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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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고린도전서 15:19-26
제목 :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지난 고등부 겨울 수련회 특강 이후에 다시 만나게 되었네요. 반갑습니다. 목사님이 여러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하나님의 말씀이 참 많은데요. 특별히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목사님이 알기로는 우리 고등부 친구들 대부분이 신앙 생활한 기간이 꽤 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오늘은 특별히 여러분들이 뻔하다고 생각할 만한 내용은 다루지 않고, 약간 난이도를 높여서 준비해 보았습니다. 내용도 좀 많고, 쉽지 않을 수 있는데, 집중해서 따라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만약에 아는 내용이면, 모르는 척하고 들어주세요.
오늘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은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서 26절 말씀이었죠.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를 고린도전서라고 부르는데, 특별히 고린도전서 15장의 경우에는 독특한 별명을 가지고 있어요. 참고로,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 장이라고 부르듯이 15장도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요. 어떤 별명을 가지고 있을까요? 네. 부활장이라고 불러요. 일반적으로는 사랑장이 좀 더 친숙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신학적으로는 15장이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을 읽을 때에는 신학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읽어야 하는데요. 일단 고린도전서 15장은 굉장히 길어요. 몇 절까지 있죠? 네. 무려 58절까지 있죠. 그래서 이 내용은 구조를 나눠서 읽어야 하는데요. 고린도전서 15장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눠서 읽을 수 있습니다. (화면) 첫 번째 파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15:1-11). 두 번째 파트는 예수님의 부활(15:12-28), 세 번째 파트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삶의 적용(15:29-34), 마지막 네 번째 파트는 성도의 부활과 성도의 부활체(15:35-58). 이렇게 네 가지의 파트를 나눠서 읽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요.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이 네 가지 파트를 다 살펴...보면 학원도 못가고 집에도 못가겠죠. 그래서 핵심적인 내용 위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중에 우리가 또 만나게 된다면, 나머지 내용을 다뤄보도록 할게요.
자 그래서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냥 단순하게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 이 정도로 생각하나요? 네. 그럴 수 있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시고, 살아있는 상태로 하늘에 올라가셨다. 이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5장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부활이라는 기독교의 핵심적인 주제, 가장 중요한 주제를 가지고 4개의 논리적인 단계를 거치면서 설명합니다. 그냥 막 뭐 무조건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어라. 맹신해라. 이렇게 강압적인 방식으로, 마치 이단처럼 믿음을 억지로 요구하지 않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이성적으로 알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죠.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이 요구되지만, 그 믿음을 요구하기까지의 과정이 무조건 믿으라는 명령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활 신앙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할 수 있을 만한 텍스트가 주어진다는 얘기에요.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면, 생각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면, 애초에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는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한다고 볼 수 있는 거예요.
그럼 이제 본문 내용을 상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화면)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전한 복음을 알게 한다는데, 이 복음이란 것이 무엇일까요? 좋은 소식을 복음이라고 흔히들 말하는데, 이걸 고린도전서 식으로 표현하자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어요. 고린도전서 1장 1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화면)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장 17절 말씀에 따르면 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기름 부음 받으신 분께서 매달리신 십자가가 복음이라는 거예요. 어떤 흉악범죄자가 십자가 처형을 당한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름 부으심을 받은 구원자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을 당한 사건이 복음이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 끔찍한 죽음이 어떻게 복음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일까요?
고린도전서 1장 18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화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말씀이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거예요.
자 여기서 십자가의 말씀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것을 오해하는 경우가 있어요. 여기에는 전제가 달려 있습니다. 그냥 단순하게 십자가를 믿는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 이런 식의 표현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정도의 표현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화면)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까? 여기에는 두 가지의 요소가 들어있는데요. 무엇을 믿느냐? 어떻게 믿느냐? 두 가지의 요소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선 무엇을 믿느냐에 대한 질문은 또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를 수신하는 1차 독자인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입장에서는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입장에서는 66권의 성경 말씀을 온전히 믿는 것을 전제로 해야겠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만 믿는다? 그 정도로는 부족해요. 자 그리고 어떻게 믿느냐의 문제가 또 중요한데요. 15장 2절 말씀을 다시 보시면,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이렇게 나와 있죠. 사도 바울이 전한 말씀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여기서 “굳게 지키다”라는 단어는 원래 보존하다. 지키다. 붙잡다.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이 문장에서 사도 바울이 의도하는 것은, 어떤 중요한 순간에만 믿음을 고백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끊임없이 그 믿음을 보존하는 것, 계속해서 그 믿음을 지키고 붙잡는 것. 이런 노력이 있다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단순하게 예수님 믿는다. 말 한마디 한다고 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성경 말씀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 부분을 쉽게 망각하죠. 사실 이건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에요. 여러분들이 고등학생의 신분을 가지고 있는 동안 절대로 할 일이 없는 연애를 예로 들어볼게요. 남자친구 혹은 여자친구에게 진심을 담아서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만 하고 한 달 정도 연락 아예 끊고 지내봐요. 그럼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서로를 향한 사랑이 더 애틋해질까요? 아니면 차일까요? 당연히 차이겠죠.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에요. 우리의 믿음생활 또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지속성이라는 것은 매우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예배 한 번, 어떤 집회 한 번에 은혜 세게 받고, 눈물 콧물 몇 방울 흘린다고 다 해결되는 게 아니에요.
사도 바울은 구원받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한마디로 정리합니다. 내가 전한 그 말씀을 계속해서 굳게 붙잡는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속성 없이 잠깐, 잠깐 살짝쿵 맛만 보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닐 수 있다는 거죠. 물론 누가 구원을 받았는지는 우리가 함부로 판단할 수 없어요. 그런 건 목사님도 함부로 판단해선 안 돼요.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이 구원을 받았는지 못받았는지는 느낌적인 느낌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살아가면서 복음을 계속해서 굳게 붙잡으면서 살아가는지, 복음을 지키면서,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지를 보고 생각하면 된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란 무엇일까요? 아까 목사님이 복음이 뭐라고 했죠?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했죠? 이 내용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말씀이 3절과 4절에 나타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절과 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화면)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쉽게 중요한 부분만 직역해서 보여드리면, 이렇게 읽을 수 있어요. (화면) 성경 말씀에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을 위해서 죽으셨다. / 그리고 그분은 매장되었다. 그리고 그분은 성경 말씀에 따라서 제3일에 살리심을 받으셨다.
이 내용은 썰이 아닌 팩트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내용이에요. 예수님께서 누구를 위해서 죽으셨다고요? 우리의 죄들을 위해서 죽으셨대요. 다시 말하면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겁니다. 나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서 죽으신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지불하신 나의 죄값은 완벽하게 청산이 되었어요. 한푼도 남김 없이 깨끗하게 정리된 거죠. 다시 말해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원죄, 하나님의 형상이 훼손될 정도로 치명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이 원죄의 책임을 더 이상 지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악된 본성으로 인해 짓는 수많은 자범죄들. 이 자범죄들 역시 예수님을 통해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거예요. 자동으로 용서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는 철저히 회개하고 다시는 그 행동을 반복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해요. 하지만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특권을 누리는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자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여러분 개개인의 죄, 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끔찍한 고통을 감내하시면서 육체적인 죽음을 맞이하신 거예요. 그렇게 혼이 떠난 예수님의 육체는 돌무덤에 매장되었습니다. 그리고 3일째 되던 날에 부활하셨죠. 사실 이 내용은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내용이에요. 사람이 생물학적으로 죽음을 맞이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아세요? 심장이 멈추고 뇌와 주요 장기들의 활동이 중단되고, 혈액 순환이 정지하면서 몸이 차갑게 식고 사후경직이 발생하죠. 얼굴이나 몸에 핏기도 사라집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부패가 진행되면서 시신에서 악취가 나죠. 예수님의 육체가 돌무덤에 3일간 매장되어있었는데, 이 정도 시간이라면 부패가 진행될 수 있는 시간이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육체를 있는 그대로 사용하시는 방식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죠. (화면)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어서 확인했는지 확인하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어요. 하지만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시고 죽임당하신 육체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여러분들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내용일 거예요. 이제 심화단계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나중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믿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활에 대해서 굉장히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이제부터 굉장히 중요한 얘기에요. 고린도전서 15장 2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화면)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표현 두 가지를 구분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다시 살아나사”라는 표현인데요. 이 표현은 의역된 표현이에요. “다시 살아나사”라는 표현은 능동태에요 수동태에요? 능동태죠. 능동태로 읽으면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력으로 부활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원어성경에서 이 부분은 완료 수동태로 기록되어있어요. 그래서 원어대로 직역해서 읽으면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화면)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심 받으셨다. (그리고 그분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 괄호 안에 있는 내용은 의미상 생략되어있는 표현을 넣어 놓은 거예요. 자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심을 받으셨다는데, 그럼 누군가 예수님을 살리셨다는 말이겠죠? 예수님이 스스로 살아나신게 아니라면, 누군가 예수님을 살리셔야만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누가 예수님을 살리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고린도전서 15장에는 그런 내용이 등장하지 않아요. 하지만 신약성경에 있는 사도 바울이 쓴 편지들을 보면, 이런 식의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시간 관계상 다 살펴볼 수는 없고 대표적인 예 한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로마서 4장 25절 말씀 보세요. (화면)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이 구절도 의역된 구절이에요. 이 구절을 직역하면 이렇게 읽을 수 있어요. “예수님은 우리의 범죄들 때문에 내어줌을 받으셨고(당하셨고),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기 위해서 살리심 받으셨다.”
우리의 범죄들 때문에 십자가에 내어주는 행위를 예수님께서 당하신 거예요. 그리고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기 위해서 살리심을 받은 겁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내줌이 되고. 이건 딱 봐도 수동태처럼 보이죠. 하지만 살아나셨느니라. 이 표현은 능동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원어 성경으로 보면 두 동사 모두 수동태에요. 그럼 여기서 예수님을 살리신 분은 누구일까요? 당연히 하나님이겠죠. 물론 여기서도 하나님이 살리셨다고 정확하게 표현하진 않습니다만, 하나님께서 살리셨다고 볼 수 있어요. 왜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가 하면, 다른 구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살리셨다고 정확하게 표현하기 때문이에요.
로마서 10장 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화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셨다. 이렇게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다른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살리셨다고 표현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살리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 다시 고린도전서 15장 20절 말씀으로 돌아가서 15장 20절의 두 번째 중요한 표현을 살펴보겠습니다. 두 번째로 중요한 표현은 (화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표현이에요. 만약 성경에 이런 표현이 없었다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은 그냥 2천년 전에 예수라는 사람이 구원자로 온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정도로 이해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살리심 받음을 통해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어요. 여기서 “잠자는”이라는 표현은 죽었다는 표현을 바꿔서 표현한 거예요. 생물학적으로는 육체가 죽음을 맞이했다고 볼 수 있지만, 영적으로는 죽은 게 아니라는 거예요. 왜요? 예수님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이에요.
여기서 첫 열매라는 표현이 굉장히 굉장히 중요한데요. 우리말 성경으로 볼 때, 이 표현은 두 개의 단어죠. 처음 열매 또는 첫 열매. 이렇게 이해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이 단어는 원어로 보면 한 단어에요. 첫 열매는 헬라어로 보면 (화면) ἀπαρχή. “아파르케”라고 읽을 수 있는데요. 이 단어는 곡식이나 어떤 열매를 수확할 때 가장 처음으로 거둔 부분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 아파르케를 통해서 본격적인 추수나 수확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그러니까 이 처음 열매를 거두면, 더 거둘 게 더 있을까요 없을까요? 당연히 있겠죠. 없을 수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을 의미하는 첫 열매라는 단어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과 성도 사이에 유기적인 연합 개념이 담겨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약간 어려운 얘기일 수 있지만 조금만 더 집중해 주세요.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살리심을 받았고 예수님의 부활이 잠자는 자들의 처음 열매가 되셨다고 표현해요. 죽은 사람들 전체 중에서 처음 열매가 되셨다는 겁니다. 처음 열매라는 단어를 통해서 본격적인 수확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럼 본격적인 수확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모든 사람에게 있을 일반적인 부활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만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 구원받지 못한 사람도 부활하는 거예요. 우리만 부활하는 게 아닙니다. 사도행전 24장 15절 말씀 보세요. (화면)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는데, 사도행전 말씀만 놓고 보면, 확실하게 이해가 되진 않아요. 그냥 뭐 언젠가 부활한다는 건가? 이런 식으로 막연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우리는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서 예수님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그리고 고린도전서 15장 21절과 22절 말씀에서도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를 보여줍니다. 같이 읽어볼게요. 시작. (화면)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처음으로 창조된 인간 아담은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범죄했죠.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되었고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담이라는 한 사람으로 인해서 사망이 들어오게 되었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가능하다는 논증이에요. 그래서 21절에서는 이렇게 말하죠.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을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모든 사람의 부활을 보증하는 사건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나중에 죽게 되더라도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에 다시 살아남을 확신하게 만드는 사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어떤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까요. 몇 가지 적용점을 나누고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부활 신앙은 성도로 하여금 최선을 다해 살아갈 수 있게끔, 새로운 동기부여를 제공한다는 사실입니다. 부활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가짐은 믿지 않는 사람의 마음가짐과 차원이 달라요. 고린도전서 15장 32절 하반절 말씀 보세요. (화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부활 신앙이 없는 사람은 인생이 딱 한 번뿐이라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죠. 이름을 남기고 싶은 사람은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은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이러한 자신만의 목표 의식은 그 사람의 동기부여로 작용하죠.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동기부여는 믿지 않는 사람들의 동기부여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주어집니다. 본질적으로 우리가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로서 부활해 주셨고, 그 사실을 통해 우리 역시 부활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값없이 받았기 때문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힘을 내어 살아갈 수 있는 것이죠.
이어서 두 번째로,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않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굉장히 틀에 박힌 소리 같아 보이지만, 굉장히 중요한 얘기에요. 고린도전서 15장 33절과 3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화면)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여기서 악한 동무들이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는 말은, 악한 친구들 또는 나쁜 친구들이 좋은 습관을 어그러뜨린다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굉장히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문장이지만, 기본적인 전제는 이거예요. 신앙이 없는 친구는 나쁜 친구일 가능성이 매우 매우 매우 높다는 거예요. 되게 초딩 같이 들리는 소리일 수 있겠습니다만, 누구랑 어울리지 마. 누구랑 놀면 안 돼. 이런 얘기처럼 들릴 수 있겠습니다만,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어주심으로써 우리의 부활도 확정되었고 이로 인해 새로운 소망을 품고 살아가게 되었는데, 이 엄청난 사실을 거부하는 사람이 우리의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마음을 열고 이런저런 고민을 나누며, 인생의 진취적인 방향으로 함께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를 격려하고 진심으로 응원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그리고 만약 그런 친구와 사귀었을 때, 그 친구가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전도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는데 결국 설득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 관계를 지속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제가 질문한 이 부분들은 우리가 계속해서 고민해야 합니다.
사실 이 문제는 연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에요. 물론 여러분들은 지금 당장 연애할 일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겠지만, 일단 개념을 확실하게 잡는 거예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을 봤는데, 딱 내 스타일이야. 이상형이야. 그래서 어떻게 어떻게 하다보니 썸타게 됐는데, 알고 보니 크리스찬이 아니야. 예수님을 믿지도 않고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강한 사람이야.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될까요?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최선을 다해 이렇게도 설득해 보고, 저렇게도 설득해 보되, 설득이 안 되면 포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3절과 34절에서 악한 친구와의 연을 끊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성 교제할 때 믿지 않는 사람과 사귀지 말라. 이런 말을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명확하게 죄를 짓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이 명령은 예수님을 믿게 된 순간부터 적용되는 명령이에요.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이런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에요. 아예 죄를 짓지 않고 살 수는 없겠지만, 마음 놓고 편하게 되는대로 죄를 짓고 사는 것과, 죄를 짓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죠. 그리고 여러분들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들 스스로 죄를 지을 가능성보다, 옆에서 어떤 친구가 계속해서 이거하자. 저거하자. 이런 식으로 설득해서 죄 지을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깨어있는 상태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죄를 짓지 않도록 자신의 삶을 정돈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우리 고등부 친구들, 부활주일을 맞이해서,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린도전서 15장을 중심으로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이 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표현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담고 있다고 했어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인데,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두 가지의 중요한 요소로 구성되어있다고 했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심 받았다는 것과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어주심으로써 우리의 부활도 확증되었다고 했어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부활도 필연적으로 발생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부활이 예수님의 부활과 연결되어있는데, 이것만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부활 신앙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고 했고, 악한 자들과 관계를 맺지 않고,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하며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 자신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깊이 있게 묵상하며, 주님께 영광 돌리며 살아가는 우리 고등부 친구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 그리고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어주신 주님, 감사를 드립니다. 허물과 죄로 죽어있던 아무런 소망 없는 우리에게 부활을 확증해 주시고, 새로운 소망을 품고 살아가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끝없는 경쟁 구도 안에서 기쁨과 소망보다 낙심하는 일이 많을 수밖에 없는 우리 고등부 친구들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참된 부활 신앙을 가지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에도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는 우리 아이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때로는 원치 않는 결과를 얻을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주님 한분만 의지하며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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