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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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창 22:1-14
제목 : 축복의 조건
인생을 살다 보면, 필수적으로 거쳐야만 하는 관문들을 만납니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학점을 관리하고, 토익이나 토플 시험을 보고, 취업 준비를 하고,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 이성 교제를 하는 등, 여러 가지 쉽지 않은 일들을 직면하게 되죠. 이러한 과정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본인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울 때,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주님의 자녀에게 항상 좋은 것만 주신다는 믿음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기만 하면 무조건 응답해주신다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간구하는 것이죠. 이러한 기도와 간구는 성경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해서,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요구만 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화평의 청년들, 그리고 화평의 성도님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축복을 풍성하게 체험하기를 소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에 기록되어있는 믿음의 선조들의 삶을 통해,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축복받을 수 있는지 배워야만 합니다. 또한 우리가 말씀을 통해 배운 내용대로 삶에서 행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베푸시는 손길을 체험해야만 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시험받은 사건을 살펴볼텐데요. 특별히 아브라함이 받은 시험이 어떤 시험인지 먼저 살펴보고, 영적인 시험을 어떤 믿음으로 통과했는지,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깊이 살펴봄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함께 상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창세기 22장 말씀인데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했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아브라함에 관한 내용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이기 때문에 대략적으로 어떤 내용인지는 다들 잘 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단순한 내용보다는 좀 더 깊이 있는 내용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22장 1절 상반절 말씀 보세요. (in)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out)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시점이 그 일 후에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그 일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성경책 가지고 오신 분들은 창세기 21장 말씀 보세요. 21장 1절에서 7절은 아브라함이 100살이 되었을 때 이삭을 낳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기적이 일어난 것이죠. 생물학적으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태였지만, 아들을 출산하게 됩니다.
그리고 21장 8절에서 21절은 아브라함의 여종 하갈과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에게 쫓겨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21장 22절에서 34절은 아비멜렉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아비멜렉이란 이 당시 블레셋의 왕을 지칭하는 명칭이었는데요. 중요한 점은 블레셋의 통치자가 아브라함에게 이런 말을 했다는 거예요. 창세기 21장 22절 말씀 보세요. (in) “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out)
블레셋의 통치자, 아비멜렉. 이런 표현들은 복잡하니까 쉽게 말하자면, 불신자가 아브라함한테 너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는구나. 이렇게 감탄했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최고의 칭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 주위에 믿지 않는 친구나 지인들이 여러분의 모습을 보고,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지만, 널 보면 하나님이라는 신이 진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져.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까? 이런 말을 듣는 것은 정말 정말 쉽지 않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런 말을 할 정도라면, 아브라함이 얼마나 신실하게 하나님을 잘 믿었다는 말이겠습니까. 그냥 지식이나 생각만으로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습니다. 말과 행동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뿜어져 나오고, 따뜻한 사랑이 언제나 느껴져야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자 그런데,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이런 말을 들을 정도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이제 더이상 증명할 것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불신자한테 인정받았으면 말 다 한 것이죠.
자 그런데 이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다시 창세기 22장 1절 상반절 말씀 보세요. (in)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out)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서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음으로써 100살에 이삭을 낳았고, 불신자이자 블레셋 땅의 통치자인 아비멜렉으로부터 믿음을 인정받은 아브라함인데, 하나님께서는 이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서 부르셨다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의 시험에는 정해진 때와 한계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세상에서 시험 볼 때, 시험에 응시할지 말지 누가 결정합니까? 우리 자신이 결정하죠. 시간과 장소를 결정할 수는 없지만, 시험 보기 싫으면 안 볼 수 있는게 시험이에요.
하지만 믿음의 시험은 어떻습니까? 보기 싫으면 안 봐도 됩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시험은 피할 수 없습니다. 무조건 응시해야만 합니다. 제가 비유적으로 표현해서 믿음의 시험이라는 것이 확실한 것처럼 보이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영적인 시험이라는 것은 분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믿음의 성장과 확신을 주시기 위해서 시험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사탄 마귀가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길에서 떠나게 하려고 시험하는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떤 종류의 시험이든 유혹이든 관계없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 확실하게 붙잡고 살아간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이에요. 오늘 본문에서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서 이삭을 바치라고 하시는 것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영적인 시험을 통과했죠. 자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영적인 시험을 믿음으로 어떻게 통과했는지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22장 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out)
시험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너의 아들, 너가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번제가 무엇입니까? 번제란 히브리어로 “올라”라는 단어인데요. 제단 위에서 제물을 완전히 태워서 그 연기를 올라가게 만들어서 올라에요. 네. 유머였는데요. 넘어가겠습니다. 자,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는데, 그 내용은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시험에 있어서 대응하는 몇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는, 꼬치꼬치 따져보는 유형이에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내용에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하신 내용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다시 물어보는 것이죠. 예컨대, 아브라함의 경우에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정상이 아닙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두 가지 정도를 여쭤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십계명에 살인하지 말라고 되어 있는데, 아들을 죽여서 번제로 바치라는 말씀이 합당한가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어겨도 된다는 말씀인가요? 그리고 레위기 1장 말씀에 따르면, 번제물의 종류로는 소나 양, 염소, 산비둘기, 집비둘기로 바치라고 말씀하셨는데, 레위기 말씀과는 다르게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인신제사를 드리라는 말씀입니까? 이런 식으로 질문할 수 있습니다.
자 그런데, 이런 첫 번째 유형은 오늘날 적용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직접접으로 환상이나 음성으로 말씀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유형은 적법한 설교자가 선포한 설교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 조목조목 따져보는 유형으로 대체할 수 있겠습니다. 이단들의 경우에는 성적으로 몸을 바치라는 둥, 재산을 다 팔아 바치라는 둥, 이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둔갑시킵니다만, 건강하고 바른 교회에서는 그런 요구를 하지 않죠. 그렇기 때문에 굳이 선포된 말씀에 대해서 따져 볼 필요는 없습니다. 말씀을 받는대로 순종하는 것이 건강하고 바른 믿음입니다. 하지만, 말씀에 순종하기 어려울 때, 이런 식으로 꼬치 꼬치 따져보려고 하는 성향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어서 두 번째 유형은, 즉각적으로 순종하지 않고 일단 끝까지 버티고 보는 유형이에요. 창세기 22장 2절 말씀을 잘 보면, (in) 시험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모리아 땅에 있는 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말씀하신 것이 전부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구체적으로 이삭을 언제 바치라고 정확하게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이삭을 어디에서 바치라는 것인지에 관한 장소를 명확하게 알려주시지는 않았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도로명 주소로 알려주시지 않은 것이죠. (out) 자 그래서,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시간과 장소를 말씀해 주실 때까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버틸 수 있습니다. 하기 싫어서 안 한 것이 아니라, 몰라서 못한 것이라고 변명할 수 있기 때문이죠. 본인의 마음가짐 문제가 아니라, 디테일하게 지시하지 않은 하나님의 잘못이라고 하나님께 책임을 떠넘길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세는 신앙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마음과 자세는 처음부터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보다 불순종하려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세 번째 유형은, 회피하는 유형입니다. 창세기 22장 전체를 훑어보면,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가 등장합니까? 등장하지 않습니까?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라의 이름이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아요. 그런데 과거에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을 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습니까? 처음부터 자기 생각과 의지대로 하갈을 취해서 자녀를 낳으려고 했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았죠. 이때 아브라함은 사라의 조언을 듣고 애굽 여종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자, 그런데 창세기 22장에서 사라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아브라함은 사라와 상의하지 않고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바치려 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오늘날 이렇게 아브라함과 같이 행동하면 남편들은 어떻게 될까요? 아직 결혼하지 않은 분들은 실감 나지 않으시겠습니다만, 중요한 문제를 결정할 때, 가정의 대소사를 결정할 때 배우자와 상의하지 않고 마음대로 결정해 버리면, 집에서 쫓겨날 수 있습니다. 제가 그렇다는 건 아니에요. 왜냐면 저는 애초에 마음대로 결정하지 않습니다. 우리 서동빈 강도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동빈 강도사님이나 저의 경우에는 배우자의 의견을 묻지 않고 결정할 생각 자체를 안 합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씀드렸습니다만,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혹은 교회에 헌신해야 할 때, 집사람과 상의해야 한다거나 남편과 상의해 보고 결정해야 한다고 응답하시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물론 상의는 해야 합니다만, 대체적으로 회피하고자 마음 먹으시는 분들은 이런 방식으로 피해 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유형은 순순히 말씀에 순종하는 유형입니다. 아브라함이 네 번째 유형에 속하는데요. 창세기 22장 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out)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바로 다음 날 아침부터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목숨보다 소중한 아들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문제를 아브라함이 실제로 몇 시간 정도 고민했을까요? 창세기 22장 2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신 시간대가 언제쯤인지 알 수 없습니다만 창세기 22장 3절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움직였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아브라함이 최대 24시간 이상 고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의 고민과 번뇌는 매우 깊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정말 말도 안 되는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시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폭력적이고 모순적인 명령을 하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곧이 곧대로 순종해야 할지, 아니면 다시 여쭤봐야 할지, 아니면 다시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 뭐 여러 가지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해하기 어려운 명령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질문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24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기로 결정합니다.
자, 우리는 아브라함이 이렇게 순종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 가지 배워야 할 점이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교회에서 어떤 일을 섬겨달라는 요청받을 때, 즉각적으로 나오는 반응 한 가지가 있죠. 목사님, 강도사님, 전도사님, 기도해 보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사실상 거절하겠다는 멘트죠. 저도 지금까지 이런 대답을 여러차례 들었어요. 물론 진실하게 기도하면서 고민하는 분들이 대부분이겠습니다만,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24시간 이내로 결정 내리고 순종하는 모습을 배워야만 합니다. 기도를 핑계 삼아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 고민하되 지체하지 말고 신중하게 결정해서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화평의 청년들, 부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믿음의 청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올해 여름, 7월과 8월 사이에 다양한 행사들이 진행될 예정인데, 우리 목사님들이나 강도사님들, 전도사님들을 통해 섬겨달라는 요청을 받을 때, 하루 안에 결정하고 순종하는 모습을 통해 믿음을 증명하는 지의 여부를 제가 유심히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마음을 정하고, 그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움직이는 것 역시 아브라함의 순종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아브라함이 무슨 좋은 일이 있어서 신나서 일찍 일어났습니까? 그렇지 않죠. 자기 손으로 자기 아들을 죽이러 가는 길이에요. 좋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아침 일찍 길을 떠납니다. 그리고 이삭을 번제로 바칠 장소에 3일만에 도착하죠. 이때 아브라함이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 22장 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in) 시작.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예배한 뒤에 어떻게 한다고 합니까?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out)
여기서 우리는 누구를 지칭하는 말일까요. 종들을 두고 가는데 우리라고 하면 당연히 아브라함과 이삭을 말하는 것이겠죠. 자, 그런데 이삭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만약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동한다면, 이삭은 뼈만 남고 다 타버릴 예정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우리가 돌아올 것이라고 말한 근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우러나온 확신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멘. (out)
아브라함은 자신의 손으로 이삭을 죽이고, 이삭의 육체를 남김없이 불로 다 태워버린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능히 살려내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어떤 방식으로 살려내실지에 관해서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이며,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신뢰하는 믿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욥의 믿음과도 유사한데요. 욥기 1장 21절 하반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아브라함의 믿음은 욥의 고백인 주신 이도 여호와, 거두신 이도 여호와라는 믿음에서 한발자국 더 나아가서 “돌려주시는 이도 여호와이시다. 살려주시는 이도 여호와이시다.”라는 믿음까지 나아갑니다. (out)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어떻게 살려내실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만, 인간의 지성을 뛰어넘어 일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신뢰했기 때문에 “우리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종들을 놔두고, 이삭과 단둘이 걸어갈 때, 이삭이 질문합니다.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굉장히 예리한 질문을 던진 것이죠. 그러자 아브라함이 답합니다. 창세기 22장 8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자, 여기서 노란색 글씨, 하나님께서 준비하실 것이다. 이 부분이 중요한데요. (in) 이 부분을 히브리어로 읽으면 엘로힘 이레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히브리어 성경에 엘로힘 이레라고 나와 있어요. 이레라는 말은 히브리어 동사입니다. 여호와 이레만 기억하시는 분들은 여호와 이레가 땅 이름과 같이 일종의 고유명사처럼 생각하실 수 있겠습니다만, 실제로 이레라는 말은 히브리어 동사에요. 이 동사는 “그가 준비할 것이다. 그가 제공할 것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out)
자, 그런데 이 문맥을 잘 살펴보면, 이삭의 질문에 대한 아브라함의 대답은 뭔가 상황에 맞지 않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 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삭을 번제로 바치기 위해서 가는 것이죠. 여기서 번제물은 무엇입니까? 이삭이에요. 그럼 번제를 바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이죠.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죽여서 번제로 바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번제할 어린양이 어디에 있냐는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실 것이다”라는 대답은 맞는 대답입니까 틀린 대답입니까? 상식적으로 틀린 대답이죠. 왜요?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본인이 이삭이라는 번제물을 직접 준비해서 데려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 그런데 아브라함의 이런 모순적인 표현은 창세기 22장 14절에서도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숫양 한 마리를 근처에 예비해 두셔서 이삭 대신 숫양으로 번제를 드리게 합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자신이 숫양으로 번제를 바친 장소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부릅니다. 22장 1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out)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레라는 표현은 그가 준비할 것이다.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이레는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여호와께서 준비하실 것이다. 라는 의미겠죠. 성경을 나름대로 자세하게 보시는 우리 청년들은 저의 설명이 이상하게 들릴 겁니다. 창세기 22장 14절 말씀에 따르면, 여호와 이레가 어떤 의미인 것처럼 보입니까?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여호와 이레의 의미가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될 것이다.”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준비될 것이다.”라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예라에입니다. 이레와 예라에. 두 동사의 기본형은 동일하지만, 이레는 능동태고 예라에는 수동태에요. 아브라함이 여호와 이레라고 이름을 붙였고, 사람들은 그 의미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될 것이다”라고 이해했다는 겁니다.
자 그래서, “이레”라는 표현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볼텐데요.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 죽일 뻔한 그 장소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지었는데, 이 표현 안에 아브라함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여호와 이레”라는 표현에는 아브라함의 흔적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기 위해서 아침 일찍 일어나 3일 내내 걸어왔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결박해서 실제로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사건의 주인공은 누가 봐도 아브라함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사건의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본인이 아닌 하나님이 이 사건의 주인공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과 우리의 차이입니다. 일반적인 사람은 자신이 수고하고 노력하고 헌신한 부분을 충분히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만약 어떤 일을 하고 나서 본인이 생각한 만큼 인정받지 못하면 섭섭해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칠 뻔한 그 장소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부릅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땅이라고 이름 붙이지 않고, 이삭이 번제물로 드려질 뻔했던 땅이라고 이름 붙이지 않고, 여호와께서 준비하실 것이다. 라는 이름을 붙인 겁니다. 이렇게 이름 붙인 것은 창세기 22장 8절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대답했던 “엘로힘이레”가 “여호와이레”의 고백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모든 순간과 자신의 흔적을 남김없이 모두 지워버리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에만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이자 순종의 자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같이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는 주님의 자녀에게 반드시 역사하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하십니다. 창세기 22장 12절 하반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in)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멘. (out)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평가하십니다. 일반적으로 경외라는 단어는 하나님을 존경하면서 동시에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어려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에 대해 공포심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인정하는 사람이 느끼는 거룩한 두려움이 경외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자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알겠다고 말씀하시는데,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순종한 행위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과정 가운데 “경외”라는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알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경외라는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를 초월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의 어떤 마음과 행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인지, 더욱더 넓은 관점에서 파악해야 하는 것이죠. 12절 하반절 말씀 다시 보세요. (in)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아끼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시간과 물질을 아낌없이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삶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out)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하면서 가장 많이 실수하는 부분 중에 하나가 바로 하나님과 협상 테이블에 앉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께 무언가를 맡겨놓은 것처럼 본인이 원하는 것을 달라고 계속해서 떼쓰는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을 수 있습니다. 이를 요즘 젊은 청년들의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선 축복 후 순종, 선 축복 후 헌신.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서 아브라함은 어떻게 행동합니까? 선 순종 후 축복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요구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아브라함과 우리의 신앙생활은 출발점부터가 다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좋은 것만 주시는 분이시죠. 하지만 오늘 본문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아브라함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인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는 잔인한 분이십니다. 말도 안 되는 명령, 폭력적이면서도 모순적인 명령, 비성경적인 명령을 내리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러한 요구에 대해 어떻게 반응합니까. 내가 이걸 하나님께 드릴테니, 대신 저에게 이걸 주세요. 이런 식으로 반응합니까? 그렇지 않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아무것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영적인 시험을 통과하면서 하나님께 무언가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받으려고 하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믿음과 순종의 행위가 기억되길 바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인정받거나, 후손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마음을 “하나님이레, 여호와이레”라는 표현에서 확인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일뻔한 사건을 하나님께서 준비하실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을 올려드린 아브라함의 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증명해낸 자신의 헌신과 공헌도는 철저하게 비워내고, 하나님만 나타내기를 원했던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께 축복받는 인생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께 무언가를 구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에 먼저 순종하고, 먼저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아끼는 것이 없는 인생을 먼저 살아내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간다면, 아브라함에게 복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차고 넘치는 축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성경적인 축복의 조건을 기억하시면서, 우리 주님과 온전히 동행하는 인생을 살아가시는 모든 화평의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시험받은 사건을 통해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지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너무나 바쁘고 고된 인생이지만, 이 한평생 살아가는 동안, 주님과 온전히 동행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기를 원합니다. 참되고 바른 믿음, 건강한 믿음을 가지고, 성화의 삶을 살아가기 원합니다. 주님 앞에 모인 다음 세대 영혼들 기억하여 주시고, 여호와 이레의 믿음으로 자신을 부인하며 오직 하나님의 역사하심만 나타나기를 바라는 모든 주님의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먼저 주시기만을 기다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 아낌 없이 모든 것을 드리며, 헌신하고 순종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 축도 >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지극히 크신 사랑하심과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충만케 하심이, 여호와 이레의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아가기로 결단하는 모든 주님의 자녀들 머리 머리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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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 서론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나님의 도우심,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적극적으로 필요로 하는 시기. 대입, 대학생, 취준, 배우자.
하나님과 협상 테이블에 앉는 사람? 하나님과 물물교환을 요청하는 사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가? 대표적인 예 Ab.
2. 본론
1) 시험 (나싸, test)
시험의 시점 – 아브라함 말년. 주변 환경이 정돈되고 행복한 시기를 보낼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시험의 시점은 어떨까?
2) 시험의 종류와 의미
사탄이 주는 시험과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 종류와 관계없이 믿음으로 통과하면 됨. 시험이 주는 영적인 의미는 시험을 통과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영적인 유익을 위한 것. 믿음의 확신!
3) 시험에 임하는 아브라함의 자세
(1) 순종의 자세 - 아침 일찍
(고민은 하루 만에 정리함.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기도를 핑계로 삼아 거절하고 있지는 않은가?)
(2) 믿음의 자세 -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어떻게?” 방법은 알지 못하지만, 굳게 믿기. 히? 약?
3) 여호와 이레 –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4) 뒷일은 하나님께 맡깁니다.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믿음은 실전. 어린아이 소꿉장난 같은 것이 아님. 실제로 잃어버릴 각오를 해야 함.
시험에 통과한 아브라함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1)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경외의 의미? 가장 소중한 것을 아끼지 않는 것.
하나님을 경외할 때 얻는 축복은? 경외(공경 敬, 두려울 畏; fear, reverence) 명 ●공경하고 어려워함. 성경에는 하나님과 관련해 사용되며, 무서움과 공포로서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인정하는 자가 가지는 거룩한 두려움, 곧 경건한 공경심을 일컫는다. 따라서 ‘경외’란 ‘존경하는 마음으로 삼가 조심함’이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느 7:2).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누릴 복은, ① 환난에서 건짐 받음(시 34:7–9) ② 존귀(시 15:4) ③ 자손까지 형통하게 됨(신 5:29) ④ 영혼이 늘 평안함(시 25:12–13) ⑤ 양식이 끊어지지 않음(시 111:5) ⑥ 범사에 형통함(시 128:1–4) ⑦ 소원을 이룸(시 145:19) ⑧ 기도 응답을 받음(히 5:7) ⑨ 장수함(잠 10:27) ⑩ 하나님이 그 이름을 기억하심(말 3:16) ⑪ 하나님의 긍휼을 덧입음(시 103:13) ⑫ 천국에서 큰 상급을 받음(계 11:18) 등.
2) 경외와 순종의 결과 – 축복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 이 사건을 마무리하는 아브라함의 한 마디 - 여호와 이레.
시험의 핵심은 무엇이었음?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는 것. 아브라함은 비상식적인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음. 하지만 아브라함은 이 사건을 기념하면서 아브라함 샤마라고 명명하지 않고, 여호와 이레라고 명명함. 내가 무엇을 했느냐보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느냐에 집중하는 것. 내가 행한 일을 높이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는 것.
3. 적용
1) 순종의 자세. 2) 믿음의 자세. 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4) 아브라함 샤마가 아닌 여호와 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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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4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바른성경
1 이 일들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부르시니, 아브라함이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아들, 곧 네가 사랑하는 너의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말해 주는 한 산 위,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려라." 하시니,
3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그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함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일어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곳으로 갔다.
4 셋째 날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멀리서 그곳을 바라보고
5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 머물러라. 나와 아이는 저기로 가서 우리가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겠다." 하고,
6 아브라함이 번제에 쓸 나무를 들어 아들 이삭에게 지워 주고, 그는 불과 칼을 손에 들었고 그들 두 사람이 함께 걸어갔다.
7 이삭이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여." 하니,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다." 이삭이 말하기를 "보십시오.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를 위한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하니,
8 아브라함이 "내 아들아, 번제를 위한 어린 양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준비하실 것이다." 라고 말하고 그들 두 사람은 함께 걸어갔다.
9 마침내 그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곳에 이르러 아브라함이 그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묶어서 제단 나무 위에 올려놓았다.
10 아브라함이 그의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의 아들을 죽이려 할 때,
11 여호와의 천사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니,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였다.
12 천사가 말하기를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고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마라. 네가 네 아들, 네 외아들까지도 내게 아끼지 않으니, 이제 나는 네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셨다.
13 아브라함이 그의 눈을 들어 살펴보니, 보아라, 뿔이 수풀에 걸린 숫양 한 마리가 뒤에 있었다.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잡아 그의 아들을 대신하여 그것을 번제로 드렸다.
14 아브라함이 그곳 이름을 여호와이레라고 불렀으니, 오늘날도 사람들은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15 여호와의 천사가 하늘에서부터 두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16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다. '내가 내 스스로 맹세한다. 네가 이 일을 행하여 네 아들, 곧 네 외아들을 아끼지 않으니,
17 내가 반드시 네게 복을 주어서, 네 씨가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매우 번성하게 하겠고 네 씨가 그의 원수들의 문을 차지할 것이며
18 또 네 씨를 통하여 땅의 모든 민족들이 복을 얻을 것이니, 이는 네가 내 말을 순종하였기 때문이다.'" 라고하셨다.
19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되돌아왔고, 그들은 일어나 함께 브엘세바로 갔으며,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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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커 구약 개론
pp.106
창 12:1-3에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진다. 이어서 “내가 ~하겠다”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진다(2-3절). 그 다음에는 “그리하여 아브라함이 떠났다”(4절)라는 인간의 반응(응답)이 뒤따른다.
이와 동일한 구조는 약속의 두 번째 사례에 해당하는 13:14-18에서도 발견됨. “눈을 들어 바라보라”라는 하나님의 명령. “내가 ~하겠다”라는 하나님의 약속(15-17절).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겼다”라는 인간 쪽의 응답(18절).
약속의 세 번째 사례에 해당되는 15:1-6도 동일한 구조를 반영한다.
“바라보라”라는 하나님의 명령(5a). “네 자손이 이와 같을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약속(5b절). “그리하여 그가 주를 믿었다”라는 인간 쪽의 응답(6절).
그렇다고 해서 아브라함이 모든 책임을 면제받는 것은 아님. 그는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완전해야 함(17:1). 또한 그는 계약(언약)을 지켜야 함(17:9). 그는 공의와 정의를 행함으로써 주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게 해야 함(18:9). 순종과 성취 사이의 인과관계는 “네가 이같이 행하였기 때문에...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이는 네가 나의 목소리에 순종하였기 때문이다” (22:15-18)라는 말씀에 반영되어있음. 26:4-5에서도 이와 동일한 의미가 발견됨. “내가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이는 아브라함이 내 목소리에 순종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 배제된다는 데 있지 않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가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완전해지지 않고자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가 이삭을 제물로 드리기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러한 선택권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인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불가항력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한에는 그의 자유가 달려 있음이 분명함. 인간의 책임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은 놓쳐서는 안 됨.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들은 아들 출산, 자손 번성, 땅, 하나님의 함께 하심, 복과 같은 영역들을 포함함. 족장들 중에 아브라함이 가장 많은 약속을 받음. 클라인스에 따르면 창세기에는 19개의 자속에 대한 약속 본문이 있음. 13개는 아브라함에게, 1개는 하갈에게(21:18), 두 개는 이삭에게(26:4, 24), 세 개는 야곱에게(28:14; 35:11; 46:3) 주어졌음.
땅에 대한 약속 본문은 13개가 있음. 9개는 아브라함에게, 1개는 이삭에게(26:3), 3개는 야곱에게(28:13, 15; 35:12; 46:4) 주어졌음. 땅의 약속과 관련해서는 그 약속이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주어졌음. 12:7에서 하나님은 “네 자손에게” 땅을 주실 것이다. 13:15에서 하나님은 “너와 네 자손에게” 땅을 주실 것이다. 13:17에서 하나님은 “너에게” 땅을 주실 것이다.
물론 아브라함은 여호수아 때의 이스라엘처럼 그 땅을 소유해본 적 없었음. 그의 소유는 말뚝을 박아 경계를 정하는 차원에 국한됨.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13:17). 언젠가는 그의 자손들이 그 땅을 실제로 차지할 것.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제 상속자는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음. 그러나 그는 결코 제 땅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지 않음. 그에게는 장막에서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음(히 11:9-10).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대부분의 약속들은 족장들이 살아있는 동안 성취될 수 없는 것이 분명함. 자손이 크게 번성할 것이라는 약속과 땅이 선물로 주어질 것이라는 약속은 족장의 생애 가운데 성취될 수 없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먼 미래에 정점에 도달하게 될 한 과정을 아브라함과 더불어 시작하심.
그렇다면 아브라함 자신은 어떠한가? 그에게는 무수히 많은 자손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두 명의 아들만 있을 뿐임. 그는 자신의 장막과 부를 가지고 있지만, 아직 땅은 가지고 있지 않음. 자기 아내를 매장할 지극히 작은 규모의 땅을 매입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땅을 소유하지 못했음.
그러나 아브라함은 한 가지 풍성한 복을 가지고 있음. 그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을 소유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러한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음. 하나님께서는 친히 아브라함의 방패와 상급이 되어주심(15:1). 선물들이 아니라 선물들을 주신 하나님이야말로 아브라함의 가장 큰 상급으로서, 아브라함을 강하게 붙들어주심.
pp.110.
아브라함은 창 12-25장에 기록되어 있는 온갖 경험들을 통해 순종과 신뢰의 사람으로 자리잡음. 그의 인생은 하나님께 시험 받는 것으로 시작하며(창 12장 “가라”), 또 하나님께 시험 받는 것에서 정점에 도달함(창 22장, “이삭을 바쳐라”).
pp.124.
아브라함은 100세에 이삭을 낳음으로써 자신이 제일 처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약속. 곧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는 약속이 성취되는 과정을 체험한다. 믿을 수 없던 일이 실제 현실이 된 것이다. 그런데 또 다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삭의 출생과 그의 제물로 바쳐지던 때 사이의 기간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지 못한다. 이삭이 아직 어린 아이였을까, 아니면 청소년이었을까, 아니면 자발적으로 아버지의 지시에 동의할 수 있는 성인이었을까. 22장의 이삭은 ‘나아르’(아이)라고 불린다. 히브리어 나아르는 유아로부터 시작해서 10대 소년과 정탐 역할을 수행할 만큼의 성숙한 남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남자를 가리킨다. 이삭은 불에 쓸 나무를 운반할 만한 남자이고, 자기 아버지에게 영리한 질문을 던질 줄 아는 나이의 남자이다.
코우츠 : 창 22장에서의 아브라함은 초인적이고 무감각하고 약간은 비현실적인 옷을 입은채로 나타남. 그는 자기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불합리하고 다소 비상식적인 하나님의 명령에 반대하지 않음. 창 12장, 16장의 아브라함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아브라함은 마치 자동으로 움직이는 기계처럼 무언의 체념 속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무자비한 과제를 수행했던 것으로 보임.
22장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는 것으로 시작함. 아브라함의 믿음이 시험을 받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시험하는 사례로 본다면 두 번째 경우에 해당됨. 첫 번째 시험은 이미 12장에서 이루어진 바가 있음. 가라!
궁극적으로 이 이야기는 아브라함보다 하나님에 관하여 더 많은 것을 알게 해 줌. 이 이야기의 정점은 14절에 있음.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그곳 이름을 ‘주께서 준비하실 것이다’라고 지어 불렀다.” 이 이름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함. “아브라함이 순종하였다”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실 것이다”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 믿음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성품과 그의 말씀의 확실성에 기초함.
pp.129
믿음이란 무엇인가? 아브라함의 믿음의 특징은 아래와 같다(롬 4:17-20).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1. 믿음은 창조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생식 능력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출산 능력을 창조하시거나 소생시키시는 분이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하시는 창조주이시다.
2. 믿음은 초합리적인 것이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 믿음은 이성에 반하는 불합리한 것이 아니라, 이성을 초월하는 것. 인간이 처해 있는 현실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현실이 있음. 만일 하나님께서 정말로 존재하는 분이시라면, 하나님은 그 일을 행하실 수 있음.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넘어서시는 분이심.
3. 믿음은 지성적인 것이요, 현실적인 것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몸을 보고서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음. 아브라함은 주어진 사실들을 피하지 않고 도리어 그것들을 직시함. 현실에 짓눌리지 않으며 굴복하지 않는 것이 믿음임.
4. 믿음은 견고한 것이다. 어떠한 의심도 아브라함을 흔들지 못했다. 믿음이 아브라함을 붙든 것이다.
5. 믿음은 확신을 주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능히 하실 수 있음을 확신했다.
아브라함을 의롭게 만든 것은 바로 이러한 믿음임. 믿음에 대한 다양한 설명 속에서 바울이 구체적으로 이삭을 제물로 바친 일에 대해서 어디에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음. 도리어 바울은 아브라함의 생애의 또 다른 주요 측면에 초점을 맞춤.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나이를 넘어선 탓에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항이 그렇다. 비록 하나님께서 무수한 씨를 약속하시긴 했지만 말이다.
다른 한편 히브리서 저자는 아브라함의 파란만장한 삶을 한층 구체적으로 개관한다(히 11:8-22).
1)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순종했음(히 11:8).
2) 믿음으로 방랑하면서 장막에 거주하였음(히 11:9)
3) 믿음으로 그는 (아들의 부활을 확신하면서) 이삭을 제물로 바쳤음(히 11:17).
야고보서의 저자 역시 약 2:21-23에서 창 22장을 사용하되,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행위를 통해 의롭다고 인정 받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 사용함. 그는 행동하는 믿음을 통해 의롭다함을 받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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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창세기 –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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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험의 목적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경건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음. 시험과 관련하여 “내가 알려 하노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미 알고 계시지만, 어떤 사실이 경험을 통해 완전히 드러나 확정되거나 실증되게 하시겠다는 뜻에 가까움. 아브라함의 경우에 적용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과 이에 대한 아브라함의 순종의 전 과정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과 경건이 완전히 드러나며 확정되기를 원하신 것이라 할 수 있음. 이 경우 하나님의 시험은 단순히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과 경건을 더욱 견고하게 하시려는 일종의 연단이자 훈련이라 할 수 있음.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그랄에 이주했을 때의 모습, 그전에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와 달라진 것이 없는 부족한 모습이, 그랄에 오래 거주하는 동안 거주민들로부터 인정받을 만큼 변했음. 모든 일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아브라함의 경건한 모습이 외인들에 의해 확인되어 선한 증거를 받게 된 것. 하나님께서는 이때 아브라함의 믿음과 경건을 확고히 하실 목적으로 그를 시험하셨음.
시험의 구체적인 내용은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모리아 땅의 한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는 것. 이 시험은 창 22:12이 표현하듯, 단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 내게는 오직 단 하나 이것뿐이라고 할 수 있는 그것을 아끼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무조건적인 헌신, 단 한가지도 자기를 위하여 남겨놓지 않는 전적인 헌신을 요구하신 것.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생명보다 소중한 존재였음. 노년에 얻은 자식이기 때문에 소중하다는 것이 아님. 창 15장에서 아브라함이 스스로 고백했듯이,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시므로”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 “내가 네 심히 큰 상급이라”하신 약속조차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할 만한 존재였음. 이삭은 아브라함의 후사로서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이어갈 자였으므로 이삭을 잃는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무의미해지는 것을 뜻했음.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날 때 그가 믿고 바라던 소망이며, 이후 그의 전생애를 지탱해 온 기반이 무너지는 것이므로, 아브라함이 살아야 할 목적과 의미를 상실하게 될 수밖에 없었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은, 아브라함에게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내어놓으라는 요구였음.
무엇보다 하나님의 명령은 너무나 비윤리적인 명령이었음. 아버지가 아들을 죽여 제사하는 것은 끔찍한 일임. 인신제사는 타락하고 부패한 이방세계에서나 찾아 볼 수 있는 악습이었음. 과연 선하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러한 명령을 하실 수 있는지 의심할 만한 일이었으며, 당연히 의심해야 할 일이었음. 한편으로는 가장 숭고한 종교적 행위이나 다른 한편으로는 가장 흉악한 비윤리적 명령이라고 하여 이 시험의 이중성을 지적한 어떤 이의 말이 아니더라도 아브라함이 지금까지 경험한 하나님에게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명령이었음.
아브라함이 바로 다음날 아침에 길을 떠났다는 말씀에서 우리는 그가 단순하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고 볼 수 없음. 아브라함이 밤 사이에 얼마나 깊은 번민과 갈등 속에서 죽음의 고통을 맛보았는지, 그 시험의 가혹함을 어떻게 이겨내었는지 상상할 수 없음.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룻밤의 짧은 시간 안에 마음에 어떤 해답을 얻고 길을 떠났음. ex) 이삭의 질문.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자식을 죽여 번제로 드려야 하는 아비에게 참으로 고통스럽고 난감한 질문이었으나 아브라함은 조용히 아들에게 말함.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히브리서 11:17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다고 증거함. 아브라함이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으로 보임.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얻은 믿음의 해결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브라함은 종들에게 “우리가 경배하고 돌아올 것이다”라고 말하였음. 히 11:19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다고 믿었음. 아브라함의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은 믿음이며,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은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분으로 믿는 믿음이었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시험은 그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시려는 연단의 절정이었음.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창 22:16-18)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로 주신 것임. 아브라함의 축복은 아브라함의 순종과 헌신이 전제되어 있는 것. 믿음과 순종의 관계는 무엇인가? 약 2:21-25을 참고해야 함. 야고보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린 행위가 그의 믿음을 증명하는 증거였다고 말함. 아브라함의 믿음을 말할 때, 그의 순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의 순종을 말할 때, 그의 믿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약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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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OT2
pp.135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이 사건은 여러 이유에서 동시에 가장 당황스러운 사건임.
1절 “그 일 후에”는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은 후인가? 아니면 하갈과 이스마엘이 사라진 후인가? 그리고 얼마 후인가? 며칠 혹은 몇 달, 몇 년인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아브라함이 이삭을 ‘나아르’라고 부르는 것을 보아, 이삭이 육체적으로 성인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함.
보통 히브리어 구문은 동사가 주어를 앞섬. 22:1에서 “시험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이렇게 배열되어야 정상임. 그러나 22:1은 “그 하나님, 그가 아브라함을 시험했다”라고 주어를 먼저 배치함으로써 하나님을 주목하게 만듦. 22:1에 따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심.
* 시험의 내용
시험의 강도는 명령문의 세 가지 직접 목적어. 1) 네 아들 2) 네가 사랑하는 아들 3) 이삭 순서로 극대화됨. 이렇게 구체화하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처음으로 말씀하실 때와 동일함. 1) 너의 고향과 2) 친척과 3) 아버지의 집을 떠나.
아브라함은 이삭을 모리아 땅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음. 번제(올라)는 제단 위에서 제물을 완전히 태우는 것(전부 태워버림, holocaust)을 의미함.
아브라함에게 시험은 두 가지 의미가 있음. 1) 사랑하는 아들을 희생 제물로 바칠 것인가? 2) 후손에 대한 약속을 지속할 수 있는 아들을 희생시킬 수 있는가?
구약에는 아이를 희생 제물로 바친 분명한 예가 있음. 삿 11:30 이후 입다가 하나님께 인간 희생 제물을 맹세함. 이 경우 희생 제물은 입다의 딸임. 이 관습은 모압에서 온 관습으로, 모압 왕은 성이 포위됐을 때 자신의 장자를 성벽 위에서 제물로 바쳤음(왕하 3:27).
몰렉의 제의가 이스라엘에 성행했다는 증거도 존재함. 레 18:21은 몰렉에게 자녀를 주어 불로 통과하게 하지 말라고 명령함. 레 20:1-5에는 몰렉에게 바칠 희생 제물을 위해 인간의 손으로 처형하는 것을 제재하는 규정이 있음.
마찬가지로 신 18:10은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를 맹렬히 비난함. 8세기 유다왕 아하스는 이런 불법적인 의식에 관여했으며(왕하 16:3), 요시야는 이 관습을 개혁의 일부로 제거하려 하였음(왕하 23:10). 선지자들 가운데 미가 6장 6-7절은 분명하게 아이 희생 제물에 반대하는 진술을 함.
이러한 자녀 희생 제물 역사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명령만 놓고 보면, 하나님의 명령은 비합리적이고 자기모순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음.
22:4
브엘세바에서 모리아까지 3일 동안 이동하면서 한 마디의 대화도 기록되지 않았음. 아브라함이 “가능하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소서”라고 말했을지라도, 성경은 기록하지 않았음. 아브라함이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코츠는 아브라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함. “아브라함은 초인적이며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들을 희생 제물로 바치라는 비합리적이며 미친 명령에 결코 반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마치 기계인 것처럼 조용히 체념하고 냉혹한 일을 위해 움직이는 것 같다.” (G. Coats)
히 11:17-19은 “우리가 예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를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읽는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은 욥의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욥 1:21)라는 고백을 뛰어넘어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며, 돌려주시는 이도 여호와시다”까지 나아감.
아브라함은 이삭의 질문(번제물은 어디에 있습니까?)에 대해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라고 답함.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을 보였다면, 이삭은 협조하는 믿음을 보임. 이삭이 희생 제물을 위한 나무를 옮길 정도로 강하고 컸다면, 아버지에게 저항할 만큼 강하고 컸을 것.
22:12
아브라함이 기꺼이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려 한 것은, 그가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임(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이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실 때 심지어 가장 귀중한 것도 움켜지지 않는 순종이며, 하나님 자신이 약속한 미래에도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을 의미함.
22:14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번제 바친 장소를 “여호와 이레”라고 이름 붙인다. 아브라함은 이 장소를 가리켜 “아브라함 샤마”(아브라함이 순종했다)라고 이름 붙이지 않는다. 여호와 이레라는 이름은 아브라함의 역할에 주목하지 않는다. 이 이름은 여호와의 베푸시는 행동만 부각시킨다. 독자는 아브라함의 순종보다는 하나님의 신실함에 더욱 인상을 받고 이 이야기를 떠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