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야김과 요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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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렘 22:10-19 (봉독 렘 22:13-19)
제목: 살룸과 여호야김
예레미야 22장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활동했던 시기에 남유다를 다스렸던 왕들을 책망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어제 살펴본 말씀에서는 왕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책망받는 왕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예레미야 22장 18절 상반절 말씀 보세요.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에게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여호야김은 요시야 왕의 둘째 아들이자, 남유다의 열 여덟 번째 왕이었습니다.
그가 어떤 왕이었는가 하면, 구약성경 역사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두 가지 말씀을 소개해 드릴텐데요. 먼저 열왕기하 24장 4절 말씀, “또 그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그의 피가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라” 그리고 역대하 36장 5절 말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야김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가증한 일들과 그에게 발견된 악행이 이스라엘과 유다 열왕기에 기록되니라”
역사서에 따르면 여호야김은 의심의 여지 없이 굉장히 악한 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야김이 무죄한 자의 피를 예루살렘에 가득 채울 만큼, 그는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상실한 왕이었으며, 그의 가증한 일들과 악행으로 인해 하나님께 심판받은 왕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예레미야 22장 13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은, 여호야김의 악행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하게 살펴보기 전에,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여호야김의 죄악이 표면상으로는 종교적인 문제, 다시 말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신실함의 문제가 아닌, 그의 통치 방식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여호야김의 어떤 점을 책망하시는지 함께 살펴보고 이를 통해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함께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예레미야 22장 1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부정하게 그 다락방을 지으며 자기의 이웃을 고용하고 그의 품삯을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여기서 집이라는 단어는 왕이 거주하는 궁궐을 가리키고요. 다락방이라는 단어는 우리말로 누각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이웃이라는 말은 동족 또는 유다 백성을 가리킨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에 따라 새번역 성경은 원어의 의미를 충실하게 반영해서 이렇게 번역합니다. “불의로 궁전을 짓고, 불법으로 누각을 쌓으며, 동족을 고용하고도, 품삯을 주지 않는 너에게 화가 미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여호야김이 하나님께 책망받는 첫 번째 문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의 첫 번째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의 죄악된 집착과 탐욕과 병든 야망으로 인해 눈이 멀어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국가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성품을 전 세계에 고스란히 드러내야만 하는 거룩한 의무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이러한 의무를 백성들 앞에서 솔선수범함으로써 거룩하게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야김은,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의무를 감당하기는커녕, 하나님의 뜻과 완전히 반대되는 행위를 일삼았습니다.
13절 말씀을 다시 보시면, 여호야김이 어떤 죄를 범했습니까? 의롭지 못한 마음으로 자신이 거주할 궁궐을 건축했습니다. 불법으로 누각을 쌓아 올렸습니다. 유다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 시켜서 과도한 노역을 감당하게 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백성들의 노동에 대한 대가를 치루지 않았습니다. 쉽게 말해 자신의 권력으로 백성들의 노동력을 착취한 것입니다. 본인이 왕이기 때문에, 백성들의 노동력쯤이야, 왕이 하라고 하면 하는 거지. 이런 식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여호야김의 악행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15절 말씀 상반절 말씀 보세요. “네가 백향목을 많이 사용하여 왕이 될 수 있겠느냐?” 이 말씀은 다소 의역된 부분이 있기 때문에, 히브리어의 뉘앙스를 살려서 읽을 필요가 있는데요. 한번 들어보십시오.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백향목을 더 많이 써서 집 짓는 것을 경쟁하는 것으로 더 좋은 왕이 될 수 있겠느냐?”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책망은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여호야김은 누군가와 경쟁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기에 급급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죠.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 여호야김의 마음의 중심은, 아주 아주 값비싼 백향목을 레바논으로부터 대량으로 수입해서 으리으리한 궁전을 지음으로써, 이전에 남유다를 통치했던 선왕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 왕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허영심과 탐욕이 초래하는 영적인 질병을 주의해야만 합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웅장한 건축물이 주는 위압감은 그 나라의 힘과 권세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대하고 웅장한 궁궐을 바라보면서 그 나라의 경제력이 얼마나 부유한지, 그런 궁궐을 지을 수 있는 건축 기술이 얼마나 뛰어난지, 이런 부분을 통해 그 나라의 국력을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평가 기준은 하나님의 다스리심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인간적인 기준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기준으로는 감히 평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모델로서의 이스라엘은 세상이 평가하는 기준이 어떻든 상관없이, 세간의 평가나 여론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드러내는 데에 최선을 다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여호야김은 이를 완전히 망각했습니다. 단순하게 잊어버려서 그런 것이 아니라, 탐욕과 욕망과 허영심에 눈이 멀어 본연의 의무를 완전히 망각해 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러한 여호야김의 죄악된 모습을 책망하시면서, 여호야김과 정반대되는 인생을 살아가며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린, 그의 아버지 요시야 왕의 선한 행위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요시야 왕의 선한 행위 첫 번째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2장 15절 말씀 중간 부분 보세요, “네 아버지가 먹거나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이 구절은 수사의문문입니다. “네 아버지가 먹거나 마시지 않았느냐?”라고 반문하시는 구절이죠. 하나님께서 요시야 왕이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 물어보시는 것이 아니라, 요시야 왕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왕으로써 누린 부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인지하고 계시며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부분을 충분히 인정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평서문으로 바꿔서 읽으면 “너의 아버지 요시야 왕은 적절하게 누릴 것을 누리며 살았다.”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하고 선한 목적만을 위해 인생을 살아야 하니까 왕이라고 하더라도 다 떨어진 신발 신고, 옷이 헐거워지고 누더기 같아질 때까지 기워입고, 음식도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만 먹고, 이런 식으로 무슨 금욕주의자처럼 살라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온전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건강을 유지해야 합니다. 또한 유다의 왕으로서 적절한 품위와 품격을 갖출 필요가 있으니, 무시당하지 않을 만큼의 단정한 의복을 차려입어야 하며, 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다양한 음식을 섭취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어느 정도 허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핵심은 남유다의 왕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느냐, 그 정도가 도대체 어디까지냐. 이런 문제가 아닙니다. 15절 하반절 말씀 보세요. “네 아버지가 먹거나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정의와 공의를 행할 때, 기계적으로 죽어라 그것만 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정의와 공의를 행하기 위해서 건강도 가꾸고, 휴식도 취하면서, 인생의 밸런스를 맞추면서 주님의 일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최선을 다해 주님의 일을 감당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형통이라는 것이 따라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네 아버지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때에 그가 형통하였었느니라.” 요시야가 형통하기 위해서 정의와 공의를 행한 것이 아니라, 형통하기 위해서 기도한 것이 아니라, 형통하기 위해서 교회에 헌신한 것이 아니라, 그저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다보니 형통이라는 결과가 뒤따라왔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는 형통의 원리에 인과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형통을 누린다는 성경적인 인과율을 영적인 눈으로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요시야 왕의 선한 행위 두 번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2장 16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요시야 왕의 선한 행위 두 번째 내용은 첫 번째 내용을 구체적으로 적용한 내용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정의와 공의를 올바르게 시행하려면, 인간관계에 휘둘려선 안 됩니다. 인간관계 때문에 마음이 약해져서 자신과 가까운 사람의 손을 들어줘선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정의와 공의를 올바르게 시행하려면, 일면식도 없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의 억울하고 애통한 심정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하며, 그들이 처한 억울한 상황을 하나님 대신에 해결해 주는 역할을 감당해야만 합니다. 왕이 이러한 역할을 감당할 때, 필연적으로 힘 있는 자들과 대립하게 됩니다. “너만 고결하냐. 너만 깨끗하냐. 그래 너 잘났다!” 이런 소리를 듣더라도 묵묵히 인내하며,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올바르게 시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이렇게 인간적인 관계를 뛰어넘어 약자들의 편에서 일을 처리하다 보면, 기득권층과 거리가 멀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있어서, 부딪치는 일이 많아지지 않겠습니까? 계속해서 부딪치다 보면, 관계도 불편해지고, 협업이 잘 안되다보면, 국정 운영이 엉망진창이 되지 않겠습니까? 네. 왕이라는 사람이 이런 고민을 계속해서 하다 보면, 결과적으로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의 바른 시행을 져버리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적으로 왕이 행동하려면, 뒷일을 생각하고 머리를 굴리기보다, 요시야와 같이 어느 때에든지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행위가 요구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 이렇게 여호야김의 아버지인 요시야 왕의 선한 행위 두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요시아는 이러한 행위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고 인정받게 됩니다. 우리말로 안다는 것은 너무나 광범위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그렇게 큰 칭찬처럼 들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다만, 예레미야서에서 “하나님을 모른다, 하나님을 대적한다, 목이 곧다, 교만하다.” 이런 식의 책망이 끊이지 않고 등장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요시야는 엄청난 칭찬을 받은 선한 왕이구나.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요시야의 둘째 아들인 여호야김은 아버지의 길을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서두에서 살펴보았듯이, 여호야김의 첫 번째 죄악은 집착과 탐욕으로 인해 영적인 안목이 사라졌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두 번째 죄악은, 무죄한 백성들의 피를 흘리도록 만드는 것과 백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한 것입니다. 1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그러나 네 두 눈과 마음은 탐욕과 무죄한 피를 흘림과 압박과 포악을 행하려 할 뿐이니라”
13절에서 “자기 이웃을 고용하고 그의 품삯을 주지 아니하는” 이 부분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했습니까? 자기 동포, 자기 백성을 고용해서 일을 강제로 시켜놓고, 노동의 대가를 치루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죠. 17절 말씀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반복해서 증거합니다. 여호야김의 두 눈과 마음이 어디를 향해 있다는 것입니까? 탐욕과 무죄한 피를 흘리는 것과, 백성들을 억압하는 것과 착취하는 것에 향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국가를 통치하고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불의와 불법을 일삼고, 탐욕스러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데 열심을 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호야김의 모습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너무나도 악한 모습이지만,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부자가 되는 지름길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고정 지출을 줄여야 총지출 금액이 절약되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이 당시에 가능하면, 일은 시키되 일당은 주지 않는. 이런 구조가 되어야 고용주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배를 두배 세배 빠르게 불릴 수 있겠죠. 이런 식으로 살아야 경제적으로 잘 살지 않겠습니까? 세상적인 관점과 세상적인 계산법으로는 여호야김의 방식이 부자가 되는 지름길처럼 보이겠습니다만, 성경적인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요시야는 그런 비열한 방법으로 남유다를 잘살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요시야가 행한 것은 공의와 정의를 행하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주님의 거룩한 인생을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그에 상응하는 열매를 허락해 주시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님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여호야김의 두 가지의 죄악과 요시야 왕의 두 가지 선행을 확인해 보았습니다. 요시야와 여호야김은 부자지간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상반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요시야는 하나님을 아는 자로 여김받고, 여호야김의 눈과 마음은 죄악을 향해 있었죠. 허영심과 집착과 온갖 병든 야망으로 물들어서 인생의 목표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신의 영광에 초점이 맞춰진 사람이 바로 여호야김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요시야는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불편함을 느끼게 되든지 말든지, 과정 가운데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드러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사람이 바로 요시야 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님들,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과연 나의 모습은 요시야의 모습인지, 아니면 여호야김의 모습인지, 말씀 앞에 자신을 세우고, 객관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말씀에 비춰봐야 할 것입니다.
요시야와 여호야김은 유다의 왕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엄격한 잣대를 들이미신 것이 아닙니다. 유다의 왕은 백성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요시야와 여호야김을 향한 평가 기준은 모든 주님의 자녀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회에서 얼마나 큰일을 하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지역사회에서, 공동체 내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드러내기 위해 얼마나 힘쓰고 있는지,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을 돕고, 어떤 일이 있어도 공동체 내에서 억울함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자신이 약자의 편에 얼마나 서고자 하는지, 진지하게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선행될 때, 하나님께서는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에 형통함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이 세상은 여호야김과 같은 사람을 원합니다. 과정과 방법이 어떻든지 간에 허영심과 탐욕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 가운데 요시야와 같은 삶을 살아냄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올려드려야 할 것입니다. 부디 오늘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축복만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먼저 주님의 자녀된 삶을 온전히 살아내는데 초점을 맞추고, 꼭 그렇게 살아내시는 모든 화평의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이 세상 가운데 살아가는 주님의 자녀들의 심령을 매일 매일 붙잡아 주시고, 믿음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말씀을 통해 붙들어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여호야김과 같이 탐욕과 허영심과 야망에 물드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는 모든 주님의 자녀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상숭배나 예배 의식에 있어서만 엄격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삶의 순간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와 은혜를 균형 있게 나타내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본론 1
: 여호야김이 “화있을진저”라는 저주의 말씀을 들은 이유는 무엇인가?
1. 백향목을 많이 사용하여 궁궐을 지으려고 하였음.
- 허영심. 집착과 병든 야망. 왕의 본질 망각
2. 노동력 착취
1) 당시 유다는 애굽에게 조공을 바치고 있었음. 조공은 백성들의 혈세로 충당하였음.
2) 과도한 세금으로 인해 고생하는 백성들을 뒤로한 채, 노동력까지 착취함.
본론 2
: 요시야는 어떤 왕이었는가? - 하나님을 아는 왕이었음.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0. 먹고 마셨음. 고행주의 x
1.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음.
2.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했음.
본론 3
여호야김의 결말 : 백향목으로 으리으리한 궁을 지었으나 결말은 최악.
1. 백성이 왕을 위해 애곡하지 않을 것.
2. 예루살렘 문 밖에 던져지고 나귀 같이 매장 당할 것.
-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
-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라는 말씀과 상통함.
결론
여호야김과 요시야에 대한 평가 기준은 믿음이 아님. 우상숭배 여부도 아님. 사회 정의를 실현하였는가? 탐욕으로 물들어 불의를 행하였는가? 하나님의 공의를 온전히 나타내고 있는가? 이 기준에 달려있음.
여호야김의 모습이 우리에게 있지는 않은가? 왕에게 맡겨진 사법적 의무. 공의로운 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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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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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커 (pp.272-)
여호야김은 여호아하스의 배다른 형제요. 왕위 계승자로서 주전 608-598년 사이에 유다를 다스린 왕. 그는 호화로운 왕궁을 지으며 동족들 중의 일부를 강제 노역 시킴. 그는 아버지 요시야의 모범을 따르는 데 실패함. 아름다운 왕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왕권의 본질이 아님(15a). 왕이 해야하는 일은 약하고 무력한 자들의 재판을 변호함으로써 사회 정의를 증진시키는 데 있음(16절). 요시야는 이를 올바르게 행함으로써 하나님께 복을 받았음(15b절). 그의 삶은 그가 참으로 하나님을 알았다는 사실을 보여줌. 여기서 알다는 용어는 머리로 인식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 누군가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임.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적인 승인이나 충성 선언만을 포함하지 않음.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의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함으로써 그것을 입증하는 행동을 뜻함. 요시야는 이를 가장 잘 보여준 왕이었음.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속해있음을 인식했으며, 왕으로서 자신의 역할이 사회 정의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데 있음을 알고 있었음. 그는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의 재판을 변호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음을 입증하였음.
여호야김은 자기 아버지와 대조적으로 자신의 동족을 압제했기 때문에(17절) 가혹한 벌을 받게 될 것(18-19절).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을 것이요, 그의 시체는 정당하게 묻히지 못할 것(렘 36:30). 그는 죽은 나귀처럼 성문 밖으로 끌려 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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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BC (pp.229)
21장은 시드기야를 꾸짖는 예언을 하였고, 22장은 그 뒤를 이은 유다 왕들에 대한 비난이 기록되어 있음. 22:1-10에서는 이름이 명시되지 않은 유다왕에게 전해짐. 이후 예레미야는 살룸에게 말함. 여호아하스라고 알려진 그는 609년에 몇 개월만 통치했음. 그 뒤 예레미야는 여호야김(609-597년)에게 시선을 돌리고, 이어서 마지막 왕인 여호야긴이 등장함. 22장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초기 예언 활동 시기에 통치했던 요시야 이후의 왕들에 대해 다룸.
22:10-12
죽은 왕이 아닌 사로잡혀 간 왕을 위해 울라고 백성들에게 말함. 죽은 왕은 요시야이고, 사로잡혀 간 왕은 그의 아들 살룸임. 대상 3:15을 제외하고 살룸은 다른 곳에서 여호아하스라고 불림. 왕은 하나 이상의 이름을 사용하였음.
여호아하스는 예레미야에 의해 시종일관 선한 왕으로 인정받는 요시야의 아들이자 직속 후계자였음. 15-17절에서 살룸의 악은 요시야(네 아버지)의 선한 성품 및 행동과 대조됨. 므깃도에서 요시야의 죽음은 유다에게 엄청난 차질을 빚었음. 살룸의 친바벨론적이고 반애굽적인 입장 때문에 네 번째 아들인 그가 왕위에 올랐을 것. (서론의 역사적 맥락 참조)
왕하 23:31-35와 대하 36:1-4에서 여호아하스의 등장과 급속한 몰락에 관한 이야기를 볼 수 있음. 여호아하스는 23세였음. 느고가 여호아하스를 폐위시킨 뒤 애굽으로 데려갔고, 그는 거기서 죽음. 열왕기에서 여호아하스는 그의 조상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는 전형적인 말을 들음. (왕하 23:32) 상세한 내용은 나오지 않지만, 여호아하스는 불법적인 종교 관행을 계속해서 허용한 것으로 추정됨.
22:13-23
주전 609년에 느고는 여호아하스가 자기 아버지처럼 친바벨론파였기 때문에, 그를 왕위에서 제거한 뒤 둘째 아들 여호야김을 왕위에 앉혔음. 느고의 결정, 여호야김과 예레미야 사이의 적대감(26장, 36장), 그리고 여호야김의 나중 행동을 고려할 때, 그는 친애굽파였을 것이라 추정됨. 예레미야는 친바벨론파라고 여겨졌을 것. 느부갓네살에게 항복하도록 유다를 설득하려는 시도가 예레미야의 임무에 포함되었기 때문. 반면 바벨론의 영향에서 벗어나려는 여호야김의 희망은 애굽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근거해 있었음.
얼마 지나지않아 느부갓네살은 이 지역에 자신의 영향력을 보여주었음. 단 1:1-3이 사실이라면, 그는 주전 605년부터 여호야김에게서 공물을 거두었음.
여호야김은 주전 597년까지 기다렸다가 행동을 취했음. 무엇이 그렇게 하도록 이끌었는지 알 수 없음(왕하 23:36-24:7). 그는 느부갓네살에게 반역했고, 이는 최소한 그가 매해 공물을 바치지 않았음을 시사함. 이 소식을 들은 바벨론 왕은 군대를 동원해서 예루살렘을 향해 장거리 행군을 시작함. 그런데 느부갓네살이 도착하기 전에 여호야긴이 왕이 되었음.
여호야김이 예루살렘에서 바벨론 군대에게 살해되었는지 또는 추방당했는지(대하 36:6)의 여부는 불분명함. 어쨌든 그의 마지막은 행복하지 못했음. 예레미야에 의하면, 여호야김의 비극적인 죽음은 열왕기나 역대기에 기록되지 않은 윤리적인 실책과 관련이 있음. 야호야김이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그렇게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그가 왕궁을 건설하면서 아무것도 주지 않고 자기 동족을 고용했다는 말에서, 왕상 11:28에 기록된 솔로몬처럼, 그가 유다 시민에게 불법적인 강제 노동을 강요했다고 진술함. 그는 선왕인 아버지 요시야 왕과 다르게 압제자였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를 맞이했다고 암시됨.
예레미야가 전하는 신탁은 사람들이 여호야김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을 것이라는 진술로 마무리됨. 보통 어떤 사람이 죽을 때, 그 곁에는 슬픔으로 인해 슬프다고 말하는 생존자가 있음. 친척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그의 주검 앞에서 슬픔을 표현할 것임. 하지만 예레미야는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기껏해야 무관심으로, 설상가상으로 기쁨으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상상함. 또한 그는 나귀의 장례처럼 멸시받는 장례를 치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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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KC
22:10-12
살룸은 여호아하스의 다른 이름. 그는 요시야의 아들임. 요시야가 바로느고 2세에게 죽임을 당한 후에(왕하 23:29-33) B.C.609년에 그 뒤를 이어 왕이 되었음. 통치한 지 3개월만에 바로 느고에게 폐위 당했음. 예레미야는 살룸이 포로가 되어 예루살렘에서 애굽으로 유배된 이후 609년에 본문을 기록했음(왕하 23:34). 예레미야는 살룸이 예루살렘으로 결코 돌아올 수 없을 것이며, 그는 포로가 되어 유배되어 있는 애굽에서 죽을 것이라 예언함.
여호야김에 대한 메시지(22:13-23)
22:13-14
바로 느고에 의해 왕으로 임명된 이후에 여호야김은 전형적인 동양 군주로서 행동했음. 유다는 국가를 이끌어갈 단단한 리더가 필요했음. 그러나 국가는 파멸되어 갔고 왕은 개인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었음. 여호야김은 자신을 위한 궁전을 짓기 위해서 백성들을 희생시켰음. 여호야김은 백향목을 구입하는데 많은 돈을 낭비하면서도 백성들에게는 무임으로 일을 하도록 강요했음.
22:15-17
예레미야는 여호야김을 그의 아버지 요시야 왕과 비교함. 요시야는 바르고 정의로운 일을 했고, 가난한 사람과 궁핍한 사람을 옹호해 주었음. 하나님의 목자로서 요시야는 양떼를 잘 양육했던 것. 그러나 여호야김은 그의 아버지의 선한 행실을 유산으로 물려받지 않고 오직 더러운 이윤, 피흘림, 억압과 강요에만 관심이 있었음.
22:18-19
여호야김의 폭정과 억압으로 인해 그가 죽었을 때 백성들은 그를 위해 슬퍼하지 않았음. 예레미야는 독재자 여호야김에게는 정상적으로 치러야 할 장례 대신 나귀처럼 묻힐 것이라 예언했음. 예루살렘에서는 동물이 죽었을 때 그 동물을 끌어내 성 밖으로 던지는 관습이 있었는데, 여호야김의 시신도 이와같이 치욕을 당할 것이라고 했음.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진격하던 B.C.598년에 여호야김은 죽임 당했음. 어떤 사람들이 추측한 것처럼, 여호야김은 느부갓네살을 설득하려다가 살해당했다고 함. 새 왕인 여호야긴은 항복을 당하고 바벨론에 유배되었으나 예루살렘은 파괴되지 않았음. (왕하 24: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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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22:13-19은 요시야와 그의 아들 여호야김을 대조시키며, 그에 대한 비난을 묘사하기 위해서 장례의 이미지를 사용함. 13절 서두에 등장하는 ‘호이’라는 단어는 사 10:5와 암 5:1-3과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한 슬픔과 탄식을 표현하는 감탄사로 사용되기 때문에, 심판 혹은 비난의 뉘앙스를 미리 반영함. 예레미야는 장송곡을 연상시키는 감탄사를 사용함으로써 여호야김에 대한 불길한 운명을 예고함. 그는 여호야김이 성문 밖으로 던져져 제대로 장사되지 못하고 수치 당할 것을 선언함.
13-19절은 여호야김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구체적으로 기술함.
1) 궁정을 세우며 건축을 주도했으나 고용한 자들에게 그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불의를 행했음(13절). 그는 노동자들의 노동을 착취하는 죄악을 범했음. 이 같은 죄악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탄압했던 바로의 폭정을 연상시킴. 따라서 여호야김의 건축사업은 한마디로 불의와 불공평으로 건축하는 것과 다름이 없음.
2) 그는 선왕이자 그의 아버지인 요시야와 달리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며 무죄한 자들의 피를 흘리는 죄악을 자행했음(16-17절). 여호야김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의 은총을 백성들에게 나타내야 했으나, 도리어 가난한 자와 무죄한 자를 억압하는 범죄를 행함으로써 언약 공동체의 지도자로서의 책임을 져버리고 말았음.
이러한 죄악의 결과는 수치스러운 죽음임. 비록 그는 전투에서 사망하겠지만, 그의 폭정에 고통받았던 자들은 그를 위해 아무도 슬퍼하지 않을 것이며, 장사되지 못한 죽은 나귀처럼 취급당할 것임(19절). 죽어서 장사되지 못하는 운명은 한 언약적 저주를 연상시킴. 신 28:26 네 시체가 공중의 모든 새와 땅의 짐승들의 밥이 될 것이나 그것들을 쫓아줄 자가 없을 것이며
적당한 장례 의식은 고대 이스라엘에게 매우 중요한 절차였음. 온당한 장례 절차를 밟지 못하는 것은 가장 심각한 저주에 속했음. 거대한 왕궁을 건축하려던 여호야김의 인생은 성 밖으로 버려지는 아이러니를 보여줌. 이처럼 장송곡의 곡조로 시작한 예레미야의 탄식은 여호야김의 불행한 죽음의 참상으로 끝맺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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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게 (pp.470-)
21:15-16
1. 백향목을 많이 사용하여 왕이 될 수 있겠느냐?
(네가 남보다 백향목을 더 많이 써서, 집 짓기를 경쟁하므로, 네가 더 좋은 왕이 될 수 있겠느냐?)
훌륭한 건물이 나라의 기초가 아니라 공의가 그 기초요. 이것을 그에게 그 아버지 요시야의 예증으로 증명함.
잠 14:34 공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
잠 16:12 악을 행하는 것은 왕들이 미워할 바니 이는 그 보좌가 공의로 말미암아 굳게 섬이니라
잠 29:14 왕이 가난한 자를 성실히 신원하면 그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21:15를 직역하면, 집 짓기를 경쟁한다고 읽을 수 있음. 여호야김이 누구와 경쟁했겠는가? 그는 백향목으로 궁전을 짓는 모든 왕들과 경쟁했음. 그러나 이는 어리석은 것. 건축물이 주는 위압감, 그 나라의 경제력과 영광을 상징하는 것. 아무 소용 없음.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나라와 기준이 다름. 하나님 나라를 대리 통치하는 자는 공의로움으로 자신의 왕위를 견고하게 만듦.
물론 왕이라고 해서 다 떨어진 신발을 신고, 옷을 기워입고, 음식도 대충 서민음식에 맞춰서 먹어야한다는 것은 아님. 선지자도 이 부분은 분명하게 인정함. 요시야 역시 먹고 마시는 인생을 살았음. 그러나 그는 인생의 향락을 위해서 그의 의무와 양심을 져버리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식으로 의롭게 통치했음. 이러한 점에서 그의 나라가 번영할 수 있었던 것.
착취에 대한 금지 구절
신 24:14 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은 너희 형제든지 네 땅 성문 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를 학대하지 말며
신 24:15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 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 이는 그가 가난하므로 그 품삯을 간절히 바람이라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지 않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임이라
왕의 역할
신 17:18-20
18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19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20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의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이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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틴데일 (로고스)
“화 있을진저”라는 말은 선지자의 고발이나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애곡을 도입할 수 있음. 왕은 심판을 받고, 정죄를 받을 것이며, 죽임을 당하고 애도될 것이다!
여호야김 왕은 아주 비싼 백향목으로 왕궁을 지었고 붉은 색으로 칠했음.
그러나 이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착취함으로 이루어진 일임. 이들은 자신의 나라 백성들이요.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로 다스려야만 하는 사람들임.
신 24:14-15에 따르면, 노동자들은 각각 일한 날 마지막에 공정한 보상을 받도록 되어있음. 여호야김은 바로에게 조공으로 금과 은을 바치기 위해서 유다에서 세금을 거두었음(왕하 23:35 여호야김이 은과 금을 바로에게 주니라 그가 바로 느고의 명령대로 그에게 그 돈을 주기 위하여 나라에 부과하되 백성들 각 사람의 힘대로 액수를 정하고 은금을 징수하였더라)
백성들이 무거운 재정적인 짐 아래에서 고생한 반면, 여호야김은 사치스럽게 살았음.
15-17
여호야김에게 있어서 왕권은, 할 수 있는 한 많은 백향목을 모으는 것에 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요구와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여호야김과, ‘선한’ 왕이요 공평하고 의로운 다윗 계열의 진정한 왕이었던 그의 아버지 요시야 사이의 완전한 대조이다.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의 소송을 변호하는 것은(16절) 하나님의 요구 사항들 가운데 하나(3절)이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그 땅에서 형통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16절)은 그의 뜻을 인정하고 순종하면서 그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이다(9:3 참조). 17절은 요시야와 그의 아들 사이의 커다란 대조를 강조한다.
〈18–19〉 슬프다(Alas, 4회)는 말을 반복하면서, 고소는 ‘애곡하지 않는’ 것으로 표현된다. 히브리어로 이것은 대재앙의 사상을 강조하면서 위협하는 것으로 들린다. 아무도 여호야김의 죽음을 애곡하지 않으며, 그의 시신을 장사지내는 것에 관심이 없다. 그는 나귀같이 매장 당하여 전혀 매장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다루었다(26:23). 그에게 심지어 더 나쁜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36:30을 보라). 장사되지 못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것이고, 종종 심판의 문맥 속에서 언급된다(렘 7:32–8:3; 9:22; 신 28:26; 왕하 9:36–37을 보라).
의미
부유한 통치자와 가난한 나라는 오늘날 친숙한 그림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레미야 시대에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 사이에서도 그랬다. 여호야김은 이스라엘의 왕들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대조되는 다윗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산다(신 17:14–20). 그는 수치스러운 종말로 고난을 받을 것이다. 왕의 장례가 아닌 당나귀와 같이 매장됨으로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