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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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복음을 전하는 일과 그 속에서 진리에 대해 대적하는 자들에 대하여 두려움에 떨고있는 디모데를 향한 바울의 편지

1절

바울은 디모데를 향해 엄히 명령한다.
우리는 바울의 말에 힘과 권위가 있었음을 알고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바울의 이 편지는 영향력있다.
영향력이 있는 그리스도인.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데 언제부터인가 그리스도인들의 목표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그 말에 힘과 권위 그리고 능력이 있어야 한다. 말에 힘이 있기 위해서는 특히나 어떠한 조언이나 명령함에 있어 힘과 권위가 있기 위해서는 어떤 말에 대하여 실제로 효력이 있어야 하고 말한 사람 또한 그 말한대로 살았거나 살고 있어야 할 것이다.
바울이 명령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하나님 앞과 예수 그리스도 앞,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왕 앞에서, 그의 재림과 나라를 두고 명령하고 있다. 물론 이 표현은 바울이 자신의 명령에 무거움을 더하기 위한 표현이었겠지만 동시에 하나님과 예수 앞에서 말할 수 있는 떳떳함이 있다고 해석될 수 있다.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울의 편지를 성경으로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디모데후서 2장에 기록되었듯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기 때문이다.
인간 저자에 의해서 쓰여졌지만 전적으로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우리가 편지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받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기준은 예수와 복음을 증거하는가와 함께 사도적 권위를 가지는가이다.
바울을 포함한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믿고 변화되어 오늘 바울이 말한대로 하나님과 예수님 앞에서 살기를 힘썼다. 성경의 저자들 스스로가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했기에 더욱 그들의 말과 글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권위가 더해졌을 것이다.
우리는 이를 ‘리프나이 엘로힘’, 혹은 ‘코람데오’의 삶이라고 부른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인 것이다. 교육부서 설교시간에 신앙생활에 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신앙생활을 잘 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성경의 저자들과 우리의 목적이 다를까?
그렇지 않다. 예수님과 우리의 목적은 다를까?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겠지만 포괄적으로 같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드러내는 것’이 인간의 목적이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드러내는 것이 곧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신앙은 일상에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하면 일상을 거룩하게, 구별되게 살아내는 것이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우리의 일상은 누구 앞에 서 있느냐가 중요하다. 바울과 같이 하나님과 예수 앞에서 살아야 잘 살 수 있다. 하나님은 왕이시다. 왕 앞에서 부담을 느끼며 왕과 함께 일상을 살아낼 때 우리는 잘 살 수 있다. 이것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의 죄성과 함께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으신다. 너무 높은 분이셔서 우리가 체감할 수가 없어서 그렇다.
어떻게 하면 가능할까? 생각해보니 연애할 때에 그리고 사랑할 때에 가능하더라. 어디를 걷든 무엇을 보든 누구와 이야기하든 그 사람이 생각난다. 사랑하면 그와 닮아가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그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싶어진다.
또 나에게 책임이 있을 때에 가능하더라. 전에 일하던 직장에 친한 형을 소개시켜드렸다. 물어보니 힘든 상황 안에서도 그만둘 수가 없다고. 그래서 안 볼 때는 쉬엄쉬엄하라고 했더니 그럴 수가 없다고. 왜라고 물으니 본인이 그리스도인이라, 그리고 나로 인해 소개된 사람이니 그렇다고 하더라. 괜히 감사하며 뿌듯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내어주신 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 생각으로 우리도 바울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앞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자.

2절

바울이 디모데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권면하는 바가 나온다. ‘말씀을 전파하라’는 것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말할 때에 빈도가 있다. 그 빈도는 언제나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범사에, 매일 등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냄에 있어 쉬지 않으시기를 원하신다. 사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엄히 명령할 필요가 없는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디모데는 그리고 우리는 지금 여러 핍박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이런 격려와 권면이 필요했을 것이다.
말씀을 전파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설교에 한정시키기 쉽다. 그러나 아니다. 디모데가 설교자였기 때문이지 말씀을 전파한다는 것은 말씀대로 사는 것 쉽게 말해 전도다.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우시고 또 보내신다. 목사님과 나와 같이 설교자로 그리고 누군가는 직장으로 누군가는 주부로 누군가는 학생으로 보내셨다. 역할이 없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회에 속한 구성원으로서 각각의 역할로 보내시고 각 역할에 맞는 일들을 맡기신다.
말씀을 전파하라는 것, 전도하라는 것은 각자가 보냄받은 자리 가운데에서 그리스도를 보이고 전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만큼 일상 가운데에서 적용하며 스스로를 그 말씀으로 지키고 동시에 배운 바를 권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책임은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 하고 참아야 할 것은 참고 피해야 할 것과 분별해야 할 것은 분별하며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범사에 항상 해야한다고 한다. 이것이 일상에서의 경건이요 거룩이요 신앙생활이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 내가 지금 살아가는 일상이 하나님께서 보내어주신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며 살 때에 이러한 삶이 가능하다.
교육부서에서 요즘 밀고있는 표어를 전해본다. ‘누가 하나님을 보여줄 것인가?’, ‘누가 예수님을 보여줄 것인가?’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그 사람이 되어야 한다.

3절-5절

그런데 전도가 쉬운가? 하나님을, 예수님을 보이는 것이 쉬운가? 쉽지 않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렇게 되는듯 하다. 요즈음들어 더욱 바울이 디모데에게 경고했던 때가 계속해서 차고있는듯 하다. 정말 예수님께서 곧 오시겠구나 싶다. 사람들이 점점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 사람들이 점점 복음과 불편한 소리에 대해서 귀를 닫는다. 조금이라도 바른 소리를 하려 하면 재미없는 사람이라는 낙인을 찍어버리거나 세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라고 치부한다.
듣기 싫은 소리는 한 귀로 듣고 흘린다. 그러면서 자기 소양에 옳은대로 행하고자 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내린 판단과 결정이 최선이라고 말하는 소리에는 귀를 기울이며 찬사를 표한다. 이는 언뜻보기에 각각의 개성과 판단 그리고 생각을 존중하는듯 하다. 그런데 이는 되려 긍정적이기보단 부정적인 영향력을 가져온다. 성경에서도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서도 볼 수 있듯 이러한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며 그 결과는 무질서함과 파괴적인 것을 우리는 보게되기 때문이다.
가장 작은 공동체인 가정에서 다툼이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기가 하고싶은대로 하려고 할 때에 일어난다. 화목한 가정은 다름을 존중하는 가운데에 질서와 가훈이라는 방향성이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자기소양에 옳은대로 행하는 교회는 다툼과 문제가 생기게 된다. 다양한 사람이 있지만 그리스도라는 질서와 하나님의 영광으로 하나가 된다.
공동체가 바르다고 정한 질서와 방향성이 나의 욕구, 욕심과 다를 경우 아쉽지만 이를 꺾어낼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세상의 소리가 우리를 간지럽히고 있다.
각종 미디어에서 흘러나오는 소식과 광고만 접해도 흐르는 문화의 가치관을 느낄 수 있다. 바른 소리를 하는 미디어는 인기가 적고 단순히 자극적인 것이나 지금 당장의 위로와 쾌락을 받는 방법, 마음편한 소리 즉, 내가 원하는 것을 주는 소리는 인기가 많다. 말 그대로 나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둔다. 이런 거짓된 스승들의 소리는 진리인듯해 보이지만 진리가 아니다.
이 스승들은 우리의 부족함과 필요를 채워주는듯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진리에서 떠나게 함과 동시에 곧 다른 부족함을 보게 만들어서 더 많은 스승이 필요하다고 믿게 만든다.
바울은 이러한 소리들을 허탄한 이야기, 판타지 소설이나 신화와도 같은 이야기라고 표현한다. 판타지 소설이나 신화는 처음 접하기에는 재미있다. 그런데 자꾸 보면 질린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만들어낸 이야기이며 ‘진짜’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짜가 아닌 이야기는 처음에는 흥미롭지만 곧 질리게된다. 우리의 영혼에 주는 유익이 없다. 허상이며 만들어낸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만들어낸 롯데타워를 처음 보면 우와 하지만 계속 보면 질린다. 미세먼지가 얼마나 심한지 알려주는 용도가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드신 것은 다르다. 자연은 언제봐도 질리지 않는다. 구름과 달과 별같은 것들은 항상 봐도 항상 새롭다.
복음은 우리의 귀를 간지럽히는 허탄한 소리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진리’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듣고 나누는 말씀 또한 거의 2천여년간 나누어졌음에도 새롭고 전혀 질리지 않는다. ‘늘 알고 있는 말씀’이지만 ‘늘 새로운 말씀’이다.
세상의 허탄한 소리는 아주 달콤하다. 그러나 진리는 그에 비해 덜 자극적이고 때로는 거북할 정도로 깨끗하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이 허탄한 이야기들을 따르지 말고 진리에 따라서 우리에게 맡겨진 직무를 다해야 할 줄로 안다.

6절-8절

바울은 이제 자신의 유언을 정리한다. 바울은 자신의 삶을 치열하고도 선한 싸움으로 표현하고 있다.
듣기만 좋은 말들, 썩어 없어질 것들을 위해 수고하라는 헛된 말들, 복음이 아닌 다른 소리들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다시 오실 때에 심판자 되시며 이미 왔으나 아직 오지 않은 그 나라에서 통치하실 예수님 앞에서 거룩을 유지하며 일상을 살아내라. 이것이 바울이 싸웠던 싸움이다. 그리고 이 싸움의 결과는 예비되어있다. 영광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그 싸움의 끝날에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이다. 이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면류관이 바울이 싸운 이유이다.
예수님의 나타나심, 예수님의 재림을 소원하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마치는 날까지 하나님과 예수님 앞에서 이 선한 싸움을 싸워 예비된 의의 면류관을 쓰게되는 그 날까지 함께 달려가기를 소망한다.

말씀을 정리한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 보내신 자리에서 거룩하게 구별되어 일상을 살아내라. 신앙생활을 잘 하라.
그리하여 갈수록 허탄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세상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 바른 소리를 듣게하라. 예수님을, 하나님을 보게 하라.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다. 여러분과 나도 할 수 있다. 부끄러움을 경험하게 하고 허탄한 것이 아니라 진짜를 보게 하라.
가짜는 후회 속에서 살고 진짜는 내일을 보며 산다. 우리가 진짜다. 허탄한 소리가 아닌 복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우리가 되자.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참 근심이 많은 삶 속에서 하나님과 예수님 앞에서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은 기도다. 우리의 믿음을 지킬 무기는 ‘기도’ 뿐이다.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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