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강 안식일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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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기도하고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나눌 내용의 제목은 입니다. 요한복음 5장 19절부터 47절까지의 말씀인데요. 한절씩 교독하겠습니다. ~~~ 아멘.
방금 함께 읽은 요한복음 5장 19절부터 47절까지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굉장히 굉장히 긴 말씀이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게 된 배경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치유하시고, 그 병자가 자기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갔고, 이것이 안식일 준수를 위반한 것이 되어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긴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인데요. 지난 시간에도 살펴보았습니다만, 오늘 본문에 기록된 말씀을 하시기까지 모든 과정은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을 병적으로 집착하면서 기계적으로 준수하는 유대인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베데스다 연못 행각에 누워있는, 38년이나 된 병자를 찾아가십니다. 이 병자는 예수님의 이름도 몰랐고, 치유 기적을 체험하고도 예수님에 대해서 궁금해하지도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믿지도 않았고,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예수님을 고발하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죠.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사람을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하는 격이니까요. 이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이 일로 인해서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고 예수님에 대한 박해를 시작합니다.
이런 과정을 생각해 보면, 굳이 예수님께서 이렇게까지 하셨어야 했나. 굳이 안식일에 치유하셨어야 했나. 그리고 믿지 않을 인간을 고쳐주셔야만 했나. 유대인들과의 논쟁이 일어났을 때, 그냥 못이기는 척 넘어가셨으면 좀 더 수월하고 폭넓게 공생애 사역을 감당하실 수 있지 않았겠나. 이런 생각들이 듭니다만, 철저하게 계획되고 의도된 하나님의 크신 뜻에 근거해서 이 일이 진행된 것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의문점이나 궁금증은 넣어두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 오늘 본문 내용을 천천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 파트는 아들이신 성자 예수님과 아버지이신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5장 19절에서 2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자기 자신으로부터) 할 수 없으니,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들도 그대로 하기 때문이다. /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자신이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주시고, 또 이보다 더 큰 일들을 보여주셔서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아멘.
제가 지난 시간에도 설명해 드렸고, 오늘 서두에서도 설명해 드렸듯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만나서 치유하신 것, 그리고 성전에서 우연히 병 나은 사람을 만나서 말씀하신 것, 유대인들과 대화하시는 것, 이 모든 일이 철저히 계획되고 의도된 것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 근거가 바로 요한복음 5장 19절과 20절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19절 말씀 보세요.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할 수 없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자기 자신의 주도하에,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칭호들을 예수님 자신에게 적용하실 수 있고, 하나님의 권리들을 자신의 권리로 주장하실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아버지의 권리가 나의 권리이다. 이렇게 주장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자 하나님은 언제나 성부 하나님께 순복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상호 대등한 관계는 아닙니다. 아버지는 모든 일들을 주도하고 아들을 보내며 명령하고 위임하고 허용하는 일들을 하는 반면에 아들은 응답하고 순종하며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권세를 받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대리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단순한 대리인 개념은 아닙니다. 대리인보다 훨씬 더 고귀하고 뛰어난, 그 이상의 존재입니다만, 공생애 사역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대리인의 역할을 감당하신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자 그래서, 아들이 행하는 모든 것은 아버지께서 행하는 모든 것과 일치하고 동일하기 때문에, 아들이 또 하나의 하나님으로서 아버지의 뜻에 부합하지 않는 어떤 일을 스스로 결정하여 독자적으로 행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자 예수님의 수동성이나 불완전성을 생각할 수 있는데, 이러한 오해는 정말 정말 위험한 오해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20절 말씀 보세요.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자신이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주신다고 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아들에게만 보여주시는 것이죠. 그 어느 누구도 아버지의 일을 볼 수 없습니다. 아들이신 예수님만 볼 수 있습니다.
20절 말씀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또 이보다 더 큰 일들을 보여주셔서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이 말씀도 잘 이해해야 하는데요. 더 큰 일들을 보여주시는 것은 누가 누구에게 보여주시는 겁니까?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이죠. 그럼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놀라게 하는 주체는 누구입니까?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놀라게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왜요?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그대로 순종함으로 행하시는데, 아들이 행하는 일들을 사람들이 보고 놀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보다 더 큰 일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죽은 자들을 살리고 심판하는 일들을 의미합니다. 이 내용은 4페이지 요한복음 5장 21절에서 23절까지의 말씀에서 나타나는데요.
21절부터 23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신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린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모든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이들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 아멘.
21절 말씀 보시면,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신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린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런 내용은 너무나 당연하고 친숙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처음 받은 사람들,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굉장히 충격적인 말씀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구약시대에는 죽은 사람들을 다시 살릴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래 참고 구절 1번 보시면, 세 구절을 넣어놓았는데요. 먼저 신명기 32장 3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이 말씀은 무슨 겁주려고, 센 척하려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주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에 관해서 말씀해 주시는 내용이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람을 죽이실 수도 있고 살리실 수도 있습니다.
이어서 사무엘상 2장 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한나가 사무엘을 출산하고 이렇게 기도하죠.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한나의 신앙을 고백한 기도라고 볼 수 있는데요. 한나에 따르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사람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분입니다. 지옥에 내려가게도 하시고 지옥에서 건져내시기도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열왕기하 5장 7절 상반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로 보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 아람 왕의 군대장관인 나아만이 자신의 나병을 고치기 위해서 북이스라엘의 왕인 여호람 왕에게 편지를 보냈을 때 여호람이 이렇게 반응합니다.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자 이런 내용을 종합해 보면, 구약성경에서 사람을 살리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는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죠. 그런데 요한복음 5장 21절 말씀에 따르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린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부활 생명을 맛보게 하신다는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 즉시 영원한 생명을 주시죠. 그래서 어떻게 보면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을 살리신다는 말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이 말에 문제가 있다면 영생을 주신다는 말씀도 문제가 있다고 봐야하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19절 20절에서 아들은 스스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했는데, 21절에서는 원하는 자들을 살린다고 합니다. 뭔가 모순적이죠.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살리는 건 자신이 원하는 사람들을 살린다? 말이 다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똑같은 얘기에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것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입니다. 이를 반대로 표현하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혼동해선 안 되는 것은 성부와 성자의 위격을 별개의 것으로 분리해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가 하나가 아닌 서로 다른 존재로 이해하는 것은 이단적인 이해입니다. 성부와 성자가 본질적으로는 같지만 사역의 방식이 다르다는 점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살펴보는 거예요.
자 그리고 5장 22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모든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다고 합니다. 이 말씀 역시 먼저 구약성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사야서나 예레미야서, 에스겔서와 같은 선지서를 보면, 이방 나라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그날에 최후의 심판이 행해질 텐데, 최후의 심판이 아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과 악한 나라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5장 22절에서는 현재 행해지는 심판 또는 마지막 날의 심판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을 단편적으로만 읽으시는 분들은 예수님을 구원자 정도로만 이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승천하신 예수님은 영광과 존귀를 받고 계시고, 온 우주만물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심판자로 이 땅에 오실 겁니다.
이러한 내용이 신약성경 여러 군데에 기록되어 있는데요. 5페이지 참고 구절 두 번째, 심판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구절들을 읽어보겠습니다. 먼저 고린도후서 5장 1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우리가 다 반드시 누구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됩니까?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여호와의 심판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요.
이어서 베드로전서 4장 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로 예비하신 분, 예수 그리스도께 사실대로 고할 것이다. 이런 이야기고요. 나머지 두 구절은 요한복음 5장과 9장에 나와 있는 내용인데요. 하나님께서 인자이신 예수님께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다는 말씀, 그리고 예수님께서 심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씀인데요. 특별히 어려운 내용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심판자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참고 구절이니 나중에 천천히 보시면 되겠습니다.
자 다시 4페이지로 돌아와서요. 요한복음 5장 2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이는 모든 이들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 여기서 “공경하다”라는 단어는 헬라어 티마오인데요. “존경하다”와 같은 의미입니다. 공경하다. 이런 표현은 요즘 잘 사용하지 않아서 어색하게 느껴지는 분들은 “존경하다”로 바꿔서 읽으셔도 되겠습니다.
23절 말씀의 핵심은 예수님을 존경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존경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예컨대 오늘날 어떤 나라가 다른 나라가 보낸 대사를 영접하지 않으면 그를 보낸 국가를 존중하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 역시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시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시고, 죽은 자들을 살리시며 심판의 권세를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존경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존경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은 믿는데 예수님은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자 이제 요한복음 5장 24절부터 30절까지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5장 2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의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지고 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니, 그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5장 24절 말씀은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듣고 믿는 자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신자는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영원한 생명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판받지 않습니다. 이미 무죄선고를 받았기 때문에 심판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부활 생명을 경험하게 될 마지막 날까지 심판 결과를 손꼽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 이미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그날을 고대하고 기다리고 소망해야 하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없기 때문에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은 아닙니다. 이유와 목적이 다르죠. 이러한 차이점은 분명히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날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요한복음 5장 2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때에 선한 일을 행한 자들은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들은 심판의 부활로 나올 것이다.” 선한 일을 행한 자들은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들은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고 합니다. 이 말씀에는 두 가지 포인트가 있는데요. 먼저 첫 번째, 모든 사람은 부활한다는 겁니다. 신자는 영원한 생명을 이미 소유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에 부활해서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일단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체에 대한 죽음은 맞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은 신자의 죽음을 죽음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잠을 잔다고 표현합니다. 잠자다가 일어나는 것으로 표현하죠. 좌우지간, 신자든 불신자든 관계없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그날에 모든 사람은 부활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부활이 어떤 부활이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두 번째 포인트는,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을 결정짓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겁니다. 말씀만 놓고 보면 행위가 가장 중요한 것처럼 보입니다. 선한 일을 행하면 생명의 부활을 하고, 악한 일을 행하면 심판의 부활을 하기 때문에, 동기가 어떻든지 일단 행위가 가장 중요하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레온 모리스라는 신약학자는, “사람의 삶은 자신이 고백하는 믿음에 대한 시금석 역할을 한다”라고 설명합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자신이 고백하는 믿음을 지키는 인생을 살았으면, 선한 일을 행했다고 평가받을 것이고, 불순종하는 인생을 살았으면 악한 일을 행했다고 심판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와 심판에는 어느 누구도 불복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요한복음 5장 30절 말씀에 나와 있는데요. 5장 30절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고, 듣는 대로 심판한다. 내 심판은 의로우니, 이는 내가 내 뜻을 행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려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심판은 의로운 심판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사용된 단어, 디카이오스라는 단어는, 옳은, 정직한, 의로운. 이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를 대입하든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심판에는 하나도 문제없습니다. 심판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불공평하다든지, 주관적이라든지, 이런 식의 항소가 불가한 것이죠.
자 이제 오늘 강의의 두 번째 파트. 예수님에 대한 증언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5장 31절과 3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증언한다면 내 증언은 참되지 못하나, 나에 대하여 증언하시는 분이 따로 있으니, 그분께서 나에 대하여 증언하시는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내가 안다.”
19절과 30절에서 예수님은 아들이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증언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31절 말씀 다시 보세요.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증언한다면 내 증언은 참되지 못하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께서 어떤 사역을 행하실 때, 모든 행동이 예수님의 의지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근거한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증언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자의적으로 자신에 대해서 증언하지 않습니다.
이어서 32절 말씀 보세요. 나에 대하여 증언하시는 분이 따로 있으니, 그분께서 나에 대하여 증언하시는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내가 안다. 여기서 나에 대하여 증언하시는 분은 누구이십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31절과 32절만 읽으면 하나님이라고 보기 어렵겠습니다만, 37절 상반절 말씀을 보시면,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에 대하여 증언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죠. 그러니까 나에 대하여 증언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겁니다. 자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또 다른 증인이 세례 요한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는 것을 피하는 유대인들의 관습을 따라서 이렇게 말씀한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증언이 있어야만 메시아이자 그리스도로 증명되는 분이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면 세례 요한의 증언은 예수님의 존재를 드러내는 데 있어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36절 말씀 보세요. “내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셔서 완성하도록 하신 일들, 곧 내가 하는 이 일들 자체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음을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바른성경 번역이 대체로 직역에 가깝고 번역상 오류가 굉장히 적은 편인데, 36절의 경우에는 번역이 조금 아쉽습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 하면, 증언이라는 단어는 마르튀리아 라는 헬라어 단어인데, 이 단어에는 증언 또는 증거.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증거라고 번역하고, 바른성경에서는 증언이라고 번역합니다. 증거나 증언이나 똑같은거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은 편하게 생각하셔도 좋습니다만, 증거나 증언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해야 된다고 보신다면, 증거라고 이해하시는 것이 좀 더 쉽게 느껴지실 겁니다.
자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셔서 완성하도록 하신 일들, 곧 내가 하는 이 일들 자체. 이것이 바로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된다는 겁니다.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하시면서 보여주시는 모든 일들,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사실을 증명한다는 것이죠. 우리는 오늘날 그 일들을 직접 목격할 수 없지만, 말씀을 통해 목격하게 됩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 들린 자를 자유롭게 만드시는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말씀을 통해 목격하게 되는 것이죠.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믿게 됩니다. 단순히 누가 믿으라고 강요하고 세뇌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사실관계를 보면서 이성적으로 믿는 거예요. 그냥 뭐 아무것도 없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무조건 믿어라 이런 것이 아니에요. 요한복음에는 이렇게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실 수 있는지, 어떻게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라고 볼 수 있는 건지. 이런 내용을 깊이 상고할 수 있도록 증명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이어서 세 번째 파트는 유대인들의 불신앙의 특징입니다. 요한복음 5장 37절 하반절과 38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너희는 도무지 그분의 음성을 듣지도 못하였고 그분의 모습을 보지도 못하였으며, 또 아버지의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지도 아니하니, 이는 너희가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영적으로 실패했다고 평가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물론 육성으로는 당연히 듣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죠.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전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말씀을 거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적이 없는 결론이 나오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영적으로 실패했다고 평가하시는 두 번째 이유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모세와 이사야는 제한적으로 하나님의 모습을 보긴 했습니다만, 그 외의 경우에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음성을 듣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있죠. 그것은 바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보는 겁니다. 예수님을 실제로 볼 수 있는데,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믿으면 하나님을 본 것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영적으로 실패한 세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유대인들의 마음 가운데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평가하시는 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죠. 자 그래서, 영적으로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예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 내용으로 넘어가서요. 요한복음 5장 39절부터 42절까지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너희가 성경을 자세히 살피니, 이는 그 안에 영생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그 성경이 바로 나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 / 그러나 너희는 생명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려고 하지 않는다. /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않으나, / 너희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음을 알고 있다.”
유대인들이 성경을 연구하는 목적,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성경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율법을 더 많이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생명을 더 많이 얻는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와 대조적으로 말씀하시죠. 성경을 아무리 열심히 연구한다고 하더라도 성경의 참된 내용과 목적을 깨닫지 못한다면 성경에서 얻은 지식 자체가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구약성경만 가지고 있던 시대로 말하자면, 구약의 기독론적인 가르침과 목적을 올바르게 이해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원을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의 문제는 주님만이 아시겠습니다만, 균형 잡히지 않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많습니다. 예컨대, 영적인 지식과 뜨거움이 조화를 이루지 못한 경우는 건강하지 않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느 한쪽에만 치우쳐선 안 된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성경 말씀은 엄청 많이 아는데, 삶의 적용이 없다면, 말씀을 제대로 아는 것이라고 볼 수 없겠죠. 반대로 찬양이나 기도 시간에는 정말 뜨겁게 기도하지만, 설교 시간에는 맨날 졸거나 자거나 핸드폰 보거나. 아예 듣지를 않는다면, 이것 역시 균형 잡히지 않은 믿음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또한 아무런 근거 없이, 원하는 바를 계속해서 기도하는 것은 샤머니즘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 다시 5장 42절 말씀으로 돌아와서요.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유대인들은 자기만족을 위해서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종교적인 의무를 성취하는 것에만 지나치게 몰두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를 인격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심적인 공간이 없는 겁니다. 이러한 상태는 영적으로 눈이 멀어 있는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성경 연구란 어디까지나 자기 계발의 수단에 불과했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으로 성경 연구를 사용했던 겁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스스로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말씀을 진심으로 사모하는 분들이 계세요. 가난한 마음으로 갈급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자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굉장히 바람직한 모습이죠. 그런데 은혜를 받기 위해서 말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지식적인 부분의 만족을 위해서 말씀을 듣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런 분들의 일반적인 특징은 설교자 또는 설교 내용을 평가한다는 겁니다. 물론 설교자도 사람이기 때문에 발음이 부정확하다거나, 전달력이 떨어지는 날이 있다거나, 감기에 걸려서 잦은 기침으로 인해 성도님들께 불편을 끼친다거나. 이런 일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좀 불편했다. 듣기 어려웠다. 이 정도는 이야기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서 내용이 어떻고 저떻고. 다른 내용을 좀 더 어떻고 저떻고. 이런 식의 평가는 공예배 시간에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이 준비해서 전하는 연설 정도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은혜의 방편인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이런 영적인 질병에 걸리게 되는 것이죠.
자 그래서 우리는 요한복음 5장 42절 말씀을 통해서 유대인들의 본질적인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었는데요. 그렇다면 우리가 유대인들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너무 쉬운 질문이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으므로 사랑의 표현을 충분하게 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다른 방법을 제시합니다. 물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방법도 있지만, 그것만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참고 구절 세 번째 내용을 보시면,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3장 2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이어서 요한일서 5장 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장황하게 나와 있지만 아주 아주 간단하게 표현하면, 결국 이웃을 사랑하는 것, 교회 지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마음으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도 사랑하는 것. 이런 부분이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자 이렇게 요한복음 5장의 안식일 논쟁 내용까지 살펴보았습니다. 굉장히 긴 내용이었는데요. 오늘 함께 살펴본 말씀을 한주간 묵상하시면서 우리 주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시고 진심으로 사랑하시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전적인 은혜가 아니었다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행함에 따라 심판받아 영원한 시간 동안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울며 이를 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자격 없는 우리를 먼저 사랑해 주시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며,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이웃을 사랑하고, 교회 지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신앙생활하는 시간만 흘러 보낼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칭찬받을만한, 성경적이고 건강하며 바른 신앙생활 영위하는 우리 모두가 되도록 주여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13-1
1. 1) 아들, 아버지, 의존성 2) 순종, 대리인 3) 죽은 자들을 살리고 심판하는 일들
2. 1) 원하는, 죽은 2) 모든, 심판 3) 공경(존경)
13-2
1. 1) 하나님 2)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
13-3
1.1) 음성 2) 모습 3) 말씀
2. 1) 영원한 생명 2) 사랑하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