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삭을 드리다(창22: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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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3년 8월 13일 주일 청년부
제목 : 내 이삭을 드리다
본문 : 창세기 22:9-18
결단 : 내 삶 드리리 + 나의 믿음 주께있네(후렴)
# 설교 전 중보기도 제목
1) 예배를 위해서 : 모든 것 멈춰 주 앞에 나아가오니, 주로 가득 채워지는 예배의 시간 되게 하소서
2) 질병 가운데 있는 지체들을 위해서 : 코로나와 질병으로 아픔 가운데 있는 지체들이, 속히 회복되게 하시고, 후유증 없이 다시 일어나게 하소서
1. 오늘 날 문화에 녹아든 우리
1) 극개인주의 시대 : 내것이 아니라면 다 죽여라
요즘 사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단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팽배한 시대라 말하기에는 도를 넘은 것 같은 요즘입니다. 모든 것이 나를 기준으로 하여금, 내 입맛에 맞지 않다면 그것을 불필요한 요소로 여겨 제거하려 합니다.
한 영상을 보았습니다. ‘따개비’에 관한 영상이었습니다. 따개비는 바다생물에게도 그렇고, 항해를 하는 배에 있어서도 굉장히 불필요한 존재들이라 합니다. 그래서 배에 붙은 따개비를 제거하기도 하고, 때론 어부들이 항해하다 따개비가 잔뜩 붙은 동물을 보며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그 영상만 보면 따개비는 이 세상에서 결코 필요없는 존재가 됩니다. 따개비는 정말 이 세상에서 쓸모 없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무가치한 따개비를 실수로 만드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따개비는 몇몇에게 불필요할 뿐이지, 모두에게 있어 불필요한 존재가 아닙니다.
따개비 안에는 ‘타우린’이라는 성분이 있는데, 이게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춰서 혈관계질환을 예방해 준다고 합니다. 요즘은 항암과 향균식품으로서의 개발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어서 연구 중에 있다고도 합니다. 그러니 따개비는 그저 일부, 누군가에게 불필요할 뿐이지 모두에게 불필요하다 라고 정의 내리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날은 이런 원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미 “내 것이 아니라면 다 죽인다.”는 문화가 깊이 들어와 버렸습니다. 묻지마 살인을 행한 이들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결국 ‘나’ 입니다. “나는 힘든데, 쟤는 아니더라. 그게 꼴보기 싫었다.” 아니면 “사회가 나를 너무 힘들게 하더라. 살 이유가 없어 다른 이들을 죽였다.”
‘묻지마’라 해서 이유가 없는게 아닙니다. 살인대상자에 대한 기준이 없을 뿐이지 이들의 동기는 여전히 ‘나’에 머뭅니다.
2) 역사의 반복일까? 역사의 진보는 환상이었을까?
어쩌다 이런 사회가 만들어 졌을까요? 저는 어릴 적 옆 집에 이사가 오면 시루떡을 돌리던 분들의 모습이 기억이 납니다. 또 골목에서 공을 차다 옆 집에 넘겨도 공을 꺼내 주시던 할아버지의 모습도 떠오릅니다.
하지만 이제 추억이 되었습니다. 오늘 날 이런 훈훈한 분위기는 더이상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나름 차가운 시대에 따뜻함이 남아 있음을 알리고 싶어 소박하게나마 계단에서 마주치는 사람에게, 아엘이 등하원 중에 마주하는 사람들에게, 옆 가게 사장님에게 인사를 건내봅니다. 참 아쉽지만, 안받아주실 때가 많습니다.
누군가는 이런 분위기가 형성된 것을 보며 “오늘 날 사람들이 내재화된 폭력 속에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말해봅니다.
근데 저는 어쩌면 역사의 반복일 수도 있겠다 생각이 듭니다. 디모데후서 3장을 보면 말세에 사람들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기록하는데, 조금 쉽게 현대인의 성경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2절부터 5절의 말씀입니다. “그 때에는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뽐내고 교만하고 하나님을 모독하고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감사할 줄도 모르고 거룩하지도 않으며 / 사랑이 없고 용서하지 않고 남을 헐뜯고 자제하지 못하며 사납고 선한 것을 싫어하고 / 배반하고 조급하며 거만하고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고 / 겉으로는 신앙심이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 능력은 거부할 것입니다. 그대는 이런 사람들과 같이 되지 마시오.”
너무 오늘 날 같은 이 상황이 초대교회 때에도 동일하게 있었다니, 정말 역사의 반복 같지 않습니까?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듭니다. “어쩌면 역사의 진보가 환상은 아니었을까?”
여하튼 사도 바울은 이런 상황을 보며 “그런 사람처럼 되지 말고 피하라” 말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현실적으로 가능합니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것입니다.
3) 이미 문화에 매혹당해버린 우리
왜 어려운지 아십니까? 이미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 문화에 매혹 당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 볼까요? 로마제국이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던 시기에 사람들은 제국의 군사력 앞에 굴복했지만, 사실 이들은 군사력 앞에 굴복했다기 보다, 이미 로마의 화려하고 세련된 문화에 매혹 당해버린 거였습니다.
로마 제국의 통치를 받으며 힘들어 했지만, 그러면서도 극장과 경기장에서 펼쳐진 공연을 관람하기도 했고, 신전을 기웃거리며 구경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들어온 문화에 매혹되어, 소위 “로마 문화가 없던 세상이 떠올려지지 않는”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이미 “내 것 지키기” 라는 문화에 매혹 당한 삶을 살아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새벽을 깨워 기도하기에 힘썼던 초기 한국교회는 화력이 약해졌습니다. 왜요? 새벽을 깨우기엔 밤에 우리가 즐길 문화가 많습니다. 자연스럽게 새벽에 잠을 자는 우리에게 새벽을 깨우기란 불가능해 졌습니다. 문화를 선동해가던 초기 한국교회는 더 이상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왜요? 조금 더 짜릿하고 자극적인 세상의 문화가 모던한 교회의 문화보다 더 재밌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화 속에 우리는 내 것을 드린다는 것에 극심한 어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2.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1) 첫째 날 : 하나님이 말씀하시다. “네 아들 이삭을 드리라”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 앞에 내어드리려는 장면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총 3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먼저 첫째 날입니다. 1절과 2절을 보니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 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첫째 날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그는 즉각 대답합니다. “네, 제가 여기 있습니다.”
그리곤 너무나 잔인한 말씀을 하십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 번제로 드리라”
제게 아엘이가 너무나 소중한 존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번제로 아엘이를 드리라 말씀하신다면 번제로 드리기 전에 제가 기절사 할 것만 같습니다. 심지어 아브라함을 보세요. 창세기 21잘 5절을 보면, 그가 무려 100세에 얻은 아들이 바로 ‘이삭’ 입니다. 노년에 얻은 이 아들이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대뜸 “아브라함아 거기 잘 있지? 잘 지내지? 그 너 아들 있자나? 이삭. 걔 좀 내게 번제로 드려라.” 말씀하시니 아브라함 입장에서 얼마나 충격일꺼고 청천병력 같겠습니까?
2) 둘째 날 : 밤잠을 설친 아브라함.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아마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을 겁니다. 어찌 잡니까. 당장 내 아들이 죽게 생겼는데. 그리고 둘째 날이 되었습니다. 3절을 보니 그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밤잠도 설쳤을 거고, 심적으로 착잡했을 겁니다.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떠날 준비를 하여 두 종과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모리아 땅의 산을 향해 걸어갑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때면서도 생각이 참 많았을 겁니다.
3) 셋째 날 : 결정의 순간, “이삭을 드리기로 선택하다”
4절을 볼까요? 하루가 지나 셋째 날이 됩니다. “제삼 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3일이라는 시간 얼마나 그의 마음이 무거웠을까, 그의 발걸음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감히 다 알 수는 없지만, 확실한 건 아브라함 일생의 가장 힘든 순간 이었을 겁니다.
심지어 눈을 들어 보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곳에 거진 다 이르렀으니 임박한 상황 속에 그의 심장은 어쩌면 미어 터졌을지도 모릅니다.
덴마크의 신학자 ‘쇠얀 키르케고르그’는 자신의 저서 ‘그리스도교의 훈련’이라는 책을 통해 아브라함의 3일길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흘 길은 아브라함 자신이 먼저 죽임을 당하는 시간이었고, 자신을 십자가에 먼저 못 박아야 했던 걸음이었다.”
4) 사실 아브라함은 알았다. 그리고 이삭은 배웠다.
이제 진짜 그는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노년에 얻은 정말 사랑하는 자신의 핏줄, 독자 이삭을 살리고 도망갈 것인가”
그런데 이 본문을 보면 이상한 점이 등장합니다. 먼저, 5절을 보세요. “함께 가서 예배드리고 ‘우리가’ 다시 돌아오겠다” 말합니다. 예배가 끝나면 이삭은 이미 죽은 목숨이어야 할텐데 어찌 같이 돌아옵니까?
그리고 9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합니다. 아니 아무리 어려도 그렇지, 100세 넘은 할아버지가 이삭을 결박한다는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5절을 보니 이삭을 ‘아이’라 표현하는데, 이 표현이 원어로 어떤 뜻인지 아십니까? 건장한 청년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100세를 훌쩍 넘긴 할아버지가 건장한 청년을 손쉽게 결박해 올렸다는 겁니다.
순순히 결박당한 이삭도, 손쉽게 결박한 아브라함도, 함께 돌아오겠다 말한 아브라함의 발언도 다 이상합니다. 그런데 이 비밀을 우리는 결국 본문을 통해 풀 수 있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알았습니다. 무엇을요? 하나님께서 이삭을 절대 죽이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 이삭을 살리신다. 3일간 그는 고통 가운데 있었지만, 그 시간을 통해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길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종들을 세워두고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거죠. “우리가 함께 돌아오겠다.”
그리고 이삭도 알았습니다. “자신이 번제물” 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번제물 없이 단 한 번도 예배를 드린 적이 없는데, 빈 손으로 올라가는 아버지가 이상해 보였을 겁니다. 그래도 그렇지, 이삭이 어찌 알았을까요? 6절이 그 힌트가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동행”은 ‘같이 가는 것’ 정도가 아니라 ‘한 마음과 한 뜻’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을 말합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 이삭과 공유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신의 고충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 고충을 들은 이삭에게도 그 3일은 고통의 시간이었을 겁니다.
그런 중 이삭이 묻습니다. “아버지, 번제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질문은 아마 이런 뜻이었을 겁니다. “아버지, 여기 불과 나무는 있습니다. 그런데 번제할 어린 양이 없네요. 제가 그 번제물이 되는 것이 맞죠?”
그리고 아브라함은 대답합니다.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다.” 이는 안심시키기 위한 대답은 아니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살리신다.”는 확신이었을 겁니다.
도대체 무엇이 아브라함을 ‘확신’으로 이끌었고, 이삭을 ‘순종’으로 이끌었을까요? 이들은 3일간 무엇을 보았을까요?
3. 그들은 그들의 이삭을 드렸다
1) 하나님을 경외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어떤 근거로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릴 수 있었는지,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12절입니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먼저, 이들은 “하나님을 경외” 했습니다. 경외가 무엇입니까? 첫째, 두려워 하는 것입니다. 둘째, 존경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일을 거절하기에 두려워 했고, 하나님의 말씀이 선한 길임을 믿어 존경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삭을 드리라 말씀하셨음에 기꺼이 순종했고,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선한 길로 인도하심에 확신했던 것이지요.
2) 하나님 말씀을 준행했다
그리고 이들이 하나님 앞에 다 내어드릴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는, 18절로 찾아볼 수 있는데,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하신 모든 것을 준행, 즉 쫓아 행합니다.
우리 삶을 뒤돌아 볼 때, 하나님이 우리게 인도하시는 길이 참 아이러니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왜 굳이 이런 길로 날 부르셨을까?”
저 역시 그런 고민을 참 많이 합니다. “왜 이어진교회로 나를 부르셨을까?” “왜 이들은 여기 앉아 있을까?” 그런데, 결국 청년들의 이야기를 들어도, 또 제가 왜 이곳에 있는지 이유를 생각해도 결론은 하나 입니다. “하나님” 입니다. 그래서 참 감사합니다. 비록 이찬수 목사님의 마치 유언과도 같은 선포였을지 몰라도, 결국 여러분들을 움직인 하나님을 보고 저를 인도하신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맞지 않습니까? 다 하나님 아닙니까?
아브라함도 이삭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했고, 하나님 말씀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반드시 살린다” 믿음을 보였고, 이삭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믿음을 보인 것입니다.
4. 결론
여러분들의 가장 소중한 것, 그것을 하나님께서 “가져오라” 말씀하신다면 어떻게 반응 하시겠습니까? 아브라함은 100세가 넘어 얻은 가장 소중한 아들 이삭을 “믿음으로” 드렸고, 이삭은 가장 소중한 내 생명이지만, 아버지로부터 충분히 밀치고 도망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을 “믿음으로” 드렸습니다.
여러분들의 1순위, 가장 귀한 것, 가장 소중한 것. 나와 하나님의 관계를 방해하는 내 삶 가장 가까이에 거하는 것, 그것 마저도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겠는가? 묻는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반응하실 겁니까?
명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것마저도 믿음으로 드릴 자를 찾고 계십니다. 바라옵기로는 여러분들의 이삭을 주저없이 하나님 앞에 내어드리고 믿음으로 순종하여, “너가 참으로 나를 경외하는구나. 너가 참으로 나의 말을 준행하는구나” 칭찬하시는 하나님을 맛보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단찬양 : 내 삶 드리리 + 나의 믿음 주께 있네(후렴)]
#말씀을 가지고
1)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 말씀에 준행하는 자의 모습이 나의 모습 되게 하소서
2) 내게 있는 이삭을,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 앞에 기꺼이 내어드리는 믿음을 내게 주소서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크고 놀라우신 사랑과
성령 하나님의 감동 감화 역사 임재 충만하심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 말씀을 준행하여, 주어진 한 주를 하나님 편에 서서 생각하며 살아내겠노라 다짐한 자들과
내게 있는 이삭을 주께서 내어 드리라 말씀하실 때 기꺼이 내어드릴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지닌 자로 결단한 자들과 삶과 가정과 교회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