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목숨이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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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7–12 DKV
안식 후 첫날에 우리는 빵을 떼기 위해 모였습니다. 바울이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했는데 그는 다음 날 떠날 예정이었기 때문에 강론은 한밤중까지 계속됐습니다. 우리가 모여 있는 다락방에는 등불이 많이 켜져 있었습니다.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가에 앉아 있다가 바울이 쉬지 않고 이야기하는 바람에 깊이 잠이 들었습니다. 곯아떨어진 그는 그만 3층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일으켜 보니 그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바울이 뛰어 내려가 유두고 위에 엎드려 그를 껴안고 말했습니다. “소란 피우지 마시오. 그에게 목숨이 있소.” 그러더니 바울은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 빵을 떼어 먹은 후 날이 샐 때까지 오랫동안 강론을 하고서 떠났습니다. 사람들은 살아난 청년을 집으로 데려가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다음 본문은 바울이 자신의 계획을 어쩔 수 없이 변경한 이후 그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앞서 마게도냐에서 해로를 통해 시리아로 가려고 했지만, 바울을 대적하고 음모를 꾸미는 세력들로 인해 마게도냐에서 육로를 통해 수리아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 여정 가운데 바울의 일행들은 드로아에서 바울을 기다렸고, 바울은 7일간 드로아에 머물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드로아까지의 거리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행 20:6 입니다.
사도행전 20:6 DKV
그러나 우리는 무교절 후 빌립보에서 배를 타고 떠나 5일이 지나서야 드로아에서 다른 일행과 합류하게 됐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7일을 지냈습니다.
빌립보에서 드로아까지 총 5일이 걸렸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 16:11 에 의하면 드로아에서 빌립보까지의 거리는 약 이틀거리라고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도행전 16:11 DKV
우리는 드로아에서 바다로 나와 배를 타고 사모드라게로 곧장 갔다가 이튿날 네압볼리로 갔습니다.
네압볼리는 빌립보의 항구입니다. 빌립보에서 드로아까지 약 3일의 시간이 더 걸린 것입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을까? 아마도 이들은 강한 역풍에 맞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틀 거리를 3일이나 더 헤매며 도착한 것입니다. 바울이 사람들을 피해서 간 여정 또한 그리 쉽지 많은 시간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힘들게 도착한 드로아에서의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0:7 DKV
안식 후 첫날에 우리는 빵을 떼기 위해 모였습니다. 바울이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했는데 그는 다음 날 떠날 예정이었기 때문에 강론은 한밤중까지 계속됐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강론을 전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이 자칫 바울의 긴 설교가 한밤중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여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강론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아레고마이’입니다. 이 단어는 일방적인 설교를 뜻하는 단어가 아니라 자유롭게 터놓고 이야기 하는 대화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즉, 바울은 드로아 사람들과 서로 대화를 한 것입니다. 드로아 지역의 한 집에서 바울은 많은 사람들의 궁금증, 즉, 진리를 향한 질문과 그들의 갈증을 해소해 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질의 응답은 자정이 넘는 시간 동안 지속 되었던 것입니다. 드로아 사람들의 진리를 향한 갈망을 엿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과 진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정을 훌쩍 넘길 때가 많이 있죠. 어쩌면 바울과 드로아 사람들의 분위기가 바로 그런 은혜의 분위기로 고조 되었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드로아 사람들의 진리를 향한 목마름은 이 대목에서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 20:8 입니다.
사도행전 20:8 DKV
우리가 모여 있는 다락방에는 등불이 많이 켜져 있었습니다.
바울은 다락방에 모여 있었고, 등불이 많이 켜져 있었다고 말합니다. 등불이 많이 있었다는 것은 이 집의 크기나 규모를 집작하게 합니다. 아마도 이 강론이 행해진 집의 크기는 규모가 꾀 큰 집이었으리라 짐작이 됩니다. 이 집의 크기만큼 또 많은 사람들이 왔으리라 추측케 하는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사도행전 20:9 DKV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가에 앉아 있다가 바울이 쉬지 않고 이야기하는 바람에 깊이 잠이 들었습니다. 곯아떨어진 그는 그만 3층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일으켜 보니 그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또,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가에 걸터 앉을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유두고는 많은 사람들로 인해 앉을 자리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창가에 걸터 앉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처럼 드로아의 많은 사람들은 빼곡히 모여 앉아 진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던 것으로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복음을 향한 열정과 진리에 대한 목마름이 있던 현장이 바로 이 다락방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9절 후반부는 계속되는 드로아 사람들과의 대화로 인해 유두고라는 청년은 졸다 그만 3층 높이에서 떨어져 죽게 된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청년이라는 단어를 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청년에 해당하는 헬라어 ‘네아니아스’라는 단어로, 청년이라는 의미도 가능하지만, 동시에 노예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오늘 본문에 나온 청년의 의미가 청년이 아니라 노예를 나타나기 위한 표현으로 누가가 오늘 본문을 써내려 갔다면, 아마도 노예 유두고는 하루 종일 고된 노동 끝에 졸게 된 것입니다. 노예이지만 진리를 향한 갈급함과 목마름이 있었기 때문에 비좁은 사람들 틈새에 창가에라도 걸터 앉아 주의 복음을 들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고된 노동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졸아 3층 아래로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유두고라는 사람이 청년이었건 노예였건 어찌 되었건, 이 유두고라는 사람 또한, 진리에 목마른 사람이었음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육체의 한계를 이기지 못하고 그만 떨어져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행 20:10-11 입니다.
사도행전 20:10–11 DKV
바울이 뛰어 내려가 유두고 위에 엎드려 그를 껴안고 말했습니다. “소란 피우지 마시오. 그에게 목숨이 있소.” 그러더니 바울은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 빵을 떼어 먹은 후 날이 샐 때까지 오랫동안 강론을 하고서 떠났습니다.
이 안타까운 유두고의 추락사에 바울은 그에게 목숨이 있다, 아직 살아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유두고는 회복이 되었고 다시 바울은 다시 다락방으로 올라가 오랫동안 강론을 했다고 말합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생명이 있으며, 예수님은 그 죽은 생명을 부활시키실 수도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인 이 기적을 보며, 자신들이 이야기 나누었던 하나님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길었던 강론은 그 길이만큼 더욱 깊어져 많은 사람들을 진리로 초대했을 것입니다.
바울의 말에 권위도 생겼을 것이며 성경에 나와 있지 않지만 모두 하나님의 말씀 아래 순복했으리라 상상해 봅니다. 이것이 바울이 드로아에서 복음을 전한 내용입니다.
앞서 살펴 봤지만 바울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였나요? 잘 아시다시피 시리아 였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음모로 인해 육로를 사용하게 되었고, 그 와중에 드로아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도 순탄치는 않았습니다. 예상치 못한 역풍으로 인해 이틀 거리를 5일에 거쳐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도착한 그곳에서 드로아의 수많은 갈급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진리로 초청해 주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드로아 지역에 하나님을 갈급해 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선물하기 위함이었으며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가야할 길은 모르지만 자신을 이끄시는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걸었습니다. 그리고 그길이 어떤 길이든 묵묵히 걸어갔습니다.
전도 여정은 대부분 이렇게 진행되었습니다. 자신의 계획과는 정반대로 말입니다. 때론 핍박과 박해로 그 계획이 변경되는 것은 일쑤이며, 때론 고생을 사서 해야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이 지치지 않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은 바로 테바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 방주와 모세의 바구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어가 테바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두 개의 특징을 무동력에 있다고 전도사님께서 설교해 주셨습니다.
바울 또한 자신의 계획이 있지만 이 모든 선교의 여정을 이끄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알기에 자신의 선교 여정의 핸들을 주님께 온전히 맡겨드리고, 그에 순종했습니다. 뜻이 변해도, 계획이 무산되도 낙심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에 맞는 하나님의 일을 실천 하실 것을 반드시 믿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의 인생은 선교의 여정이라고 확신합니다.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한명의 사역자로 선교사로 동참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여정은 우리의 장기와 특기를 살려 더 거창하고 더 대단한 일을 해내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도리어 우리의 장기와 특기를 내려 놓아야 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 선교의 여정은 우리의 장기와 특기에 상관 없이 우리 인생의 핸들을 주님께 맡겨 드리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지금은 내 계획과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그를 통해서 분명하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이루어 가실 것을 신뢰하는 것 이것이 선교이며, 이것이 우리 인생 전반에 걸친 우리의 숙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우리의 핸들을 주님께 맡기기 시작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일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통해 선교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 주님이심을 더욱 선명하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핸들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기를 힘쓰시는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그렇다면 분명 우리를 통해서 사도행전 29장, 하나님나라의 역사를 써내려 가실 것입니다.
1. 묵상질문: 밤중까지 계속되는 강론에 졸음을 이기지 못한 유두고가 3 층에서 떨어져 죽자, 바울은 유두고를 안고 뭐라고 말했나요? (9,10 절)
2. 적용질문: 영적인 위기 상황이 오히려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고 믿음이 견고해지는 계기가 되었던 경험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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