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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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기적으로 채우라
삶을 기적으로 채우라
요즘 스마트폰의 사진을 좀 찍을 줄 안다 싶으면 인기가 많고 예쁜 사진을 보면 아주 마음에 들어하죠. 하지만 똥손이라 불리는 사람은 머리가 크게 나오거나 다리가 짧게 나오는 등 결과물이 좋지 않죠. 스마트폰의 카메라의 특성을 잘 알고 그에 맞춰 찍는다면 좋은 결과를 얻지만 그렇지 않다면 왜곡이 일어난 결과물에 놀라게 됩니다.
오늘 본문이 그 유명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기적 사건입니다. 기적을 믿느냐 안 믿느냐는 주제로 본문의 구도를 본다면 왜곡된 결과물을 얻게 됩니다. 요한복음에는 앞으로도 6개의 기적이 더 나오고 총 7개의 기적이 나오는데 이것을 ‘표적'이라고 부릅니다. 표적은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것을 의미하는데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인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는 의도인 것이죠.
본문 11절에 “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이 표적을 보고 ‘믿게' 되는 결과를 얻어야 하는 것이죠.
본문의 구조를 살펴보면 / 계속해서 사흘째 되는 날(첫째 1:19-28/ 둘째 1:29-34/셋째 1:35-42/넷째 1:43-51/여섯째 2:1-11), 갈릴리 지역의 가나에서 혼인잔치가 있었다는 배경을 가집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을 시작하고 시간은 하루, 이틀, 사흘 이렇게 흐르고 있고 (의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는 차에 ‘혼인 잔치’가 있었던 상황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졌고 그 사실을 어머니가 어떤 이유로든 알게 되어 예수님께 말했고 예수님은 의외의 답을 하십니다라고 하니 어머니도 뜻밖에 하인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어머니와 예수의 대화 그리고 이어서 정결 예식에 쓰인다는 설명과 함께 두 세 동이들이 돌항아리 여섯 개가 놓여 있었고 예수님은 그곳에 물을 모두 가득히 부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물을 퍼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니 반응이 나옵니다. ‘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했다고 해설자가 말하는 장면과/ 누구든지 좋은 포도주를 먼저 내놓고 손님들이 취한 다음에 덜 좋은 것을 내놓는 법’이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좋은 포도주가 아직까지 있느냐’하고 감탄을 합니다. 그리고 // 이렇게 행한 것이 ‘예수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고 그래서 ‘제자들이 믿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혼인잔치가 무엇일까요?
나라, 지역 그리고 시대를 막론하고 혼인은 개인에게도 가족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특히 성경은 이를 더 의미있게 다룹니다. 왜냐하면 창조의 질서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데 창2:24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신약시대에도 마태, 마가, 그리고 바울도 그대로 이어 받고 있습니다. 혼인은 가족 뿐만 아니라 친척들에게 지지를 받는 말그대로 잔치라고 말이 제일 어울립니다. 우리나라에도 ‘돌 잔치’, ‘회갑’ 등 몇몇 중요한 의미에서 잔치를 표현합니다. 잔치가 열렸다. 누구네 집에서 잔치가 열린다고 하면 마을 전체가 들썩들썩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아파트와 각자의 생활로 살아가기 때문에 자녀 세대들은 잔치를 경험한 적이 거의 없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 예수와 어머니 형제들이 초대받은 것을 보면 친척처럼 매우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포도주가 떨어진 사정을 예수님의 어머니가 아는 상황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모인 정황은 정결예식에 사용하기 위한 돌 항아리 여섯개로 유추할 수 있는데 대략 한 항아리에 두세 통 들어간다고 했는데 한 통이 30-40리터 양인데 돌 항아리 하나에 적게는 100리터 많게는 130리터가 들어가고 다시 6개의 돌 항아리면 700-900 리터의 물이 담깁니다.
정결 예식이란 막7:3-4 “3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4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여기에서 유대인의 전통은 기본적으로 종교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의식이죠. 의식은 의도를 담아 두는 행위인데 이것을 ‘정결 예식'이라고 함으로 읽었던 마가복음 처럼 바리새인과 모든 유대인들이 지키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죠. 아무튼 한 사람이 생수병 같은 2리터를 사용한다고 해도 4-500백명 분의 물을 담아 둘 수 있습니다. 또한 10절에 ‘연회장’ 즉 행사를 주관하는 담당자도 있다는 것도 잔치의 규모를 추측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1주일 동안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바닥난 상태는 것은 많은 인원의 참석으로 인해 부족해진 상태, 즉 이를 준비한 가족이 이를 염두해 두지 못한 것이죠. 잔치에 빠질 수 없는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행사 자체를 진행할 수 없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이런 사실을 알고 예수님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잔치처럼 즐기며 살기를 원합니다. 한 번 사는 인생을 멋지게 신명나게 즐기면서 아니면 행복을 찾기를 바라고 살지만 사실은 잔치라기 보다는 결국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대표적으로 ‘돈이 없다’ 돈으로 출발한 부족함은 결코 채워질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산으로 들로, 캠핑을 떠나고 여행을 떠나고 혼자만의 시간을 아니면 집 안에 틀어 밖혀 손바닥 스마트 폰 속에서 더 깊은 세상으로 들어가면서 자기 만족을 채우려 합니다.
예수님은 ‘어머니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그렇게 살아가는 세상은 예수님께서 상관없다고 하십니다.
이미 1장에서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고 10절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한다고 했던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살다보면 그저 돈이 문제가 아니라 그보다 더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잔치에 필요한 것은 ‘정결 의식’에 사로잡혀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외적인 표직인 돌 항아리가 아니라 잔치를 잔치 답게 하는 ‘포도주’가 준비되지 못함으로 벌어지는 것이죠. 여러분은 오은영 박사가 나오는 프로그램에서 ‘아이들의 문제’, ‘부부의 문제’ 등 한 가족에게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는 상황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어머니는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하인들에게 요구합니다. 그리고 의식을 위해 자리 잡고 있던 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명령합니다. 이미 정결 의식을 위해 쓰일 수밖에 없는 물, 이미 쓰여 쓸모 없는 돌 항아리에 다시 물을 채우라고 하십니다. 기적의 결과를 알고 있는 우리는 왜 물을 채우는지 알지만 그들은 포도주로 변하기 전까지 알 수 없었습니다.
서장훈과 이수근이 진행하는 상담 형식의 예능 프로그램에 대화도 없이 사랑이 식은 젊은 부부가 나왔는데 서장훈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부터 밥먹을 때 먼저 먹었다고 일어나지 말라. OTT 서비스에 가입해서 같이 영화를 보라. 그게 뭐 별거라고 하겠지만 그것부터 하라는 거죠. 안타깝지만 우리도 그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혼자 밥먹는 것, 밥 먹으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유튜브를 보는 것 아마도 우리 생각에 그게 뭐가 그리 큰 문제인데라고 생각하겠지만 어떤 부부에게는 그런 사소한 것이 이혼하고 싶은 상황까지 치닫는 것을 막는 길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예능 프로그램에서 조차 ‘이렇게 하라’는 말을 듣고 싶어 찾아간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어떠해야 할까요?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들어 있는 표현이 있는데 9절에 ‘알지 못했다’와 ‘알더라’ 입니다.
하인들은 그 말대로 행함으로 인해 ‘알게’되었습니다. 반면 ‘맞을 보았던’ 그들은 좋은 포도주라는 사실은 맛보고 알았더라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못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중요한 장치 중 하나가 ‘아는 것’,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보의 홍수에 살고 있고 유튜브 등 시시각각 업데이트 되는 정보를 손바닥 안에서 보고 알게 됩니다. 아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그냥 아는 것과 경험을 통해 아는 것인데 이 둘은 엄연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개념으로 이해합니다. 최근에 자주 일어나는 사건중에 운전면허가 없는 청소년들이 부모님의 차를 몰고 나가서 결국은 사망에 이르는 참혹한 결과가 대표적이죠. 여기에서 경험이란 ‘때’에 맞춰 의도적으로 배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앞서 1장에서 첫날, 둘째날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를 만났고 그들이 알고 있는 대로 예수님을 고백했습니다. 당신은 메시야 이십니다. 구약에 약속한 메시야가 맞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예수를 온전히 아는 것이 필요했는데 이것을 ‘인격적인 앎’이라고 합니다. 우리도 흔히 어떤 사람에 대해서 알려고 할 때 타인에게 ‘저 사람 어때’라고 해서 알고나며 만나서 이야기하고 자신이 겪어 볼 때 제대로 알게되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다는 것은 성경에 기록한 것을 믿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처럼 설교를 듣고 소개를 받았다면 예수님을 만나서 인격적인 관계를 가질 때 진정한 앎이 형성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앎 곧 인격적인 앎을 막는 것은 무엇입니까?
본문에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질 나쁜 것을 내는 것이 당연한 세상의 방식입니다. 지난 주 나다나엘에게 이런 마음 곧 간사한 마음이 없다고 했죠. 세상은 간사한 마음을 갖고 살아야 눈 감으면 코를 베이지 않는 세상이죠. 하지만 예수께서 보여주시는 진정한 세상을 ‘하나님 나라’라고 표현하는데 주기도문에서 ‘나라가 임하시옵고’ 할때 그 나라를 경험하는 것이죠. 세상의 나라의 방식과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 이렇게 다릅니다.
살아가다 보면 저 사람 참 진국이야 하는 말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데 이렇게 우리의 삶이 시간이 지날수록 진한 맛이 느껴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주어진 삶에서 맛볼 수 있어야 합니다. 손바닥 안에 작은 스마트폰으로 보여지는 정보와 때론 감동의 소식에 눈물도 흘릴 수 있지만 그것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정결 의식이라는 미명 아래 덩그러니 놓여있는 돌 항아리처럼 내 자신을 포장해도 소용없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릅니다’ 그러나 물을 채우고 연회장에 변한 포도주를 떠다 준 사람들은 맛을 보고도 모른 사람들과 달리 알게 되고 이러한 표적을 통해 제자들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