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강 첫 표적의 의미와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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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까지 4주에 걸쳐서 요한복음 1장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요한복음 2장 1절부터 12절까지의 내용을 살펴볼텐데요. 본문 말씀을 저와 한절씩 교독하도록 하겠습니다. ~~~.
우리가 보통 성경 읽을 때 장과 절이 구분되어있다는 점에서 알게 모르게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뭔가 장별로 각각 구분되어 있고 또 분리되어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죠. 예컨대, 2장 말씀을 읽으면, 2장 말씀은 2장 1절부터 시작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물론 구조적으로 구분이 필요한 부분도 있습니다만, 문맥상 연결되는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절로 구분해 놓았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다른 내용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죠. 제가 왜 이런 설명을 드리는가 하면,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내용은 요한복음 1장 50절과 51절에 나오는 내용과 연결됩니다. 교재 3페이지에 있는 참고구절 요한복음 1장 50절과 5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아멘.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만나셔서 하신 말씀이었죠. 이것보다 더 큰 일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더 큰 일”이 요한복음 2장,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첫 번째 사건인,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에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더 큰 일이 과연 어떤 일인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요한복음 2장 1절에서 2절 말씀을 보시면, 첫 표적이 일어난 배경이 소개됩니다. 요한복음 2장 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요한복음 1장에서 이튿날이라는 말이 몇 번 등장했죠. 그리고 2장에서는 사흘째 되던 날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교재 3페이지에 보시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첫 번째 주간을 표로 넣어놓았습니다. 지난주에 교재에 있던 내용과 동일한 내용인데요. 표를 보시면, 가나 혼인 잔치는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관한 내용 중에서 일곱 번째 날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일곱 번째 날이라는 것이 100퍼센트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학자들마다 여섯 번째 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사흘째 되던 날이 몇 번째 날이냐, 예수님 공생애 사역의 7일차냐 6일차냐. 뭐 이런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경공부니까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자 그래서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었다고 합니다. 보통 우리가 이 내용을 기억할 때 가나 혼인 잔치라고 기억합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2장 1절에 기록된 대로 표현하자면,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습니다. 물론 가나라는 동네가 갈릴리 지역 안에 있는 동네이기 때문에, 갈릴리를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상관없지 않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꼭 그러지만은 않습니다. 2페이지에 참고 구절 갈릴리 내용을 보세요. 우선 “갈릴리”라는 지명은 헬라어로 갈릴라이아입니다. “갈릴라이아”라는 발음을 우리말로 음역한 것이 갈릴리입니다.
자, 그래서 이 갈릴리라는 지역이 어떤 지역인가 하면, 이스라엘의 통일 왕국 시대에 솔로몬이 두로의 히람 왕에게 갈릴리의 성읍 스무 개를 주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을 솔로몬 왕이 자의적으로 준 것이죠. 그래서 이 갈릴리 지역이 부분적으로 이방인의 소유가 된 겁니다. 그러다 보니 선민사상이 강한 이스라엘 사람들, 특히 유대인들이나 종교지도자들의 입장에서 갈릴리라는 지역은 굉장히 천한 지역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이러한 내용은 이사야서 9장 1절에도 등장하는데요. 그만큼 굉장히 뿌리 깊은 부정적인 인식이 담겨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 내용은 강의 말미에 조금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래서, 결혼 잔치가 갈릴리 가나에 있었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혼례에 초청을 받습니다. 여기서 혼례에 초청을 받은 제자들은 누구일까요? 열두 제자일까요? 요한복음 문맥만 놓고 보면, 열두 제자는 당연히 아닐 겁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요한복음 1장 내용에 근거해서 생각해 보면, 몇 명의 제자를 생각할 수 있습니까? 1번 4명, 2번 5명, 3번 6명. 몇 명이죠? 정답은 2번 다섯 명입니다. 어떻게 다섯명이죠? 안드레, 시몬 베드로, 빌립, 나다나엘, 익명의 제자. 이렇게 다섯 명이죠.
그래서 혼례에 참석한 예수님 일행은 총 일곱 명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제자 다섯 명. 이렇게 일곱 명이 혼례에 참석하게 되는데, 이렇게 예수님 일행 전체가 초청 받았다는 것은 혼례를 치루는 가족들과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살펴볼 내용 중에서 다루지 않을 내용이긴 합니다만, 3절에서 마리아가 이렇게 말하죠.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마리아가 혼례를 치루는 가족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이렇게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없을 겁니다. 네.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마리아가 성향상 오지랖이 넓은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니면 어려운 사람을 만났을 때 못 본 척하고 지나칠 수 없는, 선한 사마리아인 스타일이어서 도와주자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00퍼센트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문화적으로 볼 때 어느 정도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는 얘깁니다.
자 그래서,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에 대해서 알아보려면, 1세기 혼인 잔치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결혼식은 예식장에서 할 경우에 후딱후딱 끝나지 않습니까? 1시간도 안 돼서 끝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결혼식이 아무리 일찍 끝난다고 하더라도 피로연이 7일 동안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결혼식을 하루 안에 끝낸다고 해도 돈이 한두푼이 아닌데, 무려 일주일 동안 피로연을 열면 돈이 정말 많이 들겠죠. 그래서 이 당시에는 가족의 재산에 따라서 재정적으로 풍족한 사람은 마을 사람 전체를 초대할 수도 있고, 좀 부족하다 싶으면 관계가 있는 사람들, 아주 가까운 지인과 친척들만 초대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날과 또 다른 점은, 혼례에 청함을 받으면, 초대를 받으면, 개인적으로 그 가족을 싫어하더라도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한다는 겁니다. 요즘은 뭐 그런 거 없죠. 관계가 서로 좋지 않으면 애초에 청첩장도 보내지 않습니다. 관계가 정말 좋지 않을 경우에는 모바일 청첩장조차 보내지 않죠. 하지만 이때는 그런 거 없습니다. 결혼하는 가족이 와달라고 초대하기만 하면, 말 한마디만 하면 초대 받은 사람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집니다. 좋든 싫든 그냥 무조건 가야 되는 겁니다. 뭔가 비인격적인가요? 네. 비인격적이어서 이런 문화가 생긴 것이 아니라 유대 사회에서는 결혼식과 축하 잔치하는 이 기간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이러한 혼례 문화가 정착된 겁니다.
자 그래서 이러한 상황에 예수님은 갈릴리 가나라는 동네에서 진행되는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아서 참석하시는데요. 이제 본격적으로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장 3절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의 육적인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고, 결국 예수님은 이 사람들을 도와주시게 됩니다. 2장 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예수님께서 포도주가 없는 상황을 해결해주시겠다고 결심하셨을 때, 때마침 그곳에 무엇이 있었다는 겁니까?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 개가 있었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인의 정결 예식이라는 단어를 먼저 살펴보아야 하는데요. 아래 참고 내용을 보세요. 장로들의 전통이 마가복음 7장 3절과 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장로들의 전통이란 무엇입니까? 대표적으로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전통을 꼽을 수 있는데요.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당시에 상하수도 시설이 오늘날처럼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물을 미리 길어와서 저장해 놔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 사용하는 물은 정결 예식만을 위한 돌항아리에 따로 저장해 놓았습니다. 물은 다양한 용도로 사용할 수 있겠습니다만,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 손 씻는 물을 따로 돌 항아리에 담아놓는 것이죠.
자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정결 예식을 위해 놓여있는 돌 항아리 여섯 개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말씀합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돌 항아리 여섯 개에 들어가는 물의 용량이 대략 500리터에서 750리터 정도 되는 어마어마한 양인데요. 여기서 학자들마다 계산법이 다른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정확하게 몇리터라고 말할 순 없습니다. 미니멈 500리터에서 맥시멈 750리터 정도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뭐 500리터든 750리터든 양으로 따지면 어마어마한 양입니다. 예컨대, 중형차 세단 기준으로 트렁크 공간이 한 450리터 정도 된다고 하니까요. 양으로 따지면 굉장히 많은 물이 담겨 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자 그래서 예수님께서 표적을 일으키신 방식은 굉장히 간단합니다. 4페이지 제일 아래 내용, 요한복음 2장 7절과 8절에 그 방식이 나와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비어있는 돌항아리 여섯 개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명령하시고, 그 다음에 어떻게 하십니까? 교재 5페이지.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이것이 예수님께서 표적을 일으키신 방법입니다. 이게 전부에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지금 이 상황은 예수님 본인이 돌 항아리에 직접 물을 담아주신 것도 아닙니다. 하인들에게 물을 채우라고 명령하셨어요. 그리고나서 어떻게 하십니까? 돌항아리 여섯 개에 가득 채워진 물에 예수님의 손을 담군 것도 아닙니다. 항아리 뚜껑에 손을 얹고 안수하신 것도 아닙니다.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기도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행동으로 보이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두 가지 명령을 내리신 것뿐입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워라. 잔치 주관자에게 가져다 주어라. 정말 단순하죠. 이런 말을 누가 못합니까. 우리도 이런 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우리의 말과 차원이 다르죠.
예수님의 말씀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말씀으로 풍랑을 잔잔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니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는 것은 별 것도 아닌 것처럼 하실 수 있으시겠죠. 다만 우리가 볼 때, 쇼맨쉽이 결여되어있기 때문에, 이렇게 명령하시는 행위 자체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는 겁니다.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하인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물을 가득 채우고 돌항아리 여섯 개를 옮깁니다. 2장 9절 말씀을 보시면, 연회장이 포도주를 맛보았다고 하죠. 연회장이라는 단어는 직역하면 식탁의 지배자라고 읽을 수 있는데요. 혼례 잔치가 열린 장소를 전체적으로 관리하는 책임자를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이런 혼인 잔치를 진행하고 관리하는 데 있어서 전문가라는 말이죠. 이 사람이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았는데, 물로 된 포도주의 품질이 어땠습니까? 2장 1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전문가가 맛을 보았을 때, 처음에 먼저 냈던 포도주보다 훨씬 더 좋은 포도주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 겁니다. 일반적으로 연회에서의 주최측은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포도주를 먼저 주고, 사람들이 취하면 품질이 떨어지는 포도주를 줬다고 합니다. 취하면 취할수록 미각이 둔해지니까 취기가 오른 뒤에 약간 떨어지는 포도주를 줘도 티가 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했던 모양입니다. 요즘 이런 식으로 하면 난리나겠죠?
자 그런데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서 이런 말을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1세기 팔레스타인의 혼인잔치에서 모든 음식을 공급하는 책임은 신랑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즘이랑 완전히 다르죠. 요즘은 결혼하면 업체를 통해서 두당으로 계산해서 알아서 처리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음식에 문제가 있으면 일반적으로 업체에 항의해서 책임을 묻지, 신랑 신부에게 책임을 묻진 않습니다. 물론 음식이 어떻다 저떻다 말은 할 수 있겠습니다만, 예수님 당시에 문화는 신랑 신부가 음식에 있어서 모든 공급의 책임을 졌기 때문에 신랑이 연회장에게 칭찬을 받은 겁니다. 포도주를 줄 때 처음에 좋은 거 주고 나중에 안 좋은거 주는데, 처음에 좋은거 주고 나중에 더 좋은 최상의 포도주를 주었다는 것이죠.
자, 여기까지 표적이 일어난 배경과 과정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물이 포도주로 바뀐 기적, 어떻게 보면 굉장히 단순하고 친숙한 이야기죠. 하지만 이 내용은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됩니다. 제가 지금 소개해 드리는 내용은 굉장히 은혜롭게 들릴 수 있고, 어쩌면 지금까지 신앙생활하시면서 이렇게 해석하는 설교를 몇 차례 들어보셨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적인 해석이 아닌 잘못된 해석을 소개해 드리는 거니까, 그럴듯하게 들리시더라도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이시면 안 됩니다. 신앙생활하면서 흔히들 착각할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6페이지 위에 있는 내용 보세요. 가장 일반적으로 물이 포도주로 변한 표적에 대해서 대체되었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ㅅ브니다. 물이 포도주로 바뀌면서 물이 무엇을 상징하고 포도주가 무엇을 상징하는데 물에 대한 상징이 포도주에 대한 상징으로 바뀐거다. 예수님께서 상징적인 표적을 행하신 것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대체 이론이라고 부르는데, 대체 이론에도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 대체 해석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대체되었다는 해석입니다. 유대교 정결 예식을 위해서 준비되어있는 물이 최상의 포도주로 대체되었기 때문에, 이전의 유대교에서 지키고 있던 모든 종교 제도와 관습과 절기들은 더이상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구약과 유대교를 기독교로 대체하셨다고 해석하기 때문이죠.
두 번째 대체 해석은 불완전함에서 완전함으로 대체되었다는 해석입니다. 돌항아리가 여섯 개 있었는데, 여기서 6이라는 숫자는 불완전한 숫자이고, 이 불완전한 숫자가 유대교 정결 예식이 구원을 얻는 데 불완전하다는 것을 암시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불완전한 숫자를 예수님께서 완전함으로 바꿔주신다는 것이죠.
이어서 세 번째 대체 해석은 율법에서 복음으로의 대체입니다. 레온 모리스라는 학자는 이 표적이 예수님께서 유대주의의 물을 기독교의 포도주로, 율법의 물을 복음의 포도주로 바꾸며,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는 물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부요하고 충만한 영생의 포도주로 바꾸어 주셨다고 주장합니다.
네 번째 해석은 옛 시대에서 새 시대로, 옛 생명에서 새 생명으로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대체되었다는 해석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런 느낌으로 해석하는 것이죠.
마지막 다섯 번째 해석은 열등에서 우월로 대체되었다는 해석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중에 만드신 포도주가 좋은 포도주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 시작된 기독교가 유대교보다 훨씬 더 우월하다는 겁니다.
자, 이렇게 대체 해석에 대한 다섯 가지 내용을 살펴보았는데요. 성경을 해석할 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불분명하다. 가능성이 있다. 이런 식으로 가능성을 열어놓는 구절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구절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상징을 부각시키지 않는데, 억지로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해서 그렇게 해석해야 된다고 강요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그렇다면, 이 대체 해석이 왜 잘못된 것일까요?
대체 해석을 주장하는 학자들 대부분은 유대교의 정결 예식에 사용되는 돌 항아리 여섯 개를 문제 삼습니다. 예수님께서 단순하게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것이 아니라, 유대교 정결 예식에 사용되는 돌 항아리 여섯, 손 씻는 물을 저장해 놓은 이 돌항아리 여섯 개의 물을 바꾸셨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죠. 자 그런데 여기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존재합니다.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것은 명백한 팩트이지만, 대체 해석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문제 삼는 이 돌항아리 여섯 개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만약 항아리에 담겨 있는 물이 유대교라면, 항아리는 뭡니까? 유대교의 틀이자 형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만 유대교고 항아리는 유대교가 아니다? 이렇게 볼 수는 없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표적을 상징적으로 해석하려면 어떤 기적이 일어나야 합니까? 물이 포도주로 바뀌고 항아리도 다른 물체로 바뀌어야만, 락엔락 통으로 바뀐다던가. 뭐 이런식으로 물도 바뀌고 하앙리도 바뀌고. 이래야만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타당하게 여길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보면 돌항아리는 어떻습니까? 어떤 변화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돌항아리는 그대로 있죠. 담겨 있는 물만 포도주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모순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돌항아리와 무관하게 이 표적을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대체 해석들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문제가 있는가 하면, 구약과 신약, 율법과 복음을 단절시킨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이나 율법을 폐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율법과 은혜는 대조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만약 대조적인 관계에 있다면, 오늘날 우리가 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선 안 되겠죠. 예수님께서 폐기하신 것을 계속해서 받아들일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상징적인 해석에는 크게 두 가지의 오류가 있기 때문에 아무리 은혜롭게 들리더라도 그렇게 받아들여선 안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표적에 대해서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요한복음 2장 11절 말씀 보세요.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일을 무엇이라 부르고 있습니까? 첫 표적이라고 부르죠. 그런데 여기서 첫 표적이라는 번역은 의역된 표현입니다. 원어를 있는 그대로 옮기자면, 첫 표적이라는 말은 표적들 중에서 처음이라고 읽어야 됩니다. 표적들 중에서 처음.
그런데 우리말 성경에서 “첫”이라는 말을 보면, “첫 번째” 또는 숫자 1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헬라어로 숫자 1과 처음이라는 말은 다른 단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요한이 이 표적을 가리켜서 첫 표적, 아르켄 톤 세메이온이라고 기록한 것에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처음 표적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첫 표적을 보여주신 목적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첫 표적을 보여주신 목적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고 알려주기 위한 목적으로 행하신 것입니다. 교재 7페이지에 보시면 표가 나와있는데요.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초기 공생애 사역을 굉장히 자세하게 서술합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디테일이 담겨있다고 보긴 어렵지만, 그래도 이정도면 굉장히 자세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 그래서 첫째 날부터 시작해서 이튿날, 또 이튿날, 이튿날, 사흘 되던 날. 이렇게 다섯 번에 걸쳐서 날이 언급됩니다. 요한복음 1장 19절에서 2장 11절까지만 이런 식으로 표현됩니다. 그러니까 어떤 날, 어떤 날, 어떤 날. 이렇게 나오는 부분을 하나의 표로 정리해 보면 이런 식으로 구조를 분석할 수 있습니다. 누가 증거했느냐. 그 사람이 무엇을 증거했느냐. 증거한 내용은 무엇이냐. 이렇게 나눠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첫째 날에는 세례자 요한이 그리스도냐고 질문을 받죠. 그러자 세례자 요한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나는 그저 소리이다. 이렇게 말하자, 질문이 생기는 겁니다. 아니 그럼 그리스도는 대체 누구인가? 그러자 이튿날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증거합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내 뒤에 오시는 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그 이튿날에는 세례자 요한과 안드레가 각각 하나님의 어린양, 메시아. 이렇게 증거하고, 그 다음 날에는 빌립과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이렇게 증거합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내용이죠. 그리고 나서 사흘 되던 날이 요한복음 2장 1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인데, 여기에서 바로 첫 표적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첫 표적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당연히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여기에 관심이 있는 겁니다.
자 그래서, 표적들 중에서 처음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세 가지로 나눠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첫째로,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부분인데요. 앞서 살펴보았듯이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것, 유대 정결 예식을 위해서 따로 구별해 놓은 돌항아리 여섯 개에 물을 담았는데 포도주로 변화되었으니 이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이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표적의 강조점은 물이나 포도주 같은 것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리스도께서 누구이신가. 이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자 그래서, 예수님은 이 표적을 통해서 자신을 누구로 나타내셨습니까?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함으로써 만물이 예수님께 복종한다는 사실을 나타내셨습니다. 이러한 기적은 창조주만이 할 수 있는 일이죠. 앞서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했던 여러 가지 내용들, 로고스이시며, 독생자이시며, 그리스도이시다. 이러한 증거들에 대해서 표적을 보여주심으로써 증거가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처음 표적을 통해서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2장 11절 말씀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니.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처음 표적을 통해서 피조물이 예수님의 권세에 복종한다는 사실을 증명하셨다고 했죠.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증명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봐봐. 됐지? 맞지? 이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엄청난 표적을 통해서 예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는 겁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이 표적을 통해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2장 1절부터 11절까지의 내용 중에서 제자들이 언급되는 부분은 요한복음 2장 2절에서 한번 언급되고 11절, 12절에 언급되는 것이 전부입니다. 표적이 발생하는 과정에서는 아예 등장하지 않죠. 여기서 아이러니한 점은, 표적이 일어나는 과정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하인들의 경우에는 그들이 믿었다, 믿지 않았다 이런 말이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을 채워라. 갖다 줘라. 말씀하셔서 그 말씀대로 자기 손으로 돌항아리에 물을 담아서 갖다줬는데 그게 최상급의 포도주가 됐다면, 어떻겠습니까. 온몸에 소름이 돋지 않겠습니까? 내가 담은 건 물인데, 물이 아닐 수가 없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고 화들짝 놀랄 겁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표적을 체험한 하인들의 경우에는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았을텐데, 요한복음 2장에서 하인들이 믿었다는 내용은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등장한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었다는 진술이 나오죠. 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의 믿음이 단순한 믿음에 그쳐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첫 표적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증인으로 만들기 위한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어떠어떠한 분이다. 라고 고백하기는 했으나 그들에게는 확신이 가득한 믿음이 필요했고, 확신이 넘쳐나는 믿음은 증인으로서의 사명으로 연결되어야만 합니다. 나만 믿으면 돼. 나만 믿고 천국가면 돼. 이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증인의 사명으로 연결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전도폭발 훈련받은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사역부에 오랫동안 몸을 담고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증인된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첫 표적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첫 표적과 갈릴리에 관해서 간단하게 살펴보고 오늘 강의를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해당 내용을 제가 읽으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1. 첫 표적의 갈릴리 관련 강조
사도 요한은 첫 표적이 일어난 지역을 단순하게 ‘가나’라고 부르지 않고, “( 갈릴리 )의 가나”라고 부른다. 요한은 단순히 가나라는 마을을 언급하는 것을 넘어 가나의 지리적인 위치를 강조한다. 특히 요한복음 4장 54절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 (갈릴리) ’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라고 말함으로써 가나를 빼고 “ (갈릴리)”만 언급한다. 이것은 처음 표적과 두 번째 표적이 모두 ‘ (갈릴리) ’에서 행하여 졌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결국 핵심은 ‘가나’가 아닌 ‘갈릴리’이다.
아래 표를 보시면 갈릴리라는 지명이 반복해서 등장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그렇다면 갈릴 리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2번 내용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2. 첫 표적의 갈릴리 관련의 의미
요한복음의 첫 표적은 시작(요 2:1)과 끝(요 2:11)에서 갈릴리 가나를 반복하여 말함으로써 inclusio(수미상관 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후에 다시 한번 이 표적이 갈릴리 가나에서 있었다고 언급된다(요 4:46). 그렇다면 사도 요한은 어떤 목적으로 갈릴리를 이토록 강조하는 것일까?
1) “갈릴리”에 대한 1세기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미지
갈릴리는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당시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로 이해되어왔다. 갈릴리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메시아 신분을 부정하는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으며, 갈릴리 사람과 갈릴리 지역도 당시 사람들에게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다.
참고 구절 보시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갈릴리에서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이런 식으로 갈릴리 출신이라고 하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지 관계 없이 그냥 끝입니다. 덮어놓고 그냥 안된다는 겁니다. 답을 정해놓고 무조건 아니라고 하는 거죠.
자 그렇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갈릴리에 대해서 이렇게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예수님이 알고 계셨을까요. 모르고 계셨을까요. 당연히 알고 계셨겠죠.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제자들도 다 갈릴리 출신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상황에서 첫 표적을 갈릴리에서 행하신 거죠. 그렇다면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그 목적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2) 기독론적 변증 목적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갈릴리에서 그리스도가 나올 수 없다고 믿었다. 그런 상황에서 ‘갈릴리 사람’ 예수가 처음 표적을 행하여 자신을 그리스도로 나타내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더욱 충격적인 것은 ‘갈릴리 사람’ 예수가 이 일을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갈릴리’에서 행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역설이다. 역설은 강조의 효과를 극대화시킨다. 예수님은 이러한 역설을 통하여 메시아 출원 사상에 대한 유대인들의 오해를 교정하고 자신의 메시아 신분을 변증하였다.
예수님께서 처음 표적을 행하신 것에는 유대인들의 부정적인 선입견을 교정하고 또 예수님의 메시아 신분을 나타내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겁니다. 갈릴리 사람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갈릴리 출신 제자들을 데리고 메시아 다운 표적을 행한 것이죠.
3) 선교적 차원의 목적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표적을 행하신 것은 그들을 증인으로 세우기 위함이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선교적인 목적을 염두에 두신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처음 표적을 체험한 제자들은 특별한 점이 있다. 처음 표적까지 등장하는 제자는 안드레, 시몬 베드로, 빌립, 나다나엘, 그리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제자이며, 열두 제자에 대한 처음 언급은 이후에 등장한다.
위 내용에 따라 첫 표적을 지켜본 제자들은 모두 ( 갈릴리 )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표적의 장소가 갈릴리라는 사실은 예수님의 선교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행하신 표적으로 인해 천시받던 갈릴리 출신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증인이 되었다. 또한 멸시받던 갈릴리가 예수님의 표적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는 땅이 되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사역이 갈릴리에서 시작해서 갈릴리에서 끝나는 것 역시 이러한 갈릴리의 긍정성을 강화한다. 그러므로 첫 표적으로 인해 제자들은 존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 모두에게 갈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 어떠한 땅도 영광스러운 땅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다. 첫 표적이 갈릴리에서, 갈릴리 사람에 의해, 갈릴리 사람들 앞에서 행하여짐으로써 신분과 지역을 뛰어넘는 선교의 놀라운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4) 교육적인 목적
처음 표적이 갈릴리에서 시행된 것에는 교육적인 목적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처음 표적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교육하기 위한 것이다. 한때 제자들도 갈릴리에서 선한 것(그리스도, 선지자)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을 만난 뒤에 예수님을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으로 고백했다. 이어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제자들 앞에서 처음 표적을 행하셨다. 이로 인해 제자들은 자신들의 고백에 대해 더욱 큰 확신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처음 표적은 교회 공동체를 교육하기 위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갈릴리와 갈릴리 사람을 낮추어 보았고, 특히 갈릴리에서 그리스도가 나올 수 없다고 확신했다. 따라서 초기 교회 공동체에 유대인 성도들이 있었다면, 이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을 것이다. 요한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교육적인 목적으로 갈릴리 사람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증거하는 표적을 선별하고, 그 중에서도 특히 갈릴리에서 시행되어 예수님의 메시아 신분을 더욱 확증하는 이 처음 표적을 기록하였을 것이다.
자, 이렇게 부록 내용, 첫 표적과 갈릴리에 대한 내용까지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한 주간 시간 되실 때 교재에 있는 내용을 천천히 묵상하시면서 처음 표적을 통해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알려주시고,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며, 제자들의 믿음을 강화시키시고 제자들을 예수님의 증인으로 삼아주시는 우리 주님의 인도하심을 더욱 깊이 묵상하시면서 깊이 알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표적들 중의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일으키신 주님, 주님의 의도와 목적에 대해 깊이 상고하게 하시고, 주님의 어떤 분이신지 알아가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인생을 살아가며 주님을 깊이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무분별하고 맹목적으로 표적을 구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지만, 예수님께서 처음 표적을 행하신 목적을 기억하며,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하시고, 표적을 체험한 제자들과 동일하게 우리들도 주님을 더욱 깊이 믿으며, 제자된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를 원하오니, 주여 우리 모두에게 지혜와 능력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이를 통하여 우리가 속해있는 가정과 공동체 가운데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우리의 삶이 되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