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강 사마리아 여인의 증언과 복음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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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기도하고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함께 공부할 주제는 “사마리아 여인의 증언과 복음전파”입니다. 요한복음 4장 27절부터 42절까지의 말씀인데요. 한절씩 교독하고 마지막 절은 함께 읽겠습니다. ~~ 아멘.
첫 번째 파트는 복음을 전하는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지난 시간에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대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그 결과 예수님께서 선지자이시다. 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선지자라는 제한된 이해에 만족하지 않으시고, 예수님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나서 이 사마리아 여인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어떤 행동을 보이는지, 오늘 말씀에 나타나 있는데요. 해당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개역개정 요한복음 4장 28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4장 8절에서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고 예수님만 홀로 남아있는 상황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서 대화하게 되었는데, 대화하는 사이에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서 돌아옵니다. 이때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는 모습을 발견하는데, 이 모습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상하게 여깁니다. 여기서 이상하다는 말은 뭔가 좀 독특하네. 특이하네. 이런 의미가 아니라 부정적인 의미로 이상하게 여겼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런 내용을 보면 사실 이해가 잘 안 되죠. 남자와 여자가 대화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물론 때와 장소를 가릴 필요는 있겠죠. 어디 으슥한 곳에서 단둘이 만난다거나, 무슨 술집에서 단둘이 술잔을 기웃거린다거나. 몸이 맞닿아있다거나. 이런 모습은 분명히 이상하다고 볼 수 있지만, 본문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상황은 그렇지 않죠. 대낮에 완전히 공개된 장소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장소에서 남녀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순 없겠죠. 하지만 제자들은 이 모습을 보고 부정적으로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생각한 것은, 제자들이 좀 부족하거나 꼰대 같은 마인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당시에 만연해 있던 일종의 문화에서 비롯된 생각이었습니다. 주후 2세기의 한 랍비였던 요세 벤 요하난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 여자와 대화를 오래하지 말라. 다시 말하면 자기 아내하고도 오래 대화를 나누지 말라. 하물며 이웃의 아내하고는 말해서 무엇하랴. 현명한 남자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자와 대화를 오래하는 남자는 자기를 해롭게 하는 자요, 율법의 말씀을 읽는 것을 그만 두는 자로 결국에는 게헨나, 지옥을 물려받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셨던 시기가 1세기인 것을 미루어보아, 당시의 랍비들, 유대인들은 대부분 이렇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일반인들까지 이렇게 생각했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습니다만, 좌우지간 이런 고정관념이 자리잡혀 있던 시대였기 때문에, 시대적인 영향을 받아서 충분히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께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질문은 하지 않았다. 이것도 좀 신기하죠. 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굳게 신뢰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선한 일들이면서 동시에 선한 동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다소 이상해 보이고, 관례에 어긋나 보이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예수님께 질문하거나 따지지 않았던 것이죠. 다시 말해 제자들이 성숙한 인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묻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먼저 삶으로 모범을 보이셨고 신뢰를 받을만한 행동만 하셨기 때문에 물어보지 않은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자, 이제 3페이지로 넘어가서, 개역개정 요한복음 4장 28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개역개정에서는 접속사를 번역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상황이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아래 바른성경의 번역을 보시면, 그때에. 라는 표현이 나와있죠.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들고 예수님께 돌아온 그때를 표현한 것인데요. 바로 그때 여인이 어떻게 행동했다는 겁니까? 사마리아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갑니다. 당시에 사마리아 여인이 사용한 물동이는 학자들의 추측에 따르면, 흙으로 구워서 만든 것으로서 물동이를 어깨에 메거나 등에 지고 다녔을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플라스틱 물병이나 보온병, 이런 물건들에 비해서 훨씬 부피가 크고 무거웠을 겁니다. 여기에 물까지 가득 채우면 굉장히 무겁겠죠.
자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과의 대화 이후에 보인 행동,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간 이 행동이 굉장히 놀랍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난 시간은 대략 낮 열두 시입니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 가장 더운 시간대에 물 뜨러 나왔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으려는 그런 의도가 숨겨져 있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혼자 조용히 물 떠 가려고 의도적으로 낮 열두시에 물 뜨러 나왔는데, 28절에서 이 여인이 어떻게 행동합니까?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갑니다. 우선순위가 변한 것이죠. 물 뜨러 왔는데 그 목적을 달성하지 않고, 다른 행동을 먼저 합니다. 더 급한 일이 생긴 것이죠. 그 급한 일이 어떤 일입니까? 동네에 들어가는 겁니다. 동네에 왜 들어갑니까? 물 뜨러 우물가에 왔고, 물동이도 가져왔는데, 물도 안 뜨고 동네에 왜 돌아갑니까. 핸드폰 두고 왔습니까? 아니죠. 사람들에게 말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언하기 위해서 동네에 들어간 겁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놀라운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그동안 동네 사람들을 일부러 피해 다녔습니다. 그래서 가장 더운 시간대에, 사람들이 물 뜨러 나오지 않는 시간대에 혼자 나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의 대화 이후에 동네 사람들을 자기 발로 찾아가서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할 정도로 엄청나게 열정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까?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개인적인 삶을 다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라는 사람이 적어도 최소한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대화가 진전되면서 사마리아 여인은 나와 같은 선지자 한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예수님시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서 이 사마리아 여인은 평소에 자신이 마주치고 싶어하지 않았던 동네 사람들을 찾아가서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게 된 겁니다. 그렇다면 이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증언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4장 29절 말씀인데요.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아멘.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 여인이 동네 이웃 주민이었기 때문에 이 여인의 사생활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겁니다. 결혼을 다섯 번씩이나 했으니, 남편이 누구인지 오며 가며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사람들끼리 수군거리다 보면 소문은 순식간에 퍼지기 마련입니다. 남편이 바뀌었대. 남편이 또 바뀌었대. 남편이 또또 바뀌었대. 남편이 또또또 바뀌었대. 남편이 또또또또 바뀌었대. 이렇게 소문은 계속해서 퍼져나갔을 것이고,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이 여인의 평판은 좋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다 보니 이 여인은 동네 사람들을 피해 다니게 된 것인데,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는 동네 사람들을 오히려 찾아가서 증언합니다. 와서 보십시오. 이분이 그리스도가 아닙니까? 여기서 이분이 그리스도가 아닙니까 라는 말은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강한 긍정을 내포하는 수사의문문이죠. 이미 예수님께서 자신이 메시아 라는 사실을 밝히셨고, 그 이야기를 듣고 동네 사람들에게 와서 증언하는 이 사마리아 여인이, 아직도 불확실성에 사로잡혀서 긴가민가해서 물어보겠습니까? 정황상, 그리고 문맥상 절대로 그럴 수 없겠죠.
자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의 증언을 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사마리아 사람들 입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증언하는 이 상황은 정말 이상하게 느껴졌을 겁니다. 왜요? 그동안 일부러 사람들 피해 다니고, 대화도 잘 나누지 않던 저 여인이 갑자기 뭘 잘못먹었는지 와서 보라고. 그리스도 아니냐고. 사마리아 사람들 입장에서 저 여인이 이렇게까지 전하는 걸 보면, 뭔가 있긴 있나보다. 평소에 말도 거의 안하던 사람이 저렇게 흥분한 상태에서 급하게 전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이런 궁금증을 자아냈을 겁니다. 이렇게 사마리아 사람들이 사마리아 여인으로 인해 예수님을 찾아오게 됩니다.
자 이제 두 번째 파트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동네로 돌아간 사이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대화한 내용이에요. 제가 제자들 부분을 읽으면 성도님들은 예수님 부분을 읽어주시면 되겠습니다. ~~~.
제자들이 예수님께 음식을 드시라고 요청하자 예수님께서 엉뚱한 대답을 하십니다. 나에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 그러자 제자들이 어떻게 이해합니까? 우리가 예수님께서 드실 음식을 구입하러 간 사이에 누가 와서 예수님께 음식을 드렸나 보다. 이렇게 이해합니다. 앞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것과 니고데모가 어떻게 모태에 두 번 들어갈 수 있느냐고 질문한 것. 이런 오해들과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시죠. 4장 34절 말씀 보세요.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양식이 무엇입니까? 나를 보내신 분.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예수님의 양식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일을 완성한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십자가 사건을 통한 구원 사역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과정상으로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통해 이루어 가시는 모든 사역들을 의미할 수 있겠죠. 본문 말씀에 따르면, 그 열매는 예수님을 찾아오고 있는 사마리아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자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4장 35절부터 38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추수와 관련된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가르침을 주시는데요. 이 내용 역시 뭔가 시원하게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35절부터 38절까지의 내용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너희는 ‘아직 넉 달이 지나야 추수 때가 온다.’라고 말하지 않느냐?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아라. 이미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 추수하는 자가 품삯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거두어들이니, 심는 자와 추수하는 자가 함께 기뻐할 것이다. 이처럼 ‘한 사람은 심고 다른 사람은 추수한다.’라는 말이 옳다. 내가 너희를 보내어 너희가 수고하지 않은 것을 추수하게 하였으니, 이들은 수고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수고에 참여하였다.”
어떤 학자들은 이 넉달이라는 표현 때문에, 봄철 수확기로부터 네 달 전인 12월이나 1월 정도에 이 대화가 오갔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추수할 때가 네 달 남았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즉시 거두어야 할 밭들이 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됩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입니까? 비록 씨를 뿌리는 것과 곡식을 거두는 것 사이에 적어도 네 달이 지나야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과 더불어 종말론적인 추수가 시작되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를 담아서 다시 읽어보면 이렇게 읽을 수 있죠. 너희는 파종과 수확 사이에 일정 기간의 간격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방금 씨앗을 뿌렸고, 수확은 이미 일어나고 있다. 여기서 씨앗을 뿌렸다는 것은 복음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수확이 일어난다는 말은, 사마리아 여인 또는 사마리아 여인이 복음을 전한 사마리아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생을 위한 열매를 수확하게 되었다는 말씀이죠.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씨앗을 뿌리는 자와 추수하는 자가 동일 인물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일반적이지 않죠. 농사지을 때, 땅 주인이나 소작농이 자기 밭에 씨앗을 뿌리고 일정 기간 동안 정성스레 농사지어서 수확철에 추수하는 것. 이러한 과정이 일반적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뭔가 이상합니다. 한 사람은 심고 다른 사람은 추수한다는 말이 옳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이 과연 옳은 말일까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씨앗은 내가 뿌렸는데, 열매를 거두는 건 다른 사람이 거둬서 다른 사람이 가져간다면 이게 좋은 일입니까 나쁜 일입니까? 당연히 나쁜 일이겠죠.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수고와 노력을 했는데, 그 결과물을 다른 사람이 거두어들이는 것은 불공평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언급하시는 이 종말 시대의 영적인 추수의 경우에는 씨를 뿌리고 나서 곡식이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씨를 뿌리는 사람과 거두는 사람이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 겁니다.
계속해서 보세요. 내가 너희를 보내어 너희가 추수하지 않은 것을 추수하게 하였으니, 이들은 수고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수고에 참여하였다.
여기서 제자들은 추수하는 사람으로 표현됩니다. 제자들이 추수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은 다른 어떤 사람들이 씨앗을 뿌리는 수고를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오랜 시간 동안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들, 선지자들이나 의로운 지도자들이 씨앗을 계속해서 뿌려왔고,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시대로 말하자면, 세례 요한이 씨를 뿌렸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세례 요한의 경우에는 씨앗을 뿌렸지만 수확에는 참여하지 못한 최후의 인물이라고 볼 수 있겠죠.
자 그래서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보면, 에수님의 제자들은 구속사,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종말론적인 수확이 시작되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세 번째 파트, 예수님을 믿게 된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요한복음 4장 39절 말씀 보세요.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사마리아 여인의 증언을 통해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노방전도가 불가능한 시대로 여겨집니다. 사회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불신과 증오심이 나날이 증폭되어가는 사회적 박해가 극심한 시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따라 노방전도의 효과는 과거에 비해 득보다 실이 많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노방전도보다 관계 전도에 힘을 실어야 한다.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이때 관계 전도라는 말에서 부담감을 느끼거나 거부감을 느끼는 분들이 계십니다. 물론 그러실 수 있습니다. 우리 옆집 사는 이웃이나, 경비 아저씨나, 자주 가는 마트 직원이나, 미용실 선생님이나, 수많은 외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그리고 내가 그동안 바깥에서 어떤 태도와 자세로 살아왔는지. 이런 부분들을 종합해 볼 때 예수님의 향기를 풍기지 못한 사람으로 판단이 되면, 자연스럽게 관계 전도를 거부하게 되죠.
자 그렇다면, 오늘 말씀에 등장한 사마리아 여인은 어떻습니까.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계 전도의 개념으로 생각해 보면, 이 사마리아 여인이 관계 전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단 한 사람도 전도하지 못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동네 주민들이 이 여인의 결혼생활에 대한 사실이나 소문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죠. 팩트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소문 정도는 분명히 들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소문이 더 무섭죠. 사실보다 훨씬 더 부풀려질 수 있는 것이 소문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이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에는 루머가 더욱 치명적이었을 겁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과거에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다면, 이 여인에 대한 소문은 어땠을까요. 장난 아니었겠죠. 온갖 루머에 휩싸여서 입방아에 오르락 내리락하면서 가루가 되도록 씹혔을 겁니다. 그런 사실을 이 사마리아 여인이 얼마나 신경 쓰면서 살았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만, 동네 주민들을 의도적으로 피해 다녔다는 것 정도는 본문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런데 이렇게 사람들과 마주치는 것을 꺼려하며 지냈던 이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과 대화한 이후에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 동네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전도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관계 전도를 해냈습니다. 아예 모르는 사람들한테 전도한 것도 아니고 어느 정도 일면식이 있는 동네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언했으니 관계 전도라고 볼 수 있겠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계 전도에 대한 개념으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관계 전도를 할 때 어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컨대,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내가 복음을 전하면 저 사람이 나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오히려 관계가 멀어지지 않을까? 평소에 내가 저 사람한테 삶의 모범을 보이지 못했는데, 복음을 전하다가 오히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욕을 먹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생각이 거듭되다 보면 자연스럽게 관계 전도에 대한 마음이 흐려집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 여인은 길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조용히 자기만 구원받을 수 있었을텐데, 그렇게 하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께 요청합니다. 요한복음 4장 40절 말씀 보세요.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의식적인 정결에 대한 유대교 규정에 따르면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과 교제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4장 40절 말씀에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사람들의 요청에 따라 이틀간 머무셨다는 것은 유대인의 정결 예식 규정을 어긴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적인 규정들은 예수님께 적용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틀 동안 사마리아 땅에 머무시면서 이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십니다. 단순하게 친목 도모를 한 것이 아니라 이틀 동안 하나님 나라와 복음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 41절 말씀 보세요.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분의 말씀을 통해서 더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믿게 되었다는 겁니다.
자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서 오해해선 안 됩니다. 이 일을 통해서 사마리아 땅에 사는 모든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었겠구나. 이렇게 오해해선 안 됩니다. 사복음서에서 요한복음 4장 말씀을 제외한 나머지 전체 부분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는 사건 이전에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증거하는 구절은 단 한 구절도 없습니다. 마태보복음 10장 5절 말씀 들어보세요.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이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이방인의 땅이나 사마리아 땅으로 보내지 않으시고 유대 땅 안에서만 복음을 전하도록 제한하십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8장 말씀에 따르면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복음 전파 사역을 새로운 시도인 것처럼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내용을 볼 때,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많이 믿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사마리아 땅 전체에 복음이 전해져서 거의 모든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계속해서 예수님을 잘 믿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하지만 일차적으로 예수님께서 먼저 사마리아인들에게 복음의 씨앗을 뿌리셨고 그 열매를 제자들과 함께 추수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이어서 요한복음 4장 4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우선 이 말씀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과 이틀 동안 시간을 보낸 이후에 사마리아 여인에게 한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두 부분, 상반절과 하반절로 나눠서 생각할 수 있는데요. 상반절에서 사마리아인들이 이렇게 말하죠.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다. 이 말은 표면적으로 보면 사마리아인들이 사마리아 여인의 증언을 평가절하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만, 평가절하하거나 폄훼하는 것이 아니라 사마리아 여인의 증언을 확증해 주는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본 결과, 사마리아 여인의 증언이 참되다는 사실, 진실되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반절 말씀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죠.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이 구절은 우리말 성경에서 의역되어 있는데요. 우선 시제의 표현이 정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원어로 보면 듣고 알았다는 이 두 가지의 동사가 현재 완료 시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들었고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라는 주어는 우리 스스로. 이런 식으로 주어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을 통해서 믿음이란 것이 사람의 입장에서의 노력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근본적으로는 성령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악된 본성에 개입하셔서 그 생각과 마음에 빛을 비춰 주셔야만, 조명의 역사를 일으켜주셔야만 믿을 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사람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믿을 수 없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령님의 역사하심과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귀로 들어야 하고, 알아야만 합니다.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은, 무엇을 듣고 무엇을 아느냐가 핵심이겠죠. 사마리아인들이 무엇을 듣고 무엇을 알았다고 말합니까? 예수님께서 세상의 구주이시다. 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말로 번역된 이 구주라는 단어는 “구세주”의 준말입니다. 헬라어로는 쏘테르 인데요. 굉장히 굉장히 중요한 단어에요. 과거에 기독교인들이 물고기 표식으로 그리스도인을 서로 확인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물고기 그림 안에 들어가는 문자가 익뛰스인데, 헬라어로 예수스 크리스토스 데우 휘오스 소테르입니다. 우리말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인데요.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핵심적으로 표현하는 단어가 익뛰스라고 볼 수 있죠. 여기에 쏘테르 라는 단어가 들어가고 그 단어가 구원자라는 의미인데, 요한복음 성경공부에 참여하시는 분들은 “쏘테르”라는 단어 정도는 기억하시면 아주 아주 좋습니다.
자,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구약성경에서의 메시아가 구원자로 언급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또한 1세기에 유대교에서 구원자는 메시아를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었습니다. 앞서 설명드렸듯이 사마리아인들도 마찬가지로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구원자로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신앙생활할 때 예수님께서 구원자이시다. 라는 사실은 우리 믿음의 핵심적인 내용인데,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감당하시던 시대와 성경이 기록되던 시대에는 구원자라는 단어가 통상적으로 예수님께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이죠.
참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께서 구원자이신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인데 1세기에 구원자라는 단어는 그리스의 다양한 신들과 로마의 여러 황제들에게 적용되었습니다. 실제로 로마 황제들 가운데 구원자로 불린 황제들이 있죠. 예컨대, 누가복음 2장 1절에 등장하는 가이사 아구스도는 로마 역사에서 아우구스투스 황제로 불리는데, 이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로마에서 세상의 구원자로 불렸습니다. 로마 황제 중에 아우구스투스를 기점으로 황제 숭배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누가복음 3장 1절에 등장하는 디베료는 티베리우스인데, 티베리우스 역시 구원자로 불렸고요. 로마 황제 중에 최초로 기독교를 박해하고 탄압한 사람으로 알려진 네로 황제 역시 구원자로 불렸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시대에 구원자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로마 황제에게 돌려지는 칭호였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4장 42절에서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무엇이라 말합니까?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아마도 이때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로마의 황제가 세상의 구주인줄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보니, 진정한 세상의 구주는 로마의 황제가 아닌 예수님이구나 라는 사실을 올바로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은 본인이 직접 말씀을 귀로 듣고 눈으로 말씀을 보고 이성적으로 깊이 있게 상고하는 과정을 통해서 얻게 되는 열매입니다. 아무런 과정 없이 예수님을 쉽게 믿고 신앙생활을 잘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와 성령님의 역사하심, 그리고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의 구원 사역을 깨닫고자 하는 본인의 노력과 시간의 투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오늘 강의 내용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첫 번째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과의 대화 이후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살펴보았습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예수님에 대해 증언했죠. 동네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평판을 신경쓰지 않고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증언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죠. 사마리아 여인의 증언이 시발점이 되었고,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틀 동안 예수님과 교제하면서 예수님을 깊이 알게 되었고 그 결과 예수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 내용에서 예수님의 양식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인데, 지금 이 때가 바로 추수할 때이며, 제자들은 심지 않은 것을 거둠으로써 기쁨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우리 역시 씨앗을 뿌리는 일을 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씨뿌리는 노력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열매를 거두는 일에 참여하고, 그 과정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보았습니다. 오늘 함께 공부한 내용을 깊이 묵상하시면서 우리 주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유일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구원자로 이 땅에 보내주시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아무런 자격도 없는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허락해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예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도 사마리아 여인과 같이 삶의 우선순위를 주님께 맞추고, 우리의 평판과 자존심을 신경쓰기 보다, 죽어가는 영혼들,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을 살리는, 복음 전파의 사명에 기쁨으로 참여하기를 원하오니, 우리 모두의 심령에 열정을 회복시켜 주시고,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수 있도록 주여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교재 답안지>
2페이지
10-1
1.1. 이상하게 여겼음
1.2. 이웃의 아내와 대화하는 것을 해로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시대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
2.1.1. 물동이를 버림
2.1.2. 동네에 들어감
2.1.3. 사람들에게 말함(증언함)
3페이지
3.1. 와서 보십시오.
3.2. 그리스도
4페이지
10-2
1.1. 실제 음식물. (누군가 먹을 것을 예수님께 가져다 주었을 것)
1.2. 예수님을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
2.1.비유적인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음. "추수하는 자"는 "제자"를 의미함. 이들이 추수하는 것은 "영생에 이르는 열매"임.
2.2. 문자적으로는 불평등한 현실을 의미하지만, 비유적으로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기쁨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함.
2.3. 참여
5페이지
10-3
1. 증언
2.1. 사마리아 땅에 머물러 달라고 요청함
2.2. 이틀동안 머무심.
3. 말씀
4.2. 세상의 구원자(구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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