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이는 예배의 시작: 초대교회 예배를 회복하자

2023 여름수련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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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믿는 사람이 모든 물건을 통용하다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서론

1. 공예배의 유래

공예배를 우리는 “모이는 예배”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주일 예배”가 공예배이죠.
그리고 보통 비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기독교인도 예배라고 하면 “주일 예배”를 생각합니다.
어제는 우리가 “삶의 예배”의 측면을 얘기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동시에 “삶의 예배”와 함께 삶의 예배의 시작인 “주일 예배” 이것을 우리는 “공예배”, “모이는 예배”라고 얘기합니다.
이 모이는 예배의 시작이 어땠는지 우리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모이는 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정신이 회복되어야 하고, 더 이상 매주 드리는 형식적이고 비생산적인 예배에서 우리는 벗어나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마음 가운데 모이는 예배를 향한 사모하는 마음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오늘 사도행전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모이는 예배 즉 공예배의 시작에 대해서 다뤄보려 합니다.
성경에 바로 첫 공예배에 대한 말씀이 잘 나와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배의 의미를 이해하고, 우리에게 하나님게서 말씀하시는 예배의 회복의 측면을 잘 들으시는 여러분 되시길 소망합니다.

본론

2. 주일 공예배의 시작 (본문)

이러한 의미를 가진 주일 공예배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공예배는 교회의 탄생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승천하시고난 후 예수님의 약속대로 성령이 그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에게 임합니다.
그리고나서 교회가 탄생하게 된 교회의 태동, 시작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본문을 보면 지금 우리의 공예배와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공예배의 구성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하죠? 교회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성전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생각했을 때, 교회가 시작되면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공예배가 시작되는 것도 마찬가지인 겁니다.
(1) 오순절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한번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1절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1 (NKRV)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오순절 날”이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한 곳에 모였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롯한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그것보다 더 큰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예수님의 승천까지 함께 경험한 증인들”이라는 점입니다.
이들이 오순절 날에 모입니다.
이것이 무엇의 시작일까요? 바로 공예배의 시작입니다.
오순절은 유월절이라는 절기가 지난 후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이것이 세보면 주일이 되는데요, 이 주일에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고 따른 증인들이 한 곳에 모입니다.
이 구절이 유명한 이유는 “초대교회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본문을 그대로 잘 읽어보면 이것은 “초대교회”의 시작이면서 “공예배”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교회의 정체성은 바로 “모이는 예배”로부터 시작됐었습니다.
교회가 시작되는 곳은 반드시 예배가 시작됩니다. 만약 교회가 부패하고, 썩어가고 있다면 모이는 예배가 분명히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이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공예배, 모이는 예배의 정신은 무엇일까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한 자들이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정신”입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활을 함께 경험한 자들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통해서 우리는 새생명이 우리에게 오게 된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는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모이는 예배에 오게 될 때 가장 중요한 정신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기억하는 것”과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2) 성령이 충만한 예배 (2-4절)
사도행전 2:2–4 NKRV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런데 예수님을 위해 모인 자들에게 “성령”이 옵니다.
불의 혀의 형상을 한 성령님의 충만함으로 모두 각자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방언의 은사가 나오긴 하지만, 우리는 방언보다 “성령의 충만함”에 집중하기 원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인하여 방언의 은사가 있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 이후의 본문을 통해서 일어나는 모든 예배의 모습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인한 일이라는 것을 잘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충만했을 때 일어났던 첫 예배의 시작이 어떤 모습으로 이루어졌을까요?
(3) 말씀의 선포 (14절)
사도행전 2:14 (NKRV)
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베드로와 열한 사도가 함께 서서 크게 말합니다. 뭐라고 말하나요?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나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라고요.
여러분 이 구절은 예사 구절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약 성경을 많이 봐왔다면 이 구절을 들어봤을 겁니다.
신명기 6:4–5 NKRV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스라엘아 들으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쉐마”라는 히브리어 단어를 들어보셨나요? 이 “쉐마”라고 하는 표현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해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실 때 사용하셨던 특별한 표현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들고 그대로 선포할 때 “들으라”라고 쉐마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베드로와 사도들이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번역상 다르게 되었지만 똑같은 말입니다.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라는 말이 바로 “들으라”라는 말이죠.
모세는 이스라엘의 리더였음과 동시에 “선지자”였습니다.
신명기 18:15 NKRV
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모세가 “나와 같은 선지자”를 미래에 보내실 것이라고 말하는건데 이것으로 보았을 때 모세는 분명히 “선지자의 역할을 맡았던 자”가 확실하죠.
그런데 오순절에 최초에 초대교회의 예배가 시작되었을 때, 사도들이 모세의 하나님 말씀 선포의 표현과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무엇을 의미할까요? 열두 사도가 선포하는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심지어 놀라운 사실은요, 오순절은 원래 구약에서부터 이어오던 절기인데, 모세가 오순절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시나요?
모세가 오순절에 하나님의 말씀인 십계명을 받습니다.
지금 우리 본문이 정말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구약 배경 안에서 열두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선포하는 선지자로서의 사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에서 선지자, 신약에서 사도가 이어져서 지금 사도와 선지자들의 말씀 선포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예배에서 설교죠.
설교는 단순히 좋은 말솜씨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설교는 논리적인 구성을 통해 사람들을 이해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모이는 예배의 설교 시간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시간”입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 믿으시나요?
여러분이 주일에 모이는 공예배에서 선포되는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된느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해야할 것은 무엇이겠어요?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의 귀를 열고 듣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공예배가 회복되는 중요한 정신이죠.
들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순종하셔야 합니다. 듣고 순종함이 설교를 선포하는 자도, 듣는 자도 다 행해야하는 마땅한 예배에서의 자세입니다.
(3) 말씀의 선포를 듣고 일어난 회개와 죄 사함의 역사
사도행전 2:37–38 NKRV
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설교 말씀이 선포되고 그것을 듣는 자들이 말씀을 듣자 무슨 역사가 일어납니까?
그들이 “마음에 찔리고”, 서로에게 “어찌할까?”하고 해야할 바를 모릅니다.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르게 선포되고 그것을 듣는 자들은 먼저 자신의 더러움과 죄악으로 인하여 마음에 양심이 회복됩니다.
그들의 회복된 양심은 그 죄가 얼마나 더러운 것인지 깊이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그 죄가 얼마나 더러운지 알게 되면요,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그 죄를 해결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 죄는 하나님 앞에서 존재하기조차 부끄러운 수치스러운 죄이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최초에 죄를 저질렀을 때 그들이 했던 반응은 “숨는 것”이었죠.
지금 비슷한 반응이 일어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뭐라고 대답하나요 38절에서?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세례가 무엇인가요? 옛 과거, 죄인의 신분에서 성령으로 인하여 씻겨지고 깨끗해졌다는 의미를 가지는 의식이죠. 죄 사함과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수치심으로 인하여 숨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탓하시지만 동물을 죽여 가죽옷을 입히심으로 수치를 깨끗케 하시죠.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도, 지금 우리들도 동물 옷으로 수치심을 가리는 수준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는 어떤 은혜냐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죄 사함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죽어주셔서 우리의 수치를 대신 다 받으시는 것입니다.
단회적이지 않고 영원하고, 가죽 옷은 헤어지면 끝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의 옷은 영원히 헤지지 않죠.
우리의 예배에서 말씀을 듣고 우리의 마음 가운데 밝혀지는 더러운 죄들이 우리에게 드러나고,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 이제 예수님 없이는 나의 죄를 해결할 수 없는 그 절박함에 무릎꿇고 회개하고, 죄 사함을 구해야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요? 원래는 불가능한 일을 예수님께서 대신 죽어주심으로 우리의 수치와 모든 죄가 다 해결되는 일을 모이는 예배를 통해서 겪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일 예배에서, 길벗교회 청년부 예배에서 이러한 모습이 회복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여러분의 죄악이 드러나면, 그것을 마음 깊은 심연으로 끌고 가서 숨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앞에 그대로 드리고 죄사함 받는 역사가 일어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4) 나눔과 헌신
사도행전 2:42–47 (NKRV)
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길지만 우리가 밑줄 친 부분을 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42절에서 보면 교제하고 떡을 뗍니다.
44~46절을 보면 물건을 서로 통용합니다. 서로의 필요대로 나누죠.
제가 여기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단순히 교제 혹은 통용 그 자체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헌신의 자세”입니다.
헌신에는 희생이 필요하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함이 회복되면 사랑이 회복되고, 그 사랑으로 인해서 자발적으로 헌신하게 됩니다.
교제하고 떡을 떼는 것은 당시 교회가 가지고 있던 재정을 사용했다는 것이 아니겠죠. 자신이 가지고 올 수 있는대로 먹을 것을 가지고와 서로 나누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부족함이 있는 자들도 사랑으로 함께하며, 서로 함께 나누는 것이죠.
물질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이것은 예배가 회복되면 나타나는 중요한 현상입니다.
예배가 참되게 회복된다는 것은 곧 사랑으로 인한 헌신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예배에서 나눔, 헌신은 어떤 방식으로 나타날까요? 직접 공예배에서 드러나는 모습은 “헌금”입니다.
여러분 헌금의 가장 근본적인 정신은 무엇인가요? 이웃 사랑이 회복됨으로 나타나는 헌신의 마음입니다.
물론 가장 먼저로는 내가 가진 모든 소유가 하나님께 속해있는 것이라는 신앙의 고백이겠죠.
그러나 이웃을 향한 자발적인 헌신의 마음이 바로 헌금을 하는 시간입니다.
낮 시간대 강의 시간을 통해서 헌금을 통한 헌신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생각해봤었습니다.
헌금은 1. 하나님이 내 모든 것을 소유하셨다는 신앙의 고백이며, 2. 교회의 섬김의 사역을 위한 헌신 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타나는 성도들의 헌신의 모습은 하기 싫은 마음을 품고 억지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 나누기 위하여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이는 예배 속에서 우리의 이러한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헌신이라는 표현이 지금 우리 세대에게는 결코 와닿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 세대에서 정말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의 헌신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되는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세대를 막론하고, 우리는 헌신을 해야하는 자들입니다. 예배의 회복에는 그 헌신의 마음의 회복이 함께 담겨있는 것입니다.
헌신은 여러가지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ㄴ다. 단순히 물질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에요.
우리의 시간을 하나님께 드릴 수도 있습니다. 찬양팀 너무나도 훌륭한 헌신이죠. 왜요? 예배의 찬양을 위해서 토요일 따로 시간을 드려서 헌신하지 않습니까? 임원, 리더들 우리 수련회 준비하면서도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드립니까?
시간뿐만 아니라 우리의 달란트, 우리가 가진 재능으로 헌신할 수도 있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물질, 그냥 대놓고 말하겠습니다. 돈 얘기가 나오면 상당히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왜 그럴까요? 돈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강력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돈은 내 것. 그 외에 것은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
그만큼 돈이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느 ㄴ것이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어떤 것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지에 따라 우리가 무엇을 예배하는지가 달려있다는 사실을요.
우리는 예수님께 찾아온 한 부자 청년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그 부자 청년은 어떻게 구원을 얻는지 물으며, 자신이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켰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부자 청년에게 너의 모든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한 자들에게 나누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부자 청년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근심하며 갑니다.
예수님이 구원을 얻으려면 재산을 모두 팔아서 기부해야한다고 조건을 거는 것이었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죠. 그런데 왜 그 부자청년에게는 재산을 다 팔라고 명했을까요?
예수님은 그 청년의 마음을 이미 다 보고 계신거죠. 그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그의 삶에서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알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부자 청년의 마음 속에서 다른 것은 다 양보할 수 있으나, 양보할 수 없는 단 한가지를 꼬집으신 겁니다. 그것이 물질이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이, 그 물질이 섬김을 위해, 나눔을 위해 더 나아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쓰임받는다는 사실을 알게되지 않았습니까?
물질을 헌신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받게 되는 귀중한 훈련입니다.
여러분 물질뿐만 아니라 다른 부분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거두어가실 때 여러분은 끝까지 그것을 붙잡고 계실겁니까?
언젠가는 우리의 생명을 거두어 가실 때에도 우리는 그것을 드려야할 자들입니다.
우리의 모든 소유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인데, 우리는 계속해서 그것들을 놓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예배가 시작되며 예배가 회복되었을 때, 그들은 헌신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시간과, 물질과 그들의 소유를 헌신하고 나누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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