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강 성전 청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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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함께 공부할 주제는 “성전 청결”입니다. 요한복음 2장 13절부터 22절까지의 내용인데요.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 아멘. 성전 청결 사건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이렇게 사복음서 전체에 기록되어 있는 굉장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신앙생활 오래하신 분들의 경우에는 이 사건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을 이미 다 알고 계실텐데요. 오늘 이 시간 성전 청결 사건에 대해서 평소보다 조금 더 깊이 살펴보는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교재 2페이지, 요한복음 2장 1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지난 시간에 살펴본 내용의 배경은 어디였죠? 갈릴리 가나였죠. 갈릴리 가나에서 어디로 바뀝니까? 배경이 예루살렘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특이한 점이 하나 있죠. 유대인의 유월절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요한복음에 유월절이 총 세 번 등장하는데요. 방금 읽은 2장 13절과 6장 4절,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11장 55절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하게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이렇게 총 3회 등장합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때가 유월절이었다. 이런 식으로 덧붙이는 방식으로 유월절을 넣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요한복음에서 유월절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요한복음의 구조를 분석할 때 유월절을 중심으로 구조를 분석합니다. 교재 2페이지 제일 아래에 있는 표를 보시면, 유월절을 중심으로 구조를 분석할 때 일곱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요.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은 첫 번째 부분 서론과 두 번째 부분 예수님의 등장까지 살펴보았죠. 그리고 오늘 살펴볼 내용이 바로 세 번째 부분이 되는데요. 첫 번째 유월절, 그리고 두 번째 유월절, 세 번째 유월절, 예수님의 부활과 결론 부분. 이렇게 나누어져 있습니다. 교재 3페이지 보세요. 유월절 구조와 관련해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시간과 분량에 있어서 차이가 크기 때문인데요. 내용 보세요.
요한복음은 11장 55절을 중심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전반부는 예수님의 사역 초기부터 마지막 유월절 직전까지의 일을 기록한다. 후반부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월절을 중심으로 활동하신 것과 수난을 당하고 부활하신 것을 기록한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시간으로 볼 때 예수님께서 세 번째 유월절에 이르기까지 최소한 2년 이상의 활동을 하셨지만, 세 번째 유월절을 전후로 예수님께 주어진 시간은 2주 정도였다.
그런데 분량으로 볼 때 요한복음은 세 번째 유월절(11:55)을 중간쯤에 위치시킴으로써 세 번째 유월절에 이르기까지 최소한 2년 동안 예수님의 활동을 위해서 절반 정도로(11장 분량), 세 번째 유월절을 전후로 해서 2주간 남짓 일어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위해서 절반 정도로(10장 분량) 복음서를 할애한다. 이것은 요한복음이 예수님의 마지막 유월절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자, 이렇게 세 번의 유월절로 구조를 나누면, 사도 요한은 세 번째 유월절을 전후로 해서 2주 정도 사이에 일어난 일을 무려 열 장에 걸쳐서 기록합니다. 그만큼 마지막 세 번째 유월절,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에 관해 엄청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요한복음의 전반부가 덜 중요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의 전반부와 후반부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반부가 없으면 후반부도 존재할 수 없죠. 또한 2년 이상의 활동을 열한장 분량으로 기록했다면, 하루도 쉬지 않고 공생애 사역을 감당하신 예수님의 사역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을 선택적으로 기록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 기록할 순 없으니까요.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전반부인 1장부터 11장까지의 내용은 선택적으로 기록한 굉장히 중요한 사건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래서, 지난 시간에는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신 큰 일이란 것이 무엇인지, 처음 표적을 통해서 보여주셨다고 했죠. 처음 표적을 통해서 예수님이 일반적인 사람이나 선생, 훌륭한 인물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시며 창조주이시라는 사실을 증명하셨고,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으며, 제자들에게 처음 표적을 보여주심으로써 믿음을 갖게 하셨고, 그 제자들로 하여금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게끔 선교적인 목적으로 훈련시키셨다는 사실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렇게 갈릴리에서 처음 표적을 보이시고 예루살렘으로 이동하십니다. 그런데 이 예루살렘 성전에 엄청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3페이지 아래부분, 2장 14절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확인해 보시죠. 2장 1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예루살렘 성전 안에 어떤 사람들이 있었습니까? 소, 양,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을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있었습니다. 앉아있었다는 말은 단순하게 앉아있는 모습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들이 성전 안에서 상주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이 부분을 조금 더 설명해 드리자면, 소와 양과 비둘기는 성전에서 바치는 희생 제사의 제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성전에서 제사드리고자 하는 사람들은 희생제물로 사용되는 짐승들을 데리고 오거나 아니면, 현장에서 돈을 주고 구입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당시에는 차도 없고 오토바이도 없고 자전거도 없었기 때문에 멀리서 오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희생제물을 직접 데려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거리가 먼 사람들은 성전에 와서 돈으로 희생제물을 구입해서 제사를 드렸던 겁니다.
자, 그래서 이렇게 희생제물을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거래하는 일이 빈번했는데, 문제는 유대인의 명절이 되면, 로마 제국 전역에 퍼져있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제사를 드린다는 겁니다. 그럼 희생제물을 구입하고자 하는 유대인들의 숫자가 당연히 많겠죠? 비수기에는 희생제물을 구입하는 일들이 적으니까, 동물들을 많이 준비해 놓을 필요가 없었겠지만, 성수기에는 어떨까요? 물량이 많이 많이 필요하겠죠.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따라서, 유대인의 명절이 다가오면 희생제물을 구입할 사람들의 필요를 예측해서 성전 안에 동물들을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이 데려다 놓았을 것입니다.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2장 15절 말씀 보세요.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다고 합니까? 네 가지의 행동을 하셨죠. 첫 번째,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셨습니다. 둘째, 양과 소를 성전에서 싹 다 쫓아내셨습니다. 셋째, 돈 바꾸는 사람들, 환전상들의 돈을 쏟으셨습니다. 넷째, 상을 엎어버리셨습니다. 자, 여기까지는 예수님의 행동이죠. 13절부터 15절까지는 예수님께서 하신 행동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어서 16절 말씀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이 사람들을 다 쫓아내신 뒤에 한 마디 하십니다. 1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아버지의 집,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처소를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조용히 기도하는 소리만 울려퍼져야 하는 거룩한 장소에서, 소가 음메 음메 계속 울고 양들도 계속해서 울어대고 있습니다. 이것이 정상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까? 통회하는 마음으로 자복하고 회개하고 눈물을 쏟는 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돈을 환전하고 동물을 사고파는 시끄러운 소리가 영적인 소리들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양과 소를 다 쫓아내시고, 돈을 제물로 바꿔주는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시고, 상을 엎어버리신 겁니다.
물론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서 너무 과한 것 아니냐. 굳이 그렇게까지 하셨어야 했는가. 이렇게 반문할 수 있겠습니다만, 사실상 예수님의 행동은 잔인한 행동까지는 아니었으며, 일반 백성들로 하여금 무슨 폭동을 일으킬만한 선동의 의미가 담겨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오늘날 도시에서 가축을 키우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채찍이라는 단어만 봐도 폭력적이라는 인상을 받을 수 있겠습니다만, 여기서 예수님이 만드신 채찍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맞았던 그 채찍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만드신 채찍은 노끈으로 만든 채찍이었고, 노끈 채찍을 만드신 목적은, 예수님을 화나게 만든 사람들에게 체벌을 가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양과 소를 성전에서 내보내기 위해서 만드신 것이었죠.
한번 상상해 보세요. 양이나 소가 성전 이방인 뜰에 가득 차 있는데, 이 양과 소를 성전 바깥으로 전부 다 내보내려면 어떻게 수신호로 소통하면 일이 진행되겠습니까? 오라이. 오라이. 하면 얘네가 나오나요? 그렇지 않죠. 얘네가 나오게 하려면 채찍으로 안내해줘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어쩔 수 없이 채찍을 만드신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환전상들의 돈을 쏟으시고 상을 엎으신 것은 주님의 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 행동을 다시는 하지 않도록 본보기를 보여주신 것이죠. 물론 그 돈을 빼앗지는 않으셨습니다. 엎어진 상은 다시 세우면 되는 것이고, 쏟아진 동전들은 다시 주우면 되는 거니까요. 어떻게 보면 되돌릴 수 없는, 그런 끔찍하고 잔인한 행동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교재 5페이지에 보시면, 참고 구절 표가 있는데요. 성전 청결 사건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 사건이라고 말씀드렸죠. 공관복음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거의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마가복음,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누가복음,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공관복음에 나타나는 성전 청결 사건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이죠. 어떤 말씀이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라는 말씀과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다. 라는 말씀. 두 가지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죠. 이에 반해 요한복음은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표현은 다른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내용 상으로는 거의 동일하다고 볼 수 있으니, 그렇게 불편하게 느끼실 필요는 없습니다.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을 본 제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요한복음 2장 1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우선 상황만 놓고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행동을 보고 그 자리에서 이 말씀을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제자들이 생각한 이 말씀은 시편 69편 9절 말씀인데요. 교재 6페이지에 보시면,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시편 기자가 자신이 대적들로부터 겪고 있는 무자비한 박해로 인해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모습이 나오는데요. 대적들이 시편 기자를 증오하는 주된 이유는 성전에 대한 시편 기자의 깊은 헌신을 그들이 이해하거나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시편 기자는 주의 집을 사모하는 열성이 나를 삼켰다 라고 말하는 것이죠. 성전을 위한 그의 열심이 대적들로부터 극심한 박해를 받고 곤욕을 치르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는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의 모습은 시편 69편 9절에서 탄식하는 이 시편 기자의 모습과 일치됩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성전을 향한 깊은 사랑이 내재되어 있었고, 예수님은 누구보다 성전의 역할에 대해서 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전이 어떤 역할을 하는 곳입니까? 성전의 역할은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예배가 드려지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올바른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성전을 향한 관심과 사랑은 그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의 극심한 반대를 불러 일으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도 요한에게 있어서 예수님께서 삼켜질 방식은 무엇입니까? 죽음이죠. 예수님의 관심과 사랑과 열정은 죽음으로 연결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은 믿는 자들에게 영적인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줍니다.
자, 이제 두 번째 파트, 예수님과 유대인들이 대화 나누는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8절부터 21절까지의 내용인데요. 표를 보시고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당신이 이 일들을 행하는데, 우리에게 무슨 표적을 보여주겠는가? /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이것을 3일 만에 세울 것이다. / 이 성전은 46년 동안이나 지었는데, 당신이 이것을 3일 만에 세우겠다는 말이냐? ”
자, 앞서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행동을 보고 시편 69편 말씀을 떠올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행동에 동의한 겁니까? 동의하지 않은 겁니까? 동의한 거죠. 하지만 이와 반대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행동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때 가장 먼저 예수님께서 어떤 권위를 가지고 이렇게 행동하시는지 묻습니다.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 달라는 겁니다. 표적을 보여 달라는 것이죠. 이러한 유대인들의 요구는 하나님께서 어떤 선지자를 보내셨다는 실질적인 증거를 보여달라는 요구입니다. 6페이지 제일 아래에 있는 참고 구절 표를 보시면, 서기관이나 바리새인, 사두개인,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표적을 보여달라고 여러 차례 요구한 적이 있죠.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목적으로 표적을 보여달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신 신적인 권위를 확인하기 위해서 보여달라고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들의 요구에 단 한번도 응하신 적이 없습니다. 능력이 없으셔서가 아니라 불필요한 증명이기 때문입니다. 표적을 보고 믿는 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죠.
제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주위 친구들을 전도하는 과정에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습니다. 하나님 보여줘봐. 보여주면 믿을게. 마치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주면 믿겠다 라는 말과 유사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시험하는 마음을 가지고 표적을 보여달라는 사람들에게 웬만하면, 굉장히 높은 확률로 기적을 보여주지 않으십니다. 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실제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죠. 그런 사례가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자, 그래서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님에게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하고, 또 일반적인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면 놀라운 표적들을 행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표적이 전부가 아닌 것을 몰랐던 것이죠.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유대인들의 요구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이것을 3일 만에 세울 것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나중에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공회 재판에서 예수님의 유죄를 입증하는 증거로 제시됩니다. 아래 참고 구절 마가복음 14장 57절에서 59절까지의 말씀 보세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 하여 이르되 /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 그 증언도 서로 일치하지 않더라”
그러니까 이 거짓 증언한 사람들도 그렇고, 거짓 증언하라고 시킨 사람들도 그렇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을 것이다. 라는 말씀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한 겁니다. 이따가 살펴보겠지만,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대답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내용을 표면적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성전을 허물라고 요청하고, 만약 그들이 그렇게 하면, 본인이 사흘 안에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고 약속하는 것으로 들립니다. 문자적으로 이 내용을 보면, 예수님의 요구는 굉장히 황당하고 말도 안 되는 요구로 보입니다. 그러니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정신 나간 말로 알아듣습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무려 46년 동안 건축한 이 성전 건물을 예수님이 3일만에 다시 지을 수 있다는 말을 믿지 못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죠.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면 당연히 정신 나간 소리로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무슨 수로 3일만에 성전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예수님은 하실 수 있겠습니다만, 성전 건물을 지어올리겠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3일 만에 성전을 세우시겠다는 말씀은 어떤 의미일까요.
요한복음 2장 21절 말씀을 보면, 저자인 사도 요한이 해설을 달아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대답하신 것은 아니에요. 그러면 오늘 본문 말씀인 요한복음 2장 13절에서 24절까지의 말씀 중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부분은 어디어디죠? 네. 16절과 19절이 전부입니다. 16절은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고, 19절은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이에요. 그리고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반문한 것에 대해서는 답변해 주지 않으십니다. 왜 답변해 주지 않으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이 부분은 해설이 답변을 대신합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성전인 자신의 몸에 관하여 하신 말씀이었다.
자, 그러니까 예수님은 3일 만에 성전을 짓겠다고 하신 말씀이 실제로 3일 만에 건물을 올리겠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에 대해서 말씀하신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어떤 조건입니까? 성전을 허물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습니다. 표적이라는 증거는 성전인 예수님의 몸을 허는 것을 조건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성전인 예수님의 몸이 허물어지면, 사흘 후의 성전이 재건될 것입니다.
자 그래서, 이 성전을 허는 것과, 사흘만에 부활하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표적으로서 주어진다는 사실이 요한복음 2장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표적이라는 단어가 요한복음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고 했죠. 아르케 세메이온. 처음 표적. 처음 표적이 갈릴리 가나에서 일어났다고 했는데, 처음 표적의 경우에는 사도 요한이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이 표적이라고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이 표적이냐 아니냐는 굳이 따질 필요가 없는 거죠. 그리고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표적들, 지난 시간 교재에 제가 일곱 가지를 넣어놓았는데, 사실 일곱 개의 표적 중에서 여섯 개의 표적은 확실하게 표적이라고 나와있습니다만, 나머지 한 개는 표적이라고 분명하게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 분명하지 않은 내용이 바로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만 놓고보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표적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사실 표적이냐 아니냐. 이런 구분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만 성경공부니까 다루는 겁니다.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자 이제 세 번째 파트, 제자들의 깨달음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2장 2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본인과 다른 제자들이 그 당시에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제자들은 대략 3년의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물론 요한복음 2장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 그리 좋아보이진 않습니다만, 제자들이 새롭게 깨닫게 된 사실과 본인들의 기억에 파묻혀 있는 그 일들을 대조해서 맞춰보지 않았다면, 예수님께서 성전으로 비유해서 말씀하신 내용이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중에 살펴보겠습니다만, 요한복음 14장에서 16장에 나오는 파라클레토스이신 보혜사 성령 하나님이 선물로 제자들에게 주어졌고, 성령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들을 생각나게 해 주시고,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명하시는 역사를 통해서 깨닫게 해 주십니다. 이런 내용은 교리적인 이야기로 많이 들어보셨겠습니다만, 요한복음에 나오는 성령론은 대체적으로 진리의 말씀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좀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만, 간략하게 살펴보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8페이지 제일 아래 참고 구절 내용 보세요.
요한복음 7장 39절 말씀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기 때문에 성령이 아직 제자들과 함께 하시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 것과, 함께 하시는 것은 다른 문제죠. 예수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2천년 전에 역사적으로 성육신하셨지만,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건 아니죠. 요한복음 1장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누구라고 했습니까? 로고스 예수님이시죠.
자 그래서, 원래는 성령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지 않을 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보혜사 성령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14장 26절,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성령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는 겁니다. 만약 이 말씀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예배를 드리면서 말씀을 듣고, 또 이렇게 성경공부하면서 말씀을 보지 않습니까? 이럴 때 말씀을 상고하는 과정 가운데서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을 때, 이 모든 과정이 누구와 관련되어 있다는 겁니까? 보혜사 성령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다는 겁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말씀을 듣고, 말씀을 이해하고, 말씀을 깨닫는 이 과정을 거치는 분들이라면, 성령 충만한 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성령으로 충만한 분이라고 볼 수 있는 겁니다. 반대로 찬양할 때는 죽어라 찬양하고 목이 터져라 찬양하고, 남이 볼 때 엄청 은혜롭게 찬양하는데, 말씀을 듣는 시간에는 졸거나 집중하지 못하거나 핸드폰 보면서 말씀을 거부하면, 성령으로 충만한 것입니까 아닙니까? 찬양을 아무리 열심히 한들 말씀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성령으로 충만하다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청년들이나 젊은 학생들 안에 이러한 부분들이 강조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청년들이나 학생들의 감수성을 건드리는 감미로운 찬양들, 이런 찬양들을 부르면서 본인들이 은혜받았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상 말씀을 듣기 시작하면 기절하죠. 의식을 잃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성령으로 충만하다고 볼 수 없다는 겁니다. 나머지 참고 구절은 개인적으로 읽어보시고요. 네 번째 파트인 부적절한 믿음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이 네 번째 파트는 요한복음 3장인 니고데모 단락의 도입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성전 청결 사건과 관련이 없어보일 수 있지만, 시기와 위치상으로는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재 9페이지 1번 표적과 믿음의 관계, 요한복음 2장 23절 말씀 보세요.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요한복음 2장 13절,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어떻습니까.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유월절에. 두 표현 상에는 차이가 있긴 있죠. 정확하게 유월절은 아닌 상황과 유월절인 상황. 시기 상으로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 거의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장소는 어떻습니까? 둘 다 똑같이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니까 갈릴리 가나 사건과는 확실히 구별되면서, 시기나 위치상으로는 여전히 유월절 예루살렘이라는 공통 분모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자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계시면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표적들을 행하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여러 가지 기적같은 일들을 행하셨다는 정도는 알 수 있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기적같은 일들을 통해서 무엇을 갖게 되었습니까?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떻게요? 표적을 보았기 때문에 믿음을 갖게 된 것이죠. 그렇다면 표적을 보고 믿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죠. 일단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에서도 하인들은 직접 표적을 체험했으나 예수님을 믿지 못했고, 또 성전 청결 사건에서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대놓고 표적을 먼저 보여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자 이렇게 믿음을 위해서 표적을 우선시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믿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나는 표적을 먼저 보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수도 있습니다. 가능성 자체를 아예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고 인도하실지는 하나님만 아시는 거니까요. 하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 요한복음의 관점에 따라 생각해 보면, 표적 먼저고 믿음이 표적 뒤에 따라온다. 라는 도식은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참고구절 요한복음 1장 12절 말씀 보세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표적을 봐야만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표적을 보지 못해도, 기적을 체험하지 못해도 예수님의 이름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부분에서 만족을 느끼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은 기적을 체험하던데요. 다른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를 풍성하게 받던데요.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한테는 잘 주시던데요. 왜 저한테는 안 주시나요. 이런 고민을 할 수 있습니다만, 아주 아주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데 있어서 표적과 기적은 필수조건이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님들에게 이런 기적 같은 일들을 보여주시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섭섭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신 그런 기적이 없어도 믿을 수 있는 굳건한 믿음을 주셨음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자 그래서, 표적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합니다. 겉모습만 보면 믿음이 불타오르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요. 하지만 예수님은 이 사람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셨다고 합니까? 10페이지. 요한복음 2장 2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예수님께서 예수님 자신의 몸을 믿는 사람들에게 맡기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왜요? 사람들이 믿는다는데 왜요?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믿음이 가짜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 말씀을 잘 보면, 아예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지 않고 거부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애매하게 믿다가 떠난 사람들도 있었고, 믿은 줄로 알았지만 진정한 믿음이 아니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예수님 당시에만 존재했던 일들이 아니라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모습들입니다.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른 종교지도자들과는 다르게 아첨하는 말에 속아 넘어가거나 칭찬하는 말에 유혹되거나 순진하게 사기당하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아십니다. 그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가짜로 회심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의탁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반대로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 자신을 의탁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제자들과는 동고동락하기도 했고, 삭개오의 집에 머물기도 하셨습니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은 그 사람의 속을 정확하게 읽고 파악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진심으로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만 자신을 맡겨 주십니다.
자 그래서 모든 사람을 아시는 예수님이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은 어떤 증인이나 증언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증인이나 증언이 왜 필요합니까?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그 여부를 객관적으로 증명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만큼은 증인이나 증언이 필요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착각하면 안 되는 것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말하는 증인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구주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 뿐이지, 우리가 알기 때문에, 그것이 맞다. 이런 식의 증언은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어느 누구의 증언도 필요로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자 이렇게 오늘 제 6강 요한복음 2장 13절부터 25절까지의 내용을 살펴보았는데요. 오늘 나눈 내용들과 문제들 한주간 묵상하시고 복습하시면서 좀더 깊이있게 예수님을 알아가시는 귀한 한주 보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제가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시어, 독생하신 하나님께서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주님의 몸을 대속제물로 우리에게 주시고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영생을 허락하시니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어 공생애 기간동안 어떤 사역을 감당하셨으며, 어떤 말씀을 주셨는지, 요한복음 말씀을 묵상하는 동안 더욱 깊이 있게 알게 하시며, 성령하나님, 우리 모두에게 지혜와 명철을 허락하여 주셔서, 말씀을 온전히 깨달으며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 우리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번 한 주간도 생명의 말씀을 묵상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