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 로고스 기독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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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요한복음 강해”라는 제목으로 가을학기 성경 공부를 맡은 장태호 목사입니다. 제가 이번 성경 공부를 미리 준비하려고 6월 중순부터 준비를 시작해서 마지막 강의까지 교재와 강의안을 완성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께서 지금까지 신앙생활하시면서 정말 많은 성경 공부와 설교들을 접해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담감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사실 코로나 때문에 그 동안 성경 공부를 축소한 형태로 진행을 해왔습니다. 슬기로운 성경 생활이라는 제목으로 세 학기 동안 구약성경 전체를 한번 다루었습니다. 물론 다루기 어려운 내용은 생략하기도 하고, 좀 빠르게 넘어간 내용도 있고 해서, 아쉽게 느끼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그래서 이번 학기에는 집중적으로 요한복음에 대해서 자세하게 살펴보려 합니다. 강의를 들으시다 보면, 아 너무 깊다. 너무 어렵다. 이렇게 느끼실 수도 있고, 이것보다 좀 더 깊게 다뤄줬으면 좋겠다. 이렇게 느끼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젊은 목사가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준비했으니 예쁘게 봐주시고, 정말 아쉽다, 이 부분은 조금 더 보완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부분이 있으시면 개인적으로 만나서 건의해 주시거나 전화나 문자 메시지 또는 카카오톡으로 건의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본격적인 강의에 들어가기 앞서 이번 학기에 다룰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교재 2페이지를 보시면, 목차가 있는데요. 10월 14일부터 11월 24일까지. 7주 동안 강의가 진행되고요. 강의 내용은 요한복음 1장부터 3장 30절까지의 내용을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이 21장까지 있는데, 7주 동안 고작 세 장밖에 진도를 나가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면, 마음이 좀 어려우실 수도 있으실텐데, 저는 이번 요한복음 성경공부를 준비하면서, 성경 공부의 특성을 살려야겠다. 성경에 대해서 깊이 있게 알고 싶은 분들, 특별히 요한복음에 대해서 한 절도 빠짐없이 알고 싶다. 하는 분들을 위해서 준비했습니다. 따라서 성경 공부의 특성상 설교처럼 실질적으로 말씀을 삶에서 어떻게 적용시킬 것이냐. 하는 문제들은 크게 다루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깊이 있게 다루는 시간이기 때문에 적용할 만한 내용이 아예 없다고 볼 순 없습니다만, 일단은 설교 시간에 다루지 못하는 이야기들도 굉장히 많이 다루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얼마나 많이 어떤 성경 공부에 참여하셨는지에 관계 없이, 새로운 마음으로 교육에 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 그럼 제가 기도하고 요한복음 강해 첫 번째 강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님의 은혜 가운데 화평교회 가을학기 성경공부를 시작하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특별히 시간을 할애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게 하시고, 또 그러한 마음으로 시간에 맞춰서 교회에 나오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이렇게 모두가 특별한 마음으로 요한복음 강해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주님,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성령 하나님, 우리 모두의 심령 가운데 내주하여 주시고, 조명하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요한복음의 말씀을 깊이 있게 깨닫는 귀한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앞으로 진행되는 7주간의 일정을 주님께 맡겨드립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모든 심령들을 주여 기억하여 주시고, 각자의 상황과 환경을 인도하여주시어 마치는 순간까지 모두가 함께하며 주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는 귀한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이제 첫 번째 강의 내용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성경책은 그리 단순한 책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고, 신약성경은 그리스어 또는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죠. 굉장히 오래 전에 기록된 책이기도 하고, 우리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외국어로 기록된 책을 번역본으로 읽는 것이기 때문에, 문학적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한 문화적으로도 우리와 맞지 않죠. 식습관부터 시작해서 주거 형태, 명절, 종교 문화 등, 모든 것들이 있는 그대로 손쉽게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외국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오래된 문학 작품들을 영어 번역본으로 읽으면 그 고유의 느낌을 있는 그대로 느끼기 어렵죠.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반대편에서 기록된 이 성경 말씀을 우리말로 번역된 글로 읽으면 이해하기가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당연히 어렵겠죠. 그러니 평생토록 설교 말씀을 들으면서 살아도 성경을 100% 다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성경책을 읽을 때에는 신학이라는 것이 필요한데요. 신학은 성경을 보는 안경 또는 창문이라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쓰는 안경은, 어떤 안경인가 하면, 박윤선 목사님의 계시의존사색 에 근거한 안경이면서 동시에, 종교개혁자들의 해석사 전통을 따르는 안경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 교단에 소속된 모든 교회는 모두가 동일한 안경을 쓰고 성경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쓰고 있는 이 안경을 신학으로 표현하자면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보수와 진보의 측면에서 표현하자면, 아주아주 보수적인 신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와 정 반대에 있는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 중간에 있는 신학은 복음주의 신학이라고 볼 수 있고요.
자, 이렇게 보수적인 신학, 개혁주의 신학이 성경을 보는 시각과 자유주의 신학이 성경을 보는 시각이 얼마나 다를까요. 예를 들어서 설명하자면, 우리가 이번 학기에 살펴볼 이 요한복음이라는 책을 누가 기록했을까요? 개혁주의 진영 또는 보수적인 신학을 탐구하는 사람들은 단순명료하게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했다고 대답합니다. 반대로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사도 요한이 혼자 기록했다는 말에 대해 반론을 제기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반론은 일치된 의견이 아닙니다. 예컨대, 무슨 요한 공동체가 있어서 요한의 제자들이 후대에 요한복음을 편집했다는 둥, 아니면 요한이 아니라 애초에 처음부터 다른 사람이 요한복음을 기록했다는 둥, 굉장히 다양한 주장들이 존재합니다. 이렇게 저자와 관련된 문제뿐만 아니라 요한복음이라는 책을 사도 요한이 전부다 썼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반론을 제기합니다.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우리는 보통 어떻게 생각합니까? 너무나도 당연하게 요한복음은 요한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썼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18절까지의 내용을 프롤로그라고 표현하고, 이 프롤로그 단락이 후대에 첨가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사도 요한이 직접 기록한 내용이 아니라는 것이죠.
자, 이렇게 요한복음에 관련된 신학적인 여러 가지 썰들이 있는데, 사실상 설교 말씀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은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님들이 이런 이야기에 대해서 모두가 관심 있게 듣지 않습니다.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죠. 그래서 저도 성경 공부 시간에 다른 진영에서는 이 내용을 무엇이라 말하는지에 관해서 맛만 보여드리고 우리의 입장이 어떠한지, 그리고 이 말씀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교재 1페이지를 보시면, 오늘 첫 번째로 살펴볼 내용은 요한복음 개론입니다. 요한복음 말씀을 살펴보기 전에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내용들이 있는데요. 먼저 첫 번째로, 우리가 공부하는 이 책의 이름 정도는 알아야겠죠. 책 이름? 음... 당연하게 요한복음이라고 생각하실텐데요. 사도 요한이 직접 기록한 제목은 아닙니다만, 일반적으로 헬라어 성경에 달려 있는 제목은 유앙겔리온 카타 요한네입니다.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요한에 따른 복음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헬라어식으로 표현하자면 복음, 요한에 따른. 이렇게 읽으면서 이해하는 것이 맞습니다. 언어적인 사고방식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100퍼센트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만, 우선 이러한 표현 방식은 저자인 요한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나오기 때문이죠.
그런데 사실 1세기 무렵에 기록된 문헌들을 보면, 제목을 쓸 때, 저자를 가장 먼저 쓰고 그 다음에 내용에 대한 제목을 쓴다고 합니다. 이에 반해 요한복음은 어떻습니까? 저자의 이름이 마지막에 나오고 복음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죠. 여기서 복음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도 희한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복음서는 기본적으로 예수님에 대한 내용을 기록한 책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33년간의 인생을 자서전처럼 기록한 책은 아닙니다만, 누가 봐도 사복음서의 주인공은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의 생애 또는 예수님의 전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헬라어식 제목은 복음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죠.
자 그렇다면, 요한에 따른 복음이라는 이 제목은 언제 붙여졌을까요. 사도 요한이 저자이기 때문에, 요한이 그렇게 제목을 붙였을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성경의 원본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어차피 요한이 어떻게 기록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현존하는 성경의 사본들, 다시 말해 성경 원본을 보고 필사자들이 베껴쓴 것. 이것을 사본이라고 표현하는데요. 이 사본들마다 제목이 백퍼센트 일치하는 것은 아니고, 또 제목 자체가 내용보다 더 중요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자 그렇다면, 제목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닌가보다. 이렇게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을텐데, 여기서 우리는 단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면 됩니다. 다른 것 다 필요없고,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네 사람이 쓴 책은 일반적인 내용이 아닌 복음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복음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이신지. 또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또 그분이 나중에 어떻게 이 땅에 다시 오실지. 이런 내용들을 말로 선포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복음서를 생명처럼 귀하게 여기고, 이 말씀을 깊이 있게 알아가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성경을 다독하는 것만으로는 깊이 있게 알기 어렵습니다. 성경이 처음부터 우리말로 기록된 것도 아니고, 문화적으로도 공감대가 형성되기 어렵죠. 이러한 점에서 큐티는 좋으면서도 위험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에서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은 너무나 좋은 습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만, 이때 사모하는 수준을 넘어서 내 방식대로 이해하고, 내가 받아들이고 싶은대로 이해하고, 이런 식으로 말씀을 잘못 묵상하다 보면, 다른 길로 빠지게 됩니다. 그렇게 본인의 방식대로 말씀을 이해하고 묵상하다 보면, 설교 말씀을 들을 때, 자기중심적으로 말씀을 해석하게 됩니다. 이렇게까지 변질되는 것은 정말 위험한 수준이고요. 이러한 점에서 성경을 다독하면서 자기식대로 해석하는 것이 아주 아주 위험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부디 설교 말씀이나 성경 공부를 통해서 배운 내용들 안에서 자유롭게 묵상하시면서 우리 주님을 깊이 알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제 두 번째 내용, 요한복음의 저자가 누구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요한복음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만 등장합니다. 아래 참고 구절, 요한복음 13장 23절 말씀 보세요.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저자인데 그렇다면 이 사람이 누구일까요. 교회 역사 2천년 동안 요한복음의 저자는 일반적으로 세베대의 아들 사도 요한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로 스스로를 표현한 것이죠.
여담으로 말씀드리자면,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그룹에서도 핵심적인 제자 그룹에 속했습니다. 예컨대, 변화산 사건의 경우에 예수님께서 세 명의 제자만 대동하시고 산에 오르시는데, 이 세 명의 제자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었습니다. 신학교 입시 준비할 때, 앞글자만 따서 베야요라고 외우기도 했죠. 네. 이렇게 사도 요한은 사도 베드로와 거의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봤을 때, 베드로에 비해 꿀릴 것도 없는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8장 16절과 17절 말씀을 보시면,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여기서 이 제자는 누구일까요? 요한복음 공부 시간에 사도 요한에 대해서 알아볼 때 이런 질문을 하면 정답은 누구일까요? 네. 요한이죠. 사도 요한이 대제사장과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자 그리고 아래 요한복음 19장 26절 말씀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하신 말씀이 나오는데요.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보라 네 어머니이다. 예수님의 육적인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에게 어머니처럼 모시라고 명령한 것이죠. 예수님께서 이렇게 명령하신 이후로 사도 요한은 마리아를 자신의 어머니로 모시게 됩니다. 여러 문헌에 따르면 사도 요한은 노쇠한 마리아를 모시고 예루살렘에서 터키 에베소로, 또 에베소에서 밧모섬으로 이동합니다. 요한복음은 에베소에서 기록되었고 요한계시록은 밧모섬에서 기록된 것으로 알려져 있죠.
그리고 사도 요한은 복음서를 기록한 저자들 중에 가장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을 기록한 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이나 사도들의 경우에 대부분이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요한은 이러한 순교자들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생존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순교를 억지로 피하려 했다기보다, 예수님의 육적인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도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자, 이렇게 요한복음 저자와 저자의 특징까지 살펴보았고요. 요한복음 개론 마지막 내용인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을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의 기록목적은 단순합니다. 아래 참고 구절을 보지 않으시고 작성하실 수 있으면 좋고요. 기억이 가물가물하신 분들은 아래 참고 구절을 참고해서 채우시면 되겠습니다.
그럼 요한복음 20장 30절과 3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이 무엇입니까? 첫 번째 목적,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두 번째 목적,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을 갖게 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이 두 가지가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입니다. 이 두 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말씀이 기록되었다는 것이죠. 30절 말씀 보시면,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요한복음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표적들도 많이 행하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선택적으로, 요한의 신학에 따라, 또 성령님의 감동하심에 따라 어떤 표적은 기록하고 어떤 표적은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냥 입맛에 따라, 감정에 따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믿음과 영생의 측면에서, 그 목적에 부합하는 표적들만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자, 이러한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을 염두에 두시고 오늘 나눌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인데요. 한목소리로 읽겠습니다. 시작. 이어서 바른성경에는 어떻게 기록되었는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
요한복음 개론에 이어서 살펴볼 내용은 로고스 기독론입니다. 로고스 기독론이라는 말 자체를 처음들어보신 분 계십니까? 네. 그럼 로고스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네. 감사합니다. 처음 들어보셨어도 이상한 건 아닙니다. 정상이에요. 그런데 신학적으로 로고스는 굉장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완성된 성경책을 가지고 있고, 또 성경이 기록된 이후로 시간이 굉장히 많이 흘렀기 때문에, 말씀을 일차적으로 받은 그때 그 순간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상상력을 발휘해서 우리가 요한복음 말씀을 처음으로 읽는 독자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 보면, 말씀이 새롭게 보일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로고스가 무엇이며, 또 예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이러한 궁금증을 가지고 요한복음 1장 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바로 아래에 제가 직역한 내용을 보시면, “태초에 말씀이 지속적으로 있었다.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여기서 말씀이라는 단어가 바로 로고스입니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건데, 여기서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말씀이라는 단어, 로고스라는 단어가 성경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철수라는 이름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데, 김철수 씨가 영화에서 나오고, 이철수씨가 넷플릭스에서 나오고, 박철수씨가 티비 예능에 출연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데 어떤 뉴스 기사에서 철수라는 이름이 나오면, 이 철수가 어떤 철수인지 궁금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마다 궁금해하는 겁니다. 이 철수는 넷플릭스에 나온 철수다. 아니다. 티비 예능에 나온 철수다. 아니다. 영화에 나온 철수다. 다양한 의견을 낼 수 있습니다. 마치 이런 것처럼, 로고스가 어디에서 나온 로고스냐하는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조금 유식한 말로, 로고스의 기원 문제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이 내용을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이 요한복음이라는 책을 사도 요한이 1세기에 기록했는데, 이 당시에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과 플라톤 철학, 스토아 철학에서 로고스 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의 경우에는 주전 6세기에 헤라클레이토스라는 사람이 로고스라는 개념을 사용했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이 로고스를 따라 생겨났다고 주장했으며, 로고스가 만물을 만들고 지배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뭔가 성경이랑 비슷하죠. 그런데 다른 점이 있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하는 로고스는 우주를 지배하는 원리와 질서로서 물질적인 모든 것에 내재하는 정신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이 성경, 특별히 오늘 살펴볼 이 요한복음 1장에 등장하는 말씀인 로고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개념이나 사상 정도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이 로고스는 결국 예수님이고, 이 예수님은 2천 년 전에 성육신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단순하게 어떤 정신이나 사상 정도로 표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죠.
그리고 2세기에 발발한 가장 유명한 이단적인 사상 중에 영지주의라는 것이 있습니다. 영지주의가 말하는 이 로고스는 신과 인간 사이에 있는 신화적인 중간자입니다. 영지주의에 따르면 로고스는 역사적인 존재가 아니라 신비적인 존재입니다. 육체적인 것은 악하고 영적인 것은 선하다고 믿는 것이 바로 영지주의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성경공부 가운데 요한복음이 영지주의에 대항하기 위해서 기록되었다. 사도 요한이 영지주의를 배격하기 위해서 기록했다. 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주석서에 보면 이런 내용이 버젓이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듣고 성경을 보는 사람들은 요한복음 1장을 보면 영지주의를 즉각적으로 떠올립니다.
하지만 이것은 올바른 성경해석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실상 영지주의는 2세기에 발생한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시간상으로 요한복음이 먼저입니까 영지주의가 먼저입니까? 요한복음이 먼저죠. 그러니까 사도 요한이 영지주의를 알고 있는 상태에서, 영지주의에 빠지지 않게 하려는 목적으로 요한복음을 기록했다. 이렇게 볼 수는 없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로고스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무엇일까요. 정답부터 말씀드리면, 로고스는 구약성경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요한복음 1장 1절 말씀을 딱 읽으면, 즉시 창세기 1장 1절 말씀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냥 느낌적인 느낌으로 떠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교재 4페이지 요한복음 1장 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에서 태초에 라는 말이 엔 아르케인데,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여기서 태초에 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위치도 똑같아요. 히브리어 성경에서 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태초에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헬라어 성경 요한복음 1장 1절 엔 아르케 엔 호 로고스. 태초에 있었다 말씀이. 둘 다 똑같이 태초에 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것은 절대로 우연의 일치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장 1절 말씀을 기록할 때 의도적으로 “태초에” 라는 단어를 문장 제일 앞에 위치시킨 겁니다. 독자들로 하여금 요한복음 1장 1절 말씀을 읽으면서 창세기 1장 1절을 떠올릴 수 있도록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죠. 바로 로고스가 문제인 겁니다. 창세기 1장 1절에서는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들과 땅들을 창조하셨다고 하는데,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로고스가 등장합니다. 태초에 라는 말을 제외하고는 공통분모가 없습니다.
자 그래서, 일단 창세기 1장 1절에 대한 생각은 넣어두고, 요한복음 1장 1절 말씀을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말씀을 직역한 부분을 보시면, 태초에 말씀이 지속적으로 있었다. 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렇게 기록되어 있으면, 정확한 시제를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헬라어 시제를 고려해서 직역하면 느낌이 확오죠. 태초에 말씀이 있었구나.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그 말씀이 하나님이시구나. 뭔가 100퍼센트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일단 말씀이 하나님이시구나 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한분이 아니시구나 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상하게 들리실 수 있겠습니다만, 이런 얘기에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신데, 다른 위격이 있다는 근거를 발견할 수 있는 겁니다. 물론 다음 시간에 살펴볼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라는 구절을 통해서 이 말씀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만, 일단 요한복음 1장 1절만 놓고 보면, 로고스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로고스가 하나님이시구나. 이렇게 이해해야 한다는 겁니다.
자 그래서 종합적으로 정리하자면, 요한복음 1장 1절 말씀에서부터 우리는 로고스이신 예수님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예수님이라고 하면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주로 떠올리는데, 그정도로만 생각하면 예수님을 정확하게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이 창조된 역사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만, 그 오랜 세월 동안 존재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면서 동시에 태초부터 존재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조직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존재하신 분이시면서, 영원 전에 출생하셨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교재 4페이지, 로고스 관련 참고 구절에 나와 있는 로고스와 구약 성경과의 연관성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시편 33편 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아멘.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다. 창세기 1장에서도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6일 동안 창조하시는데, 시편에서도 여호와의 말씀으로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 107편 20절 말씀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아멘. 말씀을 보내서 고치시고 위험에서 구원해주신다는 것인데, 여기서의 말씀도 요한복음에서의 로고스를 연상할 수 있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또 요한계시록 19장 1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이 피 뿌린 옷을 입고 계시는데, 그 이름이 무엇이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다 라는 것이죠.
자 이렇게 요한복음에서의 로고스, 즉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이 말씀이라는 존재가 구약성경과 굉장히 관련이 깊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이 로고스의 기원은 무엇입니까? 사도 요한이 1세기에 유행하던 이방 철학이나 사변적인 사상들이나 헬레니즘에 영향을 받아서 로고스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막 이런 저런 잡다한 사상에 영향받아서 로고스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에 기원을 둔 로고스를 있는 그대로 사용한 것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5페이지로 넘어가겠습니다. 2번 요한복음 1장 3절 말씀 다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아멘. 3절 말씀은 헬라어 원문을 의역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직역하자면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되었다. 그리고 된 것 중에서 그분 없이 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창세기 1장 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하늘들과 땅들을 창조하셨다고 말하지만 요한복음 1장 3절에서는 말씀이 없이는 창조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말씀이 없이는 안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창조주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왜요? 그분이 없이 된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씀이 증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 나와있는 참고 구절 말씀들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먼저 골로새서 1장 1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사도 바울이 무엇이라고 기록했습니까.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었다. 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심지어 만물이 예수님을 위해서 창조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존재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영광 그 자체, 창조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나머지 히브리서 1장 2절 말씀과 고린도전서 8장 6절 말씀 참고해 주시고요.
이제 6페이지로 넘어가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여기서 생명과 빛이라는 단어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비유적인 표현이면서 동시에,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핵심적인 단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생명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하게 다뤄보도록 하고요. 우선 빛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자면, 요한복음에서 빛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많이 등장합니다.
아래 참고 구절을 한절씩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1장 4절에서 로고스 안에 생명이 있었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요한복음 8장 12절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요한복음 12장 35절 말씀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성경을 읽다 보면 이분법적인 사고에 굉장히 친숙해집니다.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 선과 악. 이런 사고들에 친숙해지죠. 이러한 사고는 오늘날의 사고와는 맞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는 전체를 포괄하고, 서로 다른 것을 포용하고. 이러한 것들이 좋은 것처럼 포장합니다만, 복음의 관점에서 볼 때, 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분법적인 사고는 피할 수 없습니다. 빛에 거하는 사람은 어둠에 붙잡히지 않는 사람이고, 또 어둠에 다니는 사람은 빛에 다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빛과 어둠의 대조는 요한복음에서 처음 등장한 개념이 아닙니다. 이사야서 9장 2절 말씀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아멘. 흑암에 행하던 백성,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 이런 사람들은 영적으로 소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아주 아주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관점에서는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이제 7페이지로 넘어가서 빛과 어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장 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아멘. 자, 여기서 빛이 어둠에 비쳤다는 말씀은 햇살이 어둠을 밝혔다는 말씀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비유적인 표현으로 읽자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은 어떤 곳입니까. 영적으로 무지하고 타락하고 죄가 가득한 곳이며, 공중권세 잡은 자가 끊임없이 죄악을 저지르도록 유혹하고 지배하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빛을 비추어주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굉장히 기쁜 일이면서 동시에 소망을 품을 수 있는 본질적인 근거가 됩니다.
자, 이렇게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5절까지 내용을 통해 로고스가 누구이신가에 대해 살펴보았고요. 6절부터 8절까지는 세례 요한에 대한 소개가 등장합니다.
세례 요한의 사명은 무엇인가 하는 내용을 조금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요한복음 1장 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세례 요한이 누구입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성경을 잘 아시는 분들의 경우에 요한복음이 좀 이상하다. 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아래 참고 구절 마태복음 3장 1절에 보면, 세례 요한이라고 분명하게 나와 있는데, 요한복음에서는 그냥 요한이라고만 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요한복음의 저자가 누구입니까? 요한입니다. 이름이 같죠. 이런 경우에 뭔가 구분을 짓는다거나, 어떤 특별한 호칭을 붙인다거나, 이런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혼란을 주지 않을 수도 있을텐데, 사도 요한은 다른 어떤 설명도 붙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요한복음 1장 6절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직역한 내용을 보시면, 사람이 있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그의 이름은 요한.
이런 식으로 직역할 수 있는데요. 요한이 누구냐. 세례 요한이냐. 사도 요한이냐. 누구냐. 이런 것은 중요하지 않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저 이 요한이라는 사람이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요한은 로고스와 무엇이 다릅니까? 로고스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이지만, 세례 요한은 보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냥 사람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이 세례 요한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그 내용은 6페이지에 요한복음 1장 7절 말씀에 나타나 있는데요.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세례 요한이 보내심을 받은 목적이 무엇입니까? 증언하기 위해서. 무엇을 증언하기 위해서. 빛에 대해서 증언하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빛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에 따르면, 말씀, 즉 로고스를 증언하기 위해서 보내심 받았다는 것이죠.
물론 누가복음을 보면, 세례 요한이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났고, 아버지 이름이 사가랴였으며 사가랴도 제사장이었고, 뭐 이런 자세한 내용들을 알 수 있습니다만, 요한복음은 이러한 내용을 다 생략하고 한 가지에 초점을 맞추고 집중하고 있습니다. 무엇에 집중하고 있습니까? 증언. 증언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8절 말씀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세례 요한의 부모님이 누구고, 어디에서 태어났고, 어떻게 자라났고, 행색은 어떻고. 이런 이야기들을 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자세하게, 누가복음처럼 기록할 수 있었을텐데, 요한복음은 그런 내용을 일절 담아내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은 세례 요한을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 받은 사람,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사람, 그의 증언을 통해서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내심을 받은 사람. 이런 식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제 오늘 강의 내용을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오늘 강의에서 우리는 요한복음의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8절까지의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살펴본 내용에서 예수님이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는 로고스에 대해 살펴보았고요. 로고스께서 태초부터 지속적으로 계셔왔고, 로고스이신 예수님이 태초부터 선재하심으로써 창조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셨으며,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었고 그 생명이 우리들에게 빛이 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빛이신 예수님을 증언하기 위해서 보내심 받은 사람인 세례 요한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일반적인 사람과 같은 존재이지만,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았고, 그 보내심의 목적이 예수님을 증언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알아보았습니다. 다음주에는 요한복음 1장 9절부터 18절까지의 내용. 영접하는 자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첫 번째 강의 들으시느라 고생 많으셨고요. 한 주간 오늘 함께 공부한 내용들 묵상해 보시고, 궁금한 점 있으시면 언제든지 편하게 질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제가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영원 전부터 계셔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망의 그늘에 앉아 죽어가는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빛으로 이 땅에 오신 주님,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에 대해, 예수님에 대해, 그리고 성령님에 대해, 단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우리에게 주님을 더욱더 깊이 알아갈 수 있도록 지혜를 허락하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첫 강의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이번 한 학기 동안 주님을 알아가고자 하는 열정을 잃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을 붙잡아 주시고, 환경과 여건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한주간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크신 은혜 베풀어주시고, 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