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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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회복
하나님의 회복
종종 삶이 갑자기 확 변화되어서 거의 새로 태어난 것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죽을병에 걸렸다가 큰 수술을 받고 잘 치료되어 건강을 회복하는 경우입니다. 만약 그 사람을 그냥 그대로 두었다면 분명히 병으로 죽었을 텐데, 좋은 의사를 만나서 수술을 받는 바람에 기적적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이 어떻겠습니까? 너무나도 감격스러울 것입니다.
또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뇌사 상태에 빠져 이제는 가망이 없다고 했는데 갑자기 살아난 사람들이 가끔 있고, 더 놀라운 것은 그 사이에 천국을 다녀왔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 말들을 다 믿을 수는 없지만, 가끔 보면 정말 성경에서 묘사하는 것과 굉장히 비슷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진짜 갔다 온 사람의 경우에는 그 삶이 확 바뀐다는 겁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을 돌이켜보면서 ‘내가 그래도 그럭저럭 잘 살아왔다.’라고 합니다. 물론 후회가 남는 순간도 있지만 ‘내가 남을 해코지한 것도 아니고, 사기 친 것도 아니고, 남을 죽인 것도 아니니, 그럭저럭 잘 살아왔구나.’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생각입니까?
우리는 착하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 ‘저 사람은 예수 안 믿어도 천국에 갈 사람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그건 네 생각이고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의 삶이 실패한 삶이라고 하십니다. 도저히 천국에 올 수 없는 삶이라고 하십니다.
세상에서는 성공했다고 존경받고 인정받을지 몰라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라고 했습니다.
즉, 우리가 이 세상에서 ‘내가 남들에 비해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게 살았지. 내가 남을 해친 것도 아니고, 그럭저럭 잘 살았다.’라고 나름대로 만족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그런 사람의 삶이 곧 성공했다고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은 단순히 이 세상에서 높이 올라가고 돈을 많이 벌었다고 성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공했다고 인정해주셔야 정말 성공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완전히 다시 태어나는 체험이 있어야 성공한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1.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 (1~2절)
예수님이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얼마 후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1절)
여기 보면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었고 ‘유대인의 지도자’였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율법에 아주 엄격한 바리새파였는데, 백성들이 존경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굉장히 엄격하게 율법을 지키고 너무 지나치게 지키려 전통을 만들어내서, 예수님으로부터 위선자라는 지적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율법의 열정만큼은 남들이 따라올 수 없는 종파였습니다. 또한 유대인의 지도자였다는 말은 그가 당시 유대인들의 최고 의결 기관(요즘의 국회와 비슷한 기관)이며 71명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니고데모는 요한복음에 세 번 등장합니다. 여기 3장에 나오고, 7장에 나오고(7:50), 또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장사지낼 때 나옵니다(19:39). 7장에서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모여 예수를 안 잡아왔다고 아랫사람들을 추궁하는 자리에서 그가 용감한 발언을 하는데, 이런 점으로 볼 때 그가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었다고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유대사회의 최고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는 최상위층 지도자였던 니고데모가, 나사렛에서 온 떠돌이 랍비 예수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아주 특이한 일입니다. 바리새인들 중 예수님에게 호감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알아보기 위해서 집에 초청한 사람은 있었지만, 호감을 가진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나 표적을 보면서 저 예수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졌습니다. 특히 그가 행하는 일들을 볼 때 ‘저가 혹시 정말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라는 떠돌이 랍비를 찾아간다는 것은 유대의 가장 높은 지도자로서 자존심이 상하는 일입니다. 또 다른 바리새인들로부터 압박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면 소문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오는 데에는 걸림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어떻게 합니까?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2절)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밤’에 찾아왔습니다. 그가 왜 밤에 찾아왔는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합니다.
니고데모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위치였습니다. 그래도 그는 아주 용기 있게 와서 친절한 말로 이야기합니다. “랍비님,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행하시는 그런 표징들을 아무도 행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친절하고 부드럽습니까? 그리고 솔직합니까? 이 말은 메시아를 기다리던 경건한 유대인으로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지켜보면서 예수님을 향해 사실은 질문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보니 당신은 메시아 같은데, 메시아(그리스도) 맞으시죠?’라고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2. 위로부터의 태어남 (3~9절)
그런데 이때 예수님은 아주 이상한 대답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3절)
지금 ‘선생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입니다.’라고 칭찬을 하는데 갑자기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하시니, 굉장히 엉뚱한 대답인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것이 아주 핵심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유대 민족을 구원해줄 메시아, 구약에 예언된 그 구원자(그리스도)를 고대하면서 ‘당신이 그리스도입니까?’라고 묻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관점에서 메시아는 유대인들에게 정치적 해방과 자유를 주는 분입니다. 지금 자기들을 압제하던 로마를 물리치고 유대 민족을 해방시키고 자유를 줄 뿐 아니라, 세계 최고의 민족으로 이끌어줄 그러한 구원자를 유대 백성들이 기다렸습니다. 로마로부터 자기들을 자유하게 하고 예루살렘에 다시 하나님의 주권을 회복하는 그 메시아입니다.
니고데모는 여기서 솔직하게 또 진실하게 ‘예수님이 과연 우리 유대인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실 분인가’를 물은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거듭나야 볼 수 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유대인뿐 아니라 온 인류에게 주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 니고데모처럼 경건한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하나님 나라, 즉 유대 민족이 자유를 얻고 해방되고 세계 최고가 되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 떵떵거리며 군림하는 하나님 나라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래서 뜬금없어 보이는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네가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와 진짜 하나님 나라는 완전히 다르다.’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종교적 사고방식과 습관으로 볼 때 이런 말은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니고데모의 마음에는 당연히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에 나타날 영광과 성공을 바라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종교적으로 얼마나 열심 있는 사람이었으면 그렇게 높이 올라가고 공회원까지 되고 바리새파로 열심 있는 사람이었겠습니까? 또 상당한 인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전혀 교만한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약간 잘난 체하는 모습은 있지만 교만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고, 또 진실한 열심이 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그에게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즉 ‘거듭나야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라고 하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전혀 다른 관점에서 하나님 나라를 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땅에서 성공적으로 살 것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 유대 민족이 잘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가 로마를 물리치고 정치적으로 해방되고 세상을 다스리는 민족이 될 것인가?’ 같은 것에 집착하지 말고, 성공과 실패를 영생의 관점,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거듭나다’라는 단어가 제 성경의 주를 보면 ‘또는 위에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거듭’이라는 헬라어가 아주 유명한데 ‘아노텐’(anōten)이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위에서’(above)라고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거듭난다’라고 번역하면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체험이 강조되는 표현인데, ‘위로부터’라고 번역하면 어디서부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근원을 강조하는 표현이 됩니다. 하늘로부터, 즉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거듭난다는 것은 이 땅의 것으로 되는 게 아니라 하늘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만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밤중에 진실함과 용기를 가지고 주님을 찾아와서 ‘당신이 메시아가 맞습니까?’ 하고 묻는 니고데모의 마음이 어떤지를 잘 아셨습니다. 진실하고 겸손했지만 그는 생명의 관점에서 볼 때 아직 하나님 나라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는 아직 영적이지 못하고 종교적이었을 뿐입니다.
여러분, 종교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다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 중에도 종교적인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심지어 그것을 ‘영적’(spiritual)이라고 표현합니다. 요즘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영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영성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도 진짜 영성,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종교적인 체계에서 나오는 그 당시 유대 종교에 열심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아직 들어가지 못한 사람인 겁니다. 그래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는 뭐라고 대답합니까?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4절)
메시아와 하나님 나라에 그토록 관심이 많아서 예수님을 찾아온 유대 지도자요 선생인 바리새파 니고데모가 어떻게 이렇게 어리석어 보이는 질문을 할 수가 있습니까? 주님이 거듭난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 그 말이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 나와야 한다.’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니고데모가 모르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까? 그리고 유대 지도자들은 사람이 죽은 다음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환생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어리석은 대답을 할 수 있습니까?
니고데모에게는 위선이 없었습니다. 자기가 지금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아, 그렇죠. 선생님, 맞습니다. 그 말씀이 맞죠.’라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정말 어리석은 것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사실은 진리를 찾는 마음으로 예수가 정말 메시아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니고데모가 찾아온 것인데, ‘어떻게 사람이 모태에 들어갔다 나올 수가 있는가’ 하는 질문은 사실 거듭남의 의미를 묻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거듭남이 가능한지를 묻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말 거듭남이 뭔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관점으로는 불가능한 일인데 이게 어떻게 가능하냐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눈에 보이는 것들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는데, 어떻게 다 알고 있는 이 상식을 초월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땅에 임할 하나님 나라를 믿으면서 평생 살아왔고 메시아가 오셔서 우리에게 그 나라를 주신다고 믿고 살아왔는데,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이 잘못된 것이라는 말입니까?’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결코 바보가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믿어 온 이 익숙해진 유대 종교의 틀을 어떻게 벗어나야 한다는 말입니까?’를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중에 니고데모에게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어떻게 그것을 모르냐’고 하시는데(10절), 평생 민족적인 우월감을 가지고 살아온 유대인들이 비록 다른 민족들의 지배를 오래 받았고 지금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그러나 이제 오셔서 자기들을 구원해주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니고데모와 유대 지도자들이 과연 하나님 나라를 정말 받아들이고 바뀔 수가 있겠습니까?
종교적 것에 너무 익숙해져서 존경도 받고 그것이 자기 의가 되어서 살아가던 이 사람들, 또 그것으로 명성을 높이던 이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죄인이라고 인정하며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사실 예수님이 도전하시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5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하는 3절 말씀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하는 말씀이 같은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같은 뜻입니다. ‘거듭난다’는 말이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말과 같고,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같은 의미로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묻는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자기 의와 공적을 내세우고 율법적 열심을 내세우며 이 땅에서의 성공과 형통을 인생의 최종 목표로 추구한다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결국 거듭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을 말한다고 보면 됩니다.
만약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따로 구분한다면, 지금 시대의 눈을 가지고 거꾸로 2천 년 전에 쓰인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옳은 것이 아닙니다. ‘물과 성령’은 같은 것을 말한다고 보는 게 타당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에 대해 지적으로 맞는다고 동의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런 우리의 지적 동의가 필요 없으십니다. 우리가 동의를 하든 안 하든 진리는 진리인데 무슨 우리의 동의가 필요합니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말은 이 땅에서의 행복과 진정한 성공이 권세나 재물이나 높이 올라가는 것에 있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예비하신 하나님 나라가 있기 때문에 그 나라를 바라보며 그 나라의 관점으로 살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나는 예수 믿고 천당 간다.’라는 차원이 아닙니다. 그것이 진짜 예수 믿는 목적이라면 믿자마자 죽어서 천국에 가면 되는데, 그렇지 않고 지금 살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말은 하나님 나라의 관점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살라는 겁니다. 그 사명을 가지고 살라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드러내는 사명을 우리에게 주신 겁니다. 그것이 거듭남입니다. 거듭남이라고 하면 ‘위로부터 태어남’입니다.
만약 재물이 거듭남을 방해하고, 지식이 방해하고, 심지어 종교적 위치나 익숙함이나 전통 같은 것이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듭남의 증거는 내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얻고 누리게 될 생명을 믿고 그 생명을 보여주며 사는 고백과 믿음이 있는가 하는 것이 진짜 거듭남의 증거이지, 우리의 종교적인 열심이나 가진 것이 증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거듭남, 즉 구원은 위로부터 오는 것이지 아래로부터 오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저 사람은 너무 착해.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 예수 안 믿어도 저런 사람은 천국에 가야지, 저런 사람이 지옥에 가면 말이 되나?’ 이것은 무슨 의견입니까? 땅의 의견입니다. 아래의 의견입니다. 아래의 의견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는가, 그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6절)
이것은 너무 당연한 말씀이 아닙니까? 한마디로 하면, 육은 아래이고 영은 위를 말합니다. 이 땅과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나오지만, 사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천국을 ‘하나님 나라’로 표현하지 않고 ‘영생’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뭡니까? 결국 아래가 있고 위가 있다는 것을 계속 강조합니다.
개는 강아지를 낳습니다. 소는 당연히 송아지를 낳고, 말은 망아지를 낳습니다. 이건 바뀌지 않습니다. 뭐가 하나 태어났는데 보니까 강아지입니다. 그럼 누가 낳은 겁니까? 개가 낳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강아지를 좋아해도 개가 사람을 낳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개를 낳는 것도 아닙니다. 누가 낳아주느냐에 따라 태어나는 존재가 결정됩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게 바로 그겁니다. 아무리 밑에서 해봐야 아래에 있는 존재밖에는 낳지 못한다는 겁니다. 위에서 낳아주셔야 정말 하나님 나라의 시민,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낳아주셔야 하나님의 자녀이지, 우리끼리 아무리 ‘저 사람은 착하고, 예수 안 믿어도 천국에 갈 수 있다.’라고 해봐야 그렇게 해서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이 낳아주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것을 계속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나온다는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다시 태어나봤자 밑에서 태어난 것 뿐입니다. 똑같은 방식으로 태어난 겁니다. 다른 게 아닙니다.
아무리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나고 혹시 수십 번을 되풀이하더라도, 자동적으로 아브라함을 통해 이어진 언약의 복의 백성이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또 이방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유대인들처럼 할례를 받고 유대교로 개종하며 겉으로 바꾼다고 해도, 그건 무늬만 바뀐 것이지 진짜로 속이 바뀐 게 아니라는 겁니다. 위에서 태어난 게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유대인들의 착각이었습니다.
여러분, 믿지 않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서 그리스도인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을 ‘회심(回心)’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또 다른 말로 ‘개종(改宗)’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개종은 뭡니까? 내가 어제까지는 장로교회에 다녔는데 다음 주부터는 가톨릭 성당에 다닌다는 것은 개종입니다. 아니면 내가 성당을 다니다가 불교로 바꿔야겠다고 해서 절에 다니면 그것도 개종입니다. 또 절을 다니던 사람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교회에 다닐 기분이라거나, 점쟁이에게 가서 점을 쳐보니까 ‘당신은 교회에 가야 할 사람이다.’라고 해서 이제는 교회를 다녀야겠다고 합니다.
그런 것은 개종한 것이지 회심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야만 진짜 회심이고 믿은 것이지, 종교만 바꾸고 다니는 장소만 바꿨다고 진짜 믿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 차원을 아시겠습니까? 지금 니고데모가 말하는 차원은 교회에서 성당으로, 성당으로 절로, 절에서 교회로 옮기는 차원을 계속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게 아니고, 진짜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믿음을 가졌는지를 자꾸 물어보십니다.
니고데모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찾은 수많은 사람들은 그런 걸 계속 물어봤습니다. 바리새인들도 그렇고, 요기서 요기로 바꾸는 것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육적인 노력을 한다고 영적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격이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도 회심한 게 아니라 개종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정말로 주인을 바꾸는 게 회심인데, 기존의 욕망과 생각과 자기가 원하는 것은 그대로 두고 겉으로 종교만 바꾸는 개종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은 지금 니고데모에게 개종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회심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정말로 바꾸라는 겁니다.
그렇게 성령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합니까? ‘나는 이 땅의 것, 아래 것으로 할 수 없는 죄인이다. 소망이 없는 사람이다.’ 하고 인정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입니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7절)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기셨던 것인지, 예수님은 한 가지 비유를 드시면서 ‘위로부터 난다’, ‘거듭난다’, 혹은 ‘물과 영으로 난다’라는 말을 보충해서 설명하십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8-9절)
계속 예수님은 위의 것, 하늘의 것을 이야기하시고, 니고데모는 계속 이 땅의 수준으로 질문합니다. 그래서 이해를 계속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가 흥미롭지 않습니까? 여기서 예수님은 일종의 언어유희를 하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는 바람이나 영이나 다 ‘루아흐’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이 쓰인 헬라어로는 ‘프뉴마’입니다. 바람도 영도 모두 ‘프뉴마’입니다. 같은 단어로 언어유희를 하시는 것인데, 요한복음에 이런 것이 많이 나옵니다. 이중 의미로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먼저는 구약뿐만 아니라 자연 세계에서도 영의 일을 볼 수 있지 않느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부는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여름에 더울 때 착한 사람이나 착한 동네에만 시원하게 불어주지 않고, 미리 약속하고 부는 것도 아닙니다. 바람은 ‘임의로’ 붑니다. 자기 마음대로 붑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의인이든 죄인이든, 가진 자든 못 가진 자든 다 바람이 불어주는 것처럼, 성령도 임의로 역사하십니다. 성령은 아무 원칙도 없이 하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역사하십니다. 비록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눈에 안 보이지만 바람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히 느낍니다. 바람이 불 때 압니다. 성령의 역사도 어디서 어떻게 된 건지 우리가 이해를 못한다 해도, 분명히 성령이 역사하신 것은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유대교를 대표해서 묻는 것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이 가까이 하시던 세리들과 죄인들을 보면서 ‘어떻게 저런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까?’라고 물어볼 수 있습니다. 또 ‘어떻게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어린아이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까?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성령으로 가능하다.’ 하십니다.
우리가 이 아래의 눈으로 볼 때는 ‘저 사람은 천국 갈 사람, 저 사람은 지옥 갈 사람’이라고 나름대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눈, 위의 눈, 하나님의 관점으로 볼 때는 그게 거꾸로 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중요한 건 뭡니까? 이 땅의 기준을 가지고 내가 판단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게 가장 중요한 겁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계속 땅의 기준으로 보고 있고, 예수님은 계속 하늘의 기준을 가지라고 이야기하십니다.
3. 하늘의 일 (10~13절)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10절)
나중에 보면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장사지내줍니다. 그 말은 니고데모도 어떻게 되었는지 몰라도 믿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함께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힌트가 여기 있습니다. 예수님이 여기서 힌트를 주셨습니다. 잘 보십시오. 뭐라고 하십니까?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마치 예수님이 ‘너는 그렇게 높고 학식이 많은 사람이 이것도 몰라?’ 하고 야단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게 아닙니다.
‘유대인의 선생’이라고 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했습니다. 굉장한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요한복음에는 이스라엘이 있고 유대인이 있습니다. 같은 게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어느 민족이든,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의 백성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니고데모를 향해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다.’ 지금은 아직 이해를 못하고 아직 믿지 못한다 할지라도 곧 믿게 될 것을 암시하시는 표현이 아닙니까? 얼마나 놀랍습니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11절)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벌써 세 번째로 ‘진실로 진실로’라고 하시는데, 이것이 헬라어로 ‘아멘 아멘’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일을 세 번째로 하십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2-13절)
또 땅의 일과 하늘의 일을 말씀하십니다. ‘땅의 일도 믿지 않는데 하늘의 일을 어떻게 믿겠느냐?’ 그런데 이 말은 ‘너희는 못 믿으니 가능성이 없다. 너는 틀렸다.’가 아닙니다.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는 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자, 이제 나를 잘 보고, 내 말을 잘 듣고, 이제는 땅의 수준이 아니라 하늘의 수준, 하나님 나라에 진짜로 들어가는 수준이 되어라.’ 하는 초청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어떤 기준으로 지금 살아가고 있느냐?’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혹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기준이 정말 하늘의 것입니까, 아니면 이 땅의 것, 아래의 것입니까? 잘 판단하를 원합니다. 점검하기를 원합니다.
니고데모와 같이 솔직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께 늘 나아가며, 그래서 우리가 이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 이 아래의 기준이 아니라 하늘의 기준, 정말 하나님의 기준과 하나님의 눈을 가지고 모든 결정과 판단을 내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