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함의 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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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 15:21-28
제목 : 간절함의 온도
오늘날 삶의 질이 높아지면서 과거에 비해 보다 더 좋은 서비스를 원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 같습니다. 어떤 물건을 구입할 때에도 항상 서비스를 생각하게 되죠. 고장났을 때 a/s를 얼마나 잘해주는지, 보증기간이 얼마나 되는지, 얼마나 친절하고 신속하게 처리되는지. 이런 부분들을 고려하게 됩니다. 이는 물건을 살 때 뿐만 아니라 해외여행을 갈 때에나 국내여행을 갈 때에나 시설과 서비스를 모두 고려하게 되죠. 우리의 모든 경제활동에 관련된 일에 있어서 서비스를 제외 시킬 수 있는 영역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생활 방식과 서비스에 대한 개념은 신앙생활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사회에서 받는 서비스를 교회에서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길 수 있습니다. 더욱 낮아지고 더욱 섬기는 것이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의 기본적인 마음가짐이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낮아짐보다는 서비스적인 측면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슬픈 현실입니다.
우리는 이럴 때일수록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믿음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가 어떤 서비스를 제공하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코로나 시대에 교회마다 제공하는 부분들이 다 다르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겸손한 마음과 간절한 마음입니다. 오늘 말씀을 함께 깊이 있게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 어떠한지 점검하고 우리 심령의 간절함을 회복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먼저 마태복음 15장 2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화면)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화면) 두로와 시돈 지방은 갈릴리 북쪽에 있는 이방인 지역입니다. 두 도시는 구약시대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의 뿌리 깊은 대적으로 책망해 온 도시였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왕비였던 아합의 아내 이세벨의 고향으로 굉장히 유명한 도시이죠.
두로와 시돈은 상업 도시로서 이스라엘에 경제적인 주도권을 상당하게 행사했던 도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이방 도시에 가신 이유는 구체적으로 알기 어렵습니다만, 도시 중심부에 들어가서 활동하신 것은 아니고 두로와 시돈 근방에 있는 지역에서 머무르신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어서 22절 말씀 보십시오. (화면)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마침 두로와 시돈 지역에 거주하는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가나안 여자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가나안이라는 말은 구약성경에서 전통적으로 사용되는 단어로 통용되었습니다. 이를테면 백인이나 흑인, 황인, 이런 인종을 표현하는 단어가 아니라 구약성경에서 사용되었던 단어, 어떤 상징성을 가지고 사용되는 단어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어떤 상징성을 가지고 있을까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가나안 사람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받았죠. 왜 이런 명령을 받았습니까? 가나안 사람들이 섬겼던 바알과 아세라 우상은 이스라엘의 신앙적인 정결과 경건을 끊임없이 위협하고 더럽히려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분들을 고려해보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가나안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긍정적으로 느껴지진 않습니다. 가나안 여자니까요. 그런데 이 여자는 특별한 목적으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22절 하반절 말씀 보세요. (화면)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두로와 시돈 지역에 사는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을 무엇이라 부릅니까.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는 보통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부를 때 많이들 사용하는 칭호이죠. 그런데 이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을 향해서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이렇게 부르는 것을 보면, 이 여자는 가나안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방인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유대교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어느 정도 접하고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그냥 예수님을 찾아와서 애걸복걸하며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죠. 그렇다면 이 가나안 여성이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가 무엇일까요? (화면)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가나안 여자의 딸이 귀신 들렸는데 이 귀신을 내쫓아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보통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아오면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시고 금방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데, 오늘 본문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이 여성의 간청에 금방 응답해주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가나안 여성의 간청에 어떻게 반응하시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간청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23절에 등장합니다. (화면)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예수님께서 이 여자의 말에 단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아니 고쳐주기 싫으시면 좋은 말로 거절이라도 하시지, 아예 한마디도 안 하시고 계속해서 갈 길을 가신다니, 이건 좀 너무하신 것처럼 느껴집니다. 불쌍히 여겨주시고, 사랑으로 쓰다듬어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주님의 모습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요.
그런데 문제는 이 가나안 여성이 예수님께 딱 한번 요청하고 잠잠히 예수님의 대답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예수님 일행을 따라가면서 끈질기고 간절하게 계속해서 소리 지르며 요청했다는 것입니다. 본인의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간절한 마음으로 일관되게 부르짖는 이 가나안 여성이 참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 가나안 여성이 계속해서 소리 지르며 따라오는 걸 내버려 둘 순 없겠죠. 23절 하반절에 보시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화면)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끈질기게 따라오면서 도와달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여자를 가만둘 순 없으니 제자들이 여자를 대신해서 간청합니다. 무엇이라 간청합니까. 예수님. 저 여자를 돌려보내 주십시오.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이 말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 번째는 여자를 빈손으로 그냥 돌려보내자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자에게 집에 가라고 말씀해서 보내달라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죠.
하지만 이 경우에는 두 번째 경우로 해석해야 합니다. 두 번째 해석은 저 여자가 자꾸 귀찮게 소리 지르면서 따라오니까, 에이 그냥 원하는 대로 해주고 빨리 돌려보내자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런 느낌으로 말한 것이라면 좀 실망스럽게 느껴집니다. 불쌍히 여겨달라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시끄러우니까, 귀찮으니까, 빨리 그냥 입에 사탕이라도 물려서 조용히 시키려는 것처럼 예수님께 간청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이라고는 눈꼽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너무나도 차가운 간청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요청에 이렇게 반응하십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반응이죠. 24절 말씀 보세요. (화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예수님의 두 번째 반응은 예상할 수 없을 만큼 차가운 반응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이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이스라엘의 메시아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집에 속한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오셨습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바꿔 표현하자면, 다른 집에 속한 양을 찾으러 온 것은 아니라는 말로 생각할 수 있죠. 그렇다면 예수님의 대답은 어떤 의미가 됩니까?
이방인인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께 그 어떠한 요구도 할 수 없다는 대답이 되는 겁니다. 이방인인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께 아무런 권리도 요구할 수 없다는 겁니다. 처음에 예수님을 향해 계속해서 소리 지르며 간절하게 요청했을 때 무관심하게 대답조차 하지 않았던 예수님의 모습, 그리고 이방인에게는 관심조차 갖지 않으시려는 예수님의 모습은 참 낯설게 느껴집니다. 도대체 예수님께서는 왜 이렇게 반응하시는 걸까요. 그냥 쿨하게 고쳐주시면 될 것을. 왜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만드시고 왜 이렇게까지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시는 걸까요.
이쯤 되면 자존심 상하고 열받아서 그냥 집으로 돌아갈 것 같습니다. 계속해서 말 무시하다가 결국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하시니. 이런 식이라면 무슨 대화가 되겠습니까? 소문으로만 들었던 예수님에 대해 한껏 실망하고 돌아가도 모자를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이 가나안 여자는 끝까지 예수님을 물고 늘어집니다.
25절 말씀 보세요. (화면)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아멘.
저 멀리서 간절하게 소리 지르며 예수님을 따라왔던 이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의 매몰찬 거절에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 앞에 다가와서 엎드려 절합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24절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어떤 뉘앙스로 말씀하셨습니까. 인종적으로 너는 안돼.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서 보냄받은 유대인 메시아야. 너 같은 이방인은 안돼. 이런 반응을 보인 예수님이신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엎드려서 절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이 가나안 여자의 모습을 보면, 굉장히 뜨거운 간절함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 여자가 예수님을 찾아온 목적이 딸을 지독하게 괴롭히는 귀신을 내쫓기 위함이라면, 단순히 모성애만으로 이렇게 매달리는 것이 아닐까? 모성애를 가진 엄마라면 누구나 이정도는 붙들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제가 7월 1일에 첫째 아들을 득남했는데요. 아들을 낳아보니,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알겠더라구요.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아빠의 사랑과 엄마의 사랑에는 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아들을 볼 때 꿀 떨어지는 정도와 아내가 아들을 볼 때 꿀 떨어지는 정도가 확연히 다르더라구요. 아내가 아들을 젖먹이면서 바라보는 모습과 잠자는 모습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모습을 보면, 아. 이게 모성애구나. 아 이게 바로 어머니의 사랑이구나. 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런 모성애를 가지고 있다면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듣고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을 붙잡을 수 있지 않을까요? 신앙도 신앙이지만, 모성애만으로도 이렇게 붙잡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단락의 내용을 끝까지 살펴보면 단순한 모성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26절 말씀 보세요. (화면)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나는 이방인을 위한 메시아가 아닌 이스라엘 사람을 위한 메시아야. 그러니까 너 같은 이방인은 안돼. 이런 대답을 듣고도 끈질기게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간청한 여자의 마음을 짓밟아버리는 예수님의 차디찬 반응을 보십시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이름만 지우고 보면, 누가 얘기하는 건지 헷갈릴 것 같습니다. 이런 발언은 마치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 서기관들, 유대인 장로들이나 할 법한 발언 아닙니까?
자녀의 밥을 가져다가 개들에게 주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비유로 대답하시는데 여기서 자녀는 누구죠? 이스라엘이죠. 그렇다면 개들은 누구입니까? 이방인입니다.
반려견을 가족으로 여기는 서구권이나 반려견 천만 시대를 맞이한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이 말씀을 비교적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만, 이스라엘의 문화적인 배경에서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발언은 쌍욕보다 훨씬 더 심한 발언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개라는 동물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혐오스러운 동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개들은 쓰레기나 썩어가는 고기 또는 썩어가는 시체를 먹으며 살았기 때문에 굉장히 부정한 동물로 여겨졌습니다. 이외에도 개라는 표현은 무가치하고 불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사람을 맹비난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신약성경에서도 유사합니다. 예수님도 거룩한 것을 개에게 맡기지 말라고 경고하셨고 바울 사도도 자신의 대적자들을 개라고 표현하지 않았습니까? 이뿐만 아니라 랍비의 전승에서도 개는 피조물 중 가장 야비하고 발칙하고 고약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내용은 정말 정말 정말 심각한 욕으로 받아들일 만한 내용인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생물학적인 자녀, 자신이 직접 낳은 자녀로 표현하시는 데 반해 가나안 여자와 가나안 여자의 딸은 무엇으로 표현됩니까? 개들로 표현됩니다.
자신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위해 보냄 받았지 개들에게 보냄 받은 것은 아니다. 어떻게 이런 식으로 말씀하실 수 있을까요. 이쯤 되면 모성애도 모성애지만, 치사하고 더러워서 그냥 때려치울 것 같습니다. 요즘 시대로 생각해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처사이죠.
친절하고 상냥하게 서비스 받아도 모자를 판에, 극진하게 대우받아도 불쾌할까말까, 만족해줄까 말까 한 시대에 개 취급을 받는다? 사람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고 무시한다? 이 정도면 땅바닥에 코 박고 절하며 간청하던 가나안 여자가 벌떡 일어나서 예수님의 뺨을 시원하게 후려쳐도 할 말 없을 것 같습니다. 모성애고 자시고 그냥 다 때려치우고 멱살 잡고 싸워도 속이 시원하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이 가나안 여성은 예수님의 말에 이렇게 반응합니다. 2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화면)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 가나안 여성은 예수님의 비유에 한술 더 떠서 말합니다. 예. 주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자기 주인들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들을 먹습니다.
이 가나안 여성이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겁니까? 도저히 자존심이 상해서 못참겠다. 야 니가 뭐 메시야면 그렇게 사람을 무시해도 되냐. 이렇게까지 간청하는 사람의 자존심을 짓밟아도 되냐. 어? 이렇게 따져도 정당방위로 여겨질 것 같은데, 따지기는커녕 예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그리고 자기 자신을 개로 여기면서까지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이것이 바로 가나안 여인의 간절함입니다.
이 여인의 간절함은 어떻게 해서든 딸의 귀신을 내쫓아야겠다는 목적의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다윗의 자손이십니다. 정통 유대인입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여자는 어떻습니까? 이방인입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볼 때 가나안 여자는 개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틀린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오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밥을 주시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이 사실은 가나안 여자에게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이 가나안 여자는 자신이 얻을만한 것 그 이상을 예수님께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냥 막무가내로 울부짖으면서 그래도 나를 자녀 대우해주셔야 하지 않겠냐고 억지 부리지 않습니다.
다만, 비천하고 부정한 개들이 주인님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 것은 개들이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닌지요? 이렇게 간청하는 것이 바로 가나안 여인의 간절함입니다. 주인님의 밥상에서 부스러기가 떨어질지 떨어지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그 부스러기만으로 배를 채울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지만, 개의 처지라도 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모든 굴욕과 비참함을 참아내고 자신의 이방인 된 처지를 인정하면서 온 마음 다해 주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것, 이것이 바로 간절함입니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27절의 가나안 여자의 말을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이 말은 그 여자의 겸손함과 간절함을 드러낸다. 그가 아무런 악감정이나 원망하는 마음 없이 “개”라는 일컬음도 달게 받았으니 그것은 겸손함이요, 부스러기라도 받고자 했으니 그것은 은혜를 귀하게 여겨서 적은 것이라도 낙심하지 않고 받고자 한 간절함이다.
비록 자신이 개처럼 여겨진다고 할지라도, 정갈하게 차려진 밥상을 대접받는 것이 아닌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귀하게 여겨서 받아 먹고자 하는 그 간절한 마음, 그 간절한 믿음이 바로 이방인 가나안 여자의 믿음이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반응하십니다. 28절 말씀을 보십시오. (화면)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예수님께서는 기다리셨다는 듯이 가나안 여자의 믿음을 칭찬해주시고 그녀의 딸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인을 처음 만났을 때 그녀의 딸을 즉시 회복시켜주셨다면, 이 여인의 간절함은 이토록 뜨겁게 달아오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의 즉각적인 응답이 더딘 이유와 그 목적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심령을 돌아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배드릴 때마다 은혜받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고,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셔야만 한다고 착각하는 우리의 그릇된 믿음을 회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내가 어떤 서비스를 받느냐가 아닌,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감동을 주시느냐 주시지 않느냐가 아닌 부스러기라도 받아먹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회복시켜야만 합니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화면) 영적으로 하나님께 개라는 선고를 달게 받을 수 있는 겸손함이 있는가? (화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선고하신 것이므로 족하게 여길 수 있는가? (화면) 악감정 없이 “개”로서 얻을 수 있는 무엇이라도 얻고자 하는 열렬한 기도를 드릴 수 있는가?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개와 같은 부정한 동물과 다름없다는 것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개로서 얻을 수 있는 최대치인 부스러기라도 먹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만 합니다.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그토록 갈망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차려주신 최고급의 한 끼 식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그렇게도 간절하게 원했던 것은 땅바닥에 떨어질지 떨어지지 않을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부스러기들이었습니다. 양도 얼마 되지 않고 먹어봐야 배가 차지도 않을 것만 같은 그런 부스러기조차 받아 먹고자 하는 그 간절함, 그 간절함을 가지고 주님께 은혜를 구하시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복음의 유익을 얻을 수 없는 이방인인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벽을 허물어주시며 복음의 유익을 누리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개보다 못한 더럽고 부정한 존재였던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시고 오늘도 말씀을 통해 은혜 누리게 하시니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우리 신앙생활에 여러 어려움이 발생하고 있지만, 이런 때일수록 간절함을 회복하며, 주님께서 베푸시는 상의 부스러기라도 먹고자 하는 그 겸손함과 간절한 마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첫사랑을 기억하게 하시고 기도응답을 지연시키심으로 우리의 간절함을 확고하게 만드시는 주님의 역사하심을 믿어 의심치 않도록 우리의 심령을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때에 따라 기복이 너무나도 심한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불쌍히 여겨주시옵고, 하루하루 주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갈망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홀로 영광 받으시길 간절히 소망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드리며 기도드리옵나이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이 어두운 세상에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우리를 날마다 인도해주시니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때로는 육체가 연약하기도 하고 강건하기도 하며, 영적으로 뜨겁기도 하고 냉랭하기도 한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해주시며 붙들어 주시니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불가피하게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지 못한 우리 화평의 성도님들을 기억해주시며, 허전한 심령 위로하여 주시고 각자의 처소에서 주님께 올려드린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께 모든 것을 맡겨드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담대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홀로 영광 받으시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오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여자는 비유 안에서 자신이 다투고 겨루던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남. 여자는 브니엘에서 하나님과 겨루던 야곱처럼, 예수님과 말다툼함. 이 여자는 여자 야곱임. 여자 역시 이김.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과 크게 씨름하다가 이 수로보니게 여자의 이야기에서 큰 경이와 위로를 발견함. 루터는 말하기를 여자는 자신이 받아야 할 것 이상을 절대로 요구하지 않았다고 함. “여자는 그리스도 자신의 말에서 그리스도를 이해해 받아들였다. 그러자 그리스도는 여자를 개가 아닌 이스라엘의 자녀로 여기셨다.”
예수님에 대해 많이 안다고 해서 간절함의 온도가 올라가는 것이 아님.
핏줄이나 가정으로나 믿음의 가문이라고 해서 뜨거운 간절함과 믿음을 기본적으로 지니게 되는 것은 아님. 나는 안전한가? 우리 집은 안전한가? 나의 간절함은 몇도인가.
가나안 여인은 동방 박사(2:1-12), 가버나움의 백부장(8:5-13),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현장에 있었던 로마 백부장(27:54) 등을 포함해서 마태복음에 나오는 주목할 만한 이방인들과 나란히 자신의 이름을 올린다.
* 구조
바리새인과 벌어진 논쟁. 율법과 관계있는 유대 남자들과의 논쟁. 장로들의 전통은 율법을 떠나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명제를 전제로 함. 그러나 그 논쟁 이후에 등장하는 본문은 이방인 여성이 구원받는 내용을 담고 있음.
* 내러티브의 특징
마가복음보다 예수님의 부정적인 태도가 더욱 강조되고 혹독하게 제시된 마태복음 형식에서는 많은 독자들에게 불안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어떤 학자는 예수님의 행동의 특징을 “잔인함, 무례함, 믿을 수 없는 냉담함, 지독함”등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예수님의 거부 행동이나 이방인을 개로 표현하며 그들은 메시아에게서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식의 태도는 민감하지 못하고 무례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 그러나 이 이야기는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함.
결과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구한 것을 정확히 들어주었고 그녀의 믿음에 대해 백부장을 제외한 누구보다 강력한 어조로 칭찬함. 4회의 간청의 끝에 여자의 호소는 받아들여짐. 예수님께서는 주저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고 여자의 믿음을 칭찬함.
* 구조 - 4회의 간청
[21절]
두로와 시돈에 들어가신 예수님. (가능하면 지도 찾아볼 것)
두로와 시돈은 갈릴리 북쪽에 있는 도시임. 두 도시는 모두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의 뿌리 깊은 대적으로 책망해 온 지역임. 아합의 아내였던 이세벨의 고향으로 유명함.
[22절] 가나안 여자 등장.
마태는 “가나안”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인종적인 요소를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음. 당시에 “가나안”이라는 말은 구약 성경의 전통적인 어휘 가운데 하나였음.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셨고 그들의 우상 종교인 바알과 아세라는 여호와의 백성의 신앙적인 정결에 끊임없이 위협이 되었던 민족임을 상징함.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께 간청함.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을 “주” “다윗의 자손”이라 부름. 주와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이 더해진 것은 눈여겨 볼만함. 게다가 이 말을 한 사람이 이방인이라는 것은 특별함. “주”라는 단어는 예수님의 사회적인 신분을 인정하는 예를 갖춘 호칭일 수 있지만, “주”라는 단어와 “다윗의 자손”이라는 단어의 결합은 여자가 단순한 예의 이상을 표현하고 있음을 암시함.
-> 이러한 사실을 통해 가나안 여자는 유대교에 대해 어느정도 알고 있었고 메시아 호칭을 사용함으로써 이교적인 상황과 배경에서 예수님의 관심을 끌었던 것. 유대인 메시아의 도움을 바라는 이방인 여성의 변칙적인 호소라고 볼 수 있음.
[23절] 첫 번째 간청에 대한 답변 : 무시 why?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대답하지 않자 여자는 계속해서 호소함. 어머니의 간절함이었을까? 사회적인 관습에 대해 도전하려는 놀라운 의지를 보임. 그러나 제자들은 이에 침묵하지 않았음. 제자들은 예수님께 여자를 보내달라고 간청함(두번째 간청).
강제로 쫓아내달라는 것인지, 귀찮으니 요청을 어서 들어주고 보내달라는 것인지 혼동될 수 있으나 후자임. 그 여자가 원하는 것을 해 주어서 가게 해달라는 의미임.
[24절] 두 번째 간청에 대한 답변 :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여자의 호소는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정당하게 수행해야 마땅한 영역의 바깥에 있는 일임.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오셨는데, 이 잃어버린 양은 이스라엘 집의 양임. 다른 집 양이 아님. 다른 말로 생각해보면, 이방인은 이스라엘의 메시아 사역에 아무런 권리도 요구할 수 없음.
그러나 23절에 제시된 무관심한 침묵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유대인스러운 거부감은 여자가 자신의 호소를 얼마나 확실하게 붙들고 있는지, 얼마나 간절한지 그 온도를 증명하고 검증하는 시험대가 됨. 자존심은? 기분은?
[25절] 세 번째 간청 : 주여 저를 도우소서
지금까지 저 멀리서 소리치던 여자가 이제는 예수님 앞에 절하며 엎드림.
[26절] 세 번째 간청을 비유로 거부하심 :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 개는 부정한 동물임. 의도적으로 이방인에게 상처주기 위한 모욕적인 용어로 사용되기도 함. 여기에 나오는 개라는 단어는 길들여진 반려견(κυνάριον)을 의미함. 밖에서 쓰레기를 뒤지는 야생개(κύων)로 말씀하진 않으셨음.
동물을 사랑하는 서양 문화나 반려견 문화가 급속도로 발전하는 우리 나라에서는 작은 개, 집에서 키우는 애완용 강아지, 반려견. 이런 단어로 사용되었으니 가나안 여자에 대한 마음의 상처가 반감될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름. 그러나 “반려견”이 큰 개보다 부정하지 않은 것이 아님.
참고로 개는 독실한 이스라엘에게는 혐오스러운 동물이었음. 구약성경에서 개들은 쓰레기나 썩어가는 고기, 시체를 먹으며 살았기 때문에 부정한 동물이었음. 이외에도 개라는 표현은 무가치하고 불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사람을 맹비난하는 말이었음. 신약에서도 유사하게 사용됨.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맡기지 말라고 경고하시며, 인간의 비참함을 개가 걸인의 짓무른 상처를 핥는다는 말로 기술됨. 바울은 자신의 대적자들을 개라고 지칭함. 랍비의 전승에서도 개는 피조물 중 가장 야비하고 발칙하고 고약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비난하는 말이었음. 이방인들은 원래 하나님을 믿지 않고 무지하고 우상숭배하는 이교도들이었기 때문에 개라고 묘사될만함. 랍비들은 “세상의 민족들은 개와 같다”라고 선언했음.
자녀는 개와 함께할 수 없는 권리와 특권을 가짐. 거룩한 것은 자녀에게만 허락될 뿐, 강아지에게 허락되진 않음. 마가복음에서는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라는 표현이 등장함. 이는 자녀가 먼저 먹고 강아지에게 차례가 온다는 것을 암시함. 그러나 마태는 이러한 작은 위로 혹은 기회조차 제공하지 않음.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여겼음. 이들은 아브라함의 언약에 포함되어있었고 토라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생물학적인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었음.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생물학적인 자녀로 지칭하시는 한편, 여자는 개들로 표현됨. 예수님께서 자녀들에게 보냄을 받으셨는가, 개들에게 보냄을 받았는가?
* 그런데 여기서의 요점은 이스라엘의 구속사적인 우선성임.
[27절] 네 번째 간청 :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님의 은유에 한술 더 떠서 확대해서 말함.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주시기를 요청함.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께서 거절하신 비유에 정면으로 맞섬. 만일 이방인이 “개”라면 적어도 개의 권리는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것. 개는 비록 찌꺼기, 부스러기라 할지라도 그것을 얻어먹을 권리가 있음. 이스라엘의 메시아로서 예수는 먼저 자기백성에게 가야 하지만, 예님의 사역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임. “주여 그 말씀은 옳습니다. 그러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겠다는 표현에서 얼마나 겸손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음. 보통 사람들 같으면 분개하고 욕하면서 떠나갔을 것임. 그러나 이 여자는 모든 굴욕과 비참함을 참고 자신의 이방인된 처지를 인정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간구했음. 여기서 우리는 참 신앙이란 자신의 비천한 처지를 인정하는 겸손함과 은혜를 받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음. 포기하지 않는 믿음과 어떠한 일이 있어도 끝까지 인내하면서 은혜를 구하는 간절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응답을 받을 것임.
* 27절에 대한 박윤선 목사님의 설명
이 말은 그 여자의 겸손함과 간절함을 드러낸다. 그가 아무런 악감정이나 원망하는 마음 없이 “개”라는 일컬음도 달게 받았으니 그것은 겸손이요, 부스러기라도 받고자 했으니 그것은 은혜를 귀하게 여겨서 적은 것이라도 낙심하지 않고 받고자 한 간절함이다.“
”영적으로 하나님께 “개”라는 선고를 받을 때 달게 받을 수 있는 겸손함이 있는가? 그것이 하나님께서 선고하신 것이므로 족하게 여길 수 있는가? 그 때에도 악감정 없이 “개”로서 얻을 수 있는 무엇이라도 얻고자 하는 열렬한 기도가 있겠는가? 자기가 죄인 됨을 알며, 지극히 천하여 어찌할 수 없는 줄을 알며, 천국에서는 한 마리의 개와 같은 자임을 알고, 하나님께 의뢰하며 구걸함이 참 믿음있는 사람이다.“
* 칼빈
”우리는 원래 개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게될 때 우리 육신의 교만은 온전히 겸손으로 바꾸어져야 한다.“
”이 여자가 갈망했던 것은 우연히 떨어질 수도 있는 부스러기가 강아지의 차지가 되도록 해 주시라는 것이었다.“
[28절] 결말 :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예수님의 대답은 지금까지의 대화에서 보여준 태도와 완전히 반대이다. 예수님은 여자의 말이 정당하다고 인정하며, 모욕과 거절에 굴하지 않은 여자의 대담한 태도를 칭찬하심. 여자는 예수님과의 논쟁에서 이겼고 그녀의 요구는 즉시 응답을 받게 됨. 이 본문은 마태복음에서 믿음이 “크다”고 언급된 유일한 본문임.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 유대인 출신, 이스라엘 출신의 제자들이 보여준 작은 믿음과 분명하게 비교되는 본문임.
여자는 비유 안에서 자신이 다투고 겨루던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남. 여자는 브니엘에서 하나님과 겨루던 야곱처럼, 예수님과 말다툼함. 이 여자는 여자 야곱임. 여자 역시 이김.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과 크게 씨름하다가 이 수로보니게 여자의 이야기에서 큰 경이와 위로를 발견함. 루터는 말하기를 여자는 자신이 받아야 할 것 이상을 절대로 요구하지 않았다고 함. “여자는 그리스도 자신의 말에서 그리스도를 이해해 받아들였다. 그러자 그리스도는 여자를 개가 아닌 이스라엘의 자녀로 여기셨다.”
예수님에 대해 많이 안다고 해서 간절함의 온도가 올라가는 것이 아님.
핏줄이나 가정으로나 믿음의 가문이라고 해서 뜨거운 간절함과 믿음을 기본적으로 지니게 되는 것은 아님. 나는 안전한가? 우리 집은 안전한가? 나의 간절함은 몇도인가.
가나안 여인은 동방 박사(2:1-12), 가버나움의 백부장(8:5-13),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현장에 있었던 로마 백부장(27:54) 등을 포함해서 마태복음에 나오는 주목할 만한 이방인들과 나란히 자신의 이름을 올린다.
* 예수와 이방인
바울의 견해
엡 2: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엡 2: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엡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롬 11: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 가나안 여인
그녀는 이스라엘과 이방 사이에 세워진 벽을 허물어 버린 것은 아니다. 다만 그녀는 예수의 긍휼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벽을 넘은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자녀들이 마땅히 먹어야 할 떡을 유대인들이 개라고 부르던 이방 죄인들이 먹고 있다는 것이다. 가나안 여인이 자녀의 권리를 취한 것이다. 더불어 예수님의 능력도 구원도 맛보지 못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야말로 자기들에게 베풀어진 상의 떡도 먹지 못하는, 실로 개만도 못한 자리에 떨어졌다. 주인집 자녀와 개의 위치가 뒤바뀐 것이다.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스라엘로 향하신다. 이스라엘을 향한 사역은 끝나지 않았다.
* 박윤선
겸손은 신앙의 기본 정신이다. 이러한 겸손은 자기에게 의가 없다는 것보다 한층 더 들어가서 자기에게는 불의만이 있다는 하나님의 판단에 승복하는 태도이다. 사람이 입으로는 “나는 부족하다”, “나는 죄인이다”라고 말은 잘한다. 그렇지만 남들에게서 그런 판단을 받을 때에는 원망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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