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강 생명의 떡(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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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기도하고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나눌 내용의 제목은 생명의 떡입니다. 요한복음 6장 22절부터 40절까지의 말씀을 한절씩 교독하겠습니다. ~~~ 아멘.
지난주에 우리는 요한복음 6장 1절에서 15절까지의 내용을 통해 오병이어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시간 관계상 16절부터 21절까지의 내용.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신 사건은 살펴보지 않았습니다만, 크게 어려운 내용이 없기 때문에 넘어가고, 22절 말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22절 말씀을 보시면, “이튿날”이라는 시간적인 표현이 등장하죠. 오병이어 사건이 발생한 다음날이라는 얘기에요. 이튿날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오병이어 표적이 일어났던 곳에 있던 사람들. 이 사람들이 배 두 척 중에 한 척만 떠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이 한 배를 타고 가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만 배를 타고 떠난 것을 알고 있는 것이죠. 여기서 우리는 바다 건너편, 갈릴리 바다 건너편이 동쪽이냐 서쪽이냐. 이런 부분이 궁금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 이스라엘에서 거주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동쪽이냐 서쪽이냐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리적으로 표현하자면 오병이어 표적이 일어난 곳은 갈릴리 바다 동쪽이에요. 이렇게 말씀드려도 뭔가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으실 겁니다. 이건 사실 목사인 저도 마찬가지에요. 제가 신대원 3학년 때 이스라엘에 다녀왔는데, 그때 갈릴리 바다에 간 적이 있습니다. 고양주 목사님께서 가이드해 주시면서 세세하게 설명해 주셨는데, 그곳에 직접 가지 않는 이상 감이 잘 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지리적인 특성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본문을 이해하는 데 크게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22절에서 우리가 살펴봐야 하는 내용은 오병이어 표적이 발생한 이후 둘째 날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는데, 배가 한 척 남아있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혼자 배가 없이 떠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구나. 사람들이 계속해서 예수님을 찾고 있구나. 이 부분을 짚고 넘어가면 되겠습니다.
이어서 23절 말씀을 보시면, 요한복음의 저자 사도 요한이 해설을 달아 놓습니다. 그러나 디베랴에서 다른 배들이 주께서 감사 기도를 드리신 후에 사람들이 빵을 먹었던 곳으로 가까이 왔다.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주께서 축사하신 후.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만, 지난 시간에 살펴본 내용과 동일하게 축사하다. 라는 단어는 감사 기도하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여기서 신학적인 이야기를 간략하게 하자면, 유기적 영감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나 자유주의 신학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 말씀을 후대에 첨가된 말씀으로 봅니다. 사도 요한이 쭉 기록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23절이 원래 없었는데 나중에 어떤 편집자에 의해서 삽입되었다고 보는 것이죠.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근거는 무엇인가 하면, 주께서 축사하셨다. 예수님께서 감사기도를 하셨다. 이 내용이 부활절 이후의 관점, 성만찬의 관점에서 추가적으로 이런 표현을 사용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감사기도를 드리셨다. 이런 표현이 요한복음 6장 11절에도 등장하지 않습니까? 요한복음 6장 23절이 후대에 삽입되었다거나 추가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경우에 6장 11절에 나오는 감사기도를 드리셨다는 표현 역시 후대에 수정 및 삽입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이러한 주장에는 합리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 근거가 딱히 없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반박할 수 있는 근거가 우리에게만 없는 것이 아니라, 삽입되었다고 주장하는 근거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감사기도하셨다는데,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냥 예수님께서 감사기도 하시고 빵을 나누어주셨는데, 그 빵과 물고기를 2만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먹었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걸 굳이 뭐 후대에 어떤 성경 편집자가 이 내용을 추가했고 본문을 수정했고 이런 식으로 성경을 조각조각 내서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죠.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6장 24절 말씀을 보시면, 사람들이 계속해서 예수님을 찾는데 예수님도 계시지 않고 제자들도 없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입니까? 배들을 타고 예수님을 찾아 나섭니다. 갈릴리 바다를 건너서 서쪽 연안에 있는 가버나움까지 가서 예수님을 찾은 것이죠. 이 사람들이 알고 찾았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습니다만, 가버나움은 예수님 공생애 시기에 예수님과 예수님의 가족들이 거주했던 지역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은 베들레헴, 성장하신 곳은 나사렛, 공생애 시기에 예수님께서 거주하셨던 곳은 가버나움. 이런 식으로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자 이렇게,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결국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 내용은 25절 하반절에 나오는데요. 두 번째 파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묻습니다. 랍비님, 언제 여기에 오셨습니까? 예수님을 찾아다닌 사람들,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랍비로 생각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랍비라는 호칭은 선생님이라는 호칭이긴 합니다만, 선생님으로서 최고의 지위를 지닌 사람에게만 붙이는 호칭이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일반인에게 랍비라는 호칭은 굉장히 영광스러운 호칭임에 틀림 없습니다만, 예수님께 랍비라는 호칭은 적절하지 않죠.
물론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할 때에는 예수님을 랍비여. 이런 식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6장 25절에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오병이어 표적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에요. 날이 저물고 있고, 배는 고프고, 먹을 것은 없고, 어디 가서 먹을 것을 사오기도 쉽지 않은 허허벌판이고.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적 덕분에 배불리 만족스럽게 식사하지 않았습니까? 그럼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는 것이 마땅할까요. 랍비라는 표현은 표적을 보여주신 예수님께 가장 천박한 표현일 겁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직접 체험하지 못했거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지 못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얼마든지 랍비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예수님께서 베푸신 표적을 체험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존재를 남들과는 다르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은 예수님을 랍비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하죠. 랍비님 언제 여기에 오셨습니까? 여기에 오신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이런 질문을 합니다. 이 질문 역시 예수님에 대한 무지함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오병이어 표적을 보여주신 이후에 가버나움으로 이동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동행하지 않은 상태에서 제자들만 배를 타고 이동한 것을 보았죠. 그리고 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다가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자, 그럼 여기서 예수님이 어떻게 이동하셨으리라 생각할 수 있을까요. 특별한 운송 수단이 없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이동하실 수 있었을까요. 뭔가 이상하다는 점을 눈치채야 하는데, 눈치는커녕 언제 여기 오셨습니까? 이런 질문만 하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우리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과 질문의 내용을 통해서 이 사람들이 오병이어 표적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무지하구나. 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 그래서 예수님이 이 사람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시는가 하면, 요한복음 6장 2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고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동기를 정확하게 아십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아시기 때문이죠. 따라서 예수님은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왜 따라왔는지 그 동기를 정확하게 간파하십니다. 이 사람들은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다.
영적인 목마름을 해갈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예수님은 얼마든지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제공해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육적인 만족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는다면,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해서 예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에 나를 찾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말씀을 깊이 있게 묵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과연 내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신앙생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교회에 헌신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동기를 세세하게 구분하자면 한도 끝도 없겠습니다만, 가장 큰 카테고리로 구분하자면, 예수님의 제자냐 제자가 아니냐. 이것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예수님의 제자라고 한다면, 우선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인격적으로 믿고 자신의 믿음을 주님께 고백하며 살아가는 사람이겠죠.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동기, 예수님의 제자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 이런 부분에 대해서 크게 고민하지 않고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때로는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서 주님 한분만 붙들면서 살아가는 사람. 이런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한다면, 교회에 나오는 목적이 제각각일 수 있습니다. 일종의 문화생활이나 취미생활처럼 일주일에 한 번 나와서 영화 보듯이 앉아 있다가 집에 갈 수 있죠. 아니면 사람들을 만나서 교제하는 사교클럽처럼 교회를 생각해서 출석할 수 있습니다. 주일에 교회 나와보면 사람들 많잖아요. 우리 화평교회는 대형교회는 아닙니다만, 그래도 요즘 주일 2부 예배 출석 인원이 300명 가까이 되니까요. 그리고 지역도 강남이지 않겠습니까? 우리 성도님들 면면을 잘 살펴보면 나름 잘나가는 분들도 계시고 그렇습니다. 그러니 인간적인 목적을 가지고 친교할 수 있겠죠.
또 어떤 경우에는 아주 단순한 차원에서, 신의 존재를 믿기는 하지만, 샤머니즘처럼 비나이다 비나이다. 이렇게 하면 축복받는 줄 알고 교회에 출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맹목적으로 비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지 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만, 혹여나 일이 잘 풀린다거나, 자식이 대학에 잘 들어간다거나. 이런 경우에 더욱더 맹목적으로 열심히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경우들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았는데요.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고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 기적을 체험해서 기적을 베푸신 분이 누구인가. 그분이 나에게 어떤 분이신가. 이런 고민을 하면서 믿음을 가져야 하는데, 이런 측면에서는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고 그저 내 배를 채워주시는 분. 내 필요와 만족을 채워주시는 분. 그러니까 저분만 따라다니면 인생 편하게 잘 풀리겠지. 이런 생각으로 예수님을 따라가면, 빵을 먹고 배가 불러서 따라오는 사람으로 분류된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로 취급되는 것이 어려운 일일까요? 물론 이상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쉽지 않겠습니다만, 예수님은 그렇게 냉정하고 칼 같은 분이 아니세요. 왜냐하면 제자들은 복음서에 보면 다양한 실패를 경험합니다. 귀신을 쫓아내라고 했더니 쫓아내지 못하기도 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믿음이 적다고 혼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야. 니들 그따위로 할 거면 때려쳐. 그 정도의 수준으로 어디 가서 내 제자라고 할 수 있겠냐? 제자 딱지 떼 임마. 이런 말씀은 절대로 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동기는 분명해야 합니다. 내 배를 채우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른다면 그 마음 하나만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는 증거로 채택될 것입니다.
자 그럼 예수님의 제자로 살려면 무언가 내 인생에 필요한 것들을 예수님께 구하면 안 될까요? 네 그렇지 않습니다. 구해야죠. 필요한 건 우리의 아버지께 구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린 부분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무작정 해주시기만을 바라는 것. 예수님에 대해 알아가려는 노력을 아무것도 하지도 않으면서 예수님께서 내 구체적인 필요를 채워주시기를 바라는 것. 이러한 마음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합당하지 않은 마음이라는 겁니다.
자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6장 2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이 이르도록 남아 있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여라. 인자가 이 양식을 너희에게 줄 것이니, 이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분에게 인 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물질적인 필요와 만족을 위해서, 배를 채우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온 무지한 사람들을 영적인 방향으로 이끌어주시고 권면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썩어 없어질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남아있을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물질주의적인 개념들을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라는 말씀이죠. 여기서 우리는 독특한 표현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는데요.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있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 무엇 무엇을 위해 일하지 말고 무엇을 위해 일하라. 이렇게 되어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보통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표현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표현이죠. 하지만 예수님은 6장 27절에서 일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냥 믿어지면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위해서 힘써 일하라는 겁니다. 예배 시간에 그냥 가만히 있다가 마음이 좀 뭉클해지고 이러면 은혜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받는 것 역시 은혜받기 위해서 힘써야 하는 겁니다. 입 벌리고 있으면 알아서 먹을 것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힘써서 일하듯이 노력하면서 신앙생활해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본인의 행위를 너무 의식한 나머지, 공로주의적인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예컨대, 예배와 기도회에 기계적으로 참석한다고 해서 무조건 은혜받는 것도 아니고,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볼 수도 없는 겁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따르면 신앙생활과 관련된 행위의 중요성보다는 씨앗이 심기는 밭의 상태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습니까? 만약 신앙생활에 있어서 행위만 중요하다면, 씨앗을 많이 뿌리기만 하면 되겠죠. 그러나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마음 밭이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남아있을 양식을 위한 행위는 마음 밭을 가꾸고 성장시키는 행위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자 이제 오늘 본문의 세 번째 파트,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떡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썩어 없어질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있을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말씀하시자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이렇게 반응합니다. 6장 28절 말씀 보세요. “그러자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일들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고 하니,”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올바른 반응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물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런 반응을 보였으니 잘못되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정답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아, 이제 우리가 어떤 새로운 형태의 일을 해야 하는구나. 이런 식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의 질문을 의역해서 생각해 보면,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들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지 알려주시면 우리가 그 일들을 행하겠습니다. 이런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 사람들이 이렇게 행하겠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남아있을 양식을 위해서 알려주시면 해보겠다는 겁니다.
이어서 요한복음 6장 2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 6장 28절에서 사람들이 어떤 행위를 해야 하는지 물어보았으나, 그 행위라는 것이 믿음이라는 사실이 29절에서 밝혀집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현대적인 의미에서 어떤 일들이나 행위가 아니라 고유한 기독론적을 대상을 가진 믿음입니다. 추상적인 믿음이나, 구체적인 대상이 없이 어떤 믿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이런 식으로 질문한 것에는 믿음이라는 개념보다 행위라는 개념이 훨씬 더 중요하게 자리잡혀 있다는 사실이 담겨있습니다. 실제로 이런 개념은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이 주장하는 핵심적인 개념이죠. 예컨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는 것. 이것이 십계명의 내용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계명을 바리새인들은 행위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39개에 달하는 조항을 만들어 놓고 이것을 지키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킨 것이고 위반하면 안식일을 범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떻든, 39개의 조항을 지키기만 하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킨 것이라는 거예요.
하지만 신약성경은 본질이 담겨있지 않은 인간의 행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로마서 3장 28절 말씀을 보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 칭의를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된다고 분명하게 밝힙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 이것은 율법의 행위와는 정반대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죠.
이어서 요한복음 6장 30절과 3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 그러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그러면 우리가 보고 랍비님을 믿을 수 있도록 랍비께서 무슨 표적을 행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행하시겠습니까? 기록되기를 ‘그분께서 그들에게 하늘로부터 빵을 주어 먹게 하셨다.’라고 기록된 것같이 저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는 말씀에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관습에 따라서 예수님의 권위를 입증할 수 있는 어떤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런데 참 희한하죠. 오늘 본문 말씀은 오병이어 표적이 발생한 다음 날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바로 전날 표적을 체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표적을 체험했지만 또 한번 표적을 요구하는 것은 너무나도 이상하죠. 보여줬는데 또 보여달라. 입증했는데 또 입증하라. 이런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은 너무나 당당하게 요구합니다. 예수님, 당신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면 우리가 당신을 믿을 수 있도록 표적을 보여주십시오. 이런 식의 요구인 겁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아이러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장까지 다양한 표적들을 보여주셨지만 사람들은 끊임없이 표적을 요구함으로써 자신들의 불신앙을 드러내는 것에서 아이러니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죠.
자 그런데 예수님은 표적을 보여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십니까 없으십니까? 있으시죠. 예를 들어, 어제 오병이어 표적을 보여주셨으면, 능력이 좀 빠져나가서 쉬어야 한다거나, 일정 시간이 지나고 나서 다시 보여줄 수 있다거나 하지 않죠. 언제든 예수님께서 원하시면, 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얼마든지 보여주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요구, 표적을 보여달라는 요구에 응하지 않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만약 예수님께서 이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신다면, 그것은 이 사람들이 오병이어 표적을 체험하고 나서 마음속에 품게 된 한 가지 열망. 예수님을 왕으로 삼아서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독립시키고자 했던 열망. 이 열망을 인정하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사람들이 표적을 요구해서 그 요구를 들어주신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자기 계시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좌지우지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으로 이들의 잘못된 생각을 교정해 주시죠. 31절 말씀을 다시 보시면, 이 사람들은 자기 조상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다고 말하면서 이와 유사한 표적을 요구하는데, 예수님은 여기에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5페이지 요한복음 6장 32절과 3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 빵을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떡이라고 나와 있습니다만, 성경이 우리말로 번역되었을 때 빵이라고 하면 이해하기 쉽지 않으니, 문화적으로 친숙한 단어인 떡으로 번역되었습니다. 하지만 원어상으로는 빵이 맞습니다. 그런데 빵이 맞냐 떡이 맞냐 이런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의미에요.
자 그래서 32절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빵을 준 사람이 모세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100% 맞는 말씀이죠. 먹을 것을 하나님께 구한 사람은 모세가 맞지만 응답해 주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신 분은 하나님이 맞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모세의 중요성을 엄청나게 강조합니다. 모세에게만 지나치게 많은 관심을 쏟죠. 하지만 예수님은 모세가 아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빵을 내려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여기서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빵이란 어떤 것인지. 그 의미를 분명하게 알려주시죠. 하나님께서 주시는 빵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 생명을 주는 것이 빵의 의미입니다.
자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의미를 또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 다시 말해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은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습니까?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본인의 힘과 노력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이죠. 예컨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했을 때, 만나를 어떻게 먹었습니까?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오면, 나가서 만나를 줍기만 하면 됐죠. 무언가를 심어서 키워서 추수하는. 이런 과정이 빠져있어요. 그냥 나가서 줍기만 하면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빵은 본인이 무언가를 노력해서, 어떤 행위를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라는 겁니다. 원리상으로는 만나와 똑같아요. 인간이 뭘 어떻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주시면 받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떡, 하나님께서 주시는 빵이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 생명이라는 것의 실체,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란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이 정체는 요한복음 6장 35절에서 나타납니다. 굉장히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에요. 오늘 네 번째 파트 내용, 생명의 떡, 생명의 빵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6장 3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사람은 결코 굶주리지 않을 것이며, 또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아멘.
이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우선 직역해서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순 그대로 직역해서 읽어보면 좀 어색하긴 합니다만,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나는 무엇 무엇이다. 생명의 그 빵. 나를 향해 오는 사람은 절대로 배고프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를 믿는 사람은 절대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헬라어의 독특한 점을 살펴보면, 나는 무엇무엇이다. 이 표현부터가 굉장히 독특합니다. 헬라어 동사에는 인칭이 포함되어있다고 말씀드렸죠. 헬라어 동사에는 어떤 동사든지 간에 무조건 인칭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동사만 보면 주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 그런데 6장 35절은 정말 독특하게. 나는 무엇 무엇이다. 에고 에이미 라는 단어를 별도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말로만 보면 이게 뭐가 특별한가 싶을 수 있겠습니다만, 그리스 사람들이 이 표현을 보면 뭔가 이상하다고 느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굉장히 독특하게 의도적으로, 특별하게 표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말씀에서 예수님 자신을 굉장히 강조합니다. 우리말로 나에게. 나를. 이런 표현은 글쓴이가 강조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단순하게 목적어로 쓴 건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만, 헬라어는 1인칭 대명사를 쓸 때, 강조해서 사용하는 표현이 따로 있어요. 그래서 6장 35절은 예수님 자신을 굉장히 강조해서 표현하는 그런 문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생명의 그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 자신을 굉장히 강조하는 문장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자 그러면 앞서 살펴본 내용을 기억하면서 문맥을 연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6장 32절 말씀에 따르면, 하늘에서 내려오는 빵을 누가 주신다고 했습니까? 내 아버지.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죠. 그런데 6장 35절에서는 생명의 빵이 누구라고 합니까? 바로 나. 예수님이라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그것도 굉장히 강조해서 표현되고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데,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을 주시는 일이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여기서 질문, 요한복음 6장 35절 하반절 말씀, 내게 오는 사람은 결코 굶주리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을 보면 어떤 말씀이 떠오르시나요? 지난 학기에 같이 공부했던 말씀 중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가 떠오르시죠? 6페이지 참고 구절 요한복음 4장 13절에서 1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이 말씀과 요한복음 6장 34절과 35절 말씀을 보면 굉장히 유사합니다. 그렇죠? 예수님께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주실 수 있다는 말씀과, 생명을 주는 생명의 빵이라는 말씀. 그리고 이것을 주셔서 목마르지 않게 해달라는 요청과 배부르게 항상 이 빵을 달라는 요청. 예수님의 말씀과 사람의 반응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반응은 예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해서 나온 반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왜 달라고 했죠? 물 길으러 나오지 않도록. 편하게 살기 위해 달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람들이 왜 이 빵을 항상 달라고 했죠? 오병이어 먹고 배부른 것처럼 마찬가지로 배부르게 살고 싶어서 달라고 한 겁니다. 종합해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원하신 생명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본인들이 이해한 대로, 편하게 살기 위해서, 물질적인 의미에서 이해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복음과 진리를 올바로 이해한 사람들이 볼 때에는 정말 무지한 반응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만, 이러한 반응은 예수님을 모르는 불신자의 입장에서 보일 수 있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사람의 죄악이 얼마나 비참하고 악한 것이며, 구속의 은혜가 얼마나 귀하고 큰 은혜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겁니다.
자,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반응이 불신자들에게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예컨대, 기복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진지하게 자신의 믿음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컨대, 먹고 사는 데 도움받기 위해서, 우리 가족의 평안과 번영을 위해서, 우리 자녀의 학업의 성취도와 취직과 결혼을 위해서 신앙이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빵을 항상 우리에게 주십시오”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 자신이 매일 같이 주님 앞에 보이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 교회에 출석은 열심히 하지만, 겉으로 볼 때에는 누가봐도 신자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그 안에 있는 믿음은 알맹이가 없는 믿음이며, 거짓된 믿음일 수 있다는 겁니다. 굉장히 무서운 이야기입니다만,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말씀과 사람들의 반응을 모두 다 기록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러한 교훈을 스스로 얻어야만 합니다.
자 그리고 6페이지에 보시면, 예수님의 일곱 가지 자기 계시가 나오는데요. 요한복음 6장 35절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여기서 독특한 표현이 에고 에이미라고 했죠. 나는 무엇무엇이다.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독특하게도 요한복음에는 일곱 가지의 에고 에이미가 등장합니다. 요한복음을 공부하는 우리 성도님들 정도라면, 다른 건 몰라도 이 정도는 암기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어떻게 암기하냐. 한 글자씩만 따서 외우는 겁니다. 한번 저를 따라해 보실까요? 떡 빛 문 목 부 길 포. 한번 더. 떡 빛 문 목 부 길 포. 다시 한번. 떡 빛 문 목 부 길 포. 네. 그럼 성도님들만 한번 해보실까요? 네. 그럼 떡 빛 문 목 부 길 포에서 길이 뭐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네. 이렇게 내용까지 말할 수 있으면 완벽하게 암기하신 겁니다. 시간을 들여서 암기하시면 신앙생활에 큰 유익이 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 그럼 넘어가서요. 6장 3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5장 36절에서 38절에서 예루살렘 사람들의 불신앙을 책망하셨고, 오늘 본문에서는 자신의 동향 사람인 갈릴리 사람들의 불신앙을 동일하게 책망하십니다. 학연 혈연 지연 이런 것 없습니다. 같은 동네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책망받는 거예요. 이들이 책망받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주신 빵과 능력만 보았고, 이 빵과 예수님의 능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지 못했고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떤 분이라고 생각해야 할까요. 7페이지 요한복음 6장 37절과 38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고, 또 내게로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밖으로 내쫓지 않을 것이다. 이는 내가 내 뜻을 행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려고 왔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보내신 분의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사람 중에 단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데, 이 과정이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우리의 생명을 책임지라고 맡겨주셨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변질되지 않도록, 예수님께서 잃어버리지 않으시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우리를 잃어버리지 않으시면 마지막 날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주신 자들을 모두 다시 살리시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걸 누가 한다고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또 6장 40절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면 마지막 날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자들을 다시 살리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런 일을 누가 하신다는 겁니까? 예수님께서 하신다는 겁니다.
이 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이시고, 이 생명의 빵을 먹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데,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한평생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삶의 어려운 문제들을 겪으면서 신앙적으로 연약해질 때도 있고, 넘어질 때도 있고, 주님을 원망할 때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구원이 취소되는 일이 없다는 겁니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연약해져 있을 지라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우리 믿음을 붙잡아 주신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붙잡아 주신 덕분에 일평생을 성도로서, 거룩한 무리로서, 믿는 자로서 충성되게 살아가다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면, 이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그날에, 예수님께서 잠자고 있는 우리를 다시 살리신다는 겁니다. 정말 엄청난 약속의 말씀이자, 우리의 삶의 소망이 되는 그런 말씀이라고 볼 수 있겠죠.
오늘 함께 공부한 요한복음 6장 22절에서 40절까지의 말씀을 이번 한주간 깊이 묵상하시면서 생명의 빵이시며, 우리를 결코 잃어버리지 않으시고 마지막에 우리를 다시 살리실 예수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맺어가시는 모든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께 오는 사람은 결코 굶주리지 않을 것이며, 주님을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신 주님.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매일 매일 크신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바라옵기는, 배가 불러 주님을 찾는 자들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고,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 있을 양식을 위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참된 믿음을 가지고 부단히 애쓰고 헌신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에 대한 지식이 깊어질수록, 주님을 향한 사랑이 더욱 커질수록, 우리의 삶 가운데, 빛과 소금된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15-2
1. 랍비
2. 1) 표적, 빵, 배, 불렀기 2) 제자
3. 1) 영원, 생명, 양식. 2) 인자
15-3
2. 믿는
3. 표적
4. 1) 아버지 2)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
15-4
1. 1) 생명, 떡. 2) 결코, 굶주리지(배고프지), 결코, 영원히, 목마르지
3.1 보내신, 뜻
3.2 주신, 내쫓지(쫓아내지)
4.1.1. 잃어버리지
4.1.2. 마지막, 모두, 다시, 살리는 것
4.2.1. 아들, 믿는, 영원한, 생명
4.2.2. 마지막, 다시 살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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