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아주 뼈 빠지게 일하라는 말씀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충성하라’는 말씀은 ‘신실하다’는 뜻입니다. 변덕이 없다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faithful’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단어가 일곱 번 나옵니다. 1:5, 2:10, 3:14은 ‘충성’으로, 17:14은 ‘진실한’으로, 그리고 21:5과 22:6은 ‘신실하다’로 번역했습니다. 그 중 네 번이 ‘참되다, 진실하다’는 말과 함께 쓰이고 있습니다. 19:11에서는 ‘충신(忠信)’으로 번역했습니다. 예수님의 별명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이 충성(신실)하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신실합니다. 변덕이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설명할 때, ‘참 되다, 진실하다’는 말을 함께 써서 불변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변덕이 없듯이,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변덕이 없어야 합니다.
이 단어는 ‘믿음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부활을 맞이하지 못했던 도마를 찾아오신 주님께서 당신의 부활체를 확인시켜 주시면서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그 ‘믿는’이라는 말이 ‘충성하는, 충성된’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말 충성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충성스러운 신하를 ‘충신(忠臣)’이라 합니다. 충신, 하면 우리는 고려 말 정 몽주, 그리고 조선조 단종에서 세조로 넘어가던 때의 사육신(死六臣) 등을 떠올립니다. 이들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 버티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이라 하지 않습니까?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 다시 말해 반역을 통해서 정권을 잡고, 출세하는 치사한 짓은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 ‘충성’은 임금과 나라를 위한 충성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충성’을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시켜도 될까요? 비슷하지 않습니까? 특히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이 표현이 ‘두 주인을 섬기지 않아야 한다’(마 6:24)는 주님의 말씀과 맥이 닿고 있어 보입니다. 그 충신들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듯이, 성도는 세상과 하나님, 이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경에 ‘충성한다’라는 표현은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아주 정확한 번역입니다. “예수님은 충성하신 증인이시다(계 1:5, 3:14).” 그렇죠. 예수님은 변덕이 없으십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진실만을 증언하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칼에 목숨을 잃으셨지요. 충성스런 주님의 증인 안디바 역시 그랬습니다(2:14). 하나님의 말씀 역시 ‘신실’합니다(21:5, 22:6). 다시 말하면 ‘충성’합니다. 변덕이 없다는 뜻입니다.
‘죽도록’이라는 말은 ‘죽게 되더라도’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이렇게 번역되어야 합니다.
죽는 한이 있어도 너는 변하지 말아라.
『새번역』(대한성서공회)이나 『바른성경』도 『개역개정』과 똑같이 번역하고 있어 오해의 소지가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 두 번역본은 예수님에 관한 부분(3:14, 19:11)은 ‘신실하다’로 번역하고 있어 현대적 개념에 더 잘 맞는 듯한데, 2:10은 개역성경과 동일합니다. 정말 같아도 너무 똑 같습니다.
앞에서 ‘충성하다’는 이 말이 ‘믿음이 있는, 믿는’이란 뜻도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 “죽는 한이 있어도 믿음을 저버리지 말아라” 뜻이기도 합니다. 참된 믿음은 변덕이 없어야 합니다.
충성(忠誠, faithfulness) 왕이나 국가, 주인에 대한 변함없고 진실된 마음. 원어로는 ‘성실’, ‘정직’, ‘신실’이란 의미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충성을 가르치고 있다(마 10:17–25; 행 4:19,29; 5:29). 또 하나님께서는 평생 변함없이 당신을 진실되게 섬긴 모세를 가리켜 친히 “내 온 집에 충성한 자”(민 12:7)라 칭찬하셨다. 후에 사도 바울은 직분을 받고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자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자세로 하나님을 향한 충성을 꼽았다(고전 4:2). 이렇게 하나님께 충성을 다한 자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고(계 2:10) 큰 상급을 얻게 된다(창 15:1; 시 19:9,11).
충성(忠誠, faithfulness) 참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성. 국가 등의 조직이나 주인, 왕 등 한 개인을 향한 변함없고 지극한 마음(롬 13:1–2). 특히 성경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신실함(성실성)과 정직함을 충성이라고 언급하고 있다(마 10:17–25; 행 4:19, 29; 5:29). 하나님이 당신의 종 모세를 가리켜 ‘내 온 집에 충성하는 자’(민 12:7)라 말씀하셨다.
충성은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의 기본적인 도리로서(고전 4:2; 히 2:17), 비록 아주 사소한 일에서조차 충성을 다하여야 한다(눅 16:10). 이렇게 충성한 자에게는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마 25:23) 많은 상급(창 15:1; 시 19:9, 11)과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된다(계 2:10).
우리가 충성할 까닭이 무엇인가?
1. 하나님은 곧 우리의 마음을 아시므로 충성을 하여야 되겠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섬김에는 그 마음을 모르니까 겉만 어물어물하여 그 주인이나 인군을 속여도 알지 못하거니와 하나님은 곧 전지전능하시어 사람의 맘속까지 아시니 우리가 감히 어디서 조금인들 기망欺妄(속이고 망령되게 행함) 할 수가 있습니까?
형제여, 여러분이 하나님을 속이고 무슨 일을 할 수가 있소? 있으면 하여 보시오. 여러분의 양심은 곧 자책을 면하지 못하리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보시는 줄 안 요셉은 그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지 아니하였습니까? 형제들이여, 여러분은 충성을 다하여 섬기고 하나님을 속이지 마시오. 동양 성현聖賢도 “암실기심暗室欺心이라도 신광여전神光如電이라” 한 말이 신은 속이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오니까? 그런고로 하나님은 대단히 엄위하시외다. 불가불 충성 아니할 수가 없으니 충성을 다하여야 되겠습니다.
2. 하나님은 사랑이 지중하시고 지대하신 고로 충성을 하여야 하겠소이다.
하나님의 본질은 곧 사랑이며, 예수의 사업은 곧 사랑의 사업이외다. 그러한 고로 예수교는 사랑이라는 관념으로 중심中心한 종교이외다. 그런즉 우리 예수교는 이 사랑으로 사회문제나 가정문제나 인생문제의 근거를 삼아 해결하려 하는 것입니다.
형제여, 여러분이 오늘 배우고자 하는 이 신학은 곧 이 사랑에 관한 연구이며, 여러분이 배워서 불신자에게 전하려고 하는 동기도 곧 이 사랑의 동기이며, 여러분이 하고자 하는 이상적 생활도 곧 이 사랑의 생활로 생각합니다. 그런즉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까? 그의 사랑이 얼마나 광대합니까? 광대함이 우주를 내시고, 그중에 복잡한 사회와 다수多數한 인생을 내시어 그중에 나도 일분자一分子(한 개체)가 되게 하시는 중에 다른 사람과 같지 않고 특별히 택한 백성을 삼으셨으니 얼마나 감격합니까?
그러한 중 모든 환란 고통은 조수왕래潮水往來(밀물과 썰물이 오고 가듯)하듯 하는 중 우리의 부모처자도 다 그 고통을 면케 하시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오니까? 감격함을 마지못합니다. 또 간악하고 사특한 세상에서 날마다 죄 중에 싸여 언어 행동에 누추함을 면치 못할 죄인이로되, 하나님의 관대한 사랑은 우리를 용서하시니 감사한 것을 이로 측량키 어렵습니다. 이에 충성할 일 몇 가지를 말하고자 합니다.
충성할 일이 무엇이오니까?
1. 부탁하신 일에 충성하시오
형제여, 주께서 무슨 까닭으로 여러 형제를 이곳에 모아 놓으셨습니까? 주께서 마지막으로 베드로에게 부탁하시기를 “내 양을 먹이라” 하셨습니다. 오늘 형제들에게도 이 부탁이 계심으로 이곳에 왔습니다. 천민天民(천국의 백성)의 생명을 형제들에게 부탁하셨으니 형제의 짐이 경輕하지 않습니다.
형제들이 월급이나 탐하고 명예나 취하려고 함이 아니외다. 그의 양을 먹여야 형제들은 직무를 다하는 날이외다. 양은 다수多數가 없습니다만 무리를 탐하지 마시오. 많은 무리 중에 열매가 많으리라고 생각은 하오리다. 그러나 소수少數라고 버리지 마시오. 예수께서는 신자 두셋 중에도 계신다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양 백 마리 중에 잃었던 한 마리 양도 귀히 사랑하셨습니다.
형제여, 하나님 백성을 잘 기르시오. 이것은 주의 부탁이외다. 부탁에 아무쪼록 충성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2. 계명을 충성되게 지키시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천하를 주고 생명을 바꾸겠느냐?” 하셨으니, 형제여 생명이 중하십니까? 계명이 중하십니까? 저는 계명이 중하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계명을 아담과 하와가 범犯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모든 생명을 사망에 버려 두셨습니다. 그리고 주는 그 계명을 완전케 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자고로 모든 순사殉死(순교)한 선지들도 그 계명을 지키기 위하여 자기들의 생명을 땅에 떨어뜨렸으니, 형제들이여 우리가 계명을 지킴에 그 처지와 경우를 따라하겠습니까? 계명은 처지와 경우를 허락하지(고려하지) 않습니다. 계명을 범하면 범하는 자는 대소인을 무론하고 다 사망에 들것이외다. 우리는 사망이 무서워 지키는 것이 아니라 곧 우리에게 지킬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영광과 복이 있습니다. 오늘 역경에서 슬피 부르짖는 자는 다 계명을 범한 자이외다. 그러나 광휘光輝(아름답게 번쩍이는 빛) 있는 역사를 가지고 자손이 번성하며 사업흥성事業興盛한 국가나 개인은 다 그의 계명을 잘 지킴에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문명의 낙오자는 다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요, 문명이 극도에 달하여 세계에 자랑하게 될 만한 자는 다 계명을 잘 지킨 자들이외다.
형제여, 주님의 부탁하신 계명을 우리가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지키면 땅에서도 창성하고 장수할 것이외다.
3.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
형제들을 택함은 무슨 까닭이오니까? 자못 주께서 마지막으로 부탁하시기를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하신 그 명령을 위하여 모아 놓고 공부시키는 것입니다. 남만 시키지 말고 먼저 형제들부터 솔선하여 나아가 전도하시오. 우리는 말로만 앉아서 남을 시키기를 좋아하되 먼저 나아가 전도하기를 힘쓰지 않습니다.
형제여, 전도할 때에 너무 사람의 인격을 찾지 마시오. 술장사라도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고 음부淫婦라도 예수의 제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을 생각하여 보면 베드로와 같은 사람은 불학무식不學無識한 천민賤民이며,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이는 천업賤業(천한 일)을 하던 음부가 아닙니까?
형제여, 오늘 조선 교회 목사들을 보시오. 다 주점酒店에서 불러 세우지 않았습니까? 형제들은 누구요? 다 그러한 사람들이 아니오니까? 그런고로 우리는 사람의 인격을 볼 것 없이 아무에게든지 나아가서 구원하여야 하겠습니다.
오늘 여러 형제를 이곳에 모아 가르치는 것은 자못 분별이 없이 일반을 위하여 희생으로 바치라는 것이 아니요, 대개 나는 죽음에 대하여는 일반이라고 생각합니다. 병들어 죽으나 총 맞아 죽으나 배고파 죽으나 죽음은 일반이니 우리가 죽음을 무서워할 까닭은 없소이다. 그런고로 주를 위하여 계명을 지키다가 죽으면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형제여, 열심으로 앞을 보고 위험한 곳이라도 무릅쓰고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4. 드리는 물건에 충성을 다하시오
남을 인도하는 자부터 충성하여야 따라오는 자도 충성할 것은 정한 이치외다. 형제들이여, 예배할 때에 충성을 다하여 예배드립니까? 우리가 먼저 예배를 충성되게 드려 무슨 예배든지 항상 규례를 좇아서 한 습관상으로 하지 말고, 온 맘과 정성을 다하여 드릴 것이외다. 전례나 관습성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니 교역자는 다시 주의할 것이외다.
둘째로 연보함에 충성을 다하여야 되겠소. 성경에 십일조를 바치라 하였는데 만일 아니 드리면 그는 도적이 아니오? 도적이 어찌 전도하여 신학을 공부하겠습니까? 먼저 형제들부터 충성을 다하여야 될 줄로 생각합니다.
형제들이여, 자고로 충성을 다한 인물을 보시오. 노아는 120년 후에 일어날 사실을 믿고 순종하며 충성을 다하여서 내종에(나중에) 세상이 다 멸망을 당하되 전 가족을 구원하였으며, 모세는 순종하고 충성을 다함으로 자기 민족 40만을 애굽에서 구원하고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까지 얻어먹었으며, 엘리야도 순종하고 충성을 다함으로 큰 흉년을 면하여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배를 불렸으며, 다니엘도 순종하고 충성을 다함으로 해몽解夢하는 능력을 얻어 귀하게 된 것이 아닙니까?
형제여, 충성되게 섬기기를 두려워 마시오. 하나님의 기뻐하는 사람은 불 가운데서도 구원하시며, 사자 입에서도 구원하십니다. 형제들은 제일 먼저 이 충성하는 것을 배워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사업을 성취하시기를 바랍니다.
17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18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21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22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7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서머나 교회에 보내는 말씀
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서머나 교회는 빌라델비아 교회와 함께 주님께 책망 받지 않은 교회입니다. 이렇게 칭찬만 받은 교회는 얼마나 멋있을까요? 우리 모두의 선망의 대상입니다.
2. 서머나교회: 죽도록 충성하라
서머나는 에베소 북쪽 약 48km 지점에 위치한, 인구 20~30만의 아름다운 항구 도시였다. ‘서머나’의 ‘머’(Myrrh)는 ‘유향’이란 뜻이다. 향료 수출로도 유명한 서머나는 호머의 출생지이며 학문, 특히 과학과 의술이 발달했고 소아시아 도시 중 정치, 경제, 문화, 지리적으로 우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교 문화와 황제 숭배 등 혼합화와 박해가 뒤따라 복음이 순수하게 전달되지 못했다.
서머나교회에 대해서는 본 서신 이외에 알려진 것이 없으며 유세비우스의 《폴리갑의 생애》에서 바울이 전도하였다고 전한다. 사도 요한의 제자이며 서머나교회의 초대 감독인 폴리갑(70~155년?)이 이곳에서 순교했다. ‘유향’이라는 뜻의 서머나는 현재 ‘이즈미르’이며 아직도 유향같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많은 선교사를 품고 있다. 서머나교회는 작은 힘으로 충성했다고 칭찬만 들었다.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10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계 2:9–10
주님께서 아시는 이 교회의 사정은 두 가지였습니다. ‘환난’, 그리고 ‘궁핍’이었습니다. 어려움 중에 있었고 가난했습니다. 이것이 이 교회의 형편의 전부였습니다. 또한 주님께 칭찬받은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교회를 과연 우리는 좋아할까요? 좋은 교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 교회는 왜 궁핍했을까요? 서머나라는 이 도시는 꽤나 부요한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교회만 가난했을까요? 이는 환난의 결과였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 배경에 바로 ‘충성’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서머나는 로마에 대한 충성심으로 유명했었습니다. 주후 23년에 황제 아구스도(아우구스투스)의 신전을 지었습니다. 신전을 건축했으니, 이미 황제는 신으로 섬긴다는 뜻입니다. 2년 뒤에는 다음 황제 디베료(티베리우스)를 위한 신전도 지어 바쳤습니다. 8개 도시가 신청을 했는데 이 도시만 허락을 받았습니다. 이 도시는 ‘로마에의 충성’이 최고의 가치였습니다. 가장 중요한 원리였습니다.
이 황제의 신전에서 백성들이 모여서 ‘황제는 주님이시다’를 복창하면서 절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오직 예수님만이 주님이십니다. 당연히 이 행사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온 서머나가 분노합니다. 감히 황제 숭배를 거부하다니! 황제 폐하를 거역하다니! 이런 매국노들 같으니!
국가가 지고의 가치가 되면 언제나 이런 현상은 올 수 있습니다. 국가의 정책을 반대하면 나라를 사랑할 줄 모르는 매국노 취급을 받습니다. 그러면 진리는 그 아래서 숨을 쉬기가 어려워집니다. 국가의 체제가 바뀌어도 이런 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이건, 소위 민주주의 국가이건 상관없이 국가지상주의(nationalism)가 강해지면 이런 매국노 사냥은 있기 마련입니다.
인간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와는 그 가치관이 다를 수 있습니다. 애국심이 곧 신앙인 듯이 생각하기 시작하면 세상 어디든지, 어떤 시대에나 존재할 수 있는 서머나 교회는 늘 숨쉬기조차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나라도 하나님의 나라와 일치할 수 없습니다. 계시록은 이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서머나의 유대인들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 이후 전 세계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좀 알려진 도시에는 어디에나 유대인들이 살았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사는 곳에는 어디나 회당이 있어, 안식일이면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묘하게도 이 회당 예배가 사도 바울의 선교 거점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서머나는 아시아(우리 나라가 속해 있는 지역 아시아와 구별해서 소아시아라고 부르는) 제일의 도시임을 자부하는 도시이니 당연히 유대인이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유대인들은 황제 숭배에 어떻게 대처했을까요? 이들에게도 황제 숭배는 제1계명 위배이므로 거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정치적인 수완을 발휘해서 이를 면제 받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 정치적 수완이란 언제나 위험했습니다. 어디까지는 내주고, 어느 정도까지 타협했는지는 짐작할 뿐입니다. 황제 숭배를 면제받는 대신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과 함께 이런 혜택을 받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게 문제였습니다. 권력자를 꼬드겨서 교회를 박해하게 했습니다. 쟤들은 우리랑 달라. 유대인이 아니야. 유대교라고 보지마. 이단이야. 회당에서도 쫓겨났어.
이들의 고발과 비방이 정당하지 못했음을 암시하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서머나 교회가 당하는 환난의 배후입니다. 주님은 이 유대인들을 사탄의 회당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모였습니다. 주님은 이들이 하나님께서 모으신 ‘하나님의 회’가 아닌 사탄이 불러 모은 ‘사탄의 회당, 사탄의 모임’이라 부르셨습니다. ‘사탄’은 ‘거짓 고발자’란 뜻입니다. 거짓말로 고발했다는 말입니다. 교인들이, 교회가 저지르지 않은 잘못까지 갖다 부쳐서 고발했습니다. 거짓 종교는 언제나 이렇습니다. 자기네들이 정한 목적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면 방법쯤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불법이든, 사기이든 개의치 않습니다. 거짓 교회의 모습입니다.
핍박의 실제적 요인
이처럼 교회가 받는 핍박의 외적인 두 요인은 정치권력과 종교, 정확히 말하자면 거짓된 종교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를 하나로 묶는 힘이 배후에 있습니다. 바로 사탄입니다. 마귀입니다.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의 회당을 빗대서 ‘사탄의 회당’이라고 규정하심으로써, 유대인들이 사실상 사탄의 하수인 노릇이나 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이 서머나 교회, 환난 당하고 있는, 그리고 또 다른 환난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는 이 교회를 향해서 말씀을 시작하시면서 “나는 처음과 나중이다. 죽었으나 지금은 죽음을 이기고 살아있다”고 선언하십니다.
환난이 극심해서 그 돌에 깔려 죽을 지경에 이른 이 교회를 향해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죽음을 정복했어. 그러니 내가 살아 있잖아.
서머나 교회를 향해 이 귀한 약속도 하셨습니다.
이겨내라. 이겨내면 둘째 사망의 해를 면하게 해주겠다.
그렇습니다. 누구나 죽게 되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승리한 사람에게는 둘째 사망, 영원한 사망은 없습니다. 첫째 사망은 돌이킬 수 있습니다. 부활이 있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사망, 둘째 사망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이 말씀과도 일맥 상통합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마태복음 10:28
5. 죽도록 충성하라
더 큰 환난이 몰려오고 있는 이 교회를 향해서 주님께서는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문장에는 한국 교회만 겪고 있는 오해가 있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여러분은 어떤 느낌을 받습니까? “뼈 빠지게 일해라”로 들리지 않습니까? 주일 밤이면 허리가 뻐근하고 피로에 정신을 못 차릴 정도가 되게 일하고 나면 스스로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하고 싶어지는, 그런 그림이 그려집니까? 정신 차리십시오.
‘충성하다’는 동사가 아닙니다. 형용사입니다. 쉽게 설명해 봅시다. ‘신실하다’의 ‘하다’와 ‘봉사하다’의 ‘하다’는 다릅니다. ‘충성하다’는 ‘신실하다’처럼 형용사입니다. 충성하라는 말은 변함없이 지금 그대로 있으라는 뜻입니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결국 충성하란 말씀은 믿음이 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이 뜻은 죽는 한이 있어도, ‘죽게 될 때까지도 믿음이 변하지 말라’입니다. 환난 당하고 있는 교회, 또 다른 환난의 파도가 밀려오는 이 교회를 향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죽게 되더라도, 믿음을 버리지는 말아라. 지금처럼 변하지 말아라.
생명의 면류관
그렇게 믿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생명의 관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여기서 ‘관(면류관)’은 마라톤에서 주는 ‘월계관’과 같은 겁니다. 그러니 생명의 면류관을 간단히 말하면 생명을 상으로 주겠다는 뜻입니다.
죽는 한이 있어도 믿음을 지키는 사람에게 생명을, 영생을 상으로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렇게 되면 ‘영생은 믿음으로 받는 거 아닙니까?’, 라고 항의하고 싶어 하는 분들이 꼭 있습니다. 답을 하자면 이렇습니다. 영생은 믿음으로 얻습니다. 그에 대해서야 누가 감히 토를 달겠습니까? 하지만, 쉽게 변하는 믿음은 영생 얻는 믿음이 맞는지를 의심해야 합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이 서머나 교회가 맞게 될 환난이 ‘시험’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참 믿음이 맞는지 환난을 통해서 시험을 치러보자고 하십니다. 참 믿음이 아니면, 영생을 상으로 받지 못합니다.
룻은 고통받는 나오미의 곁을 지켰다. 그저 단순한 함께 함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충성과 연대감을 보이고 있다. 룻기 기자에게 중요한 것은 룻의 개종만이 아니다. 룻의 개종은 밑그림으로 전제되어 있다. 룻기 기자가 강조하려는 것은 룻의 죽음에 이르는 충성이다.
도대체 모압 여인 룻이 어떻게 다윗의 증조모가 되면서 구속사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인가? 그것은 룻이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행동과 삶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서로에게 이 같은 충성의 삶, 인애의 모습을 보이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그의 백성을 위해 죽음에 이르는 충성을 보이셨기 때문이다.
비록 룻기를 다룬 것은 아니지만, 룻의 충성과 연대감 같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C. S. 루이스가 잘 보여준다.
시련이 구속의 필수 요소라면, 하나님 보시기에 세상이 이미 구속되었거나 더 이상 구속할 수 없는 상태가 되기 전까지는 시련이 멈추지 않을 것을 예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경제, 정치, 혹은 위생 체제가 개혁되기만 하면 지상에 천국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약속하는 그 어떤 사람의 말도 믿을 수 없습니다. 이 말이 사회운동가들을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같은 인간으로서 함께 불행을 겪고 있다는 강력한 연대감은, 우리가 도덕법을 깨뜨리면서까지 실현하고 싶어 하는 무모한 희망, 막상 실현하고 나면 먼지와 재밖에 남지 않는 그 어떤 희망 못지 않게 인간의 모든 불행을 최대한 제거하도록 박차를 가하는 훌륭한 역할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