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강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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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기도하고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함께 공부할 주제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예수님”입니다. 요한복음 4장 43절부터 54절까지의 말씀인데요. 한절씩 교독하고 마지막 절은 함께 읽겠습니다. ~~ 아멘.
오늘 함께 살펴볼 내용. 첫 번째 파트는 다시 갈릴리에 오신 예수님입니다.
요한복음 4장 43절 말씀을 보시면,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오시며 라고 기록되어 있죠. 여기서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셨다고 합니다. 이틀 동안 예수님께서 어딘가에 계셨다는 건데, 예수님께서 어디에 계셨습니까? 사마리아 땅에 사마리아 사람들과 이틀 동안 지내셨다는 사실을 지난주에 살펴보았죠. 이틀 동안 그곳에 계시다가 떠나서 갈릴리로 다시 오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44절에서 등장합니다. 4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43절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신다고 기록되어 있고, 44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선지자가 고향에서 높임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럼 여기서 고향은 어느 지역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당연히 갈릴리겠죠.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인 45절 말씀 보세요.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우리말 성경에 “그러므로”라는 말이 빠져있지만 원어에는 “그러므로”라는 단어와 “그때에”라는 단어가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해석되지 않고 누락된 단어들을 포함시켜서 읽어보면 43절, 44절, 45절 내용을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이틀 뒤에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떠나셨다. 예수님께서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도착하셨을 때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했다.
지금 이 흐름이 이해되십니까? 네. 그냥 이 정도로 읽으면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만, 여기서 고향이라는 단어를 갈릴리로 바꿔서 읽어보면 문맥이 이상해집니다. 한번 들어보세요.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떠나셨는데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 높임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대요. 다시 말해서 선지자이신 예수님께서 자기 고향인 갈릴리에서 높임을 받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대요?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도착하셨대요. 그리고 그때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했대요.
이 내용이 이해가 되십니까? 생각해 보면 뭔가 부자연스럽죠. 그렇다면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에서 고향이라는 단어를 갈릴리로 바꿔서 읽어도 될까요? 안 될까요? 네. 문자적으로만 보면 갈릴리로 바꿔서 읽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만, 이 내용을 요한복음 1장부터 4장까지의 문맥을 고려해서 생각해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천천히 설명해 드릴게요. 우선 이 고향이라는 단어를 갈릴리라고 생각할 때, 이 갈릴리라는 단어가 단순하게 지역 이름으로서 “갈릴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마리아 땅과 대비되는 유대 땅으로서의 갈릴리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됩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본 내용에 따르면 사마리아는 어떤 느낌이었습니까? 처음에는 예수님을 잘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동네였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죠.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땅에서 어떻게 활동하셨습니까?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신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세한 내용은 기록되어있지 않아서 디테일한 부분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만, 만약에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는 과정에서 어떤 반대나 위협이 있었다면 요한복음 4장에 기록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4장 내용을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복음 전파 하실 때 반대나 위협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추측할 만한 내용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예수님은 유대 땅에서 활동하는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서기관들, 종교 지도자들, 이런 사람들의 견제를 받지 않고 사마리아 땅에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 자기 고향에서 복음을 전하실 때 어떤 반응을 얻습니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지만, 비율로 따져보면, 부정적인 반응이 훨씬 더 많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이러한 부정적인 반응에 대한 내용이 이미 언급되었죠. 아래 참고 구절을 보시면, 요한복음 1장 5절,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는 말씀과 요한복음 1장 11절,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이런 말씀들에서부터 이미 자기 백성. 예수님의 백성이 예수님께 어떤 반응을 보일지 나타나 있죠.
또 요한복음 2장에서 성전 청결 사건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행하냐. 무슨 표적을 보일 수 있겠느냐. 이런 식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는 어떻습니까.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인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와 기나긴 대화를 나누지만, 결국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온전히 영접하지는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1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죠.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또 요한복음 4장에서는 어떻습니까. 4장 1절에서 3절 말씀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예수님께서 아셨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베푼 세례이긴 했지만, 어쨌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거슬리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아신 직후에 예수님께서는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이동하십니다.
물론 요한복음 1장부터 4장까지의 문맥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자기 고향 땅 사람들에게 육체적으로 박해를 받으신 것은 없었습니다만, 사마리아 땅에서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시고, 또 사마리아 사람들이 짧은 시간 안에 예수님을 많이 믿게 된 것과 비교해 볼 때, 갈릴리에서의 복음 전파는 전혀 다른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을 다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고향인 갈릴리로 가시기로 결심합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심에도 불구하고 고향 땅에 가시는 겁니다. 모르고 가는 것과 알고 가는 것은 엄청난 차이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어차피 안될 것을 알면 안 가도 되지 않습니까? 복음을 전해도 안 들을 걸 알아. 어차피 얘네는 들어도 안 믿어. 그럼 뭐하러 복음을 전합니까. 시간과 노력과 수고가 아깝게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효율적으로 일을 하려면 애초에 안될 것을 아는 곳은 안 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행동하십니까?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심에도 불구하고 유대 땅 갈릴리로 다시 이동하셔서 복음을 전하십니다.
이어서 요한복음 4장 4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바른성경 번역본으로 읽으면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그분께서 갈릴리에 오셨을 때에 갈릴리 사람들이 그분을 영접하였으니, 이는 그들 자신이 명절을 지키려고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에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모든 일을 보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러므로”라는 단어는 원어를 반영해서 제가 넣어놓은 겁니다. 앞서 간략하게 설명해 드린대로 45절 말씀은 바른성경 번역본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44절 말씀에서, 선지자이신 예수님께서 자기 고향인 갈릴리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갈릴리로 이동하셨는데, 이때 갈릴리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영접했다고 합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로 받다. 맞이하다. 영접하다.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여기에 나오는 영접하다. 라는 단어와는 다른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말로 볼 때에는 같은 단어가 나왔으니,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했구나. 믿었구나. 이런 식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원어로 볼 때 애초에 다른 단어가 사용된 거예요.
그럼 원어를 모르면 어떻게 이해해야하나. 이런 생각을 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경우에는 문맥을 보시면 됩니다. 사도 요한은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한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설명합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이는 이라는 말은 “왜냐하면”이라고 읽으셔도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명절을 지키려고 갔다가 예수님께서 명절에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모든 일을 보았기 때문이다. 직역하자면 모든 것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자 그래서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것들을 보았기 때문인데, 이 사람들이 무엇을 보았길래 영접했습니까? 아래 참고 구절에 있는 요한복음 2장 23절과 2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아멘.
유월절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실 때 표적들을 행하셨는데, 이 모습을 갈릴리 사람들이 보았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기 때문에 영접한 것이 아니라, 기적적인 일을 나타내시는 분, 표적들을 행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영접한 겁니다. 이러한 점에서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말씀에 근거해서 영접하지 않고 어떤 특별한 목적이나 이유가 있어서 영접하는 것은 요한복음이 묘사하는 초보적인 신앙, 유아기적인 신앙에 해당됩니다. 물론 그렇게라도 영접해서 점차 성장한다면 다행이겠습니다만, 요한복음에서는 대체적으로 이런 초보적인 신앙은 결국 부적합한 신앙, 부적절한 신앙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제 오늘 말씀에 두 번째 파트인 예수님과 왕의 한 신하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요한복음 4장 46절과 47절에는 이 사건이 발생하게 된 배경이 나타나는데요. 4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도 요한은 갈릴리를 표현할 때 단순하게 지리적으로 어디에서 일어난 일인가. 이 부분만 간단하게 짚고 넘어가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처음 표적을 기록한 요한복음 2장 말씀을 의도적으로 연결합니다. 그냥 갈릴리 가나에서 왕의 신하를 만났다 하고 끝내지 않고, 갈릴리 가나에 다시 오셨는데, 여기가 어딘가 하면,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었다. 이렇게 기록하면서 왕의 신하와의 만남을 서술합니다. 그렇다면 이 신하는 어떤 왕을 섬기고 있었을까요? 학자들은 대부분 이 신하가 섬기는 왕이 헤롯 안디바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자면, 헤롯 안디바는 왕의 직위를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헤롯 안디바는 갈릴리 지역을 다스리던 분봉왕이었으며, 세례 요한의 목을 베라고 지시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만 보면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을 만나러 온 이 왕의 신하에 대한 편견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굳이 왕의 신하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그런 행동을 한 것은 헤롯 안디바이지, 왕의 신하가 뒤에서 조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람이 누구를 섬기는 신하인가. 이런 부분에 신경쓰기보 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어떻게 찾아오게 되었는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왕의 신하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표적을 행했다고 증언한 갈릴리 사람들에게서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전해들었을 것입니다. 이 남자의 관심사는 예수님이란 분이 도대체 어떤 분이냐. 예수님이 메시아시냐. 이런 것이 아니라 그저 자기의 아들의 건강을 회복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왕의 신하의 아들은 고열이 수반되는 병을 앓고 있었으며,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자기 아들이 죽고 사는 문제가 걸려있었으니, 당연히 아들의 회복에만 관심이 있었겠습니다만, 마태복음에 보면 가버나움에서 여러 가지 기적들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의 신하 아들이 고침 받은 사건과 유사해 보이는 백부장 하인 치유 사건이나 베드로의 장모가 앓던 열병이 회복된 사건. 이 두 가지 사건이 모두 가버나움에서 발생했습니다. 물론 우리는 어떤 사건이 먼저 일어났는지 확실하게 주장하기는 어렵습니다. 사실 어떤 쪽을 선택하든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왕의 신하는 가버나움에서 일어난 기적 이야기를 듣고 온 것이든지, 아니면 갈릴리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목격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온 것이든지. 무엇이 되었든 기적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5페이지로 넘어가서 왕의 신하가 어떤 요청을 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4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왕의 신하가 예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말씀으로 보면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겠습니다만, 실제로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의 거리는 대략 23킬로미터 정도 됩니다. 이 거리를 걸어서 이동한다면 꼬박 하루 정도 걸린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 가는 길은 대부분 산길이기 때문에 험준한 산길을 걸어서 이동해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왕의 신하는 험한 산길을 이동해서 간신히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자기 아들을 고쳐달라고 간청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왕의 신하는 일단 자신의 목표를 달성한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 고쳐달라고 요청하기만 하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끝난 것 아닙니까? 이제 그냥 예수님께 맡겨드리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그럼 자비롭고 사랑이 많으신 우리 주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시고 다 해결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네. 요한복음 4장 말씀을 보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비슷한 본문으로 알려져 있는 이방인 백부장의 하인이 어떻게 치유 받았습니까? 이 경우에는 이방인 백부장이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을 굳건하게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직접 오시거나 하인의 몸에 직접 손을 대실 필요도 없고 그냥 지금 예수님께서 계신 자리에서 말씀만 해달라고 말할 정도의 믿음을 보였습니다. 자기는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오시는 것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겸손한 모습도 보였습니다.
자,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왕의 신하의 경우에는 어떻습니까? 왕의 신하가 하는 말을 보면 이 사람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도대체 어떤 분이시냐. 이런 부분보다는 그냥 절박해서 온 거예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아온 겁니다. 갈릴리 사람들한테 들어보니, 예수라는 남자가 기적을 일으킨다고 호들갑 떠니까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고 온 거예요.
이런 심정으로 예수님을 찾아온 왕의 신하를, 예수님께서 아실까요 모르실까요. 당연히 아시겠죠.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기 때문에 당연히 아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4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들은 표적들과 놀라운 일들을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왕의 신하에게 아들을 고쳐달라는 요청을 받고 나서 너희들은 이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왕의 신하에게 말씀하시는 줄 알았더니 너희들은 이라고 말씀하시는 걸 보면... 뭔가 실수 같습니다. 그렇죠? “너는”이라고 말씀하셔야 하는데, “너희들은”이라고 말씀하신 건 뭔가 이상합니다. 그렇죠? 네. 아닙니다. 너희들은 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철저하게 의도된 말씀입니다. 45절 말씀을 다시 보시면,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오셨을 때, 누가 맞이했습니까? 갈릴리 사람들이 맞이했죠. 여기서 합리적으로 추론을 해보면,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서 그냥 떠났겠습니까? 아마 그렇진 않았을 겁니다. 이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일들을 목격하기도 했고 전해 듣기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실물을 영접한 이 소중한 기회를 그냥 놓치고 싶진 않았을 겁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든 믿지 않든 상관없이 병 고침만 받더라도 그게 어딥니까? 그리고 이 당시에 제대로 된 병원조차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 같은 능력자를 만나는 건 정말 엄청난 일이었을 거예요. 예수님 만나는 시간이 얼마나 오래 걸리든 상관없이 계속해서 만나려고 주위를 맴돌 것이 분명합니다.
자, 이런 상황에서 왕의 신하가 예수님과 대화하는데, 이때 예수님께서 이 남자의 요청을 듣고 이렇게 반응하십니다. 너희들은 표적들과 놀라운 일들을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너희들은 누구입니까? 예수님 주위에 몰려든 갈릴리 사람들과 왕의 신하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겠죠. 이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가 어떻다는 겁니까? 표적들, 기적들과 놀라운 일들을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는 상태라는 겁니다.
자 그런데 우리는 말씀을 읽는 독자의 입장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에 대해서 어떤 거부감이나 부담감이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왕의 신하의 입장이었다면 어땠을까요. 우리 애가 죽게 생겼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도 소용이 없어. 그래서 예수라는 사람을 만나러 왔어. 엄청난 인파를 뚫고 나와서 우리 애 살려달라고 요청했어. 그런데 이 예수라는 사람이 어떤 말을 합니까? 너희들은 표적들과 놀라운 일들을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 대화의 문맥상 예수님은 지금 어떤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거의 동문서답 수준의 말씀을 하시는 거죠. 지금 이 신하의 입장에서 믿음 같은 건 신경 쓸 여력이 없습니다. 왜요? 한시가 급하기 때문입니다. 골든 타임 놓치면 우리 애가 죽습니다. 그러니 이 신하의 입장에서는 믿음이고 자시고 일단 우리 애부터 살려놓고 그 다음에 믿음에 관해서 얘기하고 싶었을 겁니다. 우리 애가 죽으면 믿음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합니다. 49절 말씀 보세요.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와 주소서. 이게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표적들과 놀라운 일들을 일으켜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죠.
이 대목에서 우리는 왕의 신하가 예수님의 의도를 아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의 신하는 지금 본인의 급한 일만 신경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왕의 신하가 자기 자신의 관심사를 뛰어넘어서, 예수님께서 단순히 기적을 행하는 인물이 아니라 더 위대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믿기를 바라시는 겁니다. 하지만 왕의 신하의 마음가짐은 순식간에 변화될 것처럼 보이지 않죠. 그래서 예수님은 결국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요한복음 4장 50절 말씀 보세요. “가라, 네 아들이 살 것이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것 역시 왕의 신하가 원하는 반응이 아니었을 겁니다. 왕의 신하가 예수님께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우리 아이가 죽기 전에 예수님께서 집에 방문해 주셔서 고쳐 주시는 것을 원했습니다. 앞서 소개해 드린 이방인 백부장의 경우에는 예수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치유될 것이라고 믿었지만, 이렇게 믿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에서도 이런 전례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방인 백부장처럼 말씀만 하옵소서.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지도를 받으면 할 수 있습니다. 가르침을 받으면 그 가르침에 따라 순종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지도 받는다고 쉽게 순종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이 부분을 조금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왕의 신하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가라. 네 아들이 살아있다.” 왕의 신하의 입장에서는 이 말씀을 믿는 것이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어려울 겁니다.
예컨대,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가면 증상을 의사 선생님께 설명하고 심각한 경우에는 검사도 받고 약을 처방받거나 수술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왕의 신하의 아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병을 앓고 있는지, 앓은지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이런 내용을 직접 듣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다 알고 계시지만, 신하의 입장에서는 상세하게 설명하진 않았죠. 그냥 죽게 생겼다고 말한 것이 전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들이 살아있다는 말 한마디만 듣고 돌아가도 괜찮을까요? 정말 쉽지 않을 겁니다. 만약에 그 말 믿고 돌아갔는데 우리 애가 죽어있으면 어떡합니까. 전화로 확인해 볼 수도 없고. 예수님의 말 한마디에 우리 애 목숨을 걸어야 하는데, 과연 속편하게 그렇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정말 어려운 일이겠습니다만, 왕의 신하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여기서 우리는 왕의 신하의 믿음을 의심해선 안 됩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말씀에 올바로 반응하지 못한 사람과 올바로 반응한 사람을 분명하게 표현합니다. 예컨대, 마태복음 19장 22절 말씀에, 재물이 많은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여쭤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준 뒤에 나를 따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자 이 청년이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근심하며 돌아갑니다. 소유를 팔지 못하겠다는 것이죠. 그렇게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지는 못하겠다는 겁니다. 자 이런 식으로 성경은 그 사람의 마음을 오류 없이, 편견 없이 정확하게 기록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왕의 신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까? 그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지 없는지 함부로 믿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예수님을 만났고 간청했고 답변을 들었으니. 이제는 믿는 수밖에 없고. 그래서 믿고 돌아간 겁니다. 결국 아이가 살아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진실되게 믿었다는 거예요.
이어서 7페이지를 보시면, 내려가는 길에 왕의 신하가 종들을 만나서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어떤 소식을 듣습니까? 아이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낫기 시작한 때는 어제 일곱 시. 오늘날로 말하자면 오후 한 시인데요. 예수님께서 아이가 살아있다고 말씀하신 그 시간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왕의 신하가 알지 못한 그때,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된 그때 이미 자신의 아들이 회복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표적을 통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왕의 신하 그 자신과 그의 온 집안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 믿게 되었습니다. 표적을 구한 왕의 신하와 표적의 수혜자인 그 아들만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그 집안 사람들 모두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표적의 역할이 믿음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런데, 요한복음이 말하는 이상적인 믿음은 예수님을 보지 않고 믿는 겁니다. 6페이지 참고 구절, 요한복음 20장 2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아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기록한 책인 이 요한복음의 핵심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않고 믿는 데 있습니다. 가능하면 보지 않고도 예수님을 믿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보지 않고 믿는 자들에게는 복이 있습니다. 어떤 복을 받느냐. 그것은 알 수 없지만 보지 않고 믿는 자들에게 복이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너무나 귀하죠. 하지만 이 말씀을 읽더라도 모두가 동일한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보지 않고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믿기 위해서 표적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38절 말씀 보세요.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라는 사람이 이렇게 놀라운 일을 행했다. 라는 사실을 믿는다는 겁니다. 이 사실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 안에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또 요한복음 14장 11절 말씀 보세요.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요한복음 10장 38절 말씀을 거꾸로 배열한 것처럼 보이는 말씀인데요. 내용은 똑같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계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겠으면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고 믿으라는 겁니다. 이러한 점에서 믿음이 없는 사람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보고 믿을 수 있다는 것이죠. 따라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목적으로 표적을 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러한 구분은 확실히 할 수 있어야겠지요.
이제 마지막으로 결론 부분을 살펴보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7페이지 제일 아래에 보시면, 요한복음 4장 54절 말씀이 나와있는데요.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우리가 요한복음을 아직 5분의 1도 살펴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떠올려 보면, 예수님께서 표적을 딱 두 번 보여주시진 않았죠. 예루살렘에 머무실 때 표적을 행하셨고 그 모습을 갈릴리 사람들이 보고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사도 요한은 표적의 숫자를 붙일 때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표적들은 표적들. 이렇게 복수 형태로 취급하고 지나갑니다.
반대로 갈릴리에서 행하신 표적은 예외없이 특별하게 취급됩니다.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신 표적은 표적들 중의 처음이라고 불리고, 왕의 신하를 치유하신 사건은 두 번째 표적으로 불립니다. 이것은 갈릴리의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갈릴리를 부각시키는 것은, 사람들의 모든 기대감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부끄러운 동네. 사람들에게 주목받지 못한 동네. 이런 동네에서 표적이 일어난다? 유대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인정하고 싶지 않겠죠. 하지만 사도 요한은 갈릴리를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지역으로 기록합니다.
오늘 함께 나눈 내용을 기억하시면서 몇 가지 적용점을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첫 번째는, 우선순위의 문제를 정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을 만나서 자기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요청합니다. 어떻게 보면 일방적인 요청이라고 볼 수 있죠. 급한 마음에 달려왔으니 이렇게 요청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죠. 이런 식으로 예외 사항을 하나씩 하나씩 인정하다가 보면, 우리의 인생에서 예수님에 대한 우선순위, 믿음에 대한 우선순위는 점점 밀려나게 됩니다. 예컨대 요즘 한국교회의 10대 아이들을 보면 어떻습니까. 19살만 되면 교회학교 졸업합니다. 심한 경우에는 고등학생만 돼도 교회학교 졸업합니다. 예외적으로 잘 나오던 아이들조차 스무살만 되면 교회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부모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오던 교회 이제 내 뜻대로 나오지 않겠다는 거예요. 하기싫은 공부 엄마 아빠 때문에 억지로 하면서 대학교 들어갔으니 이제 신앙같은 것 다 집어치우고 내 뜻대로 살겠다는 거예요. 이런 상황을 직면하면 보통 부모님들은 인내하는 편을 선택합니다. 나중에 돌아오겠지. 우리 아이를 위해서 기도하면 돌아오겠지.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내버려두면 결국 언젠가 알아서 돌아올까요? 우선순위에서 한참 멀어져 있는 그 믿음이, 언젠가 갑자기 수면 위로 떠오를까요? 저의 경험상 그런 일은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호되게 인생의 채찍을 들어서 정말 아프게 그 인생을 만지셔야 간신히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그러니 이런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처음부터 믿음에 대한 우선순위, 인생의 가치관, 신앙의 정체성. 이런 부분들을 정확히 정립할 수 있도록 부모님들께서 도와주셔야만 합니다. 그리고 부모님 자신의 마음도 정확하게 돌아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자 그리고 두 번째로 기억할 내용은, 예수님께서 표적을 일으키시는 조건이에요. 오늘 살펴본 말씀에서 예수님은 왕의 신하가 아직 믿지 않을 때 가라 네 아이가 살아있다.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이때 왕의 신하가 믿지 않았다면 아이가 낫지 않았을까요? 이런 부분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치사하게, 야 이래도 너가 안 믿어? 진짜로 안 믿어? 이런 식으로 낫게 했다가 아프게 했다가 이러진 않으셨을 겁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로 표적을 판단할 수 없다는 거예요. 일상생활 가운데 어떤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기적적인 일을 체험한 사람의 믿음이 무조건 건강하다고 볼 수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거예요. 기적을 체험했느냐 못했느냐 이렇게 믿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기적 또는 표적을 체험했으면,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고, 주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함으로써 예수님을 더욱 잘 믿으면 되는 거예요. 이게 중요한 거지 내가 표적을 체험했으니 내 믿음이 좋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영적인 교만함을 경계하며 겸손한 믿음으로 주님을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기억할 내용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기적을 베풀어 주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쉽게 착각할 수 있는 부분 중에 하나죠.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렇게 역사해주시길, 구체적인 방법을 생각해놓고 그 방법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제한하는 겁니다. 오늘 말씀에서 왕의 신하는 본인이 생각한 방법으로 요청했죠.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십시오. 예수님께 집에 오셔서 고쳐달라고 구체적으로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말씀만으로 신하의 아이를 고쳐주셨고, 이 표적을 통해 신하와 신하의 집안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셨습니다. 이 사건을 기억하시면서 우리 인생의 우선순위의 첫 번째는 언제나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점, 그리고 표적을 체험하게 되면, 그 표적으로 누군가를 평가할 것이 아니라, 표적을 체험한 사람이나, 표적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더욱 주님을 굳게 믿어야 한다는 점,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의 계획이나 우리의 뜻에 맞춰서 무조건 역사해 주시는 분은 아니라는 점. 이러한 점들을 기억하시면서, 바르고 건강한 신앙생활을 영위하시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왕의 신하를 고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깊이 묵상하며,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깨닫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믿음의 중요성을 기억하며, 우리의 삶의 우선순위를 주님께 맞추고, 기적만을 바라기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온전히 의지하기를 원하오니, 건강하고 바른 믿음 허락하여 주시고, 맹목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며, 주님께 영광 올려드리는 삶 살아갈 수 있도록, 주여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2페이지
11-1
1.1. 사마리아에서 이틀(2일)동안 계셨음.
2.1. 갈릴리
3.1. 모든 일(표적)
3.2. 유월절
11-2
1.2.1 23km
1.2.2. 2번 절박함.
2.1. 갈릴리 사람들 전체
2.2. 예수님을 찾아온 동기가 잘못되었기 때문. (불신)
2.3. 가라. 네 아들이 살 것이다.
2.4.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돌아감.
2.5. 보지 않고 믿는 자들
2.6.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을 수 있음. ex) 왕의 신하.
3.2.1. 왕의 신하 그 자신과 그의 온 집안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됨
11-3
1) 갈릴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