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강 제자들을 만나시는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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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함께 공부할 주제는 “제자들을 만나시는 예수님”입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뻔한 주제인 것 같으면서도 자세히 보면 어? 이게 이런 내용이었어? 이렇게 느껴질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동안 요한복음 1장 35절부터 51절까지의 내용을 너무 가볍게 생각해서 쉽게 지나치셨다면, 오늘 함께 공부하면서 이 내용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깊이 있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먼저 요한복음 1장 35절부터 51절까지의 말씀을 교재를 보시면서 한절씩 교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아멘.
오늘 말씀은 크게 두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는데요. 먼저 첫 번째 단락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최초의 제자들을 얻으신 내용입니다. 사실 이 내용은 별 생각없이 읽으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공관복음에 나와 있는 내용, 예수님께서 그냥 열두 제자 부르시는 거랑 크게 다를 것 없지 않나.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더 깊게 성경을 읽으시는 분의 경우에는 공관복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내용과 요한복음의 내용이 뭔가 좀 다르다는 사실을 캐치하셨을 수 있습니다. 과연 어떤 점이 공관복음의 내용과 다른지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장 35절부터 42절까지는 세례 요한의 두 제자에 관한 내용이 등장합니다. 교재 3페이지 보세요. 1장 36절에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는 내용이 나오는데요.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어떻게 증언합니까?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라고 증언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어떻게 표현했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그 어린양이다. 이렇게 표현했죠. 그리고 이어서 37절 말씀을 보세요.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세례 요한의 두 제자가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고 합니다. 어떤 말이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다. 라는 증언을 듣고 지금까지 세례 요한을 따르면서 세례 요한의 가르침을 받다가, 한순간에 예수님을 따라갔다는 겁니다.
되게 쿨하죠. 고민이라도 좀 해볼 법하지 않나요. 이렇게 갑자기 떠나버리면 좀 섭섭할 것 같은데, 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섭섭해하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 입으로 본인은 쇠해야 하고 예수님은 흥해야 한다고 말한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점에서도 세례 요한은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소리”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이나, 분파나, 제자들의 숫자에 대해서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을 드러내고 또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 따르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의 관계에 그대로 적용하면 조금 위험합니다. 세례 요한을 따르다가 예수님을 따르게 되는 것과, 어떤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다가 다른 교회로 옮기는 것에 대해서 똑같이 적용하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완전히 다른 경우이기 때문에 잘못된 적용은 피해야 합니다.
자 그래서, 세례 요한의 증언을 듣고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는데, 여기서 두 제자가 누구입니까? 교재 5페이지에 나와있는 1장 40절 말씀을 보시면, 제자 한 사람의 이름이 나와 있죠? 누구죠?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은 뭐죠? 네. 없습니다. 안 나와 있어요. 누군지 궁금하시지 않습니까? 네 저도 궁금합니다. 그래서 좀 찾아보니까, 전통적인 견해에 따르면, 이 익명의 제자가 사도 요한일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예수님과 제자들 간의 첫 만남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굉장히 세부적인 내용들까지 기록했기 때문에 본인이 처음부터 예수님을 따른 그 제자가 아니었느냐 하는 것이죠. 물론 굉장히 신빙성이 있는 주장입니다만, 우리가 보통 성경 저자가 누구냐 하는 문제를 다룰 때, 우리 개혁주의 진영에서는 굉장히 보수적인 입장을 취합니다.
예컨대, 성경에 직접적인 증거가 있다거나 하는 경우에는 100퍼센트 확신을 가지고 믿습니다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저자의 문체나 어휘 선택이나 신학적인 내용이나 이런 것을 가지고 판단하지만, 결과적으로 직접적인 증거가 없으면 확신을 가지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례 요한의 두 제자 중에 한 사람은 안드레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느낌적인 느낌으로는 분명히 사도 요한인데, 이것에 대해서 성경의 내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에, 확신할 수 없습니다.
자 그래서 다시 교재 3페이지로 돌아와서, 안드레와 익명의 제자가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세례 요한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을 즉시 따라갑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따르거늘”이라고 기록되어 있죠. “따르다”는 말이 어떤 의미일까요? 뭔가 말뜻을 확실하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바른성경 번역본을 참고하시면 이해가 되실텐데요.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갔다. 라고 되어있죠. 여기서 우리는 이 부분을 그냥 지나치기 쉽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엄밀히 따지고 보면, 안드레와 익명의 제자는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은 겁니까. 받지 않은 겁니까.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죠. 물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창세 전에 예정한 주님의 백성들을 영적으로 부르십니다만, 이것은 구원론의 관점에서 생각할 때 그런 것이지, 요한복음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비추는 빛으로 오셨습니다.
자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떠나서 요한복음 1장 37절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나를 따르라” 이렇게 명령하시고 두 제자가 그 말씀에 순종해서 네. 따르겠습니다. 하고 따라가는, 이런 일반적인 부르심은 아니라는 얘기에요. 공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그런 장면과는 완전히 다르죠.
자 그래서, 이러한 부분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될 때, 예수님께서 직접 우리를 불러주셔야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입으로, 혹은 무슨 음성으로, 혹은 무슨 꿈이나 환상으로 예수님 자신의 모습을 직접 보여주시고 말씀해 주셔야만, 극적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안드레와 익명의 제자는, 어떻게 보면 누가 전도해서 교회 나가게 된 것과 같은 모습이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뭐 대단한 것도 없어요.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이렇게 증언하긴 했습니다만, 실제로 예수님의 모습이 무슨 양 같은 모습입니까? 그렇지 않죠. 예수님은 그 당시 상황으로 추측해보면 외관상으로는 일반적인 30세 남성이었습니다. 저보다 여섯 살이나 어린 나이죠.
그런데 두 제자는 자기 스승인 세례 요한의 증언을 듣고 즉시 예수님을 따라가게 된 겁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데에는 무슨 특별한 사건이 발생해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관해서 말 한마디 듣고도 제자의 삶을 살아가겠다고 결단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너무 겁먹지 않아도 됩니다. 너무 부담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복음을 전하는 것은 두어마디 정도면 충분합니다. 물론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자기 스승의 말을 듣고 따랐다는 점에 있어서, 두어마디의 말로 전도하려면, 관계로 전도하려면 상대방과 신뢰관계가 돈독하게 쌓여있어야겠죠. 상대방이 나를 훌륭한 사람으로 존중할만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데, 예수님이 어쩌고저쩌고 이런 이야기하면 씨알도 먹히지 않겠죠.
그래서 우선 우리는 전도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으로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선행되어야 복음이 먹혀들어가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서는 요즘 시대에는 택도 없습니다. 그러니 부디 돈독한 신뢰 관계를 지역 사회 주민들과 쌓으면서, 우리의 모습을 통해 그리고 우리의 증언을 통해 잃어버린 영혼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사명을 감당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제 교재 4페이지로 넘어가서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38절과 39절에 보면 예수님과 요한의 두 제자가 대화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요.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갔다고는 하지만 아직 예수님의 정식 제자가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냥 예수님을 따라가서 대화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어떤 대화를 나눕니까? 대화 내용이 표에 들어가있는데, 제가 예수님 부분을 읽으면 성도님들께서 두 제자 부분을 읽어주시면 되겠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구하느냐. ~~~ 너희는 와라. 그러면 볼 것이다.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묻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구하느냐. 이 질문은 쉽게 생각하자면, 표면적으로 그냥 두 제자에게, 무슨 생각으로 나를 따라오는거냐. 나한테 무엇을 원하느냐. 라는 식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만, 여기에는 좀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몇주동안 살펴본 로고스의 개념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로고스이자 포스이신 예수님은 자기를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빛을 비추어주십니다. 거부당할 것을 아시면서도 빛을 비추어주셨죠.
그런데 안드레와 익명의 제자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영적으로는 빛을 비추어주신 것이 맞지만 물리적으로, 직접적인 관계에 있어서는 예수님께서 딱히 무언가 해주신 게 없습니다. 그런데 얘네가 예수님을 따라옵니다. 따라오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따라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이 제자들을 대면하시고, 그들이 자신의 삶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말할 것을 요구하시는 겁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질문하시는 것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너희의 삶은 나를 따르는 것 같기는 한데, 나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이렇게 물어보시는 것이죠.
자, 그래서 이 제자들이 예수님께 대답하는데, 사실 우리말 성경으로 보면, 뭔가 이 문맥이 되게 어색합니다. 자연스럽게 읽히지 않죠. 무엇을 구하냐고 물어봤더니 무엇이라 대답합니까? 선생님. 선생님은 어디에서 머물고 계십니까? 뭘 구하냐고 물어봤더니 어디 사녜요. 이게 대체 무슨 말이죠? 돈이 좀 많이 필요한데 집에 돈 많아요? 집 어디에요? 주소좀요. 뭐 이런 것도 아니고.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요.
사실 이 두 제자는 예수님을 사적으로 찾아가서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가르침을 받고 싶은 마음에 어디에 머물고 계시는지 여쭤본 겁니다. 요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과 참 많이 다르죠. 요즘은 어떻습니까. 담임목사님 댁에 찾아가서 성경 말씀 좀 알려주세요. 신앙상담 좀 해주세요. 이런 분들이 거의 없죠. 굳이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교회에서 제공하는 것들이 참 많아요. 주일에는 주일예배,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새벽기도회, 수요일 저녁에는 수요기도회, 금요일에는 찬양방송, 또 화요일과 목요일에는 성경공부, 또 구역마다 모여서 예배드리는 구역예배, 일주일에 한번씩 드리는 지역예배. 또 신청하기만 하면 담임목사님께 심방받을 수도 있고. 뭐 이런 식으로 원하기만 하면, 말씀을 듣고 은혜받을 수 있는 기회가 굉장히 많습니다.
이렇게 누릴 수 있는 것들이 참 많지만, 종종 어떤 성도님들은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설교가 길면 말씀은 너무 은혜로운데 지나치게 길다. 좀 짧았으면 좋겠다. 핵심만 간략하게 말씀해 주시면 좋겠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요즘 시대를 살아가는 서구 교회나 한국 교회에만 적용되는 얘기에요. 예컨대, 중국의 경우에는 기독교가 정식으로 종교활동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편하게 어디서 말씀을 듣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지역은 서너시간을 걸어가서, 최소 두어 시간 이상의 말씀을 듣고, 끝나면 다시 서너시간을 걸어서 돌아오고. 이런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뭐 중국이야 그럴 수 있지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겠습니다만, 한번 생각해보세요. 예수님과 요한의 두 제자가 대화할 때, 궁금한 것 먼저 물어볼 수도 있었을텐데, 랍비님 어디에 머물고 계십니까? 시간을 좀 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만약에 이 두 제자가 속으로 생각할 때, 예수님이랑 한 30분 정도만 얘기하면 충분하지 뭐. 이렇게 생각했으면 예수님이 어디에 머물고 계시냐고 물어보겠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겠죠. 예수님 역시 제자들의 마음을 아시고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와라. 그러면 너희가 볼 것이다.
이어서 4번 내용 보세요. 요한복음 1장 39절 하반절 내용인데요. 바른성경 번역본으로 보시면, 그러므로 그들이 와서 그분께서 머물고 계신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머물렀으니, 때는 십시쯤이었다. 열시쯤이라는 말은 요한복음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시간입니다. 구체적인 시간이 처음으로 언급되는 부분인데요. 여기서 열시라는 말은 로마시간으로 열시입니다. 1세기에 예수님께서 생활하셨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하루를 계산할 때 어떻게 계산했냐면, 해가 질 때부터 해가 뜰 때까지 계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루는 세 시간을 간격으로 하는 단위로 구분했습니다. 그래서 해가 뜰 무렵인 여섯 시부터 시작해서 계산해보면, 열시는 오후 네 시 정도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후 네 시. 오후 네 시면 오늘날로 말하자면 해가 중천에 떠있는 시간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요. 그 당시 사람들은 오후 네 시 정도가 되면 하던 일을 슬슬 마무리했다고 합니다. 하루일과를 마무리하고 퇴근을 준비하는 시간, 그 시간이 성경에 나오는 열시쯤이었다는 것이죠.
자 그래서, 오후 네 시 정도가 되었을 때, 두 제자가 예수님께서 계신 곳을 보았고 그날 함께 거했다고 하니까, 아마도 예수님과 저녁 식사를 같이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과 두 제자가 언제까지 교제를 나눴냐. 이런 부분까지 세밀하게 알 수 없습니다만,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의 요청에 따라서 진지한 마음으로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두 제자와 함께 시간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두 제자를 예수님의 제자로 받아주지 않으셔도 되는데, 이들의 요청에 따라서 친히 자신이 머무는 곳으로 초대해 주시고, 확실하지는 않지만 식사도 같이 하셨을 것이고, 긴 시간 동안 한 공간에서 교제하면서 복음을 가르쳐 주셨을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진심으로 예수님과의 교제를 원하는 이런 갈급한 요청에 대해서 거부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은혜를 받고자 하는 갈급한 심령들에게 아낌없이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마다 목마른 심정으로 은혜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으로 예배의 자리에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디 한번 줄테면 줘봐. 이게 아니라 가난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죠.
자 이제 교재 5페이지, 요한복음 1장 40절 말씀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아까 전에 세례 요한의 두 제자의 이름에 대해 살펴볼 때 한 사람은 안드레이고 한 사람은 익명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는데요. 여기서 성경의 기본 상식으로 한 가지만 살펴보고 넘어가겠습니다. 안드레가 시몬 베드로의 형제라고 하는데, 시몬 베드로의 헬라어 이름은 씨몬 페트로스입니다. 참고로 안드레는 헬라어로 안드레아스입니다. 안드레는 베드로에 비하면 크게 중요한 인물이 아니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그냥 참고로만 들으시면 되겠습니다.
자 그런데, 요한복음에 따르면 안드레는 베드로보다 먼저 등장한 사람입니다. 게다가 안드레는 베드로보다 먼저 예수님을 만났죠. 그리고 오후 4시부터 언제까지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만, 몇 시간 동안 예수님과 깊이 있게 교제를 나눴습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 1장만 놓고 보면, 안드레가 베드로보다 훨씬 대단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안드레의 대단한 점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전했다는 데 있습니다.
6번 안드레의 증언, 요한복음 1장 41절 말씀인데요. 개역개정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안드레가 베드로에게 어떤 말을 전했습니까?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41절에서 메시야를 만났다고 할 때 이 메시아라는 말은, 아래 참고 내용을 보시면, 메시아라는 말은 원래 히브리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기름부음 받은 자 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메시아라는 단어는 마쉬아흐 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마쉬아흐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음역돼서 메씨아스 라고 기록된 것이죠. 사도 요한은 안드레의 증언을 기록하면서 뒤에 해석을 덧붙입니다. 메시아는 그리스도로 번역된다. 그러니까 메시아라는 말과 그리스도라는 말이 같다는 겁니까 다르다는 겁니까? 같다는 거죠. 그리스도의 헬라어 발음은 크리스토스입니다.
자, 그래서 정리하자면, 메시아라는 말은 원래 히브리어인데, 히브리어로는 마쉬아흐이고, 마쉬아흐의 발음을 따라 음역한 헬라어 단어는 메씨아스 이고 메시아 라는 단어의 뜻은 기름 부음 받은 자인데, 그리스도 역시 기름 부음 받은 자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헬라어로 크리스토스라고 읽는다고 했습니다.
자 그래서 이렇게 오늘 성경공부 본문의 첫 번째 단락, 최초의 제자들을 얻으신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교제에는 없지만 42절에서 안드레가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려가서 게바라는 이름에서 시몬이라는 이름을 받은 내용이 등장하는데요, 41절 내용을 살펴보면서 다룬 내용이기 때문에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두 번째 단락, 예수님께서 빌립과 나다나엘, 두 제자를 얻으신 내용을 살펴볼텐데요. 먼저 빌립을 부르시는 예수님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교재 6페이지 1번, 요한복음 1장 43절 개역개정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굉장히 단순한 내용이죠.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시는 길에 빌립을 만나셨고, 빌립에게 나를 따르라. 라고 말씀하신 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왜 특별한가 하면, 요한복음에서만 빌립이라는 인물이 단독으로 등장합니다. 공관복음에서의 빌립은 열두 제자의 명단에만 등장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요한복음에서 빌립의 등장은 굉장히 특별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빌립이 뭐 대단하고 이렇게 스팟라잇을 받는 것일까요. 저자인 사도 요한이 빌립이라는 제자에게 이토록 관심을 가지고 특별하게 조명하는 것은 아마도... 여기부터는 추측입니다. 저의 개인적인 추측은 아니고 여러 학자들의 추측입니다. 아마도, 사도 요한의 실제 삶에서 사도 요한이 빌립과 끊임없이 접촉했고 사도 요한에게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특별하게 기록했을 것이라는 썰이 있습니다. 물론 이런 얘기는 어디까지나 썰입니다. 우리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빌립을 부르신 내용이 기록되었다는 것 정도이죠. 참고로 빌립은 요한복음 6장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자 그리고 여기서 또 특별한 점은, 처음에 세례 요한의 두 제자였던 안드레와 익명의 제자가 자기 발로 예수님을 따라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베드로는 형제인 안드레의 소개로 예수님을 만나러 갑니다. 그러니까 이 제자들은 사실상 자기 발로 알아서 예수님을 찾아간 사람들입니다. 물론 공관복음에서는 이 제자들을 다시 부르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오지만, 최초로 이들이 예수님과 만나는 순간에는 이 사람들이 먼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자, 그런데 빌립의 경우에는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불러주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이전에 등장한 다른 제자들은 다 셀프서비스였는데, 빌립은 예수님께 제대로 서비스 받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 부르심 받은 빌립은 자기 혼자 부르심 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빌립의 증언. 요한복음 1장 4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우선 예수님께 부르심 받은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예수님을 증언하는 이러한 모습은 복음이 확장되고 전파되는 근본적인 원리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새롭게 따르게 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언하고, 그 증언을 받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또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언하고, 그 사람들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이런 식으로 선순환이 일어나야 복음이 확장되고 전파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 전파의 원리가 요한복음 1장에 잘 나타나 있는데, 사실 요즘에는 이런 모습을 발견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일단 요즘에는 노방전도가 거의 불가능하죠. 코로나가 터지면서 아예 불가능해졌습니다. 모르는 사람과 접촉하고 모르는 사람의 물건을 만지고. 이런 일들이 왠만하면 일어나지 않죠. 그러다보니 모르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살다 보면 이사 가고 그럴 수 있지 않습니까? 예전에 살던 집은 교회에서 10분 거리, 30분 거리 이 정도였는데, 자녀들 결혼시키고 나서 이사 가고. 이런 식으로 삶의 터전에 변화가 생기다 보면,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거리가 멀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거리가 멀어지더라도 본인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죠. 하지만 복음을 전할 때 우리 교회 와서 신앙생활 같이하자. 이런 말을 어디 쉽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옆집 사는 분한테 그런 얘기하는 게 쉽지 않겠죠. 우리 집에서 교회까지 1시간 정도 소요되는데, 1시간 거리의 교회를 같이 가자고 어디 쉽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노방전도도 쉽지 않아, 지역사회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도 쉽지 않아. 이것도 어렵고 저것도 어렵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복음 전하는 것에 대한 의무감이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되고 무뎌지게 되는 거죠. 하지만 요한복음이 말하는 복음 전파의 기본 원리는 복음을 전해서 누군가 복음을 받으면, 받은 사람이 또 전하고, 새롭게 받은 사람이 또 전하고. 이러한 원리에 따라 복음이 전파됩니다.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그래서 빌립이 나다나엘을 만나서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하는데요. 우선 이 나다나엘이라는 이름은 공관복음에서 등장하지 않습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나다나엘이라는 인물이 열두 제자 중에서 바돌로매일 것이다. 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공관복음에 나오는 열두 제자 목록에 따르면 나다나엘이라는 인물은 없고 바돌로매는 있는데, 바돌로매는 빌립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나다나엘이 바돌로매일 것이다. 이러한 추측을 많이들 합니다. 자 그래서, 1장 45절 말씀을 다시 보시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분. 그분을 우리가 만났는데, 그분이 누구인가 하면, 요셉의 아들이자 나사렛 동네에 사는 예수라는 사람이다. 라는 겁니다.
여기서 빌립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부릅니까 부르지 않습니까? 표면적으로는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부르진 않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 이 말과 메시아라는 말은 다르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똑같은 말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말씀을 성취하신 분이십니다. 물론 빌립은 예수님에 대해 증언할 때 특정 성경 구절을 언급하진 않습니다만,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는 특정 말씀들이 있다는 사실을 나다나엘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구절을 언급하지 않은 것입니다. 교재 7페이지에 보시면, 참고 구절1, 신약성경 부분에서 누가복음 24장 4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 이 말씀은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죠. 히브리어 성경을 보통 타나크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히브리어 성경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요. 세 부분으로 나눈 성경의 첫 번째 글자를 따서 이니셜을 붙여서 만든 단어입니다.
예를 들어, 모세오경은 토라, 예언서는 네비임, 성문서는 케투빔. 이렇게 세 가지의 첫 글자를 따서 붙여서 토라 네비임 케투빔. 타.나.크가 된 겁니다. 자 그래서 구약성경 타나크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성취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같이 읽어보았고요. 이어서 요한복음 5장 39절 말씀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이 성경이 누구를 증언합니까? 예수님을 증언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구약성경이 예수님을 가리키고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성취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성경 전체가 예수님을 증언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성취되었다는 것인지 조금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주에 함께 읽은 말씀인데요. 신명기 18장 15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이것이 곧 네가 총회의 날에 호렙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 구한 것이라 곧 네가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이 옳도다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 우리는 이 말씀을 메시아 예언 구절로 분류합니다.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 이 사람이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믿는 것이죠.
그리고 민수기 24장 1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쳐서 무찌르고 또 셋의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한 별, 한 규. 이것이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라 보고요. 마지막으로 예레미야 23장 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다. 다윗의 뿌리이며 다윗의 의로운 가지. 이것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죠. 이렇게 타나크에 기록된 메시아 예언 구절을 성취하는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이제 예수님에 대해서 간단명료하게 증언한 빌립의 말을 들은 나다나엘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교재 8페이지 3번, 요한복음 1장 46절 말씀인데요.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나다나엘은 갈릴리 지역 안에 있는 가나 동네에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이스라엘의 지역적인 내용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만, 예수님께서 활동하신 시대에 팔레스타인에서는 일종의 지역감정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갈릴리에서 자라난 사람들은 갈릴리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했죠. 이처럼 나사렛 동네 사람들도 갈릴리와 마찬가지로 무시당했는데, 빌립은 예수님을 나사렛 사람 예수님이라고 소개했죠.
물론 예수님의 태생은 베들레헴이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베들레헴 사람 예수로 알려져 있었다면, 무시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사렛 예수 또는 나사렛 사람 예수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태생이 베들레헴이긴 해도 실제로 성장한 것은 나사렛 동네에서 성장하셨기 때문입니다.
자, 그래서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 가운데 지역적인 감정 또는 지역적인 특성 때문에 예수님은 나사렛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들의 편견과 선입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이는 나다나엘의 말에서 잘 드러나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느냐. 앞서 살펴보았듯이 나다나엘도 가나에서 자라난 갈릴리 출신이고 예수님도 나사렛에서 자라난 갈릴리 출신입니다. 그런데 같은 갈릴리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나다나엘은 예수님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똑같이 무시당하는 동네에서 자라났는데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동향 출신이면 이해할 법도 합니다만, 여기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사렛은 이스라엘에서 중요한 도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나사렛이라는 동네 또는 나사렛이라는 지명은 구약성경에서 단 한번도 언급된 적이 없습니다. 나다나엘은 지역적인 특성이나 이러한 성경적인 근거에 따라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즉각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날 우리야 뭐 귀가 닳고 닳도록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예수님을 너무나 당연하게 구원자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예수님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때에, 예수님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처음으로 그 정보를 받아들였을 때, 이렇게 부정적인 반응이 충분히 나올 수 있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나다나엘에게는 예수님을 믿을만한 어떤 충분한 근거나 증거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자, 그래서 빌립은 나다나엘의 회의적인 말에 대해서 논쟁하지 않습니다. 뭐 빌립이 말발이 딸려서 일부러 피한 것인지, 아니면 할 말이 많아도 하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만, 빌립은 그저 나다나엘에게 와서 보라 라고 말할 뿐이었죠. 한마디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겁니다. 직접 가서 보고 판단하라고 초청하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빌립의 말. “와서 보라”라는 말이 오늘날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어야 합니다.
20년 전만 해도 대한민국의 기독교 인구가 천만명이다. 이런 통계가 있었지만 요즘에는 그렇지 않죠. 많이 잡아봐야 600만명 정도로 추정된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에는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나다나엘처럼 선입견을 가지고 예수님을 함부로 판단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물론 오늘날 믿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나다나엘처럼 어떤 근거를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교회에 대한 적대감, 썬데이 크리스찬들이 빛과 소금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드는 적대감, 이러한 생각들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향해 복음으로 초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와서 보라.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와서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살아계신 분이신지, 예수님께서 과연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신지 듣고 판단할 수 있도록, 부디 말씀을 통해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그들을 향해 복음으로 초대하는, 와서 보라 라는 메시지를 그들에게 던질 수 있어야겠습니다.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나다나엘은 빌립의 말에 따라 예수님을 만나러 갑니다. 표에 있는 대화 내용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보시자마자 이렇게 말씀합니다. “보아라.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 이 말씀은 도통 무슨 말씀인지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우선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 라는 말은 당시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이 서로를 가리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통상적으로 표현하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 라는 말씀보다 그 뒤에 있는 말, 그 속에 간사함이 없다. 라는 평가를 좀 더 집중해서 살펴봐야 합니다.
일단 우리는 예수님께서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 완전한 사람이시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완벽하게 꿰뚫어 보실 수 있죠.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한 점의 오해도 없이 완벽하게 아실 수 있습니다.
이런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어떻게 평가하셨습니까? 간사함이 없는 사람으로 평가하셨습니다. 앞서 나다나엘이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듣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1세기 이스라엘의 시대적인 배경과 지리적인 배경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나다나엘이라는 사람 그 자체에는 간사함이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간사함이 없다. 라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헬라어 원어를 있는 그대로 옮기자면, 그의 안에 거짓된 것이 없다. 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겉으로 드러나는 언행과 속으로 가지는 생각이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마음속으로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깊이 있게 상고하며 검토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 간사함이 없다는 이 말씀은 단 두 마디로 표현되지만, 나다나엘은 자신에게 간사함이 없다는 말씀이 진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본인이 정말 그런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 만난 사람이 자기에 대해 정확하게 판단한다면 어떨까요. 온몸에 소름이 돋을지도 모릅니다. 길을 가다가 도를 아십니까 이런 사람들과는 격이 다르죠. 처음 뵈었는데 보니까 복이 많으세요. 그런데 복이 막혀있으시네요. 막힌 혈을 뚫으려면 제사를 지내셔야 돼요. 제사비는 얼마구요. 이런 도쟁이들과는 아예 격이 다른 겁니다.
자, 그래서 나다나엘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꿰뚫어 본 예수님에 대한 선입견이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자신을 어떻게 아시는지 여쭤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내가 너를 보았다.”
이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 번째는 상징적인 해석입니다. 랍비 문헌에 따르면 무화과나무의 그늘은 묵상과 기도의 장소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에 따르면 무화과나무는 본향이나 형통함을 상징하는 단어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뭔가 영적이면서도 상징적인 해석이 가능하긴 합니다만, 지금 예수님과 나다나엘의 대화는,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지식, 예수님의 신적인 지식, 전지하신 그 성품이 드러나는 대화이기 때문에, 굳이 영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죠.
그래서 두 번째 해석은 문자적인 해석입니다. 그냥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빌립이 나다나엘을 만나러 가기 전에 실제로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단순하지만, 정말 그랬을 수 있죠. 나다나엘이 외출해서 길을 가다가 잠깐 무화과나무 아래에 머무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종합해보자면, 간사한 것이 없다는 예수님의 평가는 나다나엘의 내면을 꿰뚫어 보신 것이고,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보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육안으로 보시지 않아도 어떤 사람이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 다 아실 수 있다는, 그런 전지하신 능력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나다나엘이 예수님에 대해 상상하고 이해하는 것보다 예수님의 실체는 그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 속에 간사함이 없는 나다나엘은 예수님과의 짧은 대화에서 한 가지 진리를 깨닫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랍비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냐고 반문한 나다나엘의 생각과 마음은 180도 변했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렛과 같은 천한 동네 출신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러한 선입견이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 되심을 침범할 수 없는 것이죠.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독생자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자녀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고백은 분명하게 구분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이고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면 똑같은 자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다르다는 겁니다. 나다나엘의 고백은 유일하신 아들로서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 이스라엘의 임금이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표현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에 대해 잘못 이해한 사람들은 왕이신 예수님을 로마로부터의 정치적인 해방을 위한 왕으로 이해했습니다. 완전히 잘못된 이해입니다만,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떤 왕으로 이해하든 예수님은 약속된 왕이셨습니다. 자, 여기서 나다나엘의 고백을 끝으로 대화가 종결되었으면 이해가 잘되었을텐데, 예수님께서 한가지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교재 9페이지 제일 위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고 말하므로 믿느냐? 네가 이것들보다 더 큰일들을 볼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볼 것이다. 아멘.
나다나엘이 더 큰 일들을 보게 될 것인데, 그 일이란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다. 라는 겁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 28장 12절을 인용하신 말씀인데요. 아래 참고구절에 창세기 28장 12절 말씀이 있죠.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창세기 28장 12절 말씀이 거의 동일하죠. 여기에 추가된 것은 “인자”라는 단어입니다. 인자라는 단어는 헬라어를 직역하면 사람의 아들이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인자 라는 단어의 기원과 의미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예수님께서 여기서 인자라는 표현, 예수님 자신을 가리켜 말씀하실 때 사용하시는 이 인자라는 표현이 등장한 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고백했는데, 여기서 예수님은 인자라는 표현을 사용하시면서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왕으로서의 오용을 막아 주십니다. 또한 창세기 28장 12절 말씀을 인용하신 것은 앞으로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활동하시면서 보여주실 수많은 가르침과 기적들, 그 모든 사역들 가운데 나타나는 예수님의 영광을 이 말씀으로 알려주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들을 목격하고 가르침을 귀로 들었어도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만, 그들이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위대한 일들을 직접 목격하고 그 영광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도록 허락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일들은 이제 요한복음 2장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자 이렇게 4주에 걸쳐서 요한복음 1장 내용을 전체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길고 어려울 수 있는 내용입니다만, 잘 따라와주셔서 감사드리고요. 이번 한주동안 오늘 배우신 말씀을 천천히 묵상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더욱 깊이 알아가시고, 또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적극적으로 전할 수 있도록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결단하시는 그런 귀한 한주 보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요한복음 1장 35절부터 51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제자들을 만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평소에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말씀들을 깊이 있게 묵상하며, 주님을 더욱 알아가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시간을 내어주시고 말씀으로 가르쳐 주시고, 주님의 사람으로 세워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본받기를 원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출신성분으로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냐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 나다나엘을, 주님의 사랑으로 변화시켜 주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시라는 고백을 할 수 있도록 변화시키시는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이러한 성경적인 지식이, 단순한 지식으로 남지 않게 하여 주시고, 우리의 삶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널리 전하기를 원하오니,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우리 주님을 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