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강 38년된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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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기도하고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나눌 내용의 제목은 38년된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입니다. 요한복음 5장 1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인데요. 한절씩 교독하겠습니다. ~~~ 아멘.
열 여뎗 절의 말씀을 네 파트로 나눠서 살펴볼텐데요. 먼저 첫 번째 파트는 38년 된 병자가 등장하는 배경에 관한 내용입니다. 요한복음 5장 1절 말씀 보세요. 그 후에 유대인들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그 후에”라는 말씀을 보면 어떤 내용이 떠올라야 할까요. 당연히 4장의 내용을 떠올릴 수 있겠죠. 4장에 어떤 인물들이 등장했죠? 사마리아 여인, 사마리아 사람들, 갈릴리 사람들, 왕의 신하. 이런 사람들이 등장했죠. 지역으로 말하자면 사마리아 지역과 갈릴리 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 후에라는 말은 어디에 있었던 일 이후를 말하는 것일까요? 사마리아입니까 갈릴리입니까? 당연히 갈릴리겠죠.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은 갈릴리에서 얼마나 머무셨는지, 그 기간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갈릴리에서 머무시다가 예루살렘으로 이동하셨다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이동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의 명절이 되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어느 지역에 살든지 상관없이 예루살렘에 갈 때에는 항상 예루살렘에 올라간다고 표현합니다. 예루살렘이 고지대이기 때문에 올라간다고 표현하는 것이 당연해 보이지만, 더 높은 지대에 살더라도 예루살렘에 올라간다고 표현합니다.
자 그래서 지난 학기에 살펴본 내용을 한번 떠올려 보세요.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할 때 유대인의 명절 중에 어떤 절기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기록했다고 했습니까? 유월절이죠. 요한복음에 유월절이 몇 번 등장한다고 했습니까? 세 번 등장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5장 1절에서는 유월절이 나오지 않지만 유대인의 명절이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이 명절은 어떤 절기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네. 정답부터 말씀드리자면 이 명절은 구체적으로 어떤 명절인지 알 수 없습니다. 명절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헤오르테인데요. 학자들은 이 명절에 대해서 지금까지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이 명절이 초막절 또는 유월절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고, 에스더에서 등장하는, 유대인들이 경험한 구원을 기념하기 위해서 제정된 부림절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의견에도 합리적인 근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도 요한이 어떤 명절을 염두에 두고 5장 1절을 기록했는지 알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3페이지로 넘어가서요. 요한복음 5장 2절 말씀 보세요. “예루살렘에는 양의 문 곁에 히브리어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에 행각 다섯이 있었다.”
이 말씀은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 5장의 배경을 카메라로 확대하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가장 먼저 예루살렘을 등장시키고 예루살렘에 있는 양의 문을 언급하고 양의 문 근처에 있는 베데스다라고 불리는 연못을 소개하죠. 그리고 그곳에 행각 다섯 개가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이 행각 다섯 개가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이죠.
이어서 요한복음 5장 3절 말씀 보시면, 이 행각들에는 수많은 병자들, 맹인들, 다리 저는 자들,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특별한 날에만 모여서 누워있던 것은 아니고 베데스다 연못 근처에 계속해서 누워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대괄호 안에 있는 내용이에요. 쾨스텐베르거라는 학자는 누워있었다 다음에 있는 내용이 성경 원문에는 들어가 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고요. 고든 피라는 학자 역시 이 의견에 찬성합니다. 학자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원어로 봤을 때, 대괄호 안에 있는 단어들 중에 무려 일곱 개의 단어가 요한이 사용하지 않는 단어라고 합니다. 이런 점에서 요한이 직접 저 내용을 기록한 것이 아니고 어떤 편집자가 저 내용을 추가로 기록했을 것이라는 얘기에요. 하지만 이것 역시 확실하게 알 수 없습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요한이 대괄호 안의 내용을 기록하지 않았다고 증명할 방법은 없습니다. 대괄호 내용은 5장 4절까지인데, 제가 실수로 빠뜨렸습니다. 넣어주세요.
자 그래서 일단 우리는 대괄호 안의 내용을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다시 5장 3절 말씀 보세요. “그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5장 4절, “이는 주님의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물이 움직인 후에 맨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나았기 때문이다.” 주님의 천사가 물을 움직이게 할 때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병에서 나았다고 합니다. 이 말이 사실일까요 거짓일까요. 당연히 거짓이겠죠. 이 당시에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이 이런 얘기를 믿었을까요? 아마도 믿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은 베데스다 연못이 치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이런 미신과도 같은 이야기를 허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수많은 병자들, 맹인들, 다리 저는 자들, 혈기 마른 자들이 연못에 몸을 어떻게든 한번 담가 보려고 계속해서 기다리는 것이겠죠.
여기에서 우리는 유대인들의 치명적인 위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천사가 가끔 내려와서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이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병에서 낫는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미신과도 같은 이야기를 방치하고 허용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입니다. 허황된 소망을 품게 만드는 것은 분명한 잘못이죠.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에 있어서는 목숨을 걸고 어떻게든 지키려고 하는데, 다른 부분에서는 그냥 뭐 그럴 수 있지. 또는 그냥 그렇게 하라고 해. 이런 식으로 방치하거나 허용하는 것은 잘못된 겁니다.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죠.
이어서 5장 5절 말씀 보세요. “그런데 거기에 삼십팔 년 된 병자 한 사람이 있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삼십팔 년 된 병자가 등장합니다. 사도 요한은 이 사람을 굉장히 간결하게 설명합니다. 38년 된 병자 한 사람. 이것이 이 사람에 대한 설명의 전부입니다. 이 사람이 어디가 얼마나 아픈지, 가족은 있는지, 이름은 무엇인지. 설명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을텐데, 그리고 사도 요한이 알고 있는 정보는 훨씬 더 방대할 텐데, 독자에게 소개하는 정보는 지극히 제한적입니다. 저자가 이 병자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간략하게 기록하는 것은 절대로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이 사람에 대해서 38년 된 병자. 이 정도로 간략하게 소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38년 되었다는 내용 외에 다른 정보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병자가 예수님께 치유 받는 사건을 소개할 때 다른 내용은 필요하지 않고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저자는 의도적으로 38년 된 병자 한 사람. 이런 식으로 무성의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단순하게 소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요한복음 5장 4절 말씀을 통해서 이 38년 된 병자가 어떤 병을 가지고 있는지 추측할 수 있습니다. 맹인들, 다리 저는 자들,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있었다고 하니, 이 셋 중에 하나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잠시 후에 살펴보겠습니다만,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걸어가라고 명령하신 것으로 보아 38년동안 걷지 못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제 두 번째 파트,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치유하시는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5장 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이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그가 이미 오랫동안 앓고 있는 것을 아시고,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낫기를 바라느냐?”라고 하시니.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에게 어떤 행동을 하십니까? 병자가 누워있는 것을 보시고, 그가 이미 오랫동안 앓고 있는 것을 아시고, 그가 낫기를 원하냐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세 가지 행동을 나눠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요. 먼저 예수님께서는 38년 된 병자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람과 같지 않습니다. 전지전능한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행동을 통해 그분이 가지고 계신 긍휼과 사랑을 풍성하게 보여주십니다. 예컨대, 예수님께서는 이 병자를 만나지 않고도 병을 고쳐 주실 수 있으십니다. 말을 섞지 않고도 고쳐주실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병자가 누워있는 행각으로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이 병자가 누워있는 모습을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그가 이미 오랫동안, 38년동안 병을 앓고 있는 것을 아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시죠.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이 담긴 행동은 모든 역사 가운데 살아가는 그분의 자녀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물론 성경에 기록되어있는 대로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만, 영적으로는 동일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예컨대, 예수님께서 우리를 말씀으로 찾아오시고,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고, 응답해 주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긍휼과 사랑과 은혜를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병자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낫기를 바라느냐. 이 말씀을 직역하면, 네가 건강해지기를 원하느냐.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질문하신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아픈 사람 중에 건강해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당연히 건강해지고 싶겠죠. 어디 장애가 있으면 장애를 극복하고 싶겠죠. 저도 아파보니까 알겠더라고요. 재작년에 경미한 접촉사고가 났는데, 아직까지도 잔잔한 후유증이 남아있습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올 때 욱신거리고 찌릿찌릿한 통증이 올 때가 있는데요. 이럴 때마다 건강이 최고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사지가 멀쩡하고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 38년된 병자와 비교할 만한 수준은 되지 않죠.
자 그런데 예수님께서 건강해지고 싶냐. 이렇게 질문하시는 이유는 요한복음 5장 7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5장 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 병자가 예수께 대답하였다. “주님, 물이 움직일 때에 저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들이 저보다 먼저 내려가곤 합니다.]
이 병자는 자신이 치료받지 못하는 원인을 엄한 곳에서 찾고 있습니다. 걷지 못하는 자신의 병 때문에, 물이 움직일 때 다른 사람이 먼저 연못에 들어가서 치유 받는 일이 반복된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죠. 미신적인 이야기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병자는 물이 움직일 때 예수님께서 자신을 베데스다 연못에 넣어주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병자의 잘못된 생각을 교정해 주시기 위해서 네가 건강해지기를 원하느냐. 이런 질문을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서 이 병자는 잘못된 반응을 보였다고 할 수 있겠죠.
자 그래서, 다른 사람이 먼저 연못에 들어가기 때문에 건강해질 수 없다는 이 병자의 말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요한복음 5장 8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우리말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나의 문장으로 명령하신 것으로 보입니다만, 원어로 보면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의 명령을 하십니다. 너는 일어나라. 너는 너의 자리를 들어라. 그리고 너는 걸어가라. 여기서 “자리”라는 단어는 가난한 사람들이 사용한 침대 정도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오늘날의 침대 개념은 아니고요. 밀짚을 엮어서 만든 물건인데 굉장히 가볍고 둘둘 말아서 휴대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병자는 걸을 수 없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고, 38년 동안 이 상태를 유지했기 때문에 당연히 가난했을 겁니다. 그러니 밀짚으로 엮은 간이침대와도 같은 이 물건이 한 몸처럼 느껴졌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는 일어나라. 네 자리를 들어라. 걸어가라. 이렇게 명령하시는 겁니다. 이 명령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누군가를 치유하실 때, 어떤 도구나 매개체를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혈루증 여인의 경우에는 예수님의 말씀이 없이도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것만으로 치유되었죠. 반대로 이 38년 된 병자의 경우에는 자신이 치유 받으려면 물이 움직일 때 남들보다 먼저 연못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 미신적인 믿음. 이런 부분들을 예수님께서 자신의 명령을 통해 교정해 주십니다. 너는 일어나라. 너는 너의 자리를 들어라. 그리고 너는 걸어가라. 이 세 가지의 명령을 하시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5장 9절 말씀 보세요.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기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 여기서 “곧”이라는 부사는 “즉시”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바른성경은 곧이라고 번역했지만 즉시라고 읽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원어성경과 우리말 성경의 어순도 다릅니다. 자 그래서 의미와 어순을 고려해서 직역하면,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너는 일어나라. 너는 너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러자 즉시 그 사람이 건강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그의 자리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가 걸어갔다.” 직역하면 느낌이 좀 다르죠. 예수님께서 명령하시자마자. 어떤 일이 일어난 겁니까? 38년 동안 앓고 있던 질병 또는 장애가 깨끗하게 치유되어서 건강한 사람과 다를 바 없이 걸어갔다는 겁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크게 표가 나지 않지만 원어성경에서는 9절 상반절에 “사람”이라는 명사가 사용됩니다. 5장 5절에서는 이 사람을 무엇이라고 표현했습니까? 병자 한 사람, 5장 7절에서는 그 병자. 이런 식으로 요한은 이 사람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표현합니다. 사람이 아니라 병자로 표현합니다. 하지만 5장 9절에서 치유 받은 이후에 이 병자를 무엇이라고 표현합니까?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다리 저는 사람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한 것이죠.
또한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 종류의 것인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보통 골절돼서 6주에서 10주, 12주 이렇게 깁스하고 뼈가 붙어서 깁스를 풀면, 풀자마자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나요? 그렇지 않죠. 물리치료도 지속적으로 받고, 재활치료도 받고, 이렇게 계속해서 치료받으면서 시간이 어느 정도 흘러야 괜찮아지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병자에게 명령하시자마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즉시 그 사람이 건강해집니다. 병이 나았다,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이 정도가 아니라 건강한 사람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 어떤 후유증이나 부작용 없이, 원래부터 건강했던 사람인 것처럼 건강하게 걸어갔다는 겁니다.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걷거나, 절뚝거리거나, 아니면 혹여나 다칠까봐 걱정돼서 조심스럽게 걷는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건강한 상태를 회복해서 건강해져서 자신 있게 걸어갔다는 겁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 또 얼마나 완벽한 것인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조심스럽게 생각해야 하는 부분이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38년 된 병자의 믿음이 어떠한가. 이 부분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말씀에서 왕의 신하는 처음에 예수님의 말씀에 온전히 반응하지 못했지만 결국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집으로 돌아갔죠.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38년 된 병자는 어떻습니까? 5장 1절부터 9절 상반절 말씀까지 살펴보면, 이 사람이 믿었다는 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처음부터 예수님께 자신의 병을 고쳐달라고 요청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예수님의 이름조차 모릅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때 고쳐준 사람의 이름 정도는 물어볼 법한데, 이름도 묻지 않고 그냥 걸어갑니다.
이런 부분들을 고려해 보면 이 사람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어 보이는 이 사람을 건강하게, 그리고 온전하게 즉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메시아로 믿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이 사람을 완전하게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치유와 관련된 기적을 일으키실 때, 병자에게 믿음이 있어야만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병자에게 믿음이 있어야만 기적이 일어난다면, 예수님의 능력은 반쪽짜리 능력이 됩니다. 어떤 조건을 갖춰야만 일어나는 것이 되기 때문이죠. 하지만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믿음이 없는 사람 또는 예수님의 말씀에 온전히 반응하지 못하는 사람, 이런 사람에게도 기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제 오늘 말씀의 세 번째 파트, 안식일 논쟁에 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38년 된 병자의 치유 사건은 요한복음 5장 9절 하반절부터 47절까지의 말씀으로 이어지는데요. 논쟁의 원인은 바로 안식일입니다. 5장 9절 하반절 말씀을 보면, 그 날은 안식일이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치유받은 날이 안식일이었다는 거예요. 오늘날로 말하자면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를 안식일로 볼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일부러 안식일에 이 병자를 고치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죠. 우연히 행하셨다거나, 갑자기 하고 싶으셨다거나. 이런 일은 없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안식일에 치유하시기로 결정하셨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사복음서를 여러번 읽으신 분들의 경우에는 안식일 논쟁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잘 아실텐데요.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안식일 논쟁은 굉장히 치열하게 전개됩니다. 이뿐만 아니라 안식일 논쟁은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동기로 작용됩니다.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 방식에는 합당한 근거가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윗 가문의 메시아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고, 과거에 선지자들을 통해 선포된 말씀들이 성취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점에서 안식일을 비롯한 여러 율법들과 제도들이 예수님에 의해서 재해석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안식일이나 율법에 대해서 재해석하실 때, 아무런 원칙 없이 하고 싶으신 대로 재해석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도주의에 입각해서 안식일 규정을 엄격하게 적용하지 않는 것.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여기서부터 벌써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과 같은 사람들의 생각과 온도 차이가 발생하죠. 조금 더 설명해 드리자면,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당시에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안식일에 관한 지배적인 견해는, 안식일에 일하지 않는다는 규정을 39가지로 확대해서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치유 받은 사람이 자기의 자리를 들고 걸어간 것은 생계를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율법을 범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만, 장로들의 전통에 의하면, 39가지 종류의 일 중에 한 가지. 어떤 물건을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기는 것을 위반한 것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율법을 범한 것, 안식일을 범한 것이 됩니다.
자 이러한 배경 지식을 가지고 본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5장 10절 말씀 보세요.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병 나은 자에게 말하기를 “오늘은 안식일인데, 당신의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므로] 병 나은 사람은 더 이상 누워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둘둘 말아서 어깨에 이고 움직였을 겁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본 유대인들은, 무언가를 들어서 옮기는 행위. 이것을 일로 보았기 때문에, 안식일 규정을 위반했다고 판단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죠. 병 나은 사람이 38년 동안 병을 앓고 있다가 치유받았다는 사실을 유대인이 알든 모르든 대화 내용에서 치유받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유대인들의 관심은 이성적으로 믿기 어려운 치유와 같은 기적을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고 있습니다. 그런 일이 있거나 말거나 안식일을 어기면 안 돼. 누가 안식일 어기래.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죠.
이어서 5장 11절 말씀 보세요. [그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를 낫게 해 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병 나은 사람이 안식일을 어겼다는 지적을 받음으로써 곤경에 처하자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자신의 병을 고쳐 준 사람이 그렇게 하라고 시켰다고 말하면서 그 책임을 예수님께 떠넘깁니다. 책임을 전가하고 있는 것이죠. 이것도 모자라서 6페이지, 요한복음 5장 15절 말씀에 보면, 이 사람은 유대인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고발하기까지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죠.
네. 다시 요한복음 5장 12절 말씀으로 돌아가서 보시면,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도록 만든 사람을 정죄하기 위해서 누가 그랬냐고 물어보지만, 13절 말씀을 보면, 병 나은 사람은 자기 병을 고쳐준 사람의 이름을 모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어떻게 보면 이 부분 역시 참 이해가 잘 안 되죠. 무려 38년 동안 아무런 소망 없이 병을 앓고 있던 사람인데, 순식간에 건강을 회복시켜 준 생명의 은인과도 같은 사람의 이름을 모른다? 속된 말로 덜 되먹은 사람인 것처럼 보입니다. 이건 그냥 저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뭔가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않아 보여요. 타인에게 감사함을 표하는 것은 신앙인의 가장 기본적인 소양입니다. 신앙이 없더라도 은인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죠.
그런데 이 사람은 예수님께 감사함을 표하기는커녕 유대인들을 찾아가서 예수님을 고발하기까지 합니다. 물론 어떻게 보면, 예수님은 신진세력과 같은 존재이고,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그 어떤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의지할만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겠죠. 반대로 유대인들,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은 로마의 위정자들을 제외하면 이스라엘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세상적인 가치관에 따르면, 생명의 은인이라고 하더라도,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고려해 보면, 유대인들 쪽에 붙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겁니다. 이러한 점에서 병 나은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제 6페이지로 넘어가서 요한복음 5장 1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를 만나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보아라, 네가 나았으므로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더 이상 죄를 짓지 마라.”라고 하시니,]
38년 된 병자를 치유하신 사건 이후에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병 나은 사람을 만나십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상황만 놓고 보면 어쩌다가 우연히 예루살렘 성전에서 마주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필연적인 만남이죠. 여기서 핵심적인 말씀은 병이 치유된 것과 죄의 문제가 연결된다는 것인데요.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으려면 더 이상 죄를 지으면 안 됩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죄와 질병에는 상관관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죄를 지으면 죄에 대한 책임이나 처벌, 징계 등으로 인해 질병이 생길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38년 된 병자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훨씬 더 흉악한 죄인이었기 때문에 병에 걸렸을까요? 그것은 확실하게 알 수 없습니다. 또한 죄를 범한 사람은 누구든지 반드시 병에 걸리거나 죽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병에 걸리거나 죽는 어떤 경우에는 특정한 죄의 직접적인 결과일 수 있다는 것이죠. 이 내용을 잘 이해하셔야만 합니다. 이 말씀을 기계적으로 이해하고 적용해선 안 됩니다. 죄를 지으면 무조건 병에 걸린다? 무조건 죽는다? 이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때에 따라서 죄를 지은 사람이 병에 걸리는 경우가 있다는 겁니다. 심판이나 징계나 처벌의 의미로 병에 걸릴 수 있다는 거예요.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래에 있는 죄와 질병의 관계 참고 구절들을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9절에서 3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성찬식에 참여하는 사람 중에 스스로 돌아보지 않고, 분별하지 않고 성찬에 참여할 경우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다. 이런 말씀인데요. 사도 바울은 여기에 덧붙여서,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다. 그리고 잠자는 자, 다시 말해서 죽은 사람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약하고 병들고 죽은 사람이 너희 중에 많은데 그 이유가 무엇이라는 겁니까? 자기의 죄를 먹고 마셨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어서 열왕기하 1장 2절과 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의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를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보라 하니라 /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 아하시야 왕이 하나님께 여쭙지 않고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병이 낫겠는지 물어보자, 엘리야가 이렇게 말하죠.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 결과 아하시야 왕은 죽습니다. 우상을 믿은 죄,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의지한 죄. 그 죄의 결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이어서 민수기 12장 1절과 1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나병에 걸려 눈과 같더라 아론이 미리암을 본즉 나병에 걸렸는지라”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한 일로 미라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죠. 그러자 미리암이 나병에 걸리게 됩니다. 잘잘못을 떠나서 일단 미리암이 나병에 걸린 것은 미리암의 행동의 결과이죠. 결과를 보고 과정을 추정하게 되는데요. 결과가 나병이기 때문에, 과정이 잘못되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열왕기하 5장 2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하니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나오매 나병이 발하여 눈같이 되었더라” 엘리사의 사환인 게하시가 나아만을 찾아가서 은 두달란트와 옷 두벌을 받아와서 엘리사 선지자에게 책망받는 내용인데요. 게하시가 지은 죄의 결과는 나병으로 찾아옵니다. 이렇게 네 가지 구절을 통해서 죄와 질병의 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다시 정리해 드리자면, 죄와 질병에는 성경적인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상황에서 기계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마태복음 8장 16절과 17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렇게 행하신 이유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함이죠. 어떤 말씀이요?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다는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병을 치유해 주신다는 거예요. 이러한 점에서 질병이 무조건 죄의 결과이다. 이렇게 볼 수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는 있겠죠. 주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았어. 예컨대, 주일에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하는 것을 분명히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를 놀러갔어. 1년에 한번 그런 것도 아니고 자주 그렇게 놀러가. 그러다가 가서 어딜 다쳤어. 혹은 놀러가기 전날 갑자기 어디가 너무 아팠어. 검사해보니 어떤 병이 생겼네. 이런 경우에는 한번 고민해 볼 법 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가능하면 이런 부분은 스스로 판단해서 성급하게 결론짓지 마시고, 담임목사님께 신앙상담을 좀 받으시고, 기도도 좀 받으시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회복하는 기간을 가지셔야 합니다.
자 이제 7페이지로 넘어가서요. 요한복음 5장 15절 말씀은 앞서 설명해 드렸죠? 병 나은 사람이 유대인들을 찾아가서 예수님을 고발한 이유.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박해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합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굴복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일하실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5장 17절과 18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시기를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하셨다. / 이 때문에 유대인들은 더욱더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으니, 이는 그분께서 안식일을 범하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하여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딱 한마디만 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일하실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들인 예수님도 일하실 수 있다는 말씀이죠. 이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두 가지를 비난합니다. 첫째, 예수라는 사람이 안식일을 범하였다. 둘째,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자신과 하나님을 동등하게 여겼다. 쉽게 말해서 신성모독이다. 이렇게 두 가지의 죄를 덮어씌웁니다.
먼저 안식일 율법을 위반한 것은 당시에 중대한 범죄로 취급받았습니다. 안식일을 더럽힌 사람은 죽임 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자신과 동등하게 여긴 신성모독죄는 참을 수 없는 중죄였겠죠.
나중에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만,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이시지 않습니까? 이러한 점에서 동등한 위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만, 역할상으로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종속되어있기 때문에, 이 역할을 따르게 되어있습니다. 또한 그 아들은 아버지에게 의존해서 일하기 때문에, 독단적으로 어떤 일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성부의 위격과 성자의 위격에는 동등한 영광이 돌려져야만 합니다. 누가 윗 사람이고 누가 아랫 사람이고 이런 것은 없습니다.
자 그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친 사건이 안식일 논쟁으로 이어지고, 안식일 논쟁이 결국 예수님과 관련된 기독론 논쟁으로 연결되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함께 나눈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한 주간 더욱 더 깊이 우리 주님을 알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먼저 사랑하시고 다가오시며,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주님, 우리는 38년 된 병자와 같이 예수님의 구주되심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믿는 자로서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지 못할 때가 참 많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주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말씀을 통해 우리의 잘못된 생각과 행동을 교정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돌같은 굳은 마음 제거해 주시고, 좋은 땅과 같은 마음 밭으로 주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깨달으며,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주님과 동행하는 삶 살아가게 하시며, 주님의 은혜 안에서 감사함이 충만한 하루를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12-1
1. 알 수 없음
2. 거짓임(미신)
12-2
1. 보시고 아시고 말씀
2. 넣어주시길 원함
3. 1) 너는 일어나라 2) 너는 너의 자리를 들어라 3) 너는 걸어가라
4. 1) 사람, 즉시 2) x
12-3
1. 안식일
2. 1) 안식일인데, 당신의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2) 2 책임전가
3. O
4. 환심
12-4
1.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
2. 예수라는 사람이 안식일을 범함. 신성모독함(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름)
3. 기독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