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회복과 삶의 회복

2023 여름수련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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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2:1–2 (NKRV)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우리의 상황은 어떠한가?

1. 선데이 크리스천

선데이 크리스천이란 말을 들어보신적 있나요? 여러분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선데이 크리스천은 주일에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거룩한 하루를 보내지만 주일이 채 지난지 8~9시간도 안돼서..그러니까 주일이 지나고 월요일부터 곧바로 크리스천의 모습은 찾을 수 없는 크리스천의 모습을 대변한 말입니다.
그래서 주일 예배에서만 거룩한척을 하고, 평일에는 어떠한 비기독교인과도 차이를 알 수 없는 똑같은 삶을 사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기도교인이 선데이 크리스천입니다.
선데이 크리스천이라는 말이 뭐 최근에는 많이 들리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언제 많이 쓰였는지도 정확히는 제가 알지는 못하는데, 제가 중등부 교회를 다닐 때 상당히 많이 들렸던 말이에요.
그렇다는건 무슨 말일까요? 그 당시 세계 기독교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한국 기독교 내에서 교회 생활과 삶의 생활의 괴리를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하겠죠?
이 설문조사 표는 한국 내 교회는 아니지만 2016년에 미국에 있는 한인교회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라고 합니다.
가장 높은 비율이 “언행일치 안되거나 배타적인 성도” 즉 우리가 선데이 크리스천이라고 말할 수 있는 “주일의 모습과 삶의 모습이 일치되지 않는 성도”라고 할 수 있겠죠.

2. 코로나 이후의 성도는 “노데이 크리스천”이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선데이 크리스천의 얘기도 현재 한국 교회 상황에 비교하면 긍정적일 수도 있는 평가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지나간 이후 우리의 세대는 어떻게 되었나요?
주일 예배 조차도 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제 주일 예배조차도 잘 찾지 않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주일 예배를 드려야한다는 그 의무감을 조금 해제시켰죠. 그래서 정말 많은 이유를 대서라도 주일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크게 양심에 찔리지 않을만한 상황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제가 코로나 바이러스가 걸려서 주일예배를 오지 못했던 분들을 향해서 하는 얘기가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들은 그런 분들에 해당이 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선데이 크리스천”이 아닌 “노데이 크리스천”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제가 내일 많이 강조를 하겠지만 주일 예배와 삶의 자리에서의 예배 이 두가지 측면은 함께 강조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우리가 삶의 자리에서의 예배에 대해서 나누겠지만, 사실 주일 예배와 삶의 자리에서의 예배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죠.
삶의 예배는 주일 예배의 확장입니다. 주일 예배가 회복되지 않으면 삶의 예배가 회복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위기는 결국 뭐냐면, 원래는 “선데이 크리스천”으로 대변되는 상황은 “주일에만 예배드리는 겉모습만 갖춘 모순적인 모습”이 위험했다면, 지금 “노데이 크리스천”으로 대비되는 상황은 “주일조차도 예배드리는 모습이 없는 모습”이 상당히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예배해야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삶의 예배로의 확장의 시작은 주일 예배입니다.
오늘 본문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바로 “삶의 자리에서의 예배”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1. 삶의 예배는 우리의 몸이 거룩한 산 제물이 되는 것이다.

로마서 12:1 (NKRV)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1) “너희 몸을”
지금 로마서를 쓰고 있는 사도 바울은 “우리의 몸”을 드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몸”이라는 말은 단순히 육체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의 몸”은 우리의 육체와 영혼 모두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면, 여기서 “드리라”라고 하는 말이 헬라어로 “파라스테사이”라는 말인데, 이것은 제사 용어입니다.
유대인들이 제사 드릴 때 혹은 유대인이 아니더라도 당시 신을 믿던 사람들이 자신이 믿는 신에게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이나 무언가를 드리는 그 동사가 바로 “파라스테사이”에요.
(현대와는 다르게 거의 모든 사람들이 종교가 있었고, 일종의 의식을 치뤘음)
그러니까 무슨 말입니까? 제사에 드리는 제물을 어떻게 드립니까? 그대로 드리잖아요.
그대로 드리는 것. 그러니까 그 제사물의 육체뿐만 아니라 그 영혼까지 다 드리는 것을 “드리라”라는 동사로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의 몸을 드리라는 것은 제사 용어로 우리 몸을 제물로서 그대로 드리라는 겁니다.
우리 몸만 드리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과 영혼 모든 것을 다 드리라는 거에요.
이것은 어떠한 드림을 얘기하는 걸까요? 우리의 전인격 모두를 드리라는 말입니다.
심지어 전인격을 드리는 예배는 어떤 예배냐면, 우리의 삶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 같은 것들조차도 다 포함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무언가가 있을거에요. 단순히 물질들 뿐만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지식도, 여러분들이 살아가면서 사용하고 소비하는 시간들도,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 다 드리라는거죠.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의 몸을 드린다는 것은 전인격을 다 드리라는 말로써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다 드리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로마서 12:1 (NKRV)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 전인격을 다해서 드리는 예배가 바로 “영적 예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바로 우리는 “삶의 예배”라고 말할 수 있겠죠.

2. “영적 예배”는 영에 국한된 것도 아니고, 삶의 모든 차원으로 확장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의 모든 전인격을 다해서 드리는 예배가 “영적 예배”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바울은 단순히 영적 예배는 영적인 부분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영적 예배는 바로 삶의 모든 차원으로 확장됩니다.
영적 예배가 영에 관련된 일이라고 국한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요? 단순히 우리가 아는 것이나 우리의 마음과 감정에 관련된 것들만이 예배라고 착각할 수 있겠죠.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는거죠.
오히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라고 말하면서 이것이 영적 예배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이 이 구절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쉽게 말하면 세 가지 명제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1. 삶의 예배는 육체만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다.
2. 삶의 예배는 영적인 차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3. 삶의 예배는 우리의 전인격을 하나님께 드려서 그 예배를 삶의 모든 차원으로 확장시키는 일이다.

3. 삶의 예배의 회복의 결과 (2절)

1절에서 말하는 삶의 예배가 회복되면 일어나는 결과가 있습니다.
로마서 12:2 NKRV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것은 “삶의 변화”입니다.
삶의 예배가 회복되면 우리의 삶 전체가 변화합니다.
우리의 삶이 어떤 모습으로 변화될까요?
먼저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올바른 예배의 대상”이 회복되었을 때 일어나는 변화이죠.
여러분 우리의 예배의 대상은 누구이신가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라는 예배의 대상을 회복했기 때문에 이 세대를 본받지 않습니다.
조금은 어려운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여러분 이 시대 속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 가운데 신을 섬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로마 시대 당시에만 해도 신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마음에 섬기지 않는다면 다른 신들을 분명히 하나 이상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무교”혹은 “무신론”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사람들도 사실은 일종의 신을 섬기고 있는거죠.
그들의 마음 가운데 그들은 자신의 삶의 목적을 두는 무언가를 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교일지라도, 혹은 무신론자일지라도 그들은 그들의 삶에서 가치있다고 판단되는 무언가를 향해 끝없이 삶을 살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1절에서처럼 우리의 전인격적인 예배가 회복이 되면 바로 진정으로 우리의 창조주시며, 구세주이신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정신인 것이죠.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은 “올바르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서 시작되며 이것은 곧 우리가 그토록이나 추구해야하는 “거룩한 삶”입니다.
거룩함.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거룩한 삶은 단순히 경건해 보이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누구를 섬기는가에 따라서 거룩한 삶이 정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세상 사람들이 섬기는 것을 똑같이 따라 살아가면 우리는 거룩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긴다면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죠.

그리스도는 무엇을 하셨는가?

1. 원래 우리의 예배는 이렇게 드릴 수 없었다.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원래 우리는 예배를 이렇게 드릴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죄가 우리 모두를 죄인으로 만들어버렸고, 죄인의 속성은 하나님과 함께 하거나, 만날 수가 없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주신 것이 바로 “성전”이었죠.
게다가 그 성전은 유대인들에게만 허락되어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가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예배에 대한 생각을 평소에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마음에 있었던 풀리지 않는 영적인 갈급함을 어떻게 채울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어렴풋이 과거 조상들로부터 내려오는 신인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드려야한다는 얘기를 들었겠죠.
예수님은 성전에서만 예배를 드릴 수가 있었다고 인정하십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갈급함이 있던 여자에게 엄청난 소식을 전해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어디서든 어느 곳에서든 예배드릴 수 있다”라는 소식이었습니다.
요한복음 4:21 NKRV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예배를 드리는 시간과 공간이 자유로워진다는 것이상의 의미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바로 우리가 드려야 할 “삶의 예배”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시간과 장소의 제약이 풀린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이 그들의 삶 전체를 드려서 예배드릴 날이 온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영과 진리로 예배드린다”라는 말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삶 전체를 드리는 “영적 예배”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지난 주 설교 때 들었죠? 우리의 성전이 누가 되어주십니까? 예수님이 되어주시죠.
요한복음 2:21 NKRV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이 우리의 성전이 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십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성전에서 제사드리는 일은 불필요해졌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그 예수님이 나와 하나되는 연합을 겪게 됩니다.
이것이 구원이죠. 구원은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연합인거에요.
그러니까 우리 마음 가운데 계신 예수님이 이제 성전이시니까 우리 마음이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성전을 가지고 모든 삶을 제사물로 드리는 예배가 영적 예배라는거에요.
우리는 한국 사람이죠. 유대인도 아니에요.
우리는 성전이 있는 곳하고도 거리도 멀고요. 우리는 옛날 그 제사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원래 죄인이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 가운데는 항상 그 더러움이 가득한 우상들만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배드릴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배 드릴 수 있는 자격이 생긴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으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고, 그분을 믿는 우리 마음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영적 예배, 우리의 전인격과 삶을 드리는 삶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받은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삶의 예배를 마땅히 드려야합니다.
여러분 예배를 왜 드리나요?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에 감격한 자들이 예배드리는 겁니다.
구원의 은혜가 감사한 자들은 그들의 삶을 드립니다. 그것이 영적 예배에요.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1. 우리의 시간과 물질을 드리고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들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우리 마음 가운데 계시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예배드립니다.
그러면 우리가 우리의 삶을 드려야하는데, 삶을 드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이제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2. 내 삶이 얼마나 나아질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은 아직 변화받지 못한 죄인의 고민일 뿐이다.

3. 삶의 예배의 회복은 삶의 회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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