보되, 중요한 표현을 따로 표시해서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장 24절 말씀 보세요. (in)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로마서 1장 26절 말씀 보세요. (in)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이어서 로마서 1장 28절 말씀 보세요. (in)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24절, 26절, 28절의 공통점이 보이십니까? 이 내용을 하나로 정리해서 보면 (in)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사,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셨으니,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사. 이렇게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셨다는 표현이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등장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셨다는 표현이겠죠.
그런데 여기서 “내버려두다”라는 번역은 원어의 의미에 충실하지 않은 번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말로 내버려 둔다는 말의 의미는 무언가를 신경 쓰지 않고 방치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로마서 1장 24절, 26절, 28절에 나오는 “내버려 두다”라는 단어의 원래 의미는 “넘겨주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말로 번역된 다양한 번역본들에서는 대부분 “내버려 두다”라고 번역했지만, 영어 성경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예컨대, NIV 성경을 보면 (in) 로마서 1장 24절, 26절, 28절 모두 gave over라고 번역되어 있죠. (in) NASB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24절, 26절, 28절 모두 gave over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또한 신학적으로도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셨다는 표현과 하나님께서 넘겨주셨다는 표현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놔두시는 것. 방치하시는 것을 의미하지만, 하나님께서 넘겨주셨다는 말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신적인 활동이자 주체적인 결정이 담겨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법정에서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도록 죄의 순환에 넘기시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죠.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은 구약성경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데요. 대표적인 예 두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사사기 2장 14절 말씀 보세요. (in)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넘겨 주사 그들이 노략을 당하게 하시며 또 주위에 있는 모든 대적의 손에 팔아 넘기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하지 못하였으며”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바알과 아스다롯을 숭배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략하는 자들의 손에 넘겨주시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결정과 행동으로 나타나죠.
이어서 사사기 6장 1절 말씀 보세요. (in)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 주시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out) 하지만 사람의 눈으로 사사기의 상황을 분석해 보면, 이스라엘이 패배한 원인을 다양하게 진단할 수 있습니다. 힘이 약해서, 싸움을 못해서, 전략이 부족해서, 뭐 이런 이유들로 전쟁에서 대패했고, 결국 압제당하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만, 말씀에 따르면 두 가지의 측면에서 분석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측면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군사력이 강하고 약하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약속의 땅에서 샬롬을 누리며 거주하는 단 한 가지의 조건은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신 하나님 한 분만을 온전히 섬기느냐 섬기지 않느냐에 달려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의 죽음 이후에 계속해서 우상숭배를 일삼았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패배한 원인은 우상숭배라고 볼 수 있죠.
두 번째 측면으로,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로 인해 진노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은 이스라엘 백성을 대적들에게 넘겨주시는 방식으로 임합니다. 이 두 가지의 측면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하나님의 진노하심은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의 개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하늘로부터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나타나는 첫 번째 방식은 (in) 더러움에 넘겨주심입니다.
로마서 1장 24절 말씀 보세요. (in)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그들의 정욕대로 살아가도록 성적인 문란함과 더러움에 넘겨주셨다고 기록합니다. (out)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에 개입하실 때, 강제적인 방식으로 개입하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짓고 싶지 않은데,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강제로 그 사람의 마음에 음란한 욕구를 주입해서 억지로 죄를 짓게 만드시는 일은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24절 말씀을 다시 보시면,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더러움에 넘겨주시는 방식으로 나타나지만, 애초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대상은 마음의 정욕대로 살아가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죄악에 물들어 있던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나타나는 두 번째 방식은 (in) 부끄러운 욕심에 넘겨 주심입니다. 여기서 부끄러운 욕심이라는 말은 24절의 더러운 욕심과 거의 유사한 단어이면서 동시에 성적인 문란함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로마서 1장 26절 말씀 보세요. (in)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더니 이들이 어떤 일들을 행했다는 겁니까? 순리대로 쓸 것, 자연스럽게 사용해야 하는 것을 역으로 사용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따라 사용되어야 할 아름다운 성이라는 것이, 인간의 부끄러운 욕심, 더러운 욕심에 의해서 동성애로 오염되었다는 겁니다. 이 말씀에 근거해서 우리는 동성애라는 것이 인간의 죄악과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하모니를 통해 더욱더 악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는 동성애와 동성애를 둘러싼 성에 대한 주관적인 잘못된 생각들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컨대, 태어날 때부터 무슨 동성애자로 태어났다거나, 아니면 남자로 태어났는데, 자기의 성 정체성은 여자니까 여자로 살겠다. 나의 성 정체성은 남자니까 남자로 살겠다는 식의 말도 안 되는 비성경적인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나는 동성애를 즐기지 않지만, 성적인 취향은 존중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뭔가 이런 식의 입장을 취하는 사람을 보면, 열려있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이 진리의 말씀을 굳게 붙드는 그리스도인은 그 어떤 경우에도, 성적인 문란함과 동성애에 대해서 단호하게 거부해야만 합니다.
이어서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나타나는 세 번째 방식은 (in) 부패한 마음에 넘겨주심입니다. 로마서 1장 28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in) 시작.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out)
로마서 1장 28절 말씀 이후에 악행의 목록이 등장하는데요. 무려 스물한 가지나 되는 악행의 목록이 등장합니다. 사도 바울은 스물한 개의 악행의 목록을 서술하기 전에 먼저 어떻게 악행이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로마서 1장 28절 말씀을 통해 근본적인 원인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우리가 1장 28절 말씀을 읽을 때, 주의해야 할 점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 번역의 문제인데요. 우선 첫 번째로,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여기서 “싫어하매”라는 표현은 “인정하지 않았다”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원어에서 이 단어는 시험하다, 판단하다, 승인하다, 증명하다.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에서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이 말씀만 놓고 보면, 사람이 하나님을 자기 마음에 모시는 것을 감정적으로 싫어하는 것처럼 볼 수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것은 감정적으로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죠.
이어서 두 번째로 조심해야 할 점은, 28절 말씀에 두 번 등장하는 마음이라는 단어가 원어에서는 다른 단어로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마음은, 28절 상반절에 나오죠.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성경책을 가지고 오신 분들은 성경책에 있는 로마서 1장 28절 말씀을 한번 보시면, 각주가 달려있을 겁니다. 헬. 지식에. 이렇게 써 있을 거예요. 실제로 이 마음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에피그노시스. 실천적인 지식. 경험에 근거한 지식을 의미합니다. 어떤 추상적인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1장 28절 상반절 말씀을 다시 읽어보면, 또한 그들이 그들의 실천적인 지식이나 경험 안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개역개정 성경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지실텐데,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감정적으로 그냥 하나님 사랑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까? 그렇지 않죠. 믿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인생을 수반합니다. 자기를 희생해야만 합니다. 놀고 싶을 때 놀지 않고, 쉬고 싶을 때 쉬지 않고. 교회 가서 섬기고,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고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 이것이 믿음이자 믿음에서 비롯되는 신앙생활이지 않겠습니까?
또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재물에 있어서도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합니다. 얼마를 벌든,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만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 재물의 일부를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감사를 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죠. 이러한 우리의 신앙생활을 감정적인 부분과 이성적인 부분의 비율로 따져보면, 과연 감정적인 부분이 얼마나 될까요. 물론 감정적인 부분이 없을 수는 없겠죠.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넘치기 때문에, 기뻐하는 마음이야 당연히 있겠습니다만, 하나님이 누군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싫어하는 마음이 어디 있겠냐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실천적인 지식과 경험 안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 하나님이 어디 있냐. 내 인생에 하나님을 주인으로 둘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인정하지 않는 모습이 1장 28절 말씀에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1장 28절 하반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셨다고 하는데, 여기서 마음이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스물여섯 번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누가복음에서 한번, 요한계시록에서 두 번, 그리고 바울 서신에서만 스물한 번 등장합니다. 다시 말해 사도 바울만 즐겨 사용하는 단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이 단어의 의미는 일반적인 마음보다는, 이성에 가깝습니다. 지적인 능력 또는 이성이라고 볼 수 있죠.
마지막 세 번째로 주의해야 할 점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셨다는 말씀에서 “상실한”이라는 표현이에요. 이 단어는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쓸모없는, 부패한, 인정받지 못한. 이런 의미로 사용됩니다. 로마서 1장 28절 말씀에서는 “부패한”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방금 살펴본 내용을 토대로 1장 28절 말씀을 다시 읽어보면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in) 또한 그들이 그들의 경험적인 지식 안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합당하지 않은 일들을 행하도록 부패한 이성 안으로 넘겨주셨다.
자 이렇게 인간의 부패한 이성은 하나님의 진리를 추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 자신의 정욕대로 살도록 부추기는 역할을 합니다. 그 결과가 로마서 1장 29절부터 31절까지 나열되어 있는데요.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in) 시작.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아멘. (out)
스물 한가지로 열거되는 이 죄악의 목록은 인간이 저지르는 대표적인 죄악으로만 취급해야 합니다. 어떤 죄가 더 나쁘냐, 하나님께서 어떤 죄를 더 싫어하시냐. 이런 이야기는 굳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알 방법도 없고요. 다만 우리는 이 악행의 목록을 통해서, 하나님에 의지에 따라 부패한 이성에 넘겨진 자들이 어떠한 죄를 저지르는지 바라봄으로써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오늘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로마서 1장 17절 말씀 이하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진노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로움은 복음을 통해서만 나타나는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로움은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행위를 자랑할 수 있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으로 믿는 것이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것도 은혜요. 그 은혜에 따라 의롭다고 칭해주시는 하나님의 법정적인 선언도 은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칭하지 않는 사람들은 무엇을 받는다고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노하심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 진노하심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인데, 온 우주적인 진노가 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진노하심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넘겨주시는 방식으로 임하게 되는데, 표면적으로만 놓고 보면, 뭐 그리 특별해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습니다. 얼마 뒤에 그 사람이 또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사람이 또 또 죄를 지었습니다. 이런 현상이 특별해 보이십니까? 하나도 특별해 보이지 않죠. 죄인이니까 죄를 짓고 또 짓고 또 짓고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로마서 1장 말씀에 따르면, 이러한 현상 안에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개입되어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더러움에 넘겨주시는 방식으로, 부끄러운 욕심에 넘겨주시는 방식으로, 부패한 이성에 넘겨주시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끊임없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 적용점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첫째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더욱더 적극적으로 찬양하며, 주님께 영광 올려드리는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저는 우리 화평교회 성도님들이 얼마나 악하신지 잘 모릅니다. 겉으로 볼 때 우리 성도님들만큼 젠틀한 분들이 없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모두 죄악된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저 역시 목사이지만 때때로 마음으로 범죄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매일 매일 기억하고 찬양하며, 주님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대로 하나님께서 악인을 심판하시기를 원하는 마음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로마서 1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하심은, 더러움과 부끄러운 욕심과 부패한 이성에 넘겨주시는 방식으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겉으로 볼 때 그들의 삶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어 보일지 몰라도, 이미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 있으며, 더 이상 멈출 수 없는 죄악의 굴레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죄악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에,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대로 주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악한 사람들이 왜 망하지 않는지, 왜 하나님께서 당장 그들을 쳐죽이지 않으시는지에 대해서 탄원하지 않아도 됩니다.
악한 사람들이 편법을 일삼고 더러운 방식으로 부를 축적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전재산이 한 줌의 모래로 변하길 바라는 것은 우리 안에 내재 되어 있는 죄악된 본성에 의한 것일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나는 이렇게 믿음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해도 나의 경제 상태는 그대로인데, 저런 죄인 나부랭이는 하나님 믿지도 않으면서도 저렇게 잘 사는 게 말이 되냐. 하나님은 지금 뭐하고 계시냐. 이런 식의 사고방식은 상대적 박탈감에서 오는 자괴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 셋째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진노하시는지, 그리고 그 진노하심을 받는 사람들이 어떤 행위를 하고 어떤 마음을 가진 사람들인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기록했지만, 정작 그들이 누구인지는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살아가던 그 시대에 악한 사람들은 차고 넘쳤을 것이 분명한데,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받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로서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향해 손가락질하면서, 어~ 저 사람, 하나님께서 부패한 이성에 넘긴 사람이네. 이런 식으로 판단해선 절대로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성도님들, 오늘 나눈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오늘도 살아계시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죄악된 본성을 지닌 우리를 의롭다고 칭해주시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믿음으로 고백하게 하시는 주님의 크신 은혜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뿐만 아니라 악인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성품으로 진노하시며 다스리시는 주님의 섭리를 믿음으로 고백하시며 우리 주님께 감사와 찬양으로 영광 올려드리는 모든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죄악된 세상 가운데 우리를 주님의 자녀로 불러주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온전히 살아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주님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그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붙잡아 주시며, 한순간도 쉬지 않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온전히 신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공의로우심과 선하신 인도하심 가운데 평안함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찬송가 338장 함께 찬송하겠습니다.
< 축도 >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지극히 크신 사랑하심과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충만케 하심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로움과 진노하심을 올바로 깨달으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모든 주님의 자녀들 머리 머리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 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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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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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약의 구약 사용 – 그레고리 빌, D.A.카슨
p.301~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합 2:4b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으로”(אֱמוּנָה)를 의미하는 “에무나”는 신실함 또는 믿음을 의미한다.
바울은 롬 1:17에서 합 2:4를 인용하면서 에무나를 “믿음”이라는 의미로 인용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히브리어 본문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본래 에무나는 충실성, 신뢰성, 신실함 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를 믿음으로 인용한다. 유대 전통과는 대조적으로 바울은 믿음을 인간적인 자질 또는 덕목 정도로 이해하지 않는다. 믿는 자의 의는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서 발견된다. 더군다나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구원에 참여함, 복음에 동참함을 뜻하는 것이며, 단순히 개인의 신실한 삶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 초기의 70인역 합 2:4은 맛소라 텍스트나 바울과는 다르다. 의인은 “나의 신실함”으로 산다고 되어 있다. 즉 하나님의 신실함으로 산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의인이 하나님의 신실함으로 사는 것인지, 믿음으로 사는 것인지 정확하게 분간하기 어렵다. 하지만 하박국의 불평은 율법이 의를 가져오지 못할 것을 암시한다. 합 1:4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선지자가 판에 기록하도록 지시를 받은 묵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심판이 토라를 넘어선 새로운 실체를 출범시킬 것을 암시한다. (렘 31:31-34 참고)
하박국은 바벨론들에 의해 유다에 임할 임박한 심판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좀 더 먼 미래에 임할 바벨론에 대한 심판이 아니다. 사실 하박국은 이러한 놀랍고 파괴적인 일에 대한 주님의 선언을 받아들여 하박국을 쓰고 있다(1:5-2:1; 3:16-19). 구원은 오직 지체됨과 심판을 통해 오게 된다(2:3). 로마서에 기록된 바울 메시지의 구조를 알려주는 것이 로마서 1:17인데 롬 1:17의 서술적 문맥은 유배의 끝이 아닌 임박한 심판의 시간을 가정한다.
합 2:4의 문맥도 하나님의 의의 계시와 믿음으로 사는 자의 의로움 사이의 연결을 지적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의의 계시가 우리를 의롭게 한다고 이해한다.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되는가? 바울의 하박국 인용에 의하면, 믿는 자의 의는 구원의 약속에 기초를 두고 있다. “하나님의 의의 계시”는 복음 안에서 “믿음에 의해, 믿음을 위해” 발생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약속의 말씀에 의해 인간에게 오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고 선포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다. 약속이 성취되었지만, 바울은 구원의 지연을 가정하고 있는데, 구원의 지연에 근거해서 하박국 2:4은 믿음을 촉구한다. 따라서 바울은 초기 유대교의 해석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현재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지만 믿음을 요구하는 약속은 약속으로 남아있다.
p. 306~ 하나님의 진노
바울이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복음이 구원하기 때문만이 아니라(1:16-17)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1:18)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의의 나타남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진노가 어떻게 구원을 설명할 수 있는가? 하박국 2:4 인용은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선지자에게 주어진 약속은 심판을 통한 구원을 함의한다. 구원이 도래하기 위해서는 심판이 반드시 와야 함.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대적들을 쓸어버리고 구원을 이룬다. 결과적으로 땅에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에 대한 지식으로 가득할 것이다.”(합 2:14). 나중에 바울은 “파괴를 통한 구원”이라는 주제로 돌아오는데, 이 주제는 선지서에도 자주 등장한다(롬 9:25-33, 사 10:20-23; 28:14-29).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패턴인 바벨론의 침공에 직면해서 하나님의 신실함으로 “살라”고 선지자를 촉구하는 하나님을 발견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복음에서 성취되었고 복음은 이미 세상에 임한 하나님의 종말적인 진노에 직면해서 믿음을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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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IGTC 리처드 롱네커
1:28-31에 제시된 악의 목록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1)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간직하기를 거절함으로써 하나님께 반역했기 때문.
2) 하나님은 그분의 지혜로, 사람들이 자신들의 욕심대로 행하고, 그들의 뜻을 표현하며, 하나님을 떠나 독립하고, 자신들의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두셨기 때문.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반사회적이고 불의한 행동으로 가득 차 왔다. 사람들의 상실한 마음은 그들이 행한 이 행동에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로마서 1:18-32은 기독교 신학에 매우 중요한 본문이다. 이 본문은 바울이 로마에서 예수를 믿는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본론의 중앙부 네 주요 단락을 기록하기 시작한 곳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 본문은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을 주는 말씀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인류의 반역과 무법 및 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과 관련하여 제시된 내용은 정신이 번쩍 들게 한다. 창조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와 관련하여 서술된 내용은 유익하다. 인류의 우상숭배와 행위를 묘사하는 내용은 비참하다. 그리고 사람들의 부도덕과 불의의 결과에 관해 묘사하는 내용은 전적으로 섬뜩하다.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남.
하나님의 진노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기도 말하기도 싫어하는 주제이다. 하지만 진노와 사랑은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공히 선포하는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의 두 속성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최후 심판을 말할 때 어려움을 느끼지 않지만,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현재 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주저한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그들 자신의 죄의 정욕과(1:24) 자신의 부끄러운 욕심(1:26) 및 자신의 상실한 마음(1:28)에 내버려 두시며, 그로 인하여 온갖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재앙들이 불가피하게 초래된다.
하지만 이 본문에 있는 구절들은 제시된 모든 내용의 문학적인 수미상관으로 기능하면서 다음 내용을 선언한다.
1)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나타나고 있다.(1:18) 이는 하나님의 진노가 현재 나타나고 있다는 것과 하나님의 심판이 모든 유형의 불경건함과 모든 시대의 불의 및 모든 유형의 불의를 겨냥하고 있음을 알린다.
2) 하나님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정하셨다(1:32).
이는 개인적인 재앙과 역기능 및 소외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목적과 삶의 방향을 떠나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창조세계에서 하나님의 계시
이 계시는
1)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의 기본 구조에 하나님이 심어놓고 유지하시는 계시임.
2) 어느 시대, 장소, 환경이든지 적어도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에 관련한 기본적인 진리의 관점에서 모든 사람이 분명히 보고 이해한 계시임.
3) 모든 사람에게 창조의 하나님께 반응하라고 촉구하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에 핑계할 수 없게 하는 계시임.
바울은 하나님이 그의 창조세계를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주셨다고 가르친다. 그 지식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과 관련이 있으며, 사람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촉구한다.
하나님에 대한 무지는 과실이 있는 무지이다. 무지함이 반역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우리 자신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소유하려는 욕심이다.
바울이 1:24-31에서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하는데
1) 인류의 우상숭배와 인류의 부도덕 및 불의는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있다.
2) 하나님에 대한 인류의 반역, 하나님을 떠남, 하나님을 찬양하지도 감사하지도 않는 것에서 비롯된 우상숭배의 결과는 사람들의 삶에서 도덕적으로 왜곡되고 윤리적으로 끔찍한 방식으로 작용한다.
로마서는 기독교 복음의 가장 중심에 있는 문제들을 설명하며, 독자에게 여러 가지 독특한 특징을 제시한다. 이러한 특징이 분명하게 발견되는 곳은 하나님의 진노를 주제로 가르침을 주는 롬 1:18-32이다.
열거된 죄들은 인간의 대표적인 악으로만 취급해야지, 죄의 무게를 가늠하여 서로 비교하려 해선 안 됨.
우상숭배, 부도덕, 불읭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인가?
- 하나님을 찬송함으로써 그분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께 감사하는 마음을 품는 것(롬 1:21)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창조와 구속 사역에서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어떤 일을 계속해서 하시는지) 알아가는 것.
빌 3:1, 빌 4:4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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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CNT 토머스 슈라이너
사실상 모든 학자들은 롬 1:16-17이 롬 해석에 결정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감사는 형식적으로 15절에서 끝나는 것으로 보이지만, 접속사 ‘가르’를 통해 16절은 15절과 연결되어 있다. 바울이 로마 교회에 방문하고자 하는 소망은 개인적인 바람이 아니었다. 이방인의 사도로 신적인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믿음 안에서 세우며 그들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했다.
논증은 다음과 같이 진술될 수 있다.
바울은 로마에서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15절)
왜냐하면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이다(16a)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이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16b)
하나님의 의(즉, 그의 구원의 능력)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복음 안에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다(17a)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하는 구약 성경에 의해 뒷받침된다(17b).
복음 선포는 너무나 능력이 있기 때문에 복음은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가져온다. 바울이 말하는 구원은 대체적으로 미래적인 의미를 담고 있으며,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한다. (롬 5:9, 10, 13:11; 고전 3:15, 5:5, 15:2; 살전 5:8-9; 딤전 2:15, 4:16; 딤후 2:10, 4:18).
종말이 이미 현재의 악한 시대 속으로 침투했기 때문에 구원이 시작되었지만(갈 1:4), 구속의 날이 되어서야 그 구원이 완성될 것이다(엡 1:13-14).
바울이 구원을 언급할 때, 그는 무엇보다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에 주어졌던 구원의 약속을 염두에 둔다. 바울의 복음에서 얻을 수 있는 구원은 이스라엘에 주어졌던 약속들의 성취를 포함한다.
이 구원은 모든 믿는 자에게 효력이 있다. 바울에게 있어 믿음은 영적인 동의를 포함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구원의 믿음은 영적인 동의 그 이상을 포함한다. 아브라함이 그의 미래 전체를 하나님의 약속에 걸었던 것처럼 하나님께 헌신하고 신뢰하는 것을 포함한다(4:18-22).
바울은 구원이 보편적인 것임을 강조한다. 바울은 복음의 보편적인 범위를 강조하며, 그 복음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확대된다. 실제로 복음의 보편성은 로마서 전체에 퍼지는 주제이다.
롬 1:17은 왜 복음이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능력인지 그 이유를 설명한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 안에 나타났기 때문에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다. ‘나타났다’(아포칼립테타이)는 현재 시제이며, 이 단어는 하나님의 의가 복음 전파에서 현재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포칼립테타이는 바울에게 있어서 종말론적인 용어이며(롬 1:18, 8:18, 고전 3:13, 갈 3:23; 살후 2:3, 6, 8), 이는 역사에 침입해 들어온 종말론적인 사건을 의미한다. 이 동사의 수동형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의를 나타냏신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의”를 정의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면서 상당한 논쟁이 되고 있다. 여기에 두 가지 해석이 존재한다.
1)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 앞에서 신자의 위치를 가리킨다.
이러한 이해는 루터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계속 옹호되고 있다. 이 해석을 채택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데우’를 근원의 속격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의로 생각한다. 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사람들을 받아들이시거나 죄가 없는 것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이다. 루터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을 공정하게 그리고 치우치지 않게 판단하시는 분배적 정의가 하나님의 의라는 생각을 공격한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의 내적인 변혁과 도덕적 혁신에 영향을 미치는 의가 투입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여전히 죄인인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라는 선물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아님을 나타내는 법정적인 술어이다.
2) 하나님의 의를 보다 광범위하게, 하나님의 구원의 힘으로 이해하는 것.
이 해석에서 데우는 주격적 속격으로 이해되었다. 하나님의 의는 효과적이면서도 법정적이다.
이 내용을 해석할 때 강조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차이점이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의 의는 신적인 선물이며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지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논증은 아래와 같다.
1) 믿음 혹은 믿는 것과 관련하여 디카이오쉬네를 연결시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지위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시사한다. 만일 하나님의 의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라면, 사람이 하나님의 면전에서 죄 없이 서 있기 위해서는 믿음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2) 믿음 혹은 믿는 것이 의로 여겨졌다고 말하는 것은 믿음 때문에 그 사람에게 어떤 지위가 속하는 것을 암시한다(롬 4:3, 5, 6, 9, 11, 갈 3:6)
3) 바울은 롬 5:17에서 ‘의의 선물의’를 말한다. 이는 어떤 사람에게 주어지는 신적인 선물을 지칭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4) 고전 1:30의 디카이오쉬네는 근원의 속격인듯하다. 바울은 그들의 의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 문구에서 바울은 고린도인들의 의의 기원을 나타낸다.
5) 빌 3:9도 의가 선물의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한다. 바울은 율법에서 난 그 자신의 의와 믿음에 근거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를 대조한다. 바울이 의의 신적인 선물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은 여러 요소들이 보여 준다. 바울은 그 자신의 의와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를 대립시킨다. ‘에크’를 사용하는 것은 의의 근원이 하나님이신 의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게다가 본문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혹은 가지고 있지 않은 의를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6) ‘디카이운’의 동사형태는 바울에게 있어 대개 법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롬 8:33이 대표적인 예이다. 여기서 법정적인 배경이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의는 본질상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 아니라 신적인 선물이다. 그리고 인간이 이루어 놓은 어떤 행위에 의해 의로워지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믿는 사람들은 종말론적인 생명을 얻을 것이다.
결론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16a)
왜냐하면 복음은 믿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16b)
복음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의 의라는 종말론적인 계시가 복음 안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17a)
인간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원의 의를 경험한다(17b).
그리하여 하나님의 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을 통해 경험된다(17c)
복음과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이같은 이해는 구약성경과 일치한다.
왜냐하면 하박국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믿음 때문에 종말론적인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 죄인들에 대한 진노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1:18)
하나님의 구원의 의는 인간의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필연적으로 포함한다. - 보크무엘
하나님의 구원의 의가 왜 필요한가? 왜냐하면 인간의 죄가 하나님의 심판의 의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계시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복음 안에서 계시되고 있다(17절)
그리고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의 구원의 의를 필요로 한다 – 함축된 명제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영광을 거슬러 죄를 지은 모든 사람에 대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18절)
따라서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에서 하나님의 의의 계시에 대해 말할 때, 복음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의 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심판을 받을만하다고 선언하는 하나님의 심판의 의이다.
따라서 이 단락의 주제는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사람들, 즉 이방인과 유대인에게 의롭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났다는 것은 이 단락의 원동력이다)
왜 바울은 이 단락을 로마 교회에 썼는가? 바울은 로마 교회가 회개하도록 요청하려는 권고적인 목적을 가지고 이 단락을 쓴 것이 아니다. 로마 교회의 유대인들은 이미 회개했으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다. 이 단락은 로마 공동체의 어떤 구체적인 문제들을 알아내기 위한 단락이 아니다. 바울은 자신이 선포하는 복음을 정확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이방인과 유대인이 복음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로마 교회가 바울이 선포했던 복음을 분명하게 이해하지 않았다면 바울의 선교를 받아들이고 이를 촉진할 그 어떤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1:18-23 이방인이 하나님을 거절함
하나님의 진노는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다(18b)
그의 진노는 사람들이 진리를 막았기 때문에 나타났다(18a)
[그리고 그들이 실제로 진리를 막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19a)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세상의 창조를 통해 그들에게 자신을 알리셨기 때문이다(19b-20a)
그 결과 사람들은 진리를 막는 것에 대해 아무런 변명을 할 수 없다(20b)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지만(21a)
사람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거나 영광을 돌리지 않았다(21b)
오히려 그들의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어리석게 되었고(21c-22)
구체적으로 그들은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그만두고 우상들을 숭배하는 것으로 돌아섰다(23)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그분의 진노를 가하시는 일에 있어서 의로우시다는 것이 주요 사상이다. -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핑계하지 못한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비난받을만하다.
하나님의 진노가 종말의 사건인가, 아니면 인간 역사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사건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났다는 것을 이미 살펴보았다.(1:17)
바울 서신에서 진노와 심판의 날은 대개 미래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지금은 하나님께서 인내하고 계시는 시대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두 가지 증거는 진노의 계시가 실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의는 현재 계시되고 있다는 점이 분명하다. 또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남을 묘사하기 위해서 24,26,28절에서 과거 시제가 사용되고 있다(파레도켄). 이는 창세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간 사회의 도덕적인 황폐함은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났다는 것을 시사한다. 복음이 도래한 것은 인간 사회의 도덕적 타락이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임을 보여준다. 역사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심판들은 심판의 날에 있을 진노의 절정을 기대한다.
모든 사람들은 예외 없이 죄의 지배 아래에 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는 것의 본질을 주목해야 한다. 사람들은 창조 세계를 관찰함으로써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인식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아는 것을 포함한다. 하지만 우리는 자연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일반 계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폭풍과 지진과 홍수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할 수 없다. 바울의 목적은 창조를 통해 획득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막혀 있고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인간의 부패는 세 가지 방식으로 표현된다. ‘그들의 생각은 허망하여졌다.’ ‘그들의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 ‘그들은 어리석게 되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이 근본적인 죄이다. 사실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실제로 하나님께 합당한 경배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신다. 그리하여 죄의 본질이 하나님의 영광과 영예를 거부하는 것임을 아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인간의 불의는 가장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기를 거부하고 피조물을 경배하기를 원하는 것에 있다. 불의는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 그의 적절한 주권을 부여하지 않는 것을 포함한다. 하나님을 존중하고 그를 영화롭게 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아디키아’(불의)로 묘사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의와 심판의 의 모두 하나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는 것을 보기 원하는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단서를 가지게 된다. 하나님이 소중하게 여겨지고, 하나님의 이름이 존중을 받고, 또한 영화롭게 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이 세상에 임하는 것이다.
2. 이방인이 하나님을 거절한 결과들(1:24-32)
24, 26, 28절에서 ‘파라도켄’(내버려 두사)을 삼중적으로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인격적인 결단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는 인격적인 용어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노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독단적이거나 변덕스러운 분노가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예배하거나 존경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거룩하고 의로운 하나님의 반응이다.
1:29-31의 악 목록은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1) 분사 ‘페플레로메누스’(가득한)는 모두 (-이아)로 끝나는 네 개의 단어를 소개한다. 이 단어들은 모두 인간의 죄에 대한 일반적인 묘사들이다. 즉, ‘아디키아’(불의), ‘포네리아’(추악), ‘플레오넥시아’(탐욕), ‘카키아’(악의)이다. 이 단어들은 인간의 사악함을 포괄적인 방식으로 지칭하기 위한 효과를 위해 사용되었다.
2) 다섯 단어들이 ‘메스투스’(가득한)을 수식한다. ‘프도누’(시기), ‘포누’(살인), ‘에리도스’(분쟁), ‘돌루’(사기), ‘카코에데이아스’(악독).
3) 마지막으로 대격으로 되어 있는 열두 개 단어들과 모든 구들, 28절에서 ‘아우투스’(그들을)의 동격이 이 목록의 결론을 내린다. 처음 두 죄들은 다른 사람들의 명성을 파괴하는 사람들을 묘사하며(수군수군하는 자, 비방하는 자). 그 다음에 나오는 여섯 가지 표현들은 악의 충격적인 깊이의 면에서 볼 때 서로 결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1:32
다른 사람들의 악랄한 행동을 용납하고 갈채를 보내는 사람들은 악과 일정치 않은 수의 다른 사람들의 부패에 대해 유리한 여론을 형성하는 데 실제로 의도적인 공헌을 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태도에서 마음껏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의 심판을 알고 있지만, 사람들은 어떻게든 악을 추구하도록 부추김을 받는다. 다른 사람들이 악을 행하도록 부추기는 사람들은 그들이 악의 확산을 조장하고 다른 사람들을 파멸시키는 데 관련되어있다는 점에서 더 큰 악을 저지르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너무나도 확고부동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악의 욕구들을 실행하기 위해 미래에 받을 심판을 기꺼이 무릅쓰고 있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은 여전히 고침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죄를 행하여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선행이 아니라 악이 우리를 즐겁게 하고, 악이 우리의 인정을 받을 때, 어떠한 개선의 희망도 더 이상 없다.”
다시 한 번 본문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근본적인 죄는 하나님의 주되심을 즐거워하거나 이에 순복하는 것을 거절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악을 행할 뿐 아니라 또한 악을 행하는 일에 가장 큰 기쁨을 발견하는 사람들에게 당연히 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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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NT 로마서 – 더글라스 무
“구원”이라는 단어는 온갖 종류의 악으로부터 구조되는 것을 묘사할 때 널리 사용되어왔다. 구약에서 구원이라는 단어는 적으로부터 구출하는 하나님의 속성으로 사용된다(출 14:13; 15:2; 삿 15:18; 삼상 11:9). 하지만 사 52:7은 특히 중요함. 왜냐하면 여기서는 구원 뿐만 아니라 좋은 소식을 가져온다는 표현도 사용되기 때문이다. 롬 10:15에서 인용됨.
그런데 바울은 구원을 영적인 구원으로만 사용한다. 뿐만 아니라 바울의 초점은 종말론에 있어서 구원은 언제나 마지막 날에야 완결되는 최후 심판에서 받는 구원이다. 하지만 이 종말의 축복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순간 이미 어느 정도는 누리게 되어있다. 바울의 구원사적 전망에 이미라는 초점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구원은 흔히 어떤 위험으로부터 받는 구조라는 소극적인 의미를 갖지만, 때로는 적극적인 뉘앙스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용어는 개인의 영적인 필요를 충족해 주기 위한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나타낼 수 있다.
16절의 마지막 부분은 로마서를 통틀어 핵심적인 모티프로 거듭 나오는 주제들을 소개한다. 먼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은 “모든 믿는 자에게” 임할 수 있다. “믿다” 뒤에 목적어가 없는 것은 로마서의 특징이다. 이는 바울이 믿음의 대상으로 그리스도를 중심에 놓는 데 소극적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언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과 워낙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어서 그 이상의 상술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방편 삼아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의롭다고 말씀하시는”(4:5)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것이다.
믿음에서 지적인 동의가 배제될 수는 없지만, 바울의 강조점은 하나님께 항복하는 의지의 행위에 있다(4:18, 10:9).
따라서 바울의 믿음은 일련의 교리에 대한 동의가 아니라 한 인격에 대한 신뢰이다. 사람에게는 믿을 책임이 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께서 그분의 은혜로 우리에게 내미시는 선물을 받는 응다빙라고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칼빈의 표현대로 믿음은 일종의 그릇이다. 우리는 그 그릇을 비우고 우리의 영혼의 입을 열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기독교강요 3.11.7) 이와 같이 믿는 일은 순수하게 인간적인 활동이긴 하지만, 하나님이 어떻게든 우리에게 보상하실 의무가 있는 어떠한 공로나 가치도 지니고 있지 않다. 즉,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주시는 능력의 혜택은 믿는 자 모두가 누릴 수 있다. 이는 율법이 애써 쌓아올린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장벽을 무너뜨린다. 이 원리가 로마서에서 가장 크게 강조된다.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 여기서 “나타나서”라는 동사는 매우 중요한 용어이다. 본래의 의미는 노출시키다(uncover)인 이 동사는 바울이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여러 국면과 요소들이 궁극적으로 폭로되는 것을 가리키기 위해 전형적으로 사용된다. 이 폭로가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의 목적들에 관련되는 다양한 진실들을 식자가 인지할 수 있도록 노출시키는 것이다.
바울은 이 단어를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인류 역사의 지평에서 펼쳐지는 대로 노출되는 것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다. 바울은 복음이 우리에게 알려지는 방법 또는 복음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에 관해 알려주는 방법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셈이다.
바울의 요지는 복음이 하나님의 의를 어떤 식으로든 현실적으로 분명히 드러낸다는 점이다. 또한 이 동사의 시제는 현재 시제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복음이 어디서 선포되든지 간에 최후에 완전한 모습을 갖추게 될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는 일이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무엇인가? 로마서에 여덟 번밖에 나오지 않는(1:17, 3:5, 21, 22, 25, 26, 10:3에서 두 번) 이 어구는 나오는 빈도에 비례하지 않는 큰 중요성을 갖는다.
이유 1. 고후 5:21을 제외하고 바울은 하나님의 의라는 어구를 로마서에서만 사용하며, 그렇기 때문에 이 어구는 로마서에 고유한 메시지를 알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이유 2. 이 어구는 로마서의 중심적인 주제를 진술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본문 1:16-17과 3:21-26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유 3. “하나님의 의”의 의미가 복음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하나님의 의는 세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1) 하나님의 여러 속성 중의 한 가지 속성.
2)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분
루터의 개인적인 영적 투쟁은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을 스스로 의로우시게 하는 의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우리가 의롭다고 여기심을 받게 되는 의”라고 깨달음으로써 끝이 났다.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닌 의. 믿는 죄인에게 부여되는 하나의 새로운 지위가 좋은 소식이 되는 것이다. 루터는 의를 법정 용어로 이해하여 의인의 신분으로 해석하였으며, 의를 내면의 쇄신 또는 도덕적 변모의 문제로 보지 않았다. 이러한 이해는 종교개혁자들의 성경해석 전통, 역사적이며 문법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전통을 받아들이는 교회는 복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의로운 신분을 드러낸다고 받아들인다.
3) 하나님의 하나의 활동
세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지만, 로마서에서 “의”가 가장 빈번히 가리키는 것은 의의 선물이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부여하시는 의인의 신분이다. 또한 바울에게 있어 하나님의 의는 본질적으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 앞에서의 신분의 변화를 의미할 뿐, 도덕적인 변모를 이끌어내지 않는다. 죄인을 무죄로 풀어 주시는 법정적인 하나님의 활동이지, 도덕적인 의미에서 의롭게 하시는 활동이 아니라는 뜻이다. 거룩해짐을 의미하는 성화와 의인의 신분으로의 변화를 의미하는 칭의는 서로 뗄 수 없는 사이이지만, 둘은 분명히 다르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이고, 믿음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이 표현은 합 2:4의 인용인데, 바울은 합 2:4를 재해석하여 인용한다. 합 2:4은 하나님의 수수방관과 불공평을 탓하는 선지자의 불평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이는 이미 의인인 사람에게 인생의 난제들, 특히 하나님의 약속과 역사적으로 일어나는 일 사이의 모순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하지만 로마서에서는 합 2:4의 인용이 어떻게 해야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고 그럼으로써 영원히 살 수 있는가를 규정하는 역할을 한다.
하박국에서의 요지는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데 있어 믿음이 관건이라는 뜻이다. 신약에서의 믿음의 의미는 믿음의 대상인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 심화된다.
그런데 믿음은 인간의 능력이나 행위나 다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을 담는다.
이신칭의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들을 위해 하신 일은 전적으로 은혜에 속한 일이라는 근본적인 바울 신앙의 인간론적 반영이다.
1:18-32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 부분(18-20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남”을 고지하고 그 진노가 왜 정당화되는지를 설명한다. 사람들이 경건하지 않고 불의한 짓들을 해서 진리를 막는 것이 그 이유이다(18절). 바울이 진리를 막는다고 사람들을 비난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알만한 것을 사람들에게 주셨기 때문이며(19-20a), 그러므로 사람들이 죄를 지을 때 핑계하지 못하는 것(20b)이다.
두 번째 부분은(21-31절)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어떻게 막았는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그 결과를 몇 가지 뽑아낸다. 바울은 병행적인 세 개의 보응 결과를 써서 그의 주장이 정당함을 보여준다.
21-24절: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우상으로 “바꾼다” - 하나님이 “저희를 ~에 내어주신다.”
25-26a절: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꾼다” - 하나님이 “저희를 ~에 내버려 두신다.”
26b-31절: 사람들이 이성을 순리대로 쓸 것을 역리로 “바꾼다” - 하나님이 “저희를 ~대로 내버려 두신다.”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은 “사람들”이다.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 알 수 없다.
1:19-32에서 묘사된 경험을 누구의 경험이라고 특정화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는 시제의 일치가 적절한 실마리가 된다. 18절-19a절, 32절에서 바울은 현재 시제를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의 나타남과, 만드신 만물에서 알 만한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막는 일과, 어떤 죄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만하다는 것은 인간의 경험에서 언제라도 나타날 수 있는 것들임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19b-31에서 바울은 부정과거 시제를 사용함으로써,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섰다, 하나님이 저희를 내버려 두셨다고 말한다. 이렇게 과거 시제를 사용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처음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선 (원죄의) 결과를 경험했다는 것 이상이며, 모든 사람이 처음 돌아서는 그런 원죄를 함께 했다는 것 이상이기도 하다. 그는 돌아선 사람들이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들이기도 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만한 사람들이기도 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18절과 32절의 만인에 대한 것임이 분명한 공격과 결합되어 하나님을 알 만한 지식을 어리석게 내팽개치는 이런 죄 짓는 행동을 모든 세대에 모든 개인이 되풀이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1세기의 이교도이건 21세기의 물질주의자이건, 어떤 사람이든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식을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건 모두 배척하고 우상 숭배 쪽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라는 무서운 실재를 알게 되고, 모든 사람이 의롭게 하는 능력이 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절실히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슬픈 진리가 우리의 세계관에 완전히 통합되기까지는, 우리가 복음의 중요성을 절대로 온전히 파악할 수 없고 마땅히 얻어야 할 복음 선포의 동기도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18절
18절의 “가르”는 하나님께서 어떤 이유로 그분의 의를 분명하게 보여 주셨으며, 왜 그것이 믿음을 통해서만 자기 것이 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을 이끄는 접속사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접속사는 1:18에서 3:20까지의 논증 전체를 이끌고, 그 논증 전체가 18절에 요약되어있다고 볼 수 있다.
성경에서 진노는 하나님의 인격의 한 양상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점화를 그의 심판의 근거로 삼는 구약의 많은 본문을 볼 때 분명하다. 하나님의 진노는 성경적 신 개념에 필수적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이 파괴되고 그분의 거룩한 뜻이 인간의 발 아래에 짓밟히는 것을 냉담하게 바라만 보고 계실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죄를 보고 강력하게 단죄하는 반응을 보이시는 것이다.
구약성경은 어김없이 하나님을 죄에 대해 노를 발하시는 것으로 그리지만, 선지자들의 글에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여호와의 날과 연관되어 우주적으로 최고조에 이르러 터질 심판으로 묘사된다.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의 작용과 효과를 강조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를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느끼게 되는 현재적인 실재로 말하며, 장차 도래할 심판의 날에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질 것을 예언한다(롬 2:5, 8, 5:9, 골 3:6, 살전 1:10). 살전 2:16에서만 하나님의 진노가 현재 임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바울이 하나님의 진노를 현재적 실재로 제시하고 있다면, 그 진노가 지금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리고 두 개의 나타남(하나님의 의의 나타남, 하나님의 진노의 나타남)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그렇다면 “나타나다”라는 말이 하나님의 진노가 실제로 발해지는 것을 가리킨다면, 그것은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가? 비록 하나님이 죄에 대한 진노를 때가 찼을 때 최종적으로 돌이킬 수 없게 터뜨리시겠지만(2:5), 역사적 사건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진노를 예측할 수 있는 일들이 일어난다. 특히 24-28절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현재 하나님이 사람들을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죄를 짓고 그 모든 결과를 당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데서 하나님의 진노가 보인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공공연히 선포되고 있는 지금은 하나님의 진노가 과거 어느 때보다 더욱 정당하게 사람들에게 임한다. 하늘 아래 있으면서 복음 안에 있지 않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을 경건치 않음과 불의로 명시한다. 이는 진리가 발전하여 능력이 되어 그들의 종교적 지식과 도덕적 상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24절 바울이 하나님의 진노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동사 “내어주다”(hand over)의 용법은 구약에 뿌리를 둔다. 구약에서 이 동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전투에서 패하도록 “내어주시는”(손에 붙이는) 상투적인 공식에서 규칙적으로 사용된다. (출 23:31, 신 7:23). 그리고 아이러니컬한 역할의 역전으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 대한 벌로 다른 나라에 내어주실 때에도 바로 이 공식이 사용된다. (레 26:25; 수 7:7; 삿 2:14; 6:1, 13).
바울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더러움에 내어주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강제하신 것은 아니다. 내버려진 자들은 죄에 물든 자들이다. “내어주다”라는 동사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과정을 일으키는 분이라는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드릴 것을 요구한다. 하나님은 배를 잡고 있던 손을 그냥 놓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류 쪽으로 힘껏 미시는 것이다. 형사 피고인을 그의 범죄가 자초한 벌을 받도록 넘기는 법관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죄인을 계속해서 그 도를 더하는 죄의 무서운 순환에 넘기시는 것이다.
“더러움”이라는 말 속에 담겨 있는 성적인 뉘앙스가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도록 버려 두셨다는 말로 표출된다. 이것이 더러움이다.
26절
사람들이 진짜 하나님을 우상으로 바꾸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벌로 저희를 내어주신다. 그리고 여기서 저희를 내어주시게 되는 더러운 욕심이 24절의 더러움과 일치한다. 바울이 사용하는 욕심이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인정되지 않는 성적인 욕망을 가리키고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
“역리로” 자연에 거스르는 성범죄는 하나님께 패역하는 죄이기도 하며, 바울이 말하는 “순리”에의 호소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의 호소를 포함할 가능성이 높게 된다. 순리로 쓸 것을 역리로 쓰는 것은 하나님의 지식의 왜곡을 연상케 한다. 또한 이는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행위들을 암시하는 것이 분명한 어구인 “부끄러운 욕심”이다. 이러한 요인들을 고려할 때, 바울은 동성애의 행위를 참된 하나님 지식과 경배에서 떠나는 하나의 징표인 하나님의 창조 질서 위배로 묘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28절
죄와 응보의 인과적 고리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기술에서 바울은 비인간적인 죄, 즉 사람이 같은 사람을 미워해서 생기는 온갖 현상들의 근원을 같은 뿌리인 우상을 숭배하는 죄에서 찾는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을 뜻하고,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 안에서 주신 하나님 자신에 관한 앎을 보유하고 거기에 반응하는 것을 뜻한다. 바울이 여기서 “마음”(에피그노시스)의 뜻으로 쓰는 헬라어 단어는 때로는 실천적인, 응용적인 삶을 함축한다. 더 깊은 앎, 더 향상된 앎을 의미한다.
세 번째로 바울은 자기를 배척하는 데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하나님께서 저희를 내어주어”라는 말로 기술한다. 앞의 두 경우에는 하나님이 사람들을 부도덕한 행위들에 내맡기셨는데, 이 경우에는 “무가치한 마음”에 내맡기셨다. 여기서 마음을 가리키는 헬라어 단어는 누스이다. 이 단어는 지적 능력 이상을 가리킨다. 그것은 도덕적 추론과 의지 작용의 기관이다. 이 단어가 신약에서 바울 서신 외에 등장하는 경우는 눅 24:45와 계 13:18, 17:9 뿐이다.
하나님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인정할 만한 자격이 없는 마음으로 끝이난다. 물론 그 결과는 그들이 합당치 못한 일들을 하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위들.
1:21에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선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대해 올바로 생각하고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비극적인 무능력이야말로 사람들이 성경의 윤리적 원칙들의 실천은 고사하고 이해도 못하는, 분명히 불가해한 사실에 대한 설명이 된다. 오직 성령의 역사로 마음(누스)을 새롭게 함으로(롬 12:2)써만 이 뿌리 깊은 맹목과 도착 행위를 극복할 수 있다.
29-31절
바울은 성행위와 관련된 죄들과 하나님께 직접 짓는 죄들은 제외하고 사회악들에 초점을 맞춘다. 신약에 등장하는 악의 목록 중에서 가장 긴 이 구절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내어주신 “상실된 마음”에 의해 저질러진 사회악의 대체적인 범위를 밝히는 데 있다. 사람이 사람에게 저지르는 폐해가 이렇게 우상 숭배와 성도착 행위에 추가되어 그리스도 바깥 세계에 대한 바울의 스케치가 완성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