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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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4:13-35
지난 7월 말에 제 페이스북에 ‘과거의 오늘’이라는 제목으로 12년 전 제가 썼던 글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내용이 이렇습니다. 당시에 부목사로 섬기던 교회의 담임목사님이 2주간 해외 출타 중이실 때 일이었는데요.
그 기간에 장례가 무려 네 번(놀라지도 않으시네요). 어린이부 여름성경학교에 청년부 여름수련회를 진행하고 노회부흥집회 찬양단 연습에 틈틈이 청년들 심방을 진행하고 주일대예배 설교와 수요, 새벽, 금요기도회 집회 인도를 했다. 이제 청년부 유치부 여름성경학교와 부모신앙교육을 진행한다. 월요일부터는 여전히 청년들 심방과 부흥 집회가 있고, 목사님이 귀국하신 이후에는 교구 대심방이 기다리고 있다. 정말 나에게는 이 모든 일을 감당할만한 은혜가 필요하다. (이때 제가 생생하게 기억하는데요. 정말 하늘나라 가는 줄 알았습니다.)
당시 제가 이 글을 쓴 이유는, 목회가 힘들다거나 피곤함보다는 제가 감당해야 할 사역의 양보다 분주함과 메마른 영성으로 교우들을 대하고 설교 강단을 지켜야 하는 일 즉, 사역의 무게가 버거웠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목회자가 먼저 은혜를 경험해야 그 수준만큼 교우들에게 은혜를 흘려보낼 수 있는데, 당시에 제가 그러질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런 부담이 비단 저 같은 목사들에게만 있는 것일까요? 여기 계신 우리 성도님들도 모든 일에 은혜가 아니면 안 된다는 절박함이 있지 않으십니까?
오늘 말씀 13절을 보시면 “그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말씀 속에서 “그날에”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당일을 말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그날은 부활절 오후이며 점점 어두워질 때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쯤 되는 곳에 엠마오라는 동네가 있는데, 그 길을 두 사람이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는 것이죠.
18절의 말씀을 보니 그중에 한 사람의 이름이 ‘글로바’라고 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은 나오질 않죠. 이에 대해 요한복음 19장 25절을 보면 십자가 밑에 있었던 몇 명의 여인 중에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라는 여인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어느 신학자들은 이 두 사람이 글로바와 그의 아내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이후 그들 부부의 고향인 엠마오로 귀향하는 것이라고 추측을 합니다.
여러분, 만일 이 두 부부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예루살렘에서 자신들의 메시아라고 생각했던 예수님이 잔혹하게 처형당하는 충격적인 일을 경험했잖아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그들은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리고 걸어가는 두 사람의 발걸음이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는 거예요. 예루살렘에서 엠마오까지는 11km가 떨어진 곳이니 적어도 서너 시간 정도는 그렇게 걸어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둘의 구체적인 모습에 대해 17절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이렇게 물어보십니다. 이에 두 사람이 어떤 모습이었다고 합니까?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그들은 슬픈 빛이 역력했어요. 왜 그렇죠? 사랑하는 주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믿고 따랐던 스승이 그들의 눈앞에서 십자가에 처형되는 모습을 봐야 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슬픔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대략 짐작이 되지 않습니까? 또한, 21절을 보니 “우리는 이 사람이(예수님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 두 부부는 이스라엘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되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였고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분명히 이들 민족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맥없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기대도 컸던 만큼 실망도 컸습니다. 더욱이 이 두 사람은 예루살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광기 어린 예루살렘의 사람들의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몰랐을 것입니다. 무기력한 제자들의 배신을 봐야 했고, 십자가에서 끔찍하게 처형당하시는 예수님을 봐야만 했습니다. 아마 마음속에 그들을 향한 분노도 있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들의 향한 실망도 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들은 혼란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왜냐하면 22절부터 보니까, 어떤 여자들이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갔다가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지고 천사만 만났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천사가 말하길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인들이 헛것을 봤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 그 여인들의 말이 아직 이 두 사람의 마음에 남아 있는 거예요. 바로 빈 무덤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믿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실망과 좌절 속에서 엠마오로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죠.
여러분, 이 두 사람이야말로 은혜가 필요한 것 같지 않습니까? 또한, 이 두 부부처럼 누군가로부터 실망을 느꼈거나 좌절을 맛본 분들이 계신다면 역시 은혜가 필요합니다. 나 자신을 향한 실망감과 분노에 자신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사람도 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을 향한 열정과 사랑으로 무엇인가를 해 보고자 했는데 벽에 부딪힌 분들이 있다면 그분도 은혜가 필요합니다. 내가 기도의 제목을 갖고 새벽에 그렇게 기도를 하는데도 아직도 응답이 없는 슬픈 마음을 가지고 이 자리에 나온 분들이 있다면 그분들 또한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성경을 읽을 때 도덕적인 말씀에는 밑줄이 그어지지만, 하나님의 뜻이나, 용서와 공의를 나타내는 부분은 인정이 안 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 또한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정말 우리 모두에게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여기 이렇게 혼란스럽고 실망과 좌절 속에 있는 두 사람에게 낯선 분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제삼자로 그들의 대화에 개입하고 계세요. 예수님의 행동,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 처형과 빈 무덤, 제자들의 간증이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글로바는 자신이 목격하고 들은 바를 잘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것을 글로바의 복음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글로바는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뭐예요? 그 복음을 전한 당사자가 바로 자신의 이야기의 주인공인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못 알아봤다는 것입니다.
성도님들 중에 예수님에 대한 복음은 잘 알고 있지만, 정작 주님이 나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사실에 대해 깨닫지 못해 쉽게 실망하고 쉽게 넘어지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분들과 함께 대화를 시도하시는데요. 25절을 보니까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못 알아보는 이 두 제자를 책망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미련하다”라는 것은 욕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아직도 선지자들이 증언한 말씀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는 연약함을 꾸짖는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주님에 대해 알고는 있고, 듣기도 했지만, 더디 믿는 자들에 대해서 “미련한 자들”이라며 꾸짖고 계십니다. 그러나 책망만 하고 끝난 것이 아니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27절을 보니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성경은 구약성경을 말하는 것이겠죠? 구약성경에 예수님 자신에 대해 어떻게 계시하고 있는지, 메시아가 해야 하는 일에 대해, 예수님이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야 하는 이유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에티오피아 내시는 구약성경을 읽고 있었지만, 그 내용을 이해하지를 못했잖아요? 이때 빌립이라는 사람이 그 내용을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습니까? 그 설명을 듣고 난 후에 내시의 영안이 열리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자세히 설명해 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엠마오 도상에서 예수님이 두 일행에게 구약의 말씀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을 때 큰 그림이 그려지면서 마음이 뜨거워져 은혜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에는 은혜받은 자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데요. 오늘은 은혜를 받은 사람은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두 가지로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은혜받았을 때 일어나는 첫 번째 변화는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32절 합독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뭐라고 기록되었죠?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예수님께서 설명해 주실 때 그들의 가슴에 거룩한 빛이 섬광처럼 찾아왔을 것입니다. 동시에 뜨거운 열정이 가슴에서 일어났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예수님을 만나 마음이 뜨거워졌던 경험이 있으십니까?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그런 뜨거움이 있지 않았습니까? 세상이 달라 보이고 뜨거운 감격과 감사가 있었습니다. 내가 과거에 행한 것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믿음 하나로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우리가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는 은혜를 받게 됩니다.
세계적인 저술가이며, 저널리스트인 필립얀시라는 분이 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에서는 은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우리가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아무리 열심히 새벽에 나오고 아무리 열심히 신앙훈련을 하고 모든 집회에 참석을 해도 심지어는 신학교에 가서 헬라어, 히브리어를 배워서 성경을 원어로 본다고 할지라도, 제아무리 의로운 싸움에 뛰어든다 할지라도 은혜가 없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필립얀시는 이어서 은혜에 대해 이렇게 정의합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약화시킬 수 없는 것이 바로 은혜이다.” 우리가 저지른 죄, 교만과 차별, 상대방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것. 속이고 약탈하는 것. 심지어는 간음과 살인까지도 하나님의 사랑을 약화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십자가의 사랑을 만날 때, 이런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능력이 있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더디 믿고 신앙의 자리에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을 그때 하나님께서 은혜 주셔서 주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까? 또한, 처음 만났을 때만 은혜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평생토록 주님의 삶을 따라야 하는 우리로서는 날마다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요. 저도 그렇고 우리 성도님들도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뜨거움이 필요합니다. 도무지 용서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었던 누군가를 용서해야 할 때도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할까 말까 평생을 고민하다 늘 주저앉아버렸던 나 자신의 연약한 믿음에도 은혜가 필요합니다. 비록 내 이름이 드러나지 않더라도 오직 주님을 위해서 이 일을 할 수 있는 것 또한 은혜가 없으면 불가능하기만 합니다.
더욱이 소명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던 교회의 리더들에게도 더더욱 은혜가 필요합니다. 한 미국의 신학자가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영적 건강을 잃어버릴 때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이 웃음이다.” 어떠세요, 여러분? 만일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내 얼굴에 웃음이 사라졌다면 그분은 은혜가 시급하게 필요한 사람입니다. 사역에 지칠 대로 지쳐서 마치 암벽을 오르는 것 같다면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주님의 멍에는 가볍다고 했는데, 지금 내가 짊어지고 있는 멍에가 무겁다고 느껴지신다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은혜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면 내가 가진 중압감을 날려버리고 견고한 삶의 진들이 무너져 내릴 것이라 믿습니다.
그런가하면 우리가 은혜받았을 때 일어나는 두 번째 변화는 영적인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30절과 3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30-31절 합독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에게 떡을 떼어 주시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여러분, 은혜는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영안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길 가던 중에 만난 분이 예수님인 줄을 몰랐습니다. 눈이 가려져서 예수님을 몰라봤어요. 그런데 저녁에 이 예수님을 자기들 집에 초청해서 하룻밤을 머물게 했습니다. 이때까지 예수님은 이들에게 그냥 손님이었어요. 그런데 그 손님이 마치 주인인 것처럼 빵을 떼어서 축사하시고 두 제자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순간 이들 제자에게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던 것 아닙니까? 마치 어디선가 본 것처럼 이 장면은 어디서 많이 봤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이들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봤습니다. 그들의 눈을 가렸던 것이 사라졌습니다. 그 순간 귀한 손님으로 여겼던 예수님은 손님이 아닌 주인이 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육체적인 눈은요. 한계가 있습니다. 뭐 다 볼 수 있을 것 같지만 볼 수 없는 것들이 더 많습니다. 사람이 노화가 일어나면 가장 먼저 쇠약해지는 것이 시력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의 영안이 열리면 주님이 보입니다. 십자가를 보는 눈이 열려요. 내 인생을, 이 시대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마치 게하시의 눈에는 보이지 않던 하나님의 군대가 엘리사의 눈에는 보였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믿음의 눈을 갖게 되면 우리의 사건과 환경을 넘어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보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이런 영안이 열리는 놀라운 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자, 그럼 이런 은혜를 받고 난 두 제자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33절 합독
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여러분, 변화 받은 사람은요. 즉시 행동으로 옮기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이들이 은혜를 받자마자 보여 준 변화는 즉각적인 행동입니다. 절대 지체하거나 망설이지 않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눈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즉시 행동으로 옮기게 됩니다. 이게 은혜 받은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유기성 목사님의 SNS에 이런 제목의 칼럼이 올라왔습니다. “주님의 뜻 모르겠다 하지 말고 깨달은 것부터 시작하자”
내용이 이렇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지금 이 시대에 '목사로 산다'는 것이 너무나 무거운 짐이다. 나 혼자의 삶도 바로 살기 힘든데, 교회를 이끌어가는 일은 너무나 버겁다. 한국교회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분별하는 일조차 언제나 힘이 든다. 그러다 보니 감당하기 힘든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심정일 때가 많았다"고 토로했다. 그런데 주님은 제게 '삶은 쉬운 것이라' 하셨다. 처음에는 그 말씀에 '아멘' 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잠잠히 생각해 보니, 주님의 말씀이 옳음을 깨달았다. 주님이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따라가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유 목사님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그저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이라는 설명이 없었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부름에 제자들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하던 일을 다 내려놓고 주님을 따랐다. 이것이 저를 향한 주님의 부르심"이라고 말하면서, "해도 소용없는 고민은 더 이상 하지 말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가자! 역사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니 저는 그저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면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참 옳지 않습니까? 은혜받은 사람은요. 해도 소용없는 고민은 더 이상 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은 기도한 대로 응답하시기에 “할렐루야!”를 외칠 때가 있죠. 하지만 기도한 대로 응답해 주시지 않더라도 그것이 주님이 말씀하신 거면, 그런 마음을 주신 거라면 즉시 “아멘!”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거예요. “주님, 그렇게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이제 더 고민하지 마시고 깨닫게 하신 것은 바로 순종하고 행동하시는 저와 우리 교우님들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는 이미 날이 어두워졌고 식사 시간이었습니다. 게다가 온종일 걸어왔기 때문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몸이 피곤한 상태였기 때문에 하룻밤 푹 쉬고 내일 가도 되는 일입니다. 누가 뭐라고도 안 하고 얼마든지 합당해 보이잖아요?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곧 그때로 일어나” 즉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결단만 하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뜨거워지고 눈이 밝아지는 것으로만 끝나질 않았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일어나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여러분, 이런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특징은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두 사람은 예루살렘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오늘 오후까지만 해도 예루살렘은 자신들이 따르고 사랑했던 예수님을 모함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했던 극악무도한 무리들이 살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은혜를 받고 나자 그토록 도망쳐 나오고 싶었고 다시는 돌아가기도 싫었던 그 예루살렘이 오히려 그 즉시로 일어나 돌아가고 싶은 소명의 도시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가서 섬기고, 나누고 싶은 사역지가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내가 속한 상황과 환경에 대한 생각이 전환되는 것입니다. 날이 어두웠고 몸이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빨리 제자들에게 자신들이 만난 부활하신 주님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자신들처럼 슬픔과 실망감에 빠져 있을 사람들을 만나 부활의 주님을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바로 오늘 오후까지만 해도 터벅터벅 걸어오던 발걸음이 아마 한시라도 빨리 가고 싶어서 열심히 뛰어갔을 것입니다. 낙심한 자들의 무거운 발걸음은 슬픔 당한 자들을 위로하고 복음을 전하고, 힘을 주기 위한 소명의 발걸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이런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자리에 엠마오로 걸어가던 두 제자처럼 슬픔에 빠졌거나 낙담하여 이 자리에 나오신 분들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이 말씀을 통해 마음이 뜨거워지고, 영안이 열려 다시 회복되고 다시 영적으로 재무장하여 희망의 발걸음, 믿음의 발걸음, 힘찬 발걸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제 첫 새벽기도회 때 함께 불렀던 이 찬양요. 우리가 많이 부르는 찬송가 310장은 ‘아 하나님의 은혜로’로 시작이 됩니다. 찬송가 가사 중에 감탄사로 시작하는 찬송시는 아마 310장이 유일할 겁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곡을 쓴 분이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감격스러운 것이죠.
그런데 그 다음 가사가 중요합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어느 날, 제가요. 저 자신을 두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제가 별 쓸데가 없는 사람이 생각이 들었습니다. 딱히 못하는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잘하는 것도 없어요. 특히 지난 10년이 넘는 부교역자 생활을 돌이켜보니 정말 별 쓸데없는 사람이더라고요. 오히려 교회와 함께 동역하던 분들에게 걸림돌이 될 때가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음 찬송가 가사가 공감이 되더라고요.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이건 정말 알 수가 없는 일이죠. ‘아니,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을…’ 저같이 쓸데가 없는 사람을 구원해 주시고, 목사로 불러 주셔서 사용해 주시니 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2절 가사의 내용은 “왜 내게 굳센 믿음과 또 복음 주셔서 내 맘이 항상 편한지 역시 난 알 수 없도다.” 3절과 4절 역시 “알 수 없는” 은혜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후에 대반전이 일어나요. 바로 후렴 가사입니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시는 주님, 늘 보호해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제가 어제도 말씀드렸잖아요? 앞에서는 다 모르는 투성이고 앞으로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는데 단 하나 아는 게 있다면, 내 모든 형편과 상황을 아시는 주님이 나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시지 않고, 엠마오의 두 제자처럼 어느새 내 곁에 다가와 깨닫게 해 주시고, 새 힘을 주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부활의 주님이 항상 나를 보호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엠마오의 두 제자처럼, 이 찬송가의 가사의 내용처럼 낙심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왜 그러시는지 알 수가 없을 때, 정말 은혜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우리 다 모르는 것 투성입니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별반 달라질 것 같지가 않아요. 여전히 상황은 달라질 것 같지 않고요. 나를 힘들게 하는 저분은 변할 것 같지 않고, 왜 하나님은 내게 그런 복을 주시지 않나? 도대체 이 상황은 뭔가? 이럴 때가 많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심하고 지쳐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다가와 다시 마음을 뜨겁게 하시는 은혜를 주시고 닫혀 있던 영안을 열어주셔서 잃어버렸던 사명감을 회복하게 해 주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면 우리도 다시 주님의 말씀 앞에 무릎을 꿇고 “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멘!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주님이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겠습니다. 멈추라면 멈추겠습니다.” 우리 그렇게 고백할 수 있죠. 당연히 그럴 수 있죠. 우리 모두에게 이러한 은혜와 사랑이 충만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 : 찬송가310장
❙합심기도
요즘 여러분 어떠세요? 은혜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 웃음을 잃어버리는 것. 혹시 웃음을 잃어버리셨습니까? 그렇다면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세요. 엠마오의 두 제자처럼 그 극악무도한 예루살렘 사람들 다시는 보기 싫었지만, 은혜를 받고 나니까 바로 일어나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다시 일어나서 돌아가야 할 사명의 자리가 어디십니까?
오늘 주신 말씀을 붙들고 함께 기도하실 때에, 주님, 제 마음이 더 뜨거워지고 영안을 열어 주셔서 더욱 사명감이 회복되는 은혜가 있게 하여 주옵소서!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의 이름을 한 번 부르고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오늘 이 자리에 엠마오의 두 제자처럼 하나님에 대해 실망하거나 낙심한 마음으로 오신 분들이 있다면, 다시금 다가와 뜨거운 마음을 회복시켜 주시고, 영안을 열어주셔서 다시 사명의 자리, 헌신의 자리로 나올 수 있도록 도우시는 우리 주님을 더욱 알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바람은 불어도 어디서 불어오는지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그 바람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부활의 주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느끼지도 알지도 못한 채 살아간다면 저희를 불쌍히 여기셔서 늘 보호하시고 함께 하시는 주님을 깊이 경험하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 드리며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 하심이, 오늘 엠마오 도상에서 어찌 할 바를 몰라 상심해 있던 두 제자를 만나주시고 회복시켜 주신 그 부활의 주님을 더욱 의지하며 살아가길 결단하는 사랑하는 교우들 머리 머리 위에 저들의 가정과 일터와 기도제목 위에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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