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새순교회 여름 수요강론(3)_초대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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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 교회는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자(엡 1:23) 사도들을 통해 세우신 공동체이다(마 16:16, 28:16-20). 그리고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공동체다(행 2:1-13). <#2>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이 교회가 세워질 초기의 모습은 어땠을까? 사도 시대를 포함해 중세 이전까지의 교회사를 ‘초대교회사’라고 부르는데, 이번에는 이 초대교회사를 한번 살펴보려고 한다. <#3> 특히 기독교가 종교의 자유를 맞이하기 이전의 교회 박해 시기를 통해 당시 초대교회의 시대적 상황과 예배, 그리고 초대교회의 선교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더 나아가 마지막으로 이 초대교회사가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져다주는지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본론
2.1. 초대교회를 향한 박해의 시작
<#4> 그럼 먼저, 초대교회는 어떤 시대적 상황 속에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박해의 상황이었다. 초대교회는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5> 첫째, 교회는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사도 시대에 세워지기 시작한 교회 내의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이었다. 사도들 또한 유대인들이었다. 이들은 메시야가 나사렛 예수의 모습으로 이제 오셨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다른 동료 유대인들과는 구별되었다. 기독교로 전환하지 않은 유대인들은 예수를 메시야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로마 정부로부터 벗어나 독립적인 국가를 세워 최강대국 이스라엘로 만드는 사람이 메시야라고 생각하는 정치적 메시야를 대망하였다. 그래서 예수를 메시야라고 생각하는 유대교는 교회를 이단이라 생각하고 핍박을 했었던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모습을 들 수 있다.
<#6> 둘째, 교회는 로마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기독교가 막 태동했을 초기에는 로마 사회에서 기독교는 그저 유대교의 아류 집단 정도로 생각하였다. 하지만 점차 교회의 영향이 커져 가기 시작하면서 로마 정부에 눈에 띄기 시작했다. 313년에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가 밀라노 칙령을 발표함으로 기독교는 로마의 공식적인 종교로 인정하는, 다시 말해 ‘공인’을 받았다. 이 말인즉슨 기독교는 공인이 되기 이전에 공식적이지 않은, 불법적인 종교였다는 뜻이다.
왜 불법적인 종교였냐면, 당시 로마는 황제 숭배를 허용하는 종교를 합법적인 종교였고,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종교는 불법 종교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당시 사회는 ‘다신교’ 사회였다. 따라서 황제를 숭배한다고 해서 그렇게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기독교는 오직 유일신이신 하나님만을 믿고 그 이외에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놓는 것은 우상 숭배였기 때문에 황제 숭배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특히 ‘주’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에 있어서 로마는 이 호칭을 오직 황제에게만 사용하도록 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외에 그 누구에게도 이 호칭을 사용할 수 없었다.
이렇게 불법적인 종교라는 이유로 기독교는 종교의 자유를 누리지 못했고, 불법 집단인 교회 공동체는 정상적인 재산 취득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오늘날처럼 교회 공동체가 소유할 수 있는 건물이 없었기 때문에 주로 가정에서 모였던 것이다. 더 나아가 기독교는 불법적인 종교였기 때문에 당시 사회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종교 문제에 있어서 로마 제국은 관용적인 정책을 폈지만, 제국의 지도자들이나 로마인들로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만신들과 황제 숭배를 거부했는데, 로마인들은 이것을 시민의 의무를 거부하는 비애국적인 행동으로 간주했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이런 비난이 확대 재생산되면서 결국 근거 없는 오해로 기독교는 반사회적 집단으로 몰리게 되었다. 로마 입장에서 기독교는 제국의 안녕을 해치는 존재였다. 고린도와 데살로니가에게 보낸 바울의 서신만 살펴봐도 기독교는 그럴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닌데 도시의 안녕을 해치는 존재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이 추방되기도 했던 것이다.
또한 다신교적 배경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신에게 제물을 바치지도 않고, 황제도 숭배하지 않는 ‘무신론자’라는 아이러니한 비난을 면할 수 없었다. 현대의 무신론자는 말 그대로 신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호칭인데, 초대교회 당시에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무신론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7> 참고로 로마인들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오해가 두 개가 있다. 첫 번째는 ‘형제’, ‘자매’라는 호칭에 관한 오해였다. 현재 교회 내에서 우리는 ‘형제’, ‘자매’라는 호칭을 쓰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초대교회 당시에도 교회 내에서 자연스럽게 이런 호칭을 사용했다. 하지만 당시 믿지 않는 자들이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형제’, ‘자매’라는 호칭을 쓰는 걸 근친상간도 마다하지 않는 혼음을 하는 집단이라고 오해하였다. 두 번째 오해는 성찬과 관련된 오해다, 성찬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는 성례다. 지금은 믿지 않는 자들도 성찬 때 빵과 포도주를 먹는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초대교회 당시에는 성찬 때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는다고 해서 인육을 먹는 집단이라는 오해를 받았다. 더구나 그리스도를 ‘아기 예수’라고 표현하기도 했기 때문에 일부는 기독교인들이 새 신자의 입문식 때에 유아를 커다란 빵 속에 감추어 두고 입문자에게 빵을 자르라고 명령한다고 생각했다. 이 두 가지의 오해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시선이 더 좋지 않았다.
2.2. 본격적인 박해의 시작
하지만 어떤 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는 개인이나 사회에서 비공식적으로 일어났었다. <#8> 바로 A.D 64년에 네로 황제가 통치하던 때에 로마에 대(大)화재가 일어나면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공식적으로 되었다. 그렇다면 로마의 대화재와 그리스도인과 무슨 상관이 있었길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공식적인 것이 되었을까? 그리스도인들이 화재를 일으킨 주범이라서 그랬었던 걸까?
로마의 대화재가 일어난 시발점은 한 기름 창고로부터 시작되었다. <#9> 당시 로마 시내는 골목이 좁고 건물이 따닥따닥 붙어 있는 도시였다. 그래서 화재가 일어나면 순식간에 옆 건물로 붙었고, 이때 화재 진압을 위한 시스템도 구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화재는 단숨에 대화재로 발전되었다. 이 화재는 고의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사고로 일어났다.
<#10> 그런데 이때 로마 시민들에게 네로 황제의 이미지는 좋지 않았다. 네로는 어머니의 음모 덕분에 로마의 황제가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이성적인 통치자로 가난한 자들을 위한 법령을 마련하여 로마 시민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네로는 점차 과대망상과 쾌락을 추구하기 시작하여 비위에 맞는 인사들로 궁정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가 황제가 된 지 10년 후 그는 국민들의 멸시를 받았고, 특히 시인들과 예술가들은 예술인이라고 자처한 네로를 혐오했다. 곧 그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로마의 대화재가 발생한 것이다. 당시 몇 키로 떨어진 다른 지역의 궁전에 있던 네로는 화재 소식을 듣자마자 로마로 달려와 화재 진압을 추진한듯하다. 그는 공공건물뿐만 아니라 자기 궁전의 정원을 이재민들에게 개방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쳤다는 의심을 받고 있던 그가 도시에 불을 지르라고 명령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화재는 일주일 동안 계속되었으며, 불길이 잡힌 후에도 사흘 동안 더 타올랐다. 이때 로마는 화재로 인해 밤에도 한낮처럼 밝았다고 한다.
이러한 고난 속에서 시민들은 정의를 부르짖었고,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11> 그 소문은 네로가 도시를 자기의 구상대로 다시 짓기 위해 로마를 파괴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에 황제를 의심하는 시민들이 증가했고, <#12> 심지어 화재가 계속되는 동안 황제가 배우처럼 분장하고 궁정의 첨탑 위에 서서 칠현금을 뜯으며 그 옛날 트로이 전쟁의 내용이 담긴 트로이의 파괴를 노래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그가 시인으로서의 영감을 얻기 위해 도시에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네로는 이러한 소문들을 막아보려 했지만, 범인이 잡히지 않는 한 자신을 향한 의심을 피할 수 없음이 명백해졌다. 그런데 화재를 면한 두 구역에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13> 그래서 네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좋은 희생양을 선택하여 황제를 숭배하지 않고 다신론이 아니라 유일신을 섬기는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로마에 재앙이 찾아왔다며 방화 혐의를 그리스도인들에게 뒤집어씌웠다. 방화범으로 지목된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박해는 로마시에만 국한적으로 일어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관리들이 다른 어떤 죄목 없이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리스도인을 사형에 처하는 선례를 남기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독교에서 유대교로 넘어가고자 하는 유혹을 그리스도인들이 받았다.
네로의 박해는 68년에 그가 죽기까지 지속되었다. 네로는 그리스도인들을 그냥 죽이지 않고 잔인하게 죽였다. 이것을 기록했던 역사가인 타키투스는 네로의 박해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다.
<#14>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죽이기 전에 시민들을 위한 오락에 이용했다. 일부 신자들에게 털옷을 덮어 씌워 개들이 찢어 죽이게 했고, 또 다른 신자들은 십자가형에 처했다. 또 다른 신자들을 불태워 밤에 등불처럼 밝히게 했다. 네로는 자기의 정원을 열어 이러한 쇼를 연출했고, 그는 원형경기장에서 마치 전차 경주자처럼 옷을 입고 전차를 타고 돌아다녔다. 이 때문에 시민들은 벌을 받아 마땅한 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일반인들의 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 인간의 잔인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죽어갔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박해는 네로에서 멈추지 않았다. <#15> 약 90-96년에 도미티안 황제 치하에서 상황은 또다시 심각해졌다. 칼리굴라와 네로 황제의 경우를 예외로 한다면, 황제들은 지나치게 열광적인 시민들이 황제에게 신적인 영예를 바치는 것을 전통적으로 금지시켜 왔었다. 하지만 도미티안 황제는 이와는 정반대의 견해를 취함으로 자신을 ‘주와 하나님’으로 부르게 하여 자신을 신격화하고 이러한 황제 숭배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자들은 반역의 혐의를 갖고 의심스럽게 여겼다. 이러한 조치로 유대교는 물론 기독교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심지어 이 당시에 유대교에 호감을 가지고 있던 몇몇 신분 높은 로마인들이 ‘무신론’의 죄목으로 고발당했으며, 이러한 죄목으로 처형당하는 사례까지 있기도 했다. 따라서 황제신에게 절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받았다. 이때의 박해는 로마를 넘어 소아시아 지방까지 확대되었다.
<#16> 도미티안 다음 황제인 트라야누스 황제는 자신에 대한 숭배가 강제적인 충성 시험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기독교 박해의 위기는 지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112년 소아시아에 있는 비두니아 지방의 총독이던 소(小) 플리니우스(Pliny of younger)는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황제에게 문의했었다. 그의 편지를 통해 기독교가 도시뿐만 아니라 시골에도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교의 신전들은 텅 빈 채로 방치되었고, 희생 제사에 쓸 동물의 고기를 실제로는 살 수가 없었다. 지역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었고 플리니우스에게 이 문제에 대한 진정이 들어왔기 때문에, 그는 로마의 시민권을 갖고 있지 않은 일부 그리스도인들을 처형했고, 시민권을 가진 다른 사람들은 재판을 받도록 하기 위해 로마로 압송하기 위해 대기시켜 두었다.
플리니우스는 그리스도인들이 이전에 처형당한 선례를 알고 있었고 망설임 없이 이를 실행했으나,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범죄의 정확한 성격에 대해서 혼란을 느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범죄를 구성하는지, 아니면 기독교와 연관된 악덕들로 고발당하는 것인지, 또는 어리거나 병약한 자들에게는 형벌을 완화해줄 수 있는 것인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입증된 사람이 신앙을 버림으로써 형벌을 면제받을 수 있는 것인지 등을 그의 편지에서 황제에게 문의했다. 플리니우스는 고발당한 사람들이 신앙을 철회하는 것을 완고하게 거부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보다 더 나쁜 죄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처형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17> 이렇게 박해함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줄어들 것을 바랐던 것과는 달리 결과는 <#18>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고발의 급증이었다. 이러한 고발은 신원을 밝힌 사람으로부터 뿐만이 아니라, 익명의 문서를 통해서도 이루어졌다. <#19> 고발당한 자들을 심문해 보면,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자체를 부인하거나, 또는 어떤 사람들은 과거에 그리스도인이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황제와 신들의 형상 앞에 향과 술을 바치고 그리스도를 저주하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증명했다. 그렇지만 배교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이러한 심문을 통해 이들이 어떤 악행도 저지르지 않았다는 당황스러운 사실이 드러났다. 고발당한 자들은 자신들의 일반적인 관습은 모임에 참석하여, 신으로서의 그리스도에게 찬송을 드리고,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죄를 피하도록 맹세를 하고, 이후에는 흩어졌다가 나중에 식사를 하기 위해 죽인 어린이가 아니라 정상적인 음식을 들기 위해 다시 만나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은 로마 사회에 해가 되는 어떠한 악행도 저지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를 향한 박해는 멈출줄 모르고 계속 되었다. 이외에도 박해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일일이 다 말하기에는 시간상 다 말할 순 없어 순교 당한 한 사람의 일화를 소개하고 이번 파트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20>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는 황제 때 폴리갑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사도 요한의 제자로 알려진 사람으로 안디옥 출신의 사람이다. <#21>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스토아라는 철학을 따르는 황제였는데, 이 철학을 따른다는 이유로 기독교를 박해했다. 또한 자연재해의 원인이 그리스도인들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비난했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그리스도인들을 채찍으로 때려 온 몸이 찢겨 속살이 드러나게 했고, 창자까지 밖으로 터져나오게까지 했다. 그리고 땅 위에 박아놓은 창 끝에 그리스도인들을 눕혔고 온갖 종류의 고문을 받게 한 뒤에 그리스도인들의 시체를 굶주린 개의 먹이로 주기까지 했다. <#22> 이때 폴리갑도 순교를 피해갈 수 없었다. 폴리갑을 죽이기 위해 군중들이 들끓었지만, 폴리갑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계속 그 도시에 머물렀다. 폴리갑이 체포되기 전날 밤에 그는 꿈에서 자신이 순교하게 될 것을 보았다. 그는 결국 붙잡히고 원형경기장에서 순교 당하게 되었다. 그가 재판정에 섰을 때 86세라는 노령의 나이였는데, 총독이 노인임을 생각해서 고문과 죽음을 당하느니 배교하도록 충고했다. 아래는 폴리갑과 총독의 대화 내용이다.
<#23> 폴리갑: “나는 86년 동안 그분을 섬겨 왔는데, 그동안 그분은 한번도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신 적이 없소.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모독할 수가 있겠소”
총독: “나는 사나운 짐승들을 준비해 두고 있소, 만일 당신이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당신을 그 짐승들에게 던져 버리겠소”
폴리갑: “그 짐승들을 부르시오. 우리는 선을 버리고 악으로 돌이켜서는 안 되오, 오히려 악에서 돌이켜 덕을 택하는 것이 선한 일이오.”
<#24> 총독: “만일 당신이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당신을 화형 시키겠소”
폴리갑: “당신은 잠시 타오르다가 곧 꺼져버리는 불로 나를 위협하고 있소. 왜냐하면 당신은 장차 임할 심판과 악인을 위해 예비된 영원한 형벌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요”
이렇게 대답한 폴리갑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걱정이 아니라 확신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이에 군중들은 폴리갑을 산채로 태워 죽이라고 소리쳤고, 상점이나 목욕탕에서 장작과 밀짚을 가져와다가 단을 만들고 폴리갑을 그 위에 세웠다. 그들은 폴리갑을 큰 못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시키려고 했으나, 폴리갑은 이렇게 반응했다.
<#25> “나를 이대로 두시오. 나에게 화형을 견뎌낼 힘을 주실 그 분은 당신들이 못을 박지 않아도 장작더미 위에서 움직이지 않고 견딜 능력도 주실 것이요.”
그리고 폴리갑은 마지막 기도를 했다.
<#26> “사랑하는 복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당신에 관한 지식을 주신 아버지여! 당신 앞에 살고 있는 모든 천사들과 천군들과 피조물, 그리고 모든 의인들의 하나님이시여! 당신께서 오늘 이 시간 나로 하여금 순교자의 반열, 그리스도의 잔에 참예하게 하시어 내 몸과 영혼이 성령의 썩지 않은 축복 속에서 영생의 부활을 얻기에 합당하게 여겨주심을 감사하나이다. <#27> 오늘 나는 신실하고 참되신 하나님이신 당신께서 예비하시고, 계시하시고, 이루신 풍성하고 열납될 만한 제물로 당신 앞에 드려지기를 소원하나이다. 나는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당신의 사랑하는 독생자, 영원한 대제사장을 통해서 당신을 찬양하고, 감사드리며 영광을 돌리나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이제부터 영원토록 영광이 있을지어다. 아멘”
이 마지막 기도를 끝으로 폴리갑은 그가 그토록 바라던 예수 그리스도 품으로 갔다. 이 폴리갑의 이야기는 당시 순교의 현장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로마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악행을 저지르지도 않았는데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박해하였고, 이런 박해 속에서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는 신앙을 버린 사람과 신앙을 끝까지 지킨 사람, 그리고 직접적으로 박해받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필자는 신앙을 버린 사람들을 마냥 비난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우리에게도 똑같은 상황이 발생하면 우리도 신앙을 버릴 수 있는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 그리고 그들이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에는 폴리갑의 이야기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이 죽음 앞에서도 담대하게 만드는 위대한 능력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2.3. 초대교회의 예배
<#28> 이처럼 초대교회의 역사는 박해와 순교의 역사이기도 하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박해는 기독교가 공인되는 313년까지 지속되었다. <#29> 이런 박해 속에 있었던 초대교회는 비밀리에 모임을 가졌다.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된 후로 기독교 공동체에 새로운 신자가 들어오는 것은 지금보다 문턱이 높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고발을 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새로 들어오려는 사람이 비밀을 지킬 수 있는지 확인 절차를 걸쳐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로처럼 만든 지하 예배당인 카타콤이 생기기도 했던 것이다. 이처럼 비밀리에 모임을 가져야만 했던 당시에는 한 가족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기존 신자들이 어느 곳이 그리스도인 가정인지를 표시할 것이 필요했다. <#30> 그래서 그들은 ‘물고기’ 모양으로 표시했다. 이 물고기는 단순한 물고기 그림이나 형태가 아니라 ‘익투스’(ΙΧΘΥΣ)라는 단어를 물고기에 넣어 표시했다. 이 익투스라는 단어는 요새는 영어 학원의 이름으로 쓰이기도 하는 단어이지만, 이 단어는 당시에 어떤 말을 나타내기 위한 약자였다. <#31>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Ιησυς χριστους, Θεου Υιος, Σοτηρια)라는 뜻이었다. 바로 이 물고기 모양을 보면 이곳이 그리스도인 가정, 또는 교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32> 그렇다면 초대교회의 예배는 어떤 형태를 띠었을까?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모습과 같았을까? 다음으로는 초대교회의 예배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33>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교회는 처음부터 떡을 떼기 위해, 즉 성찬이나 주의 만찬을 위해 한 주의 첫째 날에 모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주의 첫째 날에 모인 것은 그 날이 주님이 부활하신 날, 오늘날로 말하면 주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예배의 주된 목적은 신실한 자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거나 그들의 죄의 심각함을 의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약속된 모든 신자들의 부활을 기억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까닭에 사도행전은 이러한 집회를 행복한 행사로 묘사한다.
<#34>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26-27)
<#35> 현대 개신교의 예배는 설교, 즉 말씀을 중심으로 한 예배지만, 초대교회의 예배는 성찬을 중심을 한 예배였다. 초기 성찬 예배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금요일의 사건들이 아니라 부활절의 사건들에 초점을 두었다. 새로운 현실이 시작되고 있었으므로 기독교 신자들은 그것을 기념하고 참여하기 위해 모였다. 초기 성찬 예배의 가장 특출한 특징은 그것이 축하의 모임이었다는 것이다. 그 예배의 분위기는 슬픔과 회개가 아니라 기쁨과 감사였다. 처음에는 성찬이 식사의 일부였다. 신자들은 음식을 교회에 가져와 공동식사를 한 후에 빵과 포도주를 위한 특별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박해의 공포와 인육을 먹는다는 소문, 그리고 단지 신자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2세기 초에 공동식사는 폐지되었다. 하지만 원래의 기쁨의 분위기는 지속되었다. 2세기 신학자였던 ‘저스틴’은 당시 예배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였다.
<#36> “일요일이라고 불리는 날이면 도시나 농촌에 사는 모든 신자들이 모인다. 그들의 집회에서는 시간이 허락되는 한 「사도들의 전기」(Memoirs of Apostles)나 예언서가 봉독되었다. 봉독자가 봉독을 마치면 사회자가 권면하면서 이 아름다운 본보기들을 따르라고 권한다. 그 직후 모두가 일제히 일어서서 기도하고, 그 후에 앞에서 말한 것처럼 빵과 포도주와 물이 우리에게 제공된다. 가능하면 사회자가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하며 모든 신자들은 ”아멘“이라고 응답한다. <#37> 그 다음에는 감사함으로써 축성된 음식을 분배하고 먹는다. 집사들은 그것들을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가져다준다. 하려는 능력과 뜻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자유로이 기부하며, 헌물은 사회자에게 제공된다. 사회자는 이것을 가지고 고아들과 과부들, 질병 등의 이유로 궁핍한 사람들, 감옥에 같힌 죄수들, 일시 체류자들 등 간단히 말해서 궁핍한 모든 사람들을 돕는다. <#38> 우리는 일요일에 이 전체 모임을 갖는다. 왜냐하면 이 날은 하나님이 어둠과 물질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창조하신 날이요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이다.”
<#39> 초대교회의 예배에 대해 기록한 다른 문서들을 통해 2세기 이후 성찬예배는 두 가지 중요한 부분으로 나누어졌다. 우선 성경봉독과 간단한 해설, 그리고 기도와 찬양이 제1부를 이루었다. 당시에는 기독교 신자가 개인적으로 성경을 소유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으므로, 신자들은 1부 예배를 통하여 성경 지식을 얻었다. 지금은 우리가 개인이 이렇게 들고 다닐 수 있는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당시 성경은 복사하기가 굉장히 어려운 상황으로 복사본은 엄청난 고가의 문서였기 때문에 초대교회의 예배에는 설교가 곧 성경의 지식을 얻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설교의 중요성이 굉장히 컸다. 이 때문에 1부 예배 시간은 상당히 길어서 어떤 때는 몇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기도와 축복으로 1부 예배를 마치고 세례를 받지 않은 신자들이 퇴장한 후에 평화의 입맞춤으로 2부 예배인 성찬예배가 시작된다. 입맞춤 후에 빵과 포도주를 집례자 앞에 가져오며, 집례자는 빵과 포도주를 위해 기도한다. 보통 상당히 긴 이 기도에서 주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언급되었으며, 성령의 능력이 빵과 포도주에 임하기를 구했다. 그 후 빵을 쪼개어 분배했고, 신자들은 한 잔의 컵을 돌려가며 포도주를 마시고 축도로 모임이 끝난다. 이 예배는 궁핍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나눔의 행사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들을 위해 헌금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저스틴은 다른 곳에서 “우리는 모든 재산을 공유하며, 궁핍한 사람들과 나누어 가진다.”라고 말한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초대교회의 예배는 단순히 그들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한 기쁨과 감사를 누린 것이 아니라 궁핍한 자들에게도 나누어주는 예배였던 것이다.
2.4. 초대교회의 선교
초대교회는 앞에서 다룬 것처럼 박해 상황 가운데 있었다. 그래서 비밀리에 모임을 가졌다. <#40> 그런데 놀라운 것은 초기 몇 세기 동안 교회가 크게 성장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교회가 어떤 방법으로 그런 성장을 이루어냈는지 궁금증을 가지게 만든다. 지금처럼 ‘부흥회’ 혹은 ‘사경회’를 한 것도 아닌데, 박해 상황 속에서 비밀리에 모임을 가졌던 교회는 어떻게 신자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더 급성장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전도나 선교를 했길래 성장했을까? <#41> 이제 초대교회의 선교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42> 지금은 우리가 불신자들을 교회로 초대해서 예배 가운데서 선포되는 복음의 말씀으로 불신자들을 회심의 자리로 초대한다. 하지만 초기 예배는 성찬을 중심으로 했으며 (지금도 그렇지만) 세례받은 신자들만 참여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전도는 교회 의식이나 예배가 아니었으며, 부엌과 상점과 시장에서 이루어졌다. 저스틴과 오리겐 같은 몇몇 유명한 지식있는 교회 지도자들은 제자들을 가르치는 자신의 학당에서 논쟁을 벌여 지식인들을 개종시키기도 했다. 바울이 아테네의 아레오바고에서도 지식인들을 개종시켰듯이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초심자들은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전도를 받았다. 이러한 증인들의 예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순교의 장면이었다. 따라서 원래 “순교자”라는 말은 “증인”(Μαρτυς)을 의미했다.
<#43> 초기 기독교의 화장과 관련하여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은 신약 시대 이후에는 바울과 바나바 같은 순회전도자들(또는 순회선교사들)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초대교회 시대에 나타난 폭발적 복음의 전파는 전문 전도인 혹은 선교사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노예들, 상인들, 광산에 강제 노력으로 끌려간 포로들,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로 여행해야 했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노력에 의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 삶 그 자체가 선교였던 것이다. 그들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함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생긴 것이다. 또한 앞에서 성찬 때 헌금을 통해 궁핍한 자들을 도운 것을 언급한 것처럼 초대교회 성도들의 구제를 통해 어려운 자들을 돕는 것이 익숙했기 때문에 삶에서 어려운 자들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특히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는 것이 선교에 많이 도움이 되었다. 초대교회 문헌들을 살펴보면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상처가 나거나 병에 걸린 자들을 적극적으로 치료해주는 것에 동참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병자들이 복음을 듣게 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3. 현대 교회에게 초대교회사가 던지는 질문
이상 우리는 초대교회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초대교회는 엄청난 박해 가운데에 있으면서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고, 근친상간과 인육을 먹는다는 오해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예배를 드렸으며, 박해를 함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 폭발적인 성장이 이루어졌다.
<#44> 이러한 초대교회의 상황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게 한다. <#45> “현대에는 교회를 향한 박해가 없고 예배에 대한 오해도 없는데, 교회는 왜 감소하는가?”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아주 편안하게 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것이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수 없었던 예배의 자유라는 복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왜 교회에서 사람들이 떠나가는지, 왜 현대에는 전도나 선교가 어려운가?”라고 말이다.
물론 현대교회는 초대교회 때보다 잘 살아 생활 수준이 올라가고, 복지가 잘 되어 있어 궁핍한 자가 줄어들었다. 또한 세계에서 자랑할만한 의료보험 강국인 대한민국에서는 누구나 병을 치료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초대교회와 상황이 많이 달라져서 구제와 의료 사역이 전도나 선교에 있어서 효과가 떨어질 수도 있다. 또한 현재 교회는 많은 이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기도 하다. 교회가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이 아닌 심지어 믿지 않는 자들보다 더 심한 부도덕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교회는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가난하고 아프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돈으로도 채울 수 없는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목숨을 끊으면서까지 삶을 포기하고 싶어하는 아픔이 존재한다. 지난달 우리에게 끔찍한 소식이 전해졌다. <#46> 바로 서울의 서이초등학교에서 한 교사가 자살했다는 소식이다. 이 교사는 반 학생에게 폭행을 당했고, 부모로부터 갑질을 당한 것으로 아픔을 참지 못해 결국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선택을 했다. 또한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자살률이 높은 국가이며, 그 중 청소년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1위이다. 현대는 고대보다 훨씬 잘 먹고 잘 산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이 세상에서 채울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존재한다. 우리는 그 해답이 복음에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47> 초대교회 역사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 중 하나는 우리의 삶의 모습을 통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큰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초대교회 시대의 폭발적 복음 전파는 전문 전도인이나 선교사가 아니라 노예들, 상인들, 광산에 강제 노역으로 끌려간 포로들,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로 여행해야 했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노력이었다. 이들이 사도들처럼 성경에 대한 많은 지식을 알고 있었겠는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자기가 보고 듣고 배운 것들이 다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삶을 통해 불신자들은 그리스도인이 어떤 존재인지를 배우는 것이 다였을 것이고, 이들과의 간단한 대화를 통해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되겠다고 회심했을 것이다.
여전히 아픈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난다면 어떻게 돈이 없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 어떻게 남들이 다 가지고 싶어하는거 없어도 만족하며 살 수 있는지, 어떻게 힘들게 살면서도 웃으면서 살 수 있는지, 어떻게 손해를 보면서까지 남들에게 베풀면서 살 수 있는지를 불신자들은 질문할 것이다. 이에 우리는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시기 때문이야.”라는 간단한 대답으로라도 복음을 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초대교회나 현대교회나 여전히 세상은 복음, 즉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이것이 초대교회가 우리에게 주는 함의다.
4. 결론
우리는 초대교회사를 통해 초대교회가 처한 상황과 예배, 그리고 우리의 삶이 복음 전파의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초대교회는 박해의 역사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찬을 통해 기쁨과 감사를 누리는 공동체였고 폭발적인 성장을 하는 공동체였다. 초대교회가 박해를 견디고 기쁨과 감사를 누렸으며 폭발적인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복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이 세상 그 무엇도 줄 수 없는 가장 값진 보물인 복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복음의 열매들을 누릴 수 있었다. 현대에도 살아가고 있는 우리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러한 열매가 나타나길 소망한다. 초대교회의 상황과는 다를지라도 복음을 통해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감사를 누리며 삶을 통해 불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내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48> 긴 강의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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