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강 오병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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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기도하고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나눌 내용의 제목은 오병이어입니다. 요한복음 6장 1절부터 21절까지의 말씀을 한절씩 교독하겠습니다. ~~~ 아멘.
요한복음 6장은 요한복음의 중대한 쟁점이 모여있는 중심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요한복음 6장은 1절부터 71절까지 굉장히 긴 호흡으로 진행됩니다. 요한복음 6장이 전개되는 방식은 5장과 유사합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표적을 행하시고, 그 이후에 표적의 중요성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뒤따릅니다. 물론 오늘 살펴볼 내용인 16절부터 21절까지의 내용은 예수님의 표적과 가르침 사이에 들어가는 이야기입니다만, 물 위를 걸으신 사건을 제외하면, 표적과 가르침이라는 하나의 긴 이야기를 구성하게 됩니다. 시간 관계상 오늘은 물 위를 걸으신 사건까지만 살펴볼텐데요.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던 오병이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은지, 놓치고 있던 깊은 의미는 무엇이 있는지. 이런 내용들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 파트는, 오병이어 사건의 배경이에요. 6장 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큰 무리가 그분을 따랐는데, 그들이 예수께서 병자들에게 행하신 표적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바른성경 번역본이 직역에 가깝게 번역하는 편이긴 합니다만, 사실 헬라어는 직역하면 직역할수록 표현이 어색해집니다. 예컨대, 6장 2절 말씀을 보면, 내용 자체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없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원어로 이 문장을 보면, 이 문장에 나오는 세 개의 동사의 시제는 미완료과거 시제로 기록되어 있어요. 원어의 뉘앙스를 살려서 읽으면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큰 무리가 그분을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께서 병자들에게 행하고 있던 그 표적들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이 좀 어색하긴 합니다만, 사도 요한이 미완료과거 시제로, 뭔가 계속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기록한 이유는, 큰 무리.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몰려다녔는지는 알 수 없지만,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행하시는 표적들을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따라다녔다는 사실을 기록한 겁니다.
이러한 내용은 요한복음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데요. 예컨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치유하신 사건에서도 무리는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가셨을 때에도 무리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때에도 무리는 예수님을 지켜보았죠.
그런데 이 불특정 다수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지켜보는 것은, 예수님을 믿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닌 이유는 예수님께서 다양한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들을 보았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다양한 표적들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실 공관복음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이나 표적이 그렇게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경우는 많지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표적을 아낌없이 행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표적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주시기 위한 표적이기 때문이에요. 다시 말해 예수님의 자기 계시를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는 겁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아무런 표징도 없이, 아무런 증거도 없이 말로만 자기 자신을 구원자라고 주장한다면, 쉽게 믿을 수 있을까요? 자기에게 죄사함의 권세가 있다고 주장하면, 아 그렇군요. 당신이 바로 우리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구세주이시군요. 할렐루야. 누가 이렇게 반응하겠습니까? 절대로 그렇게 반응하지 않겠죠. 이러한 점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주시기 위한 목적에서라도 표적을 보여주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복음과 관련해서, 예수님께서 메시야되심을 알려주시기 위한 내용과 관련해서 표적을 일으키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외에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지만, 성경 저자는 그런 내용들의 디테일은 하나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성경 저자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 표적들을 옆에서 지켜보았을 것이고, 병 나은 사람들의 이름도 다 알고 있었을텐데, 의도적으로 기록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 그래서, 3페이지 요한복음 6장 3절 말씀을 보시면, 오병이어 기적이 일어난 장소가 등장하는데요.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거기에 앉으셨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죠. 오병이어의 배경은 어디입니까? 산이죠. 그런데 아래 마태복음 14장 13절 말씀 보시면, 장소가 어디로 나옵니까? 빈 들. 마가복음 6장 35절 말씀에 따르면 장소가 어디입니까? 빈 들. 누가복음 9장 12절 말씀에 따르면 어디입니까? 빈 들.
자,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따르면 오병이어 표적이 일어난 장소는 산입니까? 빈들입니까? 빈들이죠. 그런데 요한은 왜 산이라고 기록한 것일까요? 기억이 뭐가 잘못되었을까요? 이런 부분에서 성경의 모순이 발견된다고 할 수 있을까요? 네. 정답을 말씀드리자면, 산과 빈 들은 같은 단어로 볼 수 있습니다. 산이라고 번역한 단어인 “오로스”라는 단어는 특정한 산이나 비탈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구릉지대, 또는 고지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자 그래서, 산이냐 빈들이냐. 요한복음이 맞냐, 공관복음이 맞냐. 이런 이야기는 굳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산이라는 표현이나 빈 들이라는 표현 모두 정확한 표현은 아니죠. 해발이 높으면 산이라고 표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등산할 수 있는 곳을 산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겠죠. 또 반대로 해발과 상관없이 눈에 보이는 환경만 놓고 보면 빈들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내용을 종합해 보면, 구릉지대 또는 고지. 이런 식으로 표현해야 정확한 표현이 되겠습니다만, 사실 뭐가 맞고 뭐가 틀리다. 이런 건 아니에요. 확실한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무슨 백두산, 한라산, 설악산과 같은 그런 산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날이 저물어 갈 때, 저녁에. 이런 내용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특별한 내용이 등장하죠.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는데, 이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가 무엇이냐?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행하시는 표적들을 보았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이런 진술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느냐. 이 무리가 표적의 목적을 망각한 채로,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는 겁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표적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이시고, 구원자이시라는 사실을 계시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목적을 망각하고 표적만 보기를 원한다면, 이것은 참된 믿음이라고 볼 수 없겠죠.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이러한 내용을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다음주에 살펴볼 내용에서도 이 내용이 등장할 거예요.
그리고 오병이어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좀 더 살펴보려면, 마가복음 6장 33절 말씀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교재에는 없는데요.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한적한 곳으로 이동하셨지만, 큰 무리가 예수님께 몰려들면서 오병이어 기적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3페이지로 넘어가서요. 요한복음 6장 4절 말씀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나서 두 번째 유월절을 맞이하시는데요. 지난 학기에도 설명을 드렸습니다만, 요한복음에서 유월절은 굉장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요한복음의 구조를 다양한 방식으로 나눌 수 있지만, 유월절을 중심으로 구조를 나눌 수 있다고 말씀드렸죠. 3페이지 제일 아래 표에 나와있는대로, 유월절을 중심으로 구조를 나누면, 요한복음의 서론, 예수님의 등장, 첫 번째 유월절, 두 번째 유월절, 세 번째 유월절,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 및 결론. 이런 식으로 구조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월절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단순하게 구조를 나눈 것이 아니라 신학적인 의미가 담겨 있어요. 예컨대, 첫 번째 유월절의 경우에는 성전청결 사건이 발생한 때이고, 두 번째 유월절은 오병이어 사건이 발생한 때이고, 세 번째 유월절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이 발생한 때입니다. 성전청결, 오병이어, 나사로 살리심. 이 세 가지 사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선 유월절이란 무엇이죠?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이죠. 이 절기를 지킬 때 꼭 행해야 하는 의식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각 가정에서 어린 양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기록되어 있죠. 이런 측면에서 예수님은 유월절에 잡아먹는 어린 양과도 같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자 그래서, 첫 번째 유월절에 발생한 사건. 성전 청결 사건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곧 허물어지게 될 성전이라고 지칭하십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죽음을 예고한 첫 번째 사건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그런데 이 죽음은 단순하게 예수님께서 고난 당해서 죽으시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죠? 죄사함과 영생을 가져다주시는 죽음이죠. 이러한 점에서 예수님의 죽음은 생명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에서 등장하는 마지막 세 번째 유월절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둔 시점에 언급되는데요.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시고 나서 이런 말씀을 하시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유월절과 관련해서 생명이라는 주제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죠. 그리고 오늘 우리가 다루는 본문인 요한복음 6장의 오병이어 사건은 다음주에 살펴볼 생명의 떡, 또는 생명의 빵 주제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유월절과 생명이라는 주제가 연결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자 이러한 점에서 요한복음의 유월절은, 사도 요한에 의해서 신학적인 의도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생명과 관련되어있다는 거예요. 누구의 생명이요?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과 관련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병이어로 인해 양식을 먹게 된 사람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미리 맛보는 그런 엄청난 체험을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 오병이어 사건은 다른 사건들과 다르게 제자들이 개입됩니다. 요한복음 2장, 가나 혼인 잔치, 성전청결 사건, 요한복음 3장 니고데모와의 대화, 요한복음 4장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왕의 신하를 고치신 사건. 이 내용들을 잘 보면, 제자들이 단 한 명도 개입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제자들이 어디를 갔다 왔다. 이런 식으로 등장하긴 합니다만, 사건에는 깊이 개입되지 않는다는 얘기에요. 그런데 오병이어 사건에서는 제자들이 개입됩니다. 그 내용이 두 번째 파트에 등장하는데요. 두 번째 파트, 어떻게 먹일 것인가? 해당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6장 5절과 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신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디서 빵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라고 하셨으니,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예수께서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지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시려는 것이었다.”
우선 이 내용은 공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14장 16절 말씀을 보시면,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이렇게 말씀하시죠. 여기서 한 가지 신학적인 논쟁이 발생합니다. 마태,마가,누가복음에서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시고, 요한복음에서는 빌립에게 말씀하셨다고 하는데, 이 말씀을 보면 요한복음이 시대적으로 가장 뒤늦게 기록된 증거가 아니겠는가. 이런 식으로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메츠거라는 신약학자는 후대에 글을 쓰는 기록자들이 이름을 더하거나 빼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기 때문에, 이것을 근거로 삼아서 저작 연대의 선후를 따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질문하신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우리가 어디서 빵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왜 빌립에게 질문하셨을까요? 요한복음에는 이런 내용이 나와 있지 않지만, 빌립이 벳세다 출신이기 때문에, 자기 동네이기 때문에 먹을 것을 사오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기 때문에 빌립에게 질문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질문하신 것과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라고 명령하신 것은 상충되는 내용은 아니에요. 그런데 문제는 사복음서 내용을 하나로 합쳐서 원래 이 내용일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거나, 아니면 차이점을 분해해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따지는 것. 이런 시도는 굉장히 위험한 시도입니다. 그냥 비교 정도는 할 수 있으나, 무엇이 맞고 틀린지. 원래 상황은 무엇이었을지. 이런 내용을 혼자 생각하고 고민하고 결론짓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고도 불필요한 생각입니다.
자 그래서, 예수님께서 도전을 주신 것은 무엇이냐. 공관복음에 따르면 날이 저물 때이고, 사람은 굉장히 많고, 수중에 먹을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예수님은 빌립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어디서 빵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그리고 나서 6장 6절에서는 사도 요한이 해설을 덧붙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답을 가지고 계셨지만, 이 문제가 빌립의 믿음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에, 독자들로 하여금 오해가 없도록 추가 해설을 덧붙인 것이죠.
이 구절을 통해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긍정적인 목표를 두고 시험이 주어질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영적인 시험이라는 것은 언제나 어렵습니다. 세상에 쉬운 시험은 없습니다. 시험이 쉬우면 그게 시험일까요. 누구나 다 맞추고 누구나 다 칭찬받는 시험이 제대로 된 시험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죠. 얼마나 알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실력을 검증하기 위해서, 증명하기 위해서. 이런 목적으로 시험 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영적인 시험도 마찬가지에요. 물론 우리가 증명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시험을 통해서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적인 시험을 부여하십니다. 각자 처한 상황과 환경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시험이 주어지는 것이죠.
그런데 본문에서 빌립은 예수님께서 주신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6장 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빌립이 예수께 대답하기를 “각 사람이 조금씩이라도 받게 하려면, 그들에게 이백 데나리온 어치의 빵도 부족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빌립은 예수님의 시험에 어떻게 반응합니까?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합니다. 예수님께 몰려든 사람을 보고 이백 데나리온의 금액으로도 부족하다. 이런 이야기를 하죠. 여기서 1데나리온은 하루 일당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 200데나리온은 200일 치 일당이겠죠. 오늘날 개념으로 주5일제로 계산해 보면, 200데나리온은 40주 동안 일한 금액이고, 월로 치면 열 달 정도 되는 금액이라고 볼 수 있겠죠. 생각보다 꽤나 큰 금액이 필요한 상황인데,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빌립은 예수님의 능력을 온전히 믿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예수님께서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빌립을 책망하지 않으신다는 점이죠.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영적으로 양육하시고 시험하시고 기다리십니다. 물론 때에 따라서는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는 정도가 다르겠습니다만, 오병이어 사건에 있어서 만큼은 예수님의 책망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 66권 전체를 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고의 폭을 좀 더 확장해 보자면, 빌립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와 유사한 기적을 보여주셨든 보여주지 않으셨든, 열왕기하에 등장하는 기적을 알고 있다면, 다른 반응을 보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4페이지 제일 아래에 있는 참고 구절에 있는 내용, 열왕기하 4장 42절부터 44절까지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한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부터 와서 처음 만든 떡 곧 보리떡 이십 개와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린지라 그가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그 사환이 이르되 내가 어찌 이것을 백 명에게 주겠나이까 하나 엘리사는 또 이르되 무리에게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그가 그들 앞에 주었더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먹고 남았더라”
선지자 엘리사가 보리떡 이십 개와 자루에 담은 채소를 무리에게 주었는데,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먹고 남습니다. 상황은 오병이어 사건과 거의 유사합니다. 감사기도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 이 차이를 제외하면 거의 똑같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에서 음식을 나눠주는 것은 예수님이 아닌 제자들이 나누어 주었고, 엘리사의 이적에서도 엘리사가 아닌 사환이 음식을 나누어 줍니다. 음식을 먹고 남은 것도 동일합니다. 디테일한 내용들이 빠져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거의 동일하죠.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빌립이 이 사건을 알고 있느냐. 모르고 있느냐. 이걸 확신할 수 없다는 거예요. 하지만 유사한 기적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 어떤 기적도 예수님께서 행하실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현실적인 해결방식보다는 영적인 해결방식에 초점을 두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6장 8절과 9절 말씀을 보면 안드레가 나서서 말합니다. 8절 9절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분의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말하기를 “여기 한 아이가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이렇게 많은 이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안드레는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는 아이를 데리고 나옵니다. 그런데 안드레의 생각은, 이 정도로 택도 없다는 생각이었죠. 그러나 이것들이 이렇게 많은 이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안드레 역시 빌립과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하지만 아이가 가지고 온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결과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배부르게 만들어 준 귀한 음식으로 사용됩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조금 더 생각할 것이 있는데요. 빌립의 반응과 안드레의 반응. 이 두 제자의 반응이 인간적인 반응으로 여겨지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사실 이렇게 반응하는 것이 일반적이죠. 안드레가 데리고 온 아이의 음식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어떤 음식인지 아십니까? 이 당시에 보리 빵이라는 것은 보리로 만든 빵을 의미하는데요. 보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음식의 재료였습니다. 로마 시대에 가난한 사람들의 주식이 보리였다고 합니다. 당시 역사적 기록물에 따르면, 보리는 이성이 없는 짐승들이나 불행한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곡식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잘 사는 사람들은 보리 빵을 먹지 않고 밀로 만든 빵을 먹었다고 합니다. 아예 먹지 않았다는 것이죠. 실제로 가격도 밀이 보리보다 두 세배 더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가난한 사람은 밀 빵을 먹을 생각을 아예 하지 못했겠죠.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이런 배경을 가지고 생각해 보면, 이 아이가 가지고 온 보리빵 다섯 개는 그렇게 훌륭한 한 끼 식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물고기 두 마리는 헬라어로 보면 작은 물고기를 의미하는데요. 이러한 점에서 이 아이가 가지고 온 양식은 많은 사람들을 먹이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양식이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현실과 믿음 사이의 괴리를 냉정하게 판단하고,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구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자 이제 오늘 본문의 세 번째 파트, 오병이어 기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6장 1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들을 앉게 하여라.” 그곳에는 풀이 많았으므로 사람들이 앉았는데, 수가 약 오천 명이었다.”
여기서 오천 명이라는 숫자는 성인 남성의 숫자만 계수했을 때 그렇다는 얘깁니다. 다시 말해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의 숫자는 빠져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여자들과 아이들 숫자를 합해서 계산해 보면, 대략적으로 2만명 가까이 될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정합니다. 2만명이면 어마어마한 숫자죠.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백명씩 또는 오십명씩 무리를 지어 앉히십니다. 무리를 지어서 앉히시는 내용은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내용이에요. 기적을 베푸시고 음식을 먹이실 때에도 질서 있게 진행하시는 것을 알 수 있죠.
이어서 6장 11절과 1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러자 예수께서 빵을 가지고 감사기도를 드리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와 같이 하여 그들이 원하는 대로 주시니, 그들이 배불리 먹은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남은 조각들을 모으고 조금도 버리지 마라.” 하시므로,”
예수님께서 빵을 가지고 감사기도를 드리신 후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주십니다. 정확하게 빵은 다섯 개만 먹을 수 있어요. 이런 것이 아니라 원하는 대로. 배불리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하게 나눠주셨다는 거예요. 빌립이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했을 때, 무려 200데나리온이 있어도 배불리 먹일 수 없는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2만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에게, 차고 넘치게 음식이 공급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병이어 사건의 특징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특징은, 예수님께서 차고 넘치게 공급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이러한 특징은 하나님께도 동일하게 적용되죠. 하나님은 우리를 풍성하고 충만하게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음식은 두말하면 잔소리겠죠. 어느 누구 하나 만족하지 못한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배불리 먹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특징, 예수님은 차고 넘치게 채워주셔서 필요를 만족시켜 주시는 분이지만, 낭비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오병이어 표적을 보면서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찬 빵과 물고기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누가 더 가져가서 먹었는지, 이런 내용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남은 것을 모으고 조금도 버리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런 것을 보면 예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성자 하나님이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질적인 것들을 아낌없이 사용하거나 폐기하는 분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것.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기억하는 것. 먹을 때만 감사하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먹고 남은 것을 보면서도 기억할 수 있는 것. 이런 교육적인 효과들이 이 안에 담겨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네 번째 파트인 표적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6장 1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을 보고 말하기를 “이분이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이시다.”라고 하였다.”
사도 요한은 오병이어 사건을 표적이라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이 사건만 놓고 보면 무슨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거나, 귀신 들린 사람이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되었다거나, 나병환자 또는 중풍병자 온전히 치유되었다거나, 맹인이 눈을 뜨게 된다거나 하는 이런 기적적인 일이 발생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사건은 마치 마술사가 동일한 물체를 여러 개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그런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이 사건을 표적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이 오병이어 사건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으나, 요한복음에 따르면 오병이어 사건은 표적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나눠주시고 2만명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인파가 한 자리에서 식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성만찬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오병이어 사건이 성만찬을 예표한다. 이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 사건이 기록된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요한복음 6장 2절,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6장 14절,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이 사건의 서론과 결론 부분에서 표적이라는 단어가 동일하게 등장한다는 점에서, 사도 요한은 오병이어 사건을 성만찬보다는 표적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다음주에 살펴볼 내용, 6장 22절 이하의 내용을 보면, 표적을 중심으로 대화가 진행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복음에 기록된 오병이어 사건을 표적으로 받아들이되, 표적이 가리키는 바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6장 14절 말씀 다시 보세요.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을 보고 말하기를 “이분이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이시다.”라고 하였다.”
서두에 표적이 무엇을 목적으로 일어난다고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어난다고 했죠. 그렇다면 오병이어 표적을 체험한 사람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부르게 식사한 이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이분이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이시다.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사도 요한은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서, 특별히 이 사람들이 한 말에 대해서는 크게 부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 자체는 틀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만, 오병이어 표적을 체험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모세와 유사한 인물로 떠올렸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모세가 어떤 일을 했습니까? 출애굽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굶주릴 때, 하나님께 간구해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매일 매일 먹을 수 있도록 중간에서 다리 역할을 하지 않았습니까?
또한 신명기 18장 15절에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한 사람을 일으키실 것이다. 이렇게 예언한 바 있습니다. 실제로 모세가 예언한 내용, 물론 이 예언한 내용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그대로 전한 것이지만, 좌우지간 나와 같은 선지자 한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했죠. 이 사실을 잘 모르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일단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고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이런 나라들에게 끊임없이 침략당하고 정복당하고 압제당하고. 이런 비극적인 역사 가운데에서도 계속해서 메시야를 기다렸던 거예요. 어떤 메시야를 기다렸다는 겁니까? 나와 같은 선지자.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하나님께서 일으키실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계속해서 기다렸던 겁니다.
자 그래서, 요한복음 4장에서도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가리켜 선지자라고 고백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고백하는데, 이들이 고백한 내용 자체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예수님은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말씀을 성취하시는 분이 맞아요. 맞는데 그럼 문제는 무엇이냐.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기대에요. 2번에 나와 있는 요한복음 6장 1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는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데려다가 왕으로 삼으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떠나가셨다.”
오병이어 표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어떤 마음을 품습니까?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야겠다. 이런 마음을 품습니다. 여기서도 우리가 잘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 이 사람들은 단순하게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니까, 말도 안 되는 표적을 행하시는 분이니까. 이분의 힘과 능력이면 되겠다. 다 할 수 있겠다. 이런 마음에서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스라엘의 첫 번째 선지자였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이라는 고대 근동 지방의 초강대국으로부터 합법적으로 출애굽시켰습니다. 속국 정도가 아니라 노예로 살아가던 그때 그 시절에,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하에 출애굽한 것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이스라엘에 나타난다면, 모세처럼 출애굽시킬 것이다. 이런 믿음이 있었던 겁니다.
정리하자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을 체험하고 예수님을 구약의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생각했으나, 모세처럼 출애굽시키는 선지자로 생각했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때에 이스라엘은 국가 개념이 없던 때였죠. 로마에게 정복당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마치 모세처럼 로마에 의한 예속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것이라 생각했던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억지로 데려다가 왕으로 삼아야겠다. 이런 마음을 품었던 것이죠.
그런데 이런 생각은 막연한 꿈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당시에 존재했던 열심당원들과 같이 독립운동하는 사람들, 이스라엘의 독립을 꿈꾸는 급진적인 사람들이 존재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마음만 먹으면 반역을 꾀해서라도 강제로 예수님에게 왕관을 씌우고 독립하는 것을 추진할 수 있었습니다. 반역의 끝이 죽음이라고 하더라도 이들에게 독립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이건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의 정서도 마찬가지죠. 일제강점기 시기, 얼마나 치욕스러운 역사입니까. 그러니 모두를 이끌만한 리더가 나타나면 열광하기 마련입니다.
자 그런데 독립운동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것 같은 선지자가 나타났다면, 명분도 너무나 분명하죠. 연설을 잘해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 일반인 중에서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 정도가 아니라, 2만명에 달하는 엄청난 인파의 배를 채워줄 수 있는 능력과 온갖 치유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스라엘이 독립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계산이 섰을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신 왕권의 본질을 확인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8장 33절, 36절, 3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데에는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한 목적이 전제되어 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형에 대한 공식적인 판결은 신성모독과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한 점. 이 두 가지를 이유로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잘 보면, 본인이 로마가 통치하고 있던 과거 이스라엘 영토가 자신의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36절에 보시면,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말씀하시죠. 여기서부터 분명히 나타나요. 국가의 개념에 영토, 국민, 주권. 이 세 가지가 들어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개념이 뭔가 다른 것처럼 보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토나 국민에 대한 개념이 흐릿해 보이죠. 하지만 어쨌거나 확실한 것은, 예수님의 나라는 이 땅의 것이 아니라는 거에요.
자 그런데, 예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스스로를 왕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오해를 살만한 표현이라는 사실을 아심에도 불구하고 왕이라는 표현을 하시는 거예요. 37절 말씀 보세요.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왕이라고 말씀하시지만 동시에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기 위한 목적도 말씀하시죠.
이러한 점에서 예수님은 사람이 억지로 세운다고 왕이 되시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죠. 예수님은 이미 왕이에요. 이미 이 세상의 왕이신데, 왕으로 세운다? 말도 안 되는 소리죠.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통치라는 것은, 국민을 위한 통치? 그런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는 나라, 하나님의 거룩함이 충만한 나라. 그런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에요. 국민들이 원하는 어쩌구 저쩌구. 이런 이야기는 통용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필요들을 채워주지 않는 나라라는 얘기는 아니에요. 어차피 우리가 나중에 하나님 나라에 가게 되면, 영화로운 상태가 되고, 그 상태가 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과 일치하기 때문에, 다 포함된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다만 원론적으로, 본질적으로 표현하자면 그렇다는 얘기에요.
자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100퍼센트 정확하게 아시기 때문에, 표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는 사실을 아시고 홀로 산으로 떠나시는 것으로 오병이어 표적이 마무리됩니다.
이제 오늘 강의를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 굉장히 널리 알려져 있는 사건인 오병이어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요한복음에 따르면 독특한 관점으로 묵상할 수 있는데요. 무엇을 중심으로 묵상할 수 있다고 했죠? 표적. 표적을 중심으로 묵상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보여주시는 표적들로 인해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결국 오병이어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선지자로 고백하지만, 표적에 대한 반응은 예수님을 왕으로 세워서 이스라엘을 독립시키고자 하는 마음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점에서 오병이어 사건은 예수님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사람들의 실패가 나타나요. 첫 번째 실패는 제자들의 실패였죠. 빌립과 안드레가 예수님께서 주신 영적인 시험에 통과하지 못합니다. 두 번째 실패는 표적을 체험한 사람들, 빵과 물고기를 배불리 먹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는 점에서 드러났죠.
여기에서 우리는 표적에 대해서, 기적적인 일에 대해서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컨대, 기적을 체험했다고 해서, 기적을 체험한 사람이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 뜨거운 사람? 깊은 사람? 무조건 이렇게만은 볼 수 없다는 거예요. 가나 혼인잔치에서 항아리에 물을 담은 하인들? 새 포도주를 마신 사람들? 다 예수님을 믿지 못했죠. 또한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수많은 기적을 체험한 제자들 역시 어떻게 먹일 수 있겠냐는 예수님의 말씀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죠. 이러한 점에서 표적이 믿음을 증명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표적을 체험하는 것, 기적을 체험하는 것, 어떤 영적인 은사를 받는 것. 이런 식의 체험주의적인 신앙생활에 매물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개혁주의 진영에서는 이런 체험들을 그렇게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떤 체험을 강조합니까? 우리의 죄악된 본성은 언제나 죄성을 향해 관성의 법칙처럼 이끌리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성향에도 불구하고 주님께로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품는 것,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주님을 알아가는 것, 그 가운데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는 것. 이 모든 과정 가운데 성령님의 조명하심과 동행하심을 깊이 체험하는 것. 이것이 바로 개혁교회가 지향하는 신앙생활입니다. 오늘 나눈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표적과 믿음의 관계를 깊이 상고하시고,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리며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주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일평생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귀하게 여기며, 그 말씀을 온전히 깨달으며, 말씀에 근거하여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인생 가운데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인 시험들을 달게 여기며, 어떠한 순간에도 주님을 향한 헌신과 순종의 마음을 잃지 않고, 주님의 몸된 교회에 유익을 끼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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