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에 떠는 자에게 손 내미신 이(시편4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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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3년 8월 6일 주일 청년부
제목 : 두려움에 떠는 자에게 손 내미신 이
본문 : 시편 42:1-5
결단 :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 오직 주만이(후렴)
# 설교 전 중보기도 제목
1) 예배를 위해서 : 주인 되신 주님을 보며, 주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되게 하소서
2) 나라를 위해서 : 어둠이 가득한 이 세상이, 조금은 따뜻함으로, 사랑으로 함께 울며 웃는 공동체 되게 하소서
1. 두려움이 가득한 세상
1) 두려움 : 모방범죄
저는 요즘 정말 두렵습니다. 아마 이 두려움은 요즘 이슈들로부터 온다고 생각합니다. 신림동 칼부림 사건도 그렇고, 미금역 묻지마 칼부림이 그 이유일 것입니다. 특히 미금역 사건이 일어나기 3시간 전만 해도 저는 그 건물,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더 큰 두려움이 찾아오지 않았나 생각도 듭니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지킬게 많아지면 두려움도 커지고 생각도 많아진다” 는 말입니다. 혼자 인생을 살 때에는 두려움 하나 없었습니다. “조광원이 최고지” 라는 생각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냈는데, 결혼을 하니 아내를, 그리고 가정을 지켜야 했고, 자녀를 가지니 딸을 지키고 아비로써의 본분을 지켜야 했습니다.
근데 또 생각해보면 결혼을 해야만 이 말이 성립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지난 과거를 보니 늘 제 삶에는 두려움이 가득했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할 때에는 ‘짤리지 않을까’ 두려워 했고, 학교를 다닐 때는 ‘성적에 대한 두려움’과 ‘졸업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졸업할 때가 되자 ‘어떻게 먹고 살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우리 청년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어떤 두려움이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있습니까?
2) 불행 : 행복을 찾고 싶어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자들
사실 제가 이번주 그 날에 미금역에 있었던 이유는 서점에 가기 위함 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이 책, 저 책 둘러보다 ‘심리학’에 관련된 서적을 몇 권 훑어 보았습니다. 그러다 공통점을 좀 보게 되었는데,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는 결론을 제시한다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심리학 카테고리 근처에 이런 카테고리가 있었습니다. 바로 ‘행복론’ 입니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카테고리 였으며, 그 카테고리를 보며 든 생각은 이렇습니다. “세상에 너무 많은 자들이 불행하다 느끼고, 그렇기 때문에 행복을 찾고 싶어 하는구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행복을 찾고 싶어 하십니까? 또 어떤 방법으로 행복을 찾아 나서고 계십니까?
2. 두려움을 벗어나다
1) 시편 기자가 처한 상황
오늘 본문을 기록한 시편 기자 역시 우리와 같이 두려워 합니다. 그리고 그 상황이 꽤나 긴박해 보입니다. 1절을 보니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라고 기록합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갈급함. 이게 왜 긴박한 줄 아십니까? 사람이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하면 3일이 지나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근데, 물만 마셔도 40일 가량을 버틸 수 있다고 하니, 우리에게 있어 ‘물’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시편 기자가 ‘물을 찾는 갈급함’을 보인다는 것이 ‘현재 자신에게 처한 상황이 죽음의 문턱 가까이에 놓였음’을 알게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2) 두려움을 벗어나다 : 1. 묵상, “내 삶은 어떤가?”
우리의 삶을 ‘죽음의 문턱’에 놓였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잘 살고 있고, 여전히 우리는 ‘내일 죽을까’ 하는 두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육은 죽음의 문턱으로 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만, 우리의 영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과 진정 마음 다해 교제로 나아간 시간이 얼마나 되십니까?
이런 질문에 우리는 ‘건강하다’ 대답하기 위해서, 즉 영적 죽음으로부터 오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첫 번째 방법은 “묵상하는 것” 입니다.
묵상이 무엇입니까? 묵상은 ‘말 없이, 조용히 하나님과 기도로 교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바라보는 것이 우리를 두려움 가운데에서 벗어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어제를 끝으로 이어진교회의 여름사역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정말 많은 어린이들과 지체들이 함께 마음을 모았습니다. 참여자로, 스텝으로. 어떻습니까? 채움입니까? 소비입니까?
현실적으로 소비 없는 수련회는 불가능하다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저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보셨으면 합니다.
시편 기자는 소비뿐인 삶에 이런 질문으로 점검합니다. 5절 상반절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본인이 자기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왜 두려워 하는가, 왜 낙심하는가?’ 즉 시편 기자는 묵상의 시간을 통해 자기를 보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을 기준으로 왜 두려워 하며, 낙심하는가?”
우리는요? 어떻게 물을 수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을 붙들고 사는가?” “나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왜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 없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고, 낙담하지 않을 수 없기에 당연 하나님을 기준으로 물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바라옵기로는 매일 묻고 답해보십시오. “나는 건강한가?”
3) 두려움을 벗어나다 : 2.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두려움을 벗어날 두 번째 방법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5절 하반절을 보니,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편 기자는 죽음의 문턱 앞에서 그가 붙잡은 손은 소망으로 인도하실 하나님의 손이었습니다.
공포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크게 공감하지 못하시겠지만, 너무 무서워라 하시는 분들, 그렇지만 꼭 공포영화를 봐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어떠십니까? 너무 무서울 때 어찌 행동하십니까? 내 옆 사람의 옷깃을 꼭 잡고, 내 앞의 허리춤을 잡고 어떻게든 그 공포로부터 건너가 보려 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시편 기자가 두려움 앞에 붙잡은 것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에게 건내신 하나님의 능력의 손’ 이었습니다. 그 손은 소망의 손이었고, 모든 것을 건져내실 구원의 손이 었습니다.
이번주 이마트에 가 장을 보았습니다. 사람도 많고 순서를 기다리며 에스컬레이터를 기다렸습니다. 북적북적한 그 상황 속에서 저는 매우 두려웠습니다. “그럴 일 없지” 라고 말하기엔 요즘 세상이 너무나 흉흉하기에 “나도 충분히 당할 수 있다”는 걱정에 두려웠습니다.
그 순간 제가 의지할 곳이 단 하나 뿐이었습니다. 마침 제 옆을 지나가서 경찰관 두 명 근처에 알짱 거리며 있는 것.
이처럼 두려움이란 은연 중에 생기고, 다가오고 그 순간 다른 무엇인가를 찾게끔 하는 것 같습니다. 시편 기자도 그 순간 주님을 붙들었습니다. 42편 1절,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2절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금요일, 어린이부 여름성경학교를 돕다 밤늦게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처음 목격한게 무엇이냐면, 화장실 문지방에 반걸쳐 쓰러져 있는 아내였습니다.
그렇게 잘 케어하고, 아내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 아엘이를 제가 돌보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엘이도 그 날부터 열이 났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벽 4시까지 아엘이 케어하며 졸다 깨다를 반복하다, 새벽 4시 좀 넘어 아내가 ‘토요일 사역 준비하려면 좀 자야하지 않겠냐고’ 교대하러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교대해 나오자마자 누군가 저희 집 도어락을 열어 패스워드를 누르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저희집 사람은 아니었기에 계속 틀린 패스워드를 눌렀고 곧장 계단 위로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마 저희 윗집에 사는 외국인이 술에 취해 잘못 누른게 아닐까 생각하며 마무리했지만, 이미 제 잠은 저 멀리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리고 새벽 5시 조금 안되어 아내가 “오빠, 이리 와봐” 급히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렇게 가 보니 아엘이가 열성경련으로 온 몸이 굳어버린 겁니다. 눈을 좌측상단으로 돌아가 있고, 몸은 굳어 뻣뻣했습니다. 순간 저는 열성경련이라 생각도 못하고, 아엘이가 죽는 것은 아닌가 두려움이 훅 치고 들어왔습니다.
전 날 집에 들어가며 오감자 큰 걸 사들고 들어왔는데, 아무도 먹지 못하고 오히려 사고가 겹겹사로 일어나는 것이 마치 ‘운수 좋은 날’의 ‘김첨지’가 이런 기분일까 생각도 되었습니다.
여하튼, 그런 두려움 가운데 제가 느낀 것은, 진짜 두려움 가운데 놓이면 시야를 좁게 만들고, 좁아진 시야 속에 현실적으로 놓여 있는 “딱 그 정도만” 보이며, 그것만 논하게 되는게 인간이구나. 시야 넘어 계신 하나님의 손을 붙들지 못하는게 우리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나름 목회자로, 인생의 낭떠러지라 생각이 들 때, 자연스럽게 주님을 찾았던게 일상 이었지만, 극한의 두려움 속에서 끝내 저는 현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를 깨달자 저의 고백은 “그래, 하나님의 자녀는 내가 키우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키우실 뿐. 내게 주어진 자녀 하나님 앞에 잘 커가도록 나는 돕는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여전히 아엘이는 고열로 아파하지만, 저는 이 시간을 통해 아엘이가 커 가고, 저 역시 커 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본문을 쭉 보면 아시겠지만, 시편 기자의 고백을 통해 인생이 확 달라졌습니까? 인생의 고난 길이, 아름다운 꽃길로 바뀌었습니까? 전혀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전히 그의 삶은 “사망의 언저리” 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시편 기자의 고백은 더 이상 두려움 가운데 놓이지 않았습니다. 그를 향해 내민 하나님의 손을 붙잡자 “찬송가 감사”가 펼쳐 나옵니다.
3. 결론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두려운 세상, 어두운 우리의 영적 상태. 그 속에 우리는 어떤 조치를 취합니까? 좁아진 시야에 눈 앞에 놓인 것만을 봅니까? 아니면 그 넘어에 늘 자리에 계셨던 주님을 보십니까?
바라옵기로는 어떤 상황에도 늘 주님을 보기에 훈련과 최선과 노력으로 무장된 이 자리 가운데 계신 모든 이들 되시길 소망합니다.
[결단찬양 :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 오직 주만이(후렴)]
#말씀을 가지고
1) 낙심과 두려움에 빠져 낙담하지 말고, 눈을 들어 주를 보게 하소서
2) 날마다 주를 찬양함에 기쁨이 우리 안에 가득 채워지게 하소서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크고 놀라우신 사랑과
성령 하나님의 감동 감화 역사 임재 충만하심이
어둠이 가득한 세상 가운데 소망이 있음을 알게 하신 주님을 이젠 보겠노라 다짐한 자들과
그로인해 어떤 상황에도 날마다 주를 찬양하기에 힘쓰기로 결단한 자들 머리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