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813 시 144;9-10
0 ratings
· 13 views새 노래로 그분을 노래하라
Notes
Transcript
Handout
그분을 노래하라
그분을 노래하라
<서론>
오늘 시편 마무리다. 시편과도 이제 정이 들어서 조금 헤어진다는 것이 조금 아쉽기도 합니다. 하지만, 언제든 우리가 만날 수 있듯이, 시편 말씀도 항상 가까이 하면서 우리 영의 살이 되고 등이 되고 빛이되는 그런 성경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시편을 마무리 정리하면서,,,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한 분을 가리키고 있고, 우리는 그 분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의 질고와 아픔 속에 위로와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새 노래로 주를 찬양하며 열줄 비파로, 자신의 주 특기인 악기로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다윗은 말합니다. 그는 구원을 베푸시고 그의 종 다윗의 원수들로부터 구원하시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새 노래로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살펴보며 우리 삶에 적용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새 노래는 새 노랜데, 새 노래는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말 그대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늘 하나님을 새롭게 찬양한다는 뜻이고, 또 하나는 한분을 향한 뜨거운 열망과 사랑으로 찬양하는 마음으로 새 노래라는 단어를 성경은 두루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후자의 의미에 좀더 집중하여서 시편이 본래 의도하는 새 노래의 주인공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는 새 노래라는 큰 타이틀 안에서 그는 누구시며, 왜 그가 새 노래의 대상이 되셔야 하는지, 시 110 말씀을 가지고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배경>
다윗은 왜 이런 왕의 찬가를 불렀는가? 어떤 상황이었고, 어떤 뜻으로 이 본문을 노래한걸까? 다윗은 왜 여호와와 주님을 따로 불렀는가? 다윗도 하나님을 알고 주님을 알았다는 것은, 이미 그때부터 삼위하나님을 체험했다는 뜻이다. 그가 삼위하나님을 알 수 있었던 배경과, 그에게 삼위하나님은 어떤 의미로 있었던걸까?
다윗은 영적인 왕이었고, 세상 왕들과 같이 육신을 쫓아 행하지 않고 성령을 쫓아 행하기를 즐겨했다. 사무엘하 23장 2절에 보면,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라고 다윗이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세상 왕들과 달리 영적인 왕이었다. 이미 여호와의 영에 감동되어 말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을 쫓지 않는 세상 왕들을 원수로 표현했다. 그래서 레위계열 아론제사장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께로부터 오시는 멜기세덱의 반차, 즉 그 족보로 오신 메시야 주님을 이미 알았던 것 같다. 늘 하나님과 동행하다보니, 하늘의 신령한 것들을 알았을 것이다. 이 땅의 원수되고 왕된 자들은 그래서 육신적으로, 겉으로는 구별되지 않지만,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영적인 세계를 거부하는 자들이다. 다윗은 영적인 세계, 차원을 말한다. 멜기세덱의 서열이라고 하는, 이 땅에서는 절대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하늘의 신비를 다윗은 말하고 있다.
<본문>
마 22:45, 시 110(핵심) - 그가 주인이신 결정적인 이유.
1절 말씀에 다윗이 말하는 내 주는 누구일까요? 이 시편은 신약에 17~18번 인용될 정도로 매우 유명한 메시야 구절이다. 메시야 시편이다. 예수님도 인용하셨고 베드로도 바울도 인용하여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했다. 예수님은 메시아와 다윗의 주님의 정체에 대해 종교 지도자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이 질문은 마태복음 22:41-46, 마가복음 12:35-37, 누가복음 20:41-44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다음은 마태복음 22:41-46(ESV)의 구절입니다.
마태복음 22:41-46 찾아서 읽어보겠습니다.
41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질문하여 42 이르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가 누구의 아들이냐 하시니 그들이 그에게 '다윗의 자손입니다.' 43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다윗이 영에 감동하여 그를 주라 부르며 이르되 45 그런즉 다윗이 그를 주라 칭하면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46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아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놀라운 지혜를 보고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 다윗의 자손이 다윗의 주인이 되신다는 사실은 꿈에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단순히 다윗 자손의 후손, 계통인줄만 알았지, 진짜 하나님이심을 알지 못했다. 이 때 예수님이 오늘 이 시편 110편1절을 인용하신 것이다. 이 말씀을 봐라, 다윗이 그리스도를 보고 주라고 칭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어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 라고 하십니다. 다윗이 주라 칭한 내가 어찌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율법에는 능통하나, 성령이 없고 이웃사랑이 없는 그들은 예수님을 육신으로만 다윗의 후손으로 알았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것입니다. 그가 생각하는 메시야는 하늘에 번개같이 임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다윗은 고백했죠. 여호와가 내 주인에게 말씀하실 것이다.... 정말 이 말씀은 너무나 놀라운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이런 그리스도를 유대인 너희들이 못 박았지 않았느냐? 그러나 마음에 찔림을 받고 회개하고 그를 이제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은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설교하고 수천명이 회개하는 역사도 있었습니다.
이미 다윗은 그를 주라 칭하였습니다. 110편을 인용하여.... 그러니 시편의 결론도 결국은, 다른 성경들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다. 다윗이 아닙니다. 내가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다윗 언약으로 그의 육신의 혈통이지만, 그가 이미 나를 주라고 불렀다… 히 7장에 보면, 그 이유가 나오죠, 예수님은 레위 계통의 육신의 제사장이 아니라, 온 인류의 영원한 죄 문제를 해결해주실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오신 하늘의 제사장 중보자라고 하는 사실을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말씀해줍니다. 따라서 그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요, 동시에 하나님이 세우신 영원한 제사장중보자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세상 끝날, 여호와의 권능의 날에에 주께서 여호와의 오른 편에 앉아 계시다가 그 날이 이르면, 이 땅에 내려와 세상의 악한 왕들을 다 심판하신다고 합니다. 이 때 주의 백성들이 해야 할 행동은 3절말씀입니다. 그 날에는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고 합니다. 중간이 없습니다. 우리의 입장은 거룩한 옷(롬 13:14)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는 주의 백성들이며, 새벽이슬같이 나아가는 청년들임. ‘주의 백성’이란 그리스도의 권능의 통치로 말미암아 그 완고한 심령이 깨지고 새롭게 변화를 받은 성도를 의미합니다. 새벽이슬은, 이슬이 매일 새벽마다 새롭게 맺히듯이 메시아로 인하여 날마다 새로운 영적 활력을 가진 자로서 주의 백성의 면모를 설명☞ 하나님은 자원하는 헌신을 기뻐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마직날에 세상 왕들이 아니라, 하나님 오른편에 계신 그분께 나아가야만 하는 이유는, 그가 아론의 반차가 아니라 멜기세덱, 즉 하늘의 족보를 따라 오셨기 때문이라고 함. 영원한 속성을 가진 제사장이라면 우리를 구원해주실 조건과 권능이 되시기 때문.
적용점 : 우리도 하늘 시민권이 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르는 하늘의 백성들입니다. 이 세상, 이 땅의 것을 쫓아가지 말고 그리스도가 말씀하시듯, 영원한 것을 쫓아 행해야 합니다. 영혼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쫓아 행하지 말고, 구원, 영생과 같은 가치 있는 것들을 위해 스스로의 에너지와 몸과 마음과 생각을 써야 합니다. 세상 것을 쫓다가 그들과 똑같이 멸망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이나, 교회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에 뭘 좀 더 좋은 곳에 숙박을 해볼까, 이번엔 뭘 좀 더 좋은 걸 먹어볼까, 이번엔 뭘 좀 더 좋은 걸 볼까보다.... 그것은 잠시 뿐이기 때문에, 좀더 영원한 가치에 우리의 힘을 쓰도록 합시다. 늘 가치 없는 것에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다보니, 늘 남는 것은 배설물이고, 후회와 탄식, 그리고 서로 간의 남탓 밖에 남지 않는 것임. 영원한 가치를 보고 투자하는 것은 지금 당장에는 눈에 보이지 않아 변화되지 않는 것 처럼 보이지만, 언젠가 하나님의 때가 되면 열매를 맺고 결실을 맺게 될 것임. 밀알도 마찬가지죠. 땅에 심기어져 있을 때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햇빛을 주시고 물을 주시면 무럭무럭 자라 어느새 큰 나무가 될 것이며 또 다른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원리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인스턴트 신앙이 아닙니다. 슬로우 영성이라는 말처럼, 확확 변화되고 화려한 것에 우리의 눈과 귀와 입을 닫는 연습을 하고, 좀더 영적인 것들 spiritually('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롬12:1), '육체에 상응하는 영혼에 관계된 것'(롬15:27),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이뤄지는 신령적인 것'(고전2:13; 14:12), '거룩하고 신령한 관점에서'(계11:18)한 것들에 우리의 눈과 귀와 입을 맞추는 연습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항상 누굴 만나던지, 무엇을 하던지, 무엇을 먹던지, 하나님의 신령한 것들을 나누고 기도하고, 그런 것들을 보고,,, 바로 이런 것이 주의 백성, 새벽 이슬 같은 청년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교훈 : 주의 백성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이 중요한가? 세상 쫓다 멸망당하지 말고 영원한 것을 쫓아 행하라는 것이죠.
따라서 그가 새 노래의 주인이 되신 가장 첫번째 이유는, 시편이 그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율법과 시편과 선지자의 글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씀이며, 이와 같이 예수님은 시편을 자주 노래하셨다. 말씀이신 그분이 말씀을 노래하시고 그 말씀은 또한 그분을 노래합니다. 따라서 복음서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나타내는 시편이 50번 이상일 정도로 정말 많은 곳에서 시편은 예수님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특히 마 26:30 에는 예수님이 떡과 잔을 나누시고, 감람산으로 찬미하며 나갔다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찬미가 바로 시편을 노래하시는 예수님을 뜻합니다. 그만큼 늘 그는 기도만 아니라, 시편으로 찬양하기를 즐겨했고, 항상 시편을 노래했다. 삶으로 그 말씀을 노래했다.
눈 여겨 볼 문제는, 뭐냐면, 정말 다윗처럼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생각하느냐 하느냐는거에요.
그가 새 노래를 받기에 합당하신 두번째 이유는, 바로 그가 영원한 제사장과 왕이시지만만, 우리의 아픔을 함께 공유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그의 자손, 레위와 아론보다 훨씬 위대한 제사장 멜기세덱을 통해 하나님의 복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도 역시 레위와 아론의 제사장이 아니라, 의와 평강으로 우리를 축복하시는 훨씬 더 우월한 제사장이자 왕이신 그분이 필요합니다. 더 위대하신 그분이 이미 제사장이자 왕이자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로서 이 땅 가운데 마침내 오셨습니다. 우리 죄를 속죄하기 위해 단번에 돌아가신 그분은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셨고 영원히 살아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하고 예배하는 가운데 그분을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가 영원한 제사장이신 이유는
첫째로, 그는 영원히 살아계셔서 자기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애쓰는 자들을 위해 끊임없이 중보기도하십니다.
둘째로, 그 중보기도는 효과적이기 때문에 그분은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셋째로, 그는 백성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해 모든 면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히 4:14-15)
히 2:18 ,, 바리새인들은 인간 예수밖에 이해못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자, 인간의 몸으로서 인간의 죄와 고난을 고스란히 받으셨다. 그는 고난 당하셨고, 우리의 고난을 다 아시기에,, 우리도 시편에서 우리의 고난을 발견할 때 그 고난을 그분에게 가져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고난 가운데 찬미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아픔과 질고와 고통을 도무지 알지 못하셨을 것이고, 우리를 동정하실 줄 모르시며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실 수 없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우리의 고난도 똑같이 다 감내하시고 동시에 그만 하실 수 있는 영역들을 완전히 나타내시고 이루셨다.
그래서 우리는 시편이 노래하고 시편을 노래하고 시편에 의해 노래 되시는 그분을 노래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편의 주인이 다윗인줄만 알지, 예수 그리스도이신줄은 모릅니다. 그러니 바리새인과 같이 그런 질문들을 합니다. 예수님이 누군지 모르겠다… 제가 10년 전 쯤인거 같은데, 한 자매가 새가족부 확신반 하는데, 새가족부원인데, 목사님 앞에서 가장 기본적인 질문, 새가족도 하지 않을 질문을 목사님께 하는 것을 보고 경악을 했습니다. 정확한 질문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새가족도 알법한 그런 질문을, 새가족이 아닌, 그 분이 하는 것을 보니, 정말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왜냐면, 그 자매는 누구나 다 아는 자매였고, 모태신앙이고, 누구나 다 알고 오래다니고 항상 주일이면 빠지지 않는 청년이고, 늘 이야기 하는 그 30년 동안 교회 다닌 그 모태신앙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왜 다윗은 그가 주님이신줄 알았으나, 바리새인들은 그를 주라고 알지 못했을까요? 바로 그분만이 하실 수 있는 능력들을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령이 없이 말씀만 가진 사람들의 특징이다. 교회를 오래 다니고도 복음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여전히 기쁨이 없이 지치고 힘들게 신앙생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샛째로, 그가 노래받기에 합당하신 이유는, 시편 24편 3-5절말씀처럼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영역이 있고 그 의로움은 예수님만 완전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의로움을 은혜로 받기만 할 뿐, 그런 존재일 뿐, 나의 공로나 나의 의지로 바뀌는 것은 이 땅에서 잠깐의 삶이다. 그것이 모든 것인냥 살면 이 땅에서, 이 육신을 벗어나지 못한 삶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중간 중간 이런 메시야의 능력을 바라보지 못하고, 그냥 글로서 읽고 내 삶에 아무런 영향력이 없는 글자책으로 이 성경을 대하기 때문에 바리새인과 같이, 믿기는 믿고 오래 다니긴 다녀도 기쁨이 없고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조명해주시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가 하늘에에 속한한 제사장으로서서 이이 땅에에 내려오시지지 않고고 하늘에만만 계셨다면면,,,, 다윗의의 자손은은 커녕녕, 우리의의 죄 해결은 해결되지지 않은은 채채 여전히히 우리는는 절망망 속에에 이이 땅에서서 죽지지 않기기 위해해 발버둥둥 치는는 그런런 불행한한 삶을을 살고고 있을을 것입니다다. 그러나나 그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이 그를 그의 오른편에 앉히셨기에,. 따라서 그분만이 우리 영혼의 죄사함과 구원을 가능케 하시는는 영원한한 제사장이십니다다. 만약 영원성이 없는 분이라면, 우리의의 구속주가 되실 수 없으심.
딤후 2:10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구원은 영원한 것임. 따라서 세상 왕들이 쫓아가는 육신의 정욕을 따라 행하지 말고 성령의 소욕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함. 구원을 위해 살아야 함. 구원을 이루어야 함. 그것은 곧 영원한 제세장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임.
<마지막>
그러나 시편은 늘 새 노래를 강조한다. 새 노래가 무엇인가? 그분의 완전한 통치를 꿈꾸며 바라보며, 또한 참여하는 노래이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처럼, 다윗에게만 아니라, 우리 전체에게 해당한다. 주께 새노래를 부르고 찬양합니다....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시기 때문입니다.
3. 시 144:9-10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새 노래를 부르며 열 현 비파로 주를 부르리이다 그는 승리를 왕들에게 주시고 그의 종 다윗을 잔인한 칼에서 구원하시는 이시니이다”
여기서 "새 노래"는 복음이 가져다주는 새로움과 변화를 상징할 수 있습니다.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새 노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궁극적인 성취를 찾습니다. 죽음에 대한 그분의 승리는 궁극적인 승리이며, 신자들은 그분을 통해 구속과 은혜의 새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칼에서 구출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죄와 죽음의 영원한 결과로부터 구출하신 것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계 5:9-14 새 노래는 그 분의 다시 오심을 바라보며, 그분의 완전한 통치를 꿈꾸며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백성을 구원하시고, 성도는 천국의 새 노래에 참여한다.
계 14:3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시 98:1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
그래서 그는 시편을 노래하신 분이다. 시편이 그를 가리키고, 그분을 노래하는 그분의 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노래해야 한다.
새 노래는 이처럼 구원 받은 백성들만이 천국에서 부를 수 있는 노래고,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어린양을 찬양하는 노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께 있도다… 이런 찬양입니다. 현대 음악으로 찬양한다고 전부 새 노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감정이 고양되고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는게 아니라, 정말 창조주 하나님, 삼위 하나님의 인도하심, 성령님의 임재, 구속하신 하나님 이런 찬양들 가운데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유일성, 절대성, 영원성 등을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도 찬미하며 나아갔다고 합니다. 삶이 시편의 말씀 그대로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저 천국에서만 새 노래를 부르는 자들이 아닙니다. 부르는 노래가 새 노래가 아닙니다. 이 땅에서도 새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이 땅에서 새 노래를 부르는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적용 및 결론
이번 주 이제 여름수련회가 있습니다. 세상 친구들은 무슨 그런 노래를 하느냐, 하나님이 밥 먹여주냐고 거들먹거리고 핀잔주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그의 왕되심과 중보자 되심, 그의 통치와 다스리심을 찬양하기를 바랍니다. 많이 준비하고 기도하지만, 저는 가장 이상적인 수련회는 정말 내가 아는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그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찬양도, 기도도, 내 뜻대로 하는게 아니라, 주의 백성, 청년들처럼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놓고 찬양하고 기도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하늘에 계신 보좌 우편에 계신 어린 양을 찬양하는 노래이나, 동시에 그가 곧 다시 오셔서 우리게 좌정하시고 이 땅에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통치하실 완전한 하나님 나라 ,세상 왕들 심판하시시고 그의 백성과 헌신하는 청년을 구원하실 그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그것이 새 노래 아니겠습니까?
이 새노래로 이번 수련회 때 우리의 믿음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찬양해야지, 시편이 말하는 그분을 알아야지, 맨날 내 문제 해결만 위해서 찬양하고 눈물흘리고 기도하다보니까, 수려회 끝나고 뭐예요? 또 내 현실가지고만 찬양하는 거 아닙니까? 이런 자세야 말로, 예수님을 진짜 하나님으로 믿지 못하고 인간 다윗의 자손으로 알던 바리새인들과 다를게 뭐가 있겠습니까? 율법을 평생 낭독하고 외우고 해도 시편이 말하는, 다윗이 주라고 말한 그 분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바리새인들이나, 교회를 20년 30년 다녀도 교회만 다니고 변화되지 않는 삶이나,,, 똑같은거 아닙니까?
그래서 내 주님이 누구신가? 분명하게 알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멀리 갈수록 돌아오기 힘들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일 것입니다. 내 주님이 누구신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께 분명하게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어쩌면 평생 내 뜻대로 내 중심성, 내 교만으로만 살다가, 끝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원한 것을 놓고 살아야 합니다. 그는 레위아론의, 즉 육신의 제사장 반차가 아닙니다. 하늘에서 지명하신 영원한 제사장, 중보자, 왕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 영원한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리심을 찬양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처럼 그분의 통치와 다스리심을 바라보며, 그의 주권을 바라보며, 그의 다시 오심과 심판을 바라보며 예수 그리스도를 노래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별첨, 장만>
주권, 왕, 통치, 심판, 멜기세덱의 반차, 오른쪽
주권, 왕, 통치, 심판, 멜기세덱의 반차, 오른쪽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110편
〔다윗의 시〕
110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2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3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5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의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라
6 뭇 나라를 심판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깨뜨리시며
7 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므로 그의 머리를 드시리로다
<본문개요>
주어 : 여호와
목적어 : 주(행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
동사 : 심판, 주(그)를 오른편에 앉히시고 마지막 날에 그의 머리를 드심
왜? : 원수들, 세상 왕들, 머리들을 밟으시고 깨뜨리시려고
현상 : 주의 백성과 청년들이 헌신하며 나아옴
두 세력이 있음 : 세상 왕들 vs 주의 백성들
왜 그를 높이시는가? :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기 때문에
<질문>
멜기세덱의 서열을 알아야 하고 - 땅의 호칭은 살렘 왕이나, 평강의 왕과 의의 왕은 하늘의 것임. 땅의 속한 속성이 아님, 신적 속성이라는 말임.
영원한 제사장을 알아야 함 - 멜기세덱의 반차
세상 왕들은 누군가? 마귀, 그 수하들
왜 오른쪽에 앉히시는가? 부활 승천 후 오른편에 앉게 하심
하나님은 세상 왕들에게 왜 노하시는가? 우상을 숭배하며, 하나님을 대적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눈에 보이는 것들로 유혹하기 때문(돈, 섹스, 권력)
다윗은 당시 어떤 상황이었으며, 어떻게 삼위하나님의 개념을 알 수 있었는가? 하나님 나라의 왕은 모든 것을 알아야 하기에, 하나님이 미리 말씀해주심?
그렇다면 멜기세덱의 서열이란 뭔가?(히 7)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제사장 직분은 하나님 나라에서 꼭 필요한 직분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을 도모하기 때문에,,, 예수는 인간의 족보로는 마리아에게서 나고, 왕은 다윗에게서, 선지자는 모세에게서 나지만, 제사장은 좀 다름. 왜? 인간의 영혼육의 구원은 일반 제사장으로 안됨. 아론의 서열을 따라서는 영원한 속죄가 불가능 함. 아론제사장의 서열은, 일시적인 속죄함의 효과만 가능하나, 구원은 영원한 것이기에, 영원한 속죄함의 제사장 직분이 필요하고, 그래서 땅의 족보가 아니라, 하늘의 족보를 하나 더 예비하셨는데, 그 사람이 바로 멜기세덱임. 그래서 멜기세덱은 그리스도의 제사장 족보를 위해 애초부터 하나님이 인간 역사에 따로 만들어서 넣어놓으신 신비의 사람이라는 말임. 그래서 멜기세덱은 딱 여기까지, 더 이상 알 수도, 알 필요도 없는 인물임. 오직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위해서만 존재 하는 사람임. 그래서 이 땅의 논리로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직분이 바로 영원한 제사장 직분임) - ※ 구속주의 조건 : 삼중직이 필요. 인간의 몸으로 속죄함(제사장)이 필요했기에, 마리아와 멜기세덱을 사용하심. 구원하고 끝이 아니라, 통치가 필요하기에 왕으로서 다윗을 사용하심. 하나님 나라와 통치를 선포하는 선지자의 역할은 모세와 엘리야를 사용하심.
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 보라 조상 아브라함도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은 자들은 율법을 따라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약속을 받은 그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논란의 여지 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즉, 레위보다 멜기세덱이 훨씬 높은 존재라는 말임)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에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냐
제사 직분이 바꾸어졌은즉 율법도 반드시 바꾸어지리니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우리 주께서는 유다로부터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그는 육신에 속한 한 계명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되었으니
증언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시 110:4 인용)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또 예수께서 제사장이 되신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그들은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이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제사장 된 그들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아론 제사장 서열은 육신으로 죽을 수 밖에 없고)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예수는 멜기세덱의 영원한 서열을 따라 오심으로 영원한 제사장이심)- 히브리서 기자 때와 다윗 때는 몇천년의 시간 차가 존재 하는데, 이 하늘의 신비, 영적인 원리를 어찌 알았을까? 침이 꼴딱꼴딱 넘어갈 정도로 신기함
“그러므로!”(위의 모든 것을 함축해, 그러므로 예수가 진짜 영원한 우리의 제사장이심)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하늘의 오른편에서 그 날이 오기까지)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라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