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 영접하는 자
Notes
Transcript
오늘 함께 살펴볼 말씀은 요한복음 1장 9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한 절씩 천천히 교독하고 오늘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 아멘.
오늘 강의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서 생각할 수 있는데요. 먼저 첫 번째 부분은 자기 백성에게 거부당한 세상의 주인입니다. 9절부터 11절까지의 내용이고요. 먼저 9절 내용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장 9절 개역개정 내용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아멘. 이 말씀을 직역해서 읽으면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진정한 빛, 진짜인 빛이 세상에 오셨다. 개역개정의 번역과 거의 비슷하긴 하지만, 조금 다르죠.
예를 들어서 우리말 성경에서는 참 빛이라고 하는데, 참 빛이라고 하면 이게 어떤 의미인지 잘 와닿지 않습니다. 그런데 원어에서 말하는 “참된”이라는 말은 요한복음에서 “진정한”이라는 의미로 주로 사용됩니다. 그렇다면 참 빛을 “진정한 빛” 또는 진짜인 빛이라고 생각해 보면,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말로 조금 어색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의심의 여지가 없는, 가짜일 수가 없는, 진짜인 빛이라는 것이죠. 그럼 진짜인 빛은 누구를 가리키는 말일까요?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을 진정한 빛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 요한복음을 처음 읽는다고 가정하면, 참 빛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몇 절에서 알 수 있을까요? 네. 오늘 강의 중에서 살펴볼텐데요. 요한복음 1장 17절에서 예수님의 이름이 요한복음에서 처음으로 소개됩니다.
자 그래서, 진정한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보통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깊이 있게 묵상하지 않고 너무나 쉽게 지나치는데요.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표현이 익숙하게 느껴지시나요? 아니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셨다는 말이 익숙하신가요? 아마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태어나셨다. 성육신하셨다. 이러한 표현들이 조금 더 익숙하게 느껴지실 것 같은데요. 어떤 표현이 맞고 틀리고의 문제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표현과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태어나셨다는 표현 모두 맞는 말입니다. 관점에 따라 의미부여에 있어서 차이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보았듯이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인성보다 신성을 강조하면서 요한복음을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처음부터 예수님을 사람으로 표현하지 않고 말씀, 헬라어로 로고스라고 표현한다고 했죠. 로고스로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로고스가 하나님이시다. 이런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9절에 와서는 로고스를 무엇으로 표현합니까? 참 빛으로 표현합니다. 가짜인 빛이 아니라, 진짜인 빛, 진정한 빛으로 예수님을 표현하는데, 그 빛이 어떻게 했다는 겁니까?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겁니다. 이 부분도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두 부분으로 나눠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세상”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신앙생활에서 “세상”이라는 단어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됩니까 아니면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됩니까?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죠. 이렇게 사용한 근거는 요한복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말씀에 보면 일반적으로 세상은 창조주를 거역하고 반역 가운데 있는 모든 피조 질서를 가리킵니다. 그럼 믿음이 있는 사람은 세상에 속한 사람일까요 아닐까요? 아니죠. 그런데 이 세상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긴 하죠. 세상에서 살아가긴 합니다만, 세상에 속해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렇게 세상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데, 이렇게 세상을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이유는, 일부러 억지로 부정적으로 꾸며내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보면, 실제로 세상은 타락하고 죄악되기 때문에 세상의 존재 자체가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것이 당연하고, 또 이러한 의미부여를 통해서 세상에게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이렇게 간단하게 세상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았는데요. 구체적인 성경구절을 함께 살펴보면서, 세상에 대한 사도 요한의 시각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요한복음 15장 1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속해 있는지 속해있지 않은지는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겁니다. 이렇게 믿는 자는 세상과 분명하게 구별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이어서 요한복음 8장 2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속해있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과 예수님이 구별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려주시는 것이죠. 만약 에수님께서 이 세상에 속해있다면, 예수님도 죄악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세상에 속해 있다거나, 이 세상 안에 포함될 수 없죠.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태초부터 존재하셨던, 선재하신 로고스이시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카테고리로 표현하자면, 세상의 상위 카테고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세상에 있는 것이지, 세상 안에 예수님이 있는 것이 아니죠.
이어서 요한복음 18장 3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예수님께서 빌라도와 대화하실 때 하신 말씀인데요. 예수님은 예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이것도 요한복음 8장 23절 말씀과 유사한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 이런 말씀을 들으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죠. 왜냐하면 카테고리로 볼 때, 세상의 범위가 나라보다 훨씬 더 넓고 크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어느 나라라고 하면 당연히 이 세상 안에 포함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감히 담을 수 없는 나라라는 것이죠. 물론 피조물의 입장에서 이 세상은 정말 어마어마하게 넓고 큽니다. 지구만 놓고 봐도 그렇습니다. 인간의 문명이 아무리 발달하였다고 한들, 지구의 비밀을 완벽하게 파헤치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바다의 가장 깊은 곳은 어떤지, 땅의 가장 깊은 곳은 또 어떤지. 이것 뿐만 아니라 질병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죠. 이 세상에 불치병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세상에 있는 여러 문제들이나 궁금증도 다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주 안에 있는 지구는 어떻습니까? 굉장히 작은 존재죠. 이렇게 우리 피조물의 입장에서는 이 세상도 감히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나라는 세상과 분명하게 구별됩니다.
이어서 요한일서 2장 16절과 1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어떻다구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모든 물질적인 것들이 다 세상적인 것들이라는 것이죠. 그렇다고 물질적인건 악한 것이고 영적인 것만 선하다. 이렇게 생각해선 안 됩니다. 어떤 용도로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한 것이죠. 여기서는 탐욕적인 측면에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이런 부분들이 언급되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이러한 탐욕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죠.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성도와 세상의 가장 큰 차이점이죠. 이생의 자랑이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유한한 세상과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는 성도의 차이는 우리가 나중에 하나님 나라에 가게 되면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자 그래서, 진정한 빛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씀에서 세상이라는 단어를 살펴보았고요. 이제 진정한 빛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빛이 오셨다는 말은 말 그대로 사람이 오다 가다. 이렇게 실제로 움직일 때 그 움직임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교회에 오다, 교회에 가다. 뭐 이렇게 표현할 때, 생각으로만 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실제로 교회에 갈 때 교회에 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빛이 세상에 오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빛이 그냥 세상에 오신 겁니까? 그렇지 않죠. 그 앞에 수식어가 하나 붙어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이라는 말이 붙어있습니다.
교재 4페이지 보세요.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비추다. 헬라어로는 포티조라고 하는데요. 포티조의 사전적인 의미는 밝게하다. 비추다. 조명하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 여기에서 비추는 이라는 단어는 비추다, 밝게 하다, 조명하다. 세 가지의 뜻 중에서 세 번째 의미인 조명하다 라는 의미로 적용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사실 신학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냥 빛을 비추다. 뭐 이런 느낌으로 보면 정확하게 이해가 잘 되지 않는데요. 아래 해설 내용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과, 그분의 가르침을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진정한 빛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으며,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영적인 조명을 얻을 수 있다. 이는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 혈통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주어지는 외적인 조명이며 영적인 조명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예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 예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고 제가 적어 놓았는데, 이 부분을 조금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엄밀히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에게 빛을 비춰주실 필요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습니다. 주님께서 굳이 세상에 오실 필요도 없고, 죄악된 인간들과 살을 맞대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원칙대로 하면 됩니다. 세상이 악하면 악한대로 그냥 심판하면 됩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이렇게 아주 아주 악한 세상임을 누구보다 잘 아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누구에게 빛을 비추어 주십니까? 모든 사람에게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이 요한복음 텍스트가 왜 중요한가 하면, 우리가 조직신학적인 개념만 가지고 생각해보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유기하시는 분입니다. 예정과 유기를 잘못 이해하면, 선입견을 가지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시고, 싫어하는 사람은 가차없이 버리시는 분. 차갑고 냉정한 심판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1장 9절에 따르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빛을 비추어주십니다. 사람들이 이 빛을 보든 말든 상관없습니다. 이 빛을 받아들이든, 거절하든 상관없습니다. 결과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하게 빛을 비추어주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제 요한복음 1장 10절 말씀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창조주이신 로고스에 관한 말씀인데요. 1장 1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말씀이시며, 진정한 빛이신 예수님은 세상에 지속적으로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잠깐 찾아오거나 놀러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분이시며, 로고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 1절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요한복음 1장 10절 말씀에 따르면 세상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교재 5페이지에 보시면,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여러 증거들이 나타나있는데요. 한 구절씩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먼저 고린도전서 8장 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고 예수님도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골로새서 1장 1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로새서 말씀도, 만물이 예수님에게서 창조되었다고 밝힙니다. 이어서 히브리서 1장 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주어는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냥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여기서 그가 누구겠습니까? 예수님이겠죠.
자 이렇게 고린도전서 8장 6절, 골로새서 1장 16절, 히브리서 1장 2절 말씀의 증거와 요한복음 1장 10절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 창조하셨고, 예수님은 그 때 안 계셨고, 다른 데 계셨다가, 2천년 전에 이 땅에 갑자기 짠 하고 오신 것이 아니다. 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 그래서, 다시 교재 4페이지 요한복음 1장 10절 말씀으로 돌아와서요. 세상이 그를 알지 못했다. 라는 내용을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알지 못했다 라는 것은 우리말로 생각해 보면, 쉽게 말해서 모른다. 라고 표현할 수 있겠죠. 지식적으로 어떤 것을 모른다. 존재 자체를 모른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요. 사실 헬라어로 안다 라는 단어를 우리말로 번역해서 그렇지, 헬라어의 뉘앙스를 살려서 생각해 보면, 의미가 많이 달라집니다. 헬라어로 알지 못했다는 말은, 어떤 대상을 받아들이거나 믿는 것을 의도적으로 거부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몰라서 그랬어요. 이게 아니라, 알게 되었는데, 의도적으로 거부했다는 겁니다.
이어서 요한복음 1장 11절 말씀을 살펴볼텐데요. 11절 말씀은 10절 말씀과 연결되는 내용이에요. 1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0절에서는 “세상”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지만 11절에서는 세상보다 훨씬 더 구체화된 단어가 사용됩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자기 땅이라고 나와있지만, 원어적인 의미를 살려서 읽으면 자기 자신의 것들이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보통 자신의 자산 또는 자신의 집을 의미합니다. 로고스이신 예수님께서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시면서 창조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셨으니, 당연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온 세상이 다 예수님의 땅이면서 예수님의 집이라고 할 수 있겠죠.
또한 자기 백성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하나님께 속해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원래대로라면, 죄에 물들지 않은 사람은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죄에 물든 사람, 죄로 인해 오염된 사람, 죄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로고스이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교리적인 느낌으로 표현하면 되게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요한복음 1장 11절 말씀은 굉장히 모순적인 느낌을 줍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를 들어 우리 집에 왔는데, 우리 가족이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가정해 봅시다. 내가 엄마 아빠인데, 우리 자녀가 나보고 나가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이런 말 자체가 사실 이해가 안 되시고 상상도 안 가실텐데요. 왜 그렇습니까? 이런 이야기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이죠. 왜 모순입니까?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께서 로고스로서 세상을 창조하셨고, 자신이 창조한 세상에 왔는데,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우리 자식이 우리보고 집에서 나가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영적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으로 인해 지옥에 가게 되는 것은 결코 과한 처사가 아닙니다. 그에 상응하는 공의로운 심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 그래서 교재 5페이지에 1번,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대해서 소유권을 주장하실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어떻게 하셨기 때문입니까? 창조하셨기 때문이죠.
그리고 자기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는데, 여기서 영접하다 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랄람바노 라는 단어입니다. 데려오다, 영접하다, 받다, 취하다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에요.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영접하다 라는 단어를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영접하다라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인격적으로 믿고 인정하며,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어떤 분이신지 고백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가 영접하다 라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보통 예수님을 믿는다 라고 말할 때, 믿는다는 말이 애매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그럴 때 영접하다 라는 단어를 떠올리시면 되겠습니다. 그냥 그 존재를 안다, 있다는 것을 믿는다. 이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인격적으로 믿고 인정하며, 예수님께서 나 자신에게 어떤 분이신지 고백하는 것. 그리고 그 고백한 대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의 삶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제 오늘 강의의 두 번째 파트인 영접하는 자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9절부터 18절까지의 내용 중에서 9,10,11절 딱 세 절 내용을 살펴보았고요. 이제 12절 말씀이 가장 핵심적인 말씀으로 알려져있는데요. 9절부터 11절까지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12절 말씀을 읽으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성경은 원래 문맥을 배제하고 읽으면 바르게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언제나 문맥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나눈 내용인 9절부터 11절까지의 내용을 잘 이해하셨으면 12절 말씀이 더 깊이 있게 다가오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럼 1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2절 말씀은 우리말 성경의 번역은 의역이 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래 바른 성경 번역본을 보시면,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을 영접하는 자들,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일단 우리말 성경에 없는 접속사가 있죠. 그러나. 그러나 라는 말을 통해서 우리는 11절 말씀과 12절 말씀이 연결되면서 반대되는 내용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11절 말씀 살펴보면서 영접하다 라는 단어를 알아보았는데요. 12절에 나오는 영접하다 라는 말이 11절에 나온 영접하다와 똑같은 단어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헬라어로는 다른 단어입니다. 다른 단어인데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똑같은 의미인데 굳이 헬라어 단어를 넣은 이유는, 네 그냥 넣어보았습니다. 네 그래서 영접하다 라는 말은 11절에서 어떤 의미라고 했습니까?
자기 자신을 예수님께 맡기고, 예수님의 말씀을 인격적으로 믿고 인정하며, 예수님께서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 이것이 영접하다 라는 의미인데요. 여기서 우리가 추가로 생각해야 할 것은, 영접하는 자들, 이라는 말에 사용된 헬라어 시제인데요. 이 시제를 살려서 직역하면,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을 계속해서 영접하는 자들. 이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12절 말씀을 이렇게 제대로 읽으면, 예수님 한번 믿고 그냥 살면 되는 거 아니야? 이런 소리를 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당연히 없겠죠. 계속해서 영접해야 하니까요. 애초에 그렇게 말씀이 기록되어있기 때문에, 요한복음을 제대로 읽고 묵상하는 사람은 절대로 이상한 소리 하지 않습니다. 뭐 한번 믿고 천국 가는 티켓 구입했으면 나중에 죽기 전에 한번 정도만 교회 가면 되지. 또는 천국 간다는 확신만 있으면 뭐 더 이상 안가도 되지. 이런 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 말씀을 제대로 묵상하면,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한 순간도 빠짐없이 계속해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겁니다.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이 부분에서 우리는 영접하다 라는 말과 믿는다. 라는 말이 동의어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요. 여기서 독특한 점은, 그 이름을 믿는다는 표현이에요.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다. 이런 표현은 사도 요한의 독특한 표현입니다. 표면적으로 이름 자체를 믿는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선 안 되고요. 예수님의 이름이 지니고 있는 모든 특성을 믿는다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로고스이시면서 진정한 빛이신 예수님에 관한 모든 정보를 믿는다는 얘기에요.
자 그래서 참된 빛이신 로고스를 영접하는 자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무엇이 주어집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집니다. 이 권세라는 단어는 원어로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요. 능력, 권리, 권한. 뭐 이런 다양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ASV 영어성경에서는 권세라는 단어를 능력이라고 번역했는데, 이 단어는 권리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왜 그런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어떤 특정한 능력을 얻게 된다? 뭔가... 어색하고 이상하죠.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의 경우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능력? 뭐 이런 걸 얻으셨습니까? 아마 그런 분은 계시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권리로 번역하면, 하나님의 자녀가되는 합법적인 권리를 얻게 된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에 따르면 신자는 입양된 존재들인데, 입양할 때 합법적인 절차를 밟지 않습니까? 마치 그런 것과 같은 이치로, 예수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그분의 이름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합법적인 절차를 밟은 것으로 인정받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 신자들의 정체성이에요. 그냥 뭐 누구는 태어났을 때부터 믿음이 신실했고, 누구는 태어났을 때부터 영적인 능력이 탁월하고, 이런 것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방법은 모두가 동등하고, 똑같은 절차를 밟게 되어 있습니다.
자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단어를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경 공부여서 조금은 디테일하게 들어가니까, 양해 부탁드리고요. 자녀라는 단어를 또 왜 걸고 넘어지느냐.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겠습니다만, 하나님의 자녀라는 단어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단어가 요한복음에서 똑같은 의미로 사용될까요. 다른 의미로 사용될까요. 네 다른 의미로 사용되니까 질문을 드렸겠죠. 네. 그렇다면 무엇이 다를까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리를 주셨다고 하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맞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에게만 사용됩니다. 여기에서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단어에서 자녀는 복수 형태로 사용됩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렇게 읽어야 하는데, 편의상 그냥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이렇게 번역이 된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을 독생자라고 표현할 때에는 유일하신 아들. 이런 의미로 사용이 됩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2절 말씀만 놓고 보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에는 인간의 자율성에 달려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마치 인간의 의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지 말지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지죠. 영접하기만 하면,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리를 부여받는 것처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선택의 영역인 것 같죠.
하지만 13절 말씀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7페이지에 있는 1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아멘.
12절과 13절은 원어 성경으로 보면 원래 한 문장입니다. 굉장히 긴 하나의 문장이에요. 그래서 13절 말씀을 원어 어순에 따라서 읽어보면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들, 영접하는 자들은 혈통에서나 육체의 뜻에서나 사람의 뜻에 의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들이다. 자, 그러니까 영접하는 자들, 로고스의 이름을 믿는 자들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독자들에게 새로운 출생의 개념을 소개합니다. 몇 주 뒤에 살펴볼 요한복음 3장에서 위로부터의 출생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만 요한복음의 프롤로그에서부터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새로운 출생에 대해서 미리 알려줍니다. 그렇다면 이 출생이 어떠한 출생입니까? 혈연관계나 육체적인 의지나 사람의 뜻, 좀더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가부장적인 가정에서의 남편의 뜻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영적인 출생은 인간의 주도적인 역할이나 인간의 계획과 의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자 이제 오늘 강의의 마지막 세 번째 파트, 예수님의 성육신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리고 아래 나와있는 직역 부분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리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말씀이) 우리 가운데 자신의 장막을 쳤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았는데, 아버지로부터 유일하신 분의 영광이었으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드디어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성육신에 대한 내용이 등장합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성육신은 무엇입니까? 말씀, 로고스가 육신이 된 것이 성육신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내용이 충격적입니다. 말씀이 어떻게 사람이 되었는지 그 과정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그분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거하셨다는 단어. 이 단어는 굉장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장막을 치다, 살다, 거주하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요한복음을 제외하고는 요한계시록에서만 사용되는 단어인데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 생활할 때 어떻게 생활했습니까? 텐트를 치고 살지 않았습니까? 이때 하나님께서는 어디에 거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성막에서 거하셨습니다. 이러한 배경지식을 가지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라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구약시대 때보다 훨씬 더 친밀한 방식으로 자신의 백성들 사이에 거처를 정하시고 거하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까? 성막이라는 큰 텐트에 하나님이 거하신다고 하더라도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백성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상징적인 의미로 중요한 것이지, 피부로 와닿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로고스께서 육신이 되셨고 우리 가운데 장막을 쳐서 거하신다는 겁니다. 단어 자체는 장막을 쳐서 거하신다고 읽을 수 있지만, 의미상으로는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땅에 오셔서 사람들과 한 하늘 아래에서 서로 대화하며 거하신다는 것이기 때문에, 구약시대보다 훨씬 더 친밀한 방식으로 접근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거하신다는 말씀으로 끝내지 않고, 로고스의 성육신을 영광으로 연결 시킵니다. 이 부분 역시 구약성경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요. 출애굽기 40장 34절과 35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성막에 충만한 여호와의 영광은 곧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로고스의 거하심은 예수님의 충만한 임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 이렇게 예수님의 성육신 안에 예수님의 충만한 영광이 담겨 있는데, 여기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고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가난한 분이십니까? 매맞고 모욕당하고 힘없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예수님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이 말하는 이 로고스의 성육신과 성육신 그 자체의 영광스러움을 올바로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장이 말하는 이 로고스는 은혜로 충만하신 분이시면서 진리로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여기서 한 가지만 더 살펴보고 넘어갈텐데요.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신앙생활을 오래하신 분들의 경우에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독생자 라고 기억하실 겁니다. 우리가 그동안 계속해서 사용해온 용어인 독생자라는 표현이 정확한 표현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독생자라는 말은 헬라어로 모노게네스라고 부르는데요. 이 단어는 유일하고 특별한 아들을 의미합니다. 아까 잠깐 살펴본 내용입니다만, 성경에서 아들로서의 예수님을 가리키는 단어는 모노게네스. 유일한 아들을 의미하고요. 우리들을 자녀라고 표현하는 단어는 테크논입니다. 그러니까 단어 자체가 달라요. 이렇게 사도 요한은 독자로 하여금 이러한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자녀라는 단어와 유일한 아들이라는 단어를 분명하게 구분해서 의도적으로 사용합니다.
자, 그래서 우리말 성경에 나와있는 이 독생자라는 단어에 많이 익숙해져 있으시겠지만, 유일한 아들, 하나뿐인 아들로 바꿔서 기억하시는 것이 더욱 좋습니다. 너무 오랜 시간동안 가지고 온 개념이어서 바꾸기 어려우시면 그냥 독생자로 기억하셔도 되겠습니다.
이제 요한복음 1장 16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자, 이 구절은 논란이 많이 되는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어디가 그런가 하면, 은혜 위에 은혜러라. 여기에서 은혜 위에. 위에라는 말이 원어로는 전치사로 사용되는데, 이 헬라어라는 녀석이 참으로 골치 아픈 것이, 전치사의 용법이 굉장히 다양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기록할 때 사용한 헬라어는 코이네 그릭이라고 해서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헬라어이기도 합니다. 현대 그리스어와는 조금 달라요. 자 그래서 뭐가 문제인가 하면, 위에 라는 말로 번역된 이 헬라어 전치사에 위에라는 뜻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해석할 때 가장 대표적인 해석이 두 가지가 있는데요.
먼저 첫 번째는 은혜 대신에 은혜이다 라는 해석입니다. 이렇게 해석할 경우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오는 은혜와 진리가 율법을 대체하기 때문에 율법도 은혜이지만, 예수님을 통해 받는 은혜가 율법을 통해 받는 은혜를 대체한다. 이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가능성인 은혜 위에 은혜이다. 라는 해석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은혜 위에 또 은혜가 있다는 것인데, 이렇게 해석할 경우에는 은혜가 차곡 차곡 계속해서 싸이는 것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은혜의 파도가 밀려오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게 되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원하는대로 마시게 하시는 그 은혜에는 끝이 없습니다.
자 이렇게 두 가지의 가능성이 존재하는데, 신학이 어려운 이유는 결국 무엇이 맞는지 확실한 답을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송한 말씀을 드리지만, 두 가지의 해석 모두 보수적인 진영의 학자들이 서로 나름의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한 해석이기 때문에 무엇이 맞다 라고 확신을 가지고 말씀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성경공부이기 때문에, 이런 해석의 다양성이 있다는 두 가지의 견해를 소개해 드립니다. 하지만 무엇이 되었든 은혜는 은혜에요. 그리고 이 은혜는 예수님의 충만함으로부터 받는 은혜이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시간 관계상 나중에 조금 더 설명드리도록 하고요.
자 이제 요한복음 1장 17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7절 말씀을 대충 슥 한번 훑어보면, 오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오해인가 하면, 모세와 예수님 사이에 어떤 대조가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모세를 통해 받은 율법의 시대가 끝나고 뭔가 이제 새로운 은혜의 시대가 시작된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17절 말씀을 잘 보면, 모세와 예수님을 비교하거나 반대되는 개념으로 보여주는 단어는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냥 자연스러운 하나의 문장이에요. 만약 모세와 예수님을 대조하려면, 그러나 라던지 오히려 라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던지. 이런 식의 역접을 나타내는 접속사가 나와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런 단어는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신 사건과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이를 근본적으로 분리하는 것이 없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과 은혜의 시대의 불연속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연속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율법이란,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사두개인들, 유대인들, 이런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 믿고 지키는 율법이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면 유대교가 믿는 율법은 조금 다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율법의 항목들을 세밀하게 발전시켜서 행위로 지키는 데 초점을 두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나중에 안식일 논쟁 관련해서 말씀을 살펴보면서 조금 더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자 이제 요한복음 1장 1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아멘.”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처음부터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까? 그렇지 않죠. 아담은 하나님과 직접 대화할 수 있었고 하나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난 이후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었죠. 그런 의미에서 참고 구절 제일 아래에 있는 이사야서 59장 2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이사야서에 따르면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된 것은 인간의 죄악 때문입니다. 죄의 문제만 아니었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될 일도 없었으며,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다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죄악된 세상에서 살고 있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만약이라는 말에 그렇게 현혹될 필요도 없고 딱히 아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차피 체험해 본 적이 없으니까요.
자, 그래서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을 볼 수 없었는데, 예수님은 이러한 장애 요소들을 극복하셨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누구라고 하셨습니까? 로고스. 로고스가 무엇이 되었다고 했죠? 육신이 되었다고 했죠. 그런데 이 로고스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로고스가 어떤 분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했죠. 따라서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의 얼굴을 보면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과 똑같은 이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육성을 들으면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유익, 예수님의 성육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유익이 정말 말도 안되게 많습니다. 아예 불가능했던 것들이 예수님을 통해 가능해진 것이죠. 물론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실물이나 육성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만, 이렇게 성경으로 주어진 말씀이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깨닫는 이 과정 자체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오늘 강의를 마치려 합니다. 오늘 살펴본 내용들을 한 주간 복습하시고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편하게 문자나 카톡, 전화로 질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 강의 들으시느라 고생 정말 많으셨고요. 제가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주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하시며, 은혜 위의 은혜를 누리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 오늘도 성경공부를 통해 주님을 더욱 더 깊이 알아가게 하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 시간들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끄럽지 않은 지식을 갖추고, 또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통해 주님께 영광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 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