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화와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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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 주시니
2.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긴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산에서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 자기들을 위하여 만들었으며
3. 이스라엘이 파종한 때면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치러 올라와서
4. 진을 치고 가사에 이르도록 토지 소산을 멸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에 먹을 것을 남겨 두지 아니하며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기지 아니하니
5. 이는 그들이 그들의 짐승과 장막을 가지고 올라와 메뚜기 떼 같이 많이 들어오니 그 사람과 낙타가 무수함이라 그들이 그 땅에 들어와 멸하려 하니
(삿 6:1-5)

서론

이번 여름 수련회 주제가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바로 ‘여호와 샬롬’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샬롬’이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평강, 평화, 완전함, 온전함”이라는 의미를 갖는 히브리어입니다.
그리고 이 ‘샬롬’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상황이 평강 한지 아닌지 그리고 평화가 있는지 없는지 묻는 것이 아니라, 이 ‘샬롬’이라는 단어는 관계성을 나태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이 ‘샬롬’이라는 단어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 그리고 사람과 자연과 만물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가장 먼저 완전하며, 온전한 ‘샬롬’을 보여주는 곳이 바로 에덴동산이었습니다.
죄가 없었던 아담은 우리 주님과 동행하며 에덴동산에서 ‘샬롬’을 누렸습니다.
즉, 주님 안에서의 아담은 ‘샬롬’을 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자신이 우리 주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우리 주님과 같아지고자 하는 죄로 말미암아 아담에게 허락된 에덴동산에서의 ‘샬롬’은 깨졌습니다.
결과적으로 더 이상 인간에게는 온전한 의미에서 ‘샬롬’은 허락될 수 없습니다. 그 증거가 생명나무가 있는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쫓겨난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분명히 우리가 영원히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주님 안에 거하지 않고, 끝없이 주님에게서 멀어지려는 인간에게는 에덴동산은 더 이상에 의미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러한 인간을 그저 놔두지 않으셨습니다.
다시금 인간과 언약을 맺으심으로 우리 주님 안에 주어졌던 ‘샬롬’이 다시금 회복되길 원하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출애굽의 사건입니다. 우리 주님은 모세라는 불완전한 사람을 세우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다시금 주님의 통치가 임하는 새로운 ‘샬롬’을 인류에게 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마지막으로 인간과 자연 만물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고자 새로운 언약 시내산 언약을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인 모세와 체결합니다. 아담과 새운 언약이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이었다면, 시내산 언약의 내용은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19:5-6)라는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언약이 에덴동산에서 주어진 것이었다면, 두 번째 언약은 가나안 땅에서 시행될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백성들이 있으며, 주님이 함께하시는 그 땅은 에덴동산과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될 것이었습니다.
다만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과 맺은 언약을 충실히 이행할 때 말입니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자면 가나안 땅은 ‘샬롬’이 넘치는 축복의 땅이 될 수도 있지만, 주님의 백성으로 주님과 맺은 언약에 합당하게 행하지 않는다면 가나안 땅은 ‘저주의 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서론 (적용)

다시 말하면 이 말은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교회가 이와 같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을 믿는 백성이라 고백하는 우리가 모여 주님의 영광스러움을 찬양하고, 예배드리는 곳이지 않습니까?
이 곳에서는 주님의 선하심으로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아름다운 모습들이 이었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복음을 바로 이해하고, 합당하게 살아갈 때 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자녀로 합당하게 살아가지 못한다면 교회는 우리에게 가나안 땅과 같이 저주와 같은 곳이 될 수 있습니다.
습관처럼 교회 나오기는 하지만 교회 안에서 선포되는 말씀은 전혀 나와는 상관없는 말씀이 될 뿐만 아니라, 그러기에 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말들이 됩니다.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말이며, 우리 주님이 우리의 인생에서 전혀 상관없는 분이 되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려고만 하는 또한 주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해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는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되는 아주 끔찍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 영광스러운 주님의 뜻인지도 모르는체 자신의 뜻이 우리 주님의 뜻으로 둔갑하여, 남을 정죄하고, 상처를 주는 것이 정당화되는 주님의 은혜가 누려져야 할 교회가 지옥과 같아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본론1 (가나안 땅에서 시행되어야 할 것들)

그렇다면 이후의 여정들은 어떤 여정들이 되겠습니까?
모세를 필두로하여 주님이 허락하시는 ‘샬롬’을 누리기 위한 여정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께서 허락하신 ‘샬롬’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나안 땅에 있는 아낙 자손들에게 겁을 먹고 약속의 땅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도 우리 주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 땅에서 누릴 ‘샬롬’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본론1 (여호수아와 사사기)

사사기의 내용은 여호수아의 이야기와 매우 흡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매우 다릅니다.
여호수아의 내용이 영적 리더인 모세가 죽은 이후에 우리 주님이 여호수아의 기도를 들으시고 주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가나안을 정복하는 이야기라면
사사기의 내용은 영적 리더였던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 동일하게 유다 족속의 기도를 듣고 주님께서 가나안 땅의 정복을 이어가는 순조로운 스토리로 이어지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첫 사사인 옷니엘 이후에 이야기는 급속도로 변합니다.
사사기에서 오직 옷니엘 만이 온전한 사사의 전형을 보여주면 이후에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 언약을 준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론1 (가나안 거민을 진멸하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넘겨주신 모든 민족을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고 진멸하며 그들의 신을 섬기지 말라 그것이 네게 올무가 되리라”(신7:16)의 말씀에 따라 가나안 땅에 거했던 모든 민족들을 진멸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가 살아있는 시기에는 가나안 땅에 거하는 거주민들과 치열한 전투를 버렸지만 이후에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에는 점차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그들을 진멸하고 주님이 약속한 땅을 차지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공존하는 삶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그들이 올무가 되어 주님이 주신 이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을 겪는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본론1 (가나안 거민들을과 공생을 선택한 이유)

우리의 인생에서도 가끔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지 않고 어쭙잖게 타협을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른들은 이런 점들이 더 많지만 여러분들에게는 아마도 시험과 공부에 관한 것이 가장 적절한 예가 될 것 같습니다.
특히 지금 여기에 있는 고3 학생들은 정말 대단한 믿음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공부가 부담이 되지 않은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여튼 사람들로 하여금 두렵거나,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들에 대표적인 것들은 미래를 알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불안감과 인간의 게으름으로 인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특히 시험 기간이 되면 아무리 주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고백하더라도 주위에서 공부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막연한 불안감에 사로잡힙니다. 물론 그런다고 열심히 공부하지도 않으면서 말입니다. 오히려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들은 불안할 틈도 없겠죠!
그러게 막연한 두려움과 불안감이 엄습하면 자연스럽게 주님을 찾고 예배를 드리는 일에 소홀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유가 마치 정당한 사유가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도 동일했습니다. 승리는 항상 담보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치열하게 싸우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생깁니다.
동시에 이제는 좀 편안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택한 것은 ‘타협’입니다. 마치 시험 기간이 되면 주님께 대학가서 좋은 사람이 돼서 더 큰 영광을 드리겠다며 타협하는 우리의 모습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민족들과 동생의 길을 걷습니다. 처음에는 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다면 처음부터 주님이 그 길을 제시하지 않았겠습니까?
불가능하기에 진멸하라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때로는 공생의 관계에서 때로는 주종의 관계에서 지냈지만 점차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핍박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본론1 (샬롬이 선포되어야 할 땅)

처음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민족들과 타협한 것이라면 다음은 우리 주님의 말씀을 잊은데 비롯되었습니다.
“네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셔서 차지하게 하신 땅에서 너희가 평생에 지켜 행할 규례와 법도는 이러하니라 너희가 쫓아낼 민족들이 그들의 신들을 섬기는 곳은 높은 산이든지 작은 산이든지 푸른 나무 아래든지를 막론하고 그 모든 곳을 너희가 마땅히 파멸하며 그 제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불사르고 또 그 조각한 신상들을 찍어 그 이름을 그 곳에서 멸하라”(신12:1-3)
가나안 땅은 영광스러운 우리 주님이 허락하시며 그 땅에서는 주님의 언약과 율법 아래에서 ‘샬롬’이 선포되어야 할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땅에 주님 말고 다른 신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주시는 언약과 율법 말고 다른 법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 영광받으시며, 그 영광스러운 주님께 선택된 백성은 오직 주님과의 관계속에서 주어지는 샬롬을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 당연한 일이 결국 이스라엘 백성의 나태함과 아니한 생각으로 더 이상 가나안 민족을 진멸하지 않음으로 그들이 섬기던 우상들을 섬기는 끔찍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본론2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 숭배를 하는 이유)

여러분들 그런데 궁금하지 않습니까?
분명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이 하시는 놀라운 이들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따금 씩 정말 우리 주님이 살아계시다는 증거를 보여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나도 이스라엘 백성처럼 홍해가 갈라지고, 하늘에서 불 우박이 내리면 믿을 것 같은데 왜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을 믿지 못했을까?”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상숭배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악함을 알고 사단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인간이 어떻게 하면 우리 주님을 떠나 멀리 도망하게 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아담과 하와도 넘어갔겠습니까!
당시 우상은 인간의 욕심을 잘 보여줍니다. 특히나 성경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바알과 아세라가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오면서 점차 농경사회로 접어들게 됩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날씨에 민감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비가 많이 오지 않습니다. 일년에 크게는 딱 두 시기에만 비가 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걸 이른 비와 늦은 비로 설명합니다.
이른 비가 오는 시기에 딱딱해진 땅이 축축해지면 밭을 갈아엎어서 씨를 뿌리고, 추수 직전에 오는 늦은 비로 알곡이 가득 차도록 만들어서 추수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을 모르던 가나안 민족은 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보면서 바알이라는 신이 평소에는 잠을 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바알 신이 성행위를 하고 싶으면 잠시 깨어나고 그때 흘리는 정액이 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는 신을 어떻게 깨워야 합니까?
그 신을 흥분시켜서 깨워야지요! 그래서 가나안 민족들이 무엇을 하냐면 큰 나무 밑에서 모든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집단 성행위를 합니다. 그 성행위의 모습을 흥분해서 바알신이 깨어나 부인인 아세라와 성행위를 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여기서 볼 수 있는게 뭡니까?
첫 번째는 부에 대한 욕구입니다. 재산을 불리고 싶은 겁니다. 잘 살고 싶은 거죠! 안전한 생활을 보존 받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를 자극하는 것 아닙니까? 이 얼마나 좋은 방법입니까! 돈도 생기고 합법적으로 인간의 욕구도 해결하고, 이러한 문화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의 생각을 지키는게 쉽겠습니까?

본론2 (적용)

요즘 세대도 동일하지 않습니까?
최근에 제가 들은 말에 ‘자만추’라고 처음에는 이게 무슨 뜻인지 몰라서 하두 요즘에는 제가 모르는 말들이 많아서 그냥 넘어갔는데 그 뜻을 최근에 알았습니다.
‘일단 자보고 이후에 만나는 것을 추구한다’라는 뜻이더라고요! 저도 아저씨가 되었는지 제 시대만해서 젊은 남녀가 성적인 관계를 맺는 것 청년들이나 해당하는 말이었습니다.
물론 제 때에도 빠른 친구들이 있었는데 요즘에는 초등학생들이에도 이런 문제들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이 세대가 급격하게 성적으로 문란한 삶이 아무렇지 않게 둔갑되고 있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요즘 혼전 임신은 혼수라고 하는 말까지 나오지 않습니까?
세상 문화에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마음 잘 지키십니까?
주님을 믿으니 주님이 원하는 그 뜻이 무엇인지 잘 분별하며 사시냐는 말입니다! 그냥 교회에서 혼전 관계는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닌까 하지않으면 되는 겁니까?
아닙니다. 왜 주님이 이 혼전 관계를 금하셨는지 그 이유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후에 그 뜻을 기쁘게 따르셔야 하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의 뜻을 아셔야 하는 겁니다.

본론3 (죄의 결과 기드온 시기의 끔찍한 상황)

그러니 오늘 본문의 결과는 이미 주님이 아신 결과입니다.
그 땅에서 가나안 족속들을 멸하지 않으면 결국 이스라엘 백성이 세상 문화에 빠져서 이방 민족과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되는 그 모습을 말입니다.
우리 역시 어떻게 살아가실 겁니까? 세상이 말하는데로, 세상도 그렇게 살아가고 큰 문제가 되지 않으니 그렇게 살아가시겠습니까? 만약 여려분들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도 같은 생각으로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그리고 문제는 완전히 우리 주님을 섬기지 않은 것은 아니기에 그들은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면 우상숭배를 한 것입니다. 마치 우리들처럼 말입니다. 예배도 드리고 헌신도 했으니 나의 모든 삶을 요구하지 마세요! 이러면서 말입니다.
그 결과가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본 본문의 말씀입니다.
앞선 사사의 시대에도 동일하게 가나안 민족의 핍박이 있습니다. 오히려 앞선 사사의 시대보다 압제의 기간이 짧기도 합니다.
고작 7년 밖에는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7년의 시간은 앞선 시간과는 비교과 되지 못합니다.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긴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산에서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 자기들을 위하여 만들었으며”(삿6:2)
에서 보듯이 그 피해가 얼마나 극심했으면 자신이 사는 터전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그 피해가 어느 정도였냐면
“진을 치고 가사에 이르도록 토지 소산을 멸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에 먹을 것을 남겨 두지 아니하며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기지 아니하니 이는 그들이 그들의 짐승과 장막을 가지고 올라와 메뚜기 떼 같이 많이 들어오니 그 사람과 낙타가 무수함이라 그들이 그 땅에 들어와 멸하려 하니”(삿6:4-5)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들 메뚜기 떼를 본 적이 있습니까?
지금 이 말을 성경이 기록한 것은 미디안 족속은 다른 시대와 다르게 조공을 요구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그 땅에서 완전히 멸하려 모든 것을 가져가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동물이나 물고리를 잡을 때도 작은 것들을 살려줍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음에 또 거두어 들일 것을 계산하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다 잡아버린다면 번식할 수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다음을 기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디안 백성들은 지금 이스라엘 백성을 죽일 작정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지금 약탈하는 양이 어떻겠습니다. 조금도 남김없이 다 가져가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의 명령에 따라 가나안 족속을 진멸해야 하는 것처럼 지금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이 약속한 땅인 가나안 땅에서, 주님의 ‘샬롬’이 선포되어야 할 땅인 이 가나안 땅에서 진멸당할 위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이해가 되십니까?

본론4(우리에게는 한가지 선택만 가능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에게 선택은 단 두 가지 밖에는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어줍잖은 중간 지대가 없다는 것입니다. 온전힌 순종하여 주님이 허락하신 ‘샬롬’의 땅에 거하던지 아니면, 그 땅에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마치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같이 말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고통속에 놓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통은 그들 스스로 자초한 것입니다. 지난날 주님이 행하신 일들과 주님이 허락하신 언약과 율법을 버린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 이와 같다는 말입니다.
더 이상 이들에게는 기댈 곳이 없습니다. 다시금 주님께 돌아가는 것 말고는 다른 답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루하루의 삶이 고통의 연속인 삶이 되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에서 진멸된 위기에 놓인 것입니다. 그런데 더 끔찍한 사실은 이 7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우리 주님께 침묵하다 드디어 7년만에 우리 주님을 찾았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이 끔찍한 상황들 속에서도 어떻게든 자신들의 힘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미디안 백성들에게 진 것입니다. 미디안 백성들로인해 처참한 삶을 살아가야 했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주님을 잊었습니다. 주님이 주시고, 주님이 허락하신 땅인데, 주님이 들어가게 하신 곳인데, 주님이 그곳에 계셔야 그 땅이 축복에 땅인데 그들이 우리 주님을 잊어버렸습니다. 바로 ‘교만’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이 생각은 마치 아담이 우리 주님과 같이 자신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님과 같아지겠다는 그 생각이 바로 교만입니다. 그리고 우리 삶에서 주님을 구하지 않는 것 바로 이것이 교만입니다.

결과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 주님을 알기 위해서, 우리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어떤 노력들을 하고 계십니까?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을 바르게 살아가고 계시냐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 교만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냐는 말입니다.
세상은 메뚜기 떼와 같이 하늘을 가릴 만큼의 엄청난 수와 유혹들로 우리를 공격합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이라는 것이 조금도 자랄 수 없도록, 우리가 주님께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님이 우리를 버리심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버렸다는 그것마저도 기억하지 못할 만큼 우리를 흔듭니다.
세상과 겸하여 주님을 섬기면서 그것이 어떤 죄인지 알지 못합니다. 하루하루 바쁘게는 살아가지만, 여전히 우리 마음에 공허함과 두려움이 가득한 그 삶을 오늘도 살아가면서 이 문제가 어디서 왔는지 우리는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에서 자살률 1위입니다. 저출산도 1위인데 태어나는 수 가장 적고, 자살하는 사람은 1위인 국가에서 여러분들이 살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열심히 사는 것 그것으로 위안을 삼지 마십시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긴것도 약속의 터전인 자신의 집을 버리고 산속으로 숨어들어간 사람들도 모두 살아가기 위해 나름 열심을 낸 투쟁이었습니다. 열심히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이 주님의 샬롬의 땅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세상과 겸하여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닌 주님의 말씀에 따라 피조물인 인간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우리를 지으신 주님으로 인해 기뻐하며,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는 창조의 목적을 회복하는 것에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 이 자리에 여러분들 왜 와 앉아 계십니까? 여러분들의 삶이 평안하고, 평화가 흘러넘쳐서 오셨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치열한 세상 속에서 주님의 말씀으로 살아가기 위해! 우리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오신 것 아닙니까?
즐겁기 위해 오셨습니까? 어떡합니까? 단순히 인간을 즐겁게만 만드는 오락들은 세상에 더 많습니다. 여기는 그런 것들이 없습니다. 다만 이 시간들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주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체 바쁘게만 살았던 우리의 죄 된 모습들을 돌아보아 다시금 주님께로 돌이키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이 수련회가 여러분들에게 줄 것은 이것 뿐입니다. 공허하고 죽을 것 같은 불안과 두려움이 있습니까?
그것들은 다 주님의 뜻을 떠나 멀리 도망친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그러니 속히 돌아오십시오! 주님께 부르짖으십시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했던 그 모습처럼 다시금 주님께 부를 짖으십시오! 그때에 우리 주님은 우리의 음성을 들으십니다.
그리고 세상과 겨루어 이길 힘과 능력을 더하여 주십니다. 오직 주님 안에서만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강과 평화 그리고 온전함과 완전함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우리 주님의 뜻이 아닌 세상의 우상들을 섬겼던 우리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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