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강 갈등의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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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기도하고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나눌 내용의 제목은 생명의 떡입니다. 요한복음 7장 1절부터 24절까지의 말씀을 한절씩 교독하겠습니다. ~~~ 아멘.
지난주에 우리는 요한복음 6장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무려 71절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이었죠. 71절에 달하는 내용 중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내용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불신이에요. 혹시 성경책 가지고 오신 분들은 요한복음 6장 펴보세요. 네. 요한복음 6장 1절에서 15절 말씀은 오병이어 표적을 기록하고 있는데, 6장 14절과 15절에서 오병이어 표적을 체험한 사람들, 배부르게 빵과 물고기를 먹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이 속으로 품은 마음은 예수님을 억지로 왕으로 삼아서 로마로부터 독립시켜야겠다. 이런 마음을 품었다고 했죠.
그리고 6장 22절에서 40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오병이어 표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그 다음날 예수님을 찾아온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이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말씀을 하셨어요.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고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하시면서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다.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했죠.
그리고 6장 41절부터 59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서로 수군거리는데, 이때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가르침을 주셨죠.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는지, 내적 조명의 원리를 알려주시고, 다시 한번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빵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이 생명의 빵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죠.
그리고 6장 60절에서 71절까지의 말씀에서는 제자들과 예수님과의 대화가 등장합니다. 제자들이 바로 앞 단락, 예수님과 유대인들과의 대화를 듣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반감을 품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죠.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자가 아니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 중 여러 사람이 예수님을 떠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말씀하시죠. 너희도 떠나가려느냐. 이때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합니다. 우리는 주께서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알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였다는 말씀과 함께, 열두 제자 중에 한 사람이 마귀라는 사실을 밝히시면서 6장 말씀이 끝납니다.
자 그래서, 6장의 내용은 베드로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사람들에게서 예수님을 향한 짙은 불신이 나타납니다. 오병이어 표적을 체험했던 사람들, 유대인들, 제자들. 이렇게 열두 제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믿음을 보이지 않은 것이죠. 물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사람들이 어떤 어떤 반응을 보였다. 구체적인 말씀이 기록되어있지 않아서, 열린 결말처럼 생각해야되지 않을까. 이렇게 보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올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은 대부분이 예수님께 그들의 믿음을 칭찬받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믿지 않는 경우에는 책망을 받거나 언급되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장부터 6장까지의 문맥은 예수님에 대한 거부감과 불신이 점진적으로 고조되는 흐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부터 이러한 내용이 등장했죠. 로고스께서 자기 땅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요한복음 1장 말씀을 통해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강의하면서 지난 강의를 이렇게 길게 복습한 적이 거의 없는데요. 오늘 이렇게 길게 복습한 이유는 요한복음 7장의 중심적인 주제가 바로 갈등의 심화 또는 불신의 고조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등장했던 불신이 오늘 내용인 7장에서도 동일하게 등장합니다. 독특한 점은 예수님께서 이러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거부감과 살해 의도를 교묘하게, 의도적으로 피하신다는 점인데요. 해당 내용을 지금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첫 번째 파트는 예수님의 형제들의 불신입니다. 요한복음 7장 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이 일들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셨고 유대에서는 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니, 이는 유대인들이 그분을 죽이려 하였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7장 1절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머물고 계시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죠. 이 말씀은 사실상 요한복음 5장 18절과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3페이지 제일 위에 있는 참고 구절 요한복음 5장 18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 누구를 고치셨죠? 38년된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어디서요? 예루살렘 양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 연못에서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병자를 고치신 날이 어떤 날이었습니까? 안식일이었죠.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하신 일 중에서 어떤 것이 문제였습니까? 병을 고친 것도 문제였지만 유대인들이 구체적으로 문제 삼은 것이 어떤 것이었죠? 38년 된 병자가 자리를 깔고 앉았는데, 그 자리를 들고 일어나서 걸어간 것. 이 행위가 노동으로 취급돼서 안식일을 위반했다고 유대인들에게 지적당했죠. 그러자 이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나는 잘못 없습니다. 그 사람이 이렇게 하라고 해서 했을 뿐입니다. 이렇게 대답해서 유대인들과 예수님의 논쟁이 시작되었죠.
이 과정에서 예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여야겠다고 마음먹습니다. 유대인들의 살해 동기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자신의 친아버지라고 말하며,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겼다는 점에서 예수님을 죽여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것이죠.
하지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살해하겠다는 마음을 먹을지라도 예수님은 사람의 힘으로 죽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왜요?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죠.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진정한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힘과 권력으로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고, 계속해서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서 찾아다녔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복음 7장 1절에서 예수께서 갈릴리에 다니셨고 유대에서는 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다고 기록되어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살해 의도를 정확하게 인지하시고, 유대 지역에 들어가지 않고 갈릴리 동네에 계속해서 머물고 계셨던 겁니다.
그리고 이제 요한복음 7장에서 배경이 초막절로 바뀌는데요. 초막절이란 무엇입니까? 3페이지 참고 자료 보세요. “초막절은 초막을 짓고 거기에 거주하며 지키는 절기이다.” 아래 참고 구절 레위기 23장 42절과 43절 말씀 보세요. “너희는 이레 동안 초막에 거주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주할지니 /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주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아멘.
초막절이 어떤 명절이라고요? 7일 동안 초막에 거주하는데,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사람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초막에 거주하라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켜 주시고, 장막에 거주하게 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다시 참고 자료 보세요. “출애굽 당시 광야 생활 40년 동안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기 위해 히브리 종교력으로 7월 15일부터 1주간 지켰다.” 아래 참고 구절 레위기 23장 3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일곱째 달 열닷샛날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이레 동안 지킬 것이라” 초막절이 일곱째 달 열닷샛날이라고 하죠. 7월 15일이라고 생각하기 쉽겠습니다만, 히브리 달력으로 7월 15일이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으로 7월 15일은 아니에요.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으로는 10월 15일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초막절을 일주일 동안 지킨다고 하는데, 이것 역시 하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거예요. 여호와를 위하여 이레 동안 지킬 것이라. 이렇게 명령하신 것에 따르는 것이죠.
다시 참고 자료 내용 보세요. “초막절은 농사철이 끝나고 곡식을 저장하는 시기에 지켜져 추수 감사절 성격이 짙었다. 그래서 초막절은 ‘수장절’로도 불렸다. 이날에는 노동이 금지되었고, 첫날과 마지막 날에는 성회가 열렸으며, 매일 화제를 드렸다. 초막절은 유월절, 칠칠절(오순절)과 더불어 이스라엘 3대 절기 중 하나이다.”
이 참고 자료의 설명 내용은 참고 구절에 근거한 설명이에요. 참고 구절에 있는 신명기 16장 13절 말씀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거두어 들인 후에 이레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타작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거두어 들인 후에 초막절을 7일동안 지키라는 말씀을 보면, 확실히 추수감사절의 성격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죠.
자 이렇게 이스라엘의 절기 중에서 가장 큰 절기로 불리는 이 초막절이 요한복음 7장의 배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5페이지로 넘어가서 보시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예수님의 혈육들, 예수님의 형제들의 대화가 등장합니다. 요한복음 7장 3절부터 5절까지의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그분의 형제들이 그분께 말하기를 "당신의 제자들도 당신이 하시는 일들을 볼 수 있도록 여기를 떠나서 유대로 가소서. 자신이 드러나기를 바라면서 숨어서 무엇을 하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당신이 이 일들을 하시려거든 당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이는 예수님의 형제들도 그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무엇을 요청합니까? 갈릴리를 떠나 유대 지역으로 가서 예수님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드러내서 보여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모인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가르침을 보여주시든, 기적을 보여주시든, 어떤 방식을 사용하든지 간에, 현재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많은 제자들이 떠난 상황이기 때문에, 이 상황을 반전시키려면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가서 뭐라도 해야 된다는 것이죠.
이러한 예수님의 동생들의 조언 또는 요청은 원칙적으로 보면 옳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맞는 말이죠. 오병이어 사건 이후에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제자들이 많이 떠난 것도 사실이고,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도 사실이고, 거기서 예수님이 뭐라도 하시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알게 될테니, 이러한 조언은 다 맞는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동생들은 두 가지 사실을 몰랐습니다. 첫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살해하기 위해서 눈에 쌍심지를 켜고 찾아다닌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 예수님의 동생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원자이시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 감히 조언을 하는 것이죠. 만약 예수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있다면 예수님께 이런 상황에는 이렇게 하고 저런 상황에는 저렇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겠죠. 예수님이 꼰대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사람과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물론 사람들 사이에서, 또는 공동체 안에서는 선한 목적을 가지고 얼마든지 서로 조언할 수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공손하고 정중하게, 지혜롭게 사랑을 담아 요청하거나 조언하면 상대방이 누구냐를 떠나서 얼마든지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비록 이 당시에 예수님이 30대 초반의 미혼 남성이라고 하더라도 예수님은 예수님이죠. 하지만 예수님의 동생들이 예수님께 조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예수님을 향한 불신앙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게다가 사도 요한도 이 내용을 기록하면서 동생들이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요한복음 7장 5절에 추가 해설을 달아놓았습니다. 이는. 왜냐하면, 예수님의 형제들 또한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말 성경으로 이 말씀을 보면 그 뉘앙스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서 믿지 않았다는 말은 계속해서 믿지 않았다는 뉘앙스를 담고 있습니다. 헬라어 문법으로 말하자면, 미완료 과거 시제가 사용되었는데요. 미완료 과거 시제는 무엇무엇 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무엇무엇 하다. 이런 시상을 표현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미완료 과거 시제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원어로 요한복음을 읽는 독자들은 7장 5절의 뉘앙스를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 예수님의 동생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이런 말을 한 건데, 요한복음 7장의 상황에서만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믿지 않았구나. 이렇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죠.
자 그래서 요한복음 7장 3절에 그분의 형제들이라고만 나오는데요. 그분의 형제들이 누구입니까?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있다고 했죠. 지난주에 이 내용을 자세하게 살펴보았는데요. 기억이 잘 나지 않으시는 분들은 참고 자료를 확인하시면 되겠습니다.
이제 6페이지로 넘어가서요. 예수님의 형제들이 조언한 내용, 요청한 내용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시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7장 6절부터 9절까지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아직 내 때가 되지 않았으나 너희 때는 항상 준비되어 있다. 세상이 너희는 미워하지 못하나 나를 미워하니, 내가 세상에 대하여 그 행위들이 악하다고 증언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의 때가 아직 차지 않았으므로 나는 이번 명절에 올라가지 않겠다." 예수께서 이것들을 말씀하시고 갈릴리에 머무르셨다.
요한복음 7장 6절, 7절, 8절 말씀 중에서 6절과 8절 말씀은 해석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구절에 속합니다. 요한복음을 전공한 유명한 서구 신약학자들 사이에서도 해석이 상이합니다.
예컨대, 요한복음 7장 6절, 아직 내 때가 되지 않았으나 너희 때는 항상 준비되어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 2장 4절 말씀을 떠올릴 수 있는데요. 갈릴리 가나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의 육신인 어머니인 마리아가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죠.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러자 요한복음 2장 5절에서 마리아가 하인들에게 이렇게 말하죠.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그리고 예수님은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지만 표적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인 요한복음 7장은 어떻습니까? 겉으로 볼 때, 아직 내 때가 되지 않았다는 말씀이 요한복음 2장과 유사해 보일 수 있겠습니다만, 다른 점이 훨씬 더 많습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마리아는 예수님께 어떻게 해달라고 구체적으로 요청하지 않았고 포도주가 없는 상황을 이야기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 달라고 구체적으로 요청했죠. 물론 당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이 말이 모호해 보일 수 있겠습니다만, 이 말을 풀어서 생각해 보면, 기적을 나타내 주시든, 말씀으로 가르쳐 주시든, 지금까지 하신 행적들을 그대로 행해달라는 요청이기 때문에 구체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 그리고 마리아는 예수님을 믿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을 계속해서 믿지 않았죠. 나중에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에 예수님의 형제들 모두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었지만, 복음서의 상황에서만큼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요한복음 2장과 7장은 서로 유사한 구절로서 해석할 수 없습니다. 또한 “나의 때”라는 표현에서 때라는 헬라어 단어가 서로 다르게 사용되었다는 점도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7장 6절에서는 카이로스, 2장 4절에서는 호라. 이렇게 서로 다른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렇게 신학적으로 자세히 살펴보면 요한복음 2장과 7장은 다른 점이 참 많죠. 겉으로 볼 때 내 때가 되지 않았다는 말이 똑같으니까 의미도 유사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7장 6절 말씀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문맥을 살펴보면, 일단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이러한 점에서 예수님의 형제들의 때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통치에서 배제되어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특별한 때가 예비되어있지 않다는 것이죠. 반대로 예수님의 경우에는, 예수님의 말과 행동, 기적을 일으키시고 이동하시는 모든 일정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어느 것 하나도 예수님 개인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누가 어떻게 해달라. 어떻게 사역해달라. 이런 식의 조언이나 요청에 응하실 이유가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는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헛되이 사용되는 시간은 1분 1초도 없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예수님의 인생과 우리의 인생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굉장히 특별합니다. 예컨대 우리는 청지기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간과 물질과 건강을 지혜롭게 사용해야만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우리의 모든 것을 활용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우리의 섬김의 삶에는 정해진 때가 없어요.
반대로 예수님의 경우에는 다르죠. 예수님의 공생애는 굉장히 특별합니다. 창세부터 예수님의 성육신까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뜻 가운데 진행되고 있었는데, 예수님의 성육신에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절정에 달합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역사들 가운데 가장 위대하고 놀라운 일이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안에 일어나는데, 어찌 감히 예수님께 이렇게 해달라 저렇게 해달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겠죠.
이어서 7장 7절 말씀 보시면, 세상이 너희는 미워하지 못하나 나를 미워하니. 내가 세상에 대하여 그 행위들이 악하다고 증언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기서 세상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데요.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 세상이 예수님의 형제들을 미워하지 못하지만 예수님은 미워한다고 하죠. 그러니 당연히 예수님의 형제들에게는 정해진 때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냥 죄악된 존재로 그 본성 그대로 악하게 살면 되는 거예요.
하지만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 따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공생애 사역을 감당하시기 때문에, 사람의 충고와 조언 따위는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님의 형제들이 더 지혜로운 방법을 제안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예수님의 형제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두 번째 파트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두 번째 파트는 초막절을 지키시는 예수님이에요. 예수님께서 형제들의 요청을 거부하고 갈릴리에 머무셨다고 하는데, 요한복음 7장 10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시간차를 두고 비밀리에 초막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7장 11절, 12절, 13절 말씀에서 예루살렘의 분위기가 어떠한지를 기록합니다. 초막절에 예루살렘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11절 말씀 보세요. 유대인들이 명절에 그분을 찾으면서 그가 어디에 있는가?라고 말하였다.
앞에서 초막절이 어떤 명절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신 사건을 기념하면서, 장막에서 7일을 지내는 그런 명절이라고 했죠. 또 추수 감사의 의미가 담겨있는 명절이기 때문에, 감사하고 기쁨이 넘치는 명절이라고 볼 수 있는데, 요한복음 7장의 분위기를 보면, 이러한 초막절의 의미는 온 데 간데 사라져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기쁨? 감사? 이런 것 하나 없이 예수라는 남자를 찾아서 죽여버리겠다는 살의가 가득해 보이죠.
또 명절을 지키러 온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12절 말씀 보세요. 무리들 가운데 그분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소리가 많았으니,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그분은 좋은 분이오."라고 하였으나, 다른 이들은 "아니오. 그는 무리를 미혹하고 있소."라고 말하였다.
사람들의 분위기는 반반인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을 좋은 사람으로 평가하거나 미혹하는 사람으로 평가하는 두 가지의 견해로 나누어져 있죠. 자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견해 모두 잘못된 견해라고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일단 예수님은 좋은 분 정도로 평가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죠? 지난주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공관복음에서는 이렇게 고백하죠. 주님은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분이시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좋은 분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죠. 좋은 분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을 굉장히 저평가하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좋은 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아직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깊이 있는 결론을 내리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냥 예수님에 대해서 긍정적인 마음 또는 호의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거예요.
또 무리를 미혹하고 있다는 표현은 나중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어떤 유대인 집단 안에서 지배적인 의견이 되었습니다. 바빌로니아 탈무드에 따르면, 예수님이 주술을 행해서 이스라엘을 어그러진 길로 이끈 사기꾼이었기 때문에 유월절 전날에 처형되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예수님을 사기꾼이라고 생각하는 유대인 집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유대인들 역시 예수님을 구원자로 생각하지 않죠.
이어서 요한복음 7장 13절 말씀 보세요. “유대인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아무도 그분에 대하여 드러내 놓고 말하지는 아니하였다.”
상식적으로 보면 예수님을 사기꾼 또는 미혹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을 조심하는 것이 이상해 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일 정도로 싫어하는데, 예수라는 사람에 대해서 부정적인 여론을 형성하면 더 좋은 일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루살렘에 모인 무리는 유대인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수군거리기만 하고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만큼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감과 혐오가 극에 달해 있다고 볼 수 있겠죠. 다시 말해 사람들이 유대인들 앞에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감히 말도 못 꺼낼 정도의 험악한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세 번째 파트,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7장 14절과 1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이미 명절 중간쯤 되었을 때에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서 가르치시니, / 유대인들이 놀라서 말하기를 "이 사람은 배우지 않았는데 어떻게 학문을 아느냐?" 하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초막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가르치시는데, 이때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배우지 않은 사람인데 학문을 알았기 때문이죠. 물론 원어로 15절을 읽으면, 이 사람이 어떻게 글자들을 아느냐. 이렇게 읽을 수 있겠습니다만, 당시 이스라엘의 시대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예수님이 글자를 읽을 수 있다는 것에 놀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당시에 유대인 남자들은 일반적으로 글을 읽고 쓸 수 있었으며, 구약성경에 대해 기본적인 이해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놀란 것은 글을 읽고 쓰는 것에 놀란 것이 아니라, 랍비들에게서 배운 적이 없는 예수라는 사람이 성경을 자유자재로 탁월하게 해석하는 것을 보고 놀란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놀라워하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7장 16절에서 18절까지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내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 / 누구든지 그분의 뜻을 행하기 원한다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내가 스스로 말하는 것인지 알 것이다.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신의 영광을 구하나, 자기를 보내신 분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진실하며 그 속에 불의가 없다.
요한복음 7장 20절을 제외하고 19절과 21절 말씀은 요한복음 5장 19절, 30절, 31절, 41절, 44절의 내용을 반영하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의미 자체는 거의 같다고 볼 수 있어요. 하지만 17절 말씀은 요한복음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내용이에요. 누구든지 그분의 뜻,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원한다면, 이 교훈,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내가 스스로 말하는 것인지 알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일단 본질적으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내용은 랍비들 간의 생산적이고 발전적이며 건설적인, 이러한 성숙한 토론이나 논쟁을 통해서 가르침의 내용이 참이냐 거짓이냐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이죠. 어느 시대이든지 관계없이 변함없이 적용되는 진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이자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를 평가하려면, 진위여부를 판별할 수 있는 고차원적인 지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한 헌신된 자세가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믿음의 헌신이 준비되어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눈을 열어주신다는 거예요.
여기서 또 오해하시면 안 되는 것이, 인간적인 어떤 노력과 행위가 수반되어야 진리를 알 수 있다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그 말씀을 판단하려는 마음으로 대해선 안 된다는 겁니다. 내 생각에 맞지 않더라도, 시대에 뒤쳐진 것처럼 보이더라도, 세상 사람들이 다 아니라고, 그건 틀린 거라고, 요즘 누가 그렇게 생각하냐고 반문하고 공격하는, 싸구려 복음으로 전락한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세상적인 온갖 공격과 비판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귀를 막고, 말씀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믿음으로 설 때에야, 하나님께서 그 마음의 눈을 열어주신다는 겁니다.
따라서 진리 바깥에 있는 그 어떤 외부적인 근거나 철학이나, 기타 사상들로는 하나님의 계시를 평가하거나 판단할 수 없고, 하나님의 계시는 오로지 믿음으로만 접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요한복음 7장 18절 말씀을 보시면, 유대인들과 예수님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은 구약성경에 통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오경과 시편 전체를 암송하는 랍비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며, 권위 있는 랍비들이 모여서 구약성경을 해석하고, 그 해석한 내용을 토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이 가르치는 내용이 구약성경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가르치지 않고, 율법주의적으로 가르쳤을 뿐 아니라 그 과정 가운데 교만해져서 자기가 무엇이라도 된 줄 알고 행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해졌다는 것이죠. 이러한 점에서 예수님께서 볼 때, 유대인들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성경을 가르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누구보다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려야 할 사람들이, 자신의 영광만을 추구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단 한 순간도 예수님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래 참고 구절 빌립보서 2장 6절, 7절, 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께서 원래 어떤 분이셨다는 거예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셨다. 성자 하나님이셨다는 거예요. 그런데 성자 하나님께서 성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종의 형체를 취하셨다는 거예요. 여기서 종의 형체를 취했다는 건, 종과 똑같은 모습이 되었다는 것인데, 종의 모습에서 신적인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어떤 방식으로요?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는 방식으로 자신을 낮추시고 복종하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당하고, 모욕당하고, 매 맞고, 온갖 비아냥거리는 소리들 가운데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며 죽어가셨습니다. 이 과정 안에 영광이라는 요소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자 그래서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이시며 영광스러운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종의 형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 사역을 감당하시는 동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가르치심대로,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이정표대로 자신의 삶을 100% 일치시키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그 과정 가운데 자신의 영광을 세상에 요구하실 이유도 없었고, 세상 사람들이 얻기를 원하는 그 영광을 얻으실만한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진실하신 분이시며 그 속에 불의가 없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들이 진리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밝히십니다. 요한복음 7장 1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 가운데 아무도 그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 어찌하여 너희가 나를 죽이려 하느냐?"
율법에 대해서 누구보다 박식하고, 율법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유대인들이지만, 정작 이들 중에 어느 누구도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겁니다. 정말 아이러니한 말씀이죠. 여기서 우리는 매우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율법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거룩함을 보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확장시켜서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다고 해서 신자임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지금 설명해드리는 내용 때문에, 마음 불편해하시는 분들이 없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7장 19절 말씀을 통해 마음의 동기를 지적하십니다. 유대인들이 순수한 동기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순수한 동기로,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된다고 보십니까? 감히 우리가 평가할 수 없겠습니다만, 코로나 기간 동안 한국 교회 성도들이 굉장히 많이 교회를 이탈했다고 하는데요. 말씀에 근거해서 보면, 코로나 기간 동안 성도의 숫자가 감소한 것은 교회의 잘못이 아닙니다. 애초에 믿음이 없던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다고 보는 것이 말씀에 근거한 바른 진단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무엇 때문에 교회에 출석하고, 무엇 때문에 교회를 떠나고. 이런 식으로 어떤 근거를 찾는 것부터가 잘못된 진단 방식입니다. 예컨대,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이 지표가 무엇이죠? 말씀, 성례, 권징입니다. 말씀 성례 권징만 올바르게 시행된다면, 그 교회의 성도가 몇 명이든, 어떤 시설을 갖추고 있든, 어떤 교육 시스템을 가지고 있든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것은 말씀 성례 권징의 지표를 바르게 갖추고 있느냐. 바르게 시행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 당시에는 성례와 권징 제도가 정립되지 않았던 시기이기 때문에, 이때에는 “말씀”이라는 요소로만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율법의 수호자인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이 율법을 아무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죠. 어떻게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잡아서 죽이려는 모습을 통해 증명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대화 가운데 무리가 말합니다. 7장 20절 말씀 보세요. 당신은 악령이 들렸소. 이 말을 직역하면 당신은 귀신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잘못 판단하는 것은 신약성경 여러 군데에서 발견되는데요. 아래 참고구절 보세요. 요한복음 10장 20절,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요한복음 8장 48절.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마가복음 3장 22절.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이런 식으로 예수님에 대해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이러한 오판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원자로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 예수님에 대해서 아예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 모두가 잘못된 가치관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7장 22절부터 24절까지의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시작. “이 때문에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 -사실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베푼다.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않으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온몸을 온전케 한 것 때문에 너희가 나에게 노여워하느냐?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로운 판단으로 판단하여라.”
22절 말씀은 21절 말씀과 연결되는데요. 21절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죠.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였는데 너희가 모두 이상히 여기고 있다.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치유하신 사건을 말씀하시는건데요. 이 사건 때문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다시 언급하시면서 복음의 본질을 알려주십니다. 7장 22절 말씀 보세요. 이 때문에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 할례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의 증표로 주신 것이 할례이죠. 태어난지 8일째 되는 날에, 남자의 성기 표피를 베는 것. 이것이 할례인데,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이스라엘에서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베푼다는 거예요. 안식일에 노동을 하면 안된다고 하면서 할례는 베푼다는 것이죠. 이에 대해서 랍비들은 이런 설명을 해요. 안식일보다 할례가 우선시 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에 할례를 베풀어도 문제가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유대인들은 모순을 범하고 있는 것이죠. 왜요? 태어난지 8일째 되는 날에 할례를 행하는 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니까요. 이들의 논리에 따르면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안식일을 범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온 것이죠. 하지만 예수님은 안식일에 한 가지 일. 단 한 번의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이어서 요한복음 7장 23절 말씀 보세요.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않으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온몸을 온전케 한 것 때문에 너희가 나에게 노여워하느냐.
여기서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라는 명목 하에 본인들이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내고, 그 규칙을 지키는 데 온 힘을 쏟았지만, 예수님에게 있어서 할례란 사람을 온전하게 하는 의식으로 해석하셨습니다. 그러니 병을 고치는 것 역시 온전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안식일이라고 하더라도 온전하게 하는 일, 생명을 살리는 일은 노동으로 취급되거나, 안식일을 범하는 것으로 여겨져선 안 된다는 것이죠.
이제 마지막으로 요한복음 7장 24절 말씀 보시면, 예수님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십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로운 판단으로 판단해라. 여기서 공의로운 판단으로 판단하라는 명령은 구약의 명령을 인용하신 말씀인데요. 요한복음 7장 22절과 23절의 흐름과 24절이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의도는, 만약 유대인들이 공의롭게 판단했다면, 예수님께서 율법이 지시하는 방식대로 율법을 성취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기 때문에, 공의롭게 판단하고 행동하라는 말씀을 하신 겁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명령은 오늘날 우리 모두가 깊이 있게 고민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의 성품이라고만 생각하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행동의 지침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측면을 간과하고 하나님의 사랑, 자비, 은혜. 이런 부분들만 깊게 생각하다 보면, 신앙적인 불균형을 초래할 수밖에 없습니다.
참고 구절 여섯 번째, 공의 실현의 중요성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신명기 16장 18절에서 2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각 성에서 네 지파를 따라 재판장들과 지도자들을 둘 것이요 그들은 공의로 백성을 재판할 것이니라 / 너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 너는 마땅히 공의만을 따르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리라”
공의만을 따르면 어떻게 됩니까? 살겠고,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을 차지하리라. 축복의 조건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공의 실현이에요. 이 말씀은 역으로 적용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따르지 않으면, 살지 못할 것이고,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을 차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항상 역으로 적용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만, 이러한 적용이 가능한 이유는, 이와 유사한 말씀이 있기 때문이에요. 스가랴 7장 9절에서 10절, 그리고 1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 내가 그들을 바람으로 불어 알지 못하던 여러 나라에 흩었느니라 그 후에 이 땅이 황폐하여 오고 가는 사람이 없었나니 이는 그들이 아름다운 땅을 황폐하게 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스가랴서는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다. 그런데 이 명령을 지켰다는 겁니까 지키지 않았다는 겁니까? 지키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까? 14절. 내가 그들을 바람으로 불어 알지 못하던 여러 나라에 흩었느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떠나 여러 나라에 흩어지는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는 겁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겁니까? 힘이 약해서, 외세의 침입에 충분히 대비하지 못해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는 하나님의 공의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은혜와 자비의 중요성을 견지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나의 삶에서 충분히 나타내고 드러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자 이제 강의를 마치려 하는데요. 2023년도 상반기 요한복음 성경공부는 다음 주가 마지막 주간입니다. 다음 주에 요한복음 7장 마지막 절까지 살펴보고 학기를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기도하고 오늘 강의 마치겠습니다.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불신앙과 살해의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나타내시며, 말씀으로 가르치신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보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도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에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이며, 삼위일체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을 거부했던 영혼들이었음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크신 은혜로 말미암아 주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살펴보기를 원하는 자들이 되었으니,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지식만 늘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를 부단히 노력하는 주님의 자녀 되기를 소원합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뜻에 따라,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온전히 드러내며, 빛과 소금된 역할을 충실히 감당해 내는, 모든 주님의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자 이제 강의를 마치고자 합니다. 3월 16일부터 시작해서 오늘부로 열 번의 강의를 진행했습니다. 지금까지 총 열일곱 번의 강의가 진행되었는데요. 요한복음 21장까지의 내용 중에 7장 중반부까지 살펴보았습니다. 삼분의 일 정도 살펴보았는데요. 다음 학기에도 잘 준비해서 영적인 유익을 끼쳐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한 학기 동안 성실하게 참여해주시고,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가고자 노력해주셔서 대단히 감사를 드립니다. 젊은 목사의 강의이지만, 우스갯 소리에 웃어주시고, 진지한 주해 내용을 들을 땐 진지하게 상고해주시고. 함께 호흡하는 시간이어서 저도 이 시간이 얼마나 기다려졌는지 모릅니다. 다음 학기까지 주님 안에서 늘 평안하시고 강건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제가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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