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819 양청] 35문

소요리문답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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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성화의 교리를 배울 예정이다. 성화는 우리의 일생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형상으로 빚어가시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것이 단순간에 이뤄지기보다는 우리의 평생에 걸쳐서 진행되는 것이다. 종종 선배 목사님들께 이런 말씀들을 듣는다. 오랜 기간 목회를 하시면서 “참 성도들이 안 변하는구나. 저 집사는 조금 더 성화가 빠르게 진행될 것처럼 보였는데 여전히 제자리였구나” 이런 말들이다. 자기 양떼를 돌아보면서 성화가 생각보다 더딤으로 낙심하는 목사님들이 적잖이 계셨었다.
굳이 다른 사람 보지 않고 나 자신만 보아도 그렇다. 내가 하나님을 섬기며 열심히 신앙생활 하려 하는데 이 못난 자아가 빨리 깨어지질 않는다. 주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진 채로 주님 가신 길을 따르라하시는데, 나는 여전히 나를 부인하는게 쉽지 않다. 나의 십자가를 짊어지는게 쉽지 않다. 주님 가신 그 길을 따라가는게 쉽지 않다.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불순한 모습들을 발견한다. 그럴 때 우리도 낙심할 수 있더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를 그분의 형상대로 빚어가시는데, 그 시간이 인간의 시각으로 보니까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마치 우리나라 교육과정을 보면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을 거쳐 대학에 진학하게 되면 전공 과목에 대해 집중적으로 배우게 된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의 성화에 대입해서 내가 교회에서 하는 성경공부를 진행하고, 교리를 배우고 LTC를 하면 우리의 성화가 막 이뤄지는가? 그럴 것 같지만서도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시간을 통해 일하신다. 내가 LTC를 잘 수료하면, 내가 독서모임을 잘 수료하면 내 성화가 왕창 진행될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그때부터 시작이라는 것이다.
지금 제가 드리는 말씀을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 우리의 모든 수고의 과정들, 노력들이 말짱 꽝이라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들 중요하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시간을 통해 일하신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인생이라는 시간, 그래서 그 시간 속에서 내가 배우고 훈련받은 것들을 가지고, 내 삶의 자리에서, 그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그 속에서 내가 배우고 익히고 훈련받은 것들을 통하여 그 모든 것들이 내 것이 되도록, 그 말씀에 맞게 나를 빚어가시는, 이 모든 것들을 시간을 통해 이루신다는 것이다.
때로는 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왜 그리도 성숙이 느린건지, 왜 그리도 하나님 닮아가기가 어려운 건지 모를 때가 있다.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잠시 하자면, 어느 순간에 회심을 경험하고 신앙생활을 본격적으로 하다가 극적으로 선교지에서 목사로서의 부르심을 경험했다. 그 뒤로 신학대학원 입학을 준비하고 입학한 뒤로 신학을 공부하며 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했다. 그렇게 전도사, 강도사를 거쳐 목사까지 되었는데, 어느 순간 내 자신을 뒤돌아보니 이게 지금 진행 되고 있긴 한가 싶을 정도로 내 안에 예수님을 닮아가는 모습들이 안보이더라는 것이다. 툭하면 옛 자아가 튀어나오고, 툭하면 불평과 불만이 터져나오는데, 과연 내 안에 성화가 진행되고 있긴 한가 싶었다. 그러다가 운전 하던 중에 어떤 찬양을 접하게 되었다. 그게 제가 단톡방에 올려드렸던 찬양이었는데, 그 가사가 너무 공감이 되는 것이다. 내가 목사로서 내 겉모습은 뭔가 경건해보이는 것 같지만 내 속사람은 언제나 늘 그대로인 것만 같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어찌나 그리 어렵고 오래 걸리는 것인지 모르겠다. 교리를 배우고 말씀을 배우는 이 과정이 정말 쉽지 않지만, 우리가 배우고 훈련받고 경험하는 이 모든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여러분 속에서 하나님의 일들을 하신다. 비록 우리의 눈에는 그것이 잘 발견되지 않으나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들 안에서 그 일을 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아무리 더뎌보이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은 그분의 사역을 쉬지 않고 이뤄가신다. 때로는 내가 그분의 기대만큼 반응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늘 사랑으로 나를 보살피시고, 내 안에 빠른 성화의 열매들이 맺히는 것 같지 않아도 하나님은 실망하지 않으시고 기다려주신다. 이런 측면에서 성화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과 절대적으로 관계가 있다. 나를 창세전에 택하신 하나님, 내 안에 효과적인 부르심으로 부르시고, 그리스도의 의를 내 안에 적용시켜 주시어,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그 하나님께서 이제는 나를 점점 거룩하게 인도하시리라는 믿음, 그분에 대한 신뢰이다.
35문. 성화란 무엇입니까?
답. 성화란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의 사역으로, 이것에 의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전인격에 걸쳐 새롭게 되고 죄에 있어서는 점점 더 죽게 되고 의에 있어서는 점점 더 살게 됩니다.
35문은 칭의나 양자됨처럼 성화 역시도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의 사역이라고 말한다. 교재 2번의 A를 보라. 칭의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성화는 내 의지와 노력으로. 여러분 이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맞는 것 같은가? 틀린 것 같은가? 사실 전반적으로 한국교회 가운데 이런 생각이 상당히 많다. 그러나 A번은 틀린 말이다. 헷갈리시면 안된다. 칭의는 죄인의 외부에서 하나님의 법정에서 일어나는 죄인을 의롭다고 하시는 선언이다. 그 사람의 내면을 바꾸지 못한다. 칭의는 그 사람의 신분을 바꾸는 것이다. 나는 동일한데, 나는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 선언하신 것이다. 내가 한게 없다.
그러나 성화는 죄인의 내면에서 발생하는 일이다. 죄인의 속사람이 새로워지고 변화를 받아 우리의 지정의가 변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사람의 참여가 요구된다. 사람의 참여가 요구됨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성화를 주도하는게 아니라 성령님이 주도하신다. 성령님께서 이 일을 주도적으로 이뤄가시고 나는 거기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성화는 단지 도덕적인 개선을 말하는게 아니다. 이것은 영적 변화이다. 살후2:13 말씀을 보면 성령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 말한다. 이 변화는 사람의 능력으로 가능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유로운 은혜를 베푸셔서 성화의 사역을 이뤄주셔야 하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성화를 오해하기를, 마치 도인이 도를 닦는 것에 비유를 한다. 그래서 산 속 깊은 곳에 들어가서 채소만 먹으며 도를 닦는다면 그 인품이 아무래도 보통사람들에 비하면 훌륭해지겠다. 그러나 사람이 제 아무리 도를 닦아도 인간 본성애 남아있는 욕구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스도인이 일생을 사는 동안에도 우리 안에 있는 탐욕, 우상숭배와 같은 욕구들과 평생을 싸우는 것이다. 그렇게 싸워갈 때 우리의 성화가 언제 완성이 되는가? 죽을 때. 우리가 죽을 때 그 욕구가 사라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생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욕구에 이끌림을 받는다.
교재 3번을 보라. 성화와 성장. 의롭다함을 받은 신자는 거룩함 가운데 자라가야 한다. 지속적으로 지각을 사용함으로서 연단을 받아 더욱 거룩한 자리까지 자라가야 한다. 이것이 정상적이다. 여러분 생각해보라. 씨를 심었는데 자라질 않는다? 그럼 이 씨는 죽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의롭다 함을 받았는데 성화되질 않는다? 이는 그 사람이 칭의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 하나님은 성화되지 않을 사람을 칭의하지 않으시니까. 이런 의미에서 칭의와 성화는 분리될 수 없다. 구별할 수는 있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
4번을 보라. 성화는 새롭게 됨이라 말한다. 구원은 단지 죽어서 천국가는 정도의 일차원적인 것이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형상인 지식과 의와 거룩을 지식과 감정과 의지의 면에서 회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죄로 인하여 깨어졌는데 이것이 다시 회복되는 것이 구원이다. 그래서 성화의 목표는 재산이 많아진다거나 신분이 상승한다거나 이런게 아니라 내적 인격의 변화이다. 칭의나 양자됨은 나의 외적인 변화였다면 성화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내 외적인 변화이다.
물론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승진을 위해 기도도 하고, 좋은 직장 취업을 위해 기도하고, 더 큰 집을 살 수 있도록 기도하고, 앞날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이런 실제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것은 좋은 태도이다. 그러나 내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구해야 할 아주 중대한 내적인 문제들이 있는데, 그럼에도 내 관심과 내 인생의 초점이 여전히 이와 같은 외적인 것들에만 있다면 그 사람의 신앙이 건강하다고 할 수 없겠다.
5번에 중생과 성화를 보자. 하나님께서 거듭남을 통해 우리에게 새 마음을 주신다. 이전에는 없던 마음이 하나님으로 인해 내 안에 창조된다. 이는 내가 하나님 뜻대로 살고 싶어하는 마음이다. 내가 그분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겠다는 마음이다. 중생이 먼저 일어나야 성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 마음이 우리 안에 없다면 성화 역시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이 마음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인생 전체에 넘어짐, 실패, 좌절, 그리고 순종과 성공 등을 통해서 성화되어 가는 것이다.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면서 우리는 조금씩 거룩함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성화를 생각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두 가지가 있다. 교재 6번인데, 죽는 것과 살아나는 것이다. 죄에 있어서는 점점 더 죽게 되고 의에 있어서는 점점 더 살게 된다. 성화는 이 두 가지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 죽임과 살림. 소극적 의미의 성화는 죄에 대해서 점점 죽는 것이다. 적극적 의미의 성화는 의에 대해서 점점 더 사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는 어떤 존재인가? 6번의 C번을 함께 읽어보자. “신자는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이고, 옛 사람이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으므로, 더이상 죄의 종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기 신분에 합당하게 죄가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아야 하며, 자신을 하나님께 의의 무기로 드려야 한다
7번을 보자. 칭의와 성화. 앞의 5번에서는 중생과 성화를 구별해서 생각해봤다면 지금은 칭의와 성화를 구별해서 생각해보자. 죄책이 제거됨으로써 죄에 대한 형벌을 내가 안 받아도 되는 것이 칭의라면, 죄가 우리의 전속성을 부패시킨 오염들을 제거하는 게 성화이다. 지금도 시골집을 가면 푸세식 변소를 볼 수 있는데, 아주 옛날에는 이런 재래식 변소에서 빠져 죽는 애들이 항상 해마다 신문에 났었다고 한다. 어느날 똥통에 빠진 아이를 발견해서 죽을뻔한 아이를 건져냈다. 그러면 이 아이는 죽을 뻔 했다가 살아났으니 바로 친구들 만나러 뛰어 나가겠는가? 아니다. 자신에게 묻은 오염들을 닦아 내야 한다. 냅두면 똥독이 오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나를 이제 의롭다 하셨으니까 다 끝난 것인가? 아니다. 우리의 오염을 닦아내야 한다. 우리의 평생에 걸쳐 오염들을 제거해야 한다. 이게 바로 성화이다. 교재 7번의 B를 보라. “죄책의 제거는 법정에서 단번에 선언됨으로써 이루어지지만 부패가 제거되는 것은 평생에 걸쳐서 일어난다” 이게 바로 성화이다. c는 앞에서 잠시 했었던 내용이다. “칭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단독 사역이지만 성화에는 신자가 참여한다” D를 보라. 칭의와 성화는 어떤 면에서 다른지 답을 함께 읽어보자. “성화는 칭의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지만 몇가지 차이가 있다. 칭의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시키는 것이고 성화는 그의 영이 은혜를 불어넣어 그 은혜를 행사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다. 전자는 죄가 용서되고 후자는 죄가 억제된다. 전자는 공평하게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벗어나게 하고 이생에서 완전하게 하여 그들이 다시 정죄에 빠지지 않는다. 후자는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지 않고 또 이생에서 결코 완전하지 않으며 다만 완성을 향해 자라간다"
대요리문답의 설명에 의하면 성화는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지 않다고 말한다.히5:12-14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여기 보면은 “어떤 사람들은 때가 오래되어서 정상적으로 어른이 되었는데 너희는 여전히 어린아이구나!” 라고 책망한다. 이는 성화의 시간과 과정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순서와 시간과 과정으로 나타나는게 아니라는 것이다.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정말 그런 일들이 수없이 일어난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 인생에 오직 나만을 위한 맞춤 시간표를 통해서 나를 거룩하게 만들어가신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지 않다고 설명한다.
또한 이 땅의 성화는 이생에서 결코 완전해질 수 없다 했다. 예를 들어서 이생에서 50년만 믿으면 완전해진다? 그런 게 아니다. 다만 완성을 향해서 자라갈 뿐이다. 이 땅에서 완전 성화는 없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신자의 완전 성화는 이루어질 수 없다. 죄책은 완전히 제거되었어도 칭의를 통해서 죄의 부패한 성향은 완전히 제거되지 않는다.
사64:6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의 의가 더러운 옷과 같다고 말씀한다. 이렇게 함께 모여있는 와중에서 우리는 은연중에 쟤와 나를 비교한다. “하나님! 쟤보단 제가 더 의롭지 않습니까?” 이처럼 인간사이에서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잘난 부분을 찾아내면 그게 우리의 의가 될 수 있겠다. 그런데 사람 사이에서는 그것이 의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보면 그 더러운 옷이라고 말씀한다. 그냥 더러운 옷이 아니라 사실은 아주 불결하고 부정한 걸레 같은 거를 얘기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말하는 의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 쓰래기 같은 것을 가지고 우리는 도토리 키재기를 하면서 얘기할 수 없다. 그리고 실제로 100년동안 도를 닦는다 할지라도 우리 안에 있는 탐욕이라고 하는 죄성의 잔재는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다. 이 부분을 우리가 깨닫고 성화는 죽음과 함께 완성되는 것이죠.
이제 성화의 적용이다. 제가 여러분에게 던지는 도전은 바로 이것이다. 여러분의 인생의 목표는 무엇인가? 성화가 여러분의 인생의 목표가 되게 하라. 과연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어른으로서, 경건한 선배로서, 경건한 임조장으로서, 경건한 언니,오빠,형으로서 그렇게 나이 들어가고 그렇게 사람들에게 “그래! 저 사람을 보면 정말 예수님을 저렇게 믿어야 하는거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가 성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 저와 여러분들을 의롭다하시고 자녀삼으신 그 하나님께서 지금 여러분의 성화를 목표로 일하고 계신데, 이 거룩한 목표가 지금 이 순간 여러분에게도 목표가 되는가? 아니면 여전히 세상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것들, 인생의 성공, 인생의 즐거움, 인생의 부귀만을 목표로 삼아 살고있는가? 이것은 여러분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다. 여러분이 인생의 목표로 성화를 두고 살아간다면 성령님과 여러분 자신은 지금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여러분의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성화의 관점이 교회 직분자 선출의 기준이 되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다른 것 볼 필요없이 우리 청년부의 임원과 조장을 선출할 때에도 우리는 성화의 관점으로 기준을 삼아 투표하는가를 생각해보라. 성경이 말하고 있는 그런 관점이 내가 교회의 직분자 선출할 때, 그리고 우리 청년부의 임원과 조장들을 선출할 때, 내가 그런 시각으로 일꾼들을 찾고 있는가 하는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더 넓은 관점에서, 나는 성화의 관점으로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가 하는 부분이다. 제가 아까 말씀 시작할 때 말씀드렸던 부분인데, 성화는 결국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라 했다. 나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양자로 삼으신 하나님께서 지금 당장 내가 좀 미숙하고 성화가 덜 진행되는 것 같아도 나를 성화시켜가실 것이고 마침내 내 구원을 완성하실 것을 신뢰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조직에는 2080의 법칙이 있단다. 어떤 조직이든 그 안의 활발히 움직이는 20%가 공동체를 끌고간다는 것이다. 예전에 어떤 영화에서 이런 대목이 있었다. “대중은 개돼지다" 그들은 아무런 생각없이 그저 시키는대로만 따라가니까 리더들이 알아서 잘 끌고 가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끌고가는 자리에 올라서고 보면 어떤가? 일반 대중들을 하대하는 마음이 생긴다. 멸시하는 마음이 생긴다. 세상에서는, 사람들의 사이에서는 그렇다.
교회를 생각해보라. 지금 여러분이 속해 있는 공동체와 각 조들을 생각해보라. 2080의 법칙이 이 안에서도 비슷하게 보일런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것을 기준으로 삼아서 우리 교회는 이끄는 사람들이 20%가 아니라 5%밖에 안되니 문제있는교회야, 혹은 우리교회는 이끄는 사람들이 30%나 있으니 진짜 좋은 교회야! 이렇게 판단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세상의 법칙이 적용되는 곳이 아니라 은혜의 법칙이 적용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여러분 주위를 둘러보면 사람마다 성화의 진행속도나 과정이 다 다른데, 지금 당장 조금 더디고 좀 따라오지 못하고 열심을 내지 못하고 그런 지체들이 왜 없겠나? 하지만 교회는 판단이나 정죄하는 곳이 아니라 은혜의 모임이다. 은혜의 모임. 성화가 더딘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내가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게 되고, 더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람을 기다려주는 것이다. 기다리고 사랑하는 것, 이게 하나님이 지금 우리한테 주신 몫이다. 나에게 주어진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때에 일 하실 것을 기대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것. 그러면서 같이 밥도 먹고, 운동도 하며, 커피도 한잔 마시고, 그렇게 우리가 함께 가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 속에서 그렇게 함께 빚어져가는 것이고, 함께 사랑하며 기도해주며 격려하며 세워져가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벌써 종착지에 다 왔네” 이게 이제 성화의 완성인 것이다.
막상 종착지가 가까웠음을 깨닫게 되면, 지난 날들을 되돌아보며 “아니 난 지금 별로 안 거룩해진 것 같은데, 별로 성화가 진전된 것 같지 않은데?” 싶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죽음과 함께 우리가 믿음을 지키고 살아온 그 삶을 하나님의 은혜로 덮으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합당하게 거룩히 여기시고 완전한 거룩으로 만드시는 것이다. 만일 그 은혜가 없이 우리가 직접 도를 닦아서 거룩해지는 거라면 우린 다 틀려먹었다. 누가 감히 완전한 거룩을 이룰 수 있겠나?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지체들을 더 사랑할 수 있는 우리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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