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하나님이 오신다 (마3장)
교회에서 세례의 유형에 대해 설명하는 역사적인 논쟁이 있지만, 세례의 의미는 물의 사용과 상징적 변형 또는 변화의 한 가지 유형 사이의 연관성을 분명히 가리킨다. 신약에서 사용된 용어는 단순한 침수 또는 담그기의 의미적 경계를 확장한다. 각 문맥은 다양한 음영으로 용어를 명확하게 채색한다. '침례'는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의 출애굽 경험을 의미할 수 있으며 십자가형의 상징으로도 나타난다(고전 10:2; 비교 눅 12:50). 이 단어는 대개 요한의 세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의 초기관행, 또는 위에서 언급한 은유적 사용과 관련 있다.
70인역에서, 동사βάπτω(밥토우) 대개 히브리어 טָבַל (타발), “담그다”에 대한 번역이고, 정결예식을 가리킨다 (Judith 12:7). 대안적으로, 동사βαπτίζω(밥티조)는 약간 더 미묘한 뉘앙스와 함께 네 차례 발생한다. 이사야 21:4에서 그것은 은유적으로 파괴에 사용되지만, 열왕기하 5:14에서는 중간태 (즉, 헬라어 동사체계의 한 측면)로 사용되어 나아만의 요단 강 침례를 묘사한다. “이 경우 나아만의 멸망에 대한 암시가 없기 때문에 중요하다. 나아만 이야기의βαπτίζω(밥티조)의 사용은 정화를 위한 의식적 목욕을 의미하는 이후의 용례에 결정적인 것일 수 있다” (Ysebaert, Greek Baptismal Terminology).
신약에서의 동사βαπτίζω(밥티조), “세례하다”는 식전의 정결의식 및 죄 사함 둘 다 지칭할 수 있다(눅 11:38). 마태복음 15:2과 누가복음 11:38의 유사성은βαπτίζω(밥티조)νίπτω(닙토우), “손 씻기”에 대한 일반 그리스어
복음서에서 확인 된 바와 같이 요한의 신분은 당혹스러웠고 종종 예수 또는 엘리야와 얽혀 있었다(비교 눅 9:7–9; 마 11:1–19; 16:13–14). 그 기사들은 각자 긴장 속에 있다. 예수는 마태복음에서 세례 요한을 엘리야로 언급하지만, 요한복음에서 세례 요한은 자신이 그 선지자임을 부인한다(마 17:11–13; 요 1:19–22).
요한은 자신이 육체적으로 선지자 엘리야라는 사실을 부인하지만, 사복음서 내러티브가 그들을 서로 연관 시킨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세례 요한에 대한 묘사는 분명히 그를 엘리야의 전통에 위치시켰다. 요한은 요단 강 근처 유대 광야에서 낙타 털옷과 가죽 띠를 한 은자로 나타난다. 그는 메뚜기와 역청을 먹었다(막 1:6; 비교 왕하 1:8). 요한과 예수처럼, 엘리야 또한 제자를 “부른다” (왕상 19:19–21). 엘리야의 승천 전에, 그와 함께 머물게 해달라는 엘리사의 간청에 대한 대답으로, 우리는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요단으로 보내시느니라”를 읽게 된다(왕하 2:6).
상징적인 새로운 (영적) 출애굽으로서 요한의 세례에 대한 상기 해석은 그의 활동을 더 큰 초기 유대교 배경에서 관찰할 때 추가적인 신빙성을 얻는다. 요세푸스는 드다란 이름의 자칭 선지자의 활동을 기술하며, 그는 외관상 출애굽을 모방한 방식으로 요단 강에서 운동을 주도했다 (Josephus, Antiquities 20.5.1). 또다른 유대인 선지자는 예루살렘 포획을 위한 운동을 이끌었고, 여리고 성 붕괴 모방을 시도했다(Josephus, Antiquities, 20.8.6; Jewish War 2.13.5). 1세기 팔레스타인의 다른 선지자들은 심판의 신탁을 통해 자신들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AD 70, 티투스에 의한 예루살렘 파괴 전야에, 한 선지자는 정기적으로, “동쪽에서 한 소리, 서쪽에서 한 소리, 네 바람에서 한 소리; 백성들을 대적하는 한 소리”라고 외쳤다(Jewish War 6.5.3). 따라서 요한의 사역이, 특히 예수와의 관계에 있어서 독특하고 조형적인 궤도를 취하지만, 1세기에 일반적으로 예언적 활동은 결코 이례적이지 않았다.
요한에 대한 첫 언급은 마태복음 3:1에서, 예수의 족보와 탄생 기사 후에 나타난다.
요한의 종말론이 마태복음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그의 세례는 사람들에게 회개하거나 아니면 “임박한 심판”을 맞을 것을 요구한다. 마태복음 3:14에서, 요한은 예수께서 자신에게 세례 받는 것을 막고자 했으나, 예수는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답하신다. 요한은 체포 되고, 마태복음 11:3에서 우리는 그가 예수의 메시아 신분에 대해 불확신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묻는다. 예수는,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답하신다(마 11:5).
예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요한에게 찾아가는 의도에 대해 질문한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마 11:7). 이 질문의 함의는 요한이 이스라엘 다른 어느 곳에서도 없는 그 무엇을 제공했다는 것에 대한 확증이다. 요한은 마태복음 14:10에서 참수 된다.
바리새파(Φαρισαῖος, 파리사이오스). 모세 율법에 따라 엄격한 경건생활을 수행한 유대 정당의 당원들이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초기 유대교 내부에서 나온 종파로서 약 BC 150년경 활동하기 시작했고, 약 AD 135년경 랍비 운동때 별개의 정당으로 분리됐다.
마태의 이야기는 바리새파에게 경멸을 표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마태복음에는 마가가 바리새파를 대하는 많은 이야기가 포함되며, 이를 더 확대해 말한다. 예를 들어, 마태는 세례자 요한의 사역에서, 요한이 세례를 받으러 온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사람들에게 한 말을 유일하게 기록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지노를 피하라 하더냐"(마 3:7). 마태복음서의 결론에 가까운 예수의 말에는 위의 언어가 반영돼 있다"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 마태복음에서는 일부 바리새파의 신앙과 실천이 예수의 참된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한 역할을 하도록 사용된 듯 하다.
예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경건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진정한 의로움이란 단지 외식하는 형태의 의와 반대되는 내적인 성질의 것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산상설교(마 5:1–7:29)에서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진정한 제자가 되려면 바리새파 사람보다 더 의로움을 증명해내야 한다고 경고하면서(마 5:20), 외식하는 의로움은 진정한 내적 의로움이 상실된 것이라고 제시한다. 바리새파는 예수가 형성한 긴장에 반대하며 분개한다(마 15:1–20, 특히 15:12).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바리새파가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말한다(마 23:2–3).
이어지는 담론에서, 바리새파 사람들의 관행을 비판하는 예수의 말들이 이어진다. 다음과 같다.
• 바리새파는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한다. 예를 ㄹ들어 경문 띠를 넓게 하거나 옷술을 길게 한다(마 23:5)
• 회당의 높은 자리를 요구한다(마 23:6)
• 구별된 호칭을 요구한다(마 23:7)
마태복음 23:8–12에서 예수는 다른 경건의 모형을 제시하며 이런 관행들을 모두 뿌리뽑는다. 예수는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일련의 "분노"의 진술을 늘어놓는다.
• 예수는 사람을 모집하려는 그들의 관행을(마 23:15), 맹세하는 짓을 (마 23:16), 십일조 행위를(마 23:23) 규탄한다.
• 예수는 그들이 율법의 더 중요한 면은 무시하면서 사소한 것들을 강조하는 모습을 비판한다(마 23:23–24)
• 예수는 그들이 내면에는 헛된 것들로 사로잡혀 있으면서 겉으로는 거룩한 채 한다고 고발한다(마 23:25–28).
사두개인(Σαδδουκαῖος, 사두카이오스)이다. 헬레니즘 시대(하스몬)와 로마 시대, 주요 세가지 유대 사상 학파 중 하나이다. 사두개인의 저술이 더는 존재하지 않으며, 사두개 운동 외부의 빈약한 텍스트에 의존해 재구성한 것이 전부다. 이전 세대들의 구전 전통 외에는 사두개인이 성경에 대한 최고 권위를 가졌다. 사두개인들은 부활과 숙명의 존재를 부인했다.
사두개인(-人, Sadducees) B.C. 2세기경 하스모니안 왕조 때 사독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다수 제사장들에 의해 형성된 유대교의 당파 중 하나. 종교와 정치의 구심점이라 할 수 있는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귀족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일종의 정치 집단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철저히 현실주의자들이었다. 동시에 종교적으로 보수적이고 로마 정부에 대해 비판적이며 대중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던 바리새파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사두개인은 성문화된 율법(모세 오경)만을 받아들이고 구전(장로의 전승)은 거부하였으며, 부활이나 천사나 영생, 영혼 등을 믿지 않았다(막 12:18; 눅 20:27; 행 23:8).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과 ‘더 위대하신 이’의 오심에 대한 선포
요한의 사역은 예수님의 사역보다 더 상세하게 요세푸스의 문헌(Ant. xviii 116–119)에 기록되어져 있다.
러나 마태에게 있어서 요한의 중요성은 단지 예수님에 대한 그의 관계에 놓여있고, 요한에 대한 마태의 설명은 연관성을 강조하고 있다(참조, 2절). 마태복음에서 요한이 언급되는 곳은 어디든지 그것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조명을 위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여기서 요한의 설교는 예수님의 사역을 위한 길을 예비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을 위한 배경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대의 전기 작가는 자신의 주인공의 삶의 상당한 분량을 그런 식으로 침묵하며 건너뛰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마태는 서둘러서 의도적으로 자신이 진정으로 말하려는 주제인 메시아의 생애, 죽음, 부활로 거침없이 나아간다.
그의 종말론적 설교(참조, 8절과 11절)와 세례뿐만 아니라(참조, 6절) 그의 금욕적인 삶은 어떤 학자들에게 그가 쿰란 공동체의 회원으로서 성장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였다(참조, 눅 1:80).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이것은 추측 이상의 것을 의미할 수 없다), 세례 요한은 그가 선지자적인 사역을 감당할 즈음에는 쿰란으로부터 분리되어졌음을 의미한다.
그의 종말론적 설교(참조, 8절과 11절)와 세례뿐만 아니라(참조, 6절) 그의 금욕적인 삶은 어떤 학자들에게 그가 쿰란 공동체의 회원으로서 성장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였다(참조, 눅 1:80).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이것은 추측 이상의 것을 의미할 수 없다), 세례 요한은 그가 선지자적인 사역을 감당할 즈음에는 쿰란으로부터 분리되어졌음을 의미한다.
마태는 (홀로) 세례 요한의 설교를 예수님의 설교와 같은 단어들로 요약하고 있다(4:17; 참조, 10:7; 예수님의 제자들의 설교). 또 다른 유사성에 관해서는 3:7, 8, 9, 10, 12 등을 보라. 그러므로 마태에게 있어서 요한은 예수님의 경쟁상대가 아니라 같은 메시지를 전하는 설교자이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 선지자들이 빈번히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들의 반역을 버리고 언약적 순종으로 회개함으로써 하나님께 ‘돌아가라’로 외쳤던 것을 생각나게 한다.
이사야가 사용한 표현인 ‘하나님의 대로’라는 표현대신 마태에서 사용된 ‘주의 길’이라는 표현은 독자들로 하여금 ‘주’를 예수님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바로 이 예가 마태복음에서(그리고 신약성경 전체에서) 구약성경의 하나님의 오심에 대한 본문들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된 것으로 이해되는 본문이다
세례 요한의 금욕적인 의복은 엘리야를 모델로 하고 있는데(왕하 1:8) 세례 요한은 엘리야의 갑작스러운 등장, 독신생활, 타협하지 않는 메시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왕’과 그의 아내와 충돌한 것까지 엘리야의 모습을 닮아 있다.