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812 양청] 34문

소요리문답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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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양자됨’에 대해 공부할 것이다. 우리가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는 이 교리는 구원론 혹은 성령론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왜 성령론으로 이해를 하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우리에게 적용해 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시기 때문이다. ‌
그런데 우리가 지금까지 배운 것들, 예를 들어서 부르심이라는 것도 있었고, 칭의도 배웠다. 그리고 또 오늘 우리는 양자 됨이라고 하는 걸 또 배운다. 이뿐만 아니다. 중생이라는 것도 있고 성화라는 것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런 것들이 왜 중요한가? 여러분이 예수 믿어 구원받았다고 할 때, 도대체 구원받은 상태가 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죽어서 천국가는거? 죽어서 천국가는게 구원이라면 지금 여러분들은 아직 구원을 받은게 아닌건가? 성경은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어떤 것인지를 굉장히 입체적이고 종합적으로 설명을 한다. 이를 통해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근데 기껏해야 “내가 구원받았다는 게 예수님 믿고 구원받았어요” 하는 수준에서 머무른다면 그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영광스러움과 확신과 기쁨과 평안을 누리지 못한다. 왜?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가 교리를 가르치기를 포기했다. 어렵고 딱딱하니까. 가르치려는 목사도 공부를 해야 하고, 배우려는 성도들도 어려우니까. 재미없으니까.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한국 교회에 수많은 문제들이 야기되고 있는 이유는 다른 어떤 이유때문이 아니라 무지함에 결과이다. ‌‌어떤 무지함인가? 우리가 삼위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내가 믿는 그분이 누구인지, 우리 가운데 어떤 일을 베푸셨는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장차 어떤 일들이 우리 가운데 예비되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지성의 종교이다. 우리의 지성을 사용해서 내가 뭘 믿는지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지식에 대한 확신도 필요한 것이다.‌
오늘 양자됨이라고 하는 이 교리를 여러분들이 얼마큼 많이 들어보셨는지 모르겠다. 칭의에 대해서는 우리가 많이 들어봤을 법한 주제이다. 그러나 효력있는 부르심이라는 것도 별로 많이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또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것도 우리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이 설교단에서 설교자가 가르치질 않았거나, 혹은 열심히 가르쳤지만 여러분이 안들은 것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이러한 결과들이 결국 여러분이 받은 구원과 복음의 의미를 축소시키게 만들고, 여러분이 누려야 할 하나님 백성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가지는 구원의 은혜를 가려버리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교회에서 들었던 이야기이다. 한번도 교회를 안다녀본 청년을 청년부에 보내고 싶은데 그분이 하신 말씀을 그대로 옮긴다면 이렇다. “목사님, 새로운 청년을 청년부에 보내고 싶은데 하필 요즘 소요리문답 한다면서요?” 그러면서 멋쩍게 웃으며 가셨던.... 웃프지면 이게 현실이다. 그러나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영광과 확신과 기쁨과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는 구원론을 공부해야 한다. 우리의 지식 위에 확신을 세워야 한다. 오늘 양자됨에 대해 배울 것인데 이는 정말 많은 신학자들이 성경에 등장하는 교리들 중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매력적인 교리로 손꼽았다. 34문을 보자.
34문. 양자됨이란 무엇입니까?
답. 양자됨이란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의 행위로, 이것에 의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숫자로 받아들여지고 하나님의 아들들의 모든 특권에 대한 권리를 갖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어느 가정의 양자가 된다는 것의 개념이, 친자보다는 조금 못한 개념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당시 성경이 기록될 당시 로마사회에서 이 단어가 많이 사용되었는데, 이를테면 내가 아들을 낳았는데 이놈이 좀 별볼일도 없고 재능도 없다 싶으면, 다른 뛰어난 아이들을 내 양자로 데려오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그리고 그렇게 받아들여진 아들들은 친자와 동일한 상속권과 권세를 가진다. 다시 말해서 양자됨은 친자니 양자니 이걸 나누기 위함이 아니라, 자식의 권리를 온전히 가진다는 의미에서의 양자됨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품에 안아주시고 죄의 노예로부터 건져주셔서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하신다는 이 교리의 영광과 놀라움은 이루 형언할 수 없다. 양자됨의 결과로 신자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고, 자녀가 갖는 권리를 소유한다. 양자됨은 칭의 때문에 가능하다. 마치 부모가 자녀를 보호하며 이리 저리 살피며 위험 가운데 지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눈동자처럼 보호하신다고 성경은 말한다. 사람에게 있어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눈을 감는 것은 눈동자를 지키기 위한 본성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본성처럼 지키신다는 것이다.
우리 인생이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가 있다. 왜 그럴 때가 없겠나? 실패한 것 같은 순간들이 있다. 넘어질 때가 있다. 좌절할만한 상황에 놓일 때가 있고, 마음먹고 계획한 일들이 안될 때가 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우리가 아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지금도 나를 품에 안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를, 그리스도의 의를 성령께서 우리 안에 적용시켜주신 바 된 우리를,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들로 받아주셨기 때문이다.
3번을 보면, 제가 지난 시간 칭의를 설명할 때에도 동일하게 말씀드렸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자유로은 은혜의 행위이다. 무슨 의미인가? 자유로운 은혜의 행위, 자유롭다는 것은 조건에 메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께 뭔가를 했기 때문에, 내가 뭔가 받을만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잘해주셔야 한다는 이런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에게 뭔가를 먼저 받으셔서, 빚을 지셔서 갚으셔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예를 들어 누가 나에게 밥을 한두번 샀으면, 나도 언젠가는 밥을 한번 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관계에서는 그렇다. 빚진 마음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빚을 지울 존재는 없다. 왜?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나왔고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으며 모든 것이 주께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호흡, 우리의 생명, 우리가 가지고 누리는 이 모든 것들이 사실상 주님께로부터 나온 것이고, 주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 중 누구라도, 내가 가졌던 것을 전부 하나님께 도로 올려드리고, 내 시간과 정성을 하나님께 모두 드리며, 내 생명까지 해하면서 주님 앞에 절규해도 내가 하나님께 뭔가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는 인간에게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롭다' 라는 것은 곧 은혜의 행위이다. 자격도 조건도 없는 나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무언가를 주신다는 것이 은혜이다. 이것이 보상이나 거래가 아니라 은혜이다.
요일3:1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이 말씀을 펴두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는 것을 요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한다.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셨다. 어떠한 사랑이라고 할 때 이는 일반적인 보통 사랑을 말하는게 아니다. 일종의 감탄사이다. 하나님께서 아주 지극히 크신 사랑으로 우릴 그분의 자녀로 삼아주셨다. 이것이 은혜롭고 자유로운 사랑이며, 지극히 크신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하나 구분할 필요가 있는게 칭의와 양자됨의 구분이다. 칭의와 양자됨은 ‘신분의 변화’라는 측면에서는 동등하다. 신분적인 면에서 칭의와 양자됨은 같다. 칭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 되어서 우릴 의롭다고 하시는 것인데, 이는 우리 내면의 변화가 아니다. 우리 속사람이 바뀌는게 아니다. 속사람의 변화는 나중에 살펴볼 거듭남, 중생이다. 중생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새 마음을 주시는 것이다.
어쨌든 로마서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죄용서함을 받아 의인으로 받아들여진다. 칭의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여기시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에게 진노를 퍼붓는 대신 은혜 베푸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런데 양자됨은 여기서 조금 더 나간다.
이 자리의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창세전 선택을 받은 죄인들이 진노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운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단지 죄인에서 의인이 되었다는 신분의 변화 만을 말하는게 아니다. 진노와 저주를 쏟아부을 대상에서 죄의 사면만을 얻은 일반인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게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분의 사랑을 받는 아들딸이 되었다는 것이다. 마치 아버지가 자녀를 향해서 줄 수 있는 것이 사랑 밖에 없듯이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향하여 주실 것이 사랑밖에 없는 그런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까 펴둔 요일 3:1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랑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는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실 것이 사랑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잘아는 노래 중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라는 노래가 있다. 세상 사람들도 긍정적인 의미 때문에 이 노래를 좋아한다. 그런데 이 자리의 우리는 적어도 이 부분은 알아야 한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그에 앞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성령의 효력있는 부르심으로 인해 내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이지,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은 이 노래를 부를 수가 없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기 때문에.
이 순서를 반드시 기억하라. 하나님은 너를 사랑해, 하나님은 너를 기다려, 하나님은 너를 사랑해, 복음의 순서는 이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염없이 너를 기다리셔, 너가 언제든 돌아올 때까지 바보처럼 너를 기다려주실거야! 복음은 이게 아니다. 복음은 먼저 우리에게 진노와 저주를 쏟아놓는다. 우리에게 심판을 선고한다. 너는 하나님의 원수된 자야! 너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자야! 너는 공의의 하나님 앞에서 판결을 받아야 할 죄인이야! 그런데 이랬던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변화이다. 놀라우신 은혜이다. 그리고 이 놀라운 양자됨의 은혜가 칭의로 말미암아 이뤄진다. 양자됨이 먼저 오는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 이후에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는 것이다.
교재 6번에 하나님의 아들들의 숫자라 했다. 34문답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숫자로 받아들여진다고 설명한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 있다는 걸 전제로 하는 말이다. 그 숫자에 내가 들어갔다 이 말이다. 신천지는 본래부터 14만 4천명만이 구원받은 숫자라고 말해왔다. 그런데 웃긴게 지금 신천지 교인 수가 14만 4천명이 넘었다. 넘으니까 어떻게 말을 바꿨는가? 처음에 십사만 사천까지 될 줄 몰랐으니까 십사만 사천이라고 했다가 신천지가 부흥이 되니까, 교인 수가 14만 4천명이 넘어가니까 이제와서 알곡 14만 4천명만 천국에 간다고 교리를 바꿔버렸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자들의 숫자도 이렇게 상황에 따라 변동할까?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들의 숫자를 창세전부터 확고부동하게 정해놓으셨다.
엡1: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여러분, 작년에 아이유가 잠실종합운동장 올림픽주경기장에서 단독콘서트를 했다. 잠실종합운동경기장에서 그간 단독으로 콘서트를 한 가수로는 최초라고 한다. 이 올림픽주경기장 좌석수가 9만석인데, 그 중 한자리 예약하는 것도 하늘의 별따기였다고 한다. 자정이 딱 되자마자 광클을 해도 예약하는게 별따기여서 웃돈을 얹어 티켓을 거래하는 일들도 많았다고 한다. 여러분이 이 공연을 보고 싶은데 자리가 없다. 매진이 되었다. 얼마나 실망스러운가. 그런데 이 양자됨이라고 하는 교리는 비슷하게 예로 들면 하나님 나라에 우리의 자리가 예약이 돼 있다는 것이다. 이미 예약이 되어 있기 때문에 이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자정이 되기까지 광클을 준비할 필요가 없다. 어느 자격조건을 증명하기 위해 증명서를 뗄 필요도 없고, 내 편에서 준비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예약이 언제 된 건가 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된 것이다. 참 영광스러운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교재 7번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의 모든 특권을 누린다고 한다. 이 특권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누리시는 모든 특권을 나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헌금할 때 부르는 찬양의 가사이기도 하지만, 영원 전부터 삼위하나님께서 누려오셨던 그 친밀한 사귐, 그 영원한 사귐 속으로 우리를 초대하셔서 그리스도께서 누리시던 그 모든 영광과 그 아들됨의 권리를 우리도 함께 누리게 될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무엇과 관련이 있는 말인가? 양자됨이나 칭의나 부르심이나 그리고 앞으로 살펴볼 성화나 영화나 이 모든 것들은 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하는 큰 그림 안에 들어가 있는 것들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한다”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누리시는 모든 권리를 가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하신 아들을 보는 것처럼 저와 여러분들을 바라보신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자녀의 특권을 누리게 된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언제든지 주저함이 없이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는 권리
그러면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다. 과연 나는 하나님의 양자됨의 은혜를 받은 상태일까? 나는 지금 거룩하신 그분의 자녀라 할 수 있나? 우리가 양자 됨을 어떻게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가? 읽어보진 않겠지만 롬8 장 말씀을 보면, 성령님께서 우리의 죄된 행동의 패턴을 죽게 하시는 것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예전에는 아주 일사천리로 죄를 지어왔는데, 이제는 그게 조금씩 끊겨진다. 내 마음이 죄를 거부하기 시작하고, 죄를 미워하기 시작하고, 죄를 밀어내기 시작한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고 마귀의 자녀인 사람은 자기의 죄된 행동의 패턴이 죽는 것들을 경험하지 않는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죄를 죽이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양자됨의 은혜를 받은 자들에겐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 둘째로 갈4:6-7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우리에게 아들의 영을 주셨다. 그래서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하신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길 주저하지 않는다. 또한 성부하나님께 아버지로서의 의존하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것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물론 우리가 전능하신 하늘 아버지의 존귀한 자녀가 되었다 할지라도 이 땅에서의 비참함, 이 땅에서의 비극, 이땅에서의 실패와 고난은 멈추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자녀들을 때로 징계하신다. 히브리서 12장을 보면,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마다 다 징계하신다 한다. 징계하지 않는 건 사생자라고 하셨다. 어떻게 사랑의 아버지께서 자녀를 징계하실까 생각할 수 있지만, 오해하지 말라. 아버지는 자녀를 징계한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가 누릴 영광이 아직 온전히 오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 영광스러움은 아직 다 드러나지 않았다. 주님 다시 오실 날에 이루어질 그 영광의 날을 바라보면서, 그 순간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통해서 우리를 영광스러운 신분만 바꾸시는게 아니라 우리를 그 신분에 걸맞는 사람으로 빚어가신다.
영국의 왕가의 전통을 보면 왕인데도 군 복무를 한다. 왕이 될 사람들도 군 복무를 했다. 심지어 엘리자베스 여왕도 군 복무를 했어요. 여자신분임에도 불구하고 2차 세계대전 당시 비행기 정비인가 그 일을 했었다. 그리고 그 아들도 했고 그 자식 손주들도 했다. 왕의 자식이 왜 군대를 가나? 근데 영국은 그렇게 하니까 사람들에게 칭송과 존경을 받질 않나. 사실 존경을 받는 건 두 번째 문제고 그렇게 일반 백성들과 똑같이 자기들이 군대를 다 경험을 하고 그러면서 그들이 왕 다워지는 것이다. 왕이 고생을 1도 안해보고, 손에 물 한방울 안 묻혀보고는 왕 다워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주시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다운 영광의 모습들로 빚어가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삶의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어려움, 고난 고통스러운 현실은 뭐냐? “징계” 부정적 의미에서 징계는 내가 뭔가 잘못하면 하나님이 벌 주실 때 이를 징계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형벌이라고 그러지 않는다. 비슷한 의미임에도 형벌이라 하지 않는다. 왜? 형벌은 자녀에게 주지 않기 때문에. 이미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형벌을 다 받으셨으니까. 그래서 우리의 삶에 징계가 있다.
그러나 내가 잘못한 게 없이도 때로는 고난이 올 수 있다. 욥기의 이야기를 보면 영광스러운 고난도 있다. 우리는 인생 가운데 고난이 찾아오면, 내가 뭘 잘못했지? 하나님이 왜 날 때리지?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인생가운데 찾아오는 모든 고난이 징계인 것은 아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광스러운 자녀로 만드시려고 어떤 고난들을 주시기도 한다. 정말 잘 모르는 이유를 잘 모르는 고난이 있을 수 있다. 그럴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다. 왜? 이 고난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주시는 것이기에. 이 확신은 절대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이제 결론이다. 양자됨이라는 교리는 안전함과 확신을 주는 교리이다.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이셨다 할 때에 이것을 하나님께서 너 말 안 들으면 호적에서 판다! 이렇게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원히 불변하시는 결정 아래 우리를 품으시는 것이다. 불변하시는 하나님께서 정하셨는데 누가 우리의 구원을 취소할 수 있겠는가. 여러분을 사랑하는 자녀로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안전함과 확신을 누리라.
또한 이 양자됨의 교리라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그분의 자녀로서 아버지에게 나아가도록 우리를 위로하는 교리이다. 기도 생활에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제가 체면이 없어서 기도를 할 수가 없어요!” 그런 말 하지 말라. 자식은 원래 체면이 없는 것이란다. 여러분이 자녀이기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삶의 어떤 자리에서든지 하나님께 나아가실 수 있다. 고난의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죄를 범하여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는 경우들도 있지만, 때로는 이 일들을 통하여 나를 더욱 하나님 자녀로 빚어가기 위하여 주시는 경우들도 있다. 인생 속 잘 될 때 하나님의 은혜라고 쉽게 고백한다. 그런데 인생 속 고난을 만날 때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경우는 거의 못봤다. 잘 나갈 때의 믿음의 고백도 중요하지만 고난 중에 드리는 믿음의 고백이 훨씬 더 힘이 있다. 내가 전능하신 아버지의 아들이기에, 지금 이러한 고난의 상황에도 그 선하신 손길이 여전히 자녀된 나를 붙들고 계심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이 말씀하는 이 교리를 마음에 새기라.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한 자는 의롭다 여김받았고, 양자됨의 은혜를 받은 자이다. 만일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마음 가운데 영접하였다면 여러분에게는 칭의의 은혜와 함께 거룩하신 하나님의 양자로 받아들여지는 은혜가 임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사랑받는 자녀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지위를 잊지 말라.
또한 아직 이 자리에 예수를 영접하지 않은 분들도 계실 것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은혜를 누리기 위해, 이 모든 일들을 우리 마음 가운데 일으키시는 성령님께 간구하라. 성령께서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셔서, 나를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불러주셔서 주님을 영접하도록, 믿음이 생기도록, 주님을 의지하도록 붙들어 주시기를 간구하라.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실 것이다.
우리 이시간 함께 잠시 통성으로 기도하자.
내 마음에 양자됨의 은혜를 매순간마다 누릴 수 있기를(늘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그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는 내가 되길)
아직 양자됨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성령께서 그들의 마음 가운데 효력있는 부르심으로 역사하여 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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