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계관 < 1강 창조신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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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일 2:16-17, 벧전 4:1-5,7, 롬 12:2
제목 : 기독교 세계관 < 1강 창조신앙 >
네. 안녕하세요. 저는 2020년, 2021년. 2년 동안 우리 화평교회 고등부에서 사역했던 장태호 목사입니다. 지금은 우리 화평교회에서 장년부 사역과 교육위원회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만나서 반갑습니다. 제가 기도하고 기독교 세계관 특강 시작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주님의 크신 은혜로 살려주시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며, 성령 하나님의 조명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알아가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고등부 수련회 둘째날,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영원한 생명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어떠한 생각과 마음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하는지 깊이 상고하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죽기까지 사랑하신 우리 아이들 기억하여 주시고, 지혜 더하여 주셔서 기독교 세계관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 주어진 인생을 감사함으로 살아내는 우리 아이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코로나 바이러스가 2020년도에 발생한 이후에 한국교회는 엄청난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 있는 위험성 때문에 정부 지침에 따라서 예배드릴 수 있는 인원에 제한이 생겼죠. 그래서 어떤 사람은 조심하려는 마음에 집에서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영상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낯설고 익숙하지 않아서 포기하기도 하고. 이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교회에서 멀어지는 성도들이 발생했습니다. 우리 교육부서도 마찬가지에요. 작년에는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긴 했습니다만, 2020년과 2021년도에는 비대면으로 예배드린 날이 많았어요. 이런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믿음이 연약한 친구들의 경우에는 교회를 자연스럽게 떠나는 일들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안 그래도 대한민국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이 위축되고 교회에 대한 이미지가 악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코로나 바이러스까지 교회에 영향을 미친 것이죠. 완전 업친 데 덮친 격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정도로만 이야기하면 와닿지 않을테니 구체적인 데이터를 보면서 살펴보겠습니다. 2021년도에 한국갤럽에서 조사한 한국인의 종교에 대한 설문조사 내용인데요. (다음) 나름 구체적으로 조사를 했어요. 성별, 연령별, 직업별, 지역별. 이런 식으로 다양하게 항목을 나눠서 조사했는데, 중요한 내용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우선 이 설문조사는 1,500명을 대상으로 진행했습니다. 전체가 다 그런 거라고 볼 수 없지만, 그래도 참고 정도는 가능한 자료니까 따라와 주세요. (다음) 조사에 따르면, 1500명 중에 60%가 종교가 없다고 응답했어요. 그리고 이 중에서 17%가 개신교라고 응답했습니다. 그리고 연령 별로 봤을 때, (다음) 20대의 78%가 종교가 없다고 응답했고 30대의 70%가 종교가 없다고 응답했습니다. 그리고 40대의 68%가 종교가 없다고 응답했어요. 우리 어린 세대들만 종교가 없고 신앙이 없고 이런 이야기를 할 것이 아니라, 20대, 30대, 40대 모두가 굉장히 심각한 상황이죠. 20대는 10명 중의 8명, 30대와 40대는 10명 중의 7명이 종교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요. 뭐 그럴 수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 설문조사 내용이에요. (다음) 귀하께서 종교를 믿거나 믿지 않으시는 것과 무관하게 현재 가장 호감이 가는 종교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비종교인 902명 중에 6%만 개신교에 호감을 표현했습니다. 그럼 나머지 94%는 개신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한다는 거예요? 좋지 않게 생각한다는 거겠죠.
자 그렇다면 비종교인들이 종교를 믿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음) 종교에 대한 불신과 실망으로, 나 자신을 믿기 때문에, 정신적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관심이 없어서. 종교를 믿지 않는다는 겁니다. 주위에 보면 이런 친구들 많을 거예요. 교회 가자고 하면 이런 이유로 교회가기 싫다고 대답하는 친구들이 있을 겁니다.
이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서요. (다음) 종교인 중에 주 1회 이상 종교 시설 방문자 비율에 대한 질문을 보면요. 개신교인. 교회 다니는 사람 중에 일주일에 한번 이상 교회 가는 사람이 전체의 57%라고 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 10명 중에 여섯 명만 일주일에 한번 이상 교회에 간다는 거에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느냐 제대로 하지 않느냐. 건강하고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 가지고 있지 않느냐의 기준은 행위로 결정되는 건 아닙니다만, 일단 기본적으로 교회에 규칙적으로 출석하지 않으면, 건강하고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방금 살펴본 설문조사 결과를 토대로, 여러분들 나이대와 밀접해 있는 20대를 기준으로 정리해보면 이렇게 볼 수 있어요. (다음) 20대의 80%가 종교가 없고, 개신교는 14%에요. 그리고 일주일에 한번 이상 교회 출석하는 비율이 57%입니다. 결국 20대 청년들 중에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전체 비율에서 7% 정도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100명 중에 일곱 명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리고 이 비율은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신앙생활하는 비율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냥 교회 나오는 사람의 비율이 대략적으로 이 정도구나. 이렇게 참고하는 자료 정도로만 확인하는 겁니다.
자 그래서 오늘 특강 주제로 표현하자면, 설문 조사에 따르면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100명 중에 일곱 명이다 이렇게 볼 수 없는 거예요. 반대로 말하자면 (다음) 20대 청년 100명중에 93명이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 10대는 어떨까요? 10대는 20대와 비슷하거나 더 심각할 겁니다. 10대 전체 또는 고등학생 전체를 대상으로 조사할 수는 없어서 정확하게 통계를 낼 순 없지만, 수치상으로 20대와 비슷하거나 더 심각할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죠. 한번 잠깐 확인해볼까요. 고은아. 작년에 고1이었지. 작년에 같은 반 학생 수가 몇 명이었어? 그중에 교회 다니는 아이가 몇 명이었는지 혹시 아니? 잘 모르겠지만 교회 다닐 것 같아 보이는 애는 있었니? 그렇구나 대답해줘서 고마워.
고은이 말에 따르면 정확하게 몇 명인지 알 수 없지만, 느낌적인 느낌으로, 교회 다니는 정서,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만의 정서. 이런 정서를 공유할만한 친구가 거의 없다는 것 정도는 확인할 수 있는 대화였어요. 자 그래서 이런 현실을 보면 (다음) 우리나라가 다종교 국가이면서 동시에 다원주의 사회를 이루고 있구나. 이런 현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의 종교가 제각각이라는 사실 자체가 문제는 아니에요. 진짜 문제는 비기독교인들이 우리가 옳다고 말하는 것을 틀렸다고 말하거나, 성경에 기록되어있는 변하지 않는 진리의 말씀을 신화 또는 소설로 받아들임으로써 진리를 거부하고 공격하는 것이 문제에요. 아까 20대 청년 중에 93퍼센트가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볼 수 있다고 했죠? 이런 수치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게 아니에요. 조금 유식한 말로 표현하자면 (다음) 2030 탈종교화에 대한 결과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종교에서 벗어난다는 얘긴데, 탈종교화가 서서히 이루어져서 이런 수치가 만들어진 것이고, 탈종교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과거에 한국교회가 폭발적인 부흥을 체험했던 1980년대에서 2천년대 초반의 시기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현실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죠.
불과 30년 전이나 40년 전에 우리 부모님 세대는 (다음) “누가 진짜 신이냐” 이런 부분에 있어서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이때는 종교가 없는 사람의 비율이 지금에 비하면 훨씬 적었어요. 물론 바르고 건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또 다른 문제이지만, 표면적으로만 놓고 보았을 때, 대부분이 종교를 가지고 있었고 대한민국 인구가 4천만명일 때 천만명 이상이 기독교인이었던 때가 있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2023년의 지금 세대는 종교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합니까? (다음) 신은 필요 없다고 반응합니다.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신의 필요성을 거부하는 현실이 된 거예요. 누가요? 열 명 중에 아홉 명이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거예요. 일주일에 딱 한번 교회 와서 성경 말씀을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나머지 6일 동안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세상적인 가치관에 타협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오스 기니스라는 저자가 저항이라는 책을 썼는데요. (다음) 이분은 오늘날의 시대를 세 가지로 표현합니다. 신앙의 변절을 요구하는 시대. 반역하는 시대. 타협의 시대. 이러한 시대에 그리스도인은 신앙적인 확고한 분별력을 가지고 저항해야 한다는 겁니다. 뭘 해야 한다구요? 저항해야 한다는 거예요. 무엇에 대해 저항해야 합니까? (다음) 상대주의에 저항해야 합니다. 상대주의란 무엇인가 하면, (다음) 절대적으로 올바른 진리란 있을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정해요? 올바른 것은 그것을 정하는 기준에 의해서 정해진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옳고 그름의 기준에 따라서 정해지는데, 이 기준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이런 사상으로 종교를 대하면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다음)
유시민 씨가 이렇게 말하죠. “너도 맞을 수 있고 나도 맞을 수 있어. 종교의 자유와 권리를 서로 100% 존중하자.” 이 말을 얼핏 보면 굉장히 그럴듯해 보여요. 굉장히 이성적인 것처럼 보이고, 인격적으로 성숙하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겉으로 표현할 때만 그런 거예요. 실제로 상대주의에는 한 가지 치명적인 모순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바로 (다음) 기독교의 상대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너희는 왜 이렇게 배타적이야? 왜 너희만 맞다고 해? 우리도 맞아. 이런 식으로 공격하죠. 그런데 과연 기독교만 배타적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모든 종교는 배타적이에요. 왜냐하면 모든 종교는 각각의 고유한 특징이 있기 때문이에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절에 가본 친구 있어요? 절에 가면 불상 앞에서 뭐해요? 절하죠. 남들 다 절할 때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처럼 옆에서 두 손 모으고 깍지 끼고 기도하면 그걸 불공드린다고 표현할까요? 그렇지 않죠. 나는 부처님께 두 손 모으고 기도하겠다고 하면 그걸 인정할까요? 그렇지 않죠. 모든 종교에는 예배 의식이라는 것이 있는데, 정해진 방식대로 따르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 종교는 없어요.
그럼 무신론은 어떨까요. 무신론도 배타적이에요. 신이 없다고 믿는 것이 무신론이잖아요. 신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은 신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공격해요. 신이 어디 있냐. 신이 없는데 왜 자꾸 신이 있다고 말하느냐. 이것 자체가 무신론의 배타성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죠.
자 그래서, 구원받는 방법은 여러 가지라고 주장하는 다원주의와 상대주의는 서로 어떤 종교를 믿든지 간에 종교의 자유와 권리를 인정하고 존중하자고 말하지만 상대주의는 기독교의 상대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21세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거예요? 저항해야 한다는 겁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래 니 말도 맞고 니 말도 맞아. 난 열려있는 사람이야. 난 깨어있는 사람이야. 이런 식의 자세를 취하는 사람은 기독교인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요. 지금 여러분들이 살아가고 있는 시대는 현대성과 다원주의, 상대주의. 이런 무지막지한 친구들이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시대에요. (다음) 이때 우리가 바르고 건강한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저항하지 않는다면, 무기력하게 쓸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어? 어 그래? 어 니 말이 맞는 것 같아. 응. 맞아. 기독교가 잘못했네. 이런 식으로 휩쓸려 갈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상대주의에 대해서 저항해야 하는데, 저항하는 기준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린지 분별하는 기준이 있어야 저항할 수 있겠죠. (다음) 그래서 우리는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겁니다.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저항하기 위해서 기독교 세계관을 갖춘다기보다,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저항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면 저항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목사님이 이야기한 내용 중에 갸우뚱하는 내용이 있다거나, 잘 와닿지 않는다거나 하는 친구들이 있다면, 기독교 세계관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친구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괜찮아요. 아직 고등학생이고 신앙생활하면서 다져가면 되는 거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부터 갖춰도 괜찮아요.
자 그래서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할텐데요. 일단 개념부터 잡고 가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세계관이란 (다음) 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 즉 세상을 보는 관점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이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는가? 어떤 방식으로 있는가에 관한 문제가 세계관의 문제입니다. 월터스는 세계관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다음) “한 사람이 사물들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신념들의 포괄적인 틀” 이렇게 세계관이란 지각의 틀이며 사물을 인지하는 방식이고,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제임스 사이어라는 학자는 세계관의 숫자가 그 시대에 사는 의식적 존재의 숫자만큼이나 많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100% 똑같지 않을 수 있으니, 숫자로 따지면 굉장히 많은 세계관이 존재할 수 있겠지만, 엄밀히 말하면, 세계관은 일정한 유형들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세계관이 몇 개냐. 이런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아요. 사실 세계관이라는 표현도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죠. 굳이 세계관이 어쩌고 저쩌고 말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냥 개인이 가지고 있는 생각? 나름의 관점? 나름의 이해를 가지고 그냥 살면 됩니다. 그게 그 사람의 세계관이 되는 거지만, 굳이 세계관이 어떻고 저떻고 말하지 않아도 생각하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거에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말을 하든 하지 않든, 사람에게는 세계관이 존재한다는 것이죠. (다음) 그래서 의식되지 않는 세계관을 일상적 세계관 또는 내재적 세계관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일까요? (다음)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그 관점에서 이 세상을 이해하는 내용. 이것이 기독교 세계관이에요. 관점과 내용. 두 가지가 들어가 있어야 기독교 세계관이에요. 어떻게 보느냐.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게 전부가 아니에요. 내용과 실천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자 그래서, 이 내용이라는 건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타이틀을 사용해야만 익힐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건전하고 바른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하고 깊이 있게 잘 배웠다면,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서 따로 공부를 하거나 배운 적이 없어도 기독교 세계관을 자기도 모르게 배운 거예요. 목사님이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서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하진 않았지만, 이따가 해당 내용을 다룰 때 아, 이거? 맞아 맞아. 알아. 그치 그치. 이런 식으로 반응한다면, 이미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감이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단어의 범위는 엄~~청 넓어요. 교육, 사회, 윤리, 정치, 문화, 직업. 등등. 이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것에 있어서 기독교 세계관이 적용되어야 하기 때문에 범위가 굉장히 넓은 개념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자 그래서,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내용은 이전에 없던 어떤 새로운 것을 말하거나 주장하는 것이 아니에요. 기독교 세계관이 갖는 의의는 (다음) 성경이 기록한 복음에 대한 사고를 폭넓게 하는 것, 이를 명확하게 표현하고 외형적으로 드러내는 것. 이것이 바로 기독교 세계관의 의의입니다. 그러니까 알면 좋고 모르면 말고. 이런 것이 아니라, 현대성과 상대주의, 다원주의 사회에서 건강하고 바른 믿음을 가지고 살려면,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저항해야 합니다. 어떻게 저항해요? 기독교 세계관으로 복음에 대한 사고를 폭넓게 하고, 이러한 내용을 삶으로 표현하고 드러내는 것. 이것이 우리의 저항 방법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저는 그냥 혼자 주일에 조용히 교회 다니고 그러면 되는 줄 알았는데, 무슨 저항까지 해야 하나요? 무슨 저항군이에요?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는데요. 사실 우리가 저항해야지. 라고 생각해서 저항하는 것은 아니에요. 예수님을 올바로 믿으면, 아주 아주 자연스럽게 기독교 세계관을 드러내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일종의 생리현상처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거예요. 누가 우리한테 숨 들이마셔. 숨 내쉬어. 이런 식으로 매번 명령해야 숨 쉬는 건 아니잖아요.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아주 자연스럽게 호흡하죠. 마치 이런 것처럼 기독교 세계관을 드러내면서 살아가는 건 그리스도인으로서 아주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에요. 하지만? 처음부터 다 그럴 순 없죠.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기독교 세계관을 드러내며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가 있는데요. (다음) 먼저 첫째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존재 뿐만 아니라 이 세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바르게 반응하는 것을 위해서 부르심 받았기 때문이에요. 신약 성경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깊이 생각하라는 겁니다. 그냥 교회 와서 예배 드리면 끝. 이게 아니라 예배드릴 때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 설교시간에 듣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우리는 믿는데, 이 말씀을 무슨 세뇌 당하듯이 그냥 기계적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니라, 과연 이 말씀이 진짜인가. 과연 이 말씀대로 내가 살아갈 수 있을까. 이 말씀대로 살아가려면 나에게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 어떤 부분을 결단하고 노력해야 할까.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고민해야 하죠. 이와 마찬가지로 “나”라는 존재와 이 세상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깊이 고민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두 번째 이유, (다음) 이 세상은 인간이 살아가고 활동해야 하는 세계이기 때문이에요. 만약 세상이 마블 영화에 나오는 무슨 멀티버스처럼, 이 세상, 저 세상. 이런 식으로 수십 개, 수백 개, 수천 개의 세상으로 나눠져있다면, 세계관은 굳이 필요 없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현실적으로 보면, 이 세상은 하나죠. 다른 세상은 없습니다. 그러니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인생이란 무엇인지 정의해야 하고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희망과 목적, 동기부여. 이런 것들을 찾아내면서 살아가야 해요.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세계관이 필요한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독교 세계관을 올바로 드러내면서 살아간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밖에 없습니다. 나 혼자만 꿀빨아야지 이런 거 아니에요. 혼자 이득 보라고 기독교 세계관 갖는 것 아닙니다.
자 그래서 목사님이 방금 설명한 두 번째 이유가 개인적인 이유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대인관계 뿐만 아니라 자연을 어떻게 대하고 생각해야 하는지. 이런 내용까지 포함하는 겁니다. 나를 제외한 다른 모든 존재에 대해서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이런 내용까지 포함하는 거예요. 따라서 기독교 세계관은 그리스도인에게 필수적인 요소일 수밖에 없는 거죠.
자, 이렇게 기독교 세계관의 의미와 기독교 세계관을 드러내면서 살아가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요. 그럼 구체적으로 기독교 세계관에 들어있는 내용이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겠죠. 기독교 세계관을 형성하는 가장 기초적이고 근원적인 내용은 바로 창조입니다. (다음)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창조는 모든 것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이런 질문들을 완벽하게 해소시킵니다. 창세기 1장 1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기독교의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너의 구원자로 믿어라. 이런 말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태초에. 시간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에, 하나님께서 하늘들과 땅들을 창조하셨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창조 질서 전체의 유일한 근원이라고 가르치는 것이죠. 따라서 그 어떤 신도 하나님의 경쟁 상대가 될 수 없고 어떤 자연의 힘도 스스로 존재할 수 없으며, 그 어떤 것도 자신의 본성이나 존재를 다른 근원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다음) 이처럼 하나님의 창조는 이 세상에 질서와 구조를 부여합니다. 이 표현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하나님의 창조는 두 가지의 특성이 있어요. 먼저 첫째는 (다음) 하나님께서 하신 창조가 과학에서 공부하는 물리적인 성격을 지닌 법칙의 근원이 된다는 거예요. 성경에 하나님께서 중력을 창조하셨다. 이런 이야기가 있나요? 지구가 알아서 돈다. 이런 말이 있나요? 없죠. 없지만 이런 과학 법칙이 마치 진리처럼 존재합니다. 중력이 없어질 수 있나요 없나요? 없죠. 누군가 중력을 약하게 만들거나 없애버릴 수 없습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에 하나님께서 지구를 만드셨다. 중력을 만드셨다. 이런 이야기가 전혀 나와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물리적 성격을 지닌 모든 법칙의 근원이 하나님의 창조에 있다고 믿는 거예요.
그리고 창조의 두 번째 특성은, (다음) 인간의 본성에 관한 법칙의 근원이 된다는 거예요. 창조의 보편적인 성격은 타락의 보편성으로 연결됩니다. 성경은 창조 이후에 인간이 타락했다고 말하는데, 이 타락의 결과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상태를 훼손시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있긴 하지만 훼손된 거예요. 온 인류의 육체와 지성에 영향을 미친 것이죠. 이것을 조금 유식한 말로 (다음) 타락의 인지적 영향이라고 표현합니다. 타락의 인지적 영향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 하면, 이 세상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는 인간의 지적인 능력을 무력화 시킵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인간 개인의 능력으로는 이 세상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는 거예요.
하지만 타락의 인지적 영향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죠. 애초에 성경이 말하는 내용, 기독교 세계관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이 주장하는 대표적인 것이 바로 진화론이에요. (다음) 창조와 완벽하게 대립할 수밖에 없는 주장이 진화론인데요. 19세기 후반에 찰스 다윈이라는 사람이 진화론을 주장했죠. 진화론이 뭐에요? (다음) 생명의 기원과 발달은 오직 자연적인 원인들에 달려있다는 거죠. 이것을 다른 말로 자연주의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요. 자연주의에 근거한 진화론이 주장하는 것은 이거에요. (다음) 아주 아주 기나긴 시간 사이에 어떤 특정한 순간에 우연히. 자연스럽게. 이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거예요. 신의 존재가 없기 때문에 비인격적인 창조라고 볼 수 있죠. 다시 말해서 (다음) 자연적인 원인이 자율적으로 작동해서 만물을 생산했다는 거예요. 그럼 신은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창조주가 할 일은 없습니다. 생명의 기원과 발달은 알아서 자연스럽게 존재하게 된 거예요.
자 그런데 자연선택이라는 것이 이 땅에 엄청나게 다양한 생물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을까요? 어디에서 그런 창조적인 능력이 발휘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이렇게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해요. 그렇죠? 그런데 사람들은 자연만이 생명의 모든 형태를 창조할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신념에 설득당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철학적인 자연주의에 설득당한 거예요. 자연이 존재하는 전부라고 믿거나, 과학이 다룰 것은 자연의 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이런 철학적인 입장을 수용하게 되면 비교적 작은 증거로도 쉽게 설득당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무슨 갈라파고스 군도에 사는 핀치새 부리가 진화했다는 둥, 초파리를 가지고 생체실험을 했는데 날개가 한쌍이 더 생겼다는 둥. 이런 예시를 들이미니까 그래. 맞지. 이게 맞지. 창조는 무슨 진화가 맞지. 이렇게 믿게 된 거예요.
하지만? 실제로 다윈의 진화설을 100% 입증할 수 있는 실제적인 증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리처드 도킨스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해요. (다음) “다윈의 이론을 지지하는 실제적인 증거가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다른 모든 경쟁 이론들보다 그것을 선호하는 것은 여전히 정당화되어야 한다.” 이게 무슨 소리에요? 증거는 없어. 하지만 다른 이론들보다는 진화가 나아. 과학적으로 입증이 불가능하지만 다른 것보단 진화가 나아. 이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왜요? 진화는 철학적 자연주의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오늘날 진화론은 공적인 교육체계 전반에 걸쳐서 의문의 여지가 없는 정설로서 교육되고 있죠. 목사님도 고등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서 진화론 배웠어요. 요즘도 진화론 배운다고 하는데, 진화론에 대해서 조금만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자, 목사님이 아까 자연주의에 대해서 설명할 때, 긴 시간과 우연과 비인격이 합쳐진 게 자연주의라고 했죠? 과거에 영국에서 이 이론을 확인하기 위해서 실제로 실험한 사례가 있습니다. 어떤 실험인가 하면, 컴퓨터를 켜놓고 한 방에 원숭이 여섯 마리를 넣어놓는 거예요. 그럼 여기서 무슨 일이 생길까요. 컴퓨터가 켜져 있으니까, 원숭이들이 뛰어놀면서 자연스럽게 키보드를 누르지 않겠어요? 그러다 보면 어떤 글자를 쓸 수 있지 않을까요? 시간제한을 두면 당연히 어렵겠지만, 시간제한을 두지 않으면 언젠가는 글자를 쓸 수 있지 않을까요? 네. 이론상으로는 충분히 가능한 얘기죠. 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나왔을까요? 글자를 썼다 손? 못 썼다 손? 네. 원숭이들이 주로 한 행동은 컴퓨터를 때리는 행동이었대요.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컴퓨터를 화장실로 착각해서 컴퓨터에 소변을 보는 원숭이들도 있었대요. 그래서 실험을 시작한지 한달이 지나도록 원숭이들은 영어로 한 단어 조차 제대로 타이핑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영어로 단어 하나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데, 시간과 우연과 비인격의 조합이 과연 생명체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겠죠.
자 그래서, 우리는 이런 내용을 정리해 보면, 어떤 결론을 도출할 수 있을까요? (다음) 우연은 복잡하고 세분화 된 정보를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우연과 시간과 비인격은 생명체를 만들어낼 수 없다고 말할 수 있겠죠. 그래서 신학자 노먼 가이슬러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어요. (다음) “만일 당신이 부엌에 들어가서 알파벳 시리얼이 식탁 위에 쏟아져 있는 것을 보았는데 당신의 이름과 주소가 쓰여 있다면, 고양이가 그 시리얼 상자를 넘어뜨렸다고 생각하겠는가?”
여러분 생각은 어때요. 한글과 숫자 장난감이 식탁에 어지럽혀 있는데, 거기에 내 이름과 주민등록번호가 조합되어 있다면, 이걸 개나 고양이가 우연히 이렇게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죠.
이건 확률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우연에 의해서 생명이 발생할 확률이 희박한 게 아니라, 원칙적으로 우연과 시간과 비인격의 조합이 복잡하디 복잡한 다양한 생명들을 창조해 낼 수 없다는 데 있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역사적인 창조란 무엇일까요. 진화가 시간, 우연 비인격의 조합이었다면 성경이 말하는 창조란 (다음) 시간과 의도와 인격의 조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간은 태초라고 볼 수 있고, 의도는 하나님의 작정하심이라고 볼 수 있고, 인격은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볼 수 있겠죠.
자 이렇게, 진화냐 창조냐. 이 문제에 대해서 진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다양한 증거들을 제시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증거가 조작되었거나 거짓이라는 사실들이 밝혀지고 있고, 어떤 동물이 다른 동물로 진화하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개가 하이애나보다 치악력이 더 강해지도록 진화된다거나, 말이 치타처럼 빨라진다거나, 아니면 사과가 수박이나 호박만큼 커진다거나 하는 종의 진화는 불가능한 것으로 밝혀져 있습니다. 물론 실험은 굉장히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어요. 하지만 진화 실험에 있어서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음) 종이 가지고 있는 한계에 가까워질수록 그 유기체는 점점 더 약해지고 질병에 걸리거나 죽기 쉽다는 거예요.
성공 사례라고 해봐야 자연적인 진화를 관찰했다기보다, 고정된 한계 안에서 이루어진 변화에 국한된 것에 불과합니다. 만약 진화가 사실이라면, 진화가 진리라면 생명체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에 관한 의문점이 해결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의문점은 아무도 설명하지 못하죠.
그리고 다윈도 (다음) 자신의 이론에 가장 큰 타격을 주는 증거가 화석 기록의 불연속성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생명체가 자연적으로 진화한다고 주장했지만, 진화하는 중간상태의 화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입증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언젠가는 발견하지 못한 화석들을 찾아내지 않을까. 이런 희망을 품었다고 합니다.
자 그래서, 창조냐 진화냐의 싸움은 종교와 과학의 대립이 아닙니다. 창조와 진화의 대립은 (다음) 하나님께서 행하신 창조의 목적을 믿는 신자와 우연을 믿는 신자와의 싸움이라고 결론 지을 수 있겠습니다. 결국 믿음의 문제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 이제 다시 기독교 세계관으로 돌아와서요. 창조냐 진화냐의 문제에서 진화를 완벽하게 떨쳐내 버리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창조라는 교리에서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창조의 기독교 세계관적 함의라고 표현할 수 있어요. 기독교 세계관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에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 있느냐. 세 가지 의미가 담겨 있는데요.
먼저 첫 번째, (다음) 피조계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의존을 분명히 한다는 겁니다. 피조계는 온 세상을 통칭한 거예요. 자연부터 시작해서 모든 생명체가 하나님을 의존하고 있다는 거죠.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이 시작되었다면, 세상은 언제나 항상 하나님께 의존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 의존적이에요. (다음) 욥기 12장 1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 모든 생물의 생명과 사람의 목숨이 어디에 있다고요? 그의 손.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거예요. 이어서 시편 104편 2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다음)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아멘. 빨간 글씨만 다시 읽어볼까요? 시작.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이 말씀에 따르면, 사람의 목숨이라는 것, 사람의 생명이라는 것이 하나님께 의존적이냐 의존적이지 않느냐에 따라서 오래 살거나 금방 죽거나. 이런 것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목적이 있어서 의존적인 것이 아니라, 그냥 존재 자체가 창조된 것이기 때문에, 창조주에게 의존적인 성향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기독교 세계관에서의 창조의 두 번째 의미는, (다음)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지금도 다스리고 계신다는 사실이에요.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것은 사실인데, (다음) 그 이후에는 진화적인 방식으로 창조를 하셨어. 이런 주장을 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성경이 말하는 창조와는 또 다른 창조의 개념이에요. 성경이 말하는 역사적인 창조는 어떤 창조에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하신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기 때문에, 더 진화될 것도 없고, 부족하게 창조된 것도 없는 창조였습니다.
(다음) 그런데 유신론적 진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피조 세계에 진화의 자연법칙을 부여하셨다고 믿습니다. 사실 학문적으로 접근하다보면, 유신론적 진화론은 굉장히 이성적이고 과학적이면서 설득력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그리고 유신론적 진화론의 스펙트럼도 굉장히 넓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창조로부터 시작되는 기독교 세계관을 다루는 시간이기 때문에, 유신론적 진화론의 부정적인 측면들을 맛만 보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유신론적 진화론의 (다음) 첫 번째 단점은, 하나님의 섭리적인 개입을 차단한다는 거예요. 유신론적 진화론이 인식하는 하나님은 비성경적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이 마치 태엽을 감은 시계처럼 독자적으로 작동하는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입장을 취하기 때문이에요. 이렇게 우주를 창조하셨으면 초자연적인 개입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죠. 태엽을 감았으면 태엽이 풀리겠죠. 풀리는대로 흘러가도록 내버려둬야겠죠? 그렇게 만들었으니까요.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우주 바깥으로 쫓겨나듯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신처럼 인식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틀렸다는 거에요.
그리고 두 번째 단점, (다음) 지금 이 내용은 유신론적 진화론의 주장이에요. 우리의 주장이 아닙니다. 이 주장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가져온거에요. 내용을 보시면, “창조 이후에 하나님께서 자연에 개입하시는 것은 하나님 스스로 자신의 창조가 완전하지 못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개입해선 안 된다는 얘기에요. 그냥 개입하지 말고 예수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가만히 계시면 세상은 알아서 돌아간다는 거예요.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로봇이 아닌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창조하셨는데,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에 개입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알 수 있을까요? 자연경관만 보고 하나님의 창조를 찬양하면서 살아라 이 소리와 똑같은 건데, 그럴거면 기도할 필요도 없죠. 그래서 이 부분이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정반대되는 주장이기 때문에 유신론적 진화론을 소개한 겁니다.
그리고 유신론적 진화론의 세 번째 단점은 진화론을 과학적 사실로서 어느 정도 인정한다는 거예요. 유신론적 진화론을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진화론을 인정하는 건 아니지만, 진화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같은 진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자 이렇게 유신론적 진화론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았는데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과 연결됩니다.
자 그래서, 기독교 세계관에서의 창조의 의미. 세 번째, (다음) 피조계는 창조주의 뜻을 구현해야만 하는 의무가 있다는 겁니다. 이 내용을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적용시켜 보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실천하면서 살아가야만 하는 의무가 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죠.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며 살아야 한다는 거예요.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에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지체를 대할 수 이어야 하고, 자연 환경을 대할 때에도 하나님의 신성이 나타나 있는 자연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목사님이 설명한 내용, 이 내용이 기독교 세계관을 구체적으로 우리 삶에 적용하는 내용인데, 사실 너무 범위가 넓은 이야기여서 여러분들에게 적용하기 쉬운 내용을 좀 더 살펴보고 강의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창조에 관련된 기독교 세계관의 적용점이에요.
(다음) 이 적용점을 확인하려면 먼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문화 명령을 이해해야 하는데요. 창세기 1장 27절과 28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나님의 문화 명령이 뭐라구요? (다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문화 명령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은 좋든 싫든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복을 주시면서 명령하신 이 말씀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거예요. 어떻게 살아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는 방식, 땅을 가득 채우는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자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신 이후에,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합니다. 창세기 3장 1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다음) 시작.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빨간 글씨만 다시 읽어볼게요. 시작.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다음) 죄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평생의 수고와 땅의 저주에요. 여기서부터 인간의 노동 개념이 발생한 겁니다. 이게 기독교 세계관이랑 무슨 소용이냐. 하나님의 역사적인 창조, 선하신 창조와 전적 타락의 내용을 진리로 믿는 사람은, 누구나 평생의 수고를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어요. 일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요? 지금 어떤 신분이에요? 학생이에요. 학생이면 공부해야죠? 대한민국에서 태어났으면, 공부 말고는 딱히 할 거 없으니까 공부해야죠? 이런 게 아니라, 평생의 수고를 감당하려면, 뭐라도 해야 하는데, 지금 우리의 위치가 어떤 위치에요? 공부를 하거나, 밖에 나가서 일을 하거나, 아니면 귀농해서 농사를 짓거나. 셋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셋 중의 하나를 선택해서, 평생의 수고를 감당하고자 하는 기독교 세계관이 주는 기본적인 마음가짐을 가질 수밖에 없어요.
그럼 그냥 어쩔 수 없이 공부하기만 하면 되는 건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것도 100% 정답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기독교 세계관을 우리의 삶에서 드러내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했죠.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해요. 나는 왜 이 모양일까. 나는 왜 암기력이 부족할까. 해결되지도 않을 문제를 걱정할 시간에 공부하는 거예요. 어? 그럼 목사님. 고3 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대학을 잘가야 하니까 교회 1년 정도는 쉬어도 되죠?
네. 이런 질문 충분히 할 수 있죠. 질문 안하고 안 나오는 것보다 낫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고3 돼서 교회 안나와도 되죠?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객관적으로 볼 때 기독교 세계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어요. 지금까지 교회를 잘 나왔다고 하더라도 아무 소용 없어요. 그건 그 학생의 믿음이 좋아서 교회 출석했다기 보다, 정확하게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믿음과는 상관없이 몸만 교회에 나온 것과 다를 바가 없어요. 왜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그리고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 올려 드리는 것. 이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고3 되면 학원 시간 때문에, 아니면 스스로 공부하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1년 동안 교회 안나오네 마네.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겁니다.
자 그래서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여러분들의 삶에 적용해 보면, 학업과 신앙생활을 성실하게 병행하면서, 지혜롭고 철저하게 시간 관리하고, 주어진 시간에 집중해서 효율적으로 공부하고.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원하는 성적을 거두고, 기쁨을 누리는 것. 이것이 바로 여러분들의 삶이에요. 전도서 3장 1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다음) 시작.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이라고요? (다음)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 여러분들이 대답해 보세요. 하나님의 선물이 뭐라구요?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 수고함으로 기뻐하는 것. 수고함을 통해서, 고생함으로써 기쁨을 누리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래요. 여러분들 평소에 수고해요 안해요. 공부하느라 수고하죠. 그런데 기뻐요 안 기뻐요. 전도서 말씀 읽기 전에 이런 질문 했으면 목사님이 무슨 미친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겠죠. 만점이 나오지 않는 이상 만족하기 쉽지 않은데, 어떤 성적을 거두든 나보다 더 높은 위치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떻게 아무런 걱정 없이 기뻐하기만 할 수 있겠어요. 그렇죠? 하지만 방금 전도서 말씀을 읽으면 이런 말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전도서 말씀을 보면서 다시 대답해 보세요. 여러분들 공부하느라 수고해요? 안 해요? 수고하죠. 그럼 기뻐요 안 기뻐요. 네. 말씀에 따르면, 기뻐해야 정상이라는 거예요.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하루. 나에게 주신 육체적인 건강. 그리고 공부할 수 있도록 환경을 허락해주신 것. 그래서 이 모든 상황과 환경과 형편을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면서, 어렵고 힘들지만, 최선을 다해서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 그리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손길과 역사하심을 체험하면서 인생의 보람을 느끼고 기쁨을 누리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겁니다.
자 그래서, 공부에 대한 잔소리 하나만 더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자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인격적으로 영접하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한다면, 여러분의 삶은 어떤 삶이 되어야 할까요? 치열한 삶이 되어야 해요. 세상 사람들, 하나님을 믿지 않는 학생들과는 다른 마인드로 치열하게 사는 거예요. 겉으로 볼 때에는 비슷하겠죠. 죽어라 공부하니까요. 하지만 내면은 달라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학생들은 벼랑 끝에 있어요. 믿을 사람은 자기 자신밖에 없습니다. 시험 못 보면 끝이에요. 좋은 대학교 못가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는 어때요? 목사님이 아까 설명한 그 과정 있잖아요? 그 과정에 따라 치열하게 인생을 살아냈으면, 어떤 결과를 맞이하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릴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이 과정 사이에 헛짓거리라는 요소가 들어가면, 신앙이고 자시고 말할 자격이 없어져요. 하나님 뭐하세요? 하나님 저한테 왜이러세요? 이런 탄원 기도조차 할 자격이 없어지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목사님이 표현한 이 헛짓거리의 종류에는 어떤 게 있을까요? 대표적인 것이 바로 (다음) 연애에요. 왜 여러분 나이대에 연애가 부질없느냐. 그 이유는 여러분은 아직 사랑이 뭔지 모르기 때문이에요. 웃어? 네. 여러분은 사랑할 줄 몰라요. 사랑이 뭔지 몰라요. 그냥 설레는 거? 껍데기가 마음에 드는 거? 사랑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드는 거? 친구가 썸타니까 나도 썸타고 싶은거? 아니면 육체적인 욕구 때문에? 등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여러분들의 나이대에 뭐해야 된다고 했어요? 땀 흘려 수고해야 하는데, 어떤 방식으로 수고해야 돼요? 공부할 사람은 공부로. 나가서 일할 사람은 일하는 방식으로. 농사짓고 가축 키울 사람은 농업이나 축산업 방식으로. 수고해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애질 따위 할 시간이 없는 거예요.
그리고 만에 하나, 정말 정말 희박한 확률로 운명의 그녀 또는 운명의 그를 만났다고 가정해 봅시다. 네. 물론 99.999%의 확률로 아닐 거예요. 그러니까 상상만 하세요. 운명의 상대를 애써 찾아다니거나, 착각하지 말고, 상상만 하세요. 자 그런데 그녀 또는 그 남자의 종교가 무교야. 이러면 운명의 상대라고 믿어도 될까요? 이런 경우에, 기독교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은 깊이. 아주 아주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다음) 2005년도에 개봉한 연애의 목적이라는 영화 포스터인데요. 고등학교 영어 교사 박해일과 한 살 연상의 미술 교생 강혜정이 연애하는 내용이에요. 목사님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두 배우의 작품이어서 보긴 봤는데, 내용은 정말 비기독교적이에요. 영화를 보라고 추천하는 거 아니에요. 굳이 볼 필요도 없습니다. 일단 이 영화의 포스터에는 이런 정말 그지 같은 문구가 쓰여있어요. 먹히지 말고 먹어버리자. 밥먹자는 얘기죠? 네. 아닙니다. 성적인 표현이에요. 성적인 행위를 주도적으로 하겠다는 얘기죠. 그런데 이 영화가 결국 하고싶은 말이 뭐에요? 성적인 관계를 맺는 게 연애의 목적이라는 거에요.
그리고 오른쪽 포스터를 보면, 하기 싫은거야? 내가 싫은거야? 이런 문구가 있는데. 이것 역시 굉장히 그지 같은 얘기에요. 뭘 하기 싫냐고 물어보는 거에요? 근데 그거랑 너가 싫은 거랑 무슨 상관이에요? 만약에 누군가 이런 대화를 여러분들에게 시도한다면, 그냥 그 사람과는 상종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에요. 왜요? 연애에 대한 기본적인 출발점 자체가 잘못됐기 때문이에요.
자, 다시 운명의 상대 이야기로 돌아가서요. 만약 상대방이 운명의 상대라면 무엇을 확인해야 하느냐. 연애의 전제 조건을 확인해야 하는데요. (다음) 첫째, 나랑 연애하고 싶다면, 연애의 목적이 무엇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기독교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있어서 연애의 목적은 뭐에요? 결혼이에요.
결혼하기 위해서 연애하는 거예요. 남들 다 하니까. 쓸쓸하고 외로우니까 연애하는 거 아닙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들 나이대에 연애는 필요해요 필요하지 않아요? 필요하지 않아요. 지금 당장 여러분들이 연애해서 결혼할 수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연애의 목적이 결혼이라는 사실을 인지한다면, 여러분들 안에 내재되어있는 요즘말로, 연애세포를 흔들어 깨울 필요가 없다는 사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연애의 전제 조건 두 번째는 (다음) 혼전 순결이에요. 일단 현실을 보여드리자면, 적지 않게 충격적인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음) 통계청에서 공개한 자료인데요. 여러분들은 고등학생이니까, 고등학생 내용만 보면, (다음) 남학생 12,000명 중에 10%, 여학생 12,000명 중에 6.2%. 고등학생 전체 평균 8.5% 정도가 고등학생 때 성관계를 경험한다는 거예요. 반올림하면 열 명 중에 한 명은 성인이 되기 전에 경험한다는 얘기죠.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점점 더 가속화되고 있다고 합니다. 요즘은 심지어 무슨 초등학생도 동영상을 보고 따라한다고 하니, 성적으로 얼마나 문란해진 사회인지 모릅니다. 이뿐만 아니라 유튜브에 보면 외설스러운 농담들이 섞인 꽁트들, 이런 영상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성적인 개방성이 당연한 것처럼, 열려있는 사람인 것처럼 포장되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깨어있어야 하는 겁니다. 기독교 세계관이 뭐에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것을 기초로 삼는 세계관이에요.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욕구대로, 하고 싶은대로 살게 만드시려고 창조하신 게 아니에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이 명령을 실현시키게 하시기 위해서 창조하신 거예요.
이러한 측면에서 성적인 관계는 무엇을 위한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부부로 인정받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진심으로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과정 가운데, 아이를 낳기 위해서 육체적인 관계를 맺는 거예요.
정리하자면, 연애와 혼전순결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로 연결됩니다. 연애의 목적이 뭐라고 했어요? 결혼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성적으로 순결함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뭐라고 했어요? 문화 명령을 위해서,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고. 이런 기본적인 원칙이 전제되어있기 때문에, 결혼하기 전에, 육체적인 욕구를 따라 마음에 드는 사람과 성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거예요.
그냥 무슨 아무 이유 없이 고리타분하고 꽉막힌 사람처럼, 야. 그럼 되겠냐. 윽박지르고, 세뇌 시켜서 금욕주의적으로 살게하고. 이런 이유에서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우리를 강제로 움직이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꼭 기억해야 해요. 요즘 시대는 더 악해졌어요. 앞서 소개한 연애의 목적이라는 영화는 그래도 연애하는 이야기를 담긴 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어때요? (다음) 연애빠진 로맨스. 이런 영화가 나와요. 제목 그대로 연애를 하지 않는 상태에서, 육체적인 관계를 맺는 이야기가 나오는 영화에요. 이런 영화가 왜 나올까요? 공감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낸 걸까요? 물론 현실을 기반으로 하는 영화는 아닙니다만, 상업적인 영화이기 때문에 아무런 근거 없이 이런 스토리를 만들어내진 않아요. 다시 말해서 요즘 20대 30대 청년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거나, 이런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기 때문에, 연애 빠진 로맨스 같은 소리를 한다는 거예요. 하지만 우리는 이런 악한 생각들에 대해서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분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고등부 친구들 이제 강의 내용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기독교 세계관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기독교 세계관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그 관점으로 이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기독교 세계관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세계관의 기초는 창조 신앙에서 비롯된다고 했습니다. 창조 신앙은 이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관한 의미를 부여한다고 했어요.
이러한 점에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굳게 믿는다면, 시간과 우연과 비인격의 조합인 진화를 반대하고,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시간에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변함없이 신뢰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지금 이 순간에도 피조물들을 창조하시며, 다스리고 계신다고 했어요. 여기에서 우리는 유신론적 진화론을 배격해야 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세계관을 우리 삶에 적용하는 방법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명령하신 내용,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을 통해 우리가 평생의 수고를 감당해야 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기쁨이라는 선물을 주신다고 했어요. 그래서 이 기쁨을 누리려면 성실하고 치열하게 본업에 충실해야 하며, 이 과정 가운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죄의식 없이, 아무런 지각 없이, 끊임없이 행하고 있는 연애는 여러분의 시기에는 부적절한 것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만약 운명의 상대를 만났다면, 연애의 전제 조건을 확인해야 한다고 했어요. 연애의 목적은 결혼이며, 결혼 전에는 무조건 순결함을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이렇게 짧지 않은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는데요. 서두에 설명한 것처럼 사실 기독교 세계관의 범위는 굉장히 넓어요. 교육, 사회, 정치, 문화, 직업 등 굉장히 넓은 범위에서 말씀을 적용하면서 기독교 세계관을 확립해 나아가야 하는데, 오늘은 아주 아주 기본적인 내용, 개론적인 내용과 창조 신앙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프란시스 쉐퍼 목사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우리의 인식의 영토에 말뚝을 박고 세상적인 가치관을 방어할 준비할 갖춰야 한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 고등부 친구들. 쉐퍼 목사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기독교 세계관에 근거한 인식의 영역을 보존하고 지켜야만 합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끊임없이 여러분을 유혹할 거예요. 하지만 그럴 때마다 오늘 나눈 내용을 기억하시면서, 그리고 우리 한강도사님이 설교 시간에 전해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세상적인 가치관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시기 바랍니다. 또한 지켜내는 것을 넘어서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며 복된 인생을 살아내시는 모든 우리 고등부 친구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열명 중에 아홉명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고, 기독교 신앙을 배척하며 기독교 세계관을 무차별적으로 비방하는 이 악한 시대에, 주님의 자녀들을 수련회 자리로 인도하여 주시고, 함께 기독교 세계관을 공부하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 이 어둡고 타락한 세대 가운데,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지혜롭게 분별하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아무런 목적 없이, 세상의 가치관에 휩쓸리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올려드리기를 원하며, 매일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우리 아이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려운 현실 가운데 낙심하거나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성령 하나님 우리 아이들의 마음을 붙잡아 주시며, 지혜 더하여 주셔서 맡은 학업 넉넉하게 감당할 수 있도록 동행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프란시스 쉐퍼>
기독교를 우리의 개인적 가치관이 아니라 객관적 지식으로 이야기하는 법을 발견해야 한다. 우리의 인식의 영토에 말뚝을 박고 그것을 방어할 준비할 갖추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의미
1) 다른 동물들로부터 진화되었다는 모든 관념을 거부함.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이므로 그 이하의 수준에서 생각할 수 없음.
2) 하나님을 잘 반영하는 형상의 역할을 감당해야 함.
자신의 몸을 사용함에 있어서도 그렇고 다른 사람과의 교제 관계에 있어서도 그렇고 피조계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잘 다스리는 데에서도 그런 역할을 해야 함.
3) 인간이 최고의 존재인 것처럼 생각하는 인간 중심주의, 인본주의에 빠져선 안 됨.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중심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해야 함.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억해야 함. 이를 저 버리는 것은 결국 자신의 근본을 버리는 것이며 비인간화되는 것임.
1강 창조신앙
1) 기독교 세계관의 근간을 이루는 창조신앙
2) 창조 vs 진화 + 유신진화론
3) 섭리 – 협력, 보존, 통치
2강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 - 연애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 = 하나님의 역사하심(일하심)과 인간의 책임
1) 성실함
2) 연애 –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기독교 세계관이란?
기독교 세계관의 필요성?
우리나라는 다종교 국가, 다원주의사회.
5천만명. 기독교 천만명.
우리가 옳다고 하는 것을 틀렸다고 말하거나, 성경의 진리를 신화 또는 소설처럼 받아들임.
친구들 중에
20대 10명 중 2명 종교인(기독교, 불교, 천주교)
2030 탈종교화 진행 중.
2021년 출산율 전체 0.8명, 서울만 0.6명 정도.
2022년 데드크로스.
부모님 세대 – 이 신이 진짜냐 저 신이 진짜냐 패러다임.
지금 세대 – 신은 필요 없다.
2016 오스 기니스 – 저항
현대성.
교회 안에서 선별작업을 볼 것이다.
문화 정치 생활 관념
저항하지 않으면 현대성의 쓰나미에 쓸려갈 것.
클라우스 슈밥 – 위대한 리셋
반지성적인 취급. 넌 아직도 그런걸 믿니?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1) 유신론자 // 무신론자
피조세계와 피조물을 창조주가 만들었다고 믿는 것. - 창조신앙
2) 유일신론자 – 삼위일체
신본주의. 인본주의x.
3) 종말론자
- 재림, 심판
4) 절대주의자 – 타협불가.
손해.
넌크리스천 세계관
- 무신론자 : 시간x우연x비인격.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없음. 인간은 단백질 덩어리. 신경호르몬의 반응. 사랑은 전기 신호에 반응하는 것. 절대기준, 절대가치 같은 것은 없음.
- 유물론자
- 진화론자
-> 상대주의자
너도 맞을 수 있고 나도 맞을 수 있어. - 종교의 자유와 권리를 100% 존중하자! (유시민)
신우회 예배 강요 금지. 종교 편향. 아동 학대.
상대주의 절대화. 믿음에 대한 증오
상대주의 특징 -> 기독교의 상대성을 인정하지 않음.
교회에 대한 호감 4%
기독교 혐오 사회. “너희는 왜이렇게 배타적이야?”
모든 종교는 배타적임. 종교마다 고유한 특징이 있음. 배타성이 있음.
무신론도 배타적임.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배타성만 공격함.
옳고 그름의 기준은 인간임.
현대성의 쓰나미. 저항하지 않으면 쓸려감.
* 사랑
- 성관계로 귀결됨.
성경을 옳다고 믿는 사람들. 거룩과 음란의 개념이 생김.
세상의 사랑은 음란으로 귀결됨.
성관계는 결혼 후 배우자와만 하는 것.
선과 악의 싸움. 전신갑주.
죄와 은혜의 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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