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강 세례자 요한의 정체와 그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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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함께 공부할 내용은 요한복음 1장 19절부터 34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교재에 보시면 본문이 나와있는데요. 한절씩 교독하겠습니다. ~~~아멘.
오늘 말씀의 주인공은 세례 요한입니다. 지난주에 세례 요한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요. 세례 요한은 어떤 사람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면서 무엇을 증언하는 사람입니까? 빛에 대해서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이라는 사람은 빛이 아니라, 빛에 대해서 증언하는 사람이죠. 그런데 이러한 세례 요한의 정체에 대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확하게 잘 알고 있었을까요 모르고 있었을까요. 잘 몰랐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그래서 이 세례 요한이라는 사람이 도대체 누군지. 뭐하는 사람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이 사람을 보내서 확인합니다. 우선 이 종교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요. 이번 학기 일곱 번째 시간에 바리새인, 사두개인, 산헤드린 공회 이런 내용들에 대해서 자세하게 다룰 예정이고요. 오늘은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이 어떤 사람들이냐에 관한 것보다, 세례 요한이라는 사람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본문이기 때문에, 오늘 말씀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래서 오늘 강의의 주제는 세례자 요한의 정체성과 그의 역할인데요. 우선 세례 요한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이 던집니다.
그런데 이 문답이 참 희한해요. 질문도 희한하고 대답도 희한합니다. 오늘 강의의 첫 번째 파트,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 요한의 정체성에 대한 간단한 문답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교재 2페이지에 있는 표를 보시면, 세 가지의 문답이 등장하는데요. 짧은 질문과 단답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 문답 보세요. 너는 누구냐 라는 질문에 요한이 이렇게 답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아니, 그리스도냐고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그냥 너는 누구냐 물어본건데 자기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합니다. 뭔가 이상하죠? 아무런 배경지식이 없이 이 부분을 읽으면 굉장히 쌩뚱맞습니다. 그런데 주후 1세기 팔레스타인의 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으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시대인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는 메시아 대망 사상이 한껏 무르익고 있었습니다. 이런 때에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고, 메시아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겉으로만 봐서는 세례 요한이 메시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품을 수 있었던 겁니다. 세례 요한은 이러한 착각을 하지 않도록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라는 말이 무슨 뜻이죠?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이죠.
이어서 두 번째 문답 보세요. 그러면 너는 누구냐. 엘리야냐? 나는 아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은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하니까 갑자기 뜬금없이 무슨 엘리야 타령을 왜 하는가. 시대가 어느 때인데,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간지 몇백년이나 흘렀는데 뭔 소리를 하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세례 요한은 엘리야의 모습과 참 많이 닮아 있습니다.
아래 참고 구절에 마태복음 3장 4절 말씀 보세요. 요한의 겉모습이 어떻습니까? 낙타털 옷을 입었습니다. 참고구절 두 번째 열왕기하 1장 8절 말씀 보세요. 엘리야의 겉모습이 어떻습니까?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자, 이렇게 보면 세례 요한의 겉모습과 엘리야의 겉모습이 흡사합니다. 물론 세례 요한은 털이 많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낙타털옷을 입었기 때문에 비슷하다고 볼 수 있죠. 그렇다고 해주세요. 네. 다시 마태복음 3장 4절 보시면,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있었다고 합니다. 열왕기하 1장 8절,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이것도 똑같죠. 자, 이렇게 세례 요한과 엘리야의 겉모습이 굉장히 유사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런데 여기서 질문, 털이 많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있는 사람이 세례 요한밖에 없었을까요? 아마 그렇진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겉모습이 비슷하다고 해서 너가 엘리야냐? 이렇게 물어보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에요. 그렇다면 종교지도자들은 왜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일까요? 참고 구절 세 번째 말씀 말라기 4장 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실제로 구약시대에 거짓 선지자들은 엘리야의 겉모습을 따라서 흉내 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세례 요한이 엘리야 선지자의 겉모습을 의도적으로 따라한 것인지 아닌지는 알 방법이 없습니다만, 겉모습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이 공관복음에서 전하는 메시지는 엘리야처럼 회개의 긴급성을 의미하는 말씀들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엘리야와 세례 요한은 서로 일치하는 점이 너무나도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단호하게 답합니다. 나는 아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은 누구일까요. 세 번째 문답 내용 보세요. 너는 그 선지자냐. 종교지도자들은 세례 요한에게 그 선지자냐 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 역시 구약성경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으면 그 선지자가 선지자 누구를 가리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선지자는 신명기 18장 15절에 나오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의미합니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그 선지자라고 표현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 선지자”라는 말은 엄청난 상징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 선지자를 약속된 메시아와 동일한 인물로 믿었습니다. 나중에 요한복음 4장 내용을 살펴볼 때 사마리아 선지자가 예수님을 선지자로 고백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내용은 나중에 다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래서 선지자에 대한 약속이 구약성경에 분명히 주어져 있었기 때문에, 종교지도자들은 그 선지자가 세례 요한인지 아닌지 물어보는 것인데요. 이에 대해 세례 요한이 무엇이라 대답합니까? 아니다. 구약성경에 약속된 선지자에 대한 예언은 세례 요한에게서 성취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는 대답입니다.
자, 여기서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세례 요한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엘리야도 아닙니다. 신명기에 나오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세례 요한은 대체 뭐하는 사람입니까? 대체 누구이길래, 수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회개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일까요. 교재 3페이지, 요한의 정체성에 대한 구체적인 문답, 네 번째 문답을 살펴보겠습니다. 너는 누구냐. 우리를 보낸 사람들에게 대답할 수 있게 하라. 너는 자신에 대하여 무엇이라 말하느냐.
바리새인들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사절단으로 보내서 질문했는데, 준비해 간 질문에 대해서 다 아니라고 하니까,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자신들을 보낸 사람들에게 대답할 수 있게 말해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러자 세례 요한이 아주 아주 유명한 대답을 합니다.
답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나는 선지자 이사야가 말한 것처럼 ‘주님의 길을 곧게 하여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이다.”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선지자도 아닌 세례 요한은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소개합니다. 무슨 소리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인데, 이 소리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주님의 길을 곧게 하여라. 라는 소리입니다. 이 구절을 이해하려면 이사야서 40장 3절 말씀을 이해해야 하는데요. 아래 참고 구절에 나와 있죠. 한 목소리로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세례 요한은 이사야서 40장 3절 말씀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합니다. 여기서 이해를 제대로 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대망하는 어떤 종말론적인 인물이나 종말론적인 선지자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 단호하게 아니라고 거부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례 요한이 일반적인 평범한 사람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그 소리.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입니다.
그리고 이사야서 40장의 문맥을 보면,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생활로부터 귀한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작은 산들과 골짜기들을 평탄하게 하고 굽은 길들을 곧게 하라고 요구하는 그런 말씀입니다. 장애물들을 깔끔하게 치워버려서 다닐 때 편안하게 다닐 수 있는, 곧게 뻗은 길을 의미하는 말씀이죠. 사실 이 말씀은 오늘날에도 적용되어야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하는 일은 주님의 길을 곧게 하는 일이 수반되어야만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예수님께 나아갈 때 그 앞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들, 세상적인 온갖 장애물들을 없애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대표적으로 이러한 장애물은 인간적인 죄라고 볼 수 있겠죠. 이러한 인간적인 죄는 요한일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이러한 것들이 예수님 앞에 나아올 때 가로막는 장애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이사야서 40장 말씀을 좀 더 생각하면, 이사야서 40장부터 66장은 예루살렘에 좋은 소식을 알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고난받는 여호와의 종에 의해 실현되는 엄청난 구속 역사를 암시하는데요. 세례 요한이 이 말씀을 인용해서 자기 자신에게 적용시키는 것은 이사야서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밝힌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제 다섯 번째 문답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다섯 번째 문답 내용은 약간 책망 섞인 그런 질문이 담겨있는데요. 제가 질문을 읽으면, 답변을 읽어주시면 되겠습니다. “네가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선지자도 아닌데, 어찌하여 세례를 주고 있느냐?” “나는 물로 세례를 주고 있으나,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분이 서 계시니, 그 분은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만한 자격도 없다.”
다섯 번째 질문의 핵심은 세례 요한이 도대체 어떤 권위로 세례를 베푸느냐 하는 것입니다. 요즘 시대에 개신교의 경우에는 세례를 목사만 줄 수 있습니다. 강도사나 전도사는 세례식을 집례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요즘 시대에는 누가 세례를 주네 마네 하는 문제로 책잡을 일이 없습니다. 목사님이 주면 주는 거예요. 하지만 세례 요한이 활동하던 시대에는 어땠을까요? 이때는 세례를 주는 행위가 아예 없었을까요? 세례 요한이 혜성처럼 등장해서 짠 하고 처음으로 세례를 베푼 것일까요? 네. 그렇진 않습니다. 이 당시 일부 유대교 집단 중에서도 개종자에게 세례를 주는 경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4페이지에 보시면 참고 구절을 달아놓았는데요. 구약성경에서 물로 정결하게 하는 개념은 시편과 에스겔, 스가랴, 이렇게 세 부분에서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한 구절씩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먼저 시편 51편 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이 말씀에 따르면 죄악을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씻어달라고 제거해달라고 간구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죄의 문제는 씻는 방식으로 제거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어서 에스겔 36장 2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맑은 물을 뿌려서 정결하게 할 수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정결하게 씻어낼 수 있다는 겁니다.
스가랴 13장 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물이 열린다는건데, 샘물이 열린다면 이 샘물이 씻는 곳에 쓰이지 않겠습니까? 그냥 샘물이 있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겠죠.
자 이러한 점에서 구약시대에 세례라는 개념, 물로 씻어서 정결하게 한다는 개념이 분명히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이 구약성경에 이러한 사례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질문한 것일까요? 아마 그렇진 않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사실들을 모두 다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문한 겁니다. 왜요? 세례 요한이 무슨 권위로 이렇게 세례를 주는지가 궁금한 겁니다.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선지자도 아닌데, 요한이 주는 세례를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겠느냐 하는 생각에서 나온 질문인 것이죠. 그러니까 첫 번째 질문부터 다섯 번째 질문까지 하나로 연결되는 내용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자, 그래서 다시 3페이지 제일 아래 부분을 보시면, 너가 무슨 권위로 물세례를 주느냐 이 질문에 대해서 요한이 무엇이라고 답합니까? 나는 물로 세례를 주고 있으나,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분이 서 계시니, 그 분은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만한 자격도 없다.
세례 요한의 대답을 조금 더 자세히 분석해 보면, 세례 요한이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대답 내용을 보시면, 나는 물로 세례를 주고 있으나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만한 자격도 없다. 합당하지 않다. 마땅하지 않다. 이런 식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원어로 이 구절을 읽으면 굉장히 독특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헬라어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을 드리자면, 헬라어 동사에는 주어가 포함됩니다. 우리말과는 굉장히 많이 다르죠. 우리말은 무조건 주어를 써야 확실하게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헬라어 동사에는 1인칭 단수, 2인칭 단수, 3인칭 단수, 1인칭 복수, 2인칭 복수, 3인칭 복수. 이런 식으로 동사 자체에 여섯 개의 변화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어를 따로 쓰지 않더라도 동사만 보면 주어의 인칭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장 26절과 27절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대답을 보면 요한은 1인칭 대명사를 사용합니다. 원래 안 써도 상관없는 주어를 특별하게 사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죠. 다시 설명해 드리자면, 나는 세례를 준다. 하면 세례주다 라는 동사만 써도 주어가 1인칭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여기서 “나는”이라는 인칭대명사를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나는”이라는 말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말하는 사람, 세례 요한 자신을 강조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이렇게 사용하는 겁니다.
자, 그래서 “나는”이라는 말을 강조해서 읽으면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 나는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가 증언하는 분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분은 누구시냐면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푸는 것도 감당할 수 없다. 나는 그럴만한 자격도 없고 합당하지도 않은 사람이다. 이런 식으로 요한은 예수님과 자신의 관계, 그리고 자신이 예수님에 비해서 얼마나 낮고 비천한 사람인지를 강조하는 겁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과 세례 요한과의 다섯 가지의 문답은 세례 요한의 대답으로 끝이 납니다.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은 세례 요한의 대답을 듣고 그 내용을 올바로 이해했을까요? 아마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예수님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에 대해 율법주의적인 논쟁을 부분에 있어서도 그렇고, 또 예수님께서 하시는 공생애 사역의 성격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내용은 요한복음 말씀을 같이 공부하다보면 나중에 자세하게 다루게 될 겁니다.
그리고 한 가지 내용만 더 살펴보고 넘어가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세례 요한은 자신이 주는 물세례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에 반해 공관복음에서는 세례 요한이 주는 세례에 대한 성격이 어떠한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4페이지 두 번째 참고 구절참고 구절에 있는 마태복음 3장 7절부터 9절까지의 내용을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시작.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으려고 나아오는 상황에서 주어지는 말씀인데요. 세례 요한이 이렇게 말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종교지도자들이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는 것으로, 그 자체만으로도 어떤 효력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말을 듣는 겁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어떻게 해아합니까? 세례 받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자신들의 육적인 조상으로 생각해선 안 됩니다. 족보 상으로 따지면 아브라함이 자기들의 조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안에 담겨있는 의미는, 아브라함이 대신해서 자기들의 죄를 구원해 줄 수 있다고 믿어선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세례 요한이 이런 말을 하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아브라함이 행한 공로가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도 영향을 미쳐서 자동적으로 구원 받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이십니까?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 받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결국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메시지가 요한복음에는 빠져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3장 7절에서 9절까지 내용을 기억하시면 물 세례의 성격을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자, 이제 오늘 다룰 내용의 두 번째 파트인,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만남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아멘.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서 가장 유명한 말씀 중에 하나인데요. 너무 친숙한 말씀이다 보니, 이 말씀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 설명 드리는 내용이 뭔가 굉장히 어색하고 낯설게 들리실 수 있을텐데요. 미리 보험을 들자면, 제가 설명해 드리는 내용은 저의 개인적인 생각은 하나도 없습니다. 전문 서적을 참고해서, 신약학을 전공한 세계적인 학자들이 저술한 책을 참고해서 말씀드리는 거니까, 거부감 갖지 마시고 차분하게 들어보시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 그래서, 요한복음 1장 29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표현됩니까?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표현됩니다. 자, 여기서 어린 양이라는 말이, 일반적인 어린 양을 의미할까요 아니면 특별한 한 마리의 어린 양을 지칭하는 것일까요. 네 정답은 특별한 한 마리의 어린 양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근거를 말씀드리자면, 우리말 성경에서는 거의 취급되지 않는 정관사 라는 것이 붙어 있어요. 그래서 제대로 번역을 하자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그 어린 양이로다. 이렇게 읽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말로 “그”라는 정관사를 붙이는 것은 뭔가 거추장스러워요. “그”라는 말을 붙이든 안 붙이든 딱히 크게 문제되지 않습니다. 알고 읽으면 정관사를 붙여서 읽는 것과 똑같이 이해를 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모르고 읽는 사람은 이게 특별한 어린 양을 말하는 건지, 일반적인 어린양을 말하는 건지 모를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 성도님들은 느낌적인 느낌으로 하나님의 어린양이 특별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성경적인 근거가 있다는 사실, 이 정도는 기억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자 그런데 이 하나님의 어린양은 어떤 양입니까? 우리말 성경에 따르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여기서 어린양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어린양에 대한 이미지를 어떻게 가져오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성경의 내적 증거들을 참고하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5페이지 보세요. 어린 양에 대한 해석의 다양성. 어린 양이 무엇을 가리키는가. 구약성경에 보면 세 가지의 경우가 등장합니다.
먼저 예레미야 11장 19절 말씀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나는 끌려서 도살 당하러 가는 순한 어린 양과 같으므로 그들이 나를 해하려고 꾀하기를 우리가 그 나무와 열매를 함께 박멸하자 그를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끊어서 그의 이름이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함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이 말씀에서의 어린양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까? 말 그대로 순한 어린 양입니다. 만약 사도 요한이 예레미야 말씀의 어린 양 이미지를 인용한 것이라면, 예수님은 순순히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 됩니다.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볼 순 없습니다.
그럼 다음 가능성으로는 레위기 16장 8절에서 10절, 아사셀 염소가 어린양으로 인용되었다는 주장이 있는데요. 속죄제물로 아사셀 염소를 드린다는 점에서 뭔가 예수님과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염소와 어린 양은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번째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고요.
마지막 세 번째 가능성, 이사야 53장 7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구약성경 말씀을 성취하신 분이라고 할 때, 어떤 말씀을 성취하신 것이냐. 그리고 어느 말씀을 인용한 것이냐. 하는 문제는 냉철하게 신학적으로 판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 그래서, 방금 읽은 이사야서 53장 7절 말씀의 어린양이 요한복음 1장 29절 말씀의 어린양이라고 생각한다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운반하는, 하나님의 힘 없고 순한 어린 양, 순종하는 어린 양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해석이 어떻게 느껴지십니까? 맞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일반적으로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을텐데요.
학자들은 여기서 다른 관점을 제안합니다. 우리말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이 말에는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원어로 “아이로”라는 동사에는 세 가지의 뜻이 있는데요. 짊어지다. 들어올리다. 제거하다.
이 세 가지의 뜻 중에서 우리말 성경인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짊어지다”라는 뜻을 채택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거하다”라는 뜻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뭔가 이상하게 느껴지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조금만 참고 들어주세요. 보라,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보라. 세상 죄를 없애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이런 식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이죠. 어떻습니까. 이래도 이상하게 느껴지십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죄를 없애시는 예수님, 죄를 제거하시는 예수님, 이런 예수님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재 5페이지에 2번 요한계시록에 관한 말씀들을 보면, 아마 새로운 이미지를 가지실 수 있을텐데요. 한 절씩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먼저 5장 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누군가 성경 66권의 말씀 중에서 가장 어려운 책을 뽑아보라고 한다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요한계시록을 선택할 겁니다. 저뿐만 아니라 웬만한 목사님들 모두 요한계시록이 어렵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을 겁니다. 그만큼 요한계시록은 정말 어렵고 난해한 책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김기연 목사님께서 진행하시는 요한계시록 성경 공부는 정말 귀한 강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그래서 방금 읽은 요한계시록 5장 6절 말씀은, 보좌 위에 앉으신 어린 양에 대한 말씀입니다. 보좌 위에 앉았다는 말 자체부터 느낌이 딱 오시죠. 온 우주만물을 통치하시는 어린양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지 않습니까? 온 우주만물을 통치하는 분이 어린양이시라면, 어린양의 이미지는 어떤 이미지여야 할까요. 나약한 이미지입니까. 아니면 그 무엇보다 강하고 전지전능한 이미지입니까. 당연히 전지전능한 이미지여야하겠죠.
그리고 사실 말 자체가 어린양이어서 그렇지, 실제로 요한계시록이 표현하고 있는 어린 양의 모습은 문자적으로 읽으면 장난이 아닙니다. 방금 읽은 5장 6절에서 어린양의 생김새가 어떻습니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습니다. 상상이 가시나요? 저는 사실 상상이 잘 되지 않습니다. 뭔가 무섭고 흉측한 느낌이 들기까지 합니다. 전혀 나약해 보이는 그런 이미지가 아니죠.
이어서 요한계시록 7장 1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어린 양이 어디에 계십니까? 보좌 가운데 계십니다. 이 어린 양이 어떤 분이 되어주신다구요?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신다고 합니다. 목자이신 어린 양의 이미지가 나타나고 있죠.
이어서 요한계시록 17장 1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어린양이 어떤 분이십니까?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 21장 22절과 2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마지막 날에 새로운 예루살렘 성전을 주실 것인데, 성전이 무엇입니까?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자, 이렇게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어린양의 이미지를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어린양의 이미지가 어떻던가요? 순수하고 약하고 여린 느낌입니까 아니면 강하고 카리스마 있는 느낌이던가요. 후자죠.
그러니까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에 있는 어린 양의 이미지를 알고 있었다면, 요한복음도 사도 요한이 쓰고 요한계시록도 사도 요한이 썼는데, 일반적으로 요한복음을 먼저 기록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에서 본인이 기록할 승귀한 어린 양의 이미지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면, 요한복음 1장 29절 말씀에서의 어린양은 연약한 이미지가 아닌, 세상에 있는 모든 죄를 단번에 제거하는 묵시론적인 어린양, 종말론적인 어린양의 이미지일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물론 제가 지금 말씀드린 관점은, 저의 주장이 아닌 D.A.카슨 교수님의 관점입니다. 그리고 처음에 말씀드린 연약한 양, 속죄 제물로서의 양의 이미지는 일반적인 관점에 해당됩니다만,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렸다. 100퍼센트의 확신을 가지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설교할 때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고, 성경공부할 때에나 나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평소에 다루기 어려운 이야기를 한번 나눠보았습니다.
이제 요한복음 1장 30절 말씀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말할 때 자신을 또한번 낮춰서 말합니다. 사실 한국식으로 나이를 따지자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보다 여섯 달 먼저 태어났으니, 어떻게 보면 형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막말로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습. 어디 형한테. 이럴 수 있지만, 세례 요한은 감히 예수님께 나이를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나이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에게 나이를 운운하는 것은 얼토당토 말도 안되는 소리겠죠.
자, 계속해서 보시면, 요한복음에 나타난 세례 요한의 물 세례의 목적이 31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 내용은 잘 모르실텐데요.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뭔가 정확하게 의미가 다가오지는 않지만, 일단 알겠습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라는 말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이라는 사람을 미리 알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푸는 목적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질문. 요한이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몰랐다면서 무슨 수로 예수님을 알아보고 예수님을 이스라엘에 나타냅니까? 그 내용은 다음 페이지인 7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 1장 3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공관복음에 보면, 하나님의 음성이 하늘에서 들려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그러한 내용은 빠져있죠. 대신에 33절 말씀을 보면 훨씬 더 정확한 내용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3절 말씀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아멘.
세례 요한은 본인 의지에 따라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신대로,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신대로만 그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일반적인 선지자 그 이상의 역할을 감당했다고 볼 수 있죠. 하지만 요한은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낮춥니다. 누구에 비해서요? 예수님에 비해서 자신을 아주 아주 낮추고 있습니다.
자 그래서 다음 페이지인 8페이지를 보시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하는데, 그 증언의 결론이 나옵니다. 1장 3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아멘. 우리말 성경은 다소 의역되어있는데요. 어떤 부분이 의역되었는가 하면, 이 말씀을 직역하자면, 내가 그분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증언하였다. 이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여기서 보았다. 증언하였다. 이런 동사들은 모두다 현재 완료형으로 사용됩니다. 행동이 이미 완료된 상황을 말할 때 사용하는 시제죠. 그러니까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완벽하게 확신하게 된 겁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물로 세례를 주었는데, 물로 세례를 주니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성령께서 하늘에서 비둘기같이 내려오셔서 그 위에 머무는 기적같은 일이 발생합니다. 이 일이 무엇을 상징합니까?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죠. 이렇게 세례 요한은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계시해준 말씀에 따라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누구임을 최종적으로 증언합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라는 사실을 증언하게 됩니다.
자, 이렇게 오늘 요한복음 강해 세 번째 시간, 중요한 내용들을 다뤄보았는데요. 질문 있으십니까? 없으시면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세례자 요한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오시는 길을 곧게 만들어 주시고, 세상의 죄를 제거하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자격없는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니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졌던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과 십자가의 은혜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 요한복음을 통해 하루하루 깊이 알아가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성경공부 시간을 통해 말씀을 더욱 사모하게 하시고,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며 주님을 향한 사랑이 더욱 깊어져가는 모든 우리 성도님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번 한주간도 말씀을 묵상하며 살아갈 때, 성령하나님, 모든 우리 성도님들의 심령 가운데 내주하여 주시고, 조명하시는 은혜를 더하여 주셔서, 영적인 양식을 공급받으며, 온전히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모든 성도님들 되도록 주여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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