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강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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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기도하고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함께 공부할 주제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요한복음 4장 3절부터 26절까지의 말씀인데요. 한절씩 교독하고 마지막 절은 함께 읽겠습니다. ~~ 아멘.
지난주에 우리는 요한복음 3장에 등장하는 사도 요한의 추가 해설 두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4장에서 새로운 단락이 시작되죠. 오늘 첫 번째 파트,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만나게 된 배경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4장 3절과 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유대를 떠나 다시 갈릴리로 가시는 중이었다. 사마리아를 거쳐 가셔야 했으므로”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는데, 이때 사마리아를 통과하십니다. 여기서 문제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극심한 적대감이 형성되어 있던 시대였다는 겁니다. 오늘 강의 중에 살펴보겠습니다만,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극도로 혐오했습니다. 얼마나 혐오했냐면, 물건을 같이 사용하지 않을 정도로 서로를 혐오했습니다. 물건을 같이 사용하면 부정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의식법적인 관점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으셨죠. 그러나 예수님과 사마리아인의 대화에는 넘어야 할 장벽이 존재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인이 볼 때 예수님은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을 알고 계신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 방식과는 다른 방식을 취하십니다. 물론 사마리아 여인의 영적인 이해도가 니고데모보다 뛰어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만,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벗어나지 않고 그녀의 눈높이에 맞춰서 대화를 이끌어 가십니다. 이 과정 가운데 사마리아 여인의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는데요. 변화의 결과는 요한복음 4장 42절까지의 내용을 살펴봐야 알 수 있지만, 굉장히 긴 단락이기 때문에 오늘은 26절 말씀까지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래서 다시 요한복음 4장 4절 말씀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를 거쳐 가셔야 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거쳐 가셔야 했으므로 라는 말은 사마리아 땅을 지나가야만 했다는 의미입니다. 무조건 그렇게 하셔야만 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어떤 이유로 굳이 사마리아 땅을 지나가셔야만 했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많은 설교자들이 덧붙여 설명합니다. 유대인이라면 절대로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법이 없지만,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사마리아를 지나가셨다. 이런 설명을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네. 저도 어렸을 때 이런 식의 설명을 많이 들어보았습니다. 그런데 현대 신약학자들은 다른 설명을 합니다. 우선 어떤 증거가 있는가 하면, 유대인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유대인들이 유대와 갈릴리를 오갈 때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지름길을 선호했다는 증거들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엄격한 유대인들의 경우에는 사마리아 지역을 돌아가는, 훨씬 더 긴 동선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제가 이 설명을 드리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절대로 지나가지 않는 사마리아 땅을 억지로 통과했다기보다, 원래 지나다니는 길을 선택하셨는데, 그냥 단순하게 최단 거리를 계산해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셔야만 했기 때문에 사마리아를 거쳐서 지나가시기로 결정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이 말씀은 두 가지의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 번째 해석의 가능성은 지리적인 필연성이고 두 번째 해석의 가능성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필연성이에요.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는 경로를 최단경로로 설정해서 가시려면 어쩔 수 없이 사마리아 땅을 지나가야만 했다는 것이 지리적인 필연성의 해석이고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서 복음을 전하시고, 또 사마리아 여인으로 하여금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또 이로 인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사람들을 만나서 복음을 전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계획 안에 포함되어 있는 일이라고 해석할 경우,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에 의한 필연성이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만약 지리적인 필연성으로 해석할 경우, 그냥 최단 거리로 가다보니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것이다. 이렇게 볼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뜻에 따른 필연성으로 해석할 경우,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사마리아 땅을 지나가신 것이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이죠. 여기서 어떤 해석이 더 타당해 보이십니까? 네.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에 의한 필연성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겠죠.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 방식 또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우리의 인생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행적은 하나님의 뜻에 근거한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은 우연이란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넓은 시각에서 조명하자면 당연히 우리의 삶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근거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만, 이 부분을 너무 좁게 생각하다 보면, 운명론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습니까? 어느 학교에 가서 어떤 전공을 하고, 또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지, 누구와 결혼할 것인지. 이런 모든 것들은 본인의 선택의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인생은 두 가지의 측면에서 조명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사람의 책임. 두 가지의 측면이 균형 있게 조명되어야 합니다. 운명론자는,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구나. 이게 하나님의 뜻이구나. 이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죠. 하나님의 뜻이긴 합니다만, 강제로 억지로 그렇게 인도하셨다고 볼 수는 없어요. 하나님의 작정하심에서 허용적인 작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도록 허용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이라고 볼 수 있기는 합니다만, 인간의 선택을 허용하시는 것이죠. 하지만 예수님의 경우에는 허용적인 작정 그런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완벽한 타이밍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시고, 약 3년간의 공생애 사역을 온전히 하나님의 뜻 가운데 진행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구분할 수 있어야 해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땅을 지나가신 것은 필연적인 하나님의 뜻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한 것이죠.
자 이제 요한복음 4장 6절 말씀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4장 6절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Συχάρ), 쒸카르 라는 동네에 들어가셨습니다. 이 내용은 5절 말씀인데 그렇게 중요한 내용은 아니어서 구두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선 이 수가라는 동네의 정확한 위치는 확실하게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야곱의 우물은 위치가 어느 정도 확실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단 성경공부할 때 지리에 대한 이해도가 없이 말씀을 이해하기 어려운 그런 본문이 아닌 이상은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것이 좋습니다. 나블루스에서 동쪽으로 3.2km 떨어져있는 오늘날 아스카르 지역이 수가일 것이다. 뭐 이런 설명을 드려봐야 사실 그렇게 기억에 남는 것이 없기 때문에 빠르게 넘어가겠습니다.
자 그래서, 교재에서는 5절 말씀을 생략하고 6절 말씀으로 바로 넘어간건데요. 6절 말씀을 다시 보시면,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셨다고 합니다. 이때가 여섯 시쯤 되었다고 하는데, 오늘날로 말하자면 정오, 낮 12시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자 여기서 한 가지 추론을 할 수 있는데요.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이 동이 틀 무렵에 출발했다고 가정하면, 야곱의 우물 곁에 앉으실 때까지 대략 여섯 시간 정도 걸어오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예수님과 제자 일행이 대략 50km에서 60km 정도 걸으셨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보통 군대에서 40kg 정도 되는 군장을 메고 행군하는데, 한 시간에 4km정도 걷습니다. 예수님 일행은 군장을 메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한 시간에 빠르게 걸으면 6에서 7km 정도 걸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쉬지 않고 걸으면 정오 즈음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겠죠. 좌우지간 쉬지 않고 야곱의 우물까지 걸어오신 예수님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셨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서 피곤하다는 말은 녹초가 될 정도의 피로함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무 때나 신적인 능력을 발휘해서 불편하고 번거롭고 수고로움을 감당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똑같은 육체의 연약함을 느끼신 것이죠.
이제 4페이지로 넘어가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두 번째 파트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입니다. 4장 7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인데 이 대화 내용을 바른성경 번역본으로 옮겨놓았습니다. 제가 예수님 부분을 읽으면 성도님들은 사마리아 여인 부분을 읽어주시면 되겠습니다. ~~~ 아멘.
이제 5페이지로 넘어가서 4장 9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그분께 말하기를 “유대인인 당신이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라고 하였으니, 이는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말씀에 따르면 유대인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 것이 이 당시에는 적절하지 않은 요청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유대와 사마리아의 관계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당시에 사마리아는 정치적으로 독립되어 있지 않았고 유대와 통합되어서 로마 총독의 관할 아래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에게나 사마리아인들에게나 사마리아 지역은 역사와 종교 둘 모두에 의해 확실하게 경계 지어져 있었다. 오므리 왕은 북왕국의 새로운 수도를 “사마리아”로 명명하였고 (왕상 16:24), 그 후로 이 지역, 그리고 때로는 북왕국 전체가 그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앗수르인들은 주전 722-721년에 사마리아를 점령한 후에 모든 부유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고 그 땅에는 외국인들을 정착시켰는데, 이 외국인들은 남아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과 통혼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이전에 가지고 있던 종교를 고수하였다(왕하 17-18장).
포로기 이후에 고국으로 돌아온 유대인들과 남왕국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단지 정치적인 역도들의 자손으로만 보지 않고, 이방인들과 피가 섞이고 여러 가지 용납될 수 없는 요소들로 물든 종교를 지닌 잡종들로 취급하였다(느 13장). 주전 400년경에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대항하기 위하여 그리심 산에 성전을 세웠고, 이 성전은 주전 2세기 말경에 유대의 하스모니아 왕가에 속한 통치자였던 요한 히르카누스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종교적이고 신학적인 적개심에 불을 지폈다. 주후 1세기에 사마리아인들은 모세오경을 바탕으로 해서 발전시킨 그들 자신의 유산을 지니고 있었고(그들은 오경 외에는 히브리 성경의 다른 책들을 정경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그리심 산을 계속해서 그들의 예배의 중심으로 삼고 있었다. 적은 수의 사마리아인들은 오늘날까지 생존해 있다.
자, 이렇게 유대와 사마리아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러한 배경지식을 가지고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를 살펴보면, 처음부터 뭔가 이상합니다. 예수님께서 한 대여섯시간 정도 걸어오시느라 매우 피곤하고 목도 마른 그 상황에서 어떤 요청을 하십니까? 나에게 물을 좀 다오.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요청이 어떤 요청입니까? 사마리아 여인이 사용하는 물통이나 그릇을 유대인이 사용하면 부정해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실제로 부정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부정해진다고 생각했다고 했죠. 그러니까 어지간해서는 유대인 남성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거나 음식을 달라거나 그런 요청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희한하게 예수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러자 사마리아 여인이 의외라는 듯이 놀라서 묻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죠.
하지만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몰랐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입장에서 유대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물을 달라고 하는 것이 이상해보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물을 즉시 드렸다면, 그 물이 부정해졌을까요? 그렇지 않죠. 오히려 반대로 물이 정결해졌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부정한 것에 의해서 더럽혀지기는커녕 예수님께서 만지시는 것들을 거룩하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나병환자를 만진 사람은 부정해지지만, 예수님께서 만지신 나병환자는 치유를 받습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선뜻 물을 드리지 못한 것이었죠.
자 그래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합니다. “만일 네가 하나님의 선물과 ‘나에게 물을 달라.’라고 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바로 이 말씀에서 두 가지의 주제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과 예수님은 누구인가? 이 두 가지의 주제가 대화를 이끌어 나갑니다. 계속해서 보시면, 예수님의 말씀에 사마리아 여인이 이렇게 반응합니다. “주님, 당신은 두레박이 없는데다가 우물도 깊은데 그 생수를 어디에서 얻겠습니까? 당신이 저희 조상 야곱보다 더 위대하십니까? 야곱은 우리에게 이 우물을 주었고, 그 자신과 그의 아들들과 그의 가축들도 이곳에서 마셨습니다.”
이 말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사마리아 여인은 영적인 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이 무엇인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두레박도 없으면서 어떻게 물을 떠서 자신에게 줄 수 있겠냐고 반문하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이 사마리아 여인의 말이 맞죠.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온몸이 땀 범벅에 피곤에 쩔어서 빈손으로 우물가에 앉아있는 이 유대인 남성이 무슨 수로 두레박을 가지고 물 뜨러 온 자신에게 물을 줄 수 있겠습니까? 본인도 물을 마시지 못해서 물을 달라고 하는 처지에, 무슨 수로 물을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이성적으로 보면, 사마리아 여인의 말이 다 맞는 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샘물의 정체는 다음 말씀에서 등장하죠.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를 것이나, 누구든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영생에 이르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을 연상시킵니다. 6페이지에 나와 있는 참고 구절 말씀을 한 구절씩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레미야 2장 1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버린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말씀이었고요. 이어서 이사야 44장 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이어서 요한계시록 21장 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생명수 샘물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나타나죠. 여기서 나오는 샘물의 이미지는 육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영적인 이미지입니다. 자 그런데 이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육체적인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4장 15절 말씀 보세요. “주님, 저에게 그 물을 주셔서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오지도 않게 하소서”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오지도 않게 하소서. 이 부분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죠. 하지만 이러한 과정 자체는 굉장히 긍정적입니다. 잘못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반응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예수님께서 주신다는 물의 기원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헛다리를 짚고 있는 것이죠.
자 이러한 사마리아 여인의 반응에 대해 예수님은 갑작스럽게 화제를 바꾸십니다. 16절 말씀에, 가서 네 남편을 이리로 불러오너라. 표면적으로 보면 대화의 주제가 갑자기 끊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남편 얘기를 꺼내시는 것은 뭔가 좀 이상하죠. 그런데 사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의 남편 이야기를 꺼내시는 것은 100퍼센트 의도된 이야기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파악하는 데 실패했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생수의 성격을 영적인 것이 아닌 육체적인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 예수님은 이 여인으로 하여금 자신이 여인의 인생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심으로써 예수님 자신이 인간적인 지식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이죠.
자 그런데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남편 이야기를 하시는 것은 야. 내가 이정도야. 알겠어? 이렇게 보여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영생에 이르는 샘물, 예수님의 선물이 무엇인지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 그래서 남편을 불러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사마리아 여인이 무엇이라 대답합니까? “저에게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대답이 정확한 대답일까요? 틀린 대답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확한 대답이라고 할 수 없죠. 여기에서 이 여인이 이런 식으로 대답한 것의 의도가 나타납니다. 이 여인이 남편이 없다고 대답한 것은 다섯 명의 전 남편은 모두 죽거나 이혼한 상태였기 때문에 형식적으로는 맞는 말이었지만, 그녀의 삶에서 가장 민감한 부분이었던 남편 문제가 파헤쳐져서 이 여인의 죄책과 상처가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일찌감치 더 이상 이야기할 것이 없도록 남편이 없다고 대답한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17절 18절에서, 너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가 옳게 말하였다고 평가하십니다. 죽거나 이혼했을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고, 지금 함께 사는 남자는 법적인 남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하시는 것이죠.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 당시에 혼인과 관계되어있는 이스라엘의 법적인 사항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 당시에 두 번까지 혼인하는 것은 법적으로 허용되었으나 랍비들은 세 번 이상 혼인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신앙이 있는 일반 사람들도 세 번 이상 혼인한 부부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통상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평생토록 두 번 혼인하는 것이었다. 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러한 사회상에 비추어볼 때 이 사마리아 여인은 정상적인 범주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지금까지 무려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고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편도 법적인 남편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 사마리아 여인이 어떤 사람인지 함부로 속단할 수 없지만, 일단 정상적인 사람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쾨스텐베르거 라는 학자는 이 여인의 다섯 번 혼인은 연속적인 음행과 같다고 해석합니다. 이 해석이 그럴듯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함께 하고 있는 남자는 또 다른 어떤 여인의 남편이었거나, 아니면 그 남자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 여인이 어떤 여인인지 확실하게 판단 내릴 수 없습니다만, 확실한 것은 이 여인이 도덕적으로 건전하지 않다는 점이죠.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이 비밀로 감추고 싶어하는 부분, 자신의 바람직하지 않은 사생활을 정확하게 짚어내십니다. 요한복음 2장 24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신다고 기록되어 있었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여인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읽어내실 수 있었던 겁니다.
자, 이렇게 예수님의 신적인 지식에 대해서 사마리아 여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두 번째 대화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9절 말씀을 보시면, 사마리아 여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제가 보기에 당신은 선지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선지자로 규정합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직신학에서 기독론 파트에 보면 예수님께서 삼중직을 가지고 계신다고 정리합니다. 왕직, 제사장직, 선지자직. 이 세 가지의 직분을 감당하셨다는 것인데, 특정 구절에서 이렇게 정리된 것이 아니라 조직신학자들이 성경에 널리 퍼져 있는 개념들을 정리한 겁니다. 자 그래서 이 조직신학적인 개념으로 접근해 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가리켜 당신은 선지자입니다. 이렇게 표현한 것이 올바른 고백입니까 잘못된 고백입니까? 삼중직에 선지자 직분이 들어 있으니까, 조직신학적인 사고를 하면 사마리아 여인의 고백이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사마리아 여인이 어떤 의미에서의 선지자를 말하는 것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감당하신 선지자 직분을 생각하고 말한 것이라면 올바른 고백일 수 있겠습니다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잘못된 고백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생각하는 선지자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기다려 왔습니다. 9페이지 참고구절에 신명기 18장 15절 말씀 보세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모세가 자기 자신과 같은 선지자 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세우실 것이라는 말씀이죠. 오늘날 우리는 이 말씀을 메시아를 예언한 구절로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사마리아인들은 나와 같은 선지자 한 사람. 이 사람을 메시아와 동일하게 여겨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다시 7페이지로 돌아와서 표에 있는 25절 말씀을 보세요. “저는 그리스도라는 메시아가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은 그리스도라는 메시아가 오신다는 것을 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이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인정하지만 메시아는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죠. 하지만 이 여인의 생각에는 계속해서 변화의 바람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컨대, 처음에는 유대인 남성이 왜 자신에게 물을 달라고 하냐고 묻더니, 이제는 예수님을 선지자로 인정하지 않습니까? 여전히 갈 길은 멀지만, 예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려면 한참 멀었지만, 그래도 이 여인의 내면에는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배드리는 장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말하는 우리 조상들이란 아브라함과 야곱을 말하는 것인데요. 아브라함과 야곱이 이 산에서 제단을 쌓았던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명기 말씀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은 그리심 산에서 모세에게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심 산을 축복산으로 에발산을 저주산으로 이렇게 기억하는 경향이 있죠. 이러한 점에서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 산을 굉장히 중요한 장소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의 전승에 따르면 기원전 5세기에 그리심 산에 성전이 세워졌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에피파네스 4세가 사마리아 성전을 제우스 신전으로 바꿔버립니다. 이로 인해서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 산의 다른 산꼭대기에 세운 어떤 한 제단에서 계속해서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기원전 129년에 유대인 대제사장 요한 히르카누스와 특정 유대인들에 의해 그 제단마저도 무너지게 되죠.
자 그래서 이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예배 처소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가벼운 이야기 거리가 아닌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지속되어 온 논쟁거리를 이야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여인이 이렇게 어려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예수님을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처럼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을 선지자로 인정하기 때문에 예배에 대한 주제를 꺼낸 것입니다. 그리심 산에서 예배하는 것이 맞냐. 아니면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는 것이 맞냐. 이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십니다.
21절부터 24절까지의 말씀인데요.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여자야, 내 말을 믿어라. 이 산에서나 예루살렘에서나 상관없이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온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지만 우리는 아는 분께 예배하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들에게서 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오는데, 지금이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그분께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
예수님은 예배드리는 것과 관련해서 장소는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영이시라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자기 자신을 계시하지 않고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알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함의합니다. 다시 말해 말씀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것이죠.
자 그래서,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적인 존재이시기 때문에, 어디서 예배를 드리느냐 하는 그 장소의 문제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토대로 해서 영과 진리로 예배드려야 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예배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할 것이냐를 말씀하시는데,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누구를 찾으신다고 말씀합니까?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예배에 대한 오해를 짚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예배드릴 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임재해 달라고 구합니다.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겠습니다만, 심한 경우에는 막 울부짖으면서 간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임재해달라고 기도해야만 임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특성 중에 하나는 무소부재하시다는 특성이 있지 않습니까? 이 세상 모든 곳에 계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어딜 가도 계시는 하나님이신데, 우리가 간절하게 구해야만 하나님께서 오신다는 것은 착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이런 간구가 한국 사람들에게 유독 그럴듯해 보이는 이유는 일종의 초혼 의식이 어느 정도 친숙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말씀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임재를 과도하게 요구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과 진리로 예배하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찾아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죠? 참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오는데, 지금이 그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굳이 막 미친 듯이 열광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간구할 필요까지는 없는 겁니다. 우리가 오지 말라고 하면 오지 않으실 분도 아니고, 오라고 해야만 문열고 들어오시는 분도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된 행동들은 고쳐나갈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어서 보시면, 사마리아 여인은 그리스도라는 메시아가 오신다는 것을 안다고 말하죠.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에 무엇이라 반응하십니까? 너에게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내가 바로 메시아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물가에 앉아서 물을 좀 달라고 청한 이 남자가 바로 약속된 메시아. 사마리아인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아라는 겁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스스로 밝히는 장면은 복음서에서 굉장히 드문 장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 기간동안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대놓고 드러내시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 이유인즉슨 많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아”라는 칭호는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원래 메시아라는 단어는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메시아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만, 이 당시에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라는 단어는 정치적인 독립을 이끌어줄 구원자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만약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칭호를 잘못 사용한다면 말씀을 성취하시는 분으로서의 메시아가 아니라, 죄로부터 건져내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가 아니라, 정치적인 의미. 로마로부터의 독립을 이끌어줄 구원자로 이해될 수 있다는 오해의 소지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예수님은 유대 땅에서 활동하실 때에는 본인이 스스로 메시아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으시고, “인자”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셨던 겁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에는 어떻습니까?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아 라는 단어의 잘못된 이해를 공유하고 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가감없이 본인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밝혀주신 겁니다.
자 이제 오늘 공부한 내용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혼생활에 문제가 있는 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시기 위해 사마리아 땅을 통과해서 지나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야곱의 우물가에 앉아 이 사마리아 여인을 기다리다가 만나셔서 대화를 나눕니다.
첫 번째 대화에서는 예수님께서 영생에 이르도록 솟아나는 샘물의 정체를 알려주십니다. 하지만 이 사마리아 여인은 영적인 이해도가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죠. 그러자 예수님은 이 여인의 사생활을 꼬집어 내시고 예수님이 일반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십니다.
이에 따라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인식하게 되었고, 그동안 궁금했던 질문, 예배 처소, 예배 드리는 위치 또는 장소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예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하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알려주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사마리아 여인에게 알려주십니다.
자 이렇게 오늘 공부한 내용을 복습하실 때, 말씀을 천천히 묵상해 보시고, 오늘 제가 설명해 드린 내용이 과연 그러한지, 깊이 상고하시면서 주님을 더욱 알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전지전능하시며, 오늘도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말씀으로 계시해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나눈 말씀을 기억하며 영이신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하게 하시며,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를 찾아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