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살리다

가나안 정복작전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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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합, 인생역전, 인생도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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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2:1-24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밤의 여인에게 찾아온 밝은 빛)
주제: 은혜의 빛, 생명의 빛, 새 사람, 어두움에서 빛으로.
인생 도약, 인생 역전, 어둠에서 빛으로,
미국 노숙자, 목소리로 성우로 인생 역전.
https://mindessay.kr/132
https://youtu.be/CmHH-ldaLZE
본문에는 라합이라는 여인.
가나안 민족의 기생에 불과했던 라합이 하루 아침에 새생명의 대명사가 되었을 뿐 아니라 마1:5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인생 역전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녀가 그처럼 극적이고도 최고의 사람으로 변모할 수 있었던 요인이 무엇인가?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이처럼 기가막힌 변화를 체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여호수아는 여리고성을 공략하기 전 먼저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그들이 여리고성에 도착해서 마침 유숙하게 된 곳이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이었습니다. ‘기생’이라는 히브리 단어(zonah)는 신약성경에서는 ‘pornos’라는 단어로 사용되어 ‘음행하는 자’(고전5:9.10,11; 엡5:5; 딤전1:10)를 말합니다.
소위 자기 몸을 파는 기생이었던 라합의 집에 남자들이 드나드는 것은 일상사였기 때문에 정탐꾼들은 그녀의 집으로 숨어 들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동편 땅을 차지한 것을 알고 있었던 가나안족속들로서는 긴장 속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경계태세를 바짝 조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여리고 왕은 곳곳에 배치해 둔 감시자의 눈과 귀를 통해 라합의 집에 낯선 남자들이 들어갔다는 첩보를 입수하게 됩니다.
여리고 왕은 즉시 군인들을 보냈지만 라합은 두 사람을 이미 숨긴 채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나가서 어디로 갔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급히 따라 가면 잡을 수 있을 겁니다”(5)라고 둘러댔습니다.
라합이 거짓말로 두 정탐꾼을 보호했다고 해서 거짓말을 해도 된다고 해석하면 곤란합니다. 이단이기보다는 사이비 신천지의 경우 추수꾼으로 남의 교회에 몰래 잠입한 채 온갖 거짓말로 자기를 감출 뿐 아니라 기존 성도들을 현혹시킵니다.
그들은 그런 거짓말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데, 이른바 “모략”이라는 용어로 거짓말을 합리화 시킵니다. 이에 대한 성경적 근거로 오늘 본문을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거짓말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십계명 중 9계명에서도 ‘네 이웃을 해하려고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라합의 거짓말은 범죄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라합의 경우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의도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라합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서 야고보서 2장 25절에는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라고 그녀의 행동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라합은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요?
어쩌면 그들이 정탐꾼이었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때, 그리고 여리고 왕이 보낸 군인들이 도착했을 때, 그들을 넘겼더라면 그녀의 인생은 어땠을까요?
우리나라에서 간첩을 신고하면 포상금이 어마어마했던 시절처럼 여리고 왕에게 칭찬과 명성과 재물을 얻어 성공적인 삶을 꿈꿀 수 있지 않았을까요? 늘 남자들을 상대하며 사는 인생을 깨끗이 청산하고 이제는 간첩을 신고하고 팔자고칠 수 있을 법한 상황이었음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도 어째서 라합은 자기 민족과 조국을 등지고 정탐꾼들을 살려주는 편을 택한 것입니까?
9절에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고 그 이유를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라합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성 여리고는 이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시기로 정하셨다는 사실을 안다는 말입니다. 이미 멸망할 성이었던 여리고에 그녀가 미련을 두지 않았던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라합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애굽에서 나올 때 홍해를 마르게 하신 일과 요단 동편 땅의 아모리 족속을 전멸시킨 소식은 이미 여리고 성에 파다하게 퍼져 있는 까닭에 모두가 심히 두려움에 떨고 있으며 간담이 녹아내릴 지경이라고 했습니다.
라합은 비록 자기 인생의 기반이 되었던 여리고를 의지해서 살았지만, 그녀가 전해 듣게 된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인하여 더 이상 여리고가 아닌 참된 능력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기로 서원하고 결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영원하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우선 우리 인생이 영원하지 못합니다. 이 땅에서 영원히 살아낼 능력도 재주도 없습니다. 복제인간을 통해 영생을 꿈꾸기는 하지만 그런 꿈과 이상을 가진 것이 어디 한 두 해였습니까? 인생은 결코 영생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일전에 5월 말일에 서울에 미사일 대피 경보문자가 발송되어 잠시 혼란을 겪은 일도 있었습니다. 엘리뇨와 라니냐 같은 이상기후나 혜성충돌과 같은 일이 아니더라도 그저 핵전쟁 하나만으로도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저 끝나버리고 말 장망성과 같지 않습니까?
영원할 수 없는 것을 마치 영원한 것처럼 착각하고 그것을 의지하고 사는 것은 참 어리석은 인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핵전쟁 경보문자에 간담이 녹고 정신을 잃는 삶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까지 벌하실 수 있는 궁극적인 심판자요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참된 신자로 서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때 창녀라는 최악의 신분을 가진 자도 복음으로 살아나서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는 놀라운 은혜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붉은 줄, 십자가 영생 구원.(12~
하나님만이 생명이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만이 살길이라는 확신은 라합으로 하여금 정탐꾼들을 돕게 했습니다.
그래서 라합은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고 청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집’이란 그 가문을 말하는 것인데, 13절과 같이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달라’는 청이었습니다.
이에 정탐꾼들은 ‘우리의 목숨으로 너희를 대신할 것이요 인자하고 진실하게 너를 대우하리라’(14)고 약속해주었습니다. 여기 ‘인자와 진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 관계를 말할 때 자주 사용된 단어인데, 정탐꾼들은 하나님의 인자와 진실함을 받은 자들로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인자와 진실로 너를 대우할 것이라고 화답해 주었던 것입니다.
라합은 온 성이 스파이를 찾겠다고 소란스러운 상황에도 담대하게 정탐꾼들이 탈출할 방법을 소상히 일러주었습니다(16). 라합의 구조행위는 시종일관 매우 자세하고 또 철저했습니다. 어영부영 대강 대충이 아니라 치밀하게 끝까지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이어 라합은 창문에서 줄을 달아 내렸습니다. 당시 여리고 성은 성벽 두께가 4~5미터나 될 만큼 두꺼웠기 때문에 성벽 위에 집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15절에 ‘그의 집이 성벽 위에’ 있었다고 한 것입니다.
라합을 통해 창문에 드리워진 붉은 줄은 정탐꾼들의 생명줄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침공할 때 붉은 줄을 매어 놓은 집 안에 있기만 하면 누구든지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약속의 징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붉은 줄을 매단 집 밖으로 나간다면 그 사람의 생명은 결코 책임질 수 없다는 약속이 세워진 것입니다.
결국 라합이 받은 구원의 징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붉은 줄이었습니다. 21절에 정탐꾼들을 탈출시킨 라합은 붉은 줄을 창문에 매고 여호와께서 구원하시는 그 날을 소망했던 것입니다. 붉은 줄에 대해 무관심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사람들에게 이런 저런 질문이나 추궁을 당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라합에게는 그 어떤 질문이나 추궁도 주요 관심사가 아닙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언제 일어날지 모를 여리고 멸망의 날에 구원의 징표로 받은 붉은 줄을 사수하는 그 일에만 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여리고성을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바로 그 날에 어찌하든지 부모님과 형제자매, 그에 속한 자손들을 불러 모으는 일만이 라합의 삶에 최대 관심사였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 붉은 줄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붉은 피, 십자가 대속의 붉은 피를 의미합니다.
예수 십자가 대속의 피야말로 죄로 인하여 죽은 자와 방불한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확실한 구원의 증표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얼마나 자주 넘어지고 반복적인 죄악에 빠져 허우적댑니까? 도무지 또 다시 같은 죄로 회개하기가 민망할 만큼 얼마나 못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까?
아마 하나님께서 인생과 같다면 벌써 포기하고 떠나버릴 것이 틀림 없을테지만,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인생과 같지 않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이 어떠합니까? 여전히 죄의 본성에 매여 허덕이고 실패하고 넘어지는 인생을 위해 자신의 독생자까지도 아낌없이 내어주실 만큼 그 인자와 진실이 영원하신 분이지 않습니까?
그저 말로만 약속하신 것도 아니고, 썩고 사라져버릴 문서에 약속하신 것도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붉은 피로 물든 십자가로써 당신의 구원의 증표를 우리에게 주셨는데, 이보다 더 진실한 증표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 날까지 우리는 이 교회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인자와 진실하심의 증표인 예수 십자가만을 굳게 붙들고 살아갈 때 새로운 인생을, 역전의 인생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붉은 십자가를 굳게 붙들고 예수님과 함께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저 주일에 잠시 예배당에 나와서 머리 숙이면서 십자가 밑에 나아왔다가 엿새 동안에는 자기 마음대로 여리고 성을 활보하고 다니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에 Sunday Christian이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이 말은 주일에만 기독교인처럼 보이는데, 나머지 엿새 동안에는 전혀 구별되지 않는 신자들을 지칭하는 부정적인 표현입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제발 Sunday Christian이라도 되어달라고 애원하는 형편인 것 같습니다. 제발 주일만이라도 예배당에 나와서 함께 예배드려주기만 해도 감지덕지인 것 같은 형국입니다.
하지만 그런 교인이 모인 교회가 과연 가나안을 정복하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인자와 진실하심을 힘입어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천만에 말씀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의 확신을 얻었으면 바로 그 순간부터 매일 매순간마다 확신의 증표인 십자가를 붙들고 오직 구원하실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는 말씀처럼 주일 예배만이 아니라 월화수목금토 엿새까지도 매순간 십자가의 은혜를 붙잡고 주님을 의식하고 기록된 말씀대로 살아내려고 애쓰고 분투하는 산 제물로 자신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녀와 가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십자가 밑에 나아와 구원의 은혜를 받았지만, 내 자식은 아직 어리니까, 내 자식은 아직 고3이니까, 내 자식은 아직 사회에서 자리를 잡아야 하니까, 내 자식은 아직 육아에 힘든 시기이니까 조금만 내버려 두었다가 나중에, 언젠가 십자가 밑으로 부르면 되겠지...
아니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언제 주님께서 다시 오실지 누가 알겠습니까? 또한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연약한 인생이 어찌 내년을, 몇 년 후를 기약할 수 있겠습니까? 부모에게 자기 자식은 늘 어려보이지만, 실상은 머리가 커지고 난 후에는 더 이상 부모의 훈계를 들으려 하지 않는 때가 되고 말 것입니다.
부모님을 자식 된 사람이 어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가? 믿으시면 너무 좋은데, 그렇지 못해도 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의 효성을 재점검하거나 천국신앙을 재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부모님이 언제까지 이 땅에 살아계실 것 같습니까? 한순간입니다. 이 세상 이별하는 그 날, 심판의 자리를 피하고 영원한 구원과 안식의 나라에 들어가시도록 부모님 전도에 최선을 다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이 찬송의 가사처럼 예수 십자가 외에는 장망성 세상이 무너지는 그 날에 구원을 얻을 길이 없습니다. 생명을 얻을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바른 종말의식을 가지고 십자가 밑을 결코 떠날 수 없다는 굳은 결심과 결단은 당연히 멸망의 땅에서 새 생명을 얻게 할 것이며, 저주 받은 그 자리를 축복의 자리로 변모시킬 것이 틀림없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라합은 어떤 존재였습니까? 그저 이방민족의 창녀에 불과했던 존재였습니다. 캄캄한 밤에 어둠 속에서 살던 인생이었습니다. 그랬던 그녀가 하루 아침에 선민 이스라엘 백성의 지위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예수님의 선조가 되는 영광스러운 존재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딱 4명의 여인 이름이 나오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기생 라합이었습니다. 창녀였던 자가, 어둠 속에 활동하던 자가, 하루 아침에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족보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으니, 이처럼 천한 신분에서 영광스러운 자리로 인생역전을 이룬 사람이 또 누가 있겠습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히11:31에서 라합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라합의 인생역전은 곧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녀의 인생역전은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굳게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드라마 재벌집 아들처럼 지나온 과거에 환생해서 땅을 사거나 주식에 투자해서 벼락부자가 되어 자기 인생을 극적으로 바꾸기를 바라는 것이란 정말 헛된 꿈일 뿐입니다. 쌍윤달(?) 이장? 조상의 무덤을 이장해서 조상 덕 좀 보겠다는 시도, 비싼 굿을 해서 자기 운명을 바꿔보겠다는 것은 저주받은 인생의 걸음을 답습하는 것 외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진짜 인생역전은 그런 유한한 것이 아닙니다. 잠시 사는 이 세상에서만 누릴 그런 지위나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인생역전은 죄악 가운데 살던 인생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요, 지옥 멸망이 임박한 이 세상에서 극적으로 구원받아 영원한 천국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유한한 인생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이것이야 말로 진짜 인생을 탈바꿈한 인생역전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차피 망하게 되어 있는 세상이 우리 삶의 전부인 양 좇아다니지 말고, 오직 우리 인생을 완전히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인자와 진실의 증표인 구원의 십자가를 굳게 붙듦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이 교회를 중심으로 영원한 생명과 천국을 얻은 인생역전의 주인공들이 모인 공동체로 영원히 함께 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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