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인성 여인과의 만남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84 views고통 중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
Notes
Transcript
무리와 제자
무리와 제자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한 과부의 독자를 살려주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과부는 이름도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법적으로, 경제적으로 책임져줄 남편도 없습니다. 이는 그 과부가 당대 사회적 약자 중 약자였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회적 약자인 나인성 과부를 만나 주시기 위해 나인이란 ‘성’에 들어갔습니다. 누가는 “성”이란 헬라어 “폴리스”를 사용했습니다. 폴리스는 우리가 생각하는 요새와 같은 성을 가리켜 말하지 않고, 마을, 도시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셨고, 그로인해 따르는 무리와 제자들이 생겼습니다. 여러분 무리는 예수님과 뜻을 같이하지는 않고 그저 호기심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상과 뜻에 동의가 되어 자신들도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겠다고 결의한 자들의 무리를 가리켜 성경은 ‘제자’라고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제자입니까? 무리입니까? 분명한 것은 이 제자와 무리가 섞여서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는 예수님이 걸어가셨던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켜 말합니다. 좁은 길을 걷는 것입니다.
좁은 길
좁은 길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선택의 길이 바로 좁은 길을 걷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으셨다는 것을 믿고 그 예수님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선택의 길이 바로 좁은 길입니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바가 없고, 손에 잡히는 바가 없고, 우리 앞길이 칠흑같이 어둡다고
하여도 그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 현실을 절대
긍정과 소망으로 살아가는 선택의 길이 바로 좁은 길을 걷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결국 소망을 보지 못한다고 하여도 죽음 너머에 있는 부활의 소망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실 것을 믿는 선택의 길이 바로 좁은 길입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에 눈이 멀지 않고 내게 주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 관리하려는 선택의 길이 바로 좁은 길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 곂에 제자(마테테스)와 무리(오클로스)가 함께 있음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제자입니까? 아니면 무리입니까?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면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받들고 자신의 삶에 적용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만약 여러분들이 무리라면 오늘 들은 말씀은 여러분들의 지적 호기심만을 만조시킬 것 입니다. 아니면 단순 마음에 위안만 얻을 것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저는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님께서 나인 성에 가셔서 이루셨던 뜻을 저와 여러분들의 삶을 통해 이루어내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예수님의 뜻, 사회적 약자란?
예수님의 뜻, 사회적 약자란?
예수님께서 나인 성에 들어가셔서 이루시고자 하셨던 뜻은 어떤 뜻이었을까요? 당대 이스라엘에서 가장 연약한 사람 중 한 부류였던 여인, 여인 중에서도 남편이 없는 과부, 과부 중에서도 하나 밖에 없는 자녀를 잃은 과부의 아픔에 함께 하고자 하셨던 뜻이 바로 예수님의 뜻이셨습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 즉 구원자의 특징을 가리켜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한다.”는 특징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이 예언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재 확인 됩니다. 누가복음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당대 사람이 나은 자 중에 가장 위대한 사람은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 마저도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가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위로하고, 치료해주고,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거두워 주는 메시아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백마를 타고 나타나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침체된 경제를 회복하시고, 이스라엘의 위엄을 다시 세상에 높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께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신지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누가복음 7:20
그들이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여쭈어 보라고 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때마침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찾아온 요한의 제자들에게 구약에 나타난 메시아 예언이 지금 대중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현장 교육을 통해 알려주시고자 하셨습니다.
마침 그 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신지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예수님은 메시아이십니다. 예수님은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이 구원자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관심사는 가난하고 굶주리고 약한자들에게 있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타락했기 때문에 부유해지고, 권력이 생기고, 유명해지면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땅에서의 부와 권력 그리고 명성은 영원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가난하고, 굶주리고, 헐벗은 존재로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 수 많은 부자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부와 명예와 권력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을 파괴하는 다양한 중독과 파괴적 행동 때문에 고통 가운데 시름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시기와 때가 다를 뿐이지 곧 모두가 삶에서 크고 작은 슬픔과 어려움, 고통과 좌절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메시아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그 마음에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슬픔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한 여인에게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 찾아 왔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사회적 약자로 살아왔을 여인에게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남편도 없는 가운데 자신이 의지했던 하나 뿐인 아들이 죽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목회자이기 때문에 다양한 장례를 경험했습니다. 그 중 저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했던 장례는 자식을 먼저 보내고 그 앞에서 망연자실해 있는 장례였습니다. 그래도 그나마 오늘 본문의 여인보다는 나은 상황일 때가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식을 잃은 아픔을 가지고 있는 그 여인과 남편에게는 서로를 위로해 줄 수 있는 배우자가 있었고, 또 다른 자식들이 있거나, 친척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나인성 과부는 배우자도 없고, 또 다른 자식도 없습니다. 그래도 동네에서 좋은 평이 있었던 거 같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장례 행렬에 따라 이름도 없는 그 과부의 슬픔에 동참해 주고 있습니다.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소설가 박완서 씨가 아들을 잃고 몸부림치면서 쓴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내용을 잠시 인용해 드리겠습니다. “눈을 뜨니...꿈이었으면 하는 몽롱한 착각을 즐길새도 없이 아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무서운 괴물처럼 가차 없이 육박해 왔다. 그 다음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미친 듯이 몸을 솟구치면서 울부짖을 차례였다. 그 일이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식인지 아무도 모른다. 목청껏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통곡하면 소리와 함께 고통이 발산되면서 곧 환장을 하거나 무당 같은 게 되어서 죽은 영혼과 교감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러나 그런 경지까지 도달한 적은 없다. 번번이 그 직전까지 갔다가 되돌아오곤 했다. 환장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자식을 먼저 보낸 분의 장례식에 도착했을 때 부모는 목청 높여 울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어떤 위로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그 싸늘하게 주검이 돼 있는 자녀를 함께 바라보며 눈물만 흘려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많은 분들이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고통의 무게를 측정하여 저 사람은 이 사람보다 덜 고통 스럽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통의 무게는 개개인 마다 상대적으로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뭘 이정도의 일 가지고 이렇게 소란이야!” 세상 다 떠나가겠네!”라고 말하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약자들의 현실
요즘 세상은 묻지마 범죄 때문에 혼란한 가운데 있습니다. 과외 앱을 통해 처음 만난 20대 여성을 흉기로 무참히 살해한 정유정은 검찰 ㅈ조사에서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다”고 했습니다. 지난달 신림역 인근에서 무차별적으로 흉기를 휘룰러 20대 남성 1며을 숨지게 하고 3명을 다치게 한 혐의로 구속된 조선은씨는 “내가 불행하게 살기 때문에 남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싶었고, 비슷한 또래 남성들에게 열등감을 느껴 그랬다”라고 얘기 했습니다.
그들은 사회의 약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교회가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사회의 약자에서 범죄자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회적 약자를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하신 말씀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그 마음에 인간 스스로는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을 가지고 있는 모든 인간을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말인 것입니다. 인간은 가난한 자나 부자나 사회적 약자일 수 있습니다.
실제 자살률을 보면 가난한 사람들보다 부자들이 더 많이 자살을 합니다. 실제 행복지수를 조사해 보면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보다 높은 편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이란 환경을 탓하기 시작할 때부터 불행이 시작되고, 부자들은 자신들이 이룬 바벨탑에서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며 하늘에 대고 화살을 높이 쏴 올리는 교만을 부릴 때부터 불행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께서 부한 자나, 가난한 자나 이 세상 모든 죄인을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세상은 저와 여러분 모두를 가리켜 표현하고 있는 표현인 것입니다. 부한자나 가난한자나 이 세상에 다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면 부한자나 가난한 자나 그 마음이 공허하여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모든 분들에게 찾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그 마음이 뻥 뚤려서 공허함을 넘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상황에 있는 나인성 여인을 찾아가 그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던 것처럼 말입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우리 마음에 타인을 바라볼 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야 합니다. “나도 저 입장이라면 그랬을 거 같다. 나도 저와 같았을 때가 있었는데...나도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다시 일어났지 저 사람은 지금 얼마나 힘이 들까?
예수님은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을 보고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불쌍히 여기다 라는 말을 헬라어 원어로 보면 창자가 뒤틀리는 듯한 아픔 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인간의 아픔에 공감하실 수 있다는 말인가요? 공감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래서 예수님을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시키시어 33년간 인간의 삶을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공감하실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공감하실 수 있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예수님께서 12살이 될 때까지만 성경에 등장합니다. 그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에도 그 자리에는 그의 어머니 마리아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어머니를 그의 제자였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게 부탁했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아주 어렸을 때 요셉은 사고를 당해 죽었든 병을 통해 죽었든 죽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모 중 한 분이 없는 상실의 슬픔을 그 때 배우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배신도 당하셨지요. 그 때 배신에 대한 슬픔도 배우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던 시대는 치안이 불안했습니다. 로마는 이스라엘에서 자유를 빼앗었습니다. 그래서 자유가 없는 자들의 아픔을 이해하실 수 있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법정에 서실 때 거짓 증인들의 증언과 무지한 백성들의 다수결로 십자가를 지셔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서 의분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을 예수님은 이해하실 수 있으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 김형국 목사님은 이와 같은 말씀을 덧 붙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문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얼마나 빨리 숨을 거뒀는지를 보면 얼마나 심하게 고문당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형은 사람을 빨리 죽이기 위한 처형 방법이 아닙니다. 스파르타쿠스라는 노예는 한 달을 십자가에 못 박혀 있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인간을 천천히 죽이는 형벌입니다. 십자가형은 그렇게 잔악하고 악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섯 시간 만에 숨을 거두십니다. 너무나 심한 고문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형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저와 여러분들과 같은 죄인들을 이해하실 수 있으십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먼저 십자가형을 경험하셨기 때문입니다.
울지 말라!
그래서 예수님은 누가복음 7: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말씀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리서 우리가 착각을 하면 안 됩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다양한 우여곡절을 경험했기 때문에 슬픔이 있는 사람에게
바로 가서 “울지 마세요!”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의 고통을 쉽분 공감해 줄 수 있으실 뿐 아니라 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소설가 박완서씨는 이와 같이 말씀했습니다. 자신의 아들이 죽었을 때 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저런 위로를 한다고 자신에게 이야기를 했지만 오히려 그 말이 자신에게 더 상처가 되었다고 말하며 이와 같이 말씀했습니다.
“그 분은 시간이 약이라는 말에, 잊어버리라고 말하는 사람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한결같이 잊으라는지, 세월이 약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처럼 격렬한 반감이 솟구칠 때도 없다. 그 애는 25년 5개월 동안 나를 행복하게 해주었다. 내 기쁨이요, 보람이요, 희망이요, 기둥이었다. 어떻게 25년 5개월 동안이나 기쁘게 해준 아들을 잊는 게 쉬울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나인성 과부에게 “울지마세요!”라고 말할 때는 내가 네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시체에 손을 대서는 안 되는 율법을 어겨가면서까지도 그 죽은 아들의 관에 손을 얹으신 것입니다.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예수님은 형식적으로 사람들을 위로하지 않으셨습니다. 실제 그들의 아픔의 현장 가까이
가셔 그들을 위로해 주셨습니다. 또 다른 예가 성경에 많이 기록돼 있습니다.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예수님의 행위는 단순한 몸짓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상처난 사람들의 아픔과 슬프에 동참하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도 있고,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능력도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인성 과부에게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김형국 목사님은 자신의 저서 만나지 않으면 변하지 않는다는 책에서 “예수님께서 나인성 여인에게 울지마세요!”라고 말한 이유를 3가지로 요약했습니다.
울지 마세요.
울지 마세요.
울지마세요! 끝이 아닙니다.
- 오히려 절망의 자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간증....문제를 통해 예수님을 들어내십니다. 나는 아편이 아니다.
2. 고통당하는 모든 사람이 부활의 소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예수님의 부활을 예고한 것입니다.)ex) 전도서 7: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3.믿음과 소망으로 고통의 현장을 통과하세요.
- 예수가 원하는 것은 고난과 고통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를 진실하게 알아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더 분명히 알아 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