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강 생명의 떡(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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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기도하고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나눌 내용의 제목은 생명의 떡입니다. 요한복음 6장 41절부터 71절까지의 말씀을 한절씩 교독하겠습니다. ~~~ 아멘. 지난주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 생명의 빵이시라는 사실을 알아보았습니다. 오늘 함께 공부할 내용 역시 생명의 빵에 관한 내용인데요.
오늘 본문의 첫 번째 파트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입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유대인들이 보인 반응이죠. 요한복음 6장 4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라고 하셨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그분에 대하여 수군거리며 말하였다.”
41절에 등장한 유대인들은 아마도 가버나움 회당의 회중이었거나 가버나움 회당을 주도하는 종교지도자들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수군거리는 모습은, 출애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했던 모습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 그런데, 이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는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는 말씀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수님 본인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유대인들의 반응을 볼 때,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을 왜 믿지 못하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이시라는 것,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빵이시라는 사실이 그렇게 이상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죠. 왜 그렇습니까? 요한복음 6장 4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우리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아는데, 그가 지금 어떻게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하는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요셉의 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아는 요셉이라는 사람의 아들이에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예수라는 사람은 요셉의 아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다시 말해 존경심조차 생기지 않을 법한 사람이에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 성도님들의 지인분들의 자녀들을 생각해 보세요. 나이가 20대부터 40대까지 다양할텐데, 가까이 지낸 사이라면 이름도 부를 수 있습니다. 누구야. 누구야. 이렇게 이름도 부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이라면, 존경심이라는 것이 생길 수 있겠습니까? 없겠죠. 물론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사랑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 이상의 감정은 어지간해선 생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 지인의 자녀가 갓난아기 때부터 자라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면, 더더욱 존경심과 같은 감정은 생겨나기 어렵겠죠. 바로 유대인들이 이와 유사한 케이스입니다. 공관복음에 보면 이러한 유대인들의 반응이 다양하게 나타나는데요.
아래 참고구절에 있는 마가복음 6장 2절과 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우선 이 마가복음 6장 2절과 3절 말씀은 마태복음 13장에 있는 내용과 거의 유사하기 때문에, 마태복음 13장은 참고 구절에 자세하게 넣지 않았고요. 시간 되실 때 한번 찾아보시면 되겠습니다. 자 그래서 마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여러 말씀을 가르치셨는데, 그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이 놀라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반응은 거기까지에요.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선입견과 편견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죠.
이어서 누가복음 4장 18절, 19절, 2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누가복음의 구조에 있어서 주의 은혜의 해, 희년의 개념은 굉장히 중요하게 사용됩니다. 희년으로 시작해서 희년으로 끝난다고 볼 수 있죠. 몇 달 전에 이 내용으로 수요예배 때 말씀을 전한 적이 있는데요. 이 내용을 간단하게 설명해 드리자면,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나사렛 회당에서 본격적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십니다. 구약에서 예언된 말씀을 성취하는 그리스도로서, 주의 은혜의 해. 50년에 한번씩 돌아오는 자유의 해인 희년을 전파하고,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전하는 그 시각에 희년에 관한 말씀이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예수라는 사람이 자신을 통해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감히 선언하고 있는 겁니다. 자 그래서 나사렛 회당에 있던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라고 반응합니다.
이렇게 마가복음과 누가복음, 요한복음 모두 각각 다른 상황에서 예수님이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 취급을 당한다는 사실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나이가 서른 살 정도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겉모습을 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신적인 권위를 인정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불신앙이 정당화되진 않습니다. 요한복음 1장 9절, 10절, 11절 말씀 들어보세요.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서른 살 미혼 청년으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1장부터 예수님을 참 빛. 진짜 빛. 이 세상의 창조주이자 이스라엘 백성의 주인으로 기록합니다. 하지만 정작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자,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이런 소리를 듣게 되신 것이죠.
자, 그런데 충격적인 것은 예수님께서 배척당하신 것이 일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만 배척당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족들에게까지 배척을 당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다음주에 살펴보겠습니다만, 요한복음 7장 5절 말씀을 보면, 형제들까지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예수님의 형제들과 DNA를 공유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만, 육적인 가족관계를 형성했고, 가족들과 같이 성장했지만, 결국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서는 지지를 받지 못하셨다는 것이죠. 그러니 예수님의 인간적인 외로움이 얼마나 극에 달했을지, 우리로서는 감히 헤아릴 수 없겠죠.
자 그래서 마가복음 6장 내용에서 예수님의 형제들 이름이 나오는데요.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 이렇게 네 사람의 이름이 나오죠. 그리고 누이들도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님의 형제들,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 이 사람들이 누군지 분간하실 수 있으십니까? 아마 분간하기 어려우실 겁니다. 사실 저도 좀 헷갈려요. 그래서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았는데요. 외우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만, 참고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4페이지, 야고보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야고보의 영어 이름은 제임스에요. 히브리어로는 야아콥, 헬라어로는 야코보스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야고보 동명이인은 네 명 정도로 간추릴 수 있습니다. 많죠? 첫 번째 야고보는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에요. 아래 내용 보세요.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이자 유다의 형제이며(유다서의 저자인 유다를 말하는 겁니다.) 야고보서의 저자이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모친 마리아와 함께 예수님의 활동을 제재하며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또 그분의 승천을 목격한 후 신실한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 그 후 예루살렘 교회의 중추적인 지도자로서 제3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그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찾아온 사도 바울의 방문을 받기도 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는 유대의 한 제사장에 의해 순교 당했다고 전해진다(A.D. 62년경).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는 신약성경 야고보서의 저자인데, 열두 제자는 아니다. 이 정도만 알고 넘어가셔도 되겠습니다.
이어서 두 번째 야고보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야고보입니다. 일명 큰 야고보라고 불립니다. 아래 내용 보세요. 예수님의 대표적인 세 제자(베드로, 요한, 야고보) 중 한 사람. 세베대와 살로메의 아들이자 사도 요한의 형제이다. 예수님과는 사촌 간으로 여겨지며 베드로와 동업했던 어부였다. 열두 제자 중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작은 야고보)와 구분하기 위해서 ‘큰 야고보’로 불린다. 그는 형제 요한과 함께 예수님의 정치적인 메시아 되심을 믿고 세속적인 지위를 구하기도 했고, 예수님이 잡히실 때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도망하기도 했으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 초대교회의 기둥과 같은 역할을 하다가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해 살해됨으로써 열두 사도 중에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서 핵심적인 제자 그룹이라고 볼 수 있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세 사람 중의 한 사람이 큰 야고보인데, 열두 사도 중에 최초로 순교한 사도입니다. 첫 번째 야고보는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 두 번째 야고보는 예수님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인 큰 야고보. 그리고 세 번째 야고보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작은 야고보입니다. 아래 내용 보세요. 알패오의 아들이자 요셉의 형제로서(마 27:56; 막 3:18) 일명 ‘작은 야고보’라고 불리는 (막 15:40) 예수님의 제자이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지만 신약성경에는 행적이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작은 야고보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들이 고대 문헌들에 남아있긴 합니다만 사실 여부는 알기 어렵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 야고보는요. 사도 유다의 아버지 야고보입니다. 우리가 보통 유다라고 하면, 가룟 유다만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6장 13절에 보면,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등장합니다. 열두 제자이자 사도인 유다의 아버지 야고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의 친동생 요셉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요셉이라고 하면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야곱의 아들 요셉을 떠올리기 쉽습니다만, 예수님의 친동생 중에 요셉이 있어요. 히브리어와 헬라어 발음 모두 요쎄프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음역을 거의 똑같이 했다고 볼 수 있죠. 물론 비읍 발음은 아닙니다만, 거의 유사해요. 좌우지간 이 요셉이라는 인물은 마가복음 15장 40절과 마태복음 13장 55절을 제외하고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어서 세 번째 형제는 유다입니다. 5페이지로 넘어가서요. 유다는 히브리어로는 예후다, 헬라어로는 유다스라고 읽는데요. 먼저 첫 번째 유다는 예수님의 친동생 유다입니다. 유다는 앞서 살펴본 야고보의 형제이며 예수님의 친동생입니다. 예수님의 친동생 유다는 야고보와 함께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고 유다서의 저자입니다(유 1:1). 예수님의 사역 당시에는 그분의 메시아 되심을 믿지 않았으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목격한 후에 신앙을 갖게 되었고, 오순절 성령 강림 때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지만, 부활을 목격하고 성령 강림을 체험함으로써 적극적으로 활동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어서 두 번째 유다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유다입니다. 야고보 내용에서 등장했듯이, 야고보의 아들 유다인데요.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유다는 신약성경에서 딱히 행적이 기록되어있지 않습니다.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 정보는 극히 제한적이에요.
이어서 세 번째 유다는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열두 제자 가룟 유다입니다. 은 30에 예수님을 판 가룟 지역의 출신 유다이죠. ‘가룟’은 유대 남부 지방 ‘그리욧’으로 유다의 고향입니다. 히브리어 그리욧을 헬라어로 음역한 것이 가룟이에요. 자 그래서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들 중 한 사람인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구별하기 위해서 가룟 유다로 불렸으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 공동체에서 회계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처음에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사도로서 권능을 덧입고 복음 사역에 동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지상 왕국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고 물질의 노예가 됨으로써 예수님을 배반하게 되었죠. 예수님은 처음부터 가룟 유다를 배반할 자로 알고 계셨습니다. 결국 가룟 유다는 은 30을 받고 예수님을 팔았으며, 입맞춤을 통해서 예수님을 대적들에게 넘겼습니다. 그 뒤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 그 돈을 대제사장과 장로들 앞에 던지고 자살함으로써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마태는 그가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고 했으며, 누가는 가룟 유다의 몸이 곤두박질해 배가 터져서 창자가 다 흘러 나와 죽었다고 기록했죠.
그리고 유다라는 이름은 예수님의 조상 중에 유다라는 인물이 있었고, 갈릴리의 반란자 유다가 있었고, 바사바라 하는 유다가 있었습니다. 굉장히 흔한 이름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는데요. 예수님의 친동생 유다와 열두 제자 중에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두 명 있었다. 이정도만 기억하고 넘어가면 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시몬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시몬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에서 넘어온 이름이 아닌 헬라어 이름입니다. 우리말 성경 발음과 동일하게 씨몬이라고 읽습니다. 시몬이라는 이름이 성경에서 굉장히 많이 등장하는데요. 무려 아홉 명의 시몬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 시몬은 예수님의 친동생 시몬이에요. 예수님의 친동생 시몬의 행적은 성경에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두 번째 시몬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시몬이에요. 요나의 아들이며 안드레의 형제 시몬이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베드로에요. 베드로에 관한 내용은 너무 많아서 교재에는 간략하게 넣었습니다.
자 그리고 세 번째 시몬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시몬이에요. 가나나인, 셀롯인이라 불리는 열심당원의 일원이었던 시몬인데요. 열심당원이란 무엇이냐면, 로마에게 압제를 당하고 있던 이스라엘을 독립시키기 위해서 과격한 성향을 지닌 집단을 열심당원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열심당원인 시몬에 대한 내용은 거의 등장하지 않아요. 그리고 나머지 베다니의 나병환자 시몬, 구레네 시몬, 바리새인 시몬, 가룟 유다의 아버지 시몬, 마술사 시몬, 무두장이 시몬. 굉장히 많은 시몬들이 등장합니다만, 복음서에서 헷갈릴만한 시몬은 예수님의 친동생, 열두 자제 중 시몬이라는 이름을 가진 두 사람. 세 명의 시몬이 헷갈릴 수 있겠습니다만, 교재 내용을 참고하시면서 분간하시면 되겠습니다.
자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빵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유대인들은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우리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아는데, 그가 지금 어떻게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하는가. 이런 식으로 거부반응을 보입니다. 오늘 살펴보겠습니다만 나중에 제자들 역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회의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그리고 방금 살펴본 이 예수님의 친동생들 역시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거부했죠. 이렇게 예수님은 수많은 반대와 거부에도 불구하고 공생애 사역을 이어가셨습니다. 십자가 고난을 받기 이전에도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고난의 연속이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두 번째 파트,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에서는 사람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일, 예수님을 믿는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줍니다. 6장 4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않으시면 아무도 내게로 올 수 없으며, 내게 오는 그를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요한복음 6장 37절 말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과 굉장히 유사한 말씀이죠. 6장 44절 말씀은 예정론의 근거 구절로도 사용되는데요. 왜 그런가 하면,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않으시면 아무도 내게로 올 수 없다는 말씀 때문이에요. 다시 말해서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예수님께 갈 수 없다는 거예요. 자기 의지로 내가 믿고 싶어서, 내 힘과 의지로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6장 37절과 44절 말씀을 모르고 1장만 읽으면 오해하게 되는 거예요. 어느 누구나 영접하기만 하면 된다. 믿기만 하면 된다. 자신의 이성과 지혜와 통찰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믿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는데, 그런 이해는 잘못된 이해라는 것이죠. 왜요?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로 이끌어 주셔야만, 믿을 수 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믿음이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시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하나님께 모든 책임을 돌려서도 안 됩니다. 왜요? 6장 44절 말씀 다시 보세요. 내게 오는 그를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원리는 하나님께서 이끌어주시는 것이 전제되어있어야 하지만, 예수님께로 오는 것, 예수님을 향해 가는 것은 결국 사람의 몫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거부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는 겁니다.
자 그래서 7페이지 1번 보시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 있어서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로 이끌어 주심. 2번,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 있어서 예수님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심.
그리고 아래 참고구절 보세요.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은혜는 신약성경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에서부터 등장했어요. 예레미야 31장 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
호세아 11장 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인도하셨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강압적으로 억지로 이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족장시대에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일으키기 위해서 애굽 땅으로 인도하셔서 그곳에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셨고, 그분의 권능과 은혜와 사랑으로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 주셨죠. 이렇게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스라엘을 언제나 사랑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고, 인간의 죄악된 본성 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믿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이러한 내적 조명의 기본 원리가 요한복음 6장 45절 말씀에 등장하는데요.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선지자들의 글에 '또 그들 모두가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기록되었으니, 아버지께 듣고 배운 자는 다 내게로 온다.”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진다는 겁니까? 하나님께서 사람 개개인 안에 심겨진 통찰과 가르침과 조명을 통해서 구약성경의 약속을 성취하시는 겁니다. 어떤 말씀을 성취하시는가 하면, 아래 나와있는 이사야서 54장 13절 말씀을 성취하시는데요. 54장 13절 말씀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 네 자녀에게는 큰 평안이 있을 것이며”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다.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자유롭게 인용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그대로 토씨하나 빼먹지 않고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자유롭게 변형해서 인용하신 건데요.
사실 내적 조명의 원리나 필요성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 모두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는 내용입니다. 예컨대,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법을 자기 백성의 마음에 두고 거기에 새기게 될 새 언약을 바라보죠. 또 에스겔서에서 하나님은 새 마음과 새 영을 약속해 주십니다. 또한 요엘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을 모든 사람들에게 부어주실 것이라 예언하죠. 또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과 16장에서 성령 하나님께서 가르치는 역할을 하실 것이라 말씀하시죠.
자 이런 식으로 우리의 죄악된 본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심령이 새로워지는 것은 엄청난 신비에요.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가르침을 주신 것이고, 깨달음을 주시는 것이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께 나아가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가르침 받은 사람은 필연적으로 예수님께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죠. 하나님께 가르침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가르침 받지 않은 겁니다. 구약성경을 통달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그것은 잘못된 지식이에요. 유대인들이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세 번째 파트, 생명의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6장 47절부터 51절까지의 말씀을 교독하겠습니다. 시작.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믿는 자는 영생을 가지고 있다. /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다. /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으나, /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빵이니, 이것을 먹는 자는 죽지 않는다. / 내가 곧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니,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다.”
지난 시간에도 살펴보았지만,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말씀으로 알려주셨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생명의 빵이십니다. 예수님은 이해를 돕기 위해서 만나와 자신을 대조해서 말씀하시는데요. 49절 말씀에서,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이렇게 말씀하시죠. 이 말씀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습니다. 실제로 역사가 증명하기 때문이죠. 광야에서 40년을 방랑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면서 생존했지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모두 죽었습니다. 광야라는 척박한 환경에서 목숨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영생을 줄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51절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자 생명의 빵이시기 때문에, 생명을 위한 예수님의 살이기 때문에,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생을 얻게 됩니다.
자 그래서 이렇게 살펴본 내용을 토대로 8페이지의 문제를 풀어보겠습니다. 1번, 예수님을 믿는 자는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까?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죠. 2번 예수님은 자신을 무엇이라 표현하십니까? 생명의 떡 또는 생명의 빵이죠. 3번 출애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만나의 한계는 무엇입니까?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없음. 4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생명의 빵의 출처는 어디입니까? 하늘. 5번 생명의 빵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세상의 생명을 위한 예수님의 살. 6번, 생명의 빵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자 이렇게 세 번째 파트까지 살펴보았는데요. 지난 시간에 알려드린 내용, 예수님의 일곱 가지 자기 계시, 어떻게 좀 외워보셨나요? 다시 한번 외워볼까요? 시작. 떡 빛 문 목 부 길 포. 생명의 떡, 세상의 빛, 양의 문, 선한 목자, 부활 생명, 길 진리 생명, 참 포도나무.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에고 에이미로 말씀하신 일곱 가지 내용을 암기해 두시면 유익하실 겁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의 네 번째 파트, 생명의 빵에 대한 유대인들과 예수님의 대화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52절 말씀 보세요. “그러자 유대인들이 서로 논쟁하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먹으라고 우리에게 줄 수 있겠는가?"라고 하므로,”
요한복음 6장 41절과 42절 이후로 침묵하고 있던 유대인들이 다시 말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끼리 말하는 거예요.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먹으라고 우리에게 줄 수 있겠냐며 논쟁이 벌어진 것이죠. 마치 이러한 혼란스러움은 니고데모가 했던 질문을 연상시킵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중생에 대해서, 위로부터 태어남,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남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던 니고데모의 반응과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이죠. 그러니까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예수라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먹으라고 우리에게 줄 수 있겠느냐. 상식적으로 그리고 문자적으로 이 말을 이해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드는데, 그렇다면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 하는 논쟁이 일어난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유대인들 사이에서 일어난 논쟁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3절부터 58절까지의 말씀을 교독하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이 없다.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다.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 /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인해서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해서 살 것이다. /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니, 조상들이 먹고 죽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이 빵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다."
아멘.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잘 보면, 유대인들의 오해를 말끔하게 씻어낼 수 있는 구체적인 설명이 나타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53절 말씀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이 없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단순하게 예수라는 사람의 살과 피를 마셔야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인자의 살과 인자의 피를 마셔야만 생명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설명은 54절에서 반복되죠.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예수님의 이러한 설명은 문자적인 의미가 아니라 은유적인 표현이라고 이해해야 하지만,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은유적인 표현이라고 하더라도 뉘앙스 자체가 불쾌하게 다가왔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오경은 피를 마시는 것을 금지했고, 피가 섞여 있는 고기를 먹는 것조차 금지했습니다. 우스갯소리로, 구약시대의 기준으로 오늘날 스테이크 먹는 사람들을 보면 어떨까요. 고기 굽기 레어나 미듐 레어, 미듐. 이런건 모두 부정한 거예요. 고기를 먹을 거면 무조건 웰던으로 먹어야 됩니다. 네. 진지하게 들으시면 안 되고요. 구약시대에 지켰던 율법은 그랬다는 겁니다.
하여튼 인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표현은 유대인들이 들을 때, 본능적으로 혐오스럽고 가증스러운 표현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먹다”라는 표현을 계속해서 사용하시는데요. 56절, 57절, 58절에서 모두 먹는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먹는다는 동사가 다르게 사용됩니다. 예컨대, 56절, 57절, 58절에서 나를 먹는다고 할 때 먹는다는 동사는, 초기 헬라어에서 초식성의 동물들이 풀을 우적우적 먹는다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고, 사람에게도 이 동사가 사용되는데, 큰 소리로 씹으면서 먹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우적우적 먹는다. 이런 식으로 이해할 수 있겠죠. 그런데 뭘 우적우적 먹어요? 예수님의 살을 우적우적 먹는다는 거예요. 그러니 이런 뉘앙스를 감안해서 생각해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혐오스럽고 가증스럽게 생각할만하죠.
그리고 여기서 거한다는 것은 신자와 예수님이 내면에서 연합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성령 하나님을 통한 인격적인 임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내용은 요한복음 14장에 다시 등장하는데, 나중에 더 깊이 있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어서 56절 말씀 보세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어떻다는 겁니까?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 여기서 “있다”라는 번역은 원어의 본래 의미를 담지 못합니다. 이 말은 “머물다. 거주하다. 거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동사이기 때문에, 거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내 살을 우적우적 먹는 사람은 내 안에 거하고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거하고 있다. 라는 의미에요. 다시 말해서 살을 먹는 것과 거하는 것이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죠.
또 57절 말씀을 보시면,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인해서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해서 살 것이다. 먹으면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산다는 겁니다. 그리고 58절 말씀에 따르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산다고 합니다.
자,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토대로 문제를 풀어보겠습니다. 1번, 예수님읜 자신의 살과 피를 무엇이라고 표현하십니까? 인자의 살과 인자의 피. 2번 예수님의 살과 피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하죠. 3번. 예수님의 살과 피와 대조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의 조상들이 먹었던 만나와 대조되죠. 4번.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으면 어떤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까? 내주하시는 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아래 참고 구절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을 동일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아를 부정하고, 자신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며, 이제 내가 사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하게 된 것이죠. 이러한 고백은 사도 바울이니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생명의 떡, 생명의 빵을 먹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누구나 이러한 고백을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자 이제 오늘 본문의 다섯 번째 파트, 생명의 빵에 대한 제자들의 이해를 살펴보겠습니다. 60절 말씀 보세요. 그러자 예수님의 제자들 중 여럿이 듣고 말하기를 "이 말씀은 어렵구나, 누가 그분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하므로.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어려워서 이해하기 어렵다는 의미보다는, 반감을 품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헬라어의 의미를 잘 모르면 어렵다는 말이 난이도가 높다. 너무 깊이있는 말씀이어서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식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60절에서 어렵다는 말은 “거슬리고 반감을 품게 만들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 그리고 60절에서 등장하는 제자들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일까요 아닐까요? 네 아닙니다. 아직 열두 제자라는 표현은 요한복음에서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불특정 다수의 그룹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자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아시고 유대인들에게 가르침을 주셨던 것처럼 제자들에게도 가르침을 주시는데요. 62절과 6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인자가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너희가 본다면 어찌하겠느냐? 살리는 것은 영이고, 육은 아무런 유익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들은 영이고, 생명이다.”
예수님께서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제자들이 본다면, 예수님의 주장이 진실된 주장이라는 것이 증명될 것입니다. 하지만 증명된 것을 보고 믿는 것보다,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영적인 말씀이기 때문이에요. 아래 질문 보시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어떤 말씀입니까? 영적인 말씀이자 생명의 말씀이죠.
아래 3번 보시면,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시는데요. 64절 65절 6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러나 너희 가운데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않는 자들이 누구이고 자기를 넘겨줄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자가 아니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라고 말하였다."라고 하셨다. 이러므로 그분의 제자들 중 여럿이 떠나가버리고 더 이상 그분과 함께 다니지 아니하였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불신앙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너희 중 몇몇은 믿지 못할 거야. 이런 의미가 아니라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않는지 내가 정확하게 알고 있어. 이런 말씀이에요. 따라서 나중에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넘긴 일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깜짝 놀라게 만들 수 없다는 거예요. 왜요? 예수님은 처음부터 이 모든 일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65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 중 믿지 않는 자들이 왜 믿지 않는지 알려주시는데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자가 아니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 역시 예정과 유기에 대한 근거구절로 사용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믿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 중 여러 명이 예수님을 떠나는 일이 발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떠나가는 제자들을 보면서 열두 제자에게 말씀하십니다. 11페이지 요한복음 6장 67절 68절 6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러자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도 떠나가려 하느냐?"라고 하시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우리가 뉘게로 가겠습니까? 주님은 영생의 말씀을 가지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는 주께서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알았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열두 제자에 대한 소개가 등장하는데 요한복음에서는 갑작기 쌩뚱 맞게 열두 제자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 열두 제자가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죠. 굉장히 불친절해요. 요한복음 1장부터 6장까지의 내용 중에 언급된 제자들은 안드레, 시몬 베드로, 빌립, 나다나엘이 전부입니다. 따라서 요한복음만 읽어서는 열두 제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어요.
자 그래서 예수님의 질문. 너희도 떠나가려 하느냐.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님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이심을 믿고 알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합니까?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수님만이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습니다. 물론 베드로가 나중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긴 합니다만, 말씀을 듣고 반감을 품고 거부감을 내비치면서 예수님을 떠나버린 제자들과는 다르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하고 믿었다는 점에서 베드로는 특별한 제자 그룹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자 그래서 베드로의 대답에 대해서 예수님은 독특한 반응을 보여주십니다. 70절과 71절 말씀 보세요.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시기를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않았느냐? 그러나 너희 가운데 하나는 마귀이다."라고 하셨는데, 예수께서는 가룟 사람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니, / 이는 그가 열둘 가운데 하나로서 ‘예수님을 넘겨주려 하였기 때문이었다.
요한복음 1장부터 6장까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따로 선별하시거나 선택하셨다는 내용은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70절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이미 열두 제자를 특별하게 선별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특별하게 칭찬해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죠. 한번 생각해 보세요. 베드로는 떠나가는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베드로야. 너가 그걸 알고 나를 선택해서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선택한거야. 이런 뉘앙스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어요.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셔야만 믿을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제자로 선택하시고 믿음을 이끌어주시는 것과 같은 것이죠.
물론 신자 개개인이 하나님 앞에 말씀 앞에 온전히 서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믿음으로 반응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본질적으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시고, 또 그 사람의 인생에서 적절한 순간에, 효과적인 부르심을 통해서 믿음을 발현시키시는.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신자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되어야만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조직신학적인 개념과 신약신학적인 개념이 적절하게 담겨있는 구절이죠.
그리고 71절에서는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마귀인데,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넘겨주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나타나죠. 실제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넘기는 장면이 요한복음 18장에 등장하는데, 요한복음 6장에서부터 벌써 예수님께서 알고 계신다는 사실이 등장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신적인 지식을 가지고 계시며,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상황에서 능동적으로 순종하시며, 자기 자신을 내어주시고, 그분의 살과 피를 신자들에게 허락하심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이러한 내용이 오늘 본문 말씀에 잘 나타나고 있죠. 이 내용을 이번 한주간 깊이 있게 묵상하시면서 우리 주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시고, 그분의 은혜를 더욱 깊이 체험하시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걸림이 되지 않고, 생명의 말씀이 되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를 주님의 자녀로 택하시고 부르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 심령 안에 거하시는 주님과 온전히 동행하며 빛과 소금된 역할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becnt 313
pnct 549
존더반 371
16-1
1. 하늘, 빵 2. 요셉
16-2
1.1. 이끌어 1.2. 마지막, 살리심 2. 예수님
16-3
1. 영원, 생명 2. 생명, 빵 3. 영원, 생명 4. 하늘
5. 세상, 생명, 살 6. 죽음
16-4
1.1. 불신 2.1. 인자, 인자 2.2. 죽음 2.3 만나 2.4.내주
16-5
1. 반감 2. 영적인, 생명 3. 떠나가버리고, 다니지
16-6
1. 거룩한 2.1. 가룟, 시몬, 유다 2.2. 넘겨주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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