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0 홀리스타 새벽설교 '사명자의 인내와 생명을 다하는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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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13–24 (DKV)
13.우리는 먼저 출발해 배를 타고 앗소로 가서 그곳에서 바울을 태울 예정이었습니다. 그가 거기까지 걸어가기로 했기 때문에 미리 약속해 둔 것입니다.
14.우리는 앗소에서 바울을 만나 그를 태우고 미둘레네로 갔습니다.
15.그 이튿날에는 그곳에서 배를 저어 기오 맞은편에 이르렀고 그다음 날 사모를 지나 그 이튿날에는 밀레도에 도착했습니다.
16.바울은 아시아 지방에서 지체하지 않으려고 에베소를 지나쳐 가기로 했습니다. 그는 가능하면 오순절에 맞춰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서둘렀던 것입니다.
17.밀레도에서 바울은 에베소로 사람을 보내 교회 장로들을 불러오게 했습니다.
18.장로들이 도착하자 바울이 말했습니다. “내가 아시아 지방에 처음 간 그날부터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는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는 여러분이 잘 알 것입니다.
19.내가 모든 겸손과 눈물로 주를 섬겼고 유대 사람들의 음모로 시련도 많이 당했습니다.
20.여러분도 알다시피 나는 여러분에게 유익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주저하지 않고 전했고 공중 앞에서 또 집집마다 방문하면서 여러분을 가르쳐 왔습니다.
21.유대 사람들과 그리스 사람들 모두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우리 주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선포했습니다.
22.그리고 지금 나는 성령의 강권하심 가운데 예루살렘에 가려고 합니다. 그곳에서 내가 무슨 일을 당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23.오직 내가 아는 것은 어떤 도시에 가든지 감옥과 고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을 성령께서 내게 증언해 주실 뿐입니다.
24.그러나 나는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서 내게 주신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사명을 다 완성하기 위해서라면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13절- 사도바울과 일행들은 이제 드로아를 떠나 앗소로 가고자 합니다. 드로아에서 앗소까지는 32Km 정도나 되는 이 거리를 일행들과 배를 타지 않고 혼자 걸어가기로 결정했다. 왜일까? 아마도 바울은 혼자서 걸으면서 생각하며 기도하고자 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기도 했을 것이고, 지난날의 전도여행을 회상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앞으로 일어날 ‘예루살렘에서의 환난'을 생각하면서 성령안에서 기도하며 도우심을 간구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물론 가는 길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16절에서 그가 오순절에 맞춰서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해 에베소도 들르지 않고, 서둘렀던 모습을 미루어보아.. 그가 앞으로 일어날 ‘예루살렘에서의 환난’을 염두해두고 주님과 홀로 기도하기 위해서 걸어가지 않았을까 싶다.
바울은 성령의 뜻을 따라 자신에게 맡겨진 복음의 사명을 인내함으로 생명을 다해 헌신합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고통과 고난이 있을 것이 뻔한데 인간적인 생각으론 얼마나 피하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뜻을 거슬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며 나아갑니다.
바울이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이틀 정도되는 거리를 걸어가며 어떠한 기도를 했을까요?
분명히 예루살렘으로 간다면.. 극렬한 유대인들은 바울을 잡아서 죽이거나 그를 로마인에게 넘겨서 감옥에 갇히게 할 것이다. 그렇게 될 것을 알았기에..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한편으론 엄청 답답하고 복잡한 마음이었을 것 같다.
그렇기에 바울은 주님과 홀로 기도의 시간을 갖으면서… 자신의 두려움과 연약함을 솔직하게 고백하며.. 복음을 생명다해 전할 수 있도록.. 생명을 다해 아버지의 원대로 뜻대로 따를 수 있도록 도와주시라고,,함께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이 장면을 묵상하는데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밤에 겟세마네 동산에 땀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셨던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마가복음 14:36 (DKV)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일이 가능하시니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아무리 위대한 사도바울이라 할지라도,, 위대한 엘리야 선지자라 할지라도.. 그들은 우리처럼 연약했다. 사람이기에 연약하다. 육신을 입신 예수님조차 연약함을 지니고 계셨다. 그러나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자신의 힘으로 사명을 완수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성경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람들의 공통점은 ‘성령의 함께하심'이다. ‘성령의 도우심'이 있었다.
자신의 힘으로 능으로, 주님을 끝까지 따라보겠다고 한사람들은 모두 실패를 경험한다. 베드로는 모든 사람이 다 떠나도 자신만은 끝까지 주님을 따르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결과는 어떠했는가? 주님을 3번씩이나 부인했다..
하나님의 일은 자신의 열정과 힘으로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일, 하나님으로부터 온 비전, 그분이 주신 사명은 내 열정과 힘으로 할 수 없다. 반드시 한계를 맞딱뜨리게 되고, 그 한계를 절대 넘어갈 수 없다. 왜인가? 오직 성령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바울도.. 연약함이 들어왔을때,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다. 왜? 내 힘으로 안되기 때문에 그렇다. 성령이 역사해주셔야,, 도와주셔야.. 끝까지 사명을 완수할 수 있다… 할렐루야!
스가랴 4:6 (DKV)
그러자 그가 내게 말했다. “이것이 스룹바벨에게 하신 여호와의 말씀이다. ‘네 힘으로도 안 되고 네 능력으로도 안 되고 오직 내 영으로만 된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한다.”
성전건축의 비전을 받은 스룹바벨은… 성전 방해하는 사람들때문에 성전건축이 지연된다.. 바로 그때 스가랴 선지자는 하나님의 일은 네 힘과 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선포한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영'으로 성령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과 비전에는 항상 사단도 역사한다. 성전건축을 방해하는 사람들을 선동해서, 바울에게는 바리새인과 서기관같은 종교인들을 충동해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다.. 그러나… 그 방해와 어려움속에서도 끝까지 달려나갈 수 있으려면… 끊임없이 성령으로 가야한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한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한다.. 성령의 충만함이 있어야 한다.. 기도와 말씀에 귀기울이며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따라가야한다…
바로 그렇게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때,, 새힘이 생긴다. 열정이 생긴다.. 성령이 공급해주시는 새로운 에너지로 나아갈 수 있는 추진력을 공급받게 되는 것이다 할렐루야!
이사야 40:28–31 (DKV)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가 듣지 못했느냐? 여호와는 영원한 하나님이시고 땅끝을 창조한 분이시다. 그분은 지치거나 피곤해하지 않으시고 그분의 통찰력은 아무도 탐구할 수 없다.
그분은 지친 사람들에게 힘을 주시고 약한 사람들에게 힘을 북돋워 주신다.
젊은이라도 지쳐 피곤하고 장정이라도 걸려 비틀거리겠지만
여호와를 바라는 사람들은 새로운 힘을 얻을 것이다. 독수리가 날개를 치면서 솟구치듯 올라갈 것이고 아무리 달려도 지치지 않고 아무리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 이곳에 지친 사람들이 계십니까? 피곤하고 낙담가운데 계신분이 계십니까? 오늘 다시금 그분을 바라고 갈망하시길 바랍니다. 성령님을 간구하시길 바랍니다. 바로 그럴때 주님께서 독수리가 날개치면서 올라가는 듯한 새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가야합니다. 그분의 영으로 가야합니다!!
17절부터 38절까지는 밀레도에서의 설교이다.
에베소 지역은 바울이 3년간 애정을 많이 쏟았던 곳이어서 꼭 들르고 싶었겠지만... 시간상 어쩔 수 없이 지나쳤다.. 에베소에 들리면 시간이 지체되고, 예기치 않은 일을 만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그래서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밀레도로 와서 자신을 만나달라고 요청한다.
그가 오순절에 발맞추어 예루살렘에 가고자 한 이유는 추측해보건대.. 오순절에 많이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들기 때문에 주님의 교회들이 이방 땅에서 얼마나 든든히 서가고 있는지 증언하기 위함도 있었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방 교인의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어쨋든.. 바울은 에베소로 장로들을 초청한다.
여기서 장로는 교회의 지도자를 의미한다. 이들은 때로 “감독”(에피스코포스, ἐπισκόπος)이라고 불리기도 했다(참고. 28절). 원래 “장로”는 유대의 회당에서 사용된 직분이었는데,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그대로 차용되었다. “감독”이라는 명칭은 헬라적 배경을 가지는데,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장로와 감독이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장로-감독들은 집사들과 더불어 교회의 직분자가 되었다. 이러한 직분자는 교회에서 공적으로 임명되거나 청빙되었다. 바울은 각 교회에서 “장로”를 선택하여 세웠다.
그리고 밀레도에서 장로들에게 설교를 한다. 그 목적은 지도자에게 향한 권면과 지도자의 책임과 모범을 가르친다. 그의 권면에서. 이건 진짜 찐이다.. 라고 생각한 부분은 바로 18절이다..
18절에서 사도바울은 여러분과 함께 있는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는 여러분이 잘 알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을 읽는데.. 사도바울은 삶으로 본이 될만한 진짜 그리스도인이었구나라는 생각이들었다.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삶을 당당히 이야기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될까?
그렇기 때문에 초대교회에.. 이방교회에 급속도로 복음이 전파되지 않았을까? 성령의 역사 뿐만 아니라 사도바울은 삶으로도.. 당당히.. 자신의 삶을 보라고 이야기했던 인물이다.. 그저 놀랍다.. 보통 선교지를 가면 많이 다투게 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같이 오래붙어 있어야되기 때문이다.. 오래 붙어있으면 미성숙한 삶을 보게 되기 때문에 많이 다투게된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3년 동안 에베소에서 지내면서.. 삶으로 본을 보였다.. 우리의 삶도.. 말뿐이 아닌 삶으로 보여주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소망한다..
마지막으로 22절에서 24절을 다함께 읽자.
앞서 말씀드린 대로 사도바울은..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걸어가던 길에 주님과의 독대의 시간을 통해.. 성령의 힘을, 새힘을 공급받지 않았나 추측해본다.. 22절을 보니.. 지금 나는 성령의 강권하심 가운데 예루살렘에 가려고 합니다 라고 말한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힘으로.. 선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선교를 이끌고 계시는 주체는 ‘성령'이시다. 바울의 선교는 바울이 한 것이 아니다. ‘성령'이 하신 것이다.. ‘성령’으로만 가능하다.. 할렐루야.. 그렇기에 고통과 감옥이 기다릴지라도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그분의 능력을 경험할때,, 우리는 더욱 담대해진다. 24절 말씀을 보자. 이러한 고백은… 베드로가 했던 고백과는 다르다. 모든 사람이 다 버려도 나는 주를 따르겠다라는 고백이 자신의 ‘혼'적 차원.. !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다는 차원의 고백이었다면..
바울의 이 고백은.. 그의 사역에 있어서 성령의 도우심과 능력을 경험하면서 축적된 믿음의 고백이다. 그분의 능력을 경험할 수록 ‘믿음'은 더욱 증가되고,, 그분의 ‘은혜’는 더욱 커진다.. 그렇기에 그 은혜로 인하여 생명도 드릴 수 있다는 믿음의 고백이 생기는 것이다.. 오늘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길 소망합니다 .
기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감에 있어서 연약함과 한계를 경험하여 포기하고자 했던 분이 있나요? 이 시간 다시금 그분의 사명과 비전을 붙드는 시간 되길 원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합시다. 주님저는 할 수 없습니다. 내힘과 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주님 도와주십시요. 성령님 이시간 우리에게 임하여주시옵소서.. 성령을 의지함으로 나아갑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나아갑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새롭게 세워주시고,, 다시 일어나 나아갈 힘을 주시옵소서!
우리에게도 바울처럼 삶을 통해 복음을 전할 수 있길 소망합니다.. 나의 신앙과 믿음이 말뿐이 아닌.,, 삶 속에서 나타나게 하옵소서.. 나의 삶을 통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한 매력을 느낄수 있도록.. 나의 삶이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도록.. 역사하여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